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은 무주군에 속하지만 오늘의 답사 컨셉트는 <장수구간 총정리>로 정하고 시작하였으므로 계속 ‘장수구간’이라고 표현하겠습니다.)
덕곡(덕산)저수지 아래 덕곡마을.(덕곡인지 덕산인지 혼용해서 불립니다)
덕유산 리조트 골프코스를 거쳐 껌녕재(검령)를 넘어올 수 있다 치고, 넘어왔다 치고, 처음 만나는 마을이 덕곡이다.
약간의 구릉이 감싸고 있는 아늑한 마을. 마을 안을 굳이 돌아볼 필요는 없었으나 그래도 고개를 넘어온 여행자들에게 잠깐이나마 위로와 안식을 주기 위해 마을 안길을 통과하도록 노선을 정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
마을은 북쪽으로 나지막한 언덕을 업고 있는데 이 언덕이 병풍처럼 북풍을 가려주고 있다. 거기에다 울창한 송림이 더욱 확실한 방풍림 역할을 한다.
이 솔숲 옆을 지나는 긴 마을외곽길이 나름대로 기분 좋다. 언덕이 다소 가파르지만 숲 속을 질러 마을 안쪽으로 통하는 길은 몇 가닥 나 있기도 하다.
언덕에 오르면 멀리 북쪽으로 두문마을 저수지 둑의 ‘낙화(落火)놀이’ 무대까지 보이는 전망이 그럴듯하다.
(아래, 위 : 두문동 낙화놀이 행사장.)
솔숲 옆길이 끝나는 지점이자 마을이 끝나는 곳에 한 집안의 재실이 꽤 규모 있게 자리 잡고 있다. 뒤쪽으로는 호기롭게 축대를 쌓은 거대한 묘역. 전주 이씨 집안의 묘역이란다.
이 길로 걸어서 통과해버리면 마을에 들를 일이 없게 되는데…
마을안길도 들어가 보았다.
지명총람에 이 마을은 ‘황거를’이라는 묘한 고유어 이름으로 불렸다는 해설이 있다. ‘황골·황곡’ 등의 옛 이름도 보이는데 아마도 덕산저수지가 생기기 전의 골짜기 이름이겠거니 한다. 하지만 같은 곳을 일컬었음이 분명하다.
이 마을은 뒤 언덕길로 걸을지 마을 안을 통과할지 조금 더 두고 생각해보아야 할 듯. 두 루트를 모두 제안해두고 걷는이에게 선택권을 주는 방법도 있겠다.
수랙이, 수락마을
덕유산 골짜기를 타고 내린 물이 덕곡(덕산)저수지에 담겼다가 흘러 구량천의 근원이 된다.
구량천 물줄기 아래 첫 마을이 덕곡, 하천 따라 형성된 그 다음 마을이 수락마을.
이곳까지만 와도 이미 안성의 평야는 넓고 평평해져 있다. 구량천 물도 폭이 넓어지지만 “하천 바닥의 돌 틈으로 물이 다 스며들어버린다”고 수락(水落)이라 불린단다.
‘수역(水驛)’이라는 이름도 있었다고. 그런데 세곡을 실어 나르는 조운선이 들락거릴 정도로 ‘물길의 역(포구)’ 역할을 할 만했을까, 다소 의문이기는 하다. 구량천은 수심이 깊지 않기 때문이다.
농촌마을 대상의 국가지원사업을 중복적으로 받아들여 현대식 건물과 시설이 많이 들어서 있고, 전체적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모습이다.
활터와 검은들 - 궁대, 금평.
구량천 물줄기를 버리고 북서쪽을 향해, 그러니까 안성평야를 세로로 질러 금평리를 바라고 달린다. 농로를 따라 걷는 들판길은 여름이면 덥고 따분하기 마련이다. 되도록 산기슭에 연(沿)하여 걸으려는 생각에서다.
궁대마을이 그 뒤에 자그맣게 숨어있는 나지막한 언덕 하나를 격하여 금평마을은 있다.
활터[弓垈]마을.
