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 후
전
오상진이 배현진 아나한테 아나계의 유재석이라함 ㅋㅋ
사진을 본 누리꾼들은 "불가능은 없다", "화장술의 위대함", "거짓말이야 아무리봐도 거짓말이야"라는 등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中 눈화장 前後 비교 화제 ‘화장을 해야 하는 이유’
중국의 한 누리꾼은 지난 21일(현지시각) 자신의 마이크로 블로그에 눈 화장 전과 후를 비교해 놓은 영상을 캡쳐해 게재하였다. 이에 수많은 누리꾼들은 이 사진을 자신들의 마이크로 블로그에 옮겨 게재하며 뜨거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게재된 사진 속에는 한 여성이 한쪽 눈에만 화장을 한 상태로 화장을 하지 않은 눈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눈 화장(메이크업)도 예술? - 아래 사진들은 해외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아름다운 눈 화장(eye makeup) 모습이다.
그녀가 눈을 감으면 판타지 세상이 열린다. 눈꺼풀 위에 우주의 장관이 펼쳐지고 애니메이션 ‘라이언 킹’의 스토리가 요약되어 나타난다. 또 ‘크리스마스의 악몽’과 ‘백설공주’와 ‘알라딘’의 세계도 모습을 드러낸다. 눈 화장의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는데, 이 화장 기법은 ‘아이 세도우 파노라마 아트’라 불린다. 작품을 만드는 이는 캐나다에 거주하는 21살 아티스트 케이티 앨비스(Katie Alves).
(katiealves.deviantart.com)
마이클잭슨
스칼렛 요한슨
아드리아나 리마
안젤리나 졸리
저스틴비버
조니뎁
케이티 페리
크리스 브라운
킴 카다시안
테일러 스위프트
쌩얼
[서울종합예술학교] 서양 메이크업의 역사 - http://blog.naver.com/sac_art/60059595459
서양 고대에 있어서 메이크업은 장례식, 종교 의식 등의 주술적인 제전의식, 각종 축제 및 다양한 연극 등에서 상징적인 의미로 이용되었다.
이집트의 화장은 제사장이 시체나 산사람에게 향유를 뿌리거나, 미라(mummy)를 보존하기 위해 방부제나 연고 등을 바른데서 유래되었다. 또한 절대왕권을 지닌 강력한 계급 사회로 신분에 따라 의복, 가발, 화장 등 장식의 차이가 있었으며, 뜨거운 햇빛으로부터 노출된 신체를 보호하고 장식하기 위해 장신구나 화장이 발달하였다. 초기에는 강한 자연(햇빛, 바람, 모래, 곤충 등)이나 더위를 피하기 위해 신분에 관계없이 보편화된 화장을 하였으나, 강력한 계급사회로 변화하면서 화장은 신분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특히 고대 이집트의 눈 화장은 독특한데 주술적인 의미와 함께 자연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 눈을 치장하던 것이,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이들은 공작석(malachite) 가루를 이용하여 눈의 테를 그리고, 코올(kohl)(화장먹)을 이용하여 아이라인을 그려 눈을 강조하였으며, 눈꼬리 부분은 길게 연장하여 물고기 꼬리 모양으로 그렸다. 눈썹 역시 코올로 굵고 짙게 그려 강조를 하였으며, 바깥쪽으로 길게 연장하였다. 입술은 붉게 나타내었으며, 손발 및 손발톱 등은 헤나(hena)를 이용하여 물들이기도 하였다.
여러 종족으로 이루어진 그리스는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와 함께 뛰어난 예술적 감각으로 자신들의 문화를 이루었다. 이러한 그들 고유의 문화에 이집트의 영향을 더한 그리스 문화는 직간접적으로 서양 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별한 화장법이 없었던 고대 그리스의 화장 문화 역시 이집트의 영향을 받았으며, 일반 여성들은 기본적인 간단한 화장을 하였으나 헤타이라(hetaira)(직업 접대부)들은 전신(유두, 엉덩이 등) 화장과 함께 강한 색조 화장을 즐겼다. 또한 그리스인들은 하얀 피부를 좋아했기 때문에 얼굴에 백납 분을 발라 하얗게 표현하였으며, 입술은 붉게 표현하고 블러셔는 생기 있게 표현하였다. 또한 눈썹은 미간 사이를 좁게 그리고, 긴 아치형으로 그렸다. 그리스 시대는 화장(화장술, 화장품)에 관한 연구가 과학적이고 의학적인 관점에서 연구된 시기였으며, 초기 헤타이라 중심의 화장은 후기 그리스시대에 접어들면서 상류층 여성을 중심으로 차츰 일반화되었다.
전쟁이나 무역 등으로 주변국들과 교류가 많았던 고대 로마는, 합리적이고 실질적인 사고방식으로 여러 문화를 수용하여, 각종 문화가 어우러진 복합적인 문화를 형성하였다.
BC 3세기경 남이탈리아를 정복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로마의 화장술은, BC 1세기 이후 주변국들의 다양한 화장품이 유입되면서 매우 발달하게 되었으며, 의사 가렌(Garen, AD130-200)은 콜드크림의 원형인 시원해지는 연고(creatum refrigerans)를 제조하였다.
로마의 화장 기법은 그리스와 비슷하였는데, 로마인들은 매끄러운 피부를 위해 밀기울이나 당나귀 오일 등으로 목욕하거나, 흰 피부를 위해 백납 분을 바르기도 하였다. 눈과 눈썹을 강조하기 위해 검정 코올을 사용하였으며, 뺨과 입술을 붉게 표현하였다. 로마의 상류층은 목욕(온수, 냉수, 약수 등)을 즐겼으며, 마사지와 피부손질 등 건강과 치장(의상, 헤어, 매니큐어, 페디큐어 등)을 위해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였다.
중세는 서로마 제국의 몰락(395경)에서 부터 15세기 초까지의 시기이다. 봉건사회이자 기독교가 생활의 중심이 된 중세 시대에는 종교적인 이념으로 인해 문화 및 예술 등은 암흑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여성의 지나친 몸치장과 화장은 죄악시되어 금기화 되었으며 순결과 정숙을 강요당했는데, 이러한 현상은 주변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간혹 화장을 하는 경우에도 눈썹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하얗게 하고, 볼을 약간 발갛게 표현하는 정도의 매우 단순하고 간단한 화장을 하였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여성을 유혹과 죄악의 화신으로 여겨, 여성이 치장이나 화장하는 것을 금지시킴으로써 여성의 생활은 화려하지가 못했다. 그 후 중세 말에 무역이 활성화되고 생활이 윤택함에 따라 여성들의 화장법이 조금은 나아졌다. 당시의 여성들은 넓은 이마, 하얀 피부, 아치형의 눈썹, 붉은 입술, 하얀 치아, 다갈색의 헤어 및 깔끔한 손을 선호하였다.
르네상스 시대는 문화의 재생 및 부흥을 뜻하는 시대로, 문화가 교회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옮아가고 여성의 사회적인 입장 역시 중세에 비해 향상된 시기였으며, 새로운 부르주아 계층인 상인이 귀족계급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여성들은 기독교의 억압에서 벗어나 화장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의 여성들은 창백하고 하얀 피부를 위해 백납 분을 사용하였으며, 넓은 이마를 표현하기 위해 머리선(hair line)을 면도하기도 하였다. 눈썹은 가늘게 그리고, 아이라인 역시 눈에 띄지 않게 가늘게 그렸으며, 전체적으로 밝고 부드러운 색조를 사용하였으며, 둥글고 큰 눈과 가는 허리 및 금발의 헤어를 선호하였다.
그러나 수은과 납이 함유된 분을 과다하게 사용함으로써 피부가 많이 훼손되었다.
17세기 초에는 시골 여성을 제외하고 대도시에 거주하는 여성에게 있어 화장은 매우 일반화 되었다.
바로크 양식은 16세기말경 이탈리아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유럽에서는 17세기에 활성화 되었다. 이 시대의 특징은 양식적인 면에서 복합적이며 반항적인 면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감각적인 면을 부추겨서 감정적인 상태를 나타내려는 욕구가 극적인 표현으로 나타난다. 이 시대의 사치스런 문화로 인해 귀족들과 여성들은 과도한 장식과 화장을 하게 된다. 남자들도 긴 곱슬머리 스타일을 위해 머리를 길렀으며, 귀족 남성들도 화려한 의상과 함께 위엄있고 다양한 형태의 흰 가발을 착용하였다. 여성들에게 있어서는 루이 14세 때 우아하고 기교적인 머리 형태인 퐁땅쥬(fontanges)(레이스를 주름잡아 부채처럼 높이 올린 머리 모양)가 유행을 하였다. 여성들은 피부에 백납 분을 발라 희게 표현하였으며, 홍조를 띈 뺨, 장미같은 입술, 통통한 외모, 긴 웨이브 머리 및 애교점(beauty spot) 등을 선호하였다.
