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월적인 것에 뿌리를 두고 자라나는 식물에 비유된 미세신(微細身) 혹은
에테르-체(etheric-body). 인도 라쟈스탄 지방, 18세기, 48.3Ⅹ33cm.━
참고: 이 글을 읽기 전에…….
앞에서 밀교(비밀불교)와 탄트라(Tantra)는 같은 뜻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불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렇습니다.
탄트라는 불교에 유입되어 밀교라는 새로운 종파를 만들었으니, 그럴만도
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탄트라는 힌두교의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흔히 밀교를 불교와 힌두교가 뒤섞인 이상한 종교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과연 탄트라는 어느 종교의 산물인가요? 아니면 종교를 뛰어넘은
그 어떤 것인가요?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Vigyana Bhairava Tantra)』!
우리말로 풀이하면 『의식 초월을 위한 방편(명상수행법)』이란 뜻.
이것은 탄트리즘이 티벳으로 건너가 불교 탄트리즘으로 재구성되기 전,
힌두 탄트리즘의 근본 경전이 되는 책으로서, 그 연원은 B.C. 3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래서 여러 탄트라 경전 중에 가장 고대의 탄트라 경전이기
도 합니다. ━탄트라 경전 중에는『구흐야사마쟈 탄트라(Guhyasamaja Tantra)』
도 있습니다.━ 이 책은 매우 간결하고 단순한 문장들의 112가지 소절들로 이루
어져 있는데, 이 112가지 소절은 삶의 궁극적인 질문들을 푸는 방법을 적어 놓았
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1903년 미국인 폴 랩스(Paul Reps)에 의해 영역(英譯)되
었는데, 그는 인도 북부의 캐쉬미르 지방 스리나가르를 여행하다가 은자(隱者)
락쉬만쥬(Lakshmanjoo)에게서 산스크리트어 원전(原典)을 입수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탄트라가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 사건입니다.
그리고 1972년부터 1973년 11월까지 인도 붐베이에서 오쇼 라즈니쉬가 이에 대해
강의를 하였던 것입니다.
이 책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5천년 전 고대 인도의 명상서(冥想書)이다.
② 이 책은 선(禪)의 원형서(原形書)이다.
③ 이 책은 특히 불교 신비주의(Tantric Buddhism; 密敎)의 원전(原典)이다.
④ 힌두교, 불교, 유태교, 수피(Sufis; 이슬람 신비주의), 선도(仙道) 등
이 지구상의 모든 명상과 수행이 바로 이 책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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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비(Devi)━샤크티(Sakti)라고도 함.━가 묻는다.
『오! 시바여, 당신의 실체(實體)는 무엇입니까?
이토록 경이로 가득 찬 우주는 무엇입니까?
이 모든 원소(元素)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습니까?
우주의 중심에 앉은 자(中心軸)는 누구입니까?
형상(形象)들로 충만하여 동시에 모든 형상들을 초월한 이 생명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우리는 시간과 공간, 이름과 모양마저도 뛰어넘어 이를 수 있습니까?
나의 모든 의심을 없애 주소서!』
본론으로 들어가기전에 우선 살펴 볼 것이 몇가지 있다.
먼저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의 세계는 지성적이거나 철학적인 세계가 아니다.
여기에 이론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직 방법과 테크닉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어떤 도덕이나 원칙 같은 것도 없다.
<탄트라>라는 단어 자체가 방법, 길이란 뜻이다.
그래서 이것은 철학적인 것과 하등 연관이 없다.
이 점을 기억하라. 탄트라는 지적인 문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왜(why)>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how)>의 문제이다.
<진리가 무엇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진리에 이르느냐?>의 문제이다.
또한 <탄트라(Tantra)>라는 단어는 기술, 테크닉(Technic)을 의미한다.
이런 접근 방식은 과학이다. 과학은 <왜(why)>라는 의문보다 <어떻게(how)>라는
의문에 더 관심을 쏟는다. 바로 이점이 과학과 철학의 기본적인 차이이다.
철학은 묻는다. <존재는 무엇인가?>
그러나 과학은 묻는다. <어떻게 존재하는가?>
그대가 <어떻게(how)>라고 묻는 순간, 그때는 방법, 즉 테크닉이 중요해진다.
