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장례의 올바른 이해(1)
박명진 시몬 서울대교구 연령회 연합회 상장례 강사
1. 장례를 둘러싼 우리 교회의 현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처럼 ‘요리문답’을 외워 시험(찰고)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수업 시간에 출석해서 교리를 배우면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세례를 받고 나면 판공 때 사제가 모든 교우를 대상으로 교리 지식을 점검했습니다. 따라서 부모나 회장은 수시로 교리를 재교육했으므로 신자들은 날이 갈수록 교리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폭넓게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다양한 매체로 성경 지식과 교회의 가르침을 익히고 신심 단체에서 기도와 활동으로 믿음을 굳건히 하는 이도 있지만, 견진성사를 받을 때나 혼인성사를 받을 때 일시적으로 해당 교리를 배우고 그치는 이도 적지 않습니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듯이 교회의 장례로 이승의 삶을 마무리해야 합니다. 예전에는 가족이나 본당 교우가 선종하면 영혼의 구원을 간구(懇求)하면서 교회의 장례를 익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부모나 친척의 장례 외에는 연령회원이나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에게 의존하므로 예식과 교리는 물론 기도마저 익숙해질 기회가 적습니다. 지난날의 공소회장들은 죽음의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했고 교회가 정한 절차대로 장례를 실천했습니다. 그러나 입교하기 전에 가정이나 동네에서 유교‧불교의 장례 관련 지식은 물려받았지만, 교회의 가르침을 명확하게 습득하지 못한 채 연령회장이 되어 가톨릭과 다른 종교의 죽음 이해와 장례의 의미와 목적에 관한 공통점과 차이점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이도 있습니다.
연령회가 장례를 주관하면서 장의사나 상조회사 직원처럼 시신의 처리를 중시한 나머지 교회 장례의 근본인 기도‧교리‧예식 등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한 시절도 있습니다. 더욱 심각한 점은 교회 장례에 필요한 전례‧교리교육‧교회사 지식은 물론 기본교리마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교회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내용으로 강의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를 바로잡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지만, 문제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장례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간략히 설명하고 잘못 시행하거나 조심해야 할 부분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죽음의 이해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온 지 2백 년이 넘었지만, 불교‧유교에 비해 짧으므로 그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죽음과 장례의 이해도 그 테두리에 머물기 쉽습니다. 각각의 종교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바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면 장례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기 쉽습니다.
유교는 하늘의 기를 받은 혼(魂)과 땅의 기를 받은 백(魄)이 어머니 뱃속에서 합쳐 사람이 되었다가 떨어지면 죽는 것이라고 봅니다. 제사를 받드는 아들을 낳은 이가 자기 집에서 온전하게 죽으면 상례(喪禮)를 통해 신격(神格)인 조상신이 됩니다. 따라서 아무리 악하게 살았더라도 상례를 격식대로 거행하면 제물을 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삶과 죽음은 다르지 않습니다[不二]. 산다는 것은 죽어가는 것이고, 죽더라도 다시 태어나[生有] 살다가[本有] 죽은[死有] 뒤에 다음 삶이 시작되는 단계[中有]를 거쳐 다시 태어나 살다 죽는 사유(四有)가 수레바퀴처럼 돌며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다음 생에는 더 나은 곳에서 더 좋은 존재로 태어나려고 생전에 공덕(功德)을 쌓고 보시(普施)하며 사후에 재(齋)를 바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가톨릭교회는 이승을 뒤로하고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시작을 죽음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죽음을 삶의 끝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삶으로 태어난다는 의미로 ‘천상탄일’(天上誕日, Dies natalis)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선종한 이가 하느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린다는 믿음을 고백하고, 유족은 부활과 영원한 만남에 대한 희망으로 사별의 아픔을 이겨냅니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인은 주님과 이웃의 사랑 안에서 여생을 기쁘고 보람있게 살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장례는 두려운 종말을 고하는 절망의 통과의례가 아니라 영원한 삶을 찬미하는 희망의 예식입니다.
3. 임종에 대한 자세와 준비
명나라 때 중국으로 들어간 선교사들은 교리서·기도서·예식서 등을 한문으로 번역하거나 저술하면서 장례 예식서의 주요 부분을 그 나라 실정에 맞게 편찬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중국교회의 한문본 ‘성교례규’를 번역하고 당시 여건과 교우들의 형편을 고려해 편집한 ‘텬쥬셩교례규’를 발간했는데, 운명 이전부터 바치는 기도와 예절까지 세세히 수록했습니다. 당시는 박해 중이라 사제를 모시기 어렵고 성당도 없어 평신도를 중심으로 장례를 거행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형제자매인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과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교우가 임종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속히 찾아가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도록 권면하고 위로하면서 함께 기도했습니다.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은 누구보다 문병‧임종‧장례에서 이웃사랑을 잘 실천합니다. 어렵고 아픈 이들을 위한 기도‧권면‧돌봄은 레지오 마리애 단원의 주요 임무이므로 아플 때부터 찾아가 위로하고 함께 기도하면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모로 환경이 달라져 이전처럼 봉사하기 어렵지만, 임종 이전에 해야 할 바를 소홀히 하기 쉬운 오늘의 우리가 되살려야 할 모습입니다.
