왕가(王家) 막내 아악사(雅樂師) 화정(和靜) 김태섭(金泰燮)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 졸업생 일람
제5기 졸업생
석차 : 7
성명 : 김태섭(金泰燮)
생년월일 : 1892. 12. 21
전공 : 피리
비고 : 아악수·아악사·국악사·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 교무주임·중요무형문화재 제1호(종묘제례악)·제39호(처용무) 기능보유
(<국악입문(國樂入門)>부록, 김기주(金琪洙), 한국고전음악출판사, 1972)
김태섭은 11936년 3월 서울 정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4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제5기생으로 입소하였다. 정원은 종전과 다름없이 18명이었다. 제3학년에서 전공(악기)에 별르는데 그는 피리과에 배정되었다.
전공악기는 거문고·가야금·피리·대금·해금 등 다섯 과목으로 나누는게 정석이었으나 제5기에 이르러서는 비파와 양금 두 악기를 더한 것이 조금 달랐다.
비파 전공은 일찍이 제3기 아악생 때 시도하였다가 보기좋게 실패한 것이었는데 그에 더해 양금까지 추가한 것이 뒷날 생각하면 역시 무모하였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이제 총원 18명 제5기 아악생의 전공악기 배정을 보면 거문고 3명, 가야금 3명, 비파 2명, 양금 2명, 피리 3명, 대금 3명, 해금 2명이었다.
김태섭은 이장성(李長成), 이성수(李聖洙)와 함께 피리잽이에 배정이었는데, 이것은 김태섭이 누구보다도 음악적 재능에 출중하다는 것을 실증하는 것이었다.
수학 5년간 아쉽게 우등권에는 못 들었어도 줄곧 5석·6석 상위권이었고 피리는 아악 연주에 있어 주선율을 담당하여 총명영오하고 재기발랄의 준재로 선택되었는바 제1기의 김득길(金得吉), 제2기의 박성재(朴聖在)가 더불어 피리 전공인 것이 잘 말해주고 있다.
제3기에서는 거문고(성경린)에 수석을 빼앗기었으나 2석·3석·4석을 내리 피리가 차지한 것이다.
제5기에 있어서도 그 전통은 역력하여 피리의 이장성(李長成) 수석이었던 것이 잘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김태섭이 7석, 이성수가 8석으로 피리잽이가 단연 우수함을 알 것이다.
제5기 출신은 앞의 제4기까지의 선진들과는 달리 졸업후 당국의 처우가 매우 좋았던 것을 들어야 한다. 종전은 졸업 성적의 우열로 임용 및 급여의 차등이 있었는데 이것이 무너진 것이었다
직계도 아악수(雅樂手)·아악수보(雅樂手補)로 나뉘고, 봉급도 아악수에는 월 30원, 아악수보에는 27원·25원 차등을 두었는데 일률로 아악수(雅樂手·雇)에 임명되고 급여도 월 30원으로 동일했던 것이다.
그런 분수로는 얼마 안 있어 닥친 8·15 조국 광복으로 거의 아악부를 떠나서 제5기 아악생 양성은 더 없는 흉작이었다고밖에 말하지 못한다. 총원 18명 중 뒷날까지 아악부에 남아 이 바닥에 봉사한 사람은 우리의 김태섭, 그리고 앞서 소개한 청운(淸韻) 홍원기 두 사람이니 알만하지 않은가.
1945년 8·15 광복 후 이왕직아악부는 조국 광복의 기쁨이요 감격의 겨를도 없이 장차 무엇으로 어떻게 자생의 길을 개척하여야 하는가에 고심이었다.
이왕직아악부는 구왕궁 아악부로 간판을 고쳐 달았으나 대부분의 아악사가 앞으로의 생계가 막연하여 떠나니 도리가 없었다.
1947년 7월 서울중앙방송국이 전속 조선음악회를 설치하여 아악부의 곤경을 구제하고 아악부의 붕괴를 구제할 수 있었다. 이것은 과도기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하게 평가하여야 할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 : 성경린
정악 : 김보남·김영윤·봉해룡·서상운·김만흥·김준현·김성진·이덕환·김태섭
민속악 : 김광채·김광식·지영희·이충선·성금연
김태섭은 회원 중의 가장 말제요 후진이었지만, 그는 선진 김준현과 더불어 피리를 불었고, 봉해룡 선생과는 생소병주(笙簫竝奏)로, 봉해룡 단소에 주법이 까다로운 생황을 불었고 김보남 선생과는 엇바꿔 장구를 담당하는 1인 3역의 재주꾼이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후에는 육군 군예대 제3소조 국악조의 일원으로 북한 평양지구를 왕환하여 가위 사선을 넘은 혈맹인 것도 기억에 새롭다.
