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한국대중음악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한 장르의 음반 제작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1960년대 음반들이 스플릿 형식으로 여러 가수들이 하나의 음반에 참여하며 데뷔를 이뤘던 것과 달리 1970년대에 들어서며 한국 대중음악은 독집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안착되기 시작했고, 컴필레이션 형식의 음반도 다수 제작되었다.
또한 음악적인 요소에 있어서도 영미의 팝음악을 차용해서 번안곡 수준에 머물던 이전과 달리 1970년대 한국 대중음악은 연주의 깊이와 안정감이 영글기 시작했던 시기이다.
그럼에도 1970년대 한국 대중음악은 최초의 의미를 지닌 가수와 음악이 여전히 등장했다. 최초의 시각장애인 가수인 이용복과 최초로 싱어송라이터의 체계를 선보인 한대수의 등장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1970년대 대중음악의 또 다른 특징은 역시 트윈폴리오와 뚜아에무아의 등장 이후로 남성 듀엣이나 혼성듀엣의 등장이 홍수를 이뤘다는 점이다.
두 팀이 추구하던 음악장르에서 전달되듯이 듀엣 뮤지션들은 통기타, 즉 어쿠스틱 사운드를 주로 행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이는 결국 1960년대부터 꾸준하게 팽창되어 나오던 신중현과 같은 락 사운드와 맞물리면서 어쿠스틱과 락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게 된다.
김정미와 양희은 등이 신중현과 함께 한 앨범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조총련계 재일동포 방문의 물꼬가 트인 틈을 타서 김해일의 ‘돌아와요 충무항에’를 몇 차례에 결쳐 리메이크해서 큰 반향을 일으킨 조용필은 활동금지로 인해 자신의 전성시대를 1980년대로 미뤄야만 했다.
대중문화는 세대 간의 차이와 갈등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영역이다.
서구의 역사에서 ‘청년문화’는 청년세대가 부모세대와 구별되는 가치와 취향, 태도와 행위를 보여주기 시작한 1950년대와 1960년대를 지나면서 사회학적 담론의 주제로 등장했다. 영미권에서 ‘청년문화’는 주로 노동계급 청소년 계층의 일탈적이거나 저항적인 ‘하위문화(Subculture)’에 관한 관심과 함께 조명되었다.
1960년대에는 구미의 중간계급 청년 세대를 중심으로 베트남 전쟁과 인종 차별에 반대하고 기성 사회의 지배적 가치와 문화를 거부하는 ‘히피 운동’과 같은 문화가 형성되었다. 기성의 지배 문화에 저항하는 청년문화를 ‘대항문화(counterculture)’라 부르기도 했다.
국내에서 ‘청년문화’는 주로 1970년대 초반에 대학생을 중심으로 시작되어서 1970년대 후반 대중문화에 대한 억압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사실상 강제로 퇴출되기도 했다.
이후에 진보적 성격의 민중문화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졌는데, 1990년대 이후에는 10대 청소년 계층의 문화가 대중문화 시장의 주류로 등장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청년문화’는 ‘신세대 문화’라는 용어로 대중음악 속에서 새롭게 등장하게 되었다.
1970년대 한국사회는 군사정권의 통제와 기성문화에 반기를 든 순수한 청년문화의 기운이 활발하게 성장했던 시기였다.
문화적 기류가 형성이 되면서 젊은 세대들이 즐겨 찾았던 명동 주변에는 자연스럽게 그들이 소통할 수 있는 중소규모의 공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 서울YWCA 청개구리홀, 음악 살롱 쎄시봉, 오비스캐빈 등을 중심으로 통기타 음악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김민기, 양희은, 송창식, 윤형주, 서유석, 김세환, 4월과 5월 등은 이 시대를 대표하는 통기타 가수들이다.
기성세대들이 선호했던 전통가요도 당대의 핫 이슈로 주목받았던 남진과 나훈아의 뜨거운 라이벌 구조 등을 통해 여전히 지상파 TV를 장악하며 주류음악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1968년 미국에서 귀국한 한대수는 ‘옥이의 슬픔’등 창작곡을 발표하면서 창작에 대한 열기를 심어줬으며, 1971년에는 김민기가, 그리고 1972년에는 방의경이 각각의 창작앨범을 발표하면서 새로운 대중가요의 맥을 확실하게 짚어냈다.
그러나 군사정권은 장발, 미니스커트, 통기타, 청바지, 생맥주를 선호했던 청년세대들의 행태를 퇴폐적으로 인식하며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폐단을 벌이고 말았다.
1975년 긴급조치 9호에 포함된 ‘공연활동정화정책’으로 인해 무려 222곡이 금지조치를 당하게 된다.
또한 ‘대마초 파동’에 연루된 신중현, 김추자, 이장희 등 당대의 중요 뮤지션들이 대거 활동을 금지당하면서 사상 유래가 없는 문화암흑기가 도래하게 된다.
1975년 이후 1980년대 중반까지 모든 대중가요 음반의 마지막 트랙에는 의무적으로 건전가요가 수록되었다.
당시 음반을 발표하려면 사전에 곡과 가사를 윤리위원회에 제출해서 1차 심의를 받았고, 다시 완성된 음반을 납본해서 사후심의를 받는 이중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했다.
통제와 검열로 힘을 잃은 ‘청년문화’는 1970년대 후반 새로운 음악 패러다임을 제시한 TBC해변가요제와 MBC대학가요제를 통해서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었다.
당시 참가자들은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은 기성곡이 아닌 순수 창작곡으로 참여해서 경합을 벌였으며, 심수봉과 김학래, 배철수, 구창모, 김수철, 이명훈, 노사연, 김창완 등 198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르네상스를 이끌게 되는 주요 뮤지션들이 자연스럽게 등장할 수 있었다.
흔히 시각장애인 가수하면 호세 펠리치아노(Jose Feliciano)와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를 연상하게 된다.
이용복은 높은 음악성과 가창 실력을 보여줬던 국내 최초의 시각장애인 가수로 전성기 당시에 ‘한국의 레이 찰스(Ray Charles)’로 불리던 가수이자 기타리스트이다.
어린 시절 두 번의 사고 이후 실명을 했다고 전해지는 이용복은 TV가 없던 시절, 그래서 라디오를 통해 음악을 많이 접하던 시절인 1970년대 초반까지 장애를 가진 가수라는 사실을 아는 대중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이후 TV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해박한 지식과 말솜씨로 동아방송 등의 프로그램에서 방청객과 시청자를 매우 즐겁게 이끈 예능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72년 현재의 세종문화회관인 시민회관이 화재가 났을 때, 모 프로그램에 출연한 이용복은 “불이 난 것을 가장 먼저 봤던 이가 바로 나였다.”고 너스레를 떨었던 일화는 유명하다.
18세의 나이인 1970년에 데뷔했던 이용복은 ‘밤열차 불루스’로 데뷔했고, 다음 해에 이탈리아 산레모 가요제에서 입상했던 곡을 번안해서 ‘1943년 3월 4일생’을 발표하며 스타덤에 올랐다.
이용복은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면 기타리스트로 한 시대를 풍미했을 것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양희은의 데뷔 앨범에 수록된 ‘아침 이슬’에서 이용복은 12현 스틸 기타를 연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국내에서 최초로 기타 연주 앨범을 발표한 이도 이용복이었다.
