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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정
송강정에서
사진/ 글 김경식
면앙정에서 송강정은 지척이다. 송순이 세상을 떠난 1년 후인 1584년 서인에 속했던 정철은 대사헌이 된다. 그러나 동인들의 탄핵을 받아 1585년 대사헌직에서 물러나고 절망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소년기의 추억이 깃든 창평으로 돌아온다. 지금의 송강정 자리에 초가집을 짓고 죽록정(竹綠亭)이라 부른다. 송강정은 1770년 그의 후손들이 초가집 자리에 세운 것이다. 송강 정철은 이곳에 4년간 머물면서 20리 거리에 있던 식영정을 오고 갔다. 그러면서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비롯한 시조와 가사를 짓는다.
아마 그는 면앙정의 추억도 떠올렸을 것이다. ‘사미인곡’을 쓴 연대는 1587년으로 추정한다. 제목처럼 임금의 정을 읊은 가사이다.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남편과 이별하고 사는 부인의 심정과 비교하였다.
담양의 한 산골에서 임금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충정을 고백한 내용으로
그의 대표적인 가사 중에 하나다.
이 시기에 정철은 세상을 비관하며 음주와 방황의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이다.
이것이 훗날 기축옥사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는지 모른다.
지금의 송강정은 동남향으로 앉아 무등산과 식영정과 소쇄원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형태의 기와집이다. 전면과 양쪽이 마루이고 가운데 칸에 방을 만들었다. 송강정 옆에 서 있는 ‘사미인곡’시비를 읽는다. 소나무 숲 사이로 평야가 보이고
바로 앞으로 죽록천이 흐른다. 송강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그의 호를 따온 것이다.
전국적으로 흐린다는 일기예보에 맞게 무등산은 구름에 가려 그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이곳에서 4년간 살면서 그는 정치의 허망함을 알았을 터인데 다시 정계로 나아갔다.
이때 정계로 나아가지 않고 계속해서 문학적인 창작을 하였다고 한다면 우리 국문학사에 더 큰 발전이 있었을 것이다. 그 악명 높던 기축옥사도 없었을 것이고 그는 호남에서도 큰 호평을 받는 작가로 평가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의 운명이었을 것이다.
이곳 송강정에서 4년동안 그는 매우 고독하며 절망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 정국이 회오리바람에 휩싸이게 하는 사건이 일어 난다. 일명 ‘정여립 내란 음모 사건’이었다. 그는 선조의 부름을 받는다.
정여립은 선조 때에 자신이 벼슬에 오르지 못함을 불평한다. 호남으로 낙향한 후 대동계를 조직하고 유언비어를 만들어 내어 불만세력을 규합한다. 목자망전읍흥(木子亡奠邑興) 즉 해석하면 이씨는 망하고 정씨(鄭氏)가 일어 난다’는 설이다. 정씨는 정여립 자신이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조작이었을 것이다. 모진 고문이 만들어 내었던 책략이었을 것이다.
1589년 10월에 황해도 관찰사 한준들의 밀고로 대동계의 책략은 탄로난다. 정여립은 그의 아들 정옥남과 지금의 전북 진안 죽도로 피신한다. 도저히 현실적인 대안이 없던 정여립은 자살하고 아들은 붙잡힌다.
이 모반 사건을 처리하는 책임자로 송강 정철이 임명된다. 그는 담양에서의 비관적인 생활을 청산하고 한양으로 올라와 호기를 부리면서 주동자를 잡아 처벌한다.
서인이었던 정철은 이 사건을 자신들의 정적이며 자신을 능멸하던 동인을 처단하는 기회로 삼는다.
이 사건을 기축옥사라고 한다. 이 사건을 맡아 처리한 사람은 정철이었다. 기축옥사는 무고한 사람을 많이도 죽였다. 이발, 이호, 백유양, 유몽정, ·최영경 등은 단지 정여립과 친한 이유로 처형당했다. 정언신, 정언지, 정개청 등은 귀양을 보내고 노수신을 파직 한다.
1589년이 기축년이기 때문에 기축옥사라고 하는데 이 사건 처리는 2년이나 걸렸다. 이때 동인들은 1,000여 명이 화를 입는다. 이때 동인들은 거의 전멸을 당하다 시피 했다. 기축옥사에 희생된 사람들의 후손들은 정철을 생각하면 그 분노를 표시할 때마다 정철의 끝 자인 “철 철 철”에 욕설을 섞어 부르며
분노에 몸서리를 쳤다고 한다. 조선 정치사는 어느 편으로 기울든 모두 위험한 때였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스승 면앙정 송순 선생의 처세는 정말 뛰어났다.
이번 기행의 제목을 <송강 정철과 담양>으로 한 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나는 그런 분들도 이해시키고 싶다. 문학기행에서는 문학이 주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의 문학적인 업적을 조명하는 일은 조선의 정치사와는 좀 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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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녹정
소나무 숲에 난 경사로 계단을 오르면 송강정의 측면에는 죽녹정(竹綠亭) 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아마도 송강 정철 선생이 이곳에 살 때는 소나무 숲 아래로는 대나무 숲이었을 것이다. 그 숲 너머 죽녹천이 은빛물결로 흘렀을 것이다. 수양버들이 춤을 추는 아래로 뱃사공들은 부지런히 노를 저었을 곳이다. 지금은 그 곳에 음식점들이 차지하고 있고 죽녹천은 수량이 적어 배가 떠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송강 정철은 이곳에 초가집을 지어 살았다. 자신이 잘 나가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저기 빤히 보이는 병풍산을 올랐을지도 모른다. 넓은 들판을 거닐면서 농민들의 애환도 생각하였을 것이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 강화도에서 그는 거의 굶어죽었다고 전한다. 그가 강화도로 유배를 간 것은 동인들의 탄핵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일생은 모두 결국은 죽음으로 이어진다. 살아생전에 많은 덕을 쌓은 사람은 죽어서도 후세에게 많은 귀감이 된다. 송강 정철도 정치 세도가의 호기만 아니었다면 또한 정권욕만 없었다면 조선 최고의 문장가와 더불어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을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