그때 탁상 공론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론은 전혀 의미가 없다.
오직 경험만이 중심이 된다.
탄트라는 과학이다. 결코 철학이 아니다.
철학을 이해하기는 쉽다.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직 지적(知的)인 것만이
필요하다. 언어를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언어가 내포하고 있는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대는 철학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대 자신의 어떠한 변형이나 변화도 필요하지 않다. 지금 그대로의 상태에서
철학의 이해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탄트라는 전혀 그렇지 않다.
탄트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대 자신의 변형과 성숙이 필요하다.
영적인 차원의 승화가 필요하다. 그대 자신이 다른 차원으로 변형되지 않는 한,
탄트라를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지적인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인 경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체험이라야 한다. 그대가 수용적으로 되고,
준비되고, 느낄 만큼 예민해지지 않는 한, 탄트라를 이해하기란 매우 어렵다.
철학은 <생각(thinking)>만으로, <두뇌>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탄트라는 그대의 전체를 필요로 하고 있다.
탄트라를 알기 위해서 그대는 부분이 아니라 전체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훨씬 깊은 도전이다. 그대는 그 속에서 전체가 되어야 한다.
탄트라를 알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철학과는 전혀 다른 접근법과 태도, 그리고 다른 마음이 필요하다.
물론 여기에서 데비의 질문은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질문이었다.
일단 탄트라는 이렇게 데비의 철학적인 질문에서부터 시작된다.
참고로 말해, 실제로 우리의 모든 질문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철학적이냐? 아니면 본질적이냐?』
혹은 『지적(知的)이냐? 아니면 전체적이냐?』이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사랑이 무엇이냐?』라고 물었다.
그대는 이 사랑에 대해서 지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여기에다 그대 자신의 독특한 이론체계를 내세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는 사랑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
이론을 세우는 데 경험은 별로 필요치 않다. 차라리 사랑에 대하여 적게 알면
알수록 그대는 과감하게 이론체계를 세울 수 있다.
오직 눈먼 사람만이 『빛(light)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손쉽게 정의내릴 수
있다. 모를 때는 과감해진다. 무지(無知)는 과감성이다.
그러나 알 때는 망설이게 된다. 그대가 많이 알면 알수록 점점 수렁으로 빠져
들어 간다. 알면 알수록 그대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가를 눈치챌 수 있기 때문
이다. 이러한 사람들이야말로 정말로 지혜로운 사람(知者)들이다.
그들은 무지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무지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어린아이나 바보
처럼 단순해진다. 철학적으로 되려고 한다면, 이론적 체계를 세우려 한다면,
그대는 적게 알수록 좋다! 지적인 문제에만 국한시킨다면 문제의 해결은 아주
간단하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단지 사색이나 추론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대의 존재를 변형시키는 데는 아무런 힘이 없다.
그런 식으로 그대의 존재를 변형시키기란 매우 어렵다.
정말로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 사랑을 경험해 보아야 한다. 사랑에 대한 심오한
이론과 철학을 안다고 해서 그대가 몸소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산 체험만이 그대를 변화시킬 수 있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 그대는 다른
사람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다시 나올 때는 이미 그대의 옛 모습은 사라지고
없다. 더 이상 옛날의 그대가 아니다. 거기에 하나의 틈이 생긴다.
옛 사람은 이미 죽고 새 사람이 나온 것이다.
다시 탄트라는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이다.
물론 데비의 질문은 철학적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시바(Siva)의 대답은 결코
철학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대는 처음부터 이것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당황하게 될 것이다.
시바는 데비의 질문에 대해 단 한 마디의 대답도 말하지 않았다.
데비가 묻는 질문에 시바는 완전히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질문이 데비의 질문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런 질문은 끊임없이 그대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질문의 형식은 다르지만 그 내용은 데비의 질문과 똑같다.
그리고 그 질문에는 오직 시바와 동일한 차원에 이른 사람만이 진정한 대답을
말해줄 수 있다. 데비는 묻는다.
『오! 시바여, 당신의 실체(實體)는 무엇입니까?』
그러나 시바는 데비의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바는 대답 대신
한 가지 테크닉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이 방법을 통해서, 체험을 통해서, 데비
는 스스로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대답은 언제나 질문에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바는 『나는 누구인가?』를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나는 누구인가?』를 경험할 수 있는 테크닉을 주었다.
