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눈에 담긴 이야기 하나
(눈사람/눈길)
이형국
어저께 새벽에 눈이 내렸다. 같잖은 눈발로 날리다 말았다. 지구가 많이 상했나 보다. 눈 본지 오래된 것 같다. 눈이 보고 싶다면, 눈 내리는 곳으로 가면 된다. 그러나 나는 천성이 게으르다 보니, 영상으로 보거나(본다.) 그것으로 마음에 차지 않으면 침대에 누워 옛적 함박눈이 산천을 하얗게 수 놓았던 그 날들을 생각한다.
겨울 방학이면, 고향으로 내려가 큰집에서 지냈다. 포항 근교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 마을이라 눈이 많이 왔다. 한 번은 눈이 너무 와서 무릎 밑까지 푹푹 묻혔다. 두어 발짝 떼었다가 얼른 되돌아 왔다. 세작인(소작인) 둘과 큰형이 눈을 치웠다. 눈을 치운다고 해 (그래)봤자 사람이 통행할 만큼 길을 내는데 지나지 않았다.
안채에서 중간 대문을 거처 사립문까지, 안채에서 사랑채와 별채 사이, 또 큰 부엌(과) 및 뒤란 장독대까지 오솔길을 내었다. 그리고 장독대 위의 눈은 다 쓸어내렸다. 나는 쓸데없이 그 길을 따라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며 놀았다. 마치 멍멍이같이 폴짝폴짝 뛰며(거나) 킬킬거리며.
사립문 맞은 편에는 지붕에 자그마한 종각이 세워져 있는(진) 예배당이 있었다. 구불구불한 좁은 골목 깊숙이 큰집이 있었기에 큰길까지 나가려면 열세 살 걸음으로는 한참이나 걸렸다. 아직도 교회는 상놈들이나 출입하는 곳, 또는(이라거나) 연애 당이라 하여 멸시하던 시대였다. 동네 남정네들이 나와 골목의 눈을 치웠다. 전도사라는 청년도 나와서 함께 힘을 합쳤다.
집 담장은 거의 돌담이거나 싸리나무 담장이어서(를 엮어 세웠다.) 눈을 그 담벼락에 옹벽처럼 붙여 쌓았다. (눈은 성긴 그 틈에 마치 강냉이 튀밥 튀듯 아니면 목화솜처럼 부풀어 붙었다.)
그 사이를 (골목길을) 걸을 때 몸이 약간 기우뚱하면 (눈 담에 스쳐) 닿았다. 큰길로 나가면 제법 어른, 아이(사람)들이 보인(였)다. 어른들이야 당연히 볼 일이 있어 조심조심 오고 가지만 아이들은 그게 아니다. 신이 나서 몇 명씩 우르르 (몰려) 쫓아다녔다. 눈을 뭉쳐 던지는 아이도 있고, (거나) 눈 치운 길 위를 미끄럼타는 아이도 있(었)다. ☜ 시제
또 몇몇 사람은 눈을 굴리고 있었다. 아마 눈사람(을) 만들려는 것 같았다. 나는 집으로 급히 돌아갔다. (뛰어갔다.) 앞마당이 넓으니 눈사람을 만들기에 좋았다. 큰형에게 졸라 작은형과 함께 눈사람을(두 개를) 만들었다. 눈사람 두 개를 만들었는데, 큰형이 (솔잎으로) 눈썹을 만들고 눈, 코, 입을 (숯으로 그린 뒤) 만들어 놓고는 하나에는 큰형 학교 모자를 씌우고,(씌웠다.) 또 하나에는 광목 수건을 목에 메었다.(더니) 그럴듯했다. 큰형은 그림을 참 잘 그렸다. 그래선지, 내 눈엔 (리는 큰형이) 멋져 보였다.
교사생활을 관두고 대구로 돌아와 섬유회사에 들어갔다. 1980년대 초였을 거다. 3월이었는데 큰 눈이 내렸다. 하필이면 그날 간부 회의가 압량면 소재의 공장에서 열렸다. 크게 염려되지 않을 정도의 눈이 내리고 있었다. 회의를 마친 후, 경산 모 식당에서 회식했다. 본사는 그 당시 반야월 송정리에 있었고, 얼마 전에 매입한 제4공장은 경산군 압량면에 있었다. 회식이 한창 무르익어갈 무렵 눈송이가 엄청 커졌다.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밥을 먹고 술을 마시던 손님들이 주섬주섬 (웅성대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우리는 “설마!” 하면서 거의 9시를(가) 넘어서야 일어났다. 택시를 잡으려니, 아예 운행 조차를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버스를 탔다. 버스 기사는 혼잣말로 끝까지 가겠냐며(가 내겠냐며) 투덜대었다. (궁시렁거렸다.)