1978년 마지막 앨범을 발표한 이후 이용복은 레코딩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이광조, 김수철, 부활, 샤크라 등 정상급 가수들의 레코딩 작업을 이끌었다.
이용복의 데뷔 음반은 한국 시각장애인 가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최초의 남녀 시각장애인 가수가 동시에 등장한 음반이기 때문이다.
이 음반의 B면 4번째 트랙에 위치한 ‘여인의 부르스’는 최초의 여성 시각 장애인 가수로 기록되고 있는 조성희가 부른 노래이다. 조성희의 ‘쟈니 내 사랑’ 등이 수록된 초기 음반들은 음반 수집가들의 주요 목록에 놓인 희귀반이기도 하다.
이용복이 1972년 발표한 ‘그 얼굴의 햇살’은 “휴일이었는데, 어제는 무얼 했느냐?”는 MC의 질문에 “날씨가 너무 좋아 창경원에서 밤 벚꽃놀이를 했다.”고 답한 이용복의 말처럼 야릇한 흥겨움과 서정미가 빛나는 노래이다.
낮도 아닌 밤 벚꽃놀이. 시력의 상실은 삶의 90%를 잃은 것과 같다고 한다. 이용복은 음악을 통해서 자신 삶의 어두움을 스스로 밀어냈다고 볼 수 있다.
김추자의 음악은 신중현이 추구하던 한국적 락음악을 훌륭하게 소화해 내면서 시작되었다.
덩키스의 반주로 제작되었던 김추자 데뷔 앨범의 히트곡 ‘늦기 전에’는 소울의 기취가 국악적 창법으로 뒤섞여 있는 음악적 특징을 지닌다.
음악적인 요소 외에도 김추자는 육감적인 몸매를 여과 없이 드러내면서 선보인 현란한 무대 연출은 중장년층 사이에서 '잠자던 돌부처도 불러 세웠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이목을 집중시켰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던 노래 ‘님은 먼곳에’는 1969년 11월부터 1970년 2월까지 3개월 동안 방영했던 동양TV의 주말연속극 주제가였다.
드라마가 종영된 지 4개월 후인 1970년 6월에 드라마와 주제가의 인기를 등에 업고서 신중현의 작·편곡집으로 컴필레이션 앨범이 제작되었다. 사실 ‘님은 먼 곳에’는 원래 당대 최고 인기가수였던 패티김이 부를 예정이었다.
그러나 녹음 당일에 패티김이 리사이틀 무대에 출연하게 되면서 방송국에서는 급한 마음에 신중현에게 대타 가수를 요청했고, 신중현이 추천한 김추자가 이 주제가를 부르며 히트를 기록하며 대중에게 어필이 되었다. 그리고 김추자의 목소리로 ‘님은 먼 곳에’가 녹음된 지 14년 후인 1984년 패티김은 뒤늦게 이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투코리언스의 김도향은 3천곡이 넘는 CM송을 작곡하고, 그 중 절반 이상을 직접 가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도향과 손창철로 구성된 남성 듀오 투코리언스가 데뷔음반에 담아낸 아름다운 하모니와 다채롭게 펼쳐진 애드립은 대중에게 확실한 눈도장을 찍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일편 활동 당시에 ‘시끄러운 노래’로 치부되며, 일부 대중에게 배척당하기도 했지만,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시대를 앞서간 벽오동의 음악은 지금에 들어도 매력적인 요소가 상당하다.
1971년에 발표된 1집 타이틀 곡 ‘벽오동’은 발표 때부터 지금까지도 투코리언스를 기억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표곡이다.
변칙적인 곡조에 굿거리 장단과 팝적인 리듬이 뒤섞인 가운데 시원한 가창이 인상적인 ‘벽오동’은 중반부의 ‘와르르르...’하는 대목이 유행어로 번졌을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던 노래이다.
이 앨범에는 김민기가 작사·작곡한 ‘말소리 너무 커’와 ‘길’ 등을 수록하는 등 총 10곡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1973년 솔로로 독립한 김도향은 CM송 작업으로 성공적인 변신을 이뤄냈다. 손창철은 키보이스 출신의 차도균과 2기 투코리언스로 미8군에서 재기를 시도했지만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
김도향은 어려운 생활을 하는 손창철의 소식을 듣고 투코리언스를 재결성해서 4집 [젊었다]를 발표했다. 온갖 장르를 섭렵하며 현란한 애드립으로 리메이크의 진수를 들려줬던 투코리언스의 마지막 독집인 5집은 이들 최고의 명반으로 손꼽힌다.
수록곡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들리지 않네’를 작곡한 강근식을 위시한 이호준, 유영수, 조원익 등 락밴드 동방의 빛이 들려준 무그 사운드의 절정이 담긴 것도 이 앨범의 특징이다.
이 외에도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와 ‘불꺼진 창’, ‘그건 너’ 등 이장희의 곡과 김민기가 작사작곡한 ‘고향가는 길’도 새롭게 수록되어 있다.
1975년 외래어 팀명을 사용할 수 없게 되어 투코리언스는 한글이름 ‘도향과 창철’로 활동을 이어갔지만 대마초사건으로 김도향이 활동에 제약을 받고, 손창철이 미국으로 떠나면서 팀은 와해되었다.
이 음반에는 김민기가 클래식 기타 연주를 담당한 ‘꽃 피우는 아이’와 서울음대 작곡과 여대생 김광희가 창작한 명곡 ‘세노야 세노야’, 그리고 가을시즌을 대표하는 불후의 명곡 ‘가을편지’의 오리지널 버전이 수록되어 있다.
사실 개체수가 희박해 200만원이 넘는 가격에 거래되는 초반은 완벽한 포크앨범이 아니었다. ‘가을편지’와 ‘세노야’를 제외한다면 대부분 추억을 자극하는 친숙한 곡들로 포진되어 있다.
이 음반이 명반으로 탈바꿈한 것은 창작곡들은 물론 기존의 히트, 번안곡들을 통기타 중심의 포크 선율로 새롭게 채색하며 대중가요의 수준을 예술적 경지로 견인하는 대수술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청년문화를 주도했던 포크송의 열기는 나훈아와 이미자와 같은 트로트 가수들도 포크송을 취입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게 만들었다.
원래 서울대 음대 성악과 출신이었던 최양숙은 제2회 TBC방송가요대상에서 최희준과 함께 최우수가수상을 수상하면서 대중가수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포크의 열풍 속에서 이를 수용하며 대중가요를 시작해야만 했다. 1971년 새해 첫 날 최양숙은 팝송과 샹송을 번안한 노래가 주를 이룬 앨범을 발표했다.
고은의 시를 대중가요로 승화시킨 ‘세노야 세노야’는 서울대 음대생인 김광희가 작곡하면서 처음으로 노래까지 불렀지만, 음반으로 수록된 버전은 최양숙의 버전이 최초였다. 그리고 대중적으로 히트를 기록한 ‘세노야 세노야’ 버전은 이후에 양희은이 부른 노래였다.