이 테크닉을 수련하게 되면 그대 스스로가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이론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될 것이다.
탄트라에서는 <하는 것(doing)>이 <아는 것(knowing)>이다.
그 외에 다른 앎(knowing)은 없다. 그대가 무엇인가를 수련하여 변형되지 않는
다면, 사물을 바라보는 그대의 시각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지적인 차원 이상의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더 이상 대답이 없다.
물론 여러가지 그럴싸한 대답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모든 철학은 거짓말이다. 철학에게 물어보라. 철학은 대답해 줄 것이다.
그대는 하나의 질문을 던지고 철학은 거기에 맞추어 대답한다.
그러면 그대는 만족스럽기도 하고 불만족스럽기도 하다.
만일 그 대답이 그대를 만족시키면 그대는 그 철학의 신봉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은 예나 마찬가지의 상태로 남아있다.
만일 그 대답이 그대를 만족스럽게 하지 못한다면, 그대는 만족할 만한 또 다른
철학을 찾아다닐 것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은 역시 예나 마찬가지의 상태에 머물
러 있다. 그대는 여전히 변화되지 않았다. 어떤 것에도 감동받지도 상처받지도
않은 상태에 머물고 있다.
그대가 힌두교 신자이건, 불교 신자이건, 아니면 기독교인이건 그것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힌두교 신자, 불교 신자, 기독교인라는 그 가면 뒤에 있는 진짜
사람은 모두 마찬가지이다. 힌두교, 불교, 기독교라는 옷(衣)만 다를 뿐이다.
교회나 절간, 혹은 모스크에 가더라도 똑같은 사람이 간다.
단지 가면만 다를 뿐이다. 단지 복장만 다를 뿐이다.
이 가면과 복장 뒤에는 똑같은 사람이 서 있다.
똑같은 공격성, 똑같은 분노, 똑같은 폭력성, 똑같은 질투 등등…….
기독교인의 성욕(性慾)이 불교 신자의 성욕과 어떻게 다른가?
기독교인의 폭력성이 이슬람교인의 폭력성과 어떻게 다른가?
모두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같은데 입고 있는 옷이 다를 뿐이다.
탄트라는 그대가 입고 있는 옷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탄트라는 옷 속에 있는 그대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
만일 질문을 한다면, 그것은 그대가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빛이란 무엇인가?』
철학은 빛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빛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탄트라뿐이다.
『빛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즉시, 탄트라는 묻는 자신이 지금 눈 먼 상태에
있음을 일깨워 준다. 그런 다음 그를 변형시켜 그로 하여금 몸소 빛이 무엇이라
는 것을 체험시켜 준다. 탄트라는 결코 『빛은 무엇이다.』라며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지 않는다. 대신 어떻게 빛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가를 말할 것이다.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그 대답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테크닉을 줄 것이다.
그래서 탄트라의 해답은 지적(知的)인 것이 아니다. 눈 먼 사람에게 빛에 대해서
빛에 대해서 설명해 준다면 이것은 지적인 것이다. 그러나 눈 먼 사람 자신이
직접 눈을 떠서 빛을 볼 수 있다면 이것은 본질적인 것이다.
탄트라가 지적이 아니라 본질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시바는 데비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 … … (중략) … … …
… … 시바는 대답했다. 물론 시바의 방식대로 말이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이해가 아니라 경험이다. 구체적인 명상법이다. 이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 된
명상 테크닉이다. 또한 112가지 방편의 완벽한 세트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이 명상 테크닉은 가장 현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시바가 말한 112가지 명상법에서 단 한개라도 덧붙이거나
덜어 내지않았기 때문이다. 이 112가지 명상법은 마음을 변형시키고, 마음을
없애고, 마음을 초월할 수 있는 112가지의 모든 가능성을 총동원한 것이다.
시바의 이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는 5천년 전에 편집되었다.
그러나 5천년이 지나오는 동안 단 한 줄도 더 보태어지거나 삭제되지 않았다.