임종은 운명하는 이와 남은 이들에게 가장 엄숙하고 중요한 순간입니다. 임종하는 이는 불안과 평화, 절망과 희망이 엇갈리면서 삶을 마무리하고, 남은 이들은 임종하는 이와 형제적 사랑을 나누고 자기 죽음을 묵상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임종하는 이는 사랑하는 이들을 남겨두고 주님께 돌아가야 하므로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고 운명을 담담히 맞이하는 이도 있지만, 인간적인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그동안 잘 간직했던 믿음이 흔들리는 이도 있습니다. 가족과 교우 등 신앙공동체가 함께 기도하고 격려하면서 주님께서 무한한 사랑으로 받아 주신다는 굳은 믿음과 희망 안에서 모든 것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아픈 이가 도저히 회복될 수 없다고 판단되면 고해성사‧성체성사‧병자성사를 받도록 준비합니다. 임종하는 이는 가족에게 주님 뜻에 맞게 살라고 당부하고, 남에게 진 빚이나 손해를 끼친 것, 옳지 못하게 취한 재물 등을 갚아 달라고 부탁합니다.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도 깊이 뉘우치고, 다시는 그런 죄를 범하지 않도록 결심한 뒤에 사과하거나 다른 이를 통해 대신 용서를 빕니다. 검소하게 장례를 거행하고 자기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미사를 봉헌하라고 요청합니다. 서로 화목하고 주님의 계명을 잘 지켜 세상 마칠 때 주님 품에서 만나자고 약속하면서 남은 이들을 축복합니다.
임종이 임박하면 가족과 교우들이 모여 공동체 안에서 주님께 편안히 돌아갈 수 있도록 소란하게 울지 말고 차분히 기도해야 합니다. 임종 예식은 ‘상장예식’ 18~53쪽에 두 가지 양식이 있으므로 상황에 따라 적절히 선택할 수 있으며, 사제와 함께 또는 평신도들만으로도 거행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 장례의 올바른 이해(2)
박명진 시몬 서울대교구 연령회 연합회 상장례 강사
1. 상장례의 개념과 변천
상례(喪禮)는 숨을 거두는 초종(初終)부터 신주를 사당에 안치하기 위해 지내는 길제(吉祭)까지 거행되는 유교 의례입니다. 장례(葬禮)는 상례의 일부로 장사지내는 예식이라고 할 수 있지만, 유교의 예서에 독립적으로 언급된 예는 거의 없고, 상례의 한 부분인 장례를 상례에 붙여 만든 상장례(喪葬禮)는 조어(造語)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죽은 이를 위한 의식에 여러 종교의례가 혼합되었고, 교회는 중국의 한문본 ‘성교례규’의 ‘장상예절(葬喪禮節)’과 조선의 ‘텬쥬셩교례규’의 ‘상장규구(喪葬規矩)’처럼 함께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유교의 개념으로는 불합리한 조어이지만, 오늘날 상례의 전 과정 그대로 이행하는 이가 드물고, 말은 반드시 합리적으로 변하지 않는 현실을 존중해 통용되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합니다.
2. 위령기도의 정의
인간은 영원히 살고 싶지만 죽음을 피할 수 없으므로 그로 인한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죽음으로 인한 절망에서 벗어나려고 누군가 믿고 기대고 바라는 노력 가운데 기도가 있습니다. 사전은 기도를 ‘인간보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어떠한 절대적 존재에게 비는 것이나 그런 의식’이라고 하지만, 간절히 바라는 바를 얻으려고 빌고 의식을 행해도 아무나 원하는 바를 들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존재는 한 분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분을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그분께 기도합니다.
선종한 이를 위해 바치는 기도를 ‘위령기도(慰靈祈禱)’라고 하는데, 예전에는 ‘연도(煉禱)’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연옥도문(煉獄禱文)’에서 유래되고, ‘도문’은 ‘호칭기도(呼稱祈禱)’이므로 직접적인 의미는 ‘연옥에 있는 이를 위해 바치는 호칭기도’입니다. 그러나 넓게는 교회의 이전 예식서인 ‘텬쥬셩교례규’와 오늘날 사용하는 ‘상장예식’의 돌아가신 분을 위한 모든 기도를 통칭(統稱)하는 것이므로 ‘세상을 떠난 이들의 구원을 위해 바치는 기도’입니다.
3. 위령기도의 토대
위령기도의 토대는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인간의 활동에 관한 교리와 모든 성인의 통공(通功)에 관한 교리입니다. 인간의 활동에 관한 교리는 피조물인 인간의 모든 활동이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친히 창조하신 피조물의 협조를 받아 그분의 나라를 이루고, 인간의 활동을 통해 당신 뜻이 세상에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다가 하느님이 심판하실 때 다시 살아난 사람(로마 6, 4 참조)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았더라도 자기가 지은 죄로 인해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사람은 회개하고 정화(淨化)해야 온전히 그분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모든 성인의 통공에 관한 교리는 성인들이 친밀하게 교류하면서 서로 사랑하고 가진 바를 나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승의 착한 삶을 복되게 마무리하고[善生福終]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이들, 그리스도인으로 죽었으나 정화 중인 이들, 하늘나라로 향해 가는 나그네들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들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사랑 안에서 여러 단계와 방법으로 친하고 가까운 사이가 되어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립니다. 그리스도께 딸린 이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인 교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에페 4,16 참조).
그리스도께 속한 이들 가운데 하나가 고통을 겪으면 나머지도 고통을 겪고, 하나가 영광을 받으면 나머지도 기뻐합니다(1코린 12, 26 참조). 하느님 안에서 잠든 형제와 세상 나그네들의 결합은 중단되지 않고 영신적(靈神的)으로 도움이 되는 교류로 튼튼해지며(교회헌장, 49 참조), 정화 중인 이들을 위해 바치는 나그네들의 희생‧자선‧기도 등은 매우 필요하고 큰 도움이 됩니다.