일찍이 아악부의 양악 채보 촉탁으로 근무한 일도 있는 이종태(李鍾泰) 대령에게서 이미 북상하여 괴뢰군을 추적 중에 있는 국군 장명을 위문하기 위한 육군 군예대(軍藝隊)를 조직, 파송할 계획을 세우고 아악부의 협조를 의뢰하여 온 것이다.
국군 군예대는 제1소대 양악대, 제2소대 연예대, 제3소대 국악대, 모두 3개조로 편성되었는데 제3소대는 네댓의 여류를 제외하고는 거의 아악부 소속이었다.
여기 육군 군예대 제3소대 국악조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대장 : 성경린
대원 : 김보남·김천흥·봉해룡·김성진·김기수·이덕환·김태섭·김만흥·강장원·김광채·심상건·이창배·고비연·이부용·김옥심·송백련·이청향·박금화 등이다.
김태섭은 김준현이 없어 피리를 독당하였고, 봉해룡과의 생소병주 기타 제반 아악 합주의 주역이었던 것이다.
10월 28일 서울을 출발하여 평양 및 사리원지구의 일선 위문과 문화공작의 업무를 마치고 서울에 다시 돌아온 것은 11월 3일이었다.
1951년 4월 10일 남도 부산에서 국립국악원이 개원되었다. 초대 원장 이주환(李珠煥)의 위임된 권한에 의하여 예술사(국악사) 13명이 발령되니 다음과 같다.
이병성(李炳星)·김만흥(金萬興)·박영복(朴永福)·김보남(金寶男)·김영윤(金永胤)·김기수(金琪洙) ·김성진(金星振)·이덕환(李德煥)·김준현(金俊鉉)·홍원기(洪元基)·김태섭(金泰燮)·이창배(李昌培) ·김상기(金相騏)
원장 이주환의 정부 인사에 앞서 1950년 12월 25일자 국립국악원 간부직 인사가 발표되었는데 악사장 성경린, 서무과장 장용이, 장악과장 봉해룡 3인이 발령되어 전시하 국립국악원의 체제는 그런대로 갖춘 것이었다.
위에서 보았듯이 아악부원양성소 제5기 출신으로 그중 젊고 후진인 홍원기·김태섭 두 사람이 있었는데 홍원기는 일신상의 사정으로 일찌감치 국악원을 이직하고 김태섭이 홀로 말째에 자리하여 가일층 상사와 선진의 애고와 촉망을 받았던 것이다.
화정 김태섭은 1955년 4월 16일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 개소와 동시에 이쪽 기악과(피리) 강사 겸직 발령으로 원직 국립국악원 연주직(국악사)과 더불어 1인 2역을 담당하게 된다.
그에 대면 선배인 김준현(피리)은 이듬해인 1956년 4월 3일자로 국악사양성소 강사로 배속되는 바 김천흥(해금)·김성진(대금)이 그와 함께 하였다.
김태섭은 전체 학생의 보통악과 피리 과목을 전담하였고 1961년 김준현 타계 후에는 보통악과 및 전공악과 피리 과목의 전임강사로 1977년 2월 정년퇴직까지 장장 18년을 헌신한 것이었다.
김태섭은 1964년 12월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종묘제례악) 기능보유자에 지정되고, 1971년 1월 중요무형문화재 제 39호(처용무) 기능보유자에 지정되어 가위 아악(雅樂)과 정재(呈才) 겸전의 명인 명무임을 자랑하였다.
김태섭은 약년에 이왕직 아악부의 아악수로 입신하여, 국립국악원 국악사·연주원, 국악사양성소 겸무 근무, 전속 국악연주단(정악계열의 피리) 연주·사범·원로사범으로 한 평생 일관하여 참으로 고고하고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여기 화정 김태섭의 화려하고도 잦은 해외공연의 실적으로도 그의 음악적 재능이요 공적의 높이를 가히 짐작할 것이다.
