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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장 1절~28절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 마가복음 개관, 저자와 주제, 연대
저자와 제목
초기 교부들에게서 나온 광범위한 증거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대한 기록을 자신의 수행원이자 서기관인 요한 마가에게 넘겨주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가이사레아의 유세비우스(260~340년)가 보존한 파피아스(히에라폴리스 주교, 주후 120년경)의 간략한 진술. 파피아스는 자신이 장로이자 사도인 요한에게서 구절을 받았다고 진술하면서 마가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1) 마가는 베드로의 서기관이었다. (2) 마가는 베드로의 말을 자신이 기억할 수 있는 만큼 가장 정확하게 기록했다. (3) 마가는 예수님의 증인도 제자도 아니었다(그러나 막 14:52절도 참고). (4) 마가의 바람은 어떤 내용도 빠뜨리거나 잘못 표현하지 않는 것이었다. 파피아스는 마가복음은 베드로에게서 비롯되었으므로 사도적이고 신뢰할 만하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내적 증거 또한 베드로가 마가복음의 배후에 있다는 교부들의 증언을 뒷받침합니다. 마가의 기록은 베드로와 관련된 사건들을 진술할 때 특히 생생합니다. 마가복음은 제자들 전체와 더불어 베드로의 약점들을 보여주며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베드로에 대한 칭찬받을 만하거나 주목할 만한 언급은 생략합니다. 베드로의 가이사라 설교(행 10:34~13)와 마가복음 사이에 어떤 구조적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점도 지적되어 왔습니다.
저작 연대와 장소
마가복음의 외적, 내적 자료는 대부분 마가복음의 저작 장소는 로마이며 저작 연대는 주후 50년대 중반에서 후반임을 설득력 있게 지시한다(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저작 연대를 60년대 중반이나 후반으로 잡는다). 50년대 중후반을 지지하는 논거는 사도행전이 바울이 주후 62년경에 투옥되는 것으로 끝난다는 점이며 이로 인해 많은 학자들은 사도행전이 이 시기를 전후로 기록되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사도행전의 핵심 요점은 복음이 로마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므로 사도행전은 기록된 시점에서 끝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만일 사도행전이 60년대 초반에 기록되었다면 누가복음은 60년대 초반 어느 시기에 사도행전 이전에 기록되었다(참조, 눅 1:3 및 행 1:1). 그러나 만일 누가복음의 자료와 전반적인 구조가 상당 부분 마가복음에 의존한다면(이는 오늘날 학자들의 분명한 다수견해다) 마가복음은 누가복음보다 먼저 기록되었다. 이에 따르면 마가복음의 저작 연대는 50년대 중후반이 될 것이며 그와 같은 연대는 베드로가 50년대 초중반에 로마에 있었다는 초기 교회 전승과 잘 들어맞습니다.
유세비우스는 (주후 325년경의 저작에서) 이렇게 말한다. "같은 [주후 54년에 죽은]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대에 우주의 섭리자이신 하나님은.... 위대하고 훌륭한 베드로를 로마로 인도하셔서.....복음을 전파하게 하셨다....그러나.....베드로의 청중들은.... 단 한번 듣는데 만족하지 않고..... 마가가 베드로의 수행원임을 알고 온갖 권면으로 마가에게..... 자신들에게 말로 전해진 가르침을 글로 기록해서 남겨 달라고 마가를 설득할 때까지 쉼 없이 간청했다.
그래서 이것이 마가복음이라고 불리는 성경이 탄생한 원인이 되었다"(유세비우스. <교회사> 2.14.6~2.15.1. 참조, 155~220년경에 살았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의 말을 인용한 6.14.6~7의 비슷한 전승).
마가복음에 대한 반(反) 마르키온주의 서문(주후 2세기 말)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으므로 마가복음 저작 연대는 베드로가 생존해 있던 기간으로 잡고 있다. "[마가는] 이 복음서를 이탈리아에서 썼다. 베드로는 이 소식을 듣자 이 복음서를 교회에서 읽히도록 자신의 권위로 승인하고 지지했다."
그러나 누가복음-사도행전의 이후 저작설을 받아들이거나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유사성이 누가가 마가복음의 완성된 필사본을 사용했음을 입증하지 못한다면, 마가복음이 60년대 중후반에 저작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어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이레나이우스(주후 195년경 사망)의 진술에서 이에 대한 근거를 발견한다.
"그들 [베드로와 바울]이 떠난 뒤 베드로의 제자이자 통역자인 마가도 베드로가 설교한 내용을 글로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 만일 베드로의 '떠남'이 베드로의 죽음을 가리키며 베드로가 주후 64년에 죽었다면 마가복음은 베드로가 죽은 해인 64년 이후에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반면 이는 마가복음의 저작 연대가 아닌 출판 연대를 가리키거나 베드로와 바울의 죽음이 아니라 그들이 로마를 '떠난' 일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50년대 중후반 저작설이 가장 유력하지만 60년 중반 저작설도 가능성이 있습니다.
