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 르비딤 므리바 생수
두 번째 연단과정에 들어간 분들의 내면적인 고민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 자신의 현실 환경 속에서는 그렇게 많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진리를 먼저 배웠기 때문에 속에서 실제 있는 것처럼 만들고, 또 그것을 증거해~ 사람들이 자기를 인정해주도록 하는 그런 얘기들을 많이 하게 됩니다.
영적 성장과정에 대해서 세밀하게 알고 있는 성도들이 어떻게 보면 엄살 부리는 식으로 조금만 고통이 다가와도 굉장한 어려움을 당하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두 번째 연단과정이라고 얘기하고 싶어합니다.
성장에 대한 욕망 때문에 날 넘어가는 생각을 잘 하게 됩니다.
므리바 생수를 마시게 될 때 우리는 뜨거워집니다.
그러면서 철저하게 살아보겠다는 결단을 하고, 또 능히 산상수훈 같은 모든 도덕적인 말씀들을 충분히 지킬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고 담대하게 달려나갑니다.
이와 같이 므리바 생수를 마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밝은 빛을 따라 도덕적으로 철저하게 살면서 하나님을 잘 섬겨보겠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향해 마귀는 화를 냅니다.
이는 마귀가 그 단계를 통과하는 성도들의 생활환경 배후에서 갖가지 시험풍파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음에 단단히 결심하고 능히 지킬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던 것을 흔들어 봅니다.
얼마든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고, 정말 깨끗하게 살겠다고, 또 예수님처럼 살겠다고, 성자들처럼 살겠다고, 마음이 뜨거우니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고,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 시험풍파가 일어나면서 자꾸 쓰러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자꾸만 훼방하는 활동을 하게 되어 있으니까요. 또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십니다.
성장론에서 보면 아말렉 군대와 싸우는 과정입니다.
환경을 사납게 만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내적으로 더욱 깊은 신앙, 더욱 영적으로 높은 신앙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인데, 사람은 한 치 눈앞을 보지 못하고 그냥 무조건 달려갑니다.
그렇지만 이런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성도들로 하여금 점점 성장하게 하십니다.
Q:
그렇다면 환경 가운데 큰 시험 풍파가 없으면, 내면적으로 고통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두 번째 연단과정에 들어간 것은 아니라고 봐야 하겠네요?
A:
그러나 의에 주리고 목마른 단계에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순간적으로는 거칠고 사나운 환경이 제거될 때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수많은 시험 풍파를 당하다가 한 주간이나 혹은 한 달간이나 시험 풍파가 잔잔해지고 순탄한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Q:
뚜렷한 연단의 흔적이 없어도 마음고생을 하니까 두 번째 연단과정에 들어왔다, 은혜를 체험했으니 므리바 생수를 맛보았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면 과거와 비교하면 환경의 변화는 거의 없단 말이지요.
A:
네. 그런 경우는 해당이 안 됩니다. 언제나 환경문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문제이니까요. 므리바 생수를 통과했는지도, 또 마음에 그렇게 더 철저히 살고자 하는 뜨거운 심정이 있었는지도, 또 그것이 실제 행동으로 옮겨졌는지도 골고루 확인해 봐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이런 밝은 빛에 대한 말씀을 므리바 생수를 마실 때 받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절제 생활이라든가 성인들의 경건 생활을 어느 정도라도 실천해 보고자 실제 행동으로 옮겼는지 이것을 봐야 합니다. 그냥 마음으로만 된 것처럼 생각하는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권사님 한 분이 신학교에 오랜만에 다시 복학하셨습니다. 그 권사님도 보니까 이 말씀을 신광야를 통과할 때 들으셨습니다.
좋은 직장을 다니셨던 그 권사님은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통하여 이 말씀을 듣고 좋긴 했는데, 실천 생활을 적극적으로 하는 데는 오래 걸렸습니다.
그러니까 거의 한 1년 지난 다음에 므리바 생수를 체험하고 두 번째 연단과정에 들어가셨습니다.
Q:
므리바 생수를 맛보면 두 번째 연단과정이 바로 시작됩니까?