1964.1.16 ~ 4.30 국악소개 삼천리가무단 미국각지순회공연 / 3.17 ~ 3.21 일본 순회공연
1966.9.26 ~ 10.7 일본 순회공연
1967.9.20 ~ 10.2 자유중국(대만) 순회공연
1970.8.20 ~ 9.20 주월남한국군 위문공연
1972.9.27 ~ 11.27 아악연주단 도미공연(미국·캐나다)
1973.8.29 ~ 12.16 아악연주단 유럽공연
1975.9.15 ~ 10.10 재일동포 위문공연(광복 30돌 기념)
1977.8.29 ~ 11.15 유럽순회공연
1977.10.14 ~ 10.17 제2회 홍콩 아시아예술제
1982.7.12 ~ 7.28 영국 더름 동양음악제
1983.5.28 ~ 6.5 대한민국 전통예술단 일본공연
1985.5.29 ~ 6.26 '85 백림 호리죤 페스티벌 음악제
화정의 첫 해외 나들이인 미국 아시나협회 초청 삼천리가무단의 미국 공연에는 국립국악원의 김천흥·봉해룡·김성진 등 선진 말고도, 민속악계의 김소희·신쾌동·한영숙 명인들로 구성되어 미국 주요도시를 무려 4개월에 걸쳐 순회공연하고 돌아왔다.
김태섭이 화정(和靜)이란 아호를 쓴 것은 중년도 훨씬 이후의 일인 듯 나는 여기고 있다. 그리고 자호(自號)는 아닌 것 같고, 누구인지는 모르되 참으로 김태섭의 사람됨을 잘도 관찰한 훌륭한 아호라고 이날 칭상해 마지 않고 있다.
섣부른 풀이가 부질없지만 화(和)는 화해·화기·화음 등에 통하여 순활하고 알맞고 따뜻한 기운을 뜻하고, 정(靜)은 고요하고 조용하고 맑은 마음을 뜻하여 그대로 김태섭의 참모습 그것이라고 믿고 있다.
화정 김태섭은 국립국악원의 연주직, 국악사양성소(국악고등학교) 교무 등 총총한 일과에도 여러 대학교 국악과의 간절한 바람을 물리치지 못하고 시간을 쪼개 출강하니 참으로 바쁘고 보람된 나날이었다.
1961.4 ~ 1975.12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강사
1965.3 ~ 1972.12 경희대학교 체육대학 무용과 강사
1975.3 ~ 1975.12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강사
1982.3 ~ 1989.12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강사
1982.3 ~ 1989.12 추계예술대학 강사
화정 김태섭은 1941년 4월 1일 이왕직 아악부 아악수로 임명되어(이왕직장관) 1948년 8월 구왕궁 아악부 아악사(구황궁), 1951년 4월 10일 국립국악원 예술사(국립국악원장), 1955년 11월 2일 국립국악원 국악사(문교부장관)로 입신하여 1993년 3월 24일 타계하기까지 한 평생을 일의전심 국악을 위하여 헌신 봉사한 것이었다.
그런 화정의 이 바닥에 기여한 공적의 보답인 자랑스런 포상·서훈의 기록을 본다.
1963.8.15 광복절 18주년 기념 공로표창(국립국악원장)
1963.12.17 혁명과업 유공 공무원 표창(공보부장관)
1971.4.10 모범 공무원 표창 국립국악원 개원 20주년 기념(문화공보부장관)
1971.12.31 모범 공무원 표창(문화공보부장관)
1977.12.21 녹조 근정포장(대통령)
“김태섭 선생님을 떠올리면 기억나는 몇가지는 선생님의 피리 구음과 꼬장꼬장한 면면, 얼마간은 지루했던 전공 시간이다.
지금도 확연히 기억나는 것은 중학 3년 과정의 여민락 수업 시간이었는데, 선생님은 필요로 한 말씀만 몇마디 하시고는 시작하면 종이 칠 때까지 장단을 또박또박 짚으시면서 간혹 틀리는 구석이나 챙겨야 할 곳을 일러 주셨다. 또 장구도 그렇게 맥박이 정확할 수가 없었는데 내가 장구 연주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국악고등학교 교사 박문규의 화정 김태섭 선생에 대한 회고담이다.