원 상태 그대로가 이미 완벽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오래 된 문헌이지만,
가장 현대적인 문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방편들은 지구상에서 인간이 사는
동안에는 영원한 진리이다.
이 112가지 명상법은 마음을 변형시키고 초월하는 과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이제 그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살펴볼 것이다.
먼저 우리는 지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성(知性)은 오직 하나의 도구로
만 사용하라. 그리고 이들 테크닉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대가 알고 있는 과거
의 지식들은 잠시 한쪽으로 제쳐두어라. 그대가 지금까지 모아왔던 모든 알고 있
는 것은, 무엇이든지 제쳐두어라. 그것은 거울 위에 앉은 먼지일 뿐이다.
그리하여 이 방편들을 신선한 마음으로 만나라.
논쟁하려 들지 마라. 논쟁심 없이 이것들과 마주하라.
그대여, 오해하지 마라. 따지고 논쟁하는 마음이 의식(意識)이 깨어있는 상태라
고 생각하지 마라. 그대가 논쟁에 들어가는 순간, 깨어있음은 놓치고 만다.
그리고 이 방편들은 어떤 종교에도 속하지 않는다.
이것은 결코 힌두교의 산물이 아니다.
<상대성 원리>를 발견한 아인슈타인이 유태인이라고 해서 <상대성 원리>가
유태교의 것인가? 전기(電氣)를 에디슨이 발견했으니, 전기는 기독교의 것인가?
그 누구도 그대에게 『왜 우리의 전기를 사용하는가?』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처럼 과학은 그 어떤 민족이나 종교에 속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탄트라는 바로 그 과학이다. 명상적 과학이다.
탄트라는 분명 힌두교인들의 의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 힌두교의 것
이 아니다. 탄트라는 힌두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따라서 탄트라에는 어떤 종교의식도 담겨 있지 않다.
어떤 사원도 필요 없다. 그대 자신이 바로 사원이 된다. 그대가 실험실이 된다.
모든 실험이 그대 속에서 행해질 것이다. 그리고 어떤 신앙심도 필요 없다.
이것은 종교가 아니라 과학이다. 여기에 신앙은 필요치 않다.
코란이나 베다를 믿을 필요도 없고 세례를 받을 필요도 없다.
불교도는 불교도로서,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으로서 이 방편을 이용하면 그만이다.
굳이 다른 종교로 개종하거나 새로이 믿을 필요가 없다.
그대가 어떤 이념, 어떤 종교에 몸담고 있더라도 탄트라는 그대에게 개종을 요구
하지 않는다. 탄트라는 종교란 단지 사회적인 일이라고 말한다.
그대 내면의 문제는 탄트라가 관여할 것이다. 그대 존재를 변형시키는 것은 종교
가 아니라 탄트라이다. 그대가 믿는 종교의 궁극적인 상태는 오직 탄트라의 방편
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신앙심이나 교리를 통해서는 결코 이룰 수 없다.
기독교 신자가 이 명상법을 익히게 되면 그는 성경의 의미를 보다 깊게 터득할
수 있다. 불교 신자가 이 명상법을 익히게 되면 불경의 의미를 보다 깊게 터득
하게 될 것이다. 탄트라의 이 명상법을 익히기 위해서 자신의 종교를 버릴 필요
는 전혀 없다. 그대가 이 테크닉을 수행하더라도 그대에게 어떤 사회적 변화도
필요하지 않는다. 탄트라는 항상 그대를 도울 것이다. 그대가 어떤 옷을 입고
있던지 상관없이…….
탄트라는 순수한 과학일 뿐이다. 그대가 아플 때, 병원에 가면 주사를 맞기 전에
몇 가지 마이신 반응검사를 한다. 그때 기독교를 믿는다고 해서 반응검사가 달라
지지 않는다. 불교들에게만 특별한 증상이 나타나는 일도 없다. 그런 일은 일어
날 수 없다. 그대의 신념체계가 무엇이든지, 그대가 사회주의자이건 자본주의자
이건, 마이신 반응검사의 유형은 항상 똑같다.
그대는 무지(無知)하다. 아직도 그대는 갈등 속에 있다. 그대는 잠들어 있다.