좁고 긴 골짜기에 자리 잡은 마을이니 사정(射亭)과 과녁[貫革]을 둔 긴 활터처럼 보이기도 했겠다.
금평은 ‘큰 들의 가운데에 있어 그렇게 불렀다’고도 하고(지명총람) 마을 안내표지석에는 ‘지형이 거문고와 같아서’ 그렇다고도 하지만, 둘 다 논리정연해 보이지 않는다.
‘거문들’ 즉 ‘검은 들’이었던 것.
옛 지도로 확인하고 싶지만 너무 작은 마을이어서 실려 있는 옛 지도가 없다. 화전을 일구어 토양의 색깔이 검었다거나… 혹은, 마을취락지에서 남쪽으로 펼쳐진 들판을 바라보면 역광이어서 들이 어둡게(검게) 보였거나… 했을 것이다.
금평마을 가운데로 들어서니 회관 앞 커다란 정자나무 아래 여성주민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오두재를 넘어 다녀 본 일이 있는지 물으니, 비교적 젊은(그래도 70대 초입) 두 여성은 “우리 대(代)에서는 잘 없고 어머니 세대가 넘어 다녔었다”는 대답이다. 장사하느라고.
안성장이 지척인데 오두재를 넘어 멀리 무주읍내까지 장사를 다녔더란 말인가.
“어각치(‘어긋재’라고 추측하면서) 고개는?”
그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화장실.)
(화살표 : 오두재.)
(???)
정자나무 광장 한 옆에는 토지주택공사가 지어준 현대식 화장실이 멋진 모습으로 서 있는데 정작 들어가 보니, 아뿔싸, 관리는 거의 되지 않고 있다. 농촌마을의 현실의 한 측면이기도 하다.
‘모래실’ 사전(沙田).
더 지체하지 않고 마을을 떠난다. 19번 국도 위로 넘어가는 오버패스를 지나 사전리의 논밭으로 내려간다. 안성면의 북쪽 경계를 이루는 마지막 법정리.
사전리 시가지의 동쪽 끝으로 들어가는 곳에 재미있는 낡은 다리를 만났다.
교각은 시멘트로되 상판과 난간은 나무로 지어진 짧고 낮고 작은 다리. 그 아래를 흐르는 물(사전천)도 그리 깊지 않은 시내다. 이렇게 귀여운 다리가 아직 있을까. 옛날에는 섶다리였을, 서쪽 끝에 ‘새로 지은’ 다리가 있어 사람들이 별로 이용하지 않게 되었을, 옛 다리.
그런데도 나무가 삭으면 또 덧대고 또 덧대고 하여 수리를 거듭해 온 것이 역력히 보이는 다리다.
차가 건너갈 수는 없다. 다리 끝에 세워두고 몸만 건너갔다.
건너간 곳에도 길은 없다. 다리를 쓰지 않게 되면서 길도 자연히 소멸된 것. 남의 논자리를 잠깐 밟으면서 지나갔다.
마을 서쪽 끝의 ‘새로 지은’ 다리 사전교도 사실은 일제강점기 1933년에 지은 것이니 거의 1백년이 되어간다. 그러니 이 작은 나무다리는 그보다 더 늙었으면 늙었지 젊지 않을 것이다.
논을 밟고 건너간 산기슭에 도산(道山)서원이 서 있다. 양지바른 터에 자리를 잘 잡은 서원은 공립안성학교가 생기기 전까지 지역의 교육을 담당했을 것이다.
서원으로 가는 마땅한 길은 딱히 보이지 않았지만 논과 산의 경계를 친 옹벽 위를 조심스럽게 걸으면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축대 옹벽.)
놀라운 것은, 깔끔히 관리되고 있기는 했으나 누구를 배향한 곳이라는 표시가 없는 것.
<도산서원>과 <도산사(道山祠)> 현액만 덩그러니 걸려 있다. 열려 있어 들여다보았지만 흰 벽만 마주 볼 뿐이었다.
관리가 잘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후손이 이 마을에 사는 듯하다. 서원 앞 논 건너편에 보이는 꽤 규모 있는 저 집이 혹시 그 집일까. 나중에 필요하면 수소문하여 관리하는 분을 안내자로 초빙할 생각도 했다.