특히 패치(patch), 무슈(mouche) 등으로 불렸던 애교점은, 원래는 얼굴 흉터나 여드름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후 이성을 유혹하는 목적으로도 사용되었는데, 지위고하 및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널리 유행되었다. 애교점은 별, 다이아몬드, 초승달 등의 모양으로 이마에 붙여 위엄을 나타내거나, 눈가에 붙여 정렬을 나타내거나, 입가에 붙여 요염함을 나타내었다. 또한 가면이 유행하였는데 피부가 햇볕에 그을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 혹은 사람을 만나거나 외출 시 얼굴 결점(흉터, 천연두 자국 등)을 가리기 위해 사용되었다.
로코코 양식은 18세기 초 파리에서 시작되었는데, 우아하고 여성적이며 인공적인 느낌의 곡선을 의미하였다.
이 시기 역시 하얀 피부를 위해 희고 두꺼운 화장을 하였으며, 통통한 외모, 넓은 이마, 깔끔하고 가는 눈썹, 장미 같은 입술, 붉고 둥근 볼 화장을 선호하였다. 당시 예의 규범이었던 인형 같은 얼굴을 위해, 막 유년기를 지난 얼굴에도 화장을 하였으며, 피로로 인한 창백함을 없애기 위해 붉은 볼 화장을 하였다. 헤어스타일에 있어 바로크 시대에 유행하던 퐁땅쥬(fontanges)가 깔끔하고 낮은 머리 모양으로 대처되었으며, 남자 가발 역시 대형가발에서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18세기 후반 프랑스 대혁명 이후 진한 볼 화장은 줄어들었으며, 영국에서는 시민혁명 이후 청도교도적인 생활로 진한 화장은 사라지게 된다. 이후로는 화장하지 않은 얼굴, 자연스런 머리 등이 유행하여 자연스러움을 표현하게 되었다.
로코코 시대의 자연스러운 화장법은 19세기까지 이어져서, 흰 피부, 자연스런 눈 화장, 연한 볼 화장, 자연스런 헤어스타일과 같은 연하고 자연스런 화장법이 실시되었다. 이 시대에 진한 입술과 볼 화장은 부도덕하게 여겨졌으며, 유행 또한 자연스러움을 추구하여 두껍고 진한 화장은 무대화장에 한정되었다.
하지만 1860년 품질이 향상된 화장품의 보급 등으로 메이크업용품의 일대 혁신을 불러 일으켰으며, 진한 입술, 붉은 볼 화장, 선명한 아이라인 및 인조속눈썹 등이 등장하게 되었다. 19세기 말 이후에는 크림 루주와 색조를 사용한 화장은 더욱 일반화되었다.
최초의 무대 메이크업으로는 BC 6세기에 아테네에서 활동한 그리스의 시인 테스피스(Thespis)가 연극에서 백연(white lead)이나 진사(cinnabar-진홍색의 광석) 등의 재료를 사용한 것을 시초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 당시 규모가 큰 연극에서는 가면(mask-삼베에 진흙을 발라서 굳힌 가면 또는 목제 가면)을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특수한 역에 한해서 부분적인 메이크업이 행하여졌기 때문에 메이크업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는 못하였다.
당시의 가면은 손쉽게 일인다역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실물보다 컸기 때문에 대형극장에서 배우를 더욱 돋보이게 했었다. 그러나 그리스 로마 시대에 흥행하였던 가면극이 쇠퇴하고 무대가 옥외에서 옥내로 옮겨지면서 메이크업의 필요성이 점차 대두하게 되었을 것이다.
17세기 이후에는 조명으로 양초나 석유램프 같은 사용되었으나, 극장 내부가 대체적으로 어두워 메이크업이 조잡하더라도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18세기에 들어 배우들은 그 당시 상류 여성사회에서 유행하였던 창백한 얼굴 표현을 위해 납분(leaded powder)을 바르고 입술에는 붉은색 황화수은을 사용하였다.
1816년 스코틀랜드의 드루먼드(Thomas Drum-mond)에 의해 백열 칼슘 등(燈)인 라임라이트(lime light)가 발명되어 1837년 처음으로 극장에서 사용된 이후 1860년대에 널리 사용되었으며, 19세기 후반에 실용적인 백열등이 발명되어 무대조명으로 사용되면서 배우들은 보다 나은 메이크업 재료와 메이크업 기법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밝은 조명 아래에서는 조잡한 메이크업이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기에 나타난 사실주의(realism)는 실제 생활을 좀 더 충실하게 묘사하려는 경향으로 이는 희곡작품과 공연에서도 적용되었는데, 이에 따라 여러 메이크업 재료의 연구․개발과 함께 보다 정교한 메이크업 기법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 당시 유럽에는 물에다 개어서 사용하는 몇 가지 건조물감이 사용되고 있었는데, 1860년경에 독일의 오페라 가수 루트비히 라이히너(L. Leichner)에 의해 도란(Dohran)이라는 화장용 유제(油制)인 그리스페인트(grease paint)가 발명되어 메이크업용품의 일대 혁신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에 따라 다양하고 사실적인 표현들이 가능하게 되었다.
화장의 어원과 기원 - http://history.wonkwang.ac.kr/school/west/late/late9.htm
영어 COSMETICS는 희랍어 KOSMETIKOS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KOSMETIKOS는 KOSMOS에서 생겨났다. 영어 COSMOS 도 KOSMOS에서 온 것이다. 영어 COSMOS는 단순히 우주라는 뜻이지만 희랍어 KOSMOS는 「THE ORDER OFUNIVERSE」(우주의 명령)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KOSMETIKOS(화장)는 KOSMOS(우주)의 명령을 받아 아름다운 것(여자)을 더욱 아름답게 가꾸어 보기 좋게 하는 기술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대 희랍에서 우주는 곧 신을 말하는 것으로 여자를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 낸 신은 그 아름다운 여자에게 신 자신이 만들었을 때보다 더욱 아름답게 다듬고 가꾸어서 보여 달라는 신성하고 엄숙한 명령을 내렸다. 신의 엄숙한 명령을 받은 여자는 남자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신에게 보여 드려야하는 신실한 마음으로 자신을 갈고 닦는 신성한 의식을 통해 자신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서양 민족은 "화장은 곧 의식"이라 불렀고 온갖 정성과 정열을 기울여 시간을 아끼지 않고 몰두하고 숭배의 경지에까지 이르는 여자만의 신앙의식으로 치루는 것이다. 한편 인간이 지구상에 나타난 이후 처음으로 EGUPT(에급), SUMER(수메르)인은 그들이 숭배하는 신의 제단에 가기위한 청결의식으로 얼굴에 채색을 하고 향수를 뿌렸다. 그리고 인류문명의 4대 발상지인 EGYPT의 나일강, 티그리스와 메소포타미아강, 인도의 인더스강, 중국의 황하강유역에서 발굴된 유적에서 나타난 화장의 흔적은 종교의식으로서의 화장이 얼마나 신성한 것이었는가를 잘 설명하고 있다.
1) 화장품의 역사
화장과 CLEOPATRA(클레오파트라)
인류최초의 화장은 BC 7,500년 EGYPT에서 시작, 발전되어 EGYPT왕조의 마지막여왕CLEOPATRA의 손에서 집대성 된 것이 4천년이 지난 20세기 말까지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 EGYPT에서는 태양신에게 향수를 바쳐 죽은자의 영혼을 위로하고 영원불멸하기를 빌었으며 EGYPT의 여인은 EYE-LINE을 칠하고 다녔다. 화장의 의미보다는 눈부신 태양빛 아래서 사물을 제대로 보기위한 생리적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뜨거운 사막바람으로부터 피부의 건조를 막아내기 위하여 사막개미의 알을 모아 녹여서 크림을 만들어 썼다. 또한 이 당시 MANICURE의 색깔은 계급의 표시로 왕족은 진빨강, 신분이 내려갈수록 색깔이 엷어졌다. 평민은 색깔칠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투명 랙커만 칠했다. 특히 CLEOPATRA의 화려한 MAKEUP은 새로운 화장품의 개발로서만 가능했다. 그녀의 MAKEUP은 단순히 「바르는 기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7,500년간 발전되고 축적된 EGYPT의 화장품을 체계화하고 세분화한 것이다. 그녀가 쓰던 화장품의 원료중 많은 성분이 21세기인 지금도 무독성분과 무공해적인 요소로 화장품 제조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또한 HAIR STYLE을 다양화하기 위해 가발이 발달하였으며 다양하고 화려한 가발을 만들기 위해 염색기술이 발달했고 비듬약까지 사용했다. SKIN CARE, ACCESSORY, MAKEUP, BODY CARE, NAIL CARE, HAIR CARE, PERFUME 등 CLEOPATRA는 20세기 말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 완벽한 화장법을 썼던 것이다.