4.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큰 효도는 기도
죽음은 주님 안에서 영원하고 새로운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므로 해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요즘은 상조회사 직원이 상중의 일들을 처리하기도 하지만, 신자는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연령회에 상가의 제반 업무를 맡겨야 합니다. 교우 장례에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없는 장례미사‧고별식, 입관‧출관‧하관 예식과 기도 등인데 상조회사 직원만으로 모든 예식과 기도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우가 운명하면 가장 먼저 연령회장이나 총무 그리고 성당 사무실에 소식을 알려 여러 업무를 원활히 처리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최종 목적은 주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것이므로 선종한 이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선한 행위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누구보다 열심히 기도해야 할 유족은 소홀히 하고, 연령회원 또는 이웃만 모여 기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유족으로서 관련 업무를 처리하고 문상객을 접대하는 일을 소홀히 하면 안 되겠지만, 돌아가신 분을 위한 기도를 등한시해서는 더욱 안 될 것입니다.
따라서 시간이 날 때마다 자주 모여 기도하고, 함께 모이기 어렵다면 문상객과 교우들이 돌아간 시간에 한마음으로 바쳐야 할 것입니다. 교회 장례의 의미와 절차 등을 잘 아는 연령회원이나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은 이를 잘 모르는 유족들이 교회의 가르침대로 장례를 거행할 수 있도록 자세히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5. 바람직한 문상 예절
교우가 선종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즉시 성호경과 주모경 등을 바치고 “하느님, ○○○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등과 같은 화살기도로 주님께 그분의 영원한 안식을 빕니다. 시간이 허락되면 상가를 직접 방문하고, 도저히 안 되면 ‘상장예식’ 또는 ‘가톨릭 기도서’에 있는 위령기도를 바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요한 15, 5)라는 말씀처럼 세례를 통해 우리는 모두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肢體)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 안에서 형제자매입니다. 형제자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최대 관심사는 영혼의 구원입니다. 따라서 선종한 이를 위해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하느님께 그분의 구원을 간구(懇求)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으로 인한 아픔과 아쉬움을 온전히 떨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주님 안에서 영원하고 새로운 생명으로 들어가는 복된 날이므로 아픔과 아쉬움에 파묻히지 말고 새로운 희망과 기쁨을 지녀야 합니다. 교우 상가에서 “얼마나 망극(罔極)하십니까?”라는 유교식 문상을 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고, 그리스도인답게 영원한 생명과 구원에 대한 희망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의 영혼에 영원한 안식을 주실 것입니다. ○○○의 영혼 구령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문상해야 할 것입니다.
[202309]
가톨릭 장례의 올바른 이해(3)
박명진 시몬 서울대교구 연령회 연합회 상장례 강사
1. 장례의 시편
위령기도의 중심은 시편입니다. 우리는 계속 죄를 저지르고 배반하는데도 하느님은 늘 사랑으로 용서하고 안아주십니다. 따라서 이 세상 순례를 마치고 돌아가는 우리가 하느님께 간구해야 할 바를 잘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시편 제62(63)편 악보의 ‘구성지게’를 ‘구슬프다·서글프다·청승맞다’로 이해하는 이가 있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불행한 끝이 아니라 새롭고 영원한 생명으로 주님 안에서 누리는 행복한 시작입니다. 따라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 안에서 본래 의미대로 ‘천연스럽고 구수하며 멋지게’ 불러야 합니다.
시편 제62(63)편은 다윗이 자기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궁전을 떠났을 때 바친 기도입니다. 그는 아들과 싸워야 하는 아비로서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사정을 하느님께 하소연하고 어려움에서 건져 주시기를 간절히 바랐고, 주님은 난관에 빠진 다윗을 변함없이 건져 주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있다면 어떤 위기도 극복하고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이라는 절망과 고통을 부활의 희망과 기쁨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니 늘 용서하고 구원하시는 하느님만 믿고 찬미해야 합니다.
시편 제129(130)편은 주님의 자비와 은총에 모든 것을 내맡기는 위령기도의 중심 부분입니다. 주님께 죄의 용서를 빌고 그분 자비를 바랄 수 있는 것은 분명한 믿음과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므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지만, 하느님은 늘 용서해주십니다. 주님의 은총이 당장 베풀어지지 않는다고 느끼더라도 언젠가 반드시 주실 것이니 죄악과 곤경에서 절망하지 말고 자기 죄를 참회하며 그분의 용서와 사랑을 기다려야 합니다.
시편 제50(51)편은 자기 죄에 대한 참회를 가장 절절하게 나타내는 대표적인 시편이어서 교회는 장례뿐 아니라 참회 예식에서도 바쳤습니다. 이 시편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 11-32)에서 돌아온 아들을 무조건 받아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불러일으킵니다. 비록 우리가 몇 번이고 깊은 죄에 떨어졌을지라도 진심으로 뉘우치고 죄악의 사슬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면 하느님께서는 멀어졌던 당신 품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주십니다.
2. 성인호칭기도
성인호칭기도는 눈먼 사람(마태 9, 27 참조), 귀신 들린 딸의 어머니(마태 15, 22 참조) 등 가난하고 힘없는 이가 예수님께 치유를 간청하는 자비송인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Κυριε Ελέῃσον, Kyrie Eleison)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성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성령, 삼위일체이신 주님의 자비를 바라며 간절한 청원을 들어 주시기를 빕니다. 이어 성모 마리아, 천사, 성인들에게 죽은 이의 구령을 위한 전구(轉求)를 요청하고 나서 다시 주님의 자비를 간구합니다.
