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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家食西家宿(동가식서가숙)
東:동녘 동, 家:집 가, 食:밥 식, 西:서녘 서, 宿:묵을 숙.
어의: 사람이 자기 잇속을 차리기 위해 절개도 없이 이리 붙고 저리 붙음을 말함.
옛날 제(齊)나라에 한 처녀가 있었다. 그 처녀에게 동, 서의 양쪽 집으로부터 며느리로 와 달라는 청이 있었다. 동쪽 집의 신랑감은 추남이지만 집은 부자이고, 서쪽 집은 가난하지만 신랑감은 이름난 미남이었다.
난처한 부모는 본인의 마음이 중요하다며, 딸에게 물어 보았다.
“만일 동쪽 집으로 가고 싶거든 왼쪽 소매를 걷고, 서쪽 집으로 가고 싶거든 오른쪽 소매를 걷어라”
잠시 망설이고 있던 딸은 양쪽 소매를 다 걷어 올렸다. 부모가 깜짝 놀라며 그 이유를 물으니 딸은 이렇게 대답했다. “낮에는 동쪽 집에서 좋은 것을 입고 먹으며, 밤에는 서쪽 집에서 자고 싶어요.”
우리나라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다. 대동기문(大東奇聞)이라는 책에 실려 있다.
이태조가 개국한 후 조정에서 주연을 베풀었다. 그때 모 정승이 술에 취해 설중매(雪中梅)라는 기생에게 말했다. “들으니 너는 아침엔 동가식하고 저녁에는 서가숙한다 하니, 오늘 밤엔 이 늙은이를 잠자리에 모시지 않겠는가?” 그러자 그 기생이
“동가식서가숙하는 천한 기생이 왕씨를 모시다가 이씨의 정승을 하는 어른을 모신다면 궁합이 잘 맞을 것입니다.” 라고 말해, 듣는 이들의 콧마루가 시큰시큰했다 한다.
東家之丘(동가지구)
東:동녘 동, 家:집 가, 之:갈 지, 丘:언덕 구.
뜻 : 동쪽 집에 사는 공자(孔子). 가까이에 있는 유명한 인물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고대 중국의 사상가이자 교육자였던 공자((孔子. B.C.552~B.C.479)는 성이 공(孔)씨였고 이름은 구(丘)였으며 자는 중니(仲尼)였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그에게는 제자가 무려 3천 명이 되었는데 이들 중 이름을 남긴 사람만 해도 72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중국의 통치자들은 역대에 걸쳐 대부분 공구를 숭상했기 때문에 그를 높여 공자라고 불렀을 뿐 아니라 성인(聖人)으로 추앙하였다. 그 때문에 2천4백여 년 동안 중국에서는 공자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자가 살아 있을 때는 그의 명성이 그렇게 대단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공자가어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공자의 서쪽 이웃에 살고 있던 사람조차 동쪽 집에 누가 살고 있으며 어떤 인물인지 잘 몰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매번 공자에 대해 말할 때마다 조금도 꺼리지 않고 공자의 이름을 척척 불러 가면서 “우리 동쪽 집에 살고 있는 구(俺東家之丘. 엄동가지구)가 어찌어찌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후한(後漢) 때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삼국지 병원(邴員)전의 주석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남아 있다.
병원이라는 사람이 젊은 시절에 학문이 높은 스승을 만나기 위해 사방을 두루 주유하고자 하였다. 그때 어떤 사람이 ‘자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계신데 하필이면 멀리까지 가려고 하는가?’ 라고 귀뜸해 주었다. 이에 병원은 강성선생을 찾을 수 있었다. 강성선생의 본명은 정현(鄭玄)인데 무려 제자 천여 명이나 길러낸 대 유학자였다.
이렇게 해서 병원은 정현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하는데, 처음에 병원은 정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병원이 정현(鄭玄)을 동쪽 집에 살고 있는 구(丘)로 알았다.’ 고 했다는 것이다.
東郭履(동곽리)
東:동녘 동, 郭:성곽 곽, 履:신 리.