새해 벽두에 발매되었던 최양숙의 노래는 그녀의 오빠인 최경식의 기획 아래 김민기와 김광희의 도움으로 통기타 중심의 편곡으로 다시 취입되어 재발매되었다. 새롭게 수록된 5곡 가운데 ‘꽃 피우는 아이’와 ‘가을편지’는 젊은 층 사이에서 더한 인기를 얻었다.
특히 김민기가 클래식 기타 반주로 함께 했던 ‘꽃 피우는 아이’는 최고의 노래로 각광을 받았다.
이처럼 거의 새 앨범에 가까운 재반을 발매하며 대형 가수로 성장하게 된 최양숙은 1971년 5월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오케스트라를 동원하며 컴백 리사이틀을 의욕적으로 개최했다.
예상 외의 판매량을 기록하며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키자 대도레코드는 대형 신인가수로 판단한 김민기의 독집까지 곧장 제작해서 발표했다.
그러나 김민기의 독집과 최양숙의 ‘꽃 피우는 아이’는 금지앨범과 금지곡으로 묶이며 판매 금지 처분을 받게 되었다.
한동안 활동을 접었던 최양숙은 1975년 사장된 ‘가을편지’를 악단 세션으로 재녹음한 3판을 발표하면서 천신만고 끝에 컴백에 성공했고 ‘가을편지’는 최양숙과 함께 국민가요로 각인되며 큰 인기를 끌었었다.
나훈아의 ‘해변의 여인’은 포항출신 작곡가 박성규가 작사 작곡한 곡이다. 이 노래가 수록된 앨범은 나훈아 외에도 조미미와 박일남 등 인기가수가 함께 한 스플릿 형식의 음반이다.
1969년 청운의 꿈을 안고 상경한 그는 오아시스레코드의 전속 작곡가가 되었지만 월급조차 변변하게 받지 못하는 무명의 시절을 보냈다.
1970년대 남성들은 긴 머리의 여성에 대한 로망이 강렬했다. 20대 초반부터 탈모 현상이 심했던 작곡가 박성규는 오아시스레코드의 직원들의 남이섬 여름야유회 당시 해거름 즘에 본 긴 머리 소녀의 이미지를 청계천 5가에 위치한 가수 연습실에서 완성시켰다. 처음 노래가 완성되었을 때 제목은 ‘호수의 여인’이었다.
이 노래의 가창자로 나훈아가 결정되었을 때 나훈아와 레코드사에서는 “호수보다는 우리나라에 해변이 많고, 여름 시즌에 해변과 얽힌 추억이 많으니 ‘호수의 여인’보다 ‘해변의 여인’이 더 어울릴 거 같다.”며 노래제목을 변경시켰다. 사실 이 노래는 빅히트가 터진 1971년보다 2년 앞선 1969년에 발표되었지만, 그다지 주목을 이끌지 못하고 사장된 노래였다.
1971년 나훈아는 지구레코드로 스카우트되었다. 오아시스는 소속을 옮긴 나훈아에 대한 배신감과 맞불 작전으로 히트가 예감되었던 나훈아의 ‘해변의 여인’을 발표하게 된다. 그리고 이 노래는 예상을 뛰어넘는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나훈아는 ‘해변의 여인’에서 그만의 독특한 창법의 완성을 보이면서 서정어린 가사의 분위기를 유려하게 나열했고 자신의 입지를 확고부동하게 굳히게 되었다.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로 불린 남진은 여러 장르를 오가는 히트곡이 많은 가수이다.
그 중 일인독주태세를 구축시킨 ‘님과 함께’는 국민가요로 평가받는 노래로 이 곡이 수록된 앨범은 10만 장 이상이 판매되었다.
소울의 경쾌함을 트로트에 녹여낸 ‘님과 함께’의 정서는 국가적 사업이었던 새마을 운동의 흐름과 때를 같이 하면서 온 국민의 장밋빛 청사진을 대변했다. ‘님과 함께’는 나훈아의 히트곡인 ‘사랑은 눈물의 씨앗’과 주현미의 히트곡 ‘신사동 그 사람’을 작곡한 남국인이 완성한 곡이다.
1972년 여름 남국인은 포항으로 밤바다 낚시를 가기 위해 금강휴게소를 지나고 있었다. 그 때 언덕 위에 하얀색으로 페인트칠이 된 그림같은 집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하늘빛보다 더 고운 색색의 집들을 바라 본 남국인은 곧장 ‘님과 함께’의 악상이 떠올랐다고 한다.
‘님과 함께’가 수록된 초반은 더블재킷의 컴필레이션 음반이었다. 앞면은 하와이 해변에서 시원한 서핑을 타는 그림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젊고 건장한 남진의 사진이고, 뒷면 재킷은 생소한 여가수 임정의 사진으로 장식되어 있다. 발매와 더불어 폭발적으로 팔려나간 이 음반은 이듬 해에 싱글재킷으로 새롭게 발매되었다.
‘님과 함께’가 대중에게 선사하는 음악적 매력은 여전히 삶이 버거운 서민들에게 위안을 안겨주는 가사에 있다. ‘님과 함께’는 1973년 남진과 김창숙의 주연으로 영화로 제작되었으며, 삼성 라이온즈의 이승엽 선수가 일본에서 활약할 당시 그의 응원가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 음반은 조용필만의 목소리가 담겨진 순수한 의미의 조용필의 데뷔 앨범이다.
음반이 출시된 1972년 당시 조용필은 애트킨스 파이브 핑거스를 거쳐 김대환의 김트리오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옴니버스 음반이 대세였던 1972년 당시에 가능성을 인정받은 신인가수 조용필의 첫 독집은 창작곡 ‘옛 일’에서 그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앨범에는 적잖은 번안곡들이 자리하고 있다. 먼저 1970년 산레모 페스티벌(Sanremo Festival)에서 우승을 차지했던 ‘Chi Non Lavora Non Fa L'amore’를 원작으로 하는 ‘일하지 않으면 사랑도 않을래’는 아드리아노 첼렌따노와 끌라우디아 모리가 각각 불렀던 곡이다.
스케일이 매우 큰 오케스트레이션 파트를 주로 했던 원곡의 분위기와 달리 조용필의 버전은 진성과 가성을 넘나드는 창법을 더빙해서 효과음까지 넣은 실험적인 구성을 지니고 있다. 엄밀히 그의 히트곡 중 하나인 ‘단발머리’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노래다.
또 한 곡의 번안곡인 ‘사랑의 자장가’는 스코틀랜드 민요인 ‘Geordie’를 원곡으로 편곡된 노래다. 존 바에즈와 샌디 데니, 트리스 등 영국 포크 애호가들에게 특히 많은 사랑을 받았던 노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용필의 버전에는 포크적인 흐름보다는 이 음반의 전체적인 사운드 색감이라 할 수 있는 소울의 기품과 트로트적인 기운도 묻어난다. 이는 송창식이나 윤형주의 버전으로 익숙한 나나 무스쿠리의 ‘Over & Over’에 우리말 가사를 붙인 ‘작은집’, 현인의 히트곡이지만 박인희의 목소리로 잘 알려진 ‘세월은 가도’(박인희 곡의 제목은 ‘세월이 가면’) 등에서 잘 전달된다.
