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회 청춘의 고치 성(城)
고치 성은 잊을 수 없는 성이다.
은사와 함께 우러러본 성이기 때문이다.
그 때는 1955년 1월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도다 선생님을 모시고 나는 고치에 왔다. 추운 날이었다.
이른 아침, 오사카의 이타미 공항을 나와 프로펠러 비행기로 고치 비행장에 도착, 오후에는 고치지구총회에 참석했다.
총회 장소가 고치 성 바로 옆에 있는 도사여자고등학교였다.
올려다보면 영광스러운 명성(名城)이 역사의 두루마리 그림을 펼치고 있는 것처럼 솟구쳐 있었다.
이 날 밤에는 야간열차와 배를 갈아타며 오사카로 되돌아온다는 강행군이었다.
은사 54세. 제자 27세.
고치 행을 앞둔 1월 5일, 나는 일기에 썼다.
“은사의 슬하에서 강하게 훌륭하게 자라나 죽고 싶다.
훌륭한, 광포의 인재라는 말을 들으며 죽고 싶다.
훌륭한, 도다 선생님 제자의 귀감이라는 말을 들으며 죽고 싶다.
훌륭한, 대신자(大信者)라는 말을 듣고 죽고 싶다.”
원래 몸이 약하여 30세까지 살 수 있을지 하는 말을 들은 몸이었다.
오히려 나는 도다 선생님이 계시는 동안 ‘민중구제의 싸움’에 서 전사(戰死)하자고 결심했다.
철저하게 싸워 일찍 죽는 편이 뒤를 잇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여 훌륭하게 죽어 가는 것”이라는 순교의 모습을 남길 수 있다. 그 궤적을 응시하면서 많은 청년들을 자라나게 하고 싶다 ― 그것이 거짓 없는 나의 심정이었다.
그런 나의 마음을 간파하시고 도다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너는 죽으려고 한다. 내게 목숨을 바치려고 한다. 그건 곤란하다. 너는 끝까지 살아라! 내 목숨과 바꾸는 것이다.”
자애의 스승이셨다. 선생님의 제자인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19세에 스승을 만나 서거하시기까지의 10년 간, 공사(公私)에 걸쳐 섬길 수 있었던 것이 내 청춘의 전부였다.
35년 후인 1990년에도 나는 고치 성과 잠깐 만났다. 쾌청한 11월이었다.
오전 중에 가가미 강둑을 달려 고치평화회관을 시찰했다. 시내를 달리는 도중 그리운 성의 웅자(雄姿)가 보였다. 나는 차창에서 셔터를 눌렀다.
고치 성은 시내의 얕으막한 언덕 위에 서 있다. 천수각(天守閣)은 태평양을 바라보며 우뚝 솟아 있다.
나는 ‘가쓰라하마’도 방문했는데 도사의 바다는 호쾌하다. 스케일이 크다. 아무튼 미국 서해안까지 가로막는 것도 없이 이어지는 바다다. 마음을 드넓게 해 준다.
그렇게 말하니 삼면이 바다로 열린 고치 현은 세계로 나가려고 작은 섬나라 일본에 훌쩍 등을 돌리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가쓰라하마에는 바다를 향하여 선 동상(銅像)이 있다. 도사가 낳은 ‘유신(維新)의 기적(奇蹟)’ 사카모토 료마다. 도다 선생님도 자주 료마의 이야기를 해 주셨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료마는 하나의 혜성(彗星)이다.”
또 말했다.
“하늘에 오르는 한 마리 용이다.”
“역사회천(歷史回天)의 중심축”
“근대일본의 문을 연 남자”
그 사람이 사카모도 료마였다.
그러나 유신의 대공로자였던 료마는 신정부의 인사안에 자신의 이름을 집어 넣지 않았다.
“왜?”
료마는 외쳤다.
“나의 뜻은 말이지 더 크다. 세계를 상대로 일을 하는 거네.”
“세계적인 해원대(海援隊:요즘의 종합무역상사)라도 해 볼까?”
조그만 일본에서 위대하다 한들 무엇이 되겠는가. 세계는 크다. 세계를 향해 박차고 나가는 것이다!
‘막부 말기의 세계시민’ 료마의 진면목이었다.
당시 일본인이 ‘번(蕃)’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속에서 료마는 ‘일본’ 전체의 운명을 생각하며 세계의 바다야말로 ‘나의 집’이라고 믿었다.
“사쓰마 번이 뭐냐. 죠슈 번이 어떻다는 거냐. 체면치례는 관 둬라. 결국 일본이 아닌가!”
료마가 살장동맹(薩長同盟)을 실현했을 때 실질적으로 유신은 성공했다고 해도 좋다.
료마는 실로 청년이었다. ‘불타는 불길’이었다.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거웠다. 누구에게도 불을 질렀다.
그는 진짜 청년이었다. 자유분방한 행동자였다. 그 무엇에도 사로잡히지 않았다. 급격한 진보를 거듭하면서 성큼성큼 미래를 향해 달려나갔다.
그 사람은 진짜 청년이었다. 대담무쌍한 도전자였다. 어떠한 장애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자신의 죽음조차도.
“생과 사도 사물의 표면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일을 이루는가 못 이루는가다.”
‘지사(志士)’는 사자(獅子)와 통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자’였다.
혼자만이 아니다. 모두 청년지사였다.
료마는 33세로 이 세상을 떠났다. 요시다 쇼인은 30세, 구사카 겐즈이는 25세, 다카스키 신사쿠는 29세, 하시모토 사나이는 26세… 청년들은 죽어서 일본을 이끄는 별이 되었다.
료마한테 “담배를 사 갖고 와라”는 부탁을 받아 즐거이 심부름했던 고치의 젊은이는 오랫동안 ‘동양의 루소’로 불렸다. 나카에 조민이다. 나카에는 외쳤다.
“우리 일본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철학이 없다.”
약삭빠르고 이해에는 민감하지만 도리에는 어두운, ‘현상을 따라가는’ 것을 좋아하고 ‘생각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기에 사회도 진보하지 않는다. 경박하고 위업을 건립하는 데 적당하지 않다 ― .
나카에의 탄식은 과거의 것이 되었던 것일까. 아니다!
눈앞의 이해 등을 초월하여 대위업에 몸을 바치는 신념의 청년을 일본사회는 키우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청춘의 추억의 한때가 있다. 명화(名畵)와 같이 내 마음의 미술관을 장식하고 있다.
창가학회가 아직 작고 도다 선생님의 사업도 막혀 돈도 없고 월급도 나오지 않자 이윽고 한 사람 두 사람 떠나갈 무렵이었다.
도다 선생님이 한 송이 꽃을 훈장처럼 나의 가슴에 꽃으시며 “고생을 시켜서 미안하구나. 다이사쿠는 참으로 잘 해 주고 있구나” 하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다.
이 ‘꽃 훈장’을 주위에서 웃으면서 보고 있던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광선유포의 훈장’으로서 도다 선생님이 주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귀가하여 꽃은 본존님 앞에 올리고 감사의 기원을 올렸다.
“이겨야말로 세계 최고의 무이(無二)의 훈장이다.”
지금도 나는 흉중에 은사의 ‘꽃 훈장’을 달고 싸우고 있다.
이 꽃이 피고 있는 한 내 인생은 ‘청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