A:
그렇습니다. 그것은 무조건 되는 것입니다.
그 전에 신광야를 통과할 때 밝은 빛 성경 말씀을 듣고 괜찮게 생각이 되어서 좋게 평가를 했을지라도, 적극적으로 절제 생활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의 경우는 사실상 두 번째 연단과정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생활이나 식생활, 여러 가지 면에서 절제하는 생활을 해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Q:
그러면 므리바 생수를 맛본 것이 아니네요?
A:
그렇습니다. 므리바 생수가 아닙니다. 신광야를 통과하다가 말씀을 들으면서 은혜를 맛본 것뿐입니다.
Q:
그러니까 큰 은혜를 체험해야만 므리바 생수를 마신 것인가요?
A:
또 절제 생활이나 참회 생활, 이런 것을 실천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수많은 성인처럼 그렇게 막 엄청나게 철저하게 하지는 않을지라도 어느 정도 기본적인 절제 생활은 실천하고자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마귀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법이니까요.
우리가 세상의 법대로, 세속적인 생활양식을 따라서 정욕적인 행복을 추구하면서 그냥 적당하게 산다면 마귀의 역사가 안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열심히 철저하게 살고자 하니까 비로소 거기에 맞추어 마귀의 역사가 일어나고, 우리 생활환경 속에 여러 가지 어려운 시험 풍파가 일어납니다.
그냥 세상적으로 흘러가는 물결 따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사는 사람이라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르비딤 므리바 생수를 마신 성도들은 의를 실천하고자 하고, 또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도 하게 됩니다.
은혜를 많이 받으니까 뜨거워져서 의를 실천하고자 하는데, 시험 풍파가 자꾸만 심하게 일어나면서 순간순간 실패를 많이 한다는 거예요.
죄성의 지배를 받고 정욕의 지배를 받으면서 부끄러운 일이 자꾸 생겨요.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겠다고 결심했던 것과는 다르게 자꾸 부끄러운 죄를 범하게 됩니다.
이러한 마음고생을 하면서 점점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말과 행동으로는 잘 참고 쉽게 범죄하지 않는 것 같은데 마음속에는 자꾸 악심이 생겨요. 그것을 참고, 참고, 또 참아요.
그러다가 마치 자루 속에 넣었던 송곳이 툭 솟아 나오는 것처럼, 어느 순간에 갑자기 말이나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괴로운 거예요.
사람들에게 들키고 나면 더 비참하지요. 그러면서 조용히 묵상하고 반성하노라면 ‘아, 나는 왜 이렇게 악한가? 왜 이렇게 죄에 대해서 약한가? 뭐 때문에 이렇게 추악하단 말인가?’
이래가면서 자꾸 자기 속을 들여다보는 습관이 생긴다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내면생활에 대한 반성이 습관적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야만 진덕명화(進德明化)가 되는 법이니까요. 점점 덕이 진보되고 마음에 빛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많이 성장했느냐 안 했느냐, 많이 성화되었느냐 안 되었느냐, 그것을 분별하는 것은 자기를 언제든지 반성해보는 습관이 있느냐 없느냐, 거기에 따라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에 부딪혀서 막다른 궁지에 빠졌는데, 주변 사람들로부터 속상한 말까지 많이 듣게 되면, 분통을 터트리거나 음란에 빠지거나 비방을 하거나 욕을 하고 혈기를 내게 되지요.
그것 때문에 ‘나는 왜 그렇게 연약한가? 나는 왜 그렇게 추악한가?’ 이것을 자꾸자꾸 생각하는데 이런 고민을 하다 보면 습관이 되어서, 자동으로 자기의 부끄러움을 더 쉽고 민감하게 많이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이에요.
그렇게 되면서 양심은 점점 더 밝아집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살아보자, 완전한 덕에 도달해보자, 주님을 위해서 아낌없이 드리고 사랑을 실천해 보자.’
이렇게 철저하게 살아보겠다고 결심하거나, 익은 열매라는 신앙의 목표를 세운 것이 없다고 하면, 자기반성은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