1972년에 발표된 [조용필 스테레오 힛트앨범]은 국민가요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첫 버전이 수록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사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복잡한 사연을 지닌 노래다. 이미 1960년대에 탄생된 이 노래를 최초로 부른 가수는 조용필이 아니며, 1972년 한 해에만 조용필을 비롯해서 여러 가수가 취입했던 노래였다.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최초 버전은 조용필보다 2년 앞선 1970년에 김성술이 작사해서 김해일이란 예명으로 발표했던 '돌아와요 충무항에'다.
충무항을 소재로 삼은 가사만 빼면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멜로디가 동일해서 훗날 저작권 분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22세 청년 조용필의 앳된 목소리에 통기타 두 대를 반주로 사용해서 트로트풍으로 노래한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첫 버전은 통속적인 사랑노래였다. 가사도 우리가 아는 버전과는 달랐고 그다지 큰 반응을 얻지도 못했다.
19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조용필과 영사운드의 스필릿 음반에 새로운 버전으로 수록되었다. 제작자 안치행은 자신의 밴드 영사운드의 히트곡을 채워서 빨간 재킷 이미지에 조용필의 장발사진을 담아서 발매시켰다. 처음에 방송 홍보조차 제대로 못하면서 앨범 판매가 부진했지만, 점차 부산의 다운타운가를 통해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4개월 후 깔끔하게 머리를 정리한 조용필 사진으로 교체시킨 재반이 발매되었다. 당시 최대 이슈는 조총련계 재일교포들의 고향 방문이었다.
새롭게 녹음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1972년에 발표되었던 첫 번째 버전에 락을 접목했고, ‘님’이라는 단어를 ‘형제’로 바뀌면서 당시 사회적인 기류를 타면서 대박으로 이어졌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1978년에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었고, 1979년 폴 모리아악단에 의해 연주곡으로 취입되기도 했다.
조용필을 통해서 한국을 대표하는 대중음악으로 인정받은 ‘돌아와요 충무항에’, 즉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이후 수많은 일본가수와 대만가수 등려군까지 취입하면서 아시아의 명곡으로 인정받았다.
1970년대 초반에 한국 대중음악계의 메이저 음반사들은 영국과 미국의 팝이나 포크에 영향을 받아서 포크와 트로트를 접목시킨 묘한 스타일을 탄생시켰다.
이런 스타일을 구사한 작곡가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김영광이었다. 남진의 ‘울려고 내가 왔나’와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 등 큰 히트곡을 작곡했던 김영광은 1972년에 이르러서 자신의 작곡 스타일을 트로트에 주한 포크 스타일로 변형시켰다. 그 대표적인 히트곡이 바로 이수미가 부른 ‘여고시절’이었다.
1972년 발표된 이수미의 '여고시절'은 신인 가수상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MBC 10대 가수상, TBC 7대가수상을 수상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이수미는 1969년 목포여고 3학년 때 언니들의 옷을 빌려 입고 가발을 뒤집어 쓴 상태로 목포 KBS 노래자랑대회에 나갔다가 5주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이듬해에 목포 MBC가 생기면서 MBC 연말 노래자랑 결산 방송에서는 최우수상을 받았으며, 마침 자리에 참석했던 오아시스 손진석 사장의 눈에 들며 앨범 제작에 대한 계약을 이루게 되었다.
작곡가 김영광은 ‘여고시절’을 완성하고서 오아시스레코드의 전속가수 모두에게 노래를 불러보게 했다. 마지막 차례로 이수미의 노래를 듣게 된 김영광은 “이 곡은 네가 주인”이라며 곧바로 기타 3대로 동시녹음에 들어갔다.
1972년에 발표된 '여고시절'은 그 해 4월부터 발표된 모든 방송국의 가요베스트10 상위권에 올랐고, 특히 여고생들의 절대적인 호응을 이끌어냈다. 또한 제4회 ‘낙엽상’을 김세환과 함께 수상했다. 1972년은 각종 방송잡지사가 수상하는 가요상에 이수미의 이름이 빠진 적이 없다.
이후 이수미는 정훈희와 김태희와 함께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하며 최고의 여가수로 호황을 누렸다.
양희은과 신중현의 조합은 지금에 생각해도 상상할 수 없는 조합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조화는 몽환적인 느낌 가득한 재킷 디자인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을 전달하며 한국 포크의 성수기였던 1972년에 발표되었다.
이 앨범이 갖는 의미는 한국 최초의 사이키델릭 포크 락 음반이라는 점이다. 포크와 싸이키델릭을 뒤섞은 이 앨범의 시도는 시대를 앞서간 만큼 당대에는 그다지 큰 조명을 받지 못했었다.
싸이키델릭 포크의 진수가 펼쳐진 이 앨범의 앞면은 ‘당신의 꿈’과 ‘길’ 등 신중현이 완성한 5곡이 담겨 있다. 뒷면은 조동진의 ‘작은배’와 서유석의 ‘하늘’, 그리고 김광희의 ‘빈자리’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처럼 이 음반은 조동진의 데뷔가 상당히 이른 시기였음을 알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총 10곡이 수록된 이 앨범이 이채를 더하는 부분은 두 가지다. 바로 한대수가 1968년 무대에서 발표한 이후 구전으로만 불려지던 ‘행복의 나라’가 처음으로 레코딩되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김정미의 노래로 알려진 ‘나도 몰래’ 역시 양희은이 최초로 취입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부분이다.
신중현사단의 여가수들의 노래를 들어보면 창법이 거의 흡사하다. 이는 신중현이 의도한 면이 강하다. 그러나 신중현은 양희은과의 작업 속에서 그녀의 맑은 음색으로 전달되는 창법을 그대로 유지시킨 채 가창을 진행시켰다. 때문에 이 앨범은 신중현 특유의 환각적인 싸이키델릭 사운드와는 차별되는 맑은 빛깔의 싸이키델릭이 담겨져 있다.
창작과 연주 그리고 노래까지 겸비한 뮤지션을 흔히 싱어송라이터라 부른다. 국내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공식적으로 최초라고 말하기 부담스럽지만 우선 1971년 8월 ‘그리운 사람끼리’를 발표했던 박인희를 거론하는 측이 있다.
숙명여대 불문과 출신인 그녀는 데뷔시절인 혼성듀엣 뚜아에무아 활동 때는 노래가사 쓰기에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1972년 솔로 독립 이후에는 ‘모닥불’과 ‘하얀 조가비’와 같은 창작곡을 앨범마다 2~3곡씩 수록했었다. 뒤를 이어서 등장한 이들이 또한 만만찮은 실력파들이다. 이연실과 방의경, 김광희 등은 박인희의 등장 직후에 데뷔 음반을 발표하거나, 옴니버스 앨범에 참여하게 된다.
일각에서는 방의경을 최초의 여성 싱어송라이터로 손꼽기도 한다. 그 이유는 단일곡이 아닌 앨범 개념으로 독집을 발표한 최초 가수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 초반 등장했던 많은 여성 싱어송라이터 가운데 방의경의 가창력과 작곡력은 단연 돋보였다. 또한 정미조와 함께 이화여대를 대표하는 가수로 인정받았던 방의경은 여자 가수로는 유일하게 한 대수, 김민기 등과 같은 저항적인 포크 앨범을 발표했던 뮤지션이기도 했다.