어의: 동곽의 신발이라는 뜻으로, 매우 가난함을 비유함.
출전: 사기 활계열전(滑稽列傳)
무제 때 대장군 위청(衛靑)은 흉노를 무찌르고 여오수(余吾水)부근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적의 머리를 베고 포로들을 잡아 공을 세웠으므로 그가 돌아오자 황제는 조서를 내려 황금 1000근을 주었다.
위청이 궁궐을 나서자 그 당시 공거(公車.소정의 공문과 신하나 백성들의 상소문을 처리하는 부서)에서 조서를 기다리고 있던 동곽(東郭)이 위청의 수레를 가로막고는 절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왕 부인께서는 새로이 황제의 총애를 듬뻑받고 있지만, 집이 가난합니다. 장군께서 황금1000근을 받으셨으니 그 절반을 왕부인의 부모님께 주십시오, 황제께서 이를 들으신다면 분명 기뻐할 것입니다. 이것이 기이하고도 편리한 계책입니다.”
위청은 동곽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황금 500근을 왕 부인의 부모님께 주었다.
며칠 후 이 소식을 들은 왕 부인은 위청이 베푼 행동에 감사하며 무제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그러자 무제는 의외라는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
“위청은 이러한 일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오.” 그리고는 위청을 불러 이렇게 물었다.
“이러한 계책을 누구에게 받았는가?” 위청이 말했다.
“조서를 기다리고 있는 동곽에게서 받았습니다.”
이에 황제는 조서를 내려 동곽을 부르고 군도위(郡都尉. 군의 태수를 보좌하여 병사문제를 관장하는 벼슬)로 임명하였다. 동곽은 꽤 오랫동안 공거에서 조서를 기다렸으므로 빈곤하여 굶주리고 추위에 떨었으며 옷은 떨어지고 신발도 온전치 못하여 눈 속을 걸어가면 신발 위는 있어도 밑바닥이 없어서 발이 그대로 땅에 닿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동곽의 이런 모습을 보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이에 동곽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누가 신발을 신고 눈 속을 걸어가면서 위는 신발이고 아래는 사람의 발임을 알 수 있게 하겠는가?”
동곽리는 집안 형편이 매우 가난했던 동곽의 신이 닳고 닳아 신의 윗부분만 있고 밑바닥은 없어 발이 그대로 땅에 닿았다는 데서 나온 것으로 가난의 정도가 매우 극심했음을 알게 해 준다.
東道主(동도주)
東:동녘 동, 道:길 도, 主:주인 주.
어의: 주인을 가리켜 이르는 말.
출전: 좌전 희공30년조
춘추시대 진(晋)나라의 공자 중이(重耳)는 나라 밖으로 달아나서 19년 동안이나 망명생활을 했는데, 정(鄭)나라를 지나갈 때 크게 모욕을 당한 적이 있었다. 나중에 중이는 귀국해서 임금(晋文公.진문공)이 되자 정나라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을 갚는 동시에 정나라와 초(楚)나라 사이의 관계를 깨뜨리고자 진(秦)나라와 손잡고 정나라를 공격하게 되었다.
정문공이 두 나라의 공격을 받게 되어 궁지에 몰리자 대부 일지호(佚之狐)가 나서서 계책을 올렸다.
“촉지무(燭之武)를 보내 진목공(秦穆公)에게 철군할 것을 진언한다면 우리나라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정문공은 일지호의 말대로 축지무를 파견하기로 하고 그날 저녁 그에게 밧줄을 타고 성벽을 내려가 감쪽같이 진군(秦軍) 진중으로 가서 진목공을 만나게 하였다. 촉지무는 진목공 앞에 나가 인사를 한 다음 유세하기 시작했다.