2) 화운데이션(FOUNDATION)의 역사
15세기에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꽃피우면서 다른 예술과 함께 발레도 시작되었다. 히랍시대 이후 유럽 각국에서 계속 발전해온 연극과 함께 미술, 조각, 음악이 이탈리아에서 성장한 것과는 달리 발레는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왕 앙리2세에게 시집간 피렌체의 금융명문가 메디치의 카타리나가 데리고 간 음악가 보주아외가 작곡한 발레곡이 1581년 프랑스 왕국에서 처음 발표된 이래 프랑스 파리가 세계발레의 중심지가 된다. 그리고 연극, 오페라, 발레의 화려한 무대예술은 의상과 분장술, 화장품을 함께 발전시켰다. 출연배우들의 BASE-MAKEUP(밑화장)으로 사용되는 GREASE-PAINT는 독일산이 가장 우수해 상표였던 DOHRAN(도란)이 GREASE-PAINT의 대명사로 통했다. 이것이 FOUNDATION의 시작이다. 그 후 FOUNDATION이 유럽대륙을 건너 미국에 제대로 알려진 것은 헐리우드 불세출의 분장사 맥스팩터(MAX FACTOR)를 통해서였다. 러시아 왕립 오페라단의 분장사였던 맥스팩터가 새로운 꿈을 찾아 신천지 미국에 발을 디딘 것이 1904년, 고생 끝에 1908년 헐리우드 영화계에 분장사로 자리를 잡았다. 맥스팩터는 미국영화계에서 새로운 분장 기술로 명성을 얻었으며 헐리우드에 화장품 회사를 차리고 1936년 GREAFE-PAINT를 개량한 PANCAKE MAKEUP(팬케잌 메이크업)으로 특허를 얻었고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1960년대부터 리퀴드 화운데이션(액체 타입)이 나와 선풍적 인기를 끌고 가장 많이 애용되고 있다.
3) 파우더(POWDER)의 역사
FACE POWDER는 고대 이집트에서 시작된 EYE-MAKEUP과 함께 가장 오래된 화장품이다. 열대기후와 사막이라는 환경으로 이집트에서는 뜨거운 태양빛과 사막의 열풍을 막아내기 위해 EYE-MAKEUP과 OIL을 사용한 CREAM과 기름연고가 발달했고 POWDER에 대한 흔적은 별로 없는 편이다.
POWER가 역사에 기록된 것은 고대 희랍이 처음이다. 기후적으로 온난한 지방인 희랍은 이집트처럼 햇빛이 강렬하지 않아 몸에 기름칠을 하는 것보다는 MAKE-UP과 향수가 발달했다. 열대지방에서는 OIL을 사용하는 화장품이, 온대지방에서는 MAKE-UP과 분(粉)이 발달한 것은 동서양이 마찬가지였다.
고대희랍의 황금기였던 기원전 4세기에는 아테네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장밋빛과 하얀색으로 화장했었다고 기록했다. 기록의 장미빛은 연지(ROUGE를 말한다.)와 하얀색은 납(LEAD)으로 만든 분이었다. 납 성분의 POWDER는 고대희랍시대 이후 1633년 이탈리아정부가 납성분의 POWDER 사용 금지령을 내릴 때 까지 무려 2천년동안 아름답고 싶어하는 수많은 여성의 목숨을 앗아가는 "죽음에 이르는 환상의 도구" 였다.
1625년 마침내 이태리에서 엄청난 화장품사건이 터졌다. 시그노라 토파나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여성이 비상(砒霜?ARSENIC)으로 만든 아쿠아 토파나(AQUA TOFFANA)화장수를 팔았다. 이 화장수는 얼굴을 하얗게 하는 화장수이기도 했지만 독약이기도 했다. 화장수를 살 때 독약이 될 수도 있다는 설명을 들은 여성들은 남편을 살해하는데 이것을 사용했다. 무려 6백여명의 남편이 독살당한 것이 밝혀졌고 시그노라 토파나는 1633년 교수형에 처해졌고 이탈리아정부는 독약성분이 든 화장품의 판매금지를 포고했다. 이 사건이후 프랑스에서 활석(TALC)을 사용한 FRENCH POWDER가 등장했고 이어 진주조개가루 성분의 PEARL POWDER, 쌀가루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석회성분 (VENETIAN CHALK)등이 잇따라 만들어져 여성들을 "죽음의 공포"에서 비로소 해방시켰다. 한편 동양에서는 기원전 1100년 경에 중국에 세워진 주(周)나라 때 이미 거울을 사용한 기록으로 보아 화장품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은 온대지방으로 농작물이 풍부한 지역으로 그들은 쌀 가루분을 사용했다. 14세기 이후 중국의 쌀가루는 유럽으로 수출되어 귀족층의 머리장식용 HAIR POWDER로 사용되었다. 납가루분의 해독이 밝혀지면서 쌀가루는 분으로 대용되었고 프랑스에서는 쌀가루가 분의 대명사가 되었다.
4) 립스틱(LIPSTICK)의 역사
LIPSTICK 은 20세기에 만들어진 신종단어다. 5천년 동안, 입술에 바르는 화장품은 볼과 입술에 바르는 다용도 ROUGE(연지)였다. 볼연지(CHEEK ROUGE)와 입술연지(LIP ROUGE)로 구별해서 부르기도 한다. 프랑스어로 "빨간"이라는 뜻의 형용사 루즈(ROUGE)가 명사화되어 된 것이다. ROUGE가 처음 사용된 것은 5천년 전 고대 이집트의 제3왕조 조세르(DJOSER)왕 때로 확인되었다. 조세르왕은 이집트 최초의 피라미드를 건축한 왕으로 유명한데 1926년 영국의 고고학자 세실 1세가 왕의 무덤인 계단식 피라미드를 발굴할 때 왕비가 썼던 ROUGE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세계 최고(最古)의 ROUGE로 기록되었다. 1915년 모리스 레비(MAURICE LEVY)가 지금 사용하는 LIPSTICK의 원형인 금속통속에 든 간편한 막대형(STICK)을 발명, 이름도 비로소 ROUGE에서 LIPSTICK으로 바뀌었다. 신형 LIPSTICK은 사용과 휴대가 편리해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잘 지워져 KISS할 때 남자 입술에 자국을 남기고 그릇에 묻어나는 것은 해결하지 못했다. 뒤이어 메이블린(MAYBELLINE)이 KISSPROOF(KISS해도 묻어나지 않는) LIPSTICK을 발매, 오히려 여성들보다 남성들의 환호를 받았다.
오늘의 LIPSTICK형태가 갖춰진 것이다.
저는 남성 치곤 피부가 약한 편입니다. 남성용 토너를 쓰질 못합니다.
민감 반응이 나타나기 때문이죠. 사회에 첫발을 내딛고 그해 봄, 거금들여 샀던 것이
갤랑 시리즈 화장품이었습니다. 남성용을 쓰면 항상 피부가 화끈거렸던 터라
여기서 나온 건 제 피부타입에 맞더라구요.
오늘은 미술사를 통해 메이크업의 역사를 한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중세에서 현대까지 다 다루려고 했으나 한번의 포스팅으론
불가능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용이 원체 방대하고, 이번에 책을 쓰면서
공부한 부분을 나누려고 하니, 그 깊이가 만만치 않습니다. 우선은 중세에서 르네상스
바로크와 로코코, 빅토리아 시대와 낭만주의, 인상주의 시대의 그림을 통해
메이크업의 전체적인 방향들과 그 변화를 간략하게 살펴볼까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담비를 안은 여인의 초상>
나무 패널, 54*39cm, Czartoryski Museum, 폴란드
화장의 역사레응 한 가지 결코 변하지 않는 흐름이 존재합니다.
바로 하얀 얼굴에 대한 집착이죠. 창백한 안색에 대한 열광은 고대나 지금이나
동일해서, 마치 암을 피하듯 햇빛을 피하고 다녔습니다. 고대에도 납과 수은을 섞은 회반죽을 바르거나
돼지 가죽을 얼굴에 붙이고 잠자리에 들었답니다. 고대 이집트에선 눈병을 방지하기 위해
아이섀도를 썼고, 터키석과 옥, 테라코타와 같은 돌을 빻아 만든 분을 발랐다고 합니다.
특히 가냘픈 겉모습과 함께 명문가의 자손임을
표시하기 위해 관자놀이와 목, 드러낸 가슴, 어깨 부분의 혈맥을 파란색으로 두드러 지게 하는
화장술이 발달합니다. 흔히 영어에 Blue Blood(푸른피-귀족가문을 의미)이란 용법은 바로 이런
역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요.
브론치노 <루크레치아 부인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우피찌 미술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 브론치노가 그린 매디치 가문의 여인들은 당시
여성들의 화장법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중세부터 르네상스까지 여성들은 물고기 눈처럼
약간 튀어나온 둥근 눈을 선호해서 눈화장을 하지 않았다고 해요.
그리고 속눈썹와 이마의 털 모두 깨끗하게 밀었고요.
이 때도 깨끗한 피부를 갖기 위한 유사과학이 판을 쳤습니다. 가령 주근깨를 처리하기 위해
우유에 살무사를 으깨넣고 황산염을 첨가해 만든 로션을 발랐고요.
특히 르네상스는 모발용 화장품이 성장했던 시대입니다. 포도주에 진주가루를 섞어 린스로 사용했고
고기비계를 잘게 갈아 만든 피부 유연 크림, 보리를 비장과 혼합해 만든 팩을 이용했죠.
안톤 반 다이크 <헨리에타 여왕의 초상> 1640년, 캔버스에 유채, 빈 역사박물관
르네상스를 넘어 17세기 바로크 시대로 가면 개인주의와 향락주의에 빠져
상류층의 남성 여성 모두 과도한 장식과 메이크업이 유행합니다. 어느 시대보다 진한 메이크업을 해서
마치 백랍으로 만든 인형처럼 보였고, 눈썹화장은 밝게 강조하고 빰 위치보다 약간 낮은 곳에
붉은 연지를 칠하거나 장식종이를 얼굴에 붙이고 다녔습니다.
