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로 주변에는 아직도 빗물이 고여있다.
태희는 그를 말리던 주민을 밀치고 선로에 뛰어들 기세였다. 몸집이 크지 않은 데도 불구하고, 그의 다부진 체격에서 나오는 힘은 두 사람이 달려들어도 쉽게 막아낼 수 없었다.
"학생, 거긴 강이 아니야!" 태희의 오른쪽을 붙잡은 중년이 외쳤다.
"사람이, 사람이 떠내려 가요! 빨리, 빨리 구하지 않으면...!" 태희는 절규하면서 계속해 몸을 버둥거렸다. 처음 이 마을에 왔을 때 본 청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
태희가 처음 왔을 때, 마을 사람들은 그가 외지인인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워낙 사람이 없는 동네였기 때문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그의 옷차림이었다. 장마철이면 이 곳 주민이 으레 그렇듯, 싸구려 바지에 낡아빠진 신발을 신고 있었다. 폭우는 유독 이 마을에서 심했고, 몇 년 전 찾아온 어느 가족은 이 사실을 몰라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태희는 이 마을에 확실한 목적을 갖고 찾아온 듯 했다. 생각해 보면 폐선 옆으로 늘어선 집이 고즈넉하기도 하고, 마을 구석구석 자라난 나무가 한가로이 풍경을 꾸며주니 관광객이 찾아올 법 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나는 외지인은 옆 동네에 가려다 길을 잘못든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자연스레 이 낯선 청년에게 관심이 쏟아졌다. 눈치가 보여 선뜻 나서지 못하는 주민들 대신 이장이 나섰다. 태희는 험악해 보이는 인상과 달리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신가요? 저는 전태희라고 합니다. 친구의 소개로 왔는데, 듣던대로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네요. 특히 저 붉게 녹슨 선로와 회갈색 자갈이 배경의 나무들과 어우러지는 모습이요." 안 어울리는 성우가 배정된 외화가 이런 느낌일까? 알찬 근육과 각진 두상, 사자 같은 눈빛을 가진 사내가 꺼낸 말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아, 그렇지. 뭐 많이들 그렇게 말하더라고." 당황한 이장은 되는대로 맞장구를 쳤다. 그러고 잠시 후,
"가만, 친구라고? 친구가 여기 사람인가?" 이장이 되물었다.
"네. 정확히는 어릴 적 이곳에 살았대요. 할아버지 집이 여기라고." 태희가 답하자, 이장은 반색하며 다시 물었다.
"이런 인연이 있나! 혹시 그 분 성함이 어떻게 되던가? 내 아는 사람이면 안내해 줌세!"
"아, 그 분 성함은 -" 태희가 이름을 언급하자, 이장의 미소가 사그라들었다.
"그 양반도 알긴 안다마는…." 이장은 조금 주저하다가, 태희의 실망스런 표정을 보고 길을 안내했다.
이장이 안내한 곳은 선로 주변 낡은 집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집이었다.
"어르신요, 계십니까? 손님이 왔어요!" 이장이 우렁차게 소리쳤지만, 답은 없었다.
"이 양반 또 그 집 가서 자고 있는 거 아냐?" 속삭임에 가까운 혼잣말이었지만, 곁에 있던 태희가 듣기엔 충분했다.
"그 집? 선로 옆에 늘어선 폐가를 말하는 건가요?" 태희의 질문에, 이장은 난처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 그게. 그 양반이 이사온 지가 언젠데 아직도 거기가 당신 집인 줄 알어. 그, 뭐냐. 좀 오락가락하셔." 이장은 까치발로 서서 담장 너머를 슬쩍 보고는 노인이 집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진짜 거기 계신갑네. 보일러도 없는데 입 돌아가면 어쩌려고 그러나 몰라? 참, 그러고 보니 그쪽은 학생한테 아무 말 안 하던?" 태희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하긴, 안 찾아온 지도 꽤 됐고, 상태를 알아도 남한테 떠벌릴 일은 아니지."
이장은 다른 사람과 함께 노인을 데려오겠다며 태희를 남겨두고 떠났다. 태희는 집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저 멀리 내다보았다. 마을을 등지고 바라보면 일렬로 늘어선 집이 있고, 그 앞에 철길이 놓이고, 그 옆에는-
태희는 고개를 숙이고, 숨을 가다듬는다. 주변엔 아무도 없다. 선로 옆 집이 왜 폐가가 되었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이 집의 형태는 폐가와는 완전히 다르다. 노인이 집을 떠나는 까닭을 이해했다는 듯, 태희는 오히려 대문을 마주보고 주저앉았다.
이장이 노인을 데리고 왔을 때, 그는 이장에게 한껏 악을 쓰고 있었다.
"열차 소리가 시끄러워 잠을 못 자겠다니까."
"아고, 어르신. 거기 열차가 안 다닌 지가 언젠데요."
