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사 上 / 험한 지세 청량사와 가난한 사하촌 주민들
무너지기 직전서
최고 인기 사찰로…
‘경운기 포교’로 佛心 날랐다
원효대사 창건한 천년고찰…80년대 광업 사양화로 쇠락
지현스님 주지부임후 경운기 몰며 마을돕기…주민 감화
<사진설명> : 탑과 선불장 불사가 진행된 뒤의 청량사 전경. 축대를 쌓기전 모습이다.
봉화 청량사는 산사음악회로 유명하다. 해마다 가을이면 열리는 청량사 산사음악회가 얼마나 세인들의 가슴을 녹였는지, 일간지 문화부장 몇몇이 꼭 가고 싶다는 민원(?)을 넣어 사찰측에서 이들을 특별히 초대한 적이 있었다. 경북도지사는 비공식적으로 살짝 구경하러갔다가 주지스님 눈에 띄어 대중들 앞에서 대환영을 받은 뒤 도내 기관장들에게 30분간 청량사 산사음악회를 ‘벤치마킹’하라는 강연을 하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입이 귀에 걸리는 호사를 누린 봉화군수는 그 뒤 청량사의 열렬한 팬이 됐다. 돼지 축제로 유명한 청량사 인근 봉성면은 축제 때보다 산사음악회 때 팔리는 돼지가 더 많아 주지스님만 보면 음악회를 1년에 4번 했으면 좋겠다는 농담 아닌 농담을 던지기도 한다. 청량사 산사음악회가 왜 유명한가. 청량산의 비경, 치밀한 기획 등 여러 요인을 꼽지만 그중에서도 구름 위에 걸린 듯한 사찰의 풍광을 최고로 친다. 사위가 캄캄한 밤에 청량사 주변에 걸린 등불과 무대 격인 탑 주위만 밝힌 모습을 멀리서 보면 마치 허공에 떠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그 이유는 청량사가 산 봉우리 바로 밑에서부터 수직으로 서있기 때문이다.
청량산은 태백산에서 갈라져 나온 일월산의 서남쪽 24킬로미터 지점에서 솟은 산으로 전남 영암의 월출산, 경북 청송 주왕산과 함께 3대 기악(奇嶽)으로 유명하다. 열두봉이 우뚝 솟은 아래로는 태백산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이 절벽을 끼고 흘러가는 천혜의 절경이다.
열두 봉우리 중에서 연화봉 기슭 한가운데 자리한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 (663)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송광사 16국사의 끝 스님인 법장 고봉선사(1351~1426)가 중창했다. 창건당시 승당 등 33개의 부속 건물을 갖추었던 대찰로 봉우리마다 자리잡은 암자에서는 스님들의 독경소리가 청량산을 가득 메웠다고 전해진다. 신라고찰 연대사(蓮臺寺)와 망선암(望仙菴)등 크고 작은 암자가 27곳이나 있었다는 청량산은 한마디로 불교의 산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 접어들면서 암자들은 하나씩 사라져가고 불교식 이름을 붙였던 봉우리들도 주세붕에 의해 유교식 이름으로 바뀌었다. 조선시대 불교를 억압하는 주자학자들에 의해 절이 점차 피폐해져 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현재는 청량사와 부속건물인 응진전만 남았다. 조선 후기 화가 겸재 정선이 그린 청량산에는 여러 암자가 보인다. 당시까지만 해도 청량사와 일부 암자는 존속했던 것으로 보여 청량산의 폐불은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지속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 청량사는 법당인 유리보전을 비롯해 응진전, 심검당, 심우실, 산신각, 선불장(요사채), 사무실, 종각, 5층 석탑, 3층 석탑, 수각, 유리정과 전통찻집인 안심당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리보전과 사무실, 심검당 심우실, 산신각이 가장 위에 나란히 서있고 그 옆에 5층 석탑이 마치 허공에 뜬 듯 청량산 전체를 내려다 보고 서있다. 계곡을 따라 계단식으로 내려선 공간과 공간 사이에는 10미터 이상 되는 석축이 떠받치고 서있다. 산 아래는 낙동강 상류가 흐르고 강 근처 10마지기도 안되는 논과 밭이 드문 드문 있다.