흔히 패치라고 불리는 이것은 연애를 하거나 은밀한 대화수단으로 사용되었다고 하죠.
프랑스와 부셰 <마담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뮌헨 피나코테카
바로크를 이어, 여성성의 시대 로코코에 접어들면서
여성의 화려함은 그 정점에 달합니다. 이 당시 여성들은 로코코의 거장
부셰가 그린 마담 퐁파두르를 따라잡기 위해, 그녀의 머리 스타일을 따라하거나 머리에
꽃과 깃털을 달아 장식했죠. 이 당시에도 외모는 무기였으며, 납과 수은이 첨가된 화장품을 제한없이
사용했습니다. 이때는 볼록한 빰을 만드는 것이 유행이어서 호두를 입에 물고 다니기도 했다네요.
로코코 시대 초기에는 붉은 색조의 화장이 유행을 했으나 후기로 접어들면서
매춘부의 빛깔이라 해, 붉은색을 피했다고 합니다.
알렉상드르 카바넬 <케슬러 부인의 초상> 1873년 99*76cm, 캔버스에 유채
오르세 미술관, 파리
연지벌레나 백단나무에 비계를 섞어 연지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볼과 입술을 강조하는 연지는 색조화장의 핵심이었죠.
당연히 연지의 지속성이 화장품의 품질을 나타내는 중요한 기준이었는데요.
프랑스 아카데미 화가였던 카바넬의 작품 속 케슬러 백작부인의 초상에는
이런 색조화장의 형태가 잘 녹아 있습니다. 이 당시 여인들은 하얀 피부를 갖기 위해
송아지 육수에 세수를 하거나, 백합꽃을 증류해 만든 수렴 화장수를 발랐습니다.
문제는 이 당시 유독성 금속 산화물이 섞인 화장품 사용으로, 피부가 더욱 손상되었고
악화되는 피부를 가리기 위해 더욱 다양한 종류의 연지를 발랐다는 점이죠
산책할때는 양홍색, 촛불 아래선 주홍색 연지 이런 식이었다네요.
특이한 사실은 이 당시의 여인들은 다크 서클을 일부러 만들려고
밤늦게 까지 책을 읽었고, 동공을 확대시키기 위해 풀에서 추출한 독액을 눈에 안약처럼 넣었다고 해요
그러면 마치 서클렌즈를 낀 듯한 느낌이 났다고 하죠. 대단합니다.
크사버 빈터할터 <외제니 공주와 친구들> 캔버스에 유채, 캔버스에 유채
샤토 콩파뉴 소장
오스트리아의 궁정화가였던 빈터할터는 당시 패션 리더였던 외제니 공주를
그림 속 모델로 썼습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로 패션은 간소화의 길을 걸었지만
후에 잠시 공화정이 복구되면서 로맨틱 스타일의 유행이 돌아왔지요.
19세기 중반에 들어오면서 드디어 비누가 개발되었고, 햇빛에 타지 않기 위해 얇은 베일을 쓰고
다녔습니다. 미용 팩과 필링도 이때 유행했고요. 꿀에 계란 흰자를 섞어 얼굴 마스크를 했고
올리브 오일에 오트밀을 섞어서 로션으로 사용했다고 하네요. (지금과 별 차이 없지요?)
툴루즈 로트렉 <화장대 앞의 여인> 1889년,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인상주의 화가 로트렉은 여인들의 화장하는 모습을 자주 담았습니다.
화장대에 앉아 눈썹 화장을 하는 여인의 모습이 보입니다.
이때는 인조 속눈썹이 본격적으로 시장에 출시되었고, 아이라인을 강조하는 화장법이
대대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해요.
프란시스코 그라스 <립스틱 바르는 여자> 1910년경, 개인소장, 종이에 파스텔
스페인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인 프란시스고 그라스의
그림 속 여인의 모습이 보입니다. 당시 밝은 색이 인기를 끌면서 핑크와 붉은 입술 메이크업이
유행했고, 눈썹과 눈 사이에 황색분을 발라 동양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일종의 트렌드였다고 하네요. 인상주의에 영향을 받은 화가의 작품이라 그런지
빛의 사용과 더불어 색감에도 화사한 느낌이 가득 배있습니다.
한국화장의 역사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tubetint&logNo=20104638197
북방에 거주했던 읍루인들이 겨울에 동상예방을 목적으로 돼지 기름을 바른것이 화장의 시초.
돼지기름은 해그을음.눈그을음의 예방및 피부의 연화작용이 뛰어나 유럽에서도 크림의 원료로 오랜 기간 이용되었다.
남방에 거주한 변한인들은 원시치장의 일환으로 문신을 하고 조개껍데기등의 장신구로 치장을 했다.
인간이 되고자 했던 곰과 호랑이는 쑥과 마늘을 먹었는데 쑥과 마늘은 미백효과가 우수한 미용재료임을 감안한다면 흰피부의 인간이 되고자 하는 주술적 의미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삼국시대의 화장은 벽화등에서 보면 시녀들이 머리를 곱게 빗고 눈썹을 짧고 뭉툭하게 다듬고 볼에 연지 화장을 하고 있다.
무인들도 머리카락을 뒤로 틀고 연지를 이마에 바르고 금으로 머리를 꾸민 흔적이 보인다.
백제인들은 엷은 화장을 해 고도의 화장기술을 표현했다는 추측도 나돌고 일본인들이 백제의
이러한 화장법을 배워갔다는 기록도 있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보다 화장은 늦게 시작했으나 기술은 더 뛰어났다고 한다.
화랑들은 여성들 못지 않은 화장을 하고 치장을 했으며 잇꽃으로 연지를 만들어 이마와
뺨 입술에 바르고 백분으로 색을 만들어 사용하고 다녔다고 한다.
7세기경에 이미 연분을 만들었다는 것은 세계에서도 유례없는 대 발명이었다.
4~6세기경 불교가 전래되고 신봉됨으로써 청정과 청결이 강조되고 목욕이 대중화 되었다.
서민들은 팥.녹두등 콩을 이용해 비누로 사용했고 그로인한 날비린내는 향수.향료를 만들어 대신하기도 하였다.
불교 화장의 영향으로 엷고 평면화장에 그치기는 하였으나 여러 가지 관심이 많았다는 증거는 많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화장품기술을 일본과 중국에 전할정도로 발달했고 화장술 또한 수준에 도달했었다.
화장뿐 아니라 모든 생활이 사치풍조였다.
짙은 화장은 즐기지 않았으나 버드나무 같이 가늘고 아름다운 눈썹을 그렸고 비단 향료 주머니를 차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 시대 초의 기생들은 반질거리는 머리.
짙은 눈썹과 연지화장외에 백분을 많이 펴바른 짙은 분대화장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여염집 여성들은 엷은 화장을 고수하고 기생의 분대화장을 경멸하는 풍조가 생겨 나기도 했다.
고려인들은 향을 애용하고 먹기까지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전기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강조하여 화장이 부덕한 행위로 간주되기 조차 하였다.
그러나 화장품 생산이 위축되거나 소홀했던 것이 아닌 오히려 화장개념이 세분화되고 고급스럽게 변모하였다.
여염집 여성들의 일상화장과 기생,궁녀등 특수층 여성의 의식화장이 구분이 되고
특별한 날의 화장법도 차별화가 되어 있었다.
이당시 미인의 기준은 옥같이 흰 살결,가늘고 수나비가 앉은듯한 눈썹.복숭아빛 뺨.앵도같이 붉은 입술.
구름을 연상하는 머리.가는허리를 소유한 팔등신 미인을 으뜸으로 여기고
며느리나 아내로는 건강하고 성격이 원만하며 성실한 여성을 추구 하였다.
미인박명이나 현모양처 개념이 이때 형성된 개념이 아닐지 싶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다른분야와 마찬가지로 산업화가 늦어져 외국의 화장품 기술에 비해 뒤떨어졌다.
1922년 최초로 출범한 박가성씨를 가진 사람이 만들었다는 박가분의 경우
하루에 5만갑이나 팔렸다고 하지만 생산방식이 재래식에 머물고 납성분의 부작용으로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이무렵 비공식 경로를 통해 수입되었던 백분은 납부작용이 적어 국산품과 좋은 대조를 이루었고
그결과 국산화장품에 대한 불신감을 낳기도 하였다.
외제 화장품과 더불어 입체 화장법이 도입되어 반향이 컸는데
신여성과 기생을 중심으로 신식화장이 보급되어 다소 문제가 되기도 했다.
즉 신식 문명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의 마찰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개화기 이후의 화장은 신식 화장품이 물밀듯 밀려 들어왔다.
처음에는 일본과 청나라부터 유입되었던 것이 한일합방이후 1920년대에는 프랑스를 주로 한 유럽까지 확대되었다.
크림.백분,비누.향수등의 수입 화장품은 포장과 품질이 우수하여 여성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후 일본 유학생 오엽주가 종로 화신 백화점에 처음으로 미장원을 개업하고
새로운 메이크업 테크닠과 바니싱 크림등 신식 화장품을 소개 하였다.