그녀를 대표하는 노래 ‘불나무’는 그녀의 유일한 앨범인 [방의경 노래 모음]에 수록되었던 곡이다. 어두운 사회현실을 맑고 아름다운 은유적인 노랫말로 표현한 명반이었다. 때문에 방의경의 데뷔 앨범은 발매와 동시에 방송과 판매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방의경은 자신의 데뷔 앨범 발표에 앞서 500장 한정으로 발표된 컴필레이션 음반 [아름다운 사람아 아름다운 노래들]에 ‘불나무’를 수록했었다. ‘불나무’는 암에 걸린 줄 알았던 여성에게 새로운 생명의 불씨를 지펴준 사연을 지닌 노래로 대중에게 알려져 있다.
[아름다운 사람아 아름다운 노래를]은 대학생 싱어송라이터들의 모임 장소였던 충무로의 음악감상실 내쉬빌의 멤버들이 대거 참여한 음반이다. 방의경, 김광희, 양병집, 김태곤, 박두호, 고경훈, 김현숙 등이 참여했으며, 앨범에 참가한 이들은 ‘우리들’이라는 프로젝트 명으로 타이틀 곡 ‘아름다운 사람아 아름다운 노래를’을 함께 불러서 수록했다.
한국 대중음악 역사에서 선구적인 음악활동과 누구보다 먼저 작품을 발표했음에도 대중의 지지를 제대로 받지 못했던 방의경은 1974년에 장충 스튜디오에서 2집을 녹음하게 된다. 하지만 지인에게 맡겨 두었던 마스터 음반이 분실되면서 이 녹음본은 아직까지도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박찬욱 감독의 2016년 새로운 영화인 ‘아가씨’의 주제곡은 ‘임이 오는 소리’이다.
원곡은 혼성 듀엣 뚜아에무와의 곡으로 영화 ‘아가씨’에서는 영화의 흐름상 가인과 김민서 두 사람을 멤버로 하는 여성듀엣으로 새롭게 리메이크되어 삽입되었다.
‘임이 오는 소리’에서 “기다리는 내 마음에/기쁨이 넘쳐 흘러라/그대 나를 찾아서 저기 오네/푸른 꿈 가득 안고”라는 가사는 영화 ‘아가씨’의 하녀 숙희(김태리)와 아가씨 히데코(김민희)의 사랑을 가장 잘 대변하는 표현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통기타음악에서 남녀혼성듀엣으로 첫 히트곡을 터뜨린 팀은 1971년 1월에 '사랑해'를 발표한 라나에로스포로 알려져 있지만, 최초로 결성된 남녀혼성듀엣은 뚜아에무아였다. 트윈폴리오 이후 남성 듀엣이 주로 등장하던 것과 달리 뚜아에무아의 등장을 통해서 다수의 혼성 듀엣이 나타나는 기현상도 벌어졌다.
1968년 락그룹 타이거스의 리더로 활동하던 이필원은 당시에 락음악의 메카로 분류되던 미도파살롱에서 인기 MC이자 숙대 불문과 재학생이었던 박인희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에벌리 브라더스의 ‘Let It Be Me’를 무대에서 함께 불렀고, 이들의 환상적인 화음은 음악평론가 이백천을 사로잡게 되었다.
이후 이백천은 두 사람의 방송 출연을 주선했고, 가수 조경수는 듀엣 결성을 적극적으로 제의해서 뚜아에무아는 결성될 수 있었다. 이들의 듀엣명인 '뚜아에무아'는 불어로 '너와 나(Toi et Moi)'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뚜아에무아는 차분하고 아름다운 화음을 지니고 있었으며, 통기타를 기본으로 스트링 사운드를 반주로 삽입하면서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더했다. 이러한 느낌이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노래가 바로 ‘그리운 사람끼리’와 ‘임이 오는 소리’이다.
1970년 2월 신세기에서 발매된 이들의 데뷔 앨범은 스플릿 형식으로 발매되었다. 총 8곡을 수록한 뚜아에무아는 ‘약속’을 비롯해서 자작곡 3곡을 수록시켰다.
방송을 통해 대중성을 확보한 뚜아에무아는 1971년에 3장의 음반을 발매하면서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을 두고서 나돌던 여러 소문은 내성적인 성격을 지닌 이들을 자연스레 갈라서게 만들고 말았다.
이후 이필원은 포크락을 구사했던 ‘이필원과 바람꽃’으로 활동했으며, 박인희는 솔로로 데뷔해서 새로운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혼성 듀엣 열풍을 몰고 왔던 뚜아에무아의 멤버로 대중음악계에 데뷔한 박인희가 1973년에 솔로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앨범이다.
여고 시절부터 문학소녀였던 박인희의 순수한 사고와 감성은 고은 비단결을 연상시킨다. 이는 그녀가 노래했던 여러 음악 속에서 확실히 엿보인다.
박인희는 한국 최초의 여성 포크 싱어송라이터로 일컬어지는 방의경보다 1년 여 앞선 1971년에 창작곡 ‘그리운 사람끼리’를 뚜아에무아의 2집 앨범에 수록했었다.
짧았지만 의미있었던 뚜아에무아의 활동 이후 박인희는 동아방송의 라디오 DJ로 활동하던 중 작사 초년생이던 故박건호로부터 ‘모닥불’과 ‘돌밥’의 가사를 전달 받게 된다.
정갈한 가사가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박인희는 직접 곡을 붙이게 된다. 이렇게 발매된 박인희의 솔로 1집은 수많은 재발매로 대중에게 소개되었던 음반이다.
가장 희귀한 초반은 1972년 프린스레코드에서 제작되었으며, 초반 뒷면은 검은 바탕에 통기타를 든 박인희의 사진이 장식되어 있다. ‘모닥불’은 발표 이후부터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애청되고 불려졌던 1970년대 포크 음악을 대표하는 노래이다.
1981년 대중음악계를 떠났던 박인희는 1989년 풍문여고 동창인 이해인 수녀와 함께 수필집 ‘소망의 강가로’를 내놓은 이후 사망설이 나돌 정도로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최근 홀연히 나타난 그녀는 2016년 4월 30일 송창식과 함께 콘서트를 진행했다.
故이종환이 기획한 ‘오아시스 포크 페스티발’ 시리즈의 첫 음반은 남성듀엣 4월과 5월의 데뷔 음반이다.
백순진은 이수만을 만나 듀오를 결성해서 두 사람은 레코딩에 임했다. 그러나 이 앨범은 백순진과 이수만이 레코딩을 진행했지만, 재킷 사진에는 이수만 대신에 김태풍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당시 늑막염에 걸린 이수만이 활동에 제약을 받자 도중하차하면서 생긴 해프닝의 결과였다.
백순진은 이수만을 대신해서 자신의 기타레슨생인 외국어대 불어과 3학년 김태풍으로 멤버를 교체했고, 재녹음을 진행하지 못한 채 급하게 앨범이 발표되었다. 정식 녹음이 아닌 방송출연 음원을 수록했던 열악한 음질이었던 이 음반의 수록곡은 1973년 초에 김태풍과 새롭게 녹음을 진행해서 재반으로 발표되기도 했다.
