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번 고전강독회 40주년 기념으로 동문 정기모임 및 송년회를 겸한 자리에 '석파정', '윤동주문학관', '창의문'을 방문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석파정에 대한 자료를 찾아서 정리했습니다.
모임 당일에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석파정(石坡亭)
석파정은 종로구 부암동에 위치한 흥선대원군의 별서에 딸린 정자 이름입니다.
현재 부르는 석파정은 이 정자와 별서 및 그 일대 공간을 통칭해서 부르고 있습니다.
이곳 석파정 주변은 원래 예부터 경치가 좋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인근에 안평대군 이용 집터인 '무계정사'가 있고, 윤치호의 별장인 '부암정'도 멀지 않습니다. 또한, 수성동계곡, 옥류동천, 백섯동천 등이 있는 곳입니다.
이곳 석파정은 원래 조선 숙종때 문신이었던 오재 조정만의 별장인 소운암(巢雲庵)이 있던 곳으로 지금도 계곡가 너럭바위에 "巢水雲簾庵"(소수운렴암)이라고 새긴 글자가 남아 있습니다. 소수운련암은 '물을 울로 삼고 구름을 발로 삼은 암자'라는 뜻입니다. 그옆에 "漢水翁書贈 友人定而時 辛丑歲也"(한수옹서증 우인정이시 신축세야)라는 글씨를 볼 수 있습니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의 수재자였던 권상하가 벗인 조정만에게 써준 것으로 때는 1721년이라고 합니다. 석파정은 18세기에도 사람이 살았던 공간입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번 고전강독회 40주년 기념으로 동문 정기모임 및 송년회를 겸한 자리에 '석파정', '윤동주문학관', '창의문'을 방문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석파정에 대한 자료를 찾아서 정리했습니다.
모임 당일에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석파정(石坡亭)
석파정은 종로구 부암동에 위치한 흥선대원군의 별서에 딸린 정자 이름입니다.
현재 부르는 석파정은 이 정자와 별서 및 그 일대 공간을 통칭해서 부르고 있습니다.
이곳 석파정 주변은 원래 예부터 경치가 좋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인근에 안평대군 이용 집터인 '무계정사'가 있고, 윤치호의 별장인 '부암정'도 멀지 않습니다. 또한, 수성동계곡, 옥류동천, 백섯동천 등이 있는 곳입니다.
이곳 석파정은 원래 조선 숙종때 문신이었던 오재 조정만의 별장인 소운암(巢雲庵)이 있던 곳으로 지금도 계곡가 너럭바위에 "巢水雲簾庵"(소수운렴암)이라고 새긴 글자가 남아 있습니다. 소수운련암은 '물을 울로 삼고 구름을 발로 삼은 암자'라는 뜻입니다. 그옆에 "漢水翁書贈 友人定而時 辛丑歲也"(한수옹서증 우인정이시 신축세야)라는 글씨를 볼 수 있습니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의 수재자였던 권상하가 벗인 조정만에게 써준 것으로 때는 1721년이라고 합니다. 석파정은 18세기에도 사람이 살았던 공간입니다.
다시 석파정 이야기로 돌아와 봅시다. 이러한 '삼계동정사'가 어떻게 지금의 '석파정'으로 되었을까요? '삼계동정사'가 흥선대원군 소유로 변하게 된 이야기는 재야 문인이었던 황현이 1864년부터 1910년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나타납니다.
"흥선은 장동김씨(부암동 일대에 살아온 안동김씨를 일컬음) 중에도 흥근을 가장 미워해 그가 소유한 땅을 빼았는다. 흥근이 북문 밖 삼계동에 별업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서울에서 가장 빼어난 곳이다. 흥선은 그 별업을 팔 것을 청한 바 있으나 흥근이 말을 듣지 않는다. 이에 흥선이 하루만이라도 놀이에 빌려줄 것을 재청한다. 대개 원정을 소유한자는 다른 사람이 놀기 위해 빌려 달라 청하면 부득이 빌려주는 것이 예로부터 습속이다. 흥근이 강권에 못 이겨 이를 허락하는데 흥선은 아들인 임금에게 권하여 그곳을 함께 다녀온다. 그 후 흥근은 임금의 발길이 머문 곳을 감히 신하 된 도리로 거처할 수 없는 일이라 여겨 다시는 삼계동 별업을 찾지 않게 되어 결국 운현궁 소유가 되었다."