또 그는 입술 연지를 아랫입술에만 빨갛게 바르고 눈썹을 초승달 모양으로 그리는 화장법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1945년 8.15 해방을 계기로 우리나라의 화장품 산업은 일시적으로 퇴보를 보였고
1960년대 들어서야 다시 국산 화장품 생산이 본격화되고 메이크업 테크닉도 변화가 일어났다.
박가분같은 백분의 소비는 줄어들고 액상색분 즉 화운데이션의 수요가 급증하였다.
입술 연지는 고형의 스틱타입으로 바뀌고 아이새도가 등장해 색채 화장법이 시작되었다.
부자연스러운 하얀분 화장에서 자연스런 피부표현으로 바뀌고 기초화장을 중심으로 한 피부 표현에 중점을 두어 수정화장이 더해져 세련된 느낌을 주었으나 인조 속눈썹의 사용으로 인위적인 느낌을 많이 주었다..
1970년대에는 화장품 회사의 주도하에 색채화장이 활성화 되고 입체 화장이 생활화 되었다.
샴푸.바디제품.팩제품등 화장품 시장의 급성장의식에 맞추어 화장하는 토털코디네이션이란
말이 등장하였고 이 시기부터는 의상의 유행이 화장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고 반영되기 시작했다.
복고풍의 의복이 유행하면서 화장도 올리브그린.크림베이지.브라운.오렌지.블루.핑크등
지금과 많이 다르지 않지만 현란한 컬러 위주의 화장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화장품업계 광고의 영향으로 계절별로,또는 tpo에 맞게 중점을 둔 화장법이 정착되었다.
1980년대에는 컬러 tv의 방영으로 색채에 대한 수요와 관심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화장품 수입 자유화가 되면서 선진국의 다양한 색채화장품 수입으로 소비자가
자신의 개성과 라이프 스타일에 맞추어 선택하는 지적 소비자 시대가 되었다.
해외 동포의 귀국과 교류도 빈번하여 한국에도 유입되어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외국 스타들의 화장을 따라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브룩쉴즈같이 자연적은 굵은 눈썹을 모방하기도 하였고
자신감있고 활동적인 여성상을 표현이라도 하듯이 색조 화장은 더욱 세련되고 다양해졌으며
어울리는 색상을 찾아 노력을 한 흔적이 다분히 느껴졌다.
우리 나라 화장품 업계 품질이 향상되는 1986년이후로는 화장품 수입의 전면 자율화로
80년대 후반부터는 유럽의 메이크업 관련 정보가 많이 유입되어 일본보다는 유
럽의 영향을 많이 받기 시작했는데 그래서 특히 화장 스타일이 서양인의 특성을 따라
아이홀을 강조하거나 입체감을 주는 화장에 주력한 흔적이 두드러진다.
1990년대 메이크업은 유행을 창출하고 선도되는가 하면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에 따라
이성보다는 감성을 중요하게 여기고 에콜로지의 경향으로 자연과 건강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다.
베이지 오렌지.브라운 계열을 중심으로 한 자연스런 색조가 강세를 보였고
각 화장품 브랜드에선 시즌마다 컬러를 제시하여 소비자로 하여금 유행을 선도해 나가는 특이한 현상을 낳기도 했다.
각자의 개성이 강조되고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특징이 화장품 회사의 주도하에
소비자가 선택하는 시대가 시작 된 것이었다.
또한 색감이 다양해지고 90년대 후반부터 무채색 계열의 퇴폐적이고 깊이감 있는 스타일이
패션과 더불어 유행하면서 창백한 피부톤.아치형의 검은 눈썹.붉은 립스틱 메이크업도 대세를 이루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금속적인 광택과 혼합되거나 스모키한 느낌의 음침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하였다.
또한 화장 연령이 저하되어 젊은층을 대상으로 한 화장품 시장이 점차 확대되어
눈부신 발전을 이루기도 한 때이기도 하였다.
00년대 화장을 하는 것보다 지우는 것이 중요하던 시절을 넘어
화장은 안한것처럼 하고 고도의 기술을 요하며 질감과 색감의 다양성을 추구하며 눈부신 발전을 이루고 있다.
화장품 브랜드는 국내부터 외국 브랜드 기초전문 브랜드부터 색조 전문 브랜드까지 광범위하며
저가 중가 고가등 가격대별로의 다양성까지 그야말로 화장품 춘추전국시대가 아닐 수 없다.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중반까지는 국내 브랜드의 성장과외국 브랜드의 도입및 소비의 시대 였다면
90년대후반부터 00년대의 현재는 색감및 질감의 다양성.가격경쟁.유통경쟁등 치열하고
과도한 화장품 발전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제품 개발 생산 뿐 아니라 소비에 있어서도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롯데 백화점 명동점에서 판매되는 화장품들은 거의 다 세계 1위를 자랑한다고 한다.
아직 유통경로는 백화점이 지배적이고 소매점 및 인터넷은 사향화되거나 시작일 뿐이지만
아직 들어오지 않은 무수히 많은 화장품 브랜드와 잠재된 소비층은 아직도 무한하다.
특히 남성들이 화장품에 관심을 가지고 소비하고 심지어 화장법까지 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한국의 화장품 시장은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고 명성있게 발전 할 수 있을 거라 장담한다.
한국 화장품 시장 글로벌한 도약의 시작과 정점을 맞이할 때가 온 것이다.
▣ 메이크업의 역사 - http://blog.daum.net/jenny2242/11741251
화장의 기원에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꼭 인류의 역사와 함께 병립되어 왔다. 누구나 아름다워 지고자 하는 본능에서 오는 미화설과, 종족, 계급, 신분, 남녀 구별을 위해 화장을 했다는 신분 표시설,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보호설, 신에게 경배나 제사를 드리기 위해 향나무 즙으로 만든 향료로 온 몸을 발랐다는 종교설,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서 신체를 장식하거나 가꾸었다고 보는 이성 유인설 등이 유력하다고 볼 수 있다. 메이크업의 역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서양 화장 문화사】
가) 이집트
약 7천년전 제1왕조의 묘에서 지방에 향을 넣은 화장수와 화장경이 발견됨으로써 인류의 화장기원으로 추정되고 있는 이집트의 화장법은 처음에는 주로 종교의식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으나 점차 신체보호 또는 주술적 목적 외에 장식의 즐거움으로 발전했을 것이라 보고 있다.
나) 그리스․로마시대
화장품과 화장술에 대한 연구 및 처방이 이루어진 시기로 흔히 코스메틱이라는 말은 그리스어의 코스메틱코스(cosmetikos) 치장하다에서 나온 말이다. 하얀 피부를 매우 선호한 그리스 여인들은 백납성분의 안료는 얼굴에, 다홍색 안료는 입술에 상용하였으며 코에 명암을 놓고 눈화장을 적갈색과 녹색, 회색 섀도우를 사용하는 등 다양하고 발전된 형태의 화장용품과 화장술을 애용하였다. 또한 이 시대에는 남자들에게도 화장이 행해졌다.
다) 15C-16C 중세 르네상스시대
의학, 학문의 발전으로 화장․미용에 관한 학문이 의학으로부터 분리되면서 외양적인 꾸밈으로 과도하게 사용되었다. 교회의 영향을 받아 억압되었던 화장술은 11세기 몇 차례의 십자군전쟁이후 동양으로부터 전개된 화장품, 향신료로 조금씩 행해지다 14세기 중반 경 르네상스운동의 영향으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부활하게 되었다. 르네상스시대의 전성기인 16C부터 출현한 개인주의와 향락주의는 남성미와 여성미를 강조한 상류층에 의해 과도한 화장술이 사용되었다. 특히 엘리자베스 1세 때에는 화장을 하는 여왕의 영향을 받아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까지도 화장품을 사용하였으나 수은이 들어간 로션과 납과 식초를 혼합한 분 등을 사용하고 이마에 점맥을 그려 넣는 등 지나친 화장술로 피부를 심하게 훼손하기도 하였다.
라) 17C- 바로크시대,
귀족들의 끊임없는 미적 요구로 사치의 시대에 맞는 화장술이 유행하였다. 남자들도 머리를 기르고 장식하였으며 머리칼은 컬러로 염색, 포마드로 고정하고 리본, 새털 등과 함께 머리에 딱딱한 린넨(Linen)이나 레이스(Lace)를 주름잡아 철사로 쌓아올려 장식한 퐁땅쥬(Fontange)라는 기교머리가 유행하였다. 애교점이라 불리는 패치((Patch), 뷰티스폿(Beauth Spot), 무슈(Mouche)등이 출현하고, 화려한 의상에 어울리는 진한 화장을 하였다.
마) 18C- 로코코 시대
우아한 곡선을 기초로 하는 로코코양식의 영향으로 부드럽고 높이를 낮춘 퐁파두르(Pompadour)라는 머리형이 유행하였으나 1760년경에는 거대 장식의 극치를 이룰 정도로 다시 커지게 되었으며 머리에 갖가지 색의 밀가루를 부려 머리모양을 꾸몄다. 17세기와 마찬가지로 두텁게 화장하였으며 피부표현 역시 매우 희게 강조하였다.