목적, 계기, 배경
마가는 로마에서 글을 썼지만 마가복음은 더 광범위한 교회를 위해 베드로의 사도적 증언에 대한 기록으로 저작되었다. 심지어 초기 교부 시대에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이 복음서의 수신자로 자주 언급되었다. 마가는 유대인 관습에 대체로 친숙하지 않은 독자층을 대상으로 글을 쓴다. 그리고 이들을 이런 관습들에 친숙해지게 하려 한다. 그렇게 된 이후에야 비로소 이들이 예수님의 오심을 이스라엘과 온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역의 성취로 이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핵심 주제
1. 예수님은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오해를 바로잡고자 하신다(1:25, 34, 44, 3:12, 4:10~12, 5:18~19, 43, 8:30, 9:9).
2. 예수님은 인간이다(3:5, 4:38, 6:6, 7:34, 8:12, 33, 10:14, 11:12, 14:33~42).
3.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1:11, 3:11, 5:7, 8:38, 9:7, 12:6~8, 13:32, 14:36, 61, 15:39).
4. 예수님은 모든 능력과 권세를 지닌 하나님의 아들이다(1:16~34, 2:3~12, 23~28, 3:11, 4:35~41, 6:45~52, 7:1~23, 18:1~12).
5. 예수님은 인자로서 고난받아야 한다(8:31, 10:45, 14:21, 36).
6. 예수님은 주님이다(2:28, 12:35~37, 14:62).
7. 예수님은 겸손한 섬김, 자기 부인, 고난에 있어서 자신을 본받도록 제자들을 부르신다(8:34~38, 9:35~37, 10:35~45).
8.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시며 하나님은 계속해서 한 백성을 자신에게로 부르고 계심을 알려 주신다(4장, 참조, 1:15, 9:1, 14:25, 15:43).
문예적 특징
사복음서 중에서 마가복음은 가장 분명하게 전형적이거나 대표적인 사건들 및 주목할 만한 일화들, 담화나 대화의 단편들, 화자의 논평으로 이루어진 '다큐멘터리 드라마'다.
전기적 자료에 대한 마가의 접근 방식은 주의 깊은 기록자의 방식이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현대적 의미에서의 전기는 아니다. 예수님의 외모로 묘사하거나 예수님의 혈통을 다루거나 예수님의 내면적인 삶을 묘사하려는 시도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의 목적은 예수님의 사역과 사명을 표현하는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은 그와 동시에 기록된 사건들의 구속적 의미를 암시하는 암묵적인 선포이자 변증적 저작이다.
아울러 마가복음은 소명 이야기, 칭찬 이야기, 증인/증언이야기, 만남 이야기, 갈등 또는 논쟁이야기, 선포 이야기, 기적 이야기, 비유, 강론과 설교, 속담이나 격언, 수난 이야기, 부활 이야기 등 신약 복음서에서 발견되는 하위 장르들의 일반적인 배열로 구성되어 있다. 마가복음의 전반적인 형상은 네러티브지만 마가복음은 연속적인 줄거리를 가진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단락들의 모음집이다.
거기에는 군중 장면, 소집단 장면, 공적인 장면, 사적인 장면이 있다. 그러한 결과물인 이 책은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일종의 콜라주 또는 모자이크다. 이런 형식에 적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마가가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기록물을 수집할 때 자신을 마가의 길동무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 모자이크화의 주된 통일적 요소는 주인공인 그리스도 자신이다.
(복음서들 중에 가장 짧은) 마가복음은 신속하게 전개되는 이야기다. 마가는 생생한 묘사적 설명을 포함시키는 경향이 있으며 진행 중인 동작을 묘사하는 헬라어 동사를 선호한다. 마가는 종종 예수님이 행하시고 말씀하신 것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기록한다. 다른 모든 이야기 작가와 마찬가지로 마가도 다음 두 가지 기준에 따라 글감을 선택했다. 즉 예수님의 생애에서 (치유의 기적이나 비유 같은) 전형적이거나 대표적인 사건들과 독특하고 단회적인 사건들(특히 십자가 사건 및 부활과 관련된 사건들)을 선택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공적 사역으로 이어지는 사건들을 마테나 누가처럼 예수님의 계보나 혈통적 뿌리의 관점에서, 또는 (요한처럼) 신학적 기초의 관점에서 강조하기보다 실제적 시작에 초점을 맞춥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에 대한 좋은 소식입니다. 좋은 소식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돕기 위해 개입하셔서 구원하시는 일과 관련돼 있습니다.