“진진(秦晋) 양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공격하니 이제 정나라는 결국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정나라는 진(秦)나라와 접해 있지 않습니다. 정나라는 동쪽에 있고 진나라는 서쪽에 있어 가운데 진(晋)나라가 끼어 있으니 정나라가 망하는 날이면 그 영토는 가까운 진(晋)나라에게 돌아갈 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진나라의 이웃인 진(晋)나라는 강성해지고 진(秦)나라는 도리어 약화될 것입니다. 그런즉 저는 대왕께서 무엇 때문에 정나라를 멸망시키고 진(晋)나라를 강하게 하면서 자신의 나라는 약화시키려고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에 진목공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곧 철수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촉지무는 진목공에게 이런 말도 하였다.
“대왕께서 만일 정나라를 동도주(東道主)로 만든다면 귀국의 사절들이 동방의 길을 지나갈 때 정나라는 주인으로서의 책임감으로 귀빈들을 잘 맞이할 것이니 결코 대왕께서는 불리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진(晋)나라의 침략욕심은 만족될 날이 없을 것인즉 그들이 동쪽에서 정나라를 멸망시킨 다음에는 서진해서 진(秦)나라까지 영토를 확장하려고 하지 않으리라 어떻게 장담하겠습니까? 대왕께서는 심사숙고(深思熟考)하시기 바랍니다.
진목공은 들으면 들을수록 촉지무의 말이 일리가 있는 것 같아 마침내 소리 없이 병사들을 거두고 말았다. 일이 이쯤 되자 진문공은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종욱 엮음 고사성어 대사전에서)
同流合汚(동류합오)
同:한가지 동, 流(류):흐를 류, 合:합할 합, 汚:더러울 오.
어의: 사람이 악한들과 휩쓸려 나쁜 일만 저지른다는 뜻이다.
출전: 맹자 진심장구(盡心章句) 하편
어느 날 맹자는 그의 제자 만장과 마주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일찍이 공자님께서는 향원(鄕原)들을 가장 꺼려했는데 그들을 예의가 없는 놈들이라고 하셨다.”
“모두 다 그런 사람들을 좋은 사람이라 하고 또 그들 스스로도 좋은 사람으로 자처하는데 왜 공자님께서는 예의 없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까?”
“그건 나쁜 습속에 휩쓸려 세상을 어지럽히는 (同乎流俗 合乎汚世. 동호유속 합호오세)사람들 중 겉으로 보기에는 성실하고 청렴결백(淸廉潔白)한 것처럼 보여 모든 사람들이 좋다고 하고, 또 그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실은 그런 사람들은 결코 좋은 일을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공자님께서는 그들을 가리켜 예의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하신 것일세.”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동류합오라는 성어는 바로 同乎流俗 合乎汚世(동호유속 합호오세)의 준말이다.
(임종욱 엮음 고사성어 대사전에서)
同病相憐(동병상련)
同:한 가지 동, 病:병 병, 相:서로 상, 憐:불쌍히 여길 련.
어의: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끼리 서로 불쌍히 여겨 동정하고 돕는 다는 말.
출전: 오월춘추(吳越春秋), 사기(史記)
춘추 시대 오(吳)나라와 월(越)나라의 쟁패전에 등장하는 오나라의 오자서(伍子胥)와 백비(伯嚭)에 관한 이야기다. 오자서는 원래 초(楚)나라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형이 초나라 왕에 의해 죽었기 때문에 그 원수를 갚으려고 초나라와는 원수 사이인 오나라의 왕을 섬기게 되었다. 백비도 역시 초나라 사람이었으나 조부를 초나라 왕이 죽였기 때문에 보복할 생각을 품고 오나라에 왔다.
두 사람이 오나라 왕 합려(闔閭)를 섬기게 되었을 때 오나라의 대부 피리(被離)가 오자서에게 말했다.
“당신은 왜 백비를 신용하십니까? 그는 아무래도 믿을 수 없는 사람처럼 여겨지는데요?”
”그것은 당신의 지나친 생각이오,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초나라에 대한 원한이 깊소, 이런 노래도 있지 않습니까?
同病相憐(동병상련) 같은 병을 앓는 사람끼리 서로 가엾게 여기고
同憂相求(동우상구) 같은 시름이 있는 사람끼리 서로 돕는다.
누구든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돕는 것은 인지상정이오.”