이것이 바로 병(病)이다. 영혼의 병이다. 이 병은 오직 탄트라에 의해서만 고쳐
질 수 있다. 그대가 무엇을 믿든 그것은 상관없다. 그대의 종교와 그대 자신은
다르다. 종교란 동시발생적인 사회현상이다. 그대가 어디에서 어떻게 태어났
느냐와 내가 어디에서 어떻게 태어났느냐에 따른 동시발생적인 사회현상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종교도 동시발생적인 사회적 한 현상이요, 다른 사람의 종교
역시 동시발생적인 한 사회적 현상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대여, 그대의 종교에
너무 집착하지 마라. 종교에 집착하기 보다는 그대 자신을 변형시켜라.
그리고 그러려면 과학적이며 구체적인 방법을 사용하라.
탄트라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설령 탄트라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대부분 잘못
이해하고 있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차원 높은 순수한 과학일수록 일반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적어진다.
아인슈타인이 살아 있을 당시, 그의 <상대성 원리>를 이해하는 사람은 전 세계에
서 단 12명 뿐이었다. 아인슈타인 자신도 자기가 발견해낸 이 <상대성 원리>를
남에게 이해시키시란 매우 어려웠다. 이 <상대성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높은 차원의 과학적 두뇌의 훈련과 사색을 해야한다.
단지 두뇌의 훈련과 사색으로 이해하는데도 이렇게 힘든데, 탄트라를 이해한다는
것은 더욱더 힘든 것이다. 지식의 축척이나 두뇌의 훈련을 통해서는 결코 탄트라
를 이해할 수가 없다. 논리만 갖고서는 부족하다. 탄트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변형, 오직 그대 자신의 마음의 변형만이 필요할 뿐이다. 따라서 탄트라를 통해
서 변형되지 않은 사람은 그것의 전달이 불가능하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탄트라는 일반 대중들에게 전파 될 수 없었다.
자신이 옳바로 이해하지 못할 때는 오해하게 된다.
옳바로 이해하지 못했을 때, <나는 이해했다.>고 그대는 느낀다.
그대여, 이해하지 못했으면, <이해하지 못한 그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안되는가? 그대가 어떤 일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대는 그것을 비난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이해할 수 없다는 이 사실이 그대의 자존심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내가 이것을 이해할 수 없다니? 참을 수 없다.
이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분명히 자체적으로 결함을 갖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비난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완전히 넌센스이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해야만 비로소 사람들은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탄트라는 그처럼 긴긴 세월 동안 대중들에게 전파되지 않았다.
탄트라는 세상에 나오는 즉시 오해되고 왜곡되었다.
종교적 권력을 가진 성직자들, 종교지도자들은 탄트라를 비난하고 왜곡시키는데
가장 앞장섰다.
탄트라를 이해하는데 가장 큰 장벽이 있다.
그것은 탄트라는 이중성(二重性)을 뛰어 넘고 있기 때문이다.
탄트라를 옳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 단어가 주는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① 도덕(道德; moral), ② 반도덕(反道德; immoral), ③ 비도덕(非道德; amoral)
우리는 ①의 도덕을 이해한다. 충분히 이해한다. 또 우리는 ②의 반도덕을 이해
한다. 그러나 ③의 차원, ①의 도덕과 ②의 반도덕을 넘어선 차원, <비도덕>은
이해할 수 없다. 탄트라는 이중성(二重性)을 뛰어 넘고 있다.
탄트라의 관점은 <비도덕>이다. <비도덕>이란 도덕적인 것도 반도덕적인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는 어떤 철학사상이나 이념에 대해서 도덕적이거나 아니면
반도덕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뛰어넘어 <비도덕>적인 것
은 판단하기에 매우 어렵다.
그렇다. 탄트라는 <비도덕>이다. 약(藥)은 비도덕이다. 따라서 약은 도덕도
아니고 반도덕도 아니다. 약을 도둑에게 줘 보라. 도둑의 병을 고쳐 줄 것이다.
약을 성인(聖人)에게 줘 보라. 역시 성인의 병을 고쳐 줄 것이다.
약의 효과는 성인의 경우나 도둑의 경우나 마찬가지이다.