‘억지 춘양’이라는 말에서 보듯 탄광을 실어나르는 태백선이 지나가는 오지인 봉화는 농토가 거의 없는 최빈 지역중 하나다. 1980년대 까지 인근 태백 등지에서 탄광으로 생업을 꾸렸지만 광업이 사양길로 접어 든 뒤에는 대부분 외지로 흩어지거나 산을 개간해서 밭작물을 경작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험준한 산악 지형이 대부분이어서 큰 마을을 이루지 못하고 산골짝마다 10가구 안쪽의 소규모 자연촌이 형성되었다. 청량사 인근 마을들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청량사에 처음 불사가 시작됐던 80년대 중반까지 인근 마을은 대추나무 등 밭작물로 생계를 유지했다.
신도수도 적고 가난한데다 맨몸으로 걸어도 강에서 몇 시간이 걸리는 산 위에 있어 불사는 불가능했다. 법당격인 유리보전 아래 천길 낭떠러지 절벽이 가로막고 있어 자재를 실어올 수도, 실어온다 해도 둘 곳도 마땅치 않은 좁고 험한 청량사 구조는 불사를 가로막는 결정적 요인이었다. 청량사가 쇠락해간 것은 보수를 할 수 없는 이같은 지형 조건이 크게 작용했다. 현 주지 지현스님이 부임할 당시 법당은 수십년간 수리를 못해 비가 새고 바람을 막기에도 부족할 정도로 쇠락해 있었다.
<사진설명> : 불사전 청량사 모습. 20여년전 청량사는 유리광전과 요사채 격인 스레트 지붕 한채가 전부였다.
사라지기 직전의 사찰을 오늘날 전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찰로 만든 것은 현 주지 지현스님이다. 스님이 청량사에 부임한 것은 1984년 4월. 스님을 청량사로 보낸, 당시 고운사 주지 근일스님은 일주일 뒤 ‘젊은 주지가 도망갔는지 보러’ 청량사에 올라 왔었다. 혹시나 해서 몇 시간이나 걸려 올라온 뒤 가져 온 흑사탕을 주며 격려했던 근일스님은 2년 전 두 번째로 방문할 때는 택시를 타고 절 턱밑까지 왔었다. 20년 만에 상전벽해(桑田碧海)한 청량사를 보게된 근일스님의 놀라움과 감격은 상상하고도 남는다.
20여년전 당시 총무원 어느 부장스님이 ‘경상도에 절이 하나 있는데 가서 살려나’는 말에 지현스님은 ‘아무 생각없이’ 청량사 주지 임명장을 받았다. 당시 서울 청량리 역에서 아침 8시 기차를 타면 해가 넘어간 뒤에야 들어가던 멀고 먼 사찰이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호롱불을 켜야 했으며 장작을 땔감으로 사용했다. 청량사 가는 길은 산을 넘어 능선을 타는 길과 배를 타고 냇물을 건너 계곡으로 오르는 길 두 갈래 였다. 두 코스 모두 버스에서 내려 두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다. 스님이 부임했을 때 청량사 법당은 비가 샐 정도로 낡았고 물이 없어 빨래감을 들고 마을까지 내려가야 했다. 한여름에도 군불을 때야 잘 수 있을 정도로 추운데 먹을 쌀도, 덮고 잘 이불도 없었다. 지현스님은 “정행스님과 함께 영주가서 카시미론 이불을 4천원에 사고 제산면에 가서 쌀을 반 가마 샀는데 그걸 지고 올라 올 수가 없어서 반은 아래다 두고 다음에 져 날랐다”고 말했다. 수저가 없어 싸리나무를 꺾어 간신히 끼니를 해결하는 피난살이 아닌 피난살이가 계속됐다. 부임 첫해 부처님오신날 달린 등은 25 등이었다.