“그도 그렇지만, 그 사람은 거동이 조잡스럽고 엉큼합니다. 너무 가까이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그런 일은 없을 것이오, 나는 그를 믿습니다.”
오자서는 끝까지 백비를 감쌌다.
두 사람은 합려를 도와 9년간 함께 일했다. 그리고 마침내 초나라 소왕의 군사를 무지르고 여러 해 쌓인 한을 풀었다.
그러나 그 후 피리가 염려한 대로 일이 벌어졌다.
합려가 죽은 후 두 사람은 그 아들 부차(夫差)를 섬기고 있었다.
이때 오나라와 월나라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월나라로부터 뇌물을 받아 매수된 백비는 자기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친구 오자서를 모함에 빠뜨려 오자서는 결국 분사(憤死)하고 말았다.
東山再起(동산재기)
東:동녘 동, 山:뫼 산, 再:두 번 재, 起:일어날 기.
어의: 어떤 일이나 벼슬을 그만 두었다가 다시 하게 되는 경우에 쓰이는 말이다.
출전: 진서 사안전(謝安傳)
동진(東晉) 때 진무제의 대신 사안(謝安 320-385)은 선비로서 수양과 기품이 있어 젊어서부터 명성이 높았다. 양주자사 유빙이 여러 차례 벼슬길에 나갈것을 권고했지만 번번이 사양하다가 나중에 더는 사양할 수 없게 되자 마지못해 부임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달가량 지나자 그는 핑계를 대며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나중에 벼슬을 높여 다시 불러도 그는 듣지 않았으며 이부상서 범왕(范王)이 이부랑으로 추천하여도 여전히 응하지 않고 회계군 (오늘의 철강성 소흥)의 동산(東山)에 가서 은거 생활을 하는 것으로 정치에 뜻이 없음을 표시하였다.
그러다가 당시 남군공(南郡公)로 있으면서 군사 대권을 장악하고 있던 환온(桓溫 312-373)이 부르자 사안은 그제야 산에서 내려와 환온의 수하에 들어가 사마(司馬)는 직책을 맡았다.
환온이 죽은 뒤에는 상서복야(尙書僕射)로 승진했는데, 지위는 재상과 대등했다. 그리고 북방 전진(前秦)의 국왕 부견이 남침했을 때 사안은 정토도독이 되어 조카인 전무장군 사현(謝玄343-388)과 함께 부견의 백만 대군을 비수에서 보기좋게 물리쳤다. 이것이 바로 역사상 작은 힘으로 우세한 상대를 이긴 비수의 싸움이었다.
東床禮(동상례)
東:동녘 동, 床:상 상, 禮:예도 례.
어의: 동쪽 평상 위에서 배를 드러내놓고 밥을 먹는다는 뜻으로, 혼례식이 끝난 뒤 신랑이 신부의 집에서 마을
사람들과 친구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일을 말한다.
출전: 진서(晉書) 열전 권50과 세설신어 아량(雅量)편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왕희지(王羲之)는 자가 일소(逸少)다. 왕광(王曠)의 아들이자 사도(司徒)인 왕도(王導)의 조카로 글씨를 잘 쓰기로 유명했다. 당시 진류(陳留)지방에 명망가 완유(阮裕)가 살고 있었다. 왕도는 조카 왕희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애는 우리 집안의 뛰어난 인물로, 완유에 뒤지지 않을 것이오.”
어느 날 태위(太尉)가 왕도에게 사람을 보내 사윗감을 구했는데, 왕도가 동상(東床)으로 안내해 자제들을 살펴보기로 했다. 여러모로 살피고 돌아간 사람이 태위에게 말했다.
“왕씨집 자제들이 훌륭하긴 했지만 모두 다들 사위가 되려고 노심초사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이 동상에서 배를 드러내 놓고 태연히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왕희지였고 사윗감으로 선택되었다. 모든 형제들이 그의 결혼을 축하하며 큰 잔치를 베풀었다.
(임종욱 엮음 고사성어 대사전에서)
東施效颦(동시효빈)
東:동녘 동, 施:베풀 시, 效:본받을 효, 颦:찡그릴 빈.