이렇게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이곳을 차지하면서 이 공간을 '석파정'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석파정보다 앞선 정자는 원래 현재의 석파정 왼쪽 건너 바위 언덕에 있었는데, 지금은 '육릉모정(六陵茅亭)'라는 육각 정자 터만 남아 있습니다. 지붕을 풀이나 띠로 이었던 소박한 정자로 추정할 뿐입니다. 그런데 김흥근의 소유가 되면서 청나라 기술자를 초빙해 정자를 조성하여 '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楓樓)'라는 제법 긴 이름을 가진 정자가 생겨 납니다.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화사한 단풍을 구경하는 정자'라는 뜻입니다. 이 정자가 흥선대원군의 소유가 되면서 '석파정'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石坡(석파)는 石(돌 석)과 坡(언덕 파)자로 '돌고개 또는 돌언덕'이라는 뜻으로 큰 바위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흥선대원군의 호(號)이기도 합니다. 이하응이 낭인으로 떠돌던 30대에 추사 김정희에게 묵란을 배운 다음 석란도(石蘭圖)를 반복적으로 그리며 석란도인 '석파란(石坡蘭)'을 완성하였습니다. 그의 묵란화를 '석파란'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에서도 명성이 높았고, 또한 중국과 일본 고위 관리에서 그의 란그림을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석파란에서 자신의 호를 따고 현재의 석파정도 이름 짓게되었습니다.
이렇게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이곳을 차지하면서 이 공간을 '석파정'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석파정보다 앞선 정자는 원래 현재의 석파정 왼쪽 건너 바위 언덕에 있었는데, 지금은 '육릉모정(六陵茅亭)'라는 육각 정자 터만 남아 있습니다. 지붕을 풀이나 띠로 이었던 소박한 정자로 추정할 뿐입니다. 그런데 김흥근의 소유가 되면서 청나라 기술자를 초빙해 정자를 조성하여 '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楓樓)'라는 제법 긴 이름을 가진 정자가 생겨 납니다.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화사한 단풍을 구경하는 정자'라는 뜻입니다. 이 정자가 흥선대원군의 소유가 되면서 '석파정'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石坡(석파)는 石(돌 석)과 坡(언덕 파)자로 '돌고개 또는 돌언덕'이라는 뜻으로 큰 바위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흥선대원군의 호(號)이기도 합니다. 이하응이 낭인으로 떠돌던 30대에 추사 김정희에게 묵란을 배운 다음 석란도(石蘭圖)를 반복적으로 그리며 석란도인 '석파란(石坡蘭)'을 완성하였습니다. 그의 묵란화를 '석파란'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에서도 명성이 높았고, 또한 중국과 일본 고위 관리에서 그의 란그림을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석파란에서 자신의 호를 따고 현재의 석파정도 이름 짓게되었습니다.
석파정의 공간에는 당대의 권력을 상징하는 건축물과 구조물들이 넓은 공간에 위치해 있습니다. 안채와 사랑채, 별채가 있고, 정자로는 석파정이있으며, 천세송, 글이 새겨진 바위들, 경주에서 발견되어 2012년에 이곳으로 옮겨진 삼층석탑 등이 있습니다. 특히 '코끼리바위'로도 불리는 '너럭바위' 앞에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설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빌기도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이번 기회에 소원을 빌어보세요. 저는 이번에 꼭 아내가 아니어도 좋으니 아들 하나 낳게 해달라고 빌겠습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세도정치를 연 김조순의 별서는 옥호정(玉壺亭)입니다. 이렇듯 각 파당의 이익을 위해 가급적 궁궐에 가까운 곳에 별서를 짓고, 그곳에서 밀담을 나누거나 파당 회합을 도모하는 목적으로 부암동 일대를 선택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석파정도 이하응의 실정기에 복귀를 꿈꾸며 이 같은 기능을 염두에 두고 석파정을 조성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2023년 11월 18일
고전간독회 30기 윤상현 씀
**청운동에서 부암동 일대는 처음에 창의동이었습니다. 창의문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 불리다가 창의동 창의동 하다보니 어느 순간 장의동으로 발음하게 되어 동네 이름이 되었고, 그걸 줄여서 장동이라 합니다.
장의동에 살았던 안동김씨를 장동김씨라 하는데, 김상헌의 증조부인 김번이 안동에서 이주하여 터잡고 살았으니 역사는 오래 되었습니다. 김번이 장동김씨의 시조이고,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그로부터 시작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세도가 김조순도 장동김씨의 후손이니까요.
장동김씨들은 인왕산 일대 경치 좋은 곳에 집과 정자를 짓고 살았는데, 규모가 상당했다고 합니다. /김경희씀23.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