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소자변(五素自辯) 「월간경기 - 1969.11」글 우문국
오소전이 금년 사월에 창립전을 가진 후 지난 구월에 제2회전을 은성다방에서 열었는데 주위에서는 다른 여러 그룹전보다 오소전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던 것 같다.
우선 '오소”라는 명칭에 대해 궁금히 여기는 것 같았다.
전 인천시립박물관장이며 미술평론가인 이경성(李慶成) 씨가 전문가가 아니라는 데서 오소의 소를 소인의 그룹으로 해석하는 이가 있는 한편 해마다 국전 서양화부에서 작품을 대할 수 있는 인천여자 상업고등학교 미술교사인 박응창(朴應昌) 씨와 선전 때 활약하다 전업으로 인하여 화업을 중단했다가 작년에 전업을 걷어치우고 그 자리에 육층 빌딩을 짓고 지금은 육층을 화실로 꾸며 제작에 전념하는 양화가 김영건(金永建) 씨가 있는가 하면 2회전에는 오소동인으로 우리나라 서예계의 대가인 검여 유희강(柳熙綱) 씨의 좌수(左手)작품이 참여하여 어떤 이들은 원로급들의 모임이라 해서 오소의 뜻이 오소리티(權威)에서 나온 것이 아니냐 하고 묻는 이도 있다.
창립전 때 전시장을 두루 살핀 유승원(柳承源) 씨도 오소의 뜻을 물어 옆에 있던 시인 한상억(韓相億) 씨가 겸손한 의미에서 소인의 그룹이라고 말하자 소인보다는 현인(프로)이 더 많은데 하고 말하여 좌중을 웃긴 일이 있다.
사실 예술작품에 있어서 아마츄어와 프로의 한계는 어떻게 가려햐 할지 모호한 점도 있다.
작가 자신이 그림을 전업으로 할 때 그를 프로라고 하고 본업이 따로 있고 그림을 여가로 할 때 아마츄어로 규정해야 할 것이나 작품중심으로 한다면 아마츄어와 프로의 구별은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십세기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전 영국수상 고(故) 처칠 경이나 일본의 유명한 문인 무자소로독 같은 이들의 그림은 프로의 작품으로 쳐도 너무나 훌륭하고,
반대로 필자 자신을 프로라고 친다면 외국의 대가나 전기한 두 아마츄어의 작품에 비해 보면 프로로서의 나의 작품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다.
지나버린 시간들은 아깝기만 하고 다시 이십대로 되돌아 가려도 그것은 되지 않는 일이다. 그러기에 이 연대는 철이 들었다고나 할까 나머지 여생의 분묘가 한결 더 소중하게만 여겨진다.
무언가 보람있는 일을 일생에 남기려고 하는 것은 저마다가 가지고 있는 소망일 것이며 뜻은 이루지 못했어도 남은 여생을 지나간 날 보다 한층,
의의있게 살아 보자는 욕망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사람이 50고개에 이르는 동안의 여러 가지 경험은 여생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밑거름이요,
체념에서 다시 새로운 작업을 하기 위한 활력소라고도 할 수 있다.
정력과 몸은 비록 쇠퇴일로에 있다하더라도 정열과 의욕은 20대 못지않게 강열한 생존의식을 불어 일으키기도 한다.
이것은 50이 넘은 사람들이 가지는 공통된 심리현상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공통성이 오소동인이 결합된 동기라고도 할 수 있다.
젊었을 때와 달리 가까운 사이라도 나이든 사람들이 자주 만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생활과 직장 그리고 주위 환경이 자연 그렇게 만들어 주고 있다. 금년 봄 어는 일요일 은성다방에서 나는 김영건 씨와 좀처럼 만나기 힘든 이경성 씨를 우연히 만나 앞으로 좀 자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 위하여 50이 넘은 사람들끼리 동인전을 가질 것을 제의하였던 바 두분이 다 찬성하여 그 자리에서 계획을 세워 보았다.
우선 50세 이상의 재인화가를 손꼽아 보니 고령순으로 박응창 . 윤갑로 . 김영건 . 우문국 . 이경성 씨의 순으로 다섯 사람이었다.
그래서 50세 이상이 오명이니 오자가 하나 더 들어가게 매인 오점식의 작품을 출품할 것을 결정하고 다음은 동인의 명칭을 무엇으로 하느냐에 들어갔다.
오자가 인연이 있으니 반드시 오자는 넣기로 하고 제각기 좋은 명칭을 구상해 보았으나 좀체로 좋은 회명이 떠오르질 않았다.
오노는 건방지고 오인은 평범하고 오육, 오봉, 오화, 오산, 오해, 오시 등등 그외 여러가지 명칭을 나열해 보았으나 모두 흡족한 것이 없어 무언가 더 좋은 명칭은 없을까 하고 묵묵히 서로 쳐다만 보고 있을 때 이경성 씨가 「소가 어떠할까 내나 월암선생(月菴先生)은 원래가 소인이니까 소박하고 소탈하고 겸손의 뜻도 곁들고 해서」하고 말했다.
「오소」 불러보니 구수하다.
어감도 좋고 오지그릇 피부같이 온화한 맛이 들어 이것을 채택키로 하였다.
처음 이경성 씨는 오소전을 일년에 네 번쯤 가지자고 말했다.
춘하추동 계절마다 한 번씩 그래야 더 자주 만나지고 무뎌가는 솜씨도 가는 의미에서 후일 윤갑노 씨와 박응창 씨에게 이 계획을 전하였든 바 두 분은 쌍수로 환영해 주어 오소동인이 발기 되었던 것이다.
창립전에서 우리는 오소전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내세웠다.
「사람이 살다보니 생활이 있고 생활이 있으니 시간의 여유가 생기어 아무 욕심도 없이 그림을 그리니 그곳에는 희로애락이 담기게 된다」
그것은 작품이라기 보다는 생활의 잉여가치라고 할까 여백이라고 할까 무엇이라고 부르든 간에 그와 같이 여기(餘技)로서의 결과가 생기게 된다.
굳이 고사에 비긴다면 문인화적 경지라고나 할까 다만 다르다면 과거의 문인화는 그것대로의 예술적 가치를 갖고 있으나 우리들의 그것에는 오직 생활적 의미가 있을 뿐이다.
이르기를 동양의 미는 노경(老境)의 미(美)라고 한다. 그러한 단순한 마음의 자세로 얽힌 우리들이기에 다섯 사람은 생활의 방법도 다르지만 그림을 다루는 솜씨도 다르다.
오직 공통된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나머지 여생을 곱게 보내고 싶은 마음뿐일 것이다.」
2회전에서는 이경성 씨가 교무에 바빠서 출품을 못하고 대신 작년 구월에 중풍으로 쓰러져 한때는 재기불능이라고 여겨졌던 검여 유희강 씨가 좌수 작품을 출품하여 이채를 띄웠는데 이로서 오소동인은 육명이 된 셈이다.
특히 유희강 씨의 출품은 오른쪽을 쓸 때의 그의 근엄하고 꿋꿋하던 필력은 덜 했으나 병중에서도 의지로서 여겨낸 이번의 좌수작품은 소탈한 가운데도 구성이 더 미술적이어서 그를 아끼는 친지들에게 그의 서예에 대한 강한 집념과 재기에 대한 굳은 신념을 보여주어 오히려 노경에든 건강한 사람들의 좌절감을 일깨워 주었고,
윤갑노 씨는 화필을 들 때만이 모든 잡념을 잊을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라고 말하듯이 씨의 작품은 나날이 생기를 띄어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