화정 김태섭의 자랑스런 해외 공연 기록은 삼천리가무단의 일원으로 1964년 1월부터 4월까지 장기 순회공연으로 비롯되었다.
미국 굴지의 문화단체인 아시아학회 초청의 이 공연은 한국 고유의 전통음악과 무용으로, 정악·민속악 계통 그리고 무용 부문에서도 궁중정재·민속무용이 고루 안배되어 참으로 존귀와 통속을 아울러 다채다양을 자랑한 것이었다.
정악에서는 김천흥·봉해룡·김성진·김태섭 등이요 민속악에서는 김소희·신쾌동·한영숙·박소군·전사종·전사섭 그리고 통역과 안내역으로 미국인 알랜 해의만 등 총원 14명이었다.
이때 김태섭은 관현합주에서의 피리, 생황과 단소 병주의 생황, 궁중정재 처용무에서의 무원 등 실로 1인 5·6인 역의 예능을 자랑하였다.
공연때마다 갈채…. 활기 있고 화려한 무대
<워싱턴 포스트>
삼천리가무단처럼 정취와 뉘앙스와 색채가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없었다.
<시애틀 타임즈>
1972년 9월 미주 성항(星港) 동양예술협회 초청 국립국악원 아악연주단원 공연시 김태섭의 공로가 실로 컸다. 미국·캐나다 지역의 유명한 대학 연주실에서 음악가를 비롯한 대학교수 학생 저명 인사들을 대상으로 우리나라의 궁중음악과 무용 그리고 민속악과 춤을 곁들여 발표함으로써 풍부한 표현력과 신비로운 영혼의 음악으로 이국인의 심금을 고동치게 하였다.
김태섭의 해외공연 기록은 실로 열손가락을 넘기고 있어 놀라울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악기와 춤에 고루 통효(通曉)하고 있어 자랑스럽다.
“화정 김태섭 선생께서는 피리 연주가 전공이었으나 행정력도 겸비하여 장악행정의 기안자이자 실무 책임자였다. 선생께서는 기본 일과 외에 국악사양성소 학생 교육을 제일 비중 있게 여기셨고 일과 후에 일반 무료 국악강습에서의 전수를 보람으로 여기신 듯 했다.
화정 선생께서는 한 평생을 근검 절약과 양보의 정신 곧 겸양지덕으로 사셨으므로 선후배 모두에게 높임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화정 선생께서는 이순(耳順)에 접어들면서 고혈압으로 위중하였으나 굳은 의지와 약석의 보람으로 잘 극복하신 정신력도 놀랍게 여기고 있다. 한 평생을 일관되게 국악(아악)에 헌신 봉공하신 화정 김태섭 선생님 가신지도 어언 5년이 지나 추모의 정 망극하기만 하다.” <전 국립국악원 국악자료실 김경수씨 회고담>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는 국악사를 양성할 목적으로 1955년 4월, 남자 아동 30명을 공모하여 중등부 3년과 고등부 3년 전부 6개년의 학제였다. 초대 소장은 국립국악원장 이주환이 겸하고 부소장은 악사장 성경린, 그리고 악적(樂的) 교무에 관한 사무는 장악과장 김기수가 겸하였다.
그러나 국악사양성소 초기로부터 국악고등학교로 승격 독립된 20여년 음악교육에 있어 실질적인 주무는 화정 김태섭의 몫이었던 것을 누구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뒷날 국악사양성소 교사·강사 직무 일람에서도 요연히 밝히고 있다. 1번은 소장 이주환으로 공민 성악(가곡) 담당이요, 2번 부소장 성경린 국악이론, 3번 강사(학예관) 이병성 성악과(가곡), 7번 악사(국악사) 김영윤 가야금, 8번 악사(김태섭) 기악과(피리)….
그 아래로 외부 강사들의 면면이요, 18번에 악사(국악사) 김성진 기악과(대금), 19번 악사(국악사) 김천흥 기악과(해금), 21번 악사(국악사) 봉해룡 기악과(대금)로 나와 있다.
김태섭이 국악사양성소 개소 때부터 줄곧 악적 교무의 실질적 주임으로 기악과(피리) 강사로 보통악과 피리 과목, 전공악과 피리 과목을 전담하였던 것이다.