“잘 모르는 마을에 가면 그 동네 사람에게 안내를 부탁한다.” 그것이 ‘현장전문가’ 대접이고 주민에 대한 예의이기 때문이다.
정국장은 다시 차를 운전해야 하므로 작은 나무다리로 되돌아나가고, 나는 사전리 마을 안을 들러 구경하며 걸어서 마을 광장까지 나왔다.
(옛길 자리.)
사실 이 동네는 전혀 낯이 설지만은 않다. 작년 이맘 때 예기치 않은 사고로 자동차 수리를 맡긴 것이 바로 이 마을 앞의 서비스센터였던 것.
그 때 사전교 다리가 옛 것인 점이 눈에 띄어 사진도 찍고 마을 안 식당에서 점심도 먹고 그랬었다.
(나 혼자 점심 먹었던 집.)
이 사전교 앞에 있는 마을을 다릿말[교촌], 서쪽에 따로 있는 작은 마을은 동촌이라 부른다. 지명총람은 두 마을을 통칭하여 '다릿말·교촌·도촌(屠村)'을 같은 마을로 보아 “도붓장수가 집단을 이루고 살았다”고 해설하고 있는데, 1917년 지도에는 동촌을 도촌(屠村)이라 따로 부르고 있어도축업을 하던 마을이었음을 시사한다.
안성장, 신촌, 면사무소.
안성장으로 나가 꽤 유명한 2층 밥집에서 점심을 먹다.
날씨는 더웠다. 바람이 다소 일지만 햇살은 매우 강하다.
면사무소 앞을 구간의 시작점 겸 종점으로 설정하고 있으므로 이번에도 면사무소를 찾았다.
마침 최근에 준공한 새 복지회관 건물의 앞뒤로 주차공간이 충분하고 시외버스 터미널도 가까워서 시·종점으로 하기에는 모자람이 없음을 확인했다.
전국이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면사무소 출입도 자유롭지 못하다. 문을 한 곳만 열어두고 들어가려는 사람을 일일이 붙잡아 마스크를 씌운다, 손 소독을 실시한다… 통제가 엄격하다. 아침에 마스크를 썼다가 너무 답답하여 벗어버린 것이 다소 미안해진다.
굳이 들어갈 필요는 없어서 다시 나왔다.
면소재지 일대는 꽤 번화하고 시가지도 깔끔한 편.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세련된 디자인의 ‘안성 청소년 문화의집’과 복지회관 건물을 유치원으로 개조한 센스다.
장기리는 옛 지도에도 장기(場基, 장터)로 올라있던 큰 마당인데 세 물길(구량천, 통안천, 명천)이 합해져 돌아나가는 지형인 탓에 1백 년 전쯤에 대홍수로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그러다가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을을 이루면서 신촌이라는 마을이름을 붙이게 되었다고 한다.
(틀린 글자 발견. 寸은 村이 옳다. )
안성터미널, 문화 까페
원래 깨끗하던 터미널이 최근에 또 다시 리모델 하여 ‘문화까페’라는 이름으로 거듭나 있다.
현대식 건물, 세련된 인테리어.
단지 차표나 팔고 김밥과 삶은 계란을 팔던 시골 터미널의 모습이 아니다.
여러 공간으로 나뉘어 있는데 운영할 사람이나 조직은 마땅히 없는 듯, 비어 있는 곳이 많은 것이 안타깝다.
이런 곳은 ‘무진장고원길 안성안내소’로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사진을 못 찍었네요.)
오후 일정 재개.
장터에서 남쪽으로 달리면서 만나는 마을들을 훑는다.
하리목과 상리목.
넓은 터에 자리 잡은 큰 마을이며 옛 지도에도 이목(梨木, 배나뭇골)이라 크게 실려 있어 관심이 있었으나 실제로는 또 하나의 쇠락해가는 농촌마을이어서 낙담.
아래위 배나뭇골이 거의 연결되어 있는 모습이며 가구 수도 많았으나 이렇다 할 특징은 없는 농업이 전업인 마을.