그런데 이 기도의 생성과 변화를 잘못 가르치는 이가 있습니다. “성인호칭기도에서 무교(巫敎)의 사령(死靈) 신앙적 사고를 찾아볼 수 있다.”라고 하거나 “연도 문화는 한국의 전통문화인 효 정신의 습합(習合), 무교의 사령 신앙적 사고, 공동체 문화를 바탕으로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라고 주장합니다. 성인들에게 전구를 요청하는 것을 무당이 본격적인 굿을 벌이기 전에 신들을 부르는 것과 같은 것처럼 주장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3세기에 동방교회에서 발견되며, 5세기에 서방교회에 전해졌고, 8~9세기가 되면 온 유럽으로 퍼졌습니다. 1570년까지 교황청으로부터 허락받고 성인의 이름을 넣거나 뺄 수 있었으나, 비오 5세의 ‘미사 경본’부터는 획일적으로 고정되었습니다. 라틴어로 된 이 기도문을 중국교회가 한문으로 번역하고, 조선교회가 한글로 바꾸었을 뿐 달라진 내용이 없었습니다. 신앙의 선조들은 우상을 숭배하거나 미신에 빠지지 않으려고 늘 조심했습니다. 굿판을 벌여서도 안 되고, 구경해서도 안 되기 때문에 보고 듣지 않으려고 피해 멀리 돌아간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3. 찬미와 간구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하면서 성모 마리아를 비롯한 모든 성인의 전구를 통해 선종한 이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생전에 지은 모든 죄를 사해 주시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이어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받게 하시려고 받으신 다섯 상처, 십자가, 성심 등으로 선종한 이가 하느님 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도록 간구합니다. 또한 세상의 빛, 어진 목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선종한 이를 부활시켜 주시기를 탄원하고, 성모님께도 세상을 떠난 이를 위해 전구해 주시어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간청하면서 위령기도를 마무리합니다.
4. 그리스도인의 수의와 상복
장례에서 유족은 삼베 상복을 입고, 시신에는 삼베 수의를 입히는 것을 전통이라고 오해하는 이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상복과 수의는 유교의 상례에서 비롯된 것인데 상복을 입고 수의를 입히는 이유는 다릅니다. 유교에서 죽음은 가장 불행한 사건이므로 부모나 조부모의 죽음을 막아야 하지만 이를 못 막은 자녀나 후손은 가장 큰 불효를 범했으므로 죄인의 의미를 드러내려고 거친 삼베로 지은 상복을 입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의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유교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효도인데 마지막 길을 떠나는 분께 지금은 비싸고 귀하지만 지난날에는 싸고 흔했던 삼베를 전통 수의로 잘못 알고 입히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유교 예서인 ‘주자가례’, ‘상례비요’, ‘사례편람’ 등에 특별히 수의를 지으라는 규정이 없습니다. 조선 중기 이전 무덤에서 살아있을 때의 옷을 입힌 시신이 발굴되고, 그 이후는 평소에 입던 옷과 함께 비단[緞]‧무명[木棉]‧모시[苧]‧삼베[麻] 등으로 지은 다양한 수의가 나타납니다. 삼베 수의는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만들었는데, 전쟁을 중심으로 산업 체계를 바꾸었기 때문에 고급 천이 귀해졌습니다. 어쩔 수 없이 삼[麻]과 베틀만 있으면 짤 수 있는 삼베로 수의를 지을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이를 오랜 전통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기계로 짠 옷감보다 손으로 짠 삼베가 비싸고, 그 삼베로 지은 수의는 더 비쌉니다.
“민족들의 풍습에서 미신이나 오류와 끊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든 호의로 존중하고…”(전례 헌장, 37)라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열린 자세를 본받으면서도 교회의 주요 가르침에서 벗어나면 안 될 것입니다.
“문) 비단 등 보배로운 옷으로 시체를 입힘이 어떠하뇨? 답) 옷을 입힘은 각 사람이 처지대로 할 것이로되 체면만 돌아보아 분수에 지나면 헛되이 씀과 교오(驕傲)를 부리는 두 가지 죄를 면하기 어려우니 가히 삼가지 아니하랴?”(텬쥬셩교례규)라고 가르쳤습니다.
선종한 이가 평소에 입던 옷 중에 좋은 것을 입혀 주님께 보내드리고, 상복은 형편을 따라 정하되 가능한 한 비용을 아껴 장례를 마친 뒤에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주었던 선조들의 참된 신앙생활을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202310]
가톨릭 장례의 올바른 이해(4)
박명진 시몬 서울대교구 연령회 연합회 상장례 강사
1. 염습과 입관의 시편들
시편 제113(114)편은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한 사건들을 통해 하느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신앙 안에서 생생하게 재현하는 노래입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 괴로운 삶이 이어지던 이승을 지나 완전히 구원되는 천상 세계로 넘어가는 장례에 잘 부합합니다.