스님은 그러나 주저하거나 도망가지 않았다. 신도들이 찾지 않으니 스님이 마을로 내려갔다. 고추를 함께 따고 마을길 풀베기도 거들었다. 골짜기 마다 흩어져 있는 마을을 찾아가 아이들을 경운기로 실어와 함께 놀고 해지면 데려다 주었다. 그 유명한 ‘경운기 스님’은 그렇게 탄생했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놀기’를 4년간, 드디어 마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지현스님이 들어갔다. 하지만 불사는 여전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든이 넘은 한 노파가 왔다. 죽기 전 청량사를 찾아 참배하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었던 노파는 마침 군대간 손자가 휴가 나오자 손자 등에 업혀 올라온 것이다. 노인은 수십년은 됐음직한, 꼬깃 꼬깃 구겨진 지폐를 꺼내 주지스님에게 올렸다. 도저히 그 돈을 쓸 수 없었던 스님은 고민 끝에 불사금으로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한 노파가 남긴 13만원은 그렇게 해서 상상할 수 없는 결과를 불러왔다.
청량사 중건주 지현스님은
어린이 청소년 포교에 매진
‘좋은벗 풍경소리’총재 맡아
1971년 범어사에서 법종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노스님인 소천스님((昭天. 1897~1978) 에게 치문, 서장, 선요 등을 비롯해 금강경, 원각경 등을 배웠다. 소천스님은 용성스님을 은사로 득도했으며 광덕(光德)스님을 불문에 들게 한 인연이 있다. 일찍부터 어린이.청소년 포교의 중요성을 깨달은 스님은 젊을때부터 논산 관촉사, 서울 개운사, 영화사 등에서 어린이 청소년 포교에 매진했다.
1980년대 초반 영화사에서 어린이 법회를 보던 중 1984년 4월 청량사에 부임했다. 어린이.청소년.농민 포교에 매진, 인근의 영주와 안동에 까지 영향을 미쳐 경북 북부지역 포교에 큰 힘이 됐다. 스님의 포교 열정은 1990년대 말부터 종단에도 알려져 2001년 찬불가로 어린이들을 포교하는 ‘좋은 벗 풍경소리’ 총재를 맡았다. 영주시 장애인종합복지관 관장과 총무원 총무국장, 조계사 총무, 종회 포교분과위원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12, 13, 14대 중앙종회의원, 사회복지재단 상임이사, 함께하는 시민행동 공동대표 등을 맡고 있다. 불사와 포교 공을 인정받아 지난 2000년 조계종 포교대상을 수상했다.
[불교신문 2305호/ 2월28일자]
청량사는 1992년 가장 감명 깊은 부처님오신날을 보냈다. 이날 부처님오신날 법회는 탑전에 앉힐 향로를 강에서 산 위로 끌어올리는 운력이었다. 스님들의 목탁과 독송 소리가 청량산을 울리는 가운데 신도 200여명은 무게 600kg에 이르는 향로를 끌어올렸다. 오전 법회를 마치고 부처님오신날 종일 열린 이날 운력을 통해 신도들의 신앙심과 청량사에 대한 애정은 더 커졌다. 지현스님은 “그 어느 부처님오신날 보다 더 큰 환희심이 청량산을 가득 메웠다”고 말했다. 이 일을 계기로 청량사를 찾는 신도가 크게 늘어났다.
<20여년에 걸친 오랜 불사를 마치고 청량사는 이제 전국적으로 유명한 사찰이 됐다. 가을이면 1만여 명이 청량사 산사음악회에 참석한다.>
불가능한 일이 현실 속에 펼쳐지자 청량사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봉화군 등 관(官) 에서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신도들은 더 열심히 사찰을 찾았고 불사 동참자도 늘어났다. 스님도 자신감이 생겼다. 드디어 그동안 미뤄왔던 또 다른 난간 하나를 깨트리는 일을 벌였다. 그 일은 강에서 청량사에 이르는 길을 놓고 축대를 쌓는, 그 이전 불사가 오히려 우습게 보일 정도로 험난한 공사였다. 법당 발아래가 직각에 가까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청량사는 공간이 협소하다. 더 이상 전각이 들어설 자리도 없다. 공간 문제와 불편한 접근성을 해결할 길은 축대를 쌓아 공터를 확보하고 계곡을 따라 길을 확장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청량사는 창건당시부터 축대가 있었다. 그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유리보전 앞 석축과 범종루 뒷편 석축이 그것이다. 석축을 쌓는 일은 창건 당시의 불사를 계승하는 셈이다.