1절~15절
막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 세례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6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7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0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 광야에서 사십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에 의해 선포되지만 부차적인 의미에서 좋은 소식은 예수님에 대한 보고입니다. 마가는 복음서의 시작과 끝에서 공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전합니다. 마가는 세례 요한을 '주의 길을' 준비하는 예언된 인물로 밝힙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언급된 이유는 이사야가 더 유명하며 인용된 자료에 더 많은 부분이 이사야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마가는 이 본문의 이어지는 구절에서 설명하면서 이사야서 인용만 언급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통해 엘리아의 심령을 가지고 오는자로 밝혀질 것입니다. "길"은 주를 위해 준비되어야 하며 놀랍게도 세례 요한 뒤에 오시는 이는 주님이자 메시아입니다. 이어지는 복음서 기사는 또한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신성을 지닌 분임을 입증합니다(1~3절).
세례 요한은 백성에게 죄 사함을 받기 위해 죄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회개를 촉구 함으로써 길을 준비합니다 .세례는 회개가 선행되어야 했고 따라서 세례는 죄를 용서받는 수단이 아니라 한 사람이 진정으로 회개했음을 가리키는 표시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정화의 장소이자 예언의 성취로서 광야에서 사역합니다(4절).
'온 유대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세례 요한의 사역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구원받아, 말하자면 말세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기 위해 다시 요단강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출애굽에 대한 약속의 성취를 상징합니다. 자기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역사하셔서 그들이 다시 하나님에게로 돌아와서 오실 메시아를 맞을 준비를 하도록 부르셨습니다(5절).
세례 요한의 의복과 음식은 사막에서 말씀을 선포한 다른 선지자들의 의복과 음식에 상응합니다.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에 대한 요한의 기대는 오실 분은 인간이면서 하나님이며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입니다. 신발끈을 푸는 일은 비천한 종이 할 일일 수는 있지만 유대인은 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성령 세례는 구약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뜻합니다(6~8절).
'세례를 받으시고', 예수님은 자신은 죄가 없으시지만 자기 백성의 죄와 일체화되십니다. '갈릴리'는 요단 강과 갈릴리 바다 서쪽, 사마리아 북쪽 지역입니다. 신약 시대에 갈릴리는 헤롯 대왕과 그의 아들 헤롯 안디바, 그 후에는 헤롯 안디바의 조카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연이어 통치했습니다(9절).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곧'. 이 단어는 마가가 사용하는 단어로 속도감과 긴박감을 주며 종종 새로운 사건이나 한 사건 안에서의 놀라운 상황 전환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세례 때 예수님 위에 내려오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해서 유일무이한 사역을 위임 받으십니다. 여기서 구약에 대한 마가의 암시는 하나님의 '아들'(시 2:7)과 하나님의 '종'(사 42:1)에 대한 주장을 포함합니다. 하늘의 '소리'는 영원하고 사랑으로 충만한 예수님의 아들 되심을 확증합니다(10~11절).
예수님의 공적 사역이 시작될 때 '성령' 하나님은 역사적으로 예수님을 '사탄에게 시험'을 받도록 '광야'로 몰아 내십니다. 어둠의 세력에 대한 예수님의 싸움이 시작된 것입니다. "시험을 받으시며"란 마태(마 4:11)와 누가(눅 4:1~13)가 언급한 세 번의 시험에 국한되지 않고 40일간 내내 발생한 시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악과 들짐승의 위험에 둘러싸여 계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임재가 있고 '천사들이 수종' 들고 있었으므로 버림받으신 것이 아닙니다(12~13절).
예수님의 복음선포 사역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좋은 소식'이며 이는 사람들의 마음과 삶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가 이제 확립되고 있으므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뜻입니다. 천국은 단순히 사람들 속에서의 성령의 통치만이 아닙니다. 천국은 궁극적으로 모든 피조물의 회복을 포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천국이 단계적으로 임할 것이라는 사실을 아직 계시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이 나라와 어떻게 관련 되는지는 이어지는 장에서 밝혀질 것입니다. 우선 예수님은 다가올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선포하는 분이십니다(14~15절).
16절~28절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7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좇으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 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군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21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예수님의 초기 갈릴리 사역, 제자들의 소명은 귀신과 질병을 다스리는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서술 및 권위 있는 가르침과 서로 얽혀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을 요구하시는데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과 지속적으로 교제하며 예수님이 주신 사명을 수행할 때 성취하게 될 과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렘 16:15~17를 상기시키는데 그 구절에 따르면 심판이 발생한 뒤 사람들을 낳고 사냥하는 '어부'와 '포수'가 그들을 우상에게서 하나님께로 부를 것입니다.