경산에서 반야월을 거쳐 하양으로 가는 버스였다. 여직원 한 명도 그 버스를 탔다. 여직원의 집이 송정으로(,) 본사에서 임시로 파견한 직원이었다. 버스는 반야월-송정 경계에 있는 버스 차고에 서더니, 기사가 미안한 듯 (다다르자) “폭설 때문에 더-이상은 갈 수 없으니 미안합니다.”라고 말했다. (라며 서 버렸다.) (이런 낭패가 있나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버스를 내려 (장딴지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여직원과 함께 (걸으며 한 발자국씩) 집을 향해 발을 푹푹 빠뜨리면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나아갔다. 눈을 밟으니 장딴지에 닿았다. 여직원에게는 “집까지 데려다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면서 안심시켰다. 내 집도 (그 부근) 본사 사택에 살고 있었다. 그러니, (있으니) 날 경계하지는 않았으리라. 도로 양쪽의 가로수는 하얀 눈꽃으로 등을 밝혔고, 하늘은 하얀 눈이 반사되니 천지가 (도 눈부시게) 환했다. 군데군데 나처럼 나아가는 군상을 따라 우리 둘은 아무 말 없이 걸어갔다.(걸었다.)
나아가는 걸음의 자세가 반복되다 보니 조금씩 몸에 익어 걸음걸이가 수월해졌다. (지쳤는지,) 어느새 여직원의 팔이 내 팔에 감겨있었다. 눈발은 잦아들었다. 우리 둘은 앞사람만 바라보며 나아갔다. 여기저기 앞서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시야에서 사라졌다. 따뜻한 둥지에 다다랐나 보다. 저 멀리 사람들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점처럼 작은 움직임도 보였다. 저들은 어디까지 가는 걸까?
신라섬유를 지나 송정리 가까이 다다르니, 저 앞에 한 사람만 시야에 잡혔다. 다른 사람은 집에 당도했거나 내 시야를 넘어 사라진 것 같았다. 여직원을 대문 앞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서면서, 나는 “후유!” 하는(고) 안도의 숨을 터뜨렸다. 말을 하지 않아서이지 한밤중에 두 시간여의 먼 거리를 무사히 데려다주었다는 것과 “이제 집까지 (정도)야!” 하는 안도감은(이) 첩첩이 쌓여있을(쌓였던) 피로도 말끔하게 잊게끔 했다.
솜처럼 따스했던 느낌이었다. 3월의 눈이어서인가, 팔에서 팔로 전해졌던 (그녀의) 온기 때문이었던가? 비록 눈은 왔지만, 참으로 따뜻했던 밤이었다. (13.1매)
○ 글 분리
- 눈사람
- 눈길(김승옥의 무진기행이나 이청준의 눈길)
○ 쉼표 되도록 줄임
○ 의미화
무시래기(깃) 국
권자이
“봄바람에 맏사위 달아난다.”는 속담이 있다.
글쎄다. 봄바람에 왜 맏사위가 달아나는지는 모르겠다. 짐작컨(건)대 아마 봄이라고 군불을 안 넣으니(넣지 않으니) 방이 추워서일까? 봄바람이 가슴팍(앙가슴)을 파고들면 한겨울보다 더 춥게 느껴진다.(지긴 한다.)이럴 때면 겨우내 아껴두었던 무시래기를 삶는다. 마트나 시장엘 나가면 봄나물들이 지천이라 입맛을 돋우지만, 오싹하게 (한) 한기가 느껴지게 바람이 불면 시래기(깃) 국 보다 더 나은 찬이 없다.// 바삭 마른 시래기를 보서(부스)러지지 않게 걷어서 찬물에 한 시간 정도 담가둔다. 불었다 싶으면 찬물에서부터 물을 넉넉히 넣고 한 시간-이상 끓인다. 물컹하게 삶아지면 찬물에 맑은 물이 될 때까지 (찬물에) 헹군다. 껍질을 까고 다시 헹궈서(행군 뒤) 찐(진)하게 뺀 멸치 다시 물을 준비해둔 것에(붓고) 여러 가지 양념을 해서(넣고) 끓이면 된다. 이렇게 시래기(깃) 국을 끓이고 있으면 육촌 오빠-생각이 난다.