사월과 오월의 데뷔 음반은 ‘백순진 작품집’이라는 표기에서 나타나듯이 백순진의 작품으로 채워져 있다. 작곡은 물론 편곡력까지 뛰어났던 백순진은 휘문고 2학년 시절부터 오승근과 홍순백, 김태옥 등과 보컬그룹 엔젤스(The Angels)를 결성해서 활동할 정도로 음악적 재능이 남달랐던 뮤지션이다.
사월과 오월의 1기로 분류되는 백순진과 이수만은 통기타 붐이 본격적으로 일기 시작하던 1972년에 점차 주목을 받게 된다. 특히 사월과 오월이 대중에게 이목을 집중적으로 받기 시작한 계기는 주간잡지였던 ‘선데이 서울’이 주관한 ‘대학생을 위한 밝고 고운 노래공연, 맷돌’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사월과 오월은 이후 김민기, 송창식, 양희은 등과 함께 특히 서정적인 가사와 아름다운 멜로디가 주를 이룬 창작곡 위주로 활동하며 청년문화와 함께 했다.
1974년 사월과 오월은 이수만과 김태풍을 이어서 새로운 멤버로 김정호를 맞이하게 된다. 잠시간 머물렀던 김정호는 사월과 오월 이후 곧장 ‘이름모를 소녀’를 타이틀로 한 앨범을 발표하면서 솔로로 전향했다.
1974년 중반에 백순진은 김태풍을 멤버로 다시 맞이하면서 사월과 오월의 활동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음악적으로 큰 시도를 감행했던 이 시기에 사월과 오월은 이수만이 보컬과 베이스 파트를 담당한 6인조 그룹사운드 들개들을 결성해서 포크와 락의 조화를 이룬 사운드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현재 이수만과 백순진은 각각 SM엔터테인먼트의 회장과 함께하는 음악저작권 협회의 회장으로 재직중이다.
1970년대 초반부터 중반기까지 대중음악의 중심을 잡았던 음악적 스타일은 청년문화를 대변했던 한국식 포크였다.
여기에서 장르적인 측면이 아닌 스타일적인 부분으로 포크를 논하는 이유는 대중 가운데 특히 젊은이들이 많이 좋아하고 즐겨 불렀다는 의미가 크다.
송창식과 윤형주로 구성된 트윈폴리오의 독집 음반 이후 수많은 남성 듀엣이 등장했으며, 박인희와 이필원의 뚜아에 무아의 등장 이후에는 여러 혼성 듀엣이 포크라는 스타일로 음반을 발표해 나왔다.
이러한 배경에는 무교동과 명동에 위치했던 세시봉과 디쉐네, 오비스 캐빈의 전신인 심지다방과 같은 음악감상실의 기여가 컸다.
1963년 이후부터 음악감상실의 한 귀퉁이에 자리했던 작은 무대는 한대수와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조영남, 서유석 등이 데뷔 이전에 활동하던 주요무대였다.
이와 별도로 김의철과 양병집, 김민기, 양희은, 방의경 등 대학가를 중심으로 의식있는 포크 문화를 선도해 나왔다.
여러 포크 음반이 쏟아지던 1973년부터 뮤지션들의 개별 음반이 아닌 특정 뮤지션이나 집단을 한 앨범에 모은 컴필레이션 앨범이 제작되면서 대중의 큰 환영을 이끌어내게 되었다. 이 앨범들은 ’오아시스 포크 페스티벌‘, ’영 페스티벌‘, ’골든 포크 앨범‘ ’영 패밀리‘ 등의 이름을 달고서 한 장의 앨범에 여러 가수들의 음악을 담아서 제작되었다.
또한 몇몇 앨범은 시리즈로 지속적으로 발매되며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으며, 개별 앨범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노래들이 뒤늦게 히트하게 되는 사례도 나타났다.
이처럼 포크를 중심으로 자생적으로 탄생하고 성장했던 청년문화는 미8군 무대에서 영미 음악을 포용하며 진화하고 있던 락 사운드와는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1970년대 한국 포크는 싱어송라이터 개념이 점차 강화되었으며, 사회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담긴 음악을 통해서 대중의 의식구조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1963년 이후부터 음악감상실의 한 귀퉁이에 자리했던 작은 무대는 한대수와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조영남, 서유석 등이 데뷔 이전에 활동하던 주요무대였다.
이와 별도로 김의철과 양병집, 김민기, 양희은, 방의경 등 대학가를 중심으로 의식있는 포크 문화를 선도해 나왔다.
여러 포크 음반이 쏟아지던 1973년부터 뮤지션들의 개별 음반이 아닌 특정 뮤지션이나 집단을 한 앨범에 모은 컴필레이션 앨범이 제작되면서 대중의 큰 환영을 이끌어내게 되었다. 이 앨범들은 ’오아시스 포크 페스티벌‘, ’영 페스티벌‘, ’골든 포크 앨범‘ ’영 패밀리‘ 등의 이름을 달고서 한 장의 앨범에 여러 가수들의 음악을 담아서 제작되었다.
또한 몇몇 앨범은 시리즈로 지속적으로 발매되며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으며, 개별 앨범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노래들이 뒤늦게 히트하게 되는 사례도 나타났다.
이처럼 포크를 중심으로 자생적으로 탄생하고 성장했던 청년문화는 미8군 무대에서 영미 음악을 포용하며 진화하고 있던 락사운드와는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1970년대 한국 포크는 싱어송라이터 개념이 점차 강화되었으며, 사회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담긴 음악을 통해서 대중의 의식구조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1972년 오아시스 포크 페스티발의 첫 시리즈인 [오아시스 포크 페스티발 Vol.1]은 두 장의 버전이 존재한다. ‘4월과 5월 작품집’이라는 부제가 붙은 시리즈에는 4월과 5월을 비롯해서, 이수만, 쉐그란, 홍민, 이수미 등 7개 가수와 팀이 참여하고 있다.
엄밀히 이 앨범은 음반의 한 면이 4월과 5월의 노래로 채워져 있듯이 이들의 실질적인 데뷔앨범이다. 이 음반이 흥미로운 점은 포크와 락의 조화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 앨범에서 사월과 오월은 어쿠스틱 기타 위주의 반주를 기초로 드럼과 베이스, 기타, 오르간 등 그룹사운드의 연주 방식을 부분적으로 차용했다.
대표적인 노래가 바로 ‘화’와 ‘푸른 하늘’이었으며, 이후 사월과 오월의 레코딩 방식은 이러한 맥이 강화되던 때가 존재한다. 1973년 발표된 또 다른 [오아시스 포크 페스티발 Vol.1]의 부제는 ‘국내 최고인기 5대 폭송구룹의 총결산’이다.
부제에 걸맞게 5개 팀이 노래하고 연주한 12곡의 노래가 실린 이 앨범의 정면 재킷에는 히식스와 4월과 5월, 빅 파이브, 영사운드의 사진이 오밀조밀하게 자리하고 있다.
시리즈의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오아시스 포크 페스티발 Vol.6]은 윤연선과 이수만의 노래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오아시스 포크 페스티발 Vol.6]은 ‘이수미 독집’이라는 부제를 달고서 1974년에 발표된 별도의 음반도 존재한다.