어의: 억지로 남을 모방하지만 결과적으로 웃음거리 밖에 안 되는 경우를 비유해서 일컫는 말이다.
출전: 장자 천운편(天運篇)
전하는 말에 따르면 춘추시대 월나라에는 서시(西施)라는 천하 절색의 미녀가 살았다.
오월춘추(吳越春秋)나 월절서(越絶書)의 기록에 보면 처음에 어떤 사람이 이 미녀를 발견하고 오왕 구천(句踐)에게 바쳤는데 구천은 다시 그녀를 월왕 부차(夫差)에게 바쳤다. 그 후 구천이 월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다소 공로가 있던 서시도 크게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이후 2천여 년 동안 사람들은 서시를 전형적인 미녀의 대명사로 간주하면서 미모가 출중한 여자들을 가리켜 ‘아름답기가 서시와 같다.’고 했다.
그런데 서시의 전설로부터 동시(東施)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
장자 천운편(天運篇)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서시는 속병(아마도 위장병이었던 듯)이 있었던 모양으로 언제나 가슴을 가볍게 붙잡고 양미간을 가늘게 찡그리곤 했다. 그런데 서시는 워낙 예쁘게 생겼기 때문에 그의 이런 태도는 조금도 밉게 보이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다.
이때 서시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아주 추하게 생긴 여자가 살고 있었는데 서시를 한 번 보고는 찬탄을 금치 못했다. 그래서 서시를 흠모한 나머지 늘 서시의 자태를 모방하여 자신도 가슴을 지그시 누르고 양미간을 힘껒 찌푸린 채 다녔다. 그러면 자기도 아름답게 보이리라 여긴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본래 추하게 생긴데다가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다녔으니 그 자태가 괴상망측(怪常罔測)했으리란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리하여 그를 보는 사람들마다 모두 얼굴을 돌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이 성어의 뜻은 부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긴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스스로 겸손을 표시하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런데 동시(東施)라는 것은 후대에 만들어 낸 인물인 듯 <장자 천운편>의 기록에는 나오지 않고, 청나라 사람 적호의 <통속편 23절 부녀> 중 <태평환우기>에서 처음으로 나온다.
(임종욱 엮음 고사성어 대사전에서)
同心同德(동심동덕)
同:한 가지 동, 心:마음 심, 德:덕 덕.
어의: 같은 목표를 위해 다 같이 힘쓰고 노력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출전: 상서 태서편(泰西篇)
주나라 무왕이 군사를 일으켜 상나라 주왕을 징벌할 때 무왕의 군사들은 황하를 건너 조가라는 곳에 이르러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다.
거기서 무왕은 ‘태서’를 공포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상주왕께서는 군사들과 관리들이 많아도 합심이 되지 않아 오합지졸에 불과하지만 우리 군사들은 모두 다 하나의 목표로 뭉쳐 있다.’
내용인즉 난국을 이겨 내기 위해 ‘한 마음 한뜻으로 목숨 걸고 싸워 큰 공을 세우자.(一德一心 立定厥功. 일덕일심 입정궐공)는 뜻이다.
동심동덕과 일덕일심은 일심일덕(一心一德)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동심동덕의 반대로 이심이덕(離心離德)이라는 말이 있다.
桐葉封弟(동엽봉제)
桐:오동나무 동, 葉:잎 엽, 封:봉할 봉, 弟;아우 제.
어의: 장난삼아 오동나무 잎으로 동생을 제후(諸侯)에 봉한다는 뜻으로, 제후에 봉하는 일을 말한다. 말을 삼가
라는 가르침이 담긴 성어다.
출전: 사기 진세가(晉世家)
어린 나이로 등극한 주성왕(周成王)이 동생 숙우(叔虞)와 소꿉놀이를 하면서 농담으로 오동나무 잎을 규(珪:標信.표신)로 삼아 숙우에게 주면서 말했다.
“이것으로써 너를 제후에 봉하노라.”