지금은 일흔 중반이 되신 오빠가 반세기-전 군복을 입고 시래기(깃) 국을 같이 먹었던 그날이 떠오른다. 중3-겨울 방학이었다. 새벽 다섯 시쯤 잠을 자고 있는데 대문을 두드리며 부르는 소리에 식구가 모두 깨서 일어났다. 온천지가 하얗게 눈으로 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않았다.) 엄마가 마당에 내려서니 눈이 무릎-위에 덮였다. 오빠는 말년 휴가를 오는 길이었다. 우리 집 다음 기차역에 내리면 오빠네 집을 갈 수 있지만, 역전에서(도) 도보로 산 몇 개를 (걸어) 넘어야 하는 산골이다. 눈이 오지 않아도 한 겨울 새벽에 (기차를) 내려 그 길을 가기엔 불가능하다.(예삿일이 아니다.)// 밖에서 대충 모자 위며 옷에 쌓인 눈을 털고 방으로 들어왔는데 온몸이 얼어있었다. 한 겨울 그 시간이면 아직도 해가 뜨기엔 두 세 시간이 남았다. (전이다.) 엄마는 바로 부엌으로 가서 불을 지피고 가지 대궁을(를) 삶았다. 얼어서 벌겋게 부운 손과 발을 담그게 했다. 무쇠 솥엔 손가락만한 굵직한 멸치를 넣고 들깨가루와 된장, 고춧가루를 풀어 뜨끈하게 시래기 국을 끓였다.↳ 기차역에서 우리 집까지의 거리는 어른 걸음으로 십분 거리다. 그러나 눈이 워낙 많이 와서 훤하긴 해도 밤길이라 어디가 길인지도 매번 다니는 곳이 아니라 분간이 안가더란다.(가지 않더란다.) 그러니 새벽 네 시가 안 되어서 (경에) 내렸는데 다섯 시가 자(지)나서(야) 도착했다.(한 것이다.) //오빠는 부대가 있던 인제에서 하루 전 아침에 출발해서 서울까지 와서 청량리 역에서 저녁 여섯-시에 출발하는 중앙선 비둘기호를 탔던 것이다. 만 하루를 온 셈이다. 돈이 없어 밥도 못 사-먹고 종일 가락국수 한 그릇으로 허기를 달랬다고 했다. 그러니 얼마나 춥고 허기가 졌을까. 지금 젊은이들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요즘 세월이야 그 시간이면 세계 어느 곳 이라도 갈 수 있고 카드로 무엇이던(든) 배-불리 먹을 수 있으니까.
↳엄마는 바로 부엌으로 가서 불을 지피고 가지 대궁을(를) 삶았다. 얼어서 벌겋게 부운 손과 발을 담그게 했다. 무쇠 솥엔 손가락만한 굵직한 멸치를 넣고 들깨가루와 된장, 고춧가루를 풀어 뜨끈하게 시래기 국을 끓였다.
오빠는 눈물을 글썽이며 시래기(깃) 국을 얼마나 맛나게 먹던지, 어린 마음에 나는 그 모습을 보니 오빠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얼굴이 새까맣게 타고 몸은 말라 군복이 헐렁한(데다) 조카가 온 몸이 얼어서 (온 조카가) 왔으니 안쓰러워 얼굴을 자꾸 쓰다듬었다. 겨울 내내 (오빠는 겨우내) 눈 치우는 작업을 했단다.(한 탓이니 걱정하지 마시라 되려 위로하기 바빴다.)
그렇게 추위와 배고픔에 떨고 온 조카에게 엄마는 갑자기 해 줄 것은 없고 시골에서 제일 손쉬운 시래기(깃) 국을 끓였 던 것이다.