이제 국악사양성소 초기 때부터 김태섭에게 사사한 피리 전공 제자들의 면면을 보아도 그의 이 바닥에서 공로가 지대하였음을 실감하였을 것이다.
국악사양성소 제1기 이예근(재미국악원), 제2기 정재국(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 이희명(KBS국악관현악단), 제3기 이동형(UCLA대학 교수), 제4기 서한범(단국대학교 교수) 이의경(전 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 지휘자), 제5기 김길운(부산대학교 교수), 김성배(국악고등학교 교감), 곽태천(영남대학교 교수), 제6기 박종설(국립국악원), 황규남(국립국악원), 사재성(충남국악관현악단 지휘자), 제7기 김찬섭(추계예술대학 강사), 박인기(한양대학교 교수), 제9기 박문규(국악고등학교 교사), 이영우(국립국악원), 신대철(강릉대학교 교수), 제10기 김관희(국립국악원), 배양현(부산대학교 교수), 제12기 윤명구(경북대학교 교수), 제13기 곽태규(국립국악원), 제14기 윤이근(국립국악원), 제15기 문정일(우석대학교 교수) 등이 김태섭의 제자이다. 김태섭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1964.12.7) 및 제39호 처용무(1971.1.8) 보유자로 지정되어 음악과 무용을 아울러 명인임을 자랑하였다.
종묘제례악은 조선왕조 역대 임금과 왕후의 신위를 모신 종묘 제향에서 연주하는 음악이요, 처용무는 신라에서 기원된 궁중무용으로 5인이 처용의 가면을 쓰고 5방에서 서서 추는 춤이다.
종묘제례악 보유자는 64년 지정 당시에는 20인이었으나 68년에 3인이 추가 지정되었고 71년에 11인이 연령 등의 이유로 해제되었으며 76년 다시 1인이 지정되는 등 우여곡절을 거치는 동안 9인이 타계하고 현재 4인이 남아 전승에 임하고 있으며, 처용무 또한 처음 봉해룡, 김기수, 김태섭, 김천흥, 김용 5인이 보유자로 지정되었으나 현재 김천흥, 김용 2인이 남았다.
어느 기·예능이고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되는 것만도 자랑인 터에 그것을 두 종목이나 아우른 2관왕의 이름은 저마다 누릴 수 없는 큰 영예가 아닐 수 없다.
화정 김태섭이 진미진선의 압권인 궁중음악과 궁중무용으로 얼마나 높은 위차(位次)임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화정 김태섭은 체소(體小)한 골격의 사람이 대개 그러하듯 강단있는 영근 사람이었다. 아악부원 양성소 시절 학업과 전공의 수업에도 그러하고 동료와 선배와 교유(交遊)에도 그런 면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아악부원양성소 졸업 후의 일이나 선배하고도 잘 어울려 주사에도 함께 드나드는데 집이 계동이요, 김보남, 김성진 등이 원서동이라 더욱 자별하듯 보였다.
그런데 그가 술 자리에서 선배에게 지지 않는 주량인 것도 들려 왔다.
그는 아악부원양성소 5기 출신이라 저들과는 김보남이 3기요 김성진이 4기 선배이니 10년 5년의 터울이나 술자리·술친구가 본시 그러하듯, 그건 도시 문제가 아니었고 그 분위기에 잘 동화되는 것, 그리고 주량에 있어 격차가 없어야 하는 따위가 중요하였다.
그 점 김태섭과 동기인 소당 홍원기는 누구에게도 그가 술을 마셨다는 소문을 듣지 못해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김보남은 놀라운 두주불사형이요 시작했다 하면 하루와 이틀 바로 그 자리에서 통음하는 그런 버릇이라 그게 지나쳐 병이 되고 일찍이 갔는가도 싶지만 김성진은 술이 거나해야 입이 풀리고 김태섭은 그나마도 인색한 과묵한 음주형에 속하였다.
화정 김태섭의 칠십 생애 고아하고 청정한 궁중 아악과 정재(무용) 속에서 평화로이 안주한 삶이었다고 해도 그 안에도 겪어야 하는 실의요 고민이 아주 없는 것이 아니었음을 조금 살피려고 한다.