약은 결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이 놈은 도둑이다. 그러니 이놈은 죽여야겠다.』
『이 분은 성인이다. 그러니 이분은 살려야겠다.』
약은, 의학(醫學)은, 과학이다. 그대가 성인이건 도둑이건 무관하다.
마찬가지로 그대의 존재 역시 도둑도 아니고 성자도 아니다.
탄트라는 그런 것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탄트라를 수행하기 위해서 도덕성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탄트라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다. 탄트라는 그런 사람을 보며 웃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아파서 심한 열이 나고 있는데, 의사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면
이상하지 않는가?
『지금은 안된다. 먼저 열을 내리고 오라.
먼저 건강해진 다음에 오라. 그러면 약을 주겠다.』
이것은 다음의 이야기와 똑같다. 어떤 도둑이 성자(聖者)에게 가서 말했다.
『선생님, 저는 도둑입니다. 명상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성자가 말했다.
『먼저 너의 직업을 바꾸어라. 그러면 나는 명상법을 가르쳐 주겠다.』
또 한 사람의 알코올 중독증 환자가 와서 말했다.
『저는 알코올 중독증 환자입니다. 명상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자 성자가 말했다.
『먼저 술(酒)에서 손을 떼어라. 그래야만 명상이 가능하다.』
그러나 성자의 이 말은 자살하라는 말과 다름없다.
인간은 누구나 알코올 중독자가 아니면 도둑, 도둑이 아니면 반도덕(反道德)한
사람이다. 그것은 우리 인간은 모두 혼란된 마음, 병든 마음의 상태에 있기 때문
이다. 그런 현상들은 병든 마음에서 생긴 결과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병든 마음
을 고치기 위한 치료약이 바로 명상이다. 그런데 먼저 병든 마음을 고친 후에야
명상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첫째가 정상적이어라. 그러면 명상을 할 수 있다』
마음이 정상인데 누가 명상이 필요하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을 위한 명상인가?
━물론 내가 말하는 <정상>이란 깨닫는 것이다.━
탄트라는 비도덕이다. 그대가 누구인지를 묻지 않는다. 인간이면 그것으로써
충분하다.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그대가 누구이든지간에 탄트라는 그대를 이미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그대에게 맞는 테크닉을 선택하라. 그리고 그대의 전 에너
지를 거기에 쏟아부어라. 진정하고 참된 방편은 그대에게 어떤 선결조건도 내세
우지 않는다. 만일 어떤 방편이 그대에게 조건을 제시한다면 그것은 가짜라고
생각해도 된다. 도둑에게 도둑질을 고쳐야 명상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에
게 명상은 불가능하다. 도둑질하는 그의 행동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도둑의 기질(氣質)까지는 바꿀 수는 없다. 욕심장이가 그의 행동을 바꿀 수
는 있다. 그러나 욕심장이의 그 기질까지는 바꿀 수 없다. 그 자신을 욕심이 없
는 사람이 되도록 강요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욕심이 없어지는 순간, 또 다른
종류의 욕심이 생겨난다. 천국이 약속되었다면 그는 욕심을 버리려고 노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욕심은 보다 고차원적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천국, 해탈, 축복, 이런 것들이 이번에는 그의 욕심의 대상이 될 것이다.
여기 탄트라는 말한다.
『신뢰할 만한 명상법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인간은 결코 변형되지 않는다.』
그렇다. 설교에 의해서는, 훈시에 의해서는 아무것도 변형되지 않는다.
그대여, 이 세상을 보라. 이 수많은 가르침을, 도덕주의자들, 철학자들을 보라.
수많은 성직자들, 선생들을 보라. 이 세상이 온통 그들로 가득차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여전히 이렇게 반도덕적(反道德的)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그들은 어떠한 명상법도 일러주지 않는다.
대신 무조건 『화내지 말라.』고만 떠들고 있다.
그러나 선생들의 이 말에 대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조차 할 줄 모른다.
『아, 선생이여,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화가 난다.
그런데도 당신은 그저 화내지 말라, 화내지 말라고만 하고 있다.
도대체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화가 날 때, 나는 분노 그 자체이다.