시편 제113후(115)편 5-7절의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라는 이를 두고 “사람으로서 장애란 장애는 모두 다 지니고 있는 존재이기에, 불쌍하고 가련한 존재가 바로 죽은 사람이다.”라고 가르치는 이가 있지만, “그들의 우상들은 금이며 은, 사람 손으로 지어낸 것이니이다”(4절)에서 보듯이 이 시편에서 언급하는 이는 시신이 아니라 우상(偶像)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우상숭배에 빠졌지만, 우상은 그 어떤 고통도 덜어주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이 세상 나그넷길을 마치고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인데도 사랑하는 이와 이별 앞에서 하느님을 원망하고 우상숭배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주시는 주님을 믿고 맡기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2. 출관의 시편들
시편 제41(42)편과 제42(43)편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고난에서 하느님을 간절히 찾으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지난날에는 늘 앞장서서 하느님의 집으로 갔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수 없어 가슴이 녹아날 만큼 아픕니다. 그러나 이렇게 극심한 고통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이야말로 가장 믿을 수밖에 없는 하나뿐인 존재임을 되살려내고, 주님께서 계신 그곳으로 자기를 이끌어주시기를 간절하게 청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어떤 어려움에 빠지더라도 하느님만 굳게 믿고 바란다면 다시 그분을 찬미할 수 있고 온갖 고통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시편 제22(23)편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수많은 민족이 즐겨 부르던 노래입니다. 하느님은 한시도 우리를 향한 눈길을 거두지 않으시니 어떤 걱정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생겨도 극복할 수 있고,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 때도 든든하게 지켜주시니 이 세상 순례를 마칠 때도 새로운 풀밭과 물을 준비하고 기다리시는 주님을 향해 기쁘게 갈 수 있습니다.
시편 제83(84)편은 성전을 애타게 그리워하지만, 실제로 그리워하는 것은 거기에 계시는 하느님입니다. 그분을 체험했기 때문에 참 평화를 발견하고, 넘쳐나는 즐거움에 벅찬 감격을 누릴 수 있던 성전이 그립지만, 지금은 애태우며 지쳐갈 뿐입니다. 그러나 절망적인 상황을 맞을수록 우리가 찾아가 머물 곳은 주님의 집뿐입니다.
출관은 하느님의 품으로 영원히 돌아가기 위해 이 세상 마지막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삶의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고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는 슬프고 아쉬운 순간이지만, 이러한 고통은 찰나(刹那)에 불과할 뿐 영원한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하느님 나라가 바로 앞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는 이에게도, 떠나보내지 않을 수 없는 유족에게도 참된 희망과 위로를 주는 노래입니다.
3. 고별식
장례미사에 대한 해설은 지면 관계로 생략합니다. 1968년까지 장례미사를 봉헌하고 운구하기 전에 시신 앞이나 무덤 앞에서 죽은 이의 죄를 용서하시기를 청하는 사도예절을 거행했으나, 1969년부터 죽은 이와 공동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만나 영원한 삶을 누릴 때까지 나누는 인사라는 의미의 고별식을 거행합니다.
성당 밖으로 운구하며 부르는 ‘하늘의 성인들이여’는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이란 실패나 패배가 아니라, 죄와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는 진정한 승리이므로 우렁차고 기쁘게 불러야 합니다. “천사들은 이 교우를…” 역시 죽은 이를 하늘나라로 천사들이 이끌고, 순교자들이 받아들이도록 요청하는 희망의 찬가입니다.
4. 운구의 시편들
시편 제117(118)편은 주님께서 늘 나와 함께 하시니 아무도 해치지 못한다는 확고한 믿음을 노래합니다. 일상에서 겪는 사람이나 사물을 인간적인 기준에서 하찮게 여길 때마다 주님은 그들도 당신의 존귀한 피조물이라고 깨우쳐 주셨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묘지를 향해 떠나는 길이 참으로 비통하고 안타까워 피하고만 싶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이란 영원한 삶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는 새 출발이므로 주님께 감사하며 그분의 영원한 사랑을 노래해야 합니다.
시편 제92(93)편은 주님과 그분의 나라는 위대함을 강조하면서 그분께는 영광이고 그분이 사랑하시는 백성에게는 위로가 된다는 노래입니다. 하느님께서 섭리하시고, 그분의 은총이 넘치는 나라는 누구도 흔들 수 없는 굳세고 튼튼합니다. 하느님의 법은 실로 참되므로 그분의 집은 거룩함이 어울리고 영원할 것인데, 그런 주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아갈 우리가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 그저 우리는 그분의 높은 권능과 위엄을 찬미하며 그분께 나아갈 뿐입니다.
시편 제24(25)편은 하느님께 자기의 간절한 바람이 헛되지 않도록, 원수들이 자기의 불행을 기뻐하지 않도록 하느님께 도움을 간구합니다. 자애롭고 의로우신 주님은 죄인에게 길을 가르치고, 겸손한 이에게 의를 따라 걷게 하며, 당신의 언약과 계명을 지키는 이에게 사랑과 진리이시므로 아무리 큰 죄를 지었더라도 그분의 이름으로 용서하고 자비로써 계속 보살펴주시기를 호소합니다. 이런 간청과 호소는 신심 생활이 철저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변치 않는 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관계를 잘 알고 있으므로 자기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처럼 주님만 바라보고 믿는 사람은 아무리 죄가 클지라도 용서하시는 주님께서 함께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며, 자손에게까지 축복하실 것인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5. 즈카르야의 노래
묘역에 도착하면 ‘상장예식’ 254~281쪽을 따라 무덤을 축복한 뒤에 시신을 안장하고 분향하며 성수를 뿌립니다. 성경 봉독과 청원 기도, 유가족을 위한 기도와 회중의 응답, 마침 기도 등을 바친 뒤에 흙을 덮으며 즈카르야의 노래를 부르고 장례의 모든 과정을 마무리합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루카 1, 68-79)는 나이가 많아 잉태하지 못하던 엘리사벳이 주님의 은총으로 아들을 낳자, 인류를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소식을 전할 요한 세례자의 탄생을 기뻐하며 즈카르야가 부른 것입니다. 하관 예식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이유는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께 돌아갈 때까지 은총을 베푸신다는 믿음을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마지막 날 주님은 다시 오시고, 그분의 자비와 은총으로 모든 이가 부활할 것이므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악의 올가미를 벗어나 주님만 믿고 섬기도록 이끄시는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라는 절망의 끝이 아닌 새로운 기대와 희망이 시작되는 찬미가입니다.