고교 1학년 때부터 YMCA의 '싱얼롱 Y'에 나갈 정도로 노래를 좋아하고 즐겨 부르던 윤연선은 재수생 시절이던 1972년 KBS배 쟁탈 전국 노래자랑 월말대회에 출전해서 1등을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 선발된 신인 6명과 함께 KBS의 '새별무대'에 출연해서 이수만의 자작곡을 불렀다. 이수만의 노래를 부르게 된 뒷이야기가 존재한다.
윤연선은 동국대 가정학과에 합격하고서 친구의 소개로 명동에 위치한 대학연합음악동아리에 참여하게 된다.
이때 남성듀엣 4월과 5월의 멤버로 활동하다가 병으로 잠시 활동을 중지했던 이수만을 만나게 된다.
김의철을 통해 한영애가 피어났듯이 윤연선은 이수만을 만나면서 가수의 길에 본격적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이후 이수만과 어울려 다니던 윤연선은 방송국에서 DJ 이종환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고, 대학축제무대에서 존 바에즈의 노래를 부르는 등 학생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해 봄에 윤연선은 음반 취입을 진행하던 이수만을 따라서 마장동 스튜디오를 찾게 된다.
당시 스튜디오에는 송창식, 4월과 5월, 서수남 등 기라성같은 가수들이 자신의 녹음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녹음실을 구경하던 중 DJ 이종환이 권유로 윤연선은 장난삼아 이수만의 곡을 부르게 된다. 이후 윤연선은 당시 불렀던 노래가 음반으로 나오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이종환은 1972년 10월에 윤연선과 이수만의 실질적인 데뷔음반으로 기록되는 [오아시스 포크 페스티발 6집]을 발매한다. 윤연선과 이수만의 풋풋한 모습이 담긴 앨범의 재킷은 남산 타워호텔 앞에서 급하게 촬영한 사진이다.
앨범의 타이틀곡은 윤연선이 부른 ‘내 마음’이다. 윤연선은 이 곡을 포함해서 5곡을 불렀고, 앨범의 뒷면은 이수만과 4월과 5월의 채워져 있다. 이 앨범에서 특히 돋보이는 점은 당시 대학 초년생이었던 이수만이 습작처럼 작곡한 동요스러운 선율들이다.
1970년 7월 미니스커트 복장한 이들에 대해 국립묘지 출입을 금지시킨 이후 같은 해 9월 광주 경찰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 8명을 처음으로 즉결재판에 회부시켰다.
1971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은 히피족의 TV 출연을 금지시켰으며, 곧이어 ‘음반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었다. 같은 해 장발족에 대한 일제 단속이 시작되었으며, 1972년에는 문화공보부의 주관 아래 건전가요 제정 및 선전보급을 위한 개창운동 사업계획이 발표되었다.
1974년 서울시경이 1주일 동안 10,103명을 장발 단속을 통해서 262명을 즉심에 회부했다. 급기야 1975년 9월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는 대중가요 222곡에 대해 방송금지 및 음반 유통 금지 처분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이 때를 전후해서 음반사의 설립 역시 허가제로 바뀌었으며, 모든 음반은 검열을 통해 발매승인을 받아야만 시중에 유통될 수 있었다. 또한 발매가 되었다고 해도 금지곡으로 뒤늦게 판정을 받으면 방송에 소개될 수도 없었으며, 음반은 다시 수거되어 폐기 처분되었다.
하지만 방송국 PD들은 금지사유와 상관없이 음악적으로 괜찮은 노래들을 몰래 방송에 내보냈다. 결국 정부의 관련 부서에서는 각 방송국의 자료실에 보관중인 금지 음반에 대해 ‘금지곡’ 표기를 가했다. 그럼에도 금지곡들이 방송에 간간히 나가게 되자, 이번에는 해당 음반의 홈을 아예 칼로 긁어버리기까지 했다.
이러한 훼손 흔적이 선명한 음반들은 아직도 방송국 자료실에 무수하게 남겨져 있다. 감상적인 측면에서 가치가 떨어지는 음반이지만 훼손된 해당 음반들은 1970년대 군사정권의 금지문화를 증명하는 가장 선명한 사료라 할 수 있다.
김광석의 명반으로 불리는 [다시부르기2] 음반을 통해 그가 존경심을 표했던 노래가 한 곡 있다. ‘저 하늘의 구름따라’의 원곡인 ‘불행아’가 바로 그 노래다.
이 노래는 김의철이 1973년 초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마장동 스튜디오에서 이틀 동안 일사천리로 녹음을 마쳤지만 1년이 지나서 발표된 노래였다.
‘불행아’의 노래 가사 가운데 ‘그리운 부모 형제 다정한 옛 친구 그러나 갈 수 없는 신세’라는 구절은 민중가요 노래패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일원이었던 김광석과 가장 잘 어울리는 노래라 할 수 있었다.
김의철의 데뷔 앨범이 발매되던 당시에 타이틀곡으로 염두에 두었던 ‘불행아’는 곡의 분위기가 너무 어둡고 가사가 많다는 이유로 ‘저 하늘의 구름따라’로 제목이 변경되어 수록되었다. 하지만 ‘불행아’는 그것도 모자라서 앨범의 뒷면으로 트랙 순서가 밀린 것은 물론, 가사도 수정되어 원형이 훼손된 채 발매되었다.
결국 김의철은 자신의 데뷔음반을 스스로 판매 금지하는 강수를 두고 만다. 그러나 제작사에서는 김의철과 상의없이 음반의 성공을 예견하면서 판매를 강행하고 만다.
이 음반은 이후 판매 금지 처분을 받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이 음반의 주인공이라 할 만한 김의철과 박찬응 두 사람은 대중가요 역사에서 장시간 사라지고 마는 결과를 야기했다.
김민기의 기타와 이정선의 베이스, 김광희의 피아노 등이 함께 자리한 김의철의 이 음반에는 한국 포크사 최고의 명곡이 자리하고 있다.
당시 서강대학교 영문과에 재학중이던 박찬응의 소름끼치는 허스키 창법이 담긴 ‘섬아이’는 단 한 번의 가창으로 그녀를 ‘한국 포크 최고의 컬트’로 추앙받게 만들었다.
애절하고 창백한 보이스 톤과 창법이 담긴 ‘섬아이’는 이 음반이 명반으로 평가받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
1971년 김의철이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잠시 갔던 강원도 북평의 한 바닷가에서 작곡했던 ‘섬아이’는 서울에서 내려 온 도시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해서 물끄러미 바라만 보다가 잠이 든 외로운 섬소년의 아쉬운 꿈이 담겨진 노래이다.
김의철은 1973년 봄 연세대 교정에서 열린 한 공연장에서 레오나드 코헨의 노래를 기막힌 창법으로 부르던 박찬응에게 ‘섬아이’의 주인공인 섬소년이 되어 달라고 간청을 하게 된다.
평소 “외국 곡을 능가하는 우리 나라 사람의 노래가 있다면 부르겠다.”고 공언해 오던 박찬응은 김의철의 ‘섬아이’에 깊게 매료되었고, ‘평화로운 강물’ 등 두 곡의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앨범 발매 이후 ‘창법 미숙’이라는 이유로 금지곡 처분이 내려지자, 박찬응은 미국을 오가며 학업에 전념하게 되었다. 박찬응은 1989년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서 하와이대에서 ‘한국 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95년부터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서 한국학 교수로 재직하며 판소리를 통해 한국의 얼을 세계에 알려 나오고 있다.