그런데 당신은 그저 화내지 말라, 화내지 말라고만 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화나는 내 자신을 억누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억누르면 그럴수록 분노는 더 강해진다. 결과적으로 그대는 죄책감이
생긴다. 분노하고 있는 자신을 아무리 변형시키려고 해도 변형시킬 수 없기 때문
이다. 그것으로 인해 열등감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죄책감은 <내가 무능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하여 그대는 결코 그대의
분노를 이길 수 없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자신의 분노를 이길 수는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어떤 테크닉이 필요하다.
그대의 분노는 곧 혼란된 그대 마음의 징조이다. 혼란된 마음을 변형시켜라.
그러면 변할 것이다. 지금 그 분노는 그대 내면에 무엇이 있는가를 보여주는
징조이다. 안을 변형시켜서라. 그러면 밖은 저절로 변할 것이다.
탄트라는 그대의 도덕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정말이지 도덕을 강조하는 것
만큼 비열하고 비인간적인 것은 또 없다. 진리를 배우기 위하여 찾아온 사람에게
『먼저 분노를, 성(性)을 버려라. 이런 것과 저런 것을 버려라.』라고 말한다면
그는 비인간적이다. 비열한(卑劣漢)이다.
내가 말한 이런 것들은 실제로 불가능하다. 이 불가능함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열등감과 비열함을 느끼게 만든다. 그리하여 내가 말한 이 불가능함을 실행하
려 하면 할수록 그는 패배감만을 맛볼 것이다. 그리고 이 패배의 끝에서 그는
느낀다. 그 자신이 죄인(罪人)이라고…….
설교자들이 누구인가? 이 세상이 온통 죄악으로 가득차 있음 확신시키는 사람들
이다. 죄의식에 대한 이 확신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좋다. 유리하다.
이 확신이 없다면, 그들의 직업은 더 이상 지속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대여, 그대는 분명 죄인이고 죄인이어야만 한다. 그래야만이 교회, 절, 모스크
가 번영을 누릴 수 있다. 그대 존재의 죄악은 그들(설교자들)의 황금어장이다.
그대의 죄책감은 모든 종교의 기반이다. 그대가 죄책감을 느끼면 느낄수록 종교
는 점점 더 높이 올라간다. 그것들은 그대의 열등감 위에, 죄책감 위에 세워졌
다. 그들은 인간의 마음에 열등감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탄트라는 그대의 도덕에, 사회적 형식 따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렇다고 탄트라는 결코 반도덕(反道德)을 권장하지도 않는다.
그 대신 탄트라는 그대 마음을 변형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그 방법을 말하고
있다. 그대 마음이 변하게 되면 그대의 성격이 변할 것이다. 그대의 근본 구조
가 변하게 되면 그대라는 그 건물 전체가 변하게 될 것이다.
탄트라의 이러한 비도덕적(非道德的)인 태도가 소위 성자(聖者)라는 사람들에게
는 묵인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모두 탄트라를 반대하고 있었다.
성직자와 종교지도자들은 탄트라의 가르침이 전파될까봐 두려워했다.
그들은 종교와 도덕이라는 미명으로 탄트라를 왜곡시켰다.
만일 탄트라가 성공한다면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이 모든 넌센스는
더 이상 계속될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라. 기독교는 과학의 발전을
계속 반대해왔다. 한번 그대가 자연의 비밀을 알고 나면 더 이상 종교적인 설명
으로는 먹혀들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물질을 변화시키는 비밀을 알고 나면,
조만간 마음에 대한 변화의 비밀도 알아내고 만다.
왜냐하면 마음도 변형될 수 있는 미묘한 물질(subtle matter)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변화될 수 있다. 그리고 한번 그대가 변화된 마음을 갖게 되면
그대는 다른 세상을 접하게 된다. 이것은 그대가 마음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대에게 보이는 이 세상은, 그대의 특수한 마음 때문에 그렇게 보이
는 것이다. 이제 마음을 바꾸어라. 그러면 세상 역시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대의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탄트라의 궁극적인 경지이다.
탄트라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그대의 마음을 없애는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중재자(마음) 없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중재자가 사라질 때,
비로소 그대는 실체(實體)와 직접 만날 수 있다. 이제 본질과 그대 사이에 어떤
방해물도 없다. <마음이 없는> 이 경지는 곧 <바이라바>의 경지이다.
이 <마음이 없는>상태가 바로 무심(無心)이다.