하지만 그 일은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이었다.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은 먼데다 너무 가팔랐다. 무엇보다 산 주인이 따로 있었다. 청량산은 대부분 퇴계 이황을 배출한, 진성이씨 종중 소유였다. 퇴계는 어릴 적 청량산에서 공부했으며 ‘백운암 중수기도’남겼다. 그의 고향 청량산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다.
92년 축대쌓기 착수…난공사 끝에 공간 확장
지현스님 주지 부임 14년만에 현재 모습 갖춰
가을 산사음악회 1만명 발길…전국 사찰 명성
스님은 길을 내고 공간을 넓히기 위해 진성 이씨 가문을 수도 없이 찾아 설득한 끝에 겨우 승낙을 받을 수 있었다. 우선 축대를 쌓는 일이 시작됐다. 마침 1992년부터 봉화군에서 청량사 아래 강 위에 다리를 세우고 청량에서 남면으로 넘어가는 길을 닦는 공사가 진행됐다. 청량사 토목공사 여건이 마련된 셈이다. 스님은 길 닦을 때 나온 돌로 축대를 쌓기로 했다. 문제는 이번에도 산 위까지 운반 방법이었다. 운송 수단은 경운기 밖에 없었다. 하지만 경사가 워낙 급하다 보니 경운기가 전복하는 사고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멀리 영주까지 나가 어렵게 구한 인부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보고는 모두 혼비백산 도망을 갔다. 결국 청량산과 더불어 살아 이곳 지형에 익숙한 인근 남면 사람들이 팔을 걷고 나섰다. 스님도 침목을 지게로 날라 가파르고 미끄러운 자갈길을 대신해 나무계단 길을 놓으며 길을 닦기 위한 토대를 마련해갔다. 길을 낼 때는 많은 고초를 겪었다. 공원으로 지정돼 함부로 길을 낼 수 없어 밤에만 살짝 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마저 신고가 들어가 수차례 조사를 받기도 했으며 이를 묵인해준 공무원이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처럼 축대를 쌓고 사찰까지 길을 내는 과정은 스님 신도 마을 주민.관이 혼연일체가 된 대불사였다.
어려운 여건이었지만 스님은 대충하지 않았다. 전각 하나라도 산세와 맞추기 위해 청량산을 40~50회 오르내렸다. 산과 어울리도록 법당과 같은 방향으로 축대를 쌓았다. 집을 지을 때도 시선이 불편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관심을 기울였다. 문화재 보수비로 지은 심검당과 심우당을 지을 때는 법당과 나란히 세울 것을 주장한 문화재 전문가들과 달리 다른 방향을 고집했다. 수없이 산위에 올라 고민한, 현장 경험에서 나온 판단이었다. 심우당은 스님의 의지대로 ㄱ자 형으로 꺾었다. 짓고 나자 스님의 생각이 옳았음이 드러났다.
<범종루 모습. 1998년 축대를 쌓아 올린 자리에 신도들의 보시로 만들어졌다. 청량사는 범종루를 완공하며 1만등 연등법회를 개최, 새롭게 탈바꿈한 청량사를 대외에 알렸다.>
드디어 축대가 완성됐다. 허공이 한순간에 넓은 공간으로 변했다. 꿈이 현실이 된 것이다. 스님이 축대를 쌓자 신도들이 범종루를 지어 화답했다. 스님도 신도들에게 다시 답했다. 찻집을 겸비한 휴식처를 만든 것이다.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이라는 이름을 가진 안심당(安心堂)은 사찰에 와서 기도를 한 뒤 마땅히 쉴 곳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한 주지스님의 배려가 묻어있다. 그 해가 1998년. 스님이 부임한지 14년 만이었다. 청량사는 드디어 오늘날과 같은 면모를 갖추었다. 청량사는 범종루 낙성식을 하면서 1만 등 점등 법회를 개최, 불사의 노고를 서로 위로하고 세상에 청량사의 존재를 알렸다. 청량사의 명성은 이제 산을 떠나 전국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청량사를 찾아 전국의 불자 관광객들이 봉화로 밀려들었다. 산을 끼고 흐르는 맑은 계곡과 깊은 산 그리고 허공에 떠 있는 듯한 청량사는 비경을 연출했다. 청량사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경상북도까지 관심을 보였다. 경북도는 진입 도로를 포장하고 관광객들을 위한 편의시설을 설치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2001년부터 시작된 산사음악회는 청량사를 전국적 사찰로 만들었다. 매년 가을 개최하는 청량사 산사음악회를 보기 위해 찾아온 관광버스들로 봉화군 일대는 교통마비를 겪는다. 봉화군과 청량산의 명성이 올라가자 경북도와 봉화군은 청량산과 사찰 주변 정비에 더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게 됐다. 이들 지자체는 앞으로도 청량사 진입로에 일주문 건립, 문화 예술인촌 건립 등을 계획하고 있다. 중앙정부에서도 청량사와 청량산의 역사와 지역 내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반영, 문화재청은 지난 3월13일 청량산을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으로 지정했다.