사람을 거의 만나지 못했을 정도로 한적하기만 하고 빈집도 많아 보였다.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하천(아마도 명천?)의 물을 마을 안으로 끌어들여 마을안길을 따라 흘려보내고 있는 것. 물은 빨래터의 물로, 또 시가지의 먼지를 가라앉히기 위해 거리에 뿌리거나 하는 등으로 이용할 수 있겠다.
이런 형태의 '마을 안 수로'는 어릴 적 내 고향 산촌마을에도 있었는데, 그 동네는 물길이 집집마다 경유하여 담 아래를 통해 이웃집 마당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던 기억이 새롭다.
(덕유산 능선이 오랜만에 깔끔하게 보이는.)
상리목마을은 더 볼 것도 없다고 판단하고 그냥 통과, 19번 국도를 가로질러 더 남쪽으로 향한다.
한 마을(여기도 같은 '윗배남골'인지? 국도로 마을이 분단되어 버렸다) 입구에 솟을대문이 꽤 그럴 듯한 재각이 있어 잠시 내렸다. 그런데 지은 지 얼마 되지 않고 주변이 정리되지 않아 녹아내리는 흙땅이 질척거리고 걷기 힘들다.
'쿨하게' 포기.
다시 논밭 사잇길을 따라 다소 북쪽으로 달려 봉산마을로 작은 고개를 넘어가 보려 하는데,
한 소류지(골곡소류지) 어귀에서 길이 끊겼다. 자동차가 계속 진행할 수 없는 곳.
바라보니 소류지 옆 논을 밟고 지나갈 수는 있겠다.
정국장과 내가 헤어진다. 나는 논길을 따라 소류지 둑을 향해 걷고 정국장은 차를 돌려 아까 보았던 솟을대문 재각 앞으로 난 길을 지나 반대쪽에서 만나기로 하면서.
(둑 윗길. 트랙터가 다니기는 했으나 질척거린다...)
질척거리는 논땅을 걸어 겨우 둑에 도착했지만 둑 위도 땅이 녹아 매우 질다.
차가 다닐 만한 폭은 되지만 더 이상 봉산마을 고갯길로 연결되지 않으므로 굳이 이 길을 통과할 실익이 없었다.
(녹아서 질척거리는 흙길, 깊게 패인 자동차 바퀴자국...)
신발에 잔뜩 두껍게 붙은 진흙덩이를 털어내고, 차를 다시 타고 정국장과 되돌아간다.
이렇게 고생스럽게 다니는 이유도, 세세하게 묘사하는 이유도, 모두 지루한 평야지대를 단순히 농로로만 걷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예향천리 백두대간길 무주구간’을 포용한다는 원칙을 가지고는 있지만 옛 담당자가 정해놓은 루트를 별 생각 없이 그대로 답습해서야 명품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재각 앞길로 되돌아와서 그 다음 마을을 만나려고 이동.
‘원통사로’라는 이름이 붙은 길을 타고 계속 남동쪽으로 달린다. 이 일대 길이 모두 '원통사로'로 붙어있다. 주소체계를 ‘길이름 주소’로 바꾼 것도, 사찰 등을 대표로 내세운 것도 그리 잘 한 일이라고 느끼지 못한다.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원통사로는 명천을 따라 나 있는 둑길이다. 둑길도 너무 오래 다니면 지루하므로 또 논밭(신평들) 사잇길로 구불구불 돌아 들어가서 신무마을에 도착.
신무마을, '비아들'인가 '피아들'인가. 무수동은 '무순골'?
마을 유래가 새겨진 돌비석을 읽다가 그만 지쳐버렸다.
잘못 쓰인 마을이름부터가 그랬다.
신무마을인데 왜 ‘구름샘마을’이라 쓴 걸까? 이해되지도 공감되지도 않는 이야기와, 멀쩡한 우리말 이름을 한자화 해놓고 그 위에 다시 ‘억지풍수’로 해석을 덧씌운 것을 버젓이 유래라고 소개하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관행이다.