이 말을 전해들은 사일(史佚)이 성왕에게 길일(吉日)을 가려 숙우를 제후에 봉하는 의식을 거행하자고 주청(奏請)하였다. 그러자 성왕은 그때 일은 장난삼아 한 일일뿐이라고 말했다. 이에 사일은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천자에게는 장난으로 하는 말이 없는 법입니다. 말씀을 하면 사관이 기록을 하고 이를 거행하는 예식이 이루어지며 음악으로 노래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숙우는 당(唐)에 봉해졌다. 사일의 말에서 천자무희언(天子無戱言)이란 성어도 나왔다.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만큼 말을 삼갈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임종욱 엮음 고사성어 대사전에서)
冬日之日(동일지일)
冬:겨울 동, 日 :해 일, 之:갈 지.
어의: 겨울날의 태양처럼 화기애애(和氣靄靄)하고 사랑스럽다는 뜻이다.
조최(趙衰(쇠)와 그의 아들 조순(趙盾)은 춘추시대 진(晋)나라의 유명한 공신들이었다.
조최는 재능 있는 정치가였을 뿐만 아니라 진문공의 둘도 없는 모사(謀士)였는데 일찍이 진문공 중이(重耳)의 부왕인 진현공의 박해를 받아 외국에 가서 망명생활을 할 때 조최와 호언(狐偃) 등이 줄곧 그를 따라 다니며 충성을 다 했으며 그에게 좋은 계책을 제공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년 뒤 중이가 귀국하여 왕위에 올라 진문공이 되자 조최는 그를 전력 보좌해서 국정을 보살피게 되었는데, 진문공이 춘추오패(春秋五覇)가 된 데는 조최의 역할이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진문공이 세상을 떠나고 양공이 즉위한 뒤에도 조최는 여전히 충성을 다하면서 진나라를 위해 그의 일생을 바쳤다.
조최의 아들 조순도 재능 있는 사람으로 진양공 때 재상으로 있으면서 많은 치적을 쌓은 바 있다. 양공이 죽은 뒤 일부 대신들은 일곱 살 난 공자 이고를 임금으로 세우려 하였지만 조순은 너무 어리다고 하면서 반대하였다. 대부 호사고(狐射姑. 즉 호언의 아들)는 공자 락을 임금으로 세우려 했는데 조순은 여전히 듣지 않고 공자 옹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다가 조순이 끝내 이고를 세우니 그가 진영공이었다.
진영공은 유치한 구석이 있는데다가 무능하고 방자하여 무모한 임금이었다. 조순이 몇 번인가 간곡하게 간언을 올렸지만 그는 끝내 듣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를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이에 조순은 부득이 잠시 도성을 떠나게 되었다. 얼마 후 진영공이 조찬에게 시해되자 그제야 조순은 돌아와서 진성공을 세우고 계속 왕을 섬겼다.
당시 사람들은 조최와 조순 두 부자를 공신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 두 부자의 성격은 판이하게 달랐다.
좌전 문공7년 조에 보면 어느 날 어떤 사람이 호사고에게 물었다.
“조최와 조순은 어떤 사람들인가?”
호사고가 이에 대답하였다.
“조최는 겨울날의 해와 같고, 조순은 여름날의 해와 같다.”(趙최冬日之日也 趙盾夏日之日也. 조최동일지일야 조순하일지일야)
성구 동일지일은 바로 호사고의 이 말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하일(夏日)과 같은 뜻으로 추상(秋霜)이라는 말도 있는데, 모두 다 정직하고 인격이 높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서 하일추상(夏日秋霜)이라고도 한다.
(임종욱 엮음 고사성어 대사전에서)
銅臭(동취)
銅:구리 동, 臭:냄새 취.
어의: 동전에서 나는 냄새라는 뜻으로, 돈으로 벼슬을 산 사람을 비웃는 말이다. 오늘날에는 뇌물을 써서 일을
이루려는 짓이나 그런 인물을 가리키는 말에 두루 쓰인다.