문수보살의 상주처로 알려진 청량산에서 유래한 청량산은 33 암자가 있을 정도로 부처님의 산이었다. 하지만 조선시대 유학이 득세하면서 이름도 유교식으로 강제 개명당하고 사찰은 청량사 한 곳을 빼고는 거의 사라졌다. 현재의 청량사는 청량산이 다시 부처님의 산으로 돌아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중심에는 주지 지현스님과 마을 주민들로 이뤄진 신도들이 있다.
지현스님은 “불사는 신도들과 함께 할 때 진정한 의미가 살아난다. 불사 과정 자체가 바로 신앙심을 키우는 법회의 연장”이라고 말했다. 청량사 신도들은 돈이 아니라 몸으로 불사를 도왔다. 불사가 마무리 된 지금 그들은 사찰을 일으키는데 일조했음을 자랑스러워하며 수행에 몰두한다. ‘함께’ 했던 청량사는 그래서 앞으로 ‘불사 교과서’로 사람들의 가슴에 남을 것이다.
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 청량사의 전각들
현재 청량사는 유리보전(법당)을 비롯해 응진전, 심검당, 심우실, 산신각, 선불장(요사채), 사무실, 종각, 5층 석탑, 3층 석탑, 수각, 유리정 등으로 이루어져있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5층 석탑.>
유리보전은 1705년(숙종31), 1974년 두차례 중수하고 1989년과 2000년에 보수했다. 창건연대가 오래되고 짜임새 있는 건축물로 평가받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7호로 지정됐다. ‘부처를 뽑는다’(選佛)는 뜻을 지닌 선불장은 스님들의 참선 수행처다. 종무소가 옆에 있다. 지난 1992년 지은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된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1998년 10월 준공한 범종루는 정면 3칸, 측면 1칸에 겹처마 맞배지붕의 2층 건물이다. 1998년 세운 안심당은 전통 다원(茶園)이다. 신도들의 휴식처이며 등산객들이 잠시 쉬어가는 곳이다. 선불장 옆 심검당은 2002년 개축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가운데 3칸은 강원(講院)이고 좌우 양 협실을 두었다. 템플스테이 등 수련회 공간으로도 이용된다. 심검당과 ㄱ 자 형태로 세운 심우실에 앉으면 청량산과 청량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심검당과 사이에 대청마루를 붙여 한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산신각은 가장 늦은 2003년 개축했다.
원효대사 수도위해 머문 응진전
5층 석탑엔 진신사리 5과 모셔
응진전은 청량사 부속건물로 청량사와 같은 해 생겼다. 원효대사가 수도를 위해 머물렀던 곳이다. 고려말 노국공주가 16나한상을 모시고 기도 정진한 소문난 나한기도도량이다.
탑은 2기가 있다. 지현 스님이 처음 부임했을 때 부처님이 비를 맞고 있었는데 이 비 맞던 불상 안에서 ‘훗날 인연 있는 승려가 제자리에 모시라’는 글귀와 함께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 사리 5과가 나왔다. 그 인연을 따라 유리보전 앞 사자목에 3층 석탑을 세우고 진신사리를 모셨다. 하지만 사람들의 손에 의해 석탑이 조금씩 허물어지자 이 탑은 몇 번 옮겨 다니다 산신각 옆에 최종 안착했다. 대신 1990년 5층 석탑을 현재 자리에 세우고 진신사리를 모셨다.
[불교신문 2313호/ 3월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