무수동(舞袖洞)은 춤출 무, 소매 수. ‘춤추는 신선의 소맷자락’이라고 해석해놓았지만 원래는 ‘무순(무서운)골’이었을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북쪽으로 난 어둡고 깊은 골짜기, 솔밭이 무성한 곳. 누구라도 무섭다는 느낌을 가지지 않겠는가.
신평(들)은 비아(들)의 다른 이름이다. ‘비아’를 또 날 비(飛), 갈가마귀 아(鴉)로 썼는데(지명총람은 ‘아’를 나방 蛾로 소개하고 있다) 이것도 우리말 이름 ‘뱃들·벳들’을 한자화한 것으로 본다. 그 ‘벳들’을 터전삼아 새로 만들어진 마을이 신평(新坪)마을.
그런데 ‘비아들’을 ‘피아들’이라 부른 다리이름·정자나무이름도 있으니 뒤죽박죽이다. (마치 ‘비암목재’를 ‘피암목재’로 잘못 부르는 것처럼)
거기에 무순골(무수동)을 합하여 신무마을이라 했는데 마을이름 표지석에는 웬 ‘구름샘마을’인가 말이다.
더 뒤죽박죽인 것은, 합해서 신무마을이라 했으니 신평(비아들)마을 안길을 ‘신무길’이라 한 것은 당연한데, 무순골 안길은 ‘무수동길’로 또 다시 분리된 것처럼 별도의 도로명을 붙여 놓은 점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나, 읽고 있는 분들이나, 모두 헷갈려서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 뻔하다.
(옛 피아들 다리?)
‘피아들 정자나무’ 아래 홀로 앉은 한 여성 주민. 한 눈에도 너무나 쇠약하고 생기가 없어 보여 쇠락해가는 마을의 상징처럼만 여겨진다.
“캔디 하나 드실래요?” 물어도 “안 먹어도 돼요.”
“커피 한 잔 드릴까요?” 해도 “안 마셔요.”
더 이상 말을 붙이기조차 미안할 정도다. 마을이름 유래나 구름샘마을이 어딘지 등은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정자나무가 있는 곳은 명천 둑 위로서, 내려다보이는 개천이 멋지고 물 옆 솔밭 가운데 놀이터처럼 만들어진 곳도 경치가 빼어나다. ‘솔밭권역 한마음센터’라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아 이 마을에도 국가예산을 투입한 숙박관광사업을 벌인 듯.
그런데 정자나무 아래의 할머니 말고는 아무도 만날 수 없을 정도로 마을은 비어 가는데 누가 있어 그런 사업을 활발히 추진할 것인가.
(아래 파랑 글씨는 최근에 얻은 정보를 가미한 문단입니다.)
저희가 답사를 다니던 2020년 2월 24일 무렵에는 관리되지 않고 있어 보이던 한마음센터, 그 무렵에 새로 채용된 사무장이 활기를 불어넣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시원한 물가의 짙은 솔밭, 한적한 산촌에서의 느긋한 휴식과 체험...
깔끔한 설비의 펜션도 이 마을에서 며칠 쉬고 싶은 욕구를 자극할 것 같습니다.
부지런한 사무장님 덕분에 마을이 달라지면 좋겠네요.
우리 '무진장고원길' 마니아 여러분도 이 길을 걸을 때는 잠깐씩 쉬어 갈 수 있으면 싶습니다.
한마음센터(펜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사무장님의 활약상은 아래 블로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댓글 탐사구경 잘 했소이다.
안성면은 처가동네이면서 그곳 우체국에서
8년('69~'77년)을 근무했던 곳이라서 감회가
새롭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윤순길 선생님이시군요.
건강 조심하시고 어서 뵐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
형님한테 미리 신고하고 물어볼 것 다 물어보고 갔어야 하는군요.
남의 동네에 가서 너무 휘저었습니다.
용서하세요~ ^^
@최태영 ㅎㅎ
너무 수고가 많으셔서
언제 밥 한끼 대접해야겠네요~~
탐사도 탐사지만 글쓰시는 것
또한 쉬운일이 아니거든...
네~
고맙습니다. ^~^
정국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