예전 장악원 시대와는 달라 악공직은 악공으로 종신하는게 아니었고 아악수보(雅樂手補), 아악수(雅樂手), 아악수장(雅樂手長), 아악사(雅樂師), 아악사장(雅樂師長)의 엄위한 직급으로 되어 있었다.
국립국악원 개창 후 원장·악사장·서무과장·장악과장 아래에 국악사(國樂士), 이른바 전문직인데 서무과정은 행정직의 소임이라 생각할 수 없고, 국악사로서의 우뚝한 예능이요 오랜 연륜이면 장악과장은 바라보게 되는 것이 무슨 대단한 욕심도 아니었다.
상사인 원장이 김기수 선진이요, 악사장이 김성진 선진이라 임명권자 원장의 의중은 모르는대로 대부분의 국악원 안팎에서는 그리 점치고 있은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욕망이 난망이었던가. 그 인사는 김태섭 주변의 소망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당자인 화정 김태섭의 실의는 잘 몰라도 그런 기미는 가족들도 어느 정도 이회(理會)하고 있은듯 들려 민망하였다.
화정 김태섭의 본적은 서울시 종로구 서린동 164번지이고 호주와의 관계는 김중섭(金重燮)의 아우(弟)로 되어 있어,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형님 밑에서 성장한 것 같다.
정동초등학교를 마치고,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 통학 시절은 서울시 중구 남창동에 거주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1971년 4월 15일 김태섭 서약 작성의 정부 <공무원 인사기록카드>에 등재된 그의 인적사항을 추려서 옮기면 대개 다음과 같다.
본관 : 김해(金海)
생년월일 : 1922. 12. 26
가족사항
처 용복례(龍福禮) 1928.10. 국졸
자 김재욱(載旭) 1950.10.29 대졸 학생
자 김재승(載承) 1950.8.5 고재학생
자 김재황(載晃) 1955.6.4 고재학생
자 김재명(載明) 1957.7.26 중재학생
1977년 12월 21일 별정직 4급 상당 국악사를 의원면직하고, 1978년 1월 1일자로 1급갑(甲) 연주원으로 임명되어 연주원∙단원∙사범∙지도위원∙원로단원, 구체적으로 '국립국악원 전속국악연주단원(정악계열 피리)'으로 복무하다가 1993년 3월 24일 사망으로 해촉되었다.
1941년 4월 이왕직아악부 아악수(雅樂手)를 배명(拜命)하고, 1951년 4월 국립국악원 개원과 동시에 국악사(國樂士)로 임명되어, 1993년 3월 24일 타계하기까지의 실로 중단 없는 한 길 아악∙국악에의 정진이요 봉사이니 높이 기리어 칭찬하여 마지 않는다.
아악부양성소 제5기(1936~1941) 졸업생 총 18명 중 1945년 8월 조국 광복 후 수석 졸업 이장성 등 무려 15명이 전직하고 1명이 사망하여 아악부에 남아있은 사람은 전차에 소개한 소당(素堂) 홍원기(洪元基), 그리고 이번 화정 김태섭 2명이니 참으로 귀중한 수확이요 두 사람 하나같이 역사에 남을 큰 공훈이니 자랑스럽다.
김태섭옹 별세(종묘제례악 인간문화재)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레악과 제39호 처용무의 예능보유자(인간문화재) 김태섭 옹이 지난 3월 24일 오전 1시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김옹은 14세 되던 해 이왕직아악부에 제5기생으로 들어가 전공악기 피리를 비롯, 각종 악기와 춤을 전수하였으며 지난 64년 종묘제례악 태평소, 71년에 처용무의 예능보유자로 각각 인정되었었다.
(<월간문화재>제105호, 한국문화재보호재단, 1993)
박덕현(朴德鉉) 선생
1926년 4월 우리가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제3기 아악생에 입소한 때는 박덕현 선생은 이미 아악수장에 올라 있었지만 1915년 12월 당시 아악대 악원 이력서철에 보면 아악수장이 못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아악수의 석차로도 45호가 되어 끝번인 47호 박영석을 겨우 두 셋 앞선 그야말로 최하위에 머물러 있어 눈길을 끈다.
그리고 보면 그보다 한 자리 바로 위 곧 43호가 대금의 사범 유의석 선생이던 일과 더불어 결코 무관하지 않아 보이는 것이다.