출전: 후한서 최열전(崔烈傳)
후한 말 영제(靈帝) 때 왕조 말기 증상이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신흥 종교인 태평도가 비밀결사를 이루어 황건적(黃巾賊)의 난을 일으키고, 조정에서는 환관이 득세하여 권력을 독점한 채 매관매직으로 사복을 채우는 등 나라 안팎이 혼란의 극을 치닫고 있었다. 더구나 황제는 사치한 생활을 거듭하여 국고를 탕진하였다.
조정에서는 고갈된 국고를 채우기 위한 대책으로 급기야 홍도문(鴻都門)을 열어 관직과 작위를 공공연하게 매매하였다. 이때 최열이라는 사람이 유모를 통해 5백 만전을 내고 사도(司徒)라는 관직을 샀다.
그리고는 주위의 반응을 보려고 아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내가 지금 삼공의 자리에 있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느냐?" 그러자 아들이 대답하였다.
"아버님은 젊어서는 영민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대신과 태수의 자리를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버님이 삼공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햇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아버님이 그 지위에 오르자 천하 사람들은 모두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최열이 그 까닭을 물으니 아들이 다시 대답하였다.
"사람들이 돈냄새(銅臭.동취)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십팔사략(十八史略)에도 나온다.
董狐之筆(동호지필)
董;감독할 동, 狐;여우 호, 之;갈 지, 筆:붓 필.
어의: 역사가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진실대로 쓰는 것을 말함.
출전: 춘추좌씨전
춘추 시대 진(晋)나라의 영공(靈公)은 무거운 세금을 징수하여 사치한 생활을 한 폭군이었다.
전망대 위에서 탄환을 던져 사람들이 갈팡질팡하는 것을 보고 흥겨워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곰 발바닥을 잘못 구웠다고 요리사를 죽이기도 했다.
이에 대부 조순(趙盾)이 자주 영공에게 간했지만 듣기는 커녕 조순을 죽이려고 자객까지 보냈다.
자객이 새벽에 조순의 집에 숨어 들어 갔더니 조순은 벌써 입궐할 준비를 하고 예복을 입은 채 졸고 있었다. 자객은 그 근엄함을 보고는 차마 죽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왕명을 어기고 그냥 돌아갈 수도 없어 조순의 집에 있는 큰 홰나무에 머리를 부딪쳐 죽고 말았다.
그 후 영공은 조순을 주연에 초대하여, 미리 병사를 매복시켜 놓았다가 암살하려고 햇으나 조순을 호위하던 시미명 (提彌明)이라는 자가 그것을 알고 조순을 보호하여 달아났다.
영공은 두 마리의 큰 개를 풀어 쫓게 했으나 시미명은 그 개를 때려 죽이고 덮치는 병사들을 베어 죽였다. 그 때 병사들 중에 조순이 목숨을 살려 준 일이 있는 영첩(靈輒)이라는 자가 있어 창끝을 돌려 병사들을 막아 조순을 도망치게 했다. 하지만 조순은 국경을 넘기 직전에 대신 조천(趙穿)이 영공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왔다.
그러자 태사(太史) 동호는 궁전의 기록에 이렇게 적었다.
"조순 그 임금을 시해하다"
이에 조순이 항의하자 동호는 이렇게 말했다.
"물론 대감은 하수인이 아닙니다. 허지만 당신은 대부이면서 국외로 달아나려 하셨습니다. 비록 임금이 시해당한 사실을 알고 국경을 넘지 않고 돌아오셨습니다만 하수인을 처벌하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시해한 책임자는 당신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조순은 그의 말에 수긍하고 시역자의 오명을 뒤집어썼다.
훗날 공자가 이 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동호는 훌륭한 사관이다. 법을 어기지 않고 직필했다. 조순도 역시 훌륭한 대신이었다. 법을 위해 잠자코 오명을 참았다. 애석한 일이다. 그 때 국경을 넘었더라면 이 오명을 쓰지 않았을 터인데"
출처:1)고사성어 이야기 윤미길 엮음, 2)고사성어 대사전 임종욱 엮음. 3)신 고사성어 백과사전 신옥희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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