처음으로 그대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직접 보게 된다. 만일 그대가 마음을
갖고 있다면 마음은 그대 앞에서 나름대로의 세상을 창조해 나갈 것이다.
그때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은 그대 마음의 투사체이다.
그러므로 일단 먼저 마음을 변형시켜야 한다. 그 다음 <마음의 변형>으로부터
<마음이 없는>상태로 옮겨가야 한다.
여기 이 112가지 방편들(명상법)은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다.
그중에는 그대가 좋아하는 방편(명상법)을 다른 사람은 싫어할 것이다.
각 개인의 기호에 따라 방편(명상법)의 선택도 다양하다.
이것이 시바가 왜 그렇게 많은 방편(명상법)을 말했는가 하는 그 이유이다.
우선 우리는 112가지 방편(명상법)을 모두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과연 어떤 방편(명상법)이 그대의 차원을 변형시킬 수 있는지 알아야한다.
그러기 위해서 지적(知的)인 이해도 필수불가결하다. 그러나 지적인 이해만이
전부가 아니다. 어떤 방편(명상법)이 그대에게 적합하다면 그것은 마치 조립품
처럼 즉시 그대에게 잘 맞을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애매모함도 없다. 그대는
확실히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방편(명상법)들 하나하나를 몸소 실험해
보라.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그대에게 맞는 한가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이 방편들 하나하나를 마치 게임(game)하는 마음으로 하라.
내가 게임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대가 너무 심각하게 이것들을 대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단지 게임하라. 그러면 어떤 방편이 그대에게 딱 들어맞을 것
이다. 그때에 심각해져라 그때 그 속으로 깊이 들어가라. 강렬하게, 진지하게,
그대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라. 정성을 들여라. 그러나 그 이전에는 단지
게임처럼 가볍게 다루어라.
한 가지 방편에 대해서 적어도 3일씩 해봐야 한다. 만일 어떤 방편이 그대에게
적합하지 않다는 확신이 들면 다른 것으로 옮겨가라. 그리하여 그대의 방편을
찾게 될 때 다른 방편들은 모두 깡끄리 잊어버려라. 그리고 그 한가지 방편에
만 매달려서 3개월은 꾸준히 해야한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그대에게 맞지 않는 방편은 아무리 해봐도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에게 맞는 방편은 단 3분이라도 금방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112가지 방편은 그대에게 기적적인 체험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러므로 나의 말을 주의깊게 들어라. 체험을 얻는 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나는 가능한한 여러 각도에서 각 방편들에 대해 설명할 것이다.
만일 그대에게 맞지 않다고 느끼는 방편을 만난다 할지라도 3일 정도만 실험해
보라. 그런 후에 깡끄리 잊어버려라. 만일 그대에게 맞는 방편이 나타나면 그것
을 적어도 3개월 동안 계속하라. 그대의 삶은 기적으로 변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대에게 알맞지 않는 방편을 실행했을 경우 3개월이 아니라 일생을
해 봐도 거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 그대에게 맞는 방편을 못했다면 너무 심각해하지 말라.
게임하는 자세로 하나하나의 방편에 접근하라.
시바는 이렇게 112가지 방편을 제시했다.
이것은 모든 면에서 접근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만일 이 112가지 방편에서도 그대에게 맞는 것을 찾지 못했다면, 이제 그대에게
다른 방법은 없다. 그대에겐 방편(명상법)이 필요없다. 그대는 수행따위는 잊어
버리고 그저 기쁘게 살아라. 그대는 더 이상 수행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 112가지 방편들은 인류 전체를 위한 것이다. 모든 인간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어떤 것들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세대를 위한 것이고 어떤 것들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세대를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112가지 방편 모두
가 나에게 맞지 않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이 112가지 방편들은 인간 마음의 모든 형태들이 다 고려되어 있다.
이 112가지 방편들 가운데는 지금 시대의 사람들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도 있다.
그런가 하면 아직 한번도 사용되어 본 적이 없는 방편도 있다. 그것은 미래의
어느 때쯤 나타날 인간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걱정하지 마라. 그대에게 맞는 방편은 결코 적지 않다.
단지 그대가 아직 찾아내지 못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