바) 19C- 근대(부흥시기)
귀족계층을 중심으로 과도하고 인위적인 경향에서 벗어나 자연스러운 미의 강조가 전반적으로 강조되었다. 여성만의 전유물로 화장술이 자리잡고 비누의 사용이 보편화되었다. 1866년 산하아연의 발견으로 안전하고 새로운 성분의 화장품이 공급되어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으며, 진한 화장은 무대화장에 한정되었다.
사) 20C~현대
20세기초에는 19세기의 자연스러운 화장이 그대로 지속되었으며, 1차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본격적인 산업화의 기반이 대중사회를 배경으로 산업화와 도시화의 물결속에서 다양한 제품의 출현으로 다양해진 화장술은 용도와 소비양식에 따라 세분화되기 시작하였으며 대중매체의 발달로 메이크업은 패션, 뷰티, 광고, 영화, 영상, 이벤트, 문화예술 등 여러 분야에서 필요로 하는 필수 분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한국화장 문화사】
북방에 거주했던 읍루인(婁人)들이 겨울에 돼지기름을 바른 것은 동상 예방 등 피부의 연화(軟化)를 목적으로 한 것이고 (돼지기름은 동상 ·해그을음 ·눈그을음의 예방 및 피부의 연화작용이 뛰어나 유럽에서도 크림의 원료로 오랜 기간 이용하였다), 남방에 거주한 변한인(弁韓人)들이 새긴 문신(文身)도 원시치장의 한 인간이 되고자 하는 곰[熊族]과 호랑이[虎族]에게 쑥과 마늘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기휘(忌諱)하도록 한 것은 고대사회의 지배층이 흰 사람(백색피부:지금도 흰 피부인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관습이 남아 있으며, 알타이 계통의 최초 인간은 흰 사람이라는 신화가 있다)이었으므로, 흰 피부로 변신하기 위한 주술(呪術)이라 해석된다. 쑥과 마늘이 미백(美白) 효과가 우수한 미용재료임을 감안한다면 고대의 한국인들이 겨울에 피부를 보호할 줄 알았다.
가) 삼국시대
삼국시대부터는 당시의 화장과 화장품을 살필 만한 기록과 유물이 뚜렷한 편인데, 예를 들면 고구려의 고분 벽화가 그중의 하나이다. 수산리와 쌍영총 고분 벽화에서 고구려인의 화장을 추출하면, 수산리 벽화의 주인공은 귀부인이고, 쌍영총 벽화의 주인공은 여관(女官) 또는 시녀로 보이는 데도 모두 머리를 곱게 빗고, 눈썹을 짧고 뭉툭하게 다듬었으며, 뺨에 연지화장을 하고 있다. 또한 무인(舞人)들은 머리카락을 뒤로 틀고 연지를 이마에 바르고 금당(金)으로 머리를 꾸몄으니(《三國史記》志一樂) 신분 ·빈부의 구별이 없이 치장에 열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인들의 화장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으나 일본측 사서(史書) 및 《삼재도회(三才圖會)》에 일본이 백제로부터 화장품 제조기술과 화장법을 배워 갔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진보된 화장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또한 백제인들이 엷은 화장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고도의 화장기술의 표현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신라는 백제 ·고구려보다 다소 늦게 문화를 발전시켰으면서도 화장면에서는 두 나라보다 앞섰다.
신라인들은 아름다운 육체에 아름다운 정신이 깃든다는 영육일치사상(靈肉一致思想)에서 남성인 화랑(花郞)들도 여성들 못지 않은 화장을 하고, 귀고리 ·가락지 ·팔찌 ·목걸이 등 갖가지 장신구로 장식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귀천에 관계없이 여성들이 향낭(香囊)을 차고, 귓불을 뚫어 귀고리를 달고, 장도(粧刀)를 지녔다. 또한 잇꽃으로 연지를 만들어 이마와 뺨 ·입술에 바르고, 백분(白粉) 외에 산단(山丹:백합꽃의 붉은 수술)으로 색분(色粉)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특히 692년에 한 승려가 일본에서 연분(鉛粉)을 만들어 주고 상을 받은 일이 있는데 이는 당시 신라의 화장품 제조기술이 일본보다 앞섰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7세기경에 신라에서 이미 연분을 만들었다는 것은 세계화장품 발달사에 유례없는 대발명이었다.
신라를 비롯하여 고구려 ·백제에 4∼6세기경 불교가 전래되어 널리 신봉됨으로써 청정 ·청결이 강조되고 목욕이 대중화되었다. 목욕의 대중화는 목욕용품의 발달을 촉진시켰는데, 쌀겨 목욕으로 피부미용이 향상되었다. 그러나 서민층에서는 팥 ·녹두 ·콩껍질 등으로 만든 원시비누, 즉 조두(豆)를 사용한 결과 날비린 내가 몸에 배어, 이를 가시게 하기 위하여 향수 ·향료를 애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중국측 기록(《新唐書》)에 신라 여성들이 화장을 하지 않고, 눈썹 그리기를 즐기지 않았으며,
나) 고려시대
삼국시대에는 화장품 제조기술이 뛰어나 일본과 중국에 그 기술을 전하였고, 화장기술 역시 고도의 수준에 도달했었다. 화장뿐 아니라 옷 ·장신구 등 모든 생활이 사치에 흘러, 고려시대의 정치가들 사이에서는 신라의 패망이 사치풍조에서 비롯되었다 하여 사치금압(奢侈禁壓)을 강력히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고려가 신라의 정치 ·경제 ·군사제도를 거의 그대로 답습한 데다가 문화와 생활관습마저 계승하였으므로 신라의 화장경향 역시 계승 ·진보하였다. 고려인의 화장을 중국측의 기록으로 추측해 보면, ‘부인은 귀밑머리를 오른쪽 어깨에 내려 드리우고 나머지 머리는 아래로 내려 댕기로 매고 비녀를 꽂았다’(《宋史》)고 하였으며, ‘짙은 화장을 즐기지 않아 분은 사용하나 연지를 사용하지 않았으며(不喜塗澤 施粉無朱), 버드나무 잎같이 가늘고 아름다운 눈썹을 그렸다. 또한 비단향료주머니를 차고 다닌다’(《高麗圖經》)고 했는데, 이들 기록만으로 고찰한다면 고려인의 화장이 담장(淡粧)에 그쳤던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이와 같은 표현은 이 기록자들이 송(宋)나라 사람들이기 때문에 매우 짙은 화장을 했던 송나라 여인들보다 엷다고 표현한 것뿐이다.
고려인들의 화장이 결코 엷었거나 연지를 사용하지 않았을 리 없는 것은 불가(佛家)에서 짙은 화장을 금했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佛家 八戒齊 중에 不著華瓔洛 不香塗身 不著香董衣 등의 조항이 있다). 또, 고려시대 초에 제도화된 기생(妓生) 중심으로 짙은 화장, 즉 분대화장(粉黛化粧)이 성행하였다. 분대화장은 반지르한 머리, 눈썹과 연지화장 외에 백분을 많이 펴 바른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매우 짙은 화장이었는데, 기생을 분대라고 부를 만큼 기생의 상징적인 치장이었다. 분대화장 역시 평면화장에 지나지 않았지만, 기생들의 직업적인 의식화장이 조선시대에까지 계승되고 여염집 여성들은 엷은 화장을 고수하여 고려시대부터 화장경향이 2원화되고, 기생들의 분대화장으로 인하여 화장을 경멸하는 풍조가 생겨나기도 했다.
고려인들은 향을 애용한 나머지 조정향(助情香)을 먹기까지 하였는데, 기생들이 특히 그러하였다. 고려가요 《만전춘별사(滿殿春別詞)》가 그러한 예로, 향을 먹은 기생의 노래이다. 이처럼 기생들의 분대화장은 화장에 대한 기피성향 ·경멸감을 발생시킨 반면에 화장의 보급과 화장품 발전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기생양성소인 교방(敎坊)에서 기생들에게 화장법을 가르치고, 이들이 사용할 화장품을 지급하였기 때문이다. 고려 조정에서는 수은(水銀)을 수입하여 거울을 만들게 하고 빗도 만들게 하였다(宮中에 鏡匠, 梳匠을 두었다).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후기에는 치졸하나마 머리염색도 유행했던 것 같다.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의하면 백발에 화냥노는 년이……센(흰)머리에 흑칠하고……과그른 소나기에 흰 동정 검어지고 검던 머리 다 희거다.…란 속요(俗謠)가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화장수준을 간접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으로 각종 화장도구와 화장품 용기가 있다. 삼국시대의 화장용기는 주로 토기 ·목제로서 파손되기 쉬워 남아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으나 고려시대에는 금 ·은 ·청동 등 금속제 외에 청자로 대량 제조되어, 화려하고 견고한 화장품 그릇이 많이 남아 있다. 유병 ·향수병 및 연지합 ·분합 등이 대표적인 것들인데, 특히 화장합[粧]인 청자상감모자합(靑瓷象嵌母子盒)은 신라의 토기화장합(국립경주박물관 소장)을 발전시킨 것으로서 예술적 가치가 높다. 뿐만 아니라 청자 ·백자 등의 화장품 용기는 화장품의 안전도를 고려할 때 어떤 재질(材質)의 용기보다 가장 적합한 것이다.