이 부름은 정화의 맥락에서 발생하며 이방인이 포함할 것입니다. (참조, 렘 16:1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많은 어부를 불러다가 그들을 낚게 하며 그 후에 많은 포수를 불러다가 그들을 모든 산과 모든 작은 산과 암혈에서 사냥하게 하리니 17 이는 내 눈이 그들의 행위를 감찰하므로 그들이 내 얼굴 앞에서 숨김을 얻지 못하며 그들의 죄악이 내 목전에서 은폐되지 못함이라). (16~17절)
'그 아버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님의 첫 제자들 중에 몇몇은 가난하지 않은 자영업의 종사하는 어부거나 이 경우(야고보와 요한)와 같이 가업에 동참한 이들이었습니다 레위(2:14.마태)는 꽤 부유한 세리였습니다(20절)
'가버나움' 발굴 결과 주거용 건물, '회당', 팔각형 모양의 기독교 유적이 드러났습니다. 가버나움의 유명한 잘 보존된 회당은 주후 4세기나 5세기의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래서 그 이전 건물의 벽이 발견되었는데 이 건물은 예수님 시대의 회당의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많은 비잔틴 양식의 기독교 기념 성소와 비슷하게 설계된 5세기의 팔각형 건물은 1세기 건물을 고쳐 지은 4세기의 교회 위에 서 있습니다. 이곳은 전승에 따른 베드로의 집이 있던 장소를 나타냅니다(21절).
예수님의 지상사역의 핵심적인 목적은 기적을 행하거나 귀신을 쫓아내는 일- 예수님의 가르침에 수반되며 하나님이 예수님과 함께 계시며 입증한 행동-이 아니라 '가르치시'는 일이었습니다. 여기 언급된 서기관들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예수님께 직접 도전할 만큼 대단한 지위가 더 높은 서기관들과 달리 회당에서 가르친 그 지역에 경건하고 학식있는 사람들의 집단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다른 사람들의 전통을 되풀이 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적 권위로 가르치셨습니다(22절).
'더러운 귀신'은 예수님의 능력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행하려 하지만 정확하게도 예수님이 자신을 '멸하러' 오신 것을 두려워합니다. 귀신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부르는 행위는 예수님에게 권능을 행하려는 귀신의 시도를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대적하시며 그 더러운 귀신에게 '잠잠'하라고 말씀하십니다(23~25절). '다 놀라', 이 귀신을 쫓아낸 일로 인해 예수님의 가르치는 권위는 강화됩니다(26~29절).
2:13절~22절
2: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무리가 다 나아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가르치시니라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혹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9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계속해서 "가르치는" 일에 집중하십니다. 레위(3:18에서는 마태라고 불림)는 세금을 걷고 따라서 헤롯 안디바와 협력하며 다시 로마 제국과 협력합니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땅을 점령한 정치적 쓰레기인 로마 및 로마에 협력한 모든 이들은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경멸 받았습니다. 과세제도는 부패했고 대부분의 세리들은 세금의 일부를 착복했습니다. "바닷가" "그의 집에"라는 표현은 레위가 일한 세관이 갈릴리 바다 근처에 있었고, 또한 이곳에 어부들에게 세금을 걷는 데 사용되었음을 암시합니다(14절).
식탁에 기대는(영어성경번역 ESV) 자세는 개인적인 영접과 환대를 가리킵니다. 공식적인 정찬에서 손님은 방의 삼면을 따라 깔린 긴 의자에 누웠습니다. 주인은 여러 U자 모양의 식탁으로 둘러싸인 중앙 좌석을 차지했습니다. 최고 귀빈은 머리는 식탁 쪽으로 발은 벽 쪽으로 향한 채 주인의 양 옆에 기대어 누웠습니다. '세리와 죄인들', 이는 두 집단이 모세 율법을 무시한다는 바리새인의 관점을 반영합니다. 바리새인의 해석에 따르면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자신을 '정결하게' 지켜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개인적 정결과 긍휼의 교제를 결합하는 제3의 길을 추구하십니다(15~16절).
예수님은 '건강한 자를 의인'에, '병든 자를 죄인'에 비유하십니다. 예수님의 대적들은 자신이 어떤 자들인지 스스로 판단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비가 없음으로 인해 사실은 병든 죄인들입니다(17절).
'금식 논쟁', 예수님은 자신을 '신랑'이라고 부르시는데 이는 구약에서 여호와를 뜻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동안 제자들은 기뻐해야 하지만 제자들이 예수님을 '빼앗길' 때가 되면 '그날에는 금식할' 것입니다. 그때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하기 위해 금식의 관행으로 되돌아오겠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있을 때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빼앗길" 것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간접적인 예언입니다(19~20절).
'생베 조각'은 '낡은 옷'과 공존할 수 없듯이 하나님 나라도 단순히 모세 율법의 규정과 성격 외적 전통의 헤어진 곳을 기운 조각으로 간주될 수 없습니다.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 부대'는 예수님이 새로운 방식으로 새 시대를 여신다는 같은 진리를 예시합니다(21~2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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