유의석 선생의 회고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버젓이 전악이요 아악수장까지 임명되었다가 무슨 사유에서인지 아악수로 강등되고 다시 아악수장에 올라선 사례를 보았거니와 박덕현 선생의 경우도 아악생 교육의 필요성에 의한 특별한 탁용으로 나는 나름대로 풀이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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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덕현 선생은 고종 5년(1868) 5월 4일 서울 중부 박동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서울 서부 인달방 고간동 109통 8호로 되고 본관은 밀양이었다.
고종 29년(1892) 2월 장악원 악생에 임명되고 동 32년(1895) 4월 장례원 악생으로 귀속이 옮긴 것은 여타 악인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 융희 4년(1910) 8월 잔무취급을 받았다가 이듬해(1911) 1월 잔무취급이 풀리고 동년 2월 1일자로 이왕직 악생에 임명된다.
1913년 아악수장에 임명되었으나 1915년 5월 아악수에 강등되는데 언제 다시 아악수장에 복귀되었는가는 확실치가 않다.
선생의 구명은 학길이었는데 이 무렵 덕현으로 개명하고 있다.
우리는 해방후 아악대 초기의 이력서철을 대하기까지 선생을 우방 악공 출신의 종묘악 종잽이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선생이 정작 좌방의 악생 출신이라는 사실은 적지 않은 놀라움이면서 풀기 어려운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아악생으로 입소해 제1학년 제2학년 이른바 저학년 시대 우리의 문묘악의 연습은 안덕수 선생이 맡았고 종묘악의 연습은 박덕현 선생의 담당으로 다른 사범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말하자면 전임 교사이었다.
그런 선생이 아악만을 배우고 익힌 좌방의 전악이었으니 이상하지 않은가 말이다.
우리가 알기로 우방 악공은 종묘악이며 그 밖에 제제한 연례악곡에 두루 통효한 악공이 있는가 하면 겨우 종묘악 한 곡목 그것도 한 악기에 한하여 편종이면 편종, 피리면 피리만을 이회하는 재이이었던 것이다.
그 좋은 보기로 종묘악이요 영산회상 등도 잘 불던 피리의 명수 이용진이 있는가 하면 이창식은 오로지 종묘악만 능하던 피리잽이로 알고 있다.
박덕현 선생에게서 무슨 관악기의 취주는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으나 그 편종(편경)의 연주에는 역시 완숙의 범사는 과시 다르다는 외경과 감탄을 마지않았던 기억이 홀로 나 뿐이 아니었던 걸로 알고 있다.
종은 ‘아무나 쳐도 그 소리’라고 하겠지만 선생의 연주는 가위 달인의 경지여서 범용한 제자가 감히 추급할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박선생 말고 종묘악 종잽이로 아악수에 이영지란 이가 있었다. 물론 그는 악공 출신으로 아는 곡은 종묘악이요 잽이는 편종이었다. 아악부 시대 매주 월요일이면 기성 아악수들이 전부 출근하여 종일 문묘악으로 시작해서 종묘악 그리고 여민락·영산회상 등의 연주가 계속되었는데 종묘악 합주라고 그가 편종 앞에 앉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때는 이미 1기·2기 출신의 선배들이 있고 해서 그가 꼭 편종을 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종묘대제에는 반드시 그가 편종을 맡았다.
박덕현 선생 뿐만 아니라 아악수장실의 노 범사들은 우리에겐 모두 조부 뻘이어서 어려우면서도 조손사이나처럼 허물없이 응석부리고 애증함을 받고 있었다. 그중에도 박선생은 하나하나 우리에게 별명까지 지어 부르며 각별한 애정을 표시하여 존경과 신망을 더했던 것 같다.
무엇이 좌방 악생으로 하여금 종묘악을 배우고 익히게 하였는가는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지만 선생의 자부 같은 권애는 죽기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박성재(朴聖在) 선생
내가 1926년 4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에 제3기생으로 입소하여 이 바닥 아악에 기탁한지도 어느덧 고희를 바라보는 연륜이지만 이날 아끼고 아쉽고 그립고 부러워 더욱 생각나는 선진에 박성재 형이 있다.