[202311]
가톨릭 장례의 올바른 이해(5)
박명진 시몬 서울대교구 연령회 연합회 상장례 강사
1. 화장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오랫동안 화장을 금지하던 가톨릭교회는 “장례식은 그리스도인 죽음의 파스카 성격을 더욱 명백히 드러내야 하며, 각 지역의 환경과 전통에, 또한 전례 색상에 관한 것에도, 더 잘 부응하여야 한다”(전례헌장, 81)라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존중해 “교회는 죽은 이들의 몸을 땅에 묻는 경건한 관습을 보존하기를 간곡히 권장한다. 그러나 화장을 금지하지 아니한다.”(교회법, 1176조 3항)라며 허용했습니다.
지난날 교회의 가르침대로 매장을 고수하던 한국교회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과 교회법을 따르고, 화장이 주된 장법(葬法)으로 바뀐 오늘의 우리 사회현실을 고려해 ‘상장예식’에 화장 예식을 수록했습니다.
2. 화장 예식
‘상장예식’ 282~302쪽에 있는 대로 화장장에 이르면 화장하더라도 육신의 부활 신앙은 전혀 달라지지 않음을 밝히는 기도를 합니다. 독서를 봉독하고 화답송을 부른 다음 마침 기도로 마무리하며 시신을 사를 때 위령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시신의 뼈를 모으는 습골(拾骨)과 화장한 뼈를 빻는 쇄골(碎骨)을 지켜보는 유가족의 아픔과 슬픔이 지나쳐 부활 신앙이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령기도와 장례미사에 있는 “나의 살갗이 뭉크러져 이 살이 질크러진 후에라도 나는 하느님을 뵙고야 말리라.”(욥기 19,23-27)라는 기도를 바침으로써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고 따르는 자세를 드러내야 합니다. 유골을 봉안하기 전에 청원 기도를 바치고 무덤을 축복한 다음 봉안하는 동안에 시편 22(23)편이나 성가를 부릅니다.
3. 산골(散骨) 금지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
2016년 교황청이 죽은 이의 매장과 화장된 유골의 보존에 관한 훈령인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기 위하여(Ad resurgendum cum Christo)’를 반포하고, 2017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산골에 관한 질의응답’을 공포했습니다. 교회는 매장을 장려하지만, 육신의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교 교리를 부정하지 않으면 화장도 허락하고, 유골을 묘지나 교회가 지정한 장소에 보존하게 합니다. 죽음으로 영육이 나뉘어도 부활할 때 하느님께서 썩지 않는 생명을 주시고, 영혼과 다시 결합한다는 믿음과 부활할 육신에 대한 존경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유골함을 묘지 공간의 수목‧화초‧잔디 등에 묻으면 비석이나 표지를 세우고 고인을 추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수목장은 매장의 의미와 고인의 이름을 표시해 추모 장소라는 점과 육신이 부활한다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고백 되어야 합니다. 봉안 기간이 지난 유골은 별도의 안치소를 마련해 매장의 형태로 영구하게 봉안하고 이름을 표기해 추모할 수 있도록 조치해야 합니다.
4. 우제(虞祭)의 의미와 교회
우제는 시신을 묘소에 두고 돌아온 뒤에 놀란 그의 영혼을 달래는 제사지만, 이별의 아픔으로 괴로워하는 유족을 안정시키는 기능도 있습니다. ‘상장예식’은 “민족의 문화와 전통에서 어떤 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인지 신중하고 현명하게 검토하고, 유익하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적응을 사도좌에 보고하여 동의를 얻은 다음 도입하는…”(장례 예식서, 21)이라고 하는 보편교회의 가르침과 “그리스도교의 토착화를 위해 전통 상제례를 현대에 맞게 그리스도교적 상제례 예식서를 만들 것을 요망한다.”(사목회의 의안 4 전례, 16)라는 한국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유교의 우제를 그리스도의 부활, 성인들의 통공, 희망 등 그리스도교적으로 재해석해 수록했습니다. 이 예식을 통해 세상을 떠난 이를 위해 기도하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인들의 통공을 믿으며, 이별의 아픔을 달래면서 영원한 희망을 북돋아야 합니다.