"안 다니긴 무슨. 내가 방금도-" 태희와 시선이 마주치자, 노인의 말이 멎었다. 태희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지만 노인은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어르신, 손주 분 친구가 왔어요. 태희, 전태희라던데 기억이 좀 나요?" 이장의 질문에도, 노인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태희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덩치 큰 애가 있었나…?" 노인은 앙상한 손가락을 태희의 이마께에 가져갔다. 그러고는 한참을 내려 태희의 가슴팍 정도에서 멈췄다.
"우리 손주는, 아직 요만헌데…" 노인의 손이 바들거리며 떨렸다. 이장은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한숨 쉬며 태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태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예보도 없이 비가 쏟아져 내렸다. 아열대성으로 바뀌어가는 기후를 증명하겠다는 듯, 작년보다 이르고 더 거센 폭우였다. 때때로 빗줄기가 가늘어지기도 했지만, 선로가 완전히 잠길 때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태희는 이장의 배려로 방 한 칸을 빌릴 수 있었다. 원래는 노인의 집에서 묵어야 했겠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장이 사랑방을 내어준 것이다. 사랑방에서 듣는 폭우 공지 방송은 유달리 컸다.
"농작물, 비닐하우스 지붕 조심하시고… 애들 집 밖으로 보내지 마시고…" 태희는 평소와 달리 잠을 이루지 못해 몸을 뒤척였다. 방송 전후로 울리는 마이크 두드리는 소리가, 어쩐지 덜컹이는 철로 소리처럼 들렸다.
*
태희는 귀를 때리는 공지 방송 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가 평소 일어나는 시간보다 두 시간은 일찍 안내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목소리가 더 거칠고 웅웅 울려서 알아들으려면 좀 시간이 필요했다. 사람을 찾는 방송이었다.
태희는 홀린 듯 방을 빠져나왔다. 옷은 마구잡이로 입어서 구겨지고 안팎이 뒤집힌 상태였다. 방송을 마친 이장은 민방위복을 입은 채 지도를 펼쳐 수색 범위를 지휘하고 있었다. 태희를 발견한 이장은 심호흡을 했다.
태희는 미친듯이 길을 내달렸다. 이장은 오늘 아침 피해 상황을 점검 하던 중, 노인이 자택에 없다는 걸 확인했다고 전했다. '선로 옆 늘어선 집이 서른 채는 될까?' 태희는 달리기에 자신이 있다. 하지만 태희가 도착했을 땐 이미 구조에 나선 마을 사람들이 집을 하나 하나 들여다보고 있었다.
늘어선 집들은 많지도, 크지도 않다. 서른 세 채를 모두 조사하는 데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내릴 수 있는 결론 역시 자명했다. 빗물이 가져가는 건 신발만이 아니었다. 태희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태희가 제 가슴팍보다 작을 무렵, 이 마을을 다니던 열차가 경로를 바꿨다. 도시 간 물류 운송을 용이하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여름철만 되면 열차가 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물이 차오르기 때문이었다. 홍수가 날 때면 발목까지 물이 차올랐으니, 폐선도 당연한 결과였다. 아니, 애초에 '그곳' 근처에 선로를 개설한 게 잘못이었다.
태희는 친구의 초대를 받았다. 조부의 집과 나무, 집 앞을 지나는 열차, 그리고… '그곳'. 태희가 뭘 좋아하는지 아주 잘 알기에 할 수 있었던 권유. 감사하게도 친구 부모님이 친구를 태희와 함께 이곳에 데려다 주었고, 그의 할아버지는 태희를 반갑게 맞았다. 마을은 정말 아름다웠으며, 태희와 친구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비가 쏟아지기 전까지.
*
그때, 밖을 나가선 안 됐다.
지금 눈앞에 철로가 보인다.
그 너머 그곳이 보인다.
자갈을, 신발을, 그리고 그 이상을 삼켜버린 물길이.
아직도 잦아들지 않은, 부풀고 성난 하천이.
허우적거리며 비명을 지르던-
"저기, 저기 사람이 있어요." 태희가 앞으로 걸어나간다.
"학생, 그쪽으로 가지마." 집 조사를 마친 한 중년이 그에게 경고한다.
"안 들려요? 괴로워하고 있어요. 당장 도와줘야 해요." 그의 시선은 철로 너머 흐르는 황토빛 하천을 향한다. 물을 잔뜩 머금은 냇물이, 평소의 배는 되는 너비로 흘러간다.
"괜찮아, 지금 갈게. 이제 형이니까. 힘도 세졌으니까." 태희는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도 않는 크기로 중얼거리며, 상의를 벗어던졌다.
"이봐, 누가 좀 도와줘! 이 사람 지금 뛰어들지 못하게 막아!" 중년의 남성이 도움을 요청하자, 근처의 청년이 달려와 태희를 붙잡는다. 두 사람이 막아서는데도, 태희의 힘을 견디기 버겁다.
그 후로 두 명이 더 달려들고서야, 마침내 태희를 끌어낼 수 있었다. 아니, 그러지 못했을지도.
첫댓글 인물 사건 배경 모두 너무 바꾸어서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