내가 알기로 지나온 아악부 시대며 국립국악원의 40년을 통틀어도 박성재 그만한 절세의 총기는 아직 못 보았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믿음이다.
박성재는 1907년 1월 12일 서울에서 태어나고 1922년 아악부원양성소 제2기생으로 입소, 1926년 3월 동기에서 우등으로 수석 졸업이니 그 자질이며 음악적 재능을 가히 미루어 짐작할 것이겠다.
동기에는 실로 다사제제의 수재들인 속에 으뜸이니 그의 위상이 더욱 빛나고 있다.
거문고의 장정봉(인식), 대금에 김천룡, 피리가 전공이나 뒷날 가곡으로 저문한 이병성. 저들은 이미 고인이 되었으나 2기에서는 유일한 생존으로 해금이 전공이면서 춤에 관절한 김천흥 선진들 이루 매거하기도 어려울 정도가 아닌가.
박성재는 피리가 전공이었으나 겸공으로 거문고도 능히 한 몫을 해냈다. 이는 1기의 김득길과도 궤를 같이 하고 있어 주목할 바이겠다.
대저 아악부 시대 아악생의 전공의 벼름은 나름대로 신체적 조건이며 음악적 재능, 그리고 지능의 우열 등을 계교하여서의 아악사인 김영제·함화진 두 분의 고유한 권한에 속했는데 무엇보다도 가장 우수한 자를 피리잽이로 선별했던 것이 아악부의 불문의 전통이었던듯이 알고 있다.
그런 실증은 1기·2기에서의 김득길 박성재가 함께 피리 전공이었던 걸로 넉넉할 것이다.
3기생 4기생의 경우는 반드시 수석졸업이 피리잽이에 돌아가지 않았으나 피리잽이는 고르게 수준급에 들고 수석만을 놓쳤을 뿐 모두 우등으로 상위권에 속했던 것이 그걸 잘 말하고 있다.
이복길(주환), 이재천(석재), 김보남 등이 모두 우등으로 2석·3석·4석의 석차였으니 놀라웁다.
나는 서두에 박성재를 일러 절세의 총기라고 일컬었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아는 바와 같이 아악이고 속악이고 전날은 전부 암기·암보로 연주되었지 보표에 의지하는게 절대 아니었다.
아악부에 원로 악수들이 물러나고 아악생 출신의 신세대일 때 언제부터인지 연주의 첫 자리인 목피리는 단연 박성재 그의 차지이었다.
자즐한 소속에서부터 여민락이요 세 ?≠? 영산회상에 자진한잎, 우·계면 가곡 등 대곡에 이르기까지 그는 한 가락 한 장단 막힘이 없는 완전 완미한 취주로 전 연주를 성공적으로 영도함으로 위 아래의 경탄과 상찬 선망을 한 몸에 모았던 것이다.
아악 합주에 있어 목피리의 역할은 비단 피리군의 첫 자리일 뿐만 아니라 그 연주에서의 주도 통괄을 책임지는 막강한 위치이기도 하였다. 그 점 박성재가 목피리인 합주는 벌써 성공한 합주 훌륭한 연주가 값 메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최순영·유의석 등 노악사들의 더없는 사랑과 찬사를 받은 아악부의 총아가 다름아닌 박성재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 그를 아끼던 많은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실로 우뚝한 명피리 일수였으면서 아깝게 요절한 탓인지 어느 국악사나 국악사전에 그의 이름 석자를 볼 수 없는 사실이 더더욱 섭섭하고 비통하기까지 한 것이다. 그에 비하면 훨씬 못한 범용한 악인도 몇줄 그 이름과 전공쯤은 전하고 있는데 일세의 일재 박성재가 빠진다는게 도무지 말이 되질 않는다.
그나마 <국악대사전>(장사훈) 아악이습회 목록에 피리 독주 여민락(초장)·가사 백구사(전) ·세피리 독주 가곡 우조 첫치·셋째치·가곡 언락·편락·편수대엽 등에 박성재의 이름을 남겨 1930년대 그의 화려한 연주생활의 편린을 더듬게 하고 있다.
그는 피리요 노래 뿐만 아니라 궁중정재 각종에도 원무로 날리었고 처용무에는 남방 홍의로 춤에도 비상한 재능을 보인 명무였다.
성경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