5. 우제의 시편들
장례를 마치고 집에서 초우(初虞) 예식을 거행하고, 다음 날 초우와 같은 재우(再虞) 예식을 지낸 뒤 미사에 참례해 돌아가신 분과 통공을 다지며, 셋째 날 미사에 참례하고 묘소나 봉안당에서 삼우제(三虞祭)를 지냅니다. 초우 때 바치는 시편 제30(31)편은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이 다가올 어려움에서 보호받기 위해 주님을 향한 한없는 믿음을 나타내는 노래로 주님의 자녀인 우리는 그분 품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릴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삼우 때 바치는 시편 제4편은 난관을 이겨낸 경험에서 생긴 주님께 대한 감사의 노래입니다. 어떤 아픔과 번민에 빠지더라도 주님께서 내 편이 되신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으면 모두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런 굳센 믿음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에서 자기를 건져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한 이에게 생기고, 이런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떤 처지든 평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바라고 사랑하던 이가 그분께 돌아갔지만, 주님 품에서 아무 걱정 없이 편히 잠들어 있습니다. 우리도 머지않은 날 주님께 돌아간 이들의 뒤를 따라갈 것이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품에서 다시 만나 영원한 안식을 함께 누릴 것입니다.
6. 탈상(脫喪)과 사십구재(四十九齋)
탈상은 상(喪)을 벗는[脫] 유교 의례로 운명한 지 2년이 되면 대상(大祥)을 거행하고 상복(喪服)을 벗지만, 담제(禫祭)와 길제(吉祭)까지 마쳐야 후손에게 온전한 흠향(歆饗)을 받는 조상신이 됩니다. 이에 비해 사십구재는 죽은 이의 중음신(中陰身)이 바람직한 존재로 다시 태어나기를 비는 불교 의례입니다. 돌아간 이의 중음신이 좋은 곳에서 다시 나도록 정한 기한 동안 정성을 들이고 경을 읽는 것이므로 유교의 탈상과는 의미와 목적이 전혀 다릅니다.
유교의 탈상이나 불교의 재(齋)로 죽은 이의 상(喪)을 마무리하고자 하는 이가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유교의 조상신이 되거나 불교의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지 않으므로 탈상을 위한 제사나 새로운 생을 위한 재와 무관합니다. 따라서 의미와 목적이 전혀 다른 교회의 미사로 죽은 이를 위한 탈상이나 사십구재를 대체(代替)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미사를 봉헌하면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선종한 이들의 영원한 안식과 남은 이들의 구원을 간구합니다. 유교 탈상의 대체가 아니라 효의 발로(發露)로 일정한 기간 삼간다는 의미에서 미사를 봉헌하고자 한다면 선종한 지 50일에 미사를 봉헌하고 위령기도를 바치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시대는 파스카 축제를 마무리하는 쉰 번째 날에 ‘종결하다’라는 의미로 제사를 지냈고, 신약시대는 성령께서 강림하실 때 그리스도의 새로운 파스카가 완성되고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돌아가신 분이 이승의 나그넷길을 마무리하고 주님 안에 새로 태어난다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미사를 봉헌해야 합니다.
[202312]
가톨릭 장례와 제례의 올바른 이해(6)
박명진 시몬 서울대교구 연령회 연합회 상장례 강사
1. 면례(緬禮)
면례는 무덤이나 봉안당의 유골을 다른 곳으로 옮겨 모실 때 지내는 예식으로 미사를 봉헌하고 ‘상장예식’ 326~373쪽의 기도를 바칩니다. 무덤을 열 때 노래하는 시편 117(118)편‧41(42)편‧92(93)편‧24(25)편‧118(119)편 등은 앞에서 해설했으므로 생략합니다. 유교 예서인 ‘상례비요’는 “古者改葬爲墳墓以佗故崩壞將亡失尸柩也世俗惑於風水之說有無故而遷葬者甚非也(옛적에 무덤을 옮겨 쓰는 것은, 분묘가 무너져 장차 시체를 담고 있는 널을 잃어버릴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었는데, 세상 풍속에는 풍수의 말에 혹하여 [합당한] 연고 없이 무덤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이가 있으니 심히 잘못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천주교 신자인데도 후손을 위한다는 미신에 현혹되어 멀쩡한 묘지를 옮기는 이는 꼭 새겨들어야 할 말입니다.
2. 제례(祭禮)와 교회
명나라와 청나라를 복음화하는 데 크게 공헌한 예수회는 조상 숭배와 공자공경을 중국문화 의식으로 인정하고 효도와 존경의 표시로 관대하게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는 이런 행위를 천주교 교리에 어긋나는 미신적인 우상숭배로 보고, 교황청에 문제점을 제기해 의례 논쟁을 치열하게 전개했습니다. 결국 교회는 ‘중국 의례 금지칙령’을 반포하고, 청나라 정부는 천주교 활동을 금지함으로써 중국교회는 박해에 시달렸습니다.
이 땅에 복음이 전해진 뒤 교회의 조상 제사 금지 명령을 모르는 이들과 분명히 인식하고 제사의 신령(神靈) 흠향(欽香)을 비판하는 이들이 치열하게 논쟁하다가 북경 교회에 신주와 제사 문제를 문의했습니다. 교회의 엄중한 금령(禁令)을 확인한 조선교회는 윤지충과 권상연이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살라 시작된 박해로 타격을 받았지만, 교회는 인륜과 현세보다 천주 신앙과 내세를 강조했으므로 육신과 사회생활보다 영혼과 신앙생활을 중시했습니다. 천주교를 믿으면 조상제사를 거부해야 했고, 이 때문에 정부‧사회‧집안 등으로부터 박해받았습니다.