오빠는 그 후로 우리 집에라도 가끔씩 오게 되면 (간간이 들릴 때면) 그때-엄마가 끓여 주던 시래기(깃) 국은 그 후는 그때 맛을 느낄 수 없었다고 했다. (맛을 회상하곤 했다.) 뿐만 아니라 어떤 국도 종숙모가 해주던 시래기(깃) 국 만큼 맛나지 않았단다. 그러면서 엄마-가시고 언제 한번 내 집에 오실 일이 있었다. 옥상 올라가는 (계단) 난간에 걸어놓아 (걸린) 새파랗게 말린(마른) 시래기를 보고는
“ 야 저놈으로 시락국 끓여 먹으면 아무리 추워도 겨울을 거뜬히 나겠다.”
아! 그렇지(,) 시래기(깃) 국을 먹었던 기억을 노래처럼 하던 오빠가 아니던가.
얼른 몇 가닥을 걷어서 부서져 버릴까봐 (부서지지 않게) 신문에 사서 (고이 싸서) 큰 비닐봉지에 담아 주었더니 한해 거울 잘 먹었다고 따로 전화를 했다.(가 왔다.) 그 후로 겨울만 되면 매번 말린 (물에 불린) 시래기를 물에 불려서 부서지지 않게 지난겨울까지 보냈던 것이다.
육류나 생선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토종 먹 거리를 즐겨 먹는다. 그러니 혼자 살아도 외식 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자니 나에게는 (시레기는) 소중한 저장용 먹 거리다. 지금 세월이야 맛난 음식에(다) 따뜻한 집들이라 사위가 도망갈 일은 없겠다. 난(내겐) 도망갈 사위도 없지만 만약 집이 따뜻하더라도 이런 무시래기 국을 끓여준다면 요즘 사위(녀석)들은 도망가겠지? 그러나 곤드레 밥보다 더 (요) 맛난 무시래기 밥에 달래양념장을 곁들이면 가던 놈도 돌아올 것이다.
○ 끝맺음 좋다
강변풍경
이연희
추워서 며칠 집에만 있었더니 온 몸이 쑤셨다. 무엇보다 우울해서 완전무장을 하고 나섰다. 피부에 와 닿는 기온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추위다. 강변을 걷던 그 많던 사람이 하나도 안 보인다. (보이지 않는다.) 넓은(넓고도) 하얀 들판에 사람과 동물의 발자국만 뜨문뜨문 있다. 코요테 출몰지역 표지를 보니 덜컥 겁이 난다. 사람이 없는데 낮이지만 코요테가 나오면 어쩌지. 눈길이라 내가 (재)빨리 도망도 못 가고 도와줄 사람도 없는데 괜히 나왔다 싶은 마음이 든다.
오후 한시 현재 (한낮인데도) 체감온도가 영하 35도 라는데(라니) 춥기는 정말 춥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매서운 추위다. 방한모자와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무장을 해도 삐져나온(노출된) 볼살이 따갑고 아프다. 장갑 낀 손도 손가락이 아프다.
(↖)추워서 며칠 집에만 있었더니 온 몸이 쑤셨다. 무엇보다 우울해서 완전무장을 하고 나섰다. 피부에 와 닿는 기온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추위다. 보우강을 보니 하얀 수증기 같은 것이 솔솔 피어오른다. 마치 노천온천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기온이 얼마나 낮으면 강물에서 김이 날까?) 수증기를 보니 몸을 담그고 언 몸을 푹 녹이고 싶다. 기온이 얼마나 낮으면 강물에서 김이 날까?