고려시대의 화장수준이 높고 관심이 높았던 사실은 삼국시대, 조선시대보다 고려시대에 청동거울이 가장 많이, 그리고 정교하게 제조된 사실로도 충분히 입증된다. 이와 같은 고려시대의 화장문화는 중국 특히 원(元)나라에 크게 전파되었으리라 믿어진다. 고려와 원은 왕실끼리의 혼인으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우위(優位)였던 고려의 문화가 대량으로 원에 전파되어 고려양(高麗樣:고려풍속)의 유행을 이루기도 했기 때문이다.
다) 조선시대
조선시대 전기의 지배층은 고려시대 초기의 지배층이 하였던 것처럼 검약(儉約)을 강조하였다. 이와 아울러 유교윤리를 생활의 기본으로 삼아 내외법이 강조된 나머지 자유연애와 외출이 금지되었다. 여성은 외면의 아름다움보다 내면의 아름다움, 부덕(婦德)이 강조되어 부용(婦容)은 깨끗하고 부드러운 마음가짐의 표현이라고까지 정의되었다. 따라서 여성의 화장이 부덕(不德)한 행위로 간주되기조차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시대의 화장품생산이 위축되거나 화장에 소홀했던 것은 아니며, 오히려 화장개념의 세분화가 촉진되었던 것이다. 여염집 여성들의 생활화장과 기생·궁녀 등 특수층 여성의 의식화장이 더욱 뚜렷해지고, 여염집 여성들의 생활화장도 평상시의 청결위주와 혼인·연회·외출시의 화장으로 세분되었다. 이는 남성들의 2원화된 여성관에도 기인한다. 조선시대의 남성들이 이상적으로 추구하는 여인상이 달랐는데, 소실(小室)이나 기생으로는 옥같이 흰 살결, 가늘고 수나비 앉은 듯한 눈썹, 복숭아빛 뺨, 앵도같이 붉은 입술, 구름을 연상하게 하는 머리, 가는 허리를 소유한 팔등신 미인을 으뜸으로 여기고, 며느리나 아내로는 건강하고 성격이 원만하며 성실한 여성을 추구하였다. 전자에 해당하는 여성은 미인이나 박명(薄命)하고, 후자의 여성은 유자상(有子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소실과 기생 중심으로 분대화장이 보급되었고, 여염집 여성들은 깨끗하고 맑은 피부를 간직하려고 노력하였으며, 대부분 담장에 그쳤다.
그러나 의인소설(擬人小說)인 《여용국전(女容國傳)》이 여성의 화장을 국가정치에 비유하여 권장하고 있고, 화장품과 화장도구가 18종이나 등장하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또 숙종(肅宗:재위 1674∼1720) 연간에 화장품 행상인 매분구(賣粉)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화장품의 생산·판매가 산업화할 조짐을 보일 정도로 다양하게 대량소비되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더욱이 일시적이긴 하나 궁중에 화장품 생산을 전담하는 관청인 보염서(補署)가 설치된 적이 있고, 임진왜란 직후인 선조(宣祖) 때 일본에서 발매한 아사노쓰유(朝の露:아침이슬)라는 화장수(化粧水) 광고문안 가운데 조선의 최신제법(最新製法)으로 제조한…이라는 구절이 있고 보면, 조선시대 중기까지 화장품 제조기술은 높은 수준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수공업 수준을 탈피하지 못하고 산업화가 늦어져 외국의 화장품 기술에 비해 뒤떨어졌다.
1922년에 제조허가 1호로 출범한 박가분(朴家粉)의 경우를 들어 보면, 인기를 얻어 하루에 5만 갑이나 팔렸다고 하지만 생산방식이 재래식에 머물렀고, 납성분의 부작용으로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이 무렵 공식·비공식 경로를 통해 수입되었던 백분은 납부작용이 적어 국산품과 좋은 대조를 이루었고, 그 결과 국산화장품 불신감을 낳기도 하였다. 외제화장품과 아울러 입체화장기법이 도입되어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는데, 사회적 물의가 적지 않았던 신여성과 기생 중심으로 신식 화장이 신속히 보급되어 화장에 대한 경원감정(敬遠感情)이 확대되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사용하기 간편한 신식 화장품과 색채화장이 도입·보급되는 과정에서 다소 마찰이 있었던 것이다.
라) 개화기 이후의 메이크업
강화도 조약(1876년)에 따른 개항 이후 우리나라에는 신식 메이크업 테크닉과 화장법이 물밀 듯 밀려 들어왔다. 처음에는 주로 일본과 청나라로부터 유입되었으나 한일합방 이후 1920년대에는 수입선이 프랑스를 주로 한 유럽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수입화장품은 주로 크림, 백분, 비누, 향수 등이었는데 포장과 품질이 우수하여 여성들로부터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이 무렵에는 하얀 얼굴에 반듯한 이마의 잔털을 제거하고 박가분을 물에 개어서 하얗게 발랐다.
그 후 일본 유학생 오엽주가 종로 화신 백화점에 처음으로 미장원을 개업하고 새로운 메이크업 테크닉과 바니싱 크림 등의 신식 화장품을 소개하였다. 또 그는 입술 연지를 아랫입술에만 빨갛게 바르고 눈썹을 초승달 모양으로 그리는 화장법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1945년 8.15 해방을 계기로 우리나라의 화장품 산업은 일시적으로 퇴보를 보였으며, 6.25 이후 수입 화장품, 밀수 화장품, 미군 PX 유출품이 범람하다가 1960년대에 들어서야 다시 국산 화장품 생산이 본격화되고 메이크업 테크닉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1960년 이후에는 바니싱 타입의 크림과 백분의 소비량이 격감한 가운데 액상색분(파운데이션)의 수요가 급증하였다. 또 입술연지가 고형(스틱)으로 바뀌었으며 아이섀도우가 등장해 색채 화장법이 시작되었다.
◇ 1900~1930년대
복식 경향은 한복과 양장이 혼동되었으며 신여성이라고 일컬어지고 외국 유학생이나 외교관의 부인 등 극소수의 여성에게 양장이 착용되기 시작했다. 신식화장품과 함께 도입된 신식 화장법은 입술연지의 색깔이 진해지고 향내가 강렬해졌다. 치마의 길이는 짧아졌으며 하이힐을 신고 양산을 든 차림이 신여성을 대표하였다. 하지만 이런 신여성의 화장과 옷차림이 접대부에서 먼저 유행되었고 일부 신여성의 자유연애 예찬으로 빚어진 비난 때문에 어염집 여인들은 종전보다 더욱 엷은 화장을 선호하는 현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 1940년대
화장에서 현대식 화장법이 도입된 것은 1940년대 직후이다. 화장 패턴은 얼굴을 희게 하고 눈썹은 반달 모양, 볼연지와 붉은 입술을 하는 것이다. 해방 후의 화장 기법은 번들거리고 눈화장(마스카라와 아이라인으로 강조함)을 강조한 부분 화장에 포인트를 주는 것이다. 1945년의 8.15 광복을 계기로 한국의 화장품 산업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일제 화장품의 범람과 일제 화장품 광고의 홍수는 일본의 패망으로 일제히 자취를 감추고 그 대신에 에레나 크림, 바니싱 크림, 모나미 크림, 스타 화장품 등의 구산 화장품이 생산되었다. 그러나 8.15 직후에 원료의 부족이 심각하였을 뿐만 아니라 화장품 제조 회사의 규모가 영세하였기 때문이며 그나마 1950년 6.25 동란으로 또 다시 화장을 하지 않는 경향을 낳았다.
◇ 1950년대
이 시기에는 수입 화장품, 밀수 화장품, PX 유출품의 범람이 가속되다가 1956년 처음으로 블란서 '코디'사와 기술 제휴로 신제품을 개발하면서 코디분이 국산화되어 품질을 혁신했고, 1960년대로 들어오면서 화장품 시장은 성숙기를 맞이하게 된다. 영국 영화의 상영으로 오드리 햅번 등 영화 스타의 모방이 헤어, 화장, 복식에 유행했다.
◇ 1960년대
정부의 국산 화장품 보호정책에 따라 화장품 산업은 정상적인 궤도에 진입하고 색조화장품을 생산했다. 부자연스러운 하얀분 화장에서 자연스런 피부표현으로 바뀌고, 기초 화장을 중심으로 한 피부 표현에 역점을 두고 수정 화장이 더해져 세련된 느낌을 주긴 했으나 인조 속눈썹의 사용으로 꾸민 듯한 느낌을 주었다.
◇ 1970년대
화장품 회사의 주도하에 메이크업 캠페인으로 색채 화장에 대한 거부인식을 불식시키고 입체 화장이 생활화되었다. 샴푸, 보디제품, 팩제품 등 화장품 시장의 급성장, 의상에 맞추어 화장하는 토털코디네이션이라는 말이 등장하였다. 이 시기부터 의상의 유행이 화장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여 1972년에 복고풍의 의복이 유행하게 되자 화장에 있어서도 복고풍이 나타났다. 1976년에는 패션과 함께 동양무드가 가미된 화장이 선보였고, 색상은 부드러우면서도 침착한 색조 올리브 그린, 크림 베이지, 브라운, 오렌지, 블루, 더블, 핑크색이 주류를 이루었다. 1978년부터 미용 캠페인의 영향으로 메이크업이 토탈패션의 한 부분으로 조화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생겼으며 계절별로 봄의 입술화장, 여름은 자외선 차단, 가을은 눈 화장, 겨울은 기초 피부손질에 중점을 둔 T.O.P 미용법이 정착되었다.