박해가 끝났어도 교회는 제사를 거행하고 도와주거나 제사음식 먹기 등을 십계명의 제1계명 위반으로 금지했습니다. 그러나 1932년 만주국이 공자 의례를 의무화해 신자들이 신앙의 위기에 처하자, 교황청이 1939년 ‘문화적 적응’이라며 공자참배를 허락하고, 고인의 시신‧영정‧위패에 절하는 것을 허용하는 ‘중국 의례에 관한 훈령’을 공포했습니다. 한국교회는 1940년 “교회의 도리는 만세 불변하는 진리이며 다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조상제사에 대한 현대인의 정신이 변했기 때문에 용납하는 것에 불과하고…”라는 ‘조선 8교구 모든 감목의 교서’를 발표했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용인(容認)한 제사를 신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제대로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박해가 끝난 뒤 새로[新] 복음을 듣고[聞] 신자가 된 신문교우(新聞敎友)들은 제사를 지냈겠지만,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킨 구교우(舊敎友) 후손들은 “위령기도를 바치는 것보다 더 큰 효도는 없다”라는 굳은 믿음으로 제사를 지내지 않았습니다.
3. Directorium Commune Missionum Coreae(한국 천주교 공용지도서)
1958년 한국교회는 상례와 제례에 관한 원칙을 발표하고 다음과 같은 것을 허용했습니다. 시신과 무덤, 죽은 이의 사진과 위패 앞에서 인사나 깊은 절, 엎드려 경의를 표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관습에서 향을 피우는 것은 민간의 존경 행위가 분명하므로 도입하지 말아야 하지만, 그로 인해 해(害)가 예상되면 새로 세례를 받았거나 예비신자들은 유지할 수 있습니다. 바르게 알고 있기만 하면, 시신 곁이나 사진 앞에 음식을 차릴 수 있습니다. 한국인들에 의해 제사라고 불리는 모든 것이 적어도 오늘날은 미신적으로 행해지지 않아야 하지만, 죽은 이에 대한 자녀의 효심이나 친구의 우정을 드러내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자녀는 음식을 드리며 스스로 느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나의 아버지가 계시면 나는 기쁜 마음으로 이 음식상을 드릴 것이다. 그러나 이 잔치에 함께 할 수 없어 매우 슬프다. 그분의 영정과 위패 앞에 이 상을 봉헌하여 이러한 나의 고통과 자녀로서 사랑을 표하고자 한다.”
그러나 죽은 이의 입에 쌀을 넣는 반함(飯含), 혼령들을 위로하고 그들이 저승 여행길에서 죽은 이의 영혼을 괴롭히지 않도록 죽은 이의 침대 앞에 신발과 세 그릇의 쌀을 놓아두는 사자(使者) 밥, 다시 돌아오도록 죽은 이의 영(靈)을 부르며 죽은 이의 집 지붕이나 그 끝에 죽은 이의 옷을 매달아 두는 초혼(招魂), 죽은 이 곁에 음식상을 차려놓고 죽은 이가 그의 저승 여행이 목적지에 이를 수 있도록 배불리 먹는 동안 문을 닫고 밖에 나가 있는 합문(闔門)과 유식(侑食), 이교인의 관습을 따라 기도문을 외우는 것[祝文] 등은 모든 가톨릭 신자에게 엄격하고 절대적으로 금지된다고 강조했습니다.
4. 한국 천주교 가정 제례 예식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른 종교문화에 대한 존중과 민족 복음화에 중대한 전기가 되었습니다. 한국교회는 공의회의 정신을 구현하는 구체적인 방안으로 ‘사목회의 의안 4 전례’, ‘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 등을 펴내고, 이를 바탕으로 ‘선종봉사 예식서’, ‘상제례예식서 시안’과 ‘가톨릭 상제례 토착화 시안’ 등을 편찬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확정적인 예식서가 나올 때까지 조상 제사 예식에 대한 갈증을 어느 정도 풀어 주었고, 오랫동안 연구하고 논의한 결과를 집약한 ‘한국 천주교 가정 제례 예식 지침’과 ‘한국 천주교 가정 제례 예식’을 주교회의가 승인함으로써 조상 제사가 교회 안에서 재해석되어 한국교회의 예식이 되었습니다.
‘상장예식’ 417~420쪽의 ‘한국 천주교 가정 제례 예식 지침’은 조상에 대한 효성과 추모의 전통문화를 그리스도교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한국 천주교 제례의 의미를 조상 숭배의 개념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강조합니다. 비신자 가정에서 자라 나이가 들어 입교한 이를 위한 사목적 배려에서 조상의 기일, 명절에 지낼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므로 가정 제례보다 우선해 위령미사를 봉헌해야 합니다. 신위(神位)‧신주(神主)‧위패(位牌)‧지방(紙榜) 등은 조상 숭배를 연상시키므로 조상(고인)의 이름이나 사진 등으로 대체해야 합니다.
‘상장예식’ 421~436쪽 ‘한국 천주교 가정 제례 예식’은 제사의 주요 부분을 가톨릭 정신으로 재해석하고 교회의 말씀 예절과 위령기도를 바치도록 한 것입니다. 가장의 제례 시작을 알리는 말씀, 성호경과 시작 성가, 가장이 바치는 기일 또는 명절 시작기도 등으로 시작합니다. 마태오복음 5장 1-12절을 비롯한 성경 말씀을 읽고, 가장이 조상(고인)을 회고하면서 가훈‧가풍‧유훈 등을 설명한 뒤에 신앙 안에서 성실히 살아가라고 권고하는 말씀 예절이 이어집니다. 분향하고 절한 뒤에 시편 제129(130)편‧50(51)편과 기일, 설이나 한가위에 바치는 기도,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 등을 바치고 마침 성가, 성호경, 음식 나눔 등으로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