한편 1980년대 중반부터 ‘한국의 재니스 조플린’으로 불렸던 한영애는 데뷔 초기에 포크 가수로써 ‘한국의 멜라니 샤프카’로 인정받던 시절이 있었다. 한영애의 가수 데뷔에는 가수이자 청년문화의 구심점 역할을 담당하던 김의철이 존재한다.
1975년 한영애는 매주 해바라기홀에서 해바라기의 원년 멤버였던 김의철의 노래를 주로 연습해서 불렀다. 이 당시 한영애가 불렀던 노래들은 김의철을 이어서 초창기 해바라기의 음악적 중심을 이루던 이정선의 손을 거치게 된다. 이렇게 해서 1977년에 발표된 앨범이 바로 한영애의 미발표 데뷔 음반인 [어젯밤 꿈/사랑의 바람]이다.
양병집은 억압된 70년대 사회현실을 비꼬는 노랫말을 한국적 향내가 풍기는 구수한 보컬에 얹어 외국 곡이나 구전가요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탄생시킨 인물이다.
그는 김민기와 한 대수, 서유석과 함께 초창기 한국 모던 포크의 4인방으로 솝꼽히던 뮤지션이다. 양병집의 목소리는 김민기와 김의철, 서유석 등을 뒤섞은 탁음이 매력적이다.
그의 첫 독집 [넋두리]는 한대수와 같은 해인 1974년 3월에 성음레코드에서 발매되었다. 총 10곡의 수록곡은 대부분 사회풍자적인 노래로 채워졌으며, 간단명료한 재킷의 이미지부터 인상적이다. 뱅글뱅글 도는 듯 한 돋보기안경 너머로 상대를 매섭게 쏘아보는 눈빛과 담배를 질끈 물어댄 이미지는 양병집의 고집스러운 음악세계를 가감 없이 전달하는 듯 하다.
수록곡 가운데 서유석의 노래로 익숙한 ‘타복네’와 밥 딜런(Bob Dylan)의 ‘Don't Think Twice, It's Alright’를 리메이크한 ‘역’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특히 양병집이 ‘역’의 가사에서 예견한 미래의 모습은 지금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으며, 이 노래는 이연실의 버전을 거쳐서 故김광석에 의해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로 다시 한 번 불려 지며 히트를 기록했다.
한편 김광석은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에서 3절의 가사를 조금 바꿔 부름으로써 원곡의 흐름을 새롭게 이어 표현했다. 양병집 음악은 물론 한국 포크사에 명반으로 기록되는 이 앨범에는 우디 거스리의 ‘New York Town’을 번안한 ‘서울하늘’과 유일한 자작곡이며 자신의 어머님을 연상하며 완성한 ‘아가에게’ 등도 풍성함 가득한 감성을 전달한다.
그러나 양병집의 풍자적인 노래말과 반항적인 재킷은 방송 부적격이라는 이유로 3개월 만에 판매 금지 처분이 내려졌다. 1,500장 제작된 초반 가운데 금지 앨범으로 지정되기 이전에 팔려나간 800장이 세상에 남겨진 전부다. 2005년 양병집의 [넋두리]는 330장 한정으로 앨범마다 고유번호 부여된 LP와 CD로 재발매되기도 했다.
1968년 방송국 PD이자, MC였던 이백천은 “뉴욕에서 특별한 손님이 왔다.”는 멘트로 세시봉 무대에 첫 선을 보인 한대수를 소개했다.
유명 팝가수의 노래와 히트 팝송을 주로 부르던 당시 출연진과 달리 한대수의 첫 무대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한대수, 그 자체였다. 하나의 수필을 써나가듯 전개된 멜로디와 목소리는 귀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자리한 모든 이들을 충격과 환희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한국 대중음악계에 포크락과 싱어송라이터 개념을 제대로 안착시킨 가수이자 작가인 한대수의 공연 가운데 아직도 회자되는 유명한 공연이 존재한다. 바로 1969년에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가졌던 그의 첫 번째 콘서트이다. 조명을 모두 끈 암흑 속에서 시계 초침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시작된 이 날 공연은 무대 주변에서 향이 피어오르고 한대수가 커다란 톱을 연주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날 무대에서 한대수가 노래한 곡의 상당수는 그가 18세 전후에 작곡했던 것들이었다. 이 공연은 1969년을 ‘한국 포크락의 원년’으로 이끈 것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당시 무대에서 공개되었던 노래는 5년이 지난 후에 데뷔 음반 [멀고 먼 길]로 발매되었다.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 가운데 8위에 선정된 앨범 [멀고 먼 길]은 한국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소중한 유물로 기억되고 있다.
한대수는 기존 음악 문법을 일거에 전복시켰던 지적인 감성과 창법의 조화를 보여줬으며, ‘물 좀 주소’, ‘행복의 나라로’, ‘옥의 슬픔’, ‘바람과 나’ 등의 명곡은 아직도 많은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물 좀 주소’의 주제인 ‘물’에 대해 한대수는 자유와 사랑, 희망을 상징하는 의미라고 이야기한다. 핵물리학자였던 아버지의 실종과 어머니의 재가 속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고, 청년이 되어 돌아온 한대수는 고국 땅에서 적응할 수 없었던 당시의 정치사회적 상황에 대한 바람의 의미를 여러 음악 속에서 담아냈다.
특히 ‘물 좀 주소’는 전주도 없이 바로 그 바람을 포효하듯이 쏟아내며 얼핏 소음처럼 들리지만, 더욱 간절한 목소리로 시대를 대변했다. 결국 한대수의 ‘물 좀 주소’는 김민기의 ‘아침이슬’과 함께 지친 민중과 대중을 ‘행복의 나라로’ 안내했다.
1976년 미국으로 다시 돌아갔던 한대수는 1997년 귀국과 함께 잠실 실내 체육관에서 열린 ‘유니텔 락 콘서트’ 무대에 섰다. 21년 만에 고국에서 펼쳐진 의미있는 시간이었던 이 때 한대수는 이미 지천명의 나이에 들어서고 있었다.
뒤이어 1975년에 발표된 한대수의 2집 [고무신]은 그의 기나긴 방랑생활을 알리는 장례음반이 되고 말았다. 철조망에 걸려있는 흰 고무신 한 짝은 1970년대 중반의 한국 사회의 정서를 상징하는 듯 의미심장하다. 이 음반은 재킷 앞면과 톱연주 사진으로 장식된 뒷면 사진만으로도 기존의 가요 LP와 차별점을 갖는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한대수 음악의 특징중 하나인 노랫말에 대사를 처음으로 집어넣은 2집 앨범은 실험적인 시도마저 돋보인다. 그러나 김민기와 신중현과 마찬가지로 한대수의 이 음반도 '체제전복적‘이라는 이유로 마스터테이프가 강제 회수되어 완전 파기되었다. 또한 2집을 이어서 1집 앨범도 판매 금지 조치가 뒤따랐고, 향후 한대수 음악의 맥이 끊기게 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