◇ 1980년대
1980년대에는 컬러 TV의 방영으로 색채에 대한 수요가 복식과 화장에 폭발적으로 일어났고 부분적으로 수입 자유화된 선진국의 다양한 색채화장품 수입으로 소비자가 자신의 개성과 라이프 스타일에 맞추어 선택하는 지적 소비자 시대가 되었다. 해외동포의 귀국과 해외와의 교류도 빈번하여 세계의 패턴 소식이 동시에 한국에도 유입되었다.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브룩실즈로 대표되는 자연적인 굵은 눈썹으로 자신감 있고 활동적인 여성상을 표현했다. 색조 화장은 더욱 세련되어지고 다양해졌으며 동양인의 오클계 피부에 잘 조화되는 코랄색상(핑크와 오렌지의 중간)이 유행하고 갈색을 주조색으로 황금색펄과 벽돌색의 조화로 세련되고 매혹적인 분위기의 색조화장이 유행했다.
현대에도 패션의 흐름과 더불어 메이크업도 유행을 창출하고 선도하는가 하면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에 따라 이성보다는 감성을 중요하게 여기고 패션성을 요구하고 있다. 건강에 대한 관심과 자연보호에 대한 의식이 고조되면서 베이지, 오렌지, 브라운 계열을 중심으로 한 자연스러운 색조가 강세를 보였다. 이 시기에 특히 특이한 현상은 각 브랜드에서 시즌마다 컬러를 제시하여 소비자로 하여금 유행을 선도해 나가는 현상을 들 수 있다. 각자의 개성이 강조되고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특징이 화장품 회사 주도하에서 소비자가 선택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또한 혼합되는 색의 강약에 따라 얻을 수 있는 무수한 색감을 참조하여 다양한 색채 예술의 감각으로 눈, 볼, 입술 화장을 표현했다. 1990년대 후반에 들어 패션경향은 어두운 무채색 계열로 몸의 곡선을 가린 미스틱하고 퇴폐적인 분위기와 함께 국내에서 오리엔탈리즘과 결합되어 풍부하고 깊이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한국의 디자이너들은 오리엔탈 패션테마에 맞추어 한국적인 것을 모던하게 표현하게 되었는데 의상과 함께 창백한 피부톤, 가는 아치형의 검은 눈썹, 붉은 립스틱 메이크업도 나타났다. 또한 다른 한편의 메이크업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깊은 컬러의 주류가 기초화장과 메이크업(마무리화장)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메이크업은 목적·시간·장소에 따라 분류된다.
① 내추럴(natural) 메이크업(자연스러운 화장)
데이타임 메이크업(주간)·
애프터눈 메이크업(오후)·
나이트 타임 메이크업·
포인트 메이크업(부분을 강조하는 방법) 등이 있다.
② 엑스트림(extreme) 메이크업(극단적인 화장)
포토 메이크업(사진촬영용)·
무비 메이크업(영화촬영용)·
스테이지 메이크업(무대용)·
캐릭터리스틱 메이크업(특수한 개성을 내기 위한 것) 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여성의 화장은 내추럴 메이크업을 말한다.
메이크업하기 전에 피부손질도 함께 한다. 기초화장은 반드시 필요한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현대의 화장은 예전에 비해 품질면뿐만 아니라 메이크업 방법면에서의 변화도 뚜렷하다. 그것은 과거에 있어서의 화장이 단지 단순한 건강미 또는 퇴폐미(頹廢美) 등을 목표로 한 데 대하여 현대의 화장은 피부색과의 전체미에 바탕을 둔 색의 조화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있어서의 분은 흰색, 루즈는 빨강, 눈썹은 검은색이었던 것이 각각 단일색에서 벗어나 십수 색에서 수십 색이라는 다채로운 상품구성이 되었다. 특히 아이섀도 등은 눈꺼풀에 음영(陰影)을 만들기 위한 화장이었던 것이 기성관념을 벗어나 옷의 빛깔과의 조화를 맞추기 위해서도 다채롭게 빛깔을 선택하게 되어 아이 컬러라고 불리게 되었다.
머리염색도 예전에는 흰머리를 염색하기 위해 검정 또는 흑갈색이었던 것이 십수 색이 되고, 그 중에는 청색·자색·적색·백색·은색·금색 등도 쓰일 정도로 다채롭게 되었으므로 헤어 컬러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렇게 메이크업은 패션의 일부가 되고 분위기에 따라 색조를 변화하게 되었다. 이들 화장을 보다 효과적으로 살리기 위해 피부는 맨살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으며, 파운데이션이나 분류도 모두 투명감을 가지게 되었다. 현대의 화장은 화장품의 발달과 매스미디어의 발달에 의하여 예전과 같은 화장술의 격차가 없어지고, 화장으로 짐작할 수 있었던 직업이나 지역차, 계층이나 연령 등을 알 수 있는 의미의 표현이 없어지고 개성표현의 요소가 많아졌기 때문에 개인의 기호·지성·교양 등을 알 수 있게 되었다.
1. 패션 메이크업의 개념
메이크업(make-up)'은 '페인팅 (painting)', '토일렛(toilet)', '드레싱(dressing)', '마키(maquillage)' 등과 유사한 말로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화장으로 번역된다.
'메이크업'이란 용어가·최초로 사용된 것은 17세기 초 영국의 시인 리차드 크라슈(Richard Crashou)에 의해서였다. '페인팅'은 16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전래된 짙은 화장을 가리키는 것에서 유래하였고, '토일렛'은 화장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치장을 의미하며, '마키야주'는 분장을 의미하는 연극 용어에서 유래하였다. 패션 메이크업(fashion make-up)은 메이크업에 패션성·유행의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단순히 얼굴만 아름답게 꾸미는 차원이 아니라, 의상·헤어스타일 액세서리·잡화 등 토탈패션의 요소로서 자신의 가치관·기호·상황 등을 표현하는 도구이며 자신이 속한 사회·문화와의 교류를 의미하는 차원으로 확대시킨 개념이다.
2. 패션 메이크업의 변화
1) 20세기 초, 1910년대
헤레나 루빈스타인(Helena Rubinstein), 엘리자베스 아덴(I)Izabeth Arden)에서 화장품 산업이 창시되어 화장품 생산이 귀족이 아닌 일반에도 전해졌으나 가내수공업으로 제조하여 판매하였으므로 아직은 대부분 가정에서 수작업으로 제조하여 사용하는 단계였고, 색조화장을 하기보다는 피부 손질용 기초 차장 제품인 로션 ·크림 등이 선호되었다.
일반 여성의 경우 색조 화장은 거의 하지 않고 피부 손질용 화장품 사용이 대부분이었다. 파우더만 바른 피부에 눈썹을 다듬은 정도가 화장의 전부였다. 일부 패션 리더층에서 오리엔탈풍 화장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핑크 레드 등 밝은 입술화장에 중동풍의 짙은 눈썹화장을 하고 동양적 색감의 컬러풀한 아이쉐도우를 사용하였으며 동양적으로 보이도록 옆으로 뺀 아이라인으로 표현하였다.
2) 1920년 대
1차 대전후 고가였던 화장품 외에 보다 대중적인 화장품을 파는 체인점이 등장하여 일반 대중에까지 보급되었다. 유행에 대한 영향력이 잡지에서 다루는 명사나 영화 스타에 대한 것으로 변화하였고, 영차배우인 클라라 보우(Clara Bow)가 대표적 이상형이었다. 그녀는 인위적인 화장을 하여 희게 강조된 피부에 가늘게 정리하여 정교하게 눈썹을 그리고 작게 오므린 듯한 형태의 선명한 붉은 입술 화장을 하였다.
3) 1930년 대
4) 1940년 대
세계대전 중에는 전쟁으로 물자 절약을 위해 실용적인 의생활이 이루어져 화장품·패션 산업은 침체였다. 미국에서는 성적 매력이 강조된 영화 배우들이 유행을 주도하였다. 완벽하게 커버한 두꺼운 피부 표현에 선명한 색상의 아이쉐도우와 부드러운 곡선형 눈썹의 눈화장을 하고 선명하고 반짝이는 붉은 색상의 립스틱을 바르고 매니큐어도 붉은 색으로 매치하였다. 영화배우처럼 금발이나 블론드 색상으로 염색하는 것이 대유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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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주제여서 쓸데없는 것도 넣어봤네요.
서양의 메이크업역사와 우리나라 메이크업 역사에 초점을 맞춰 조사하였습니다. 기후,종교적인 이유, 계급을 구별하기 위해 시작된 화장이 예의,매너가 되고 화장으로 인종과 나이까지 넘나들며 예술의 경지까지, 게다가 남성마져도 하게되었네요. + 아마존의 눈물이랑 아프리카의 눈물에서 원주민들의 그루밍도 볼수있는데요. 이건 안해도 될듯해서.
첫댓글 재미있게 잘 봤어요~~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