얼어붙어서 검푸른 강물과 옅은 회색 얼음(,)과 (그리고) 하얀 눈과 피어오르는 김이 장관이다. 강 한편에는 청둥오리 떼가 켁켁거리고 노놀고 있다. //“아이고 야들아 너거는 안 춥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고 햇볕은 따스한데 공기는 너무 차다. 안경과 마스크는 사이 좋은 친구는(가) 아니다. 안경에 입김이 서려 눈앞이 안 보인다. 답답해서 벗으니 습기 찬 마스크가 얼어서 금세 뻣뻣해진다. 얼굴이 시려 다시 쓴다. 언 마스크가 볼에 닿는 차가운 감촉이 내 입김이지만 기분이 참 고약하다. 선글라스를 좀 닦고(아) 말리려고 벗으니 습기가 순간적으로 바로 얼음이 된다. 선글라스가 얼다니, 무심코 손수건으로 렌즈를 문질렀다.(더니) 안경알이 쑥 빠진다. 렌즈 가장자리가 비스킷처럼 바삭 부서진다. 다행히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곳이다. 추위와 마스크가 만든 합작품이다. 코로나 시국이 아니면 겪어볼 수 없는 일이었다. 캘거리의 추위는 유명하다더니 너 정말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내가 추위 네 까짓것한테 질쏘냐. 40분 정도 가면 가끔 커피 한잔을 즐기던 '노브나인'이라는 카페가 있다. 커피 맛은 별로지만 언 몸은 녹이겠지. 그곳을 목표로 천천히 걷는다. 미끄러질까 다리에 힘이 들어가니 온 몸이 굳는다. 반대편에서 오던 제설차의 흑인 기사가 찡긋하며 손 흔들어 준다. 공원길도 눈을 치워주는데 나는 오히려 그 길이 미끄러워 눈 위로 걸었다. (그러나 너무 떨려 중도에서 포기했다.)
너무 떨려 중도에서 포기했다. 강변의 주택에서 노부부가 중무장을 하고 나왔다.(나오더니) 5분도 못 걷고 (멋쩍게) 웃으며 집으로(도로) 들어간다. 이곳에 손잡고 다니는 노부부가 많아서 (를 보니) 두고 온 남편 생각이 가끔 났었다.(난다.) 오늘은 페이스 톡을 해봐야겠다.
딸에게 (“)이렇게 추워서 안 얼어 죽고 어예 살아있노(.”) 했더니 조금 있으면 '치눅'이 온단다.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로키에서 불어오는 따스한 바람이란다. 우리가 아는 ‘높새바람’ 같은 거라고 하네. 그 바람이 불어오면 기온이 올라가서 강한 햇빛과 함께 봄날 같다고 한다. (그때면) 추위와 따스함이 반복이 되어 사는데 지장 없단다. 눈만 많이 안 쌓이면 괜찮단다. 기상이변으로 처음 왔을 때 보다 눈이 덜 오고 덜 춥다고 한다.
기상이변으로 올해 캐나다의 여름이 40도 가까이 올랐다니 (다 한다.) 지구 곳곳이 (환경의 훼손으로) 몸살을 앓고 있구나.(있다.) 우리가 치료방법은 이미 알고는 있다. (있으나) 편리함에 인이 배겨서 실천이 어렵다.(어려울 뿐이다.) 이곳은 (캐나다는) 우리나라 보다는 더 자연보호에 힘쓰는 듯하다. 자연을 해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도 보인다. 앞으로는 지구를 살살 달래 가며 살도록 애써야 되는데 실천이 어렵다. '나 하나쯤은 괜찮겠지'에서 '나부터라도 실천해보자'로 의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다.
○ 끝맺음 고민
안단테 칸타빌레
엄영희
“내 장례식 때 비발디 ‘사계’ 틀어주면 좋겠다.”
“갑자기 웬 장례식은?, 그리고 비발디 ‘사계’는 왜?”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게 인간 아닌가?, 인생도 사계처럼 변화무상하잖아. 그리고 박인수·이동원의 ‘향수’도 틀어주고.”
‘향수’는 평소에도 남편이 좋아하는 노래 중 하나이다.
코로나19 오미크론 확산으로 갇힌 생활을 하고 있는 요즘, 한동안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시청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동계올림픽의 꽃이라 불리는 피겨스케이팅에는 우리나라 여자 선수가 두 명(이) 참석하는 관계로 더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젊고 싱싱한 몸과 개성 있고 우아한 연기를 보는 것도 즐겁지만 거기에 어울리는 배경음악을 듣는 것도 즐거움이다.
일본의 어느 선수였던가? 비발디의 ‘사계’를 막스 리히터가 재작곡한 음악에 맞추어 한창 피겨 스케이팅을 하고 있을 때 장례식 음악이야기가 나왔다. 툭 내뱉듯이 얘기를 했지만 평소 생각이 은연중에 나타난 것이라 여겨져 마음이 짠하다.
흐르는 세월 탓인지 꿈틀거리던 어깨근육 만큼이나(무엇이?) 불룩거리고, 때로는 까탈스럽던 남편의 성정이 많이 숙졌다. 몸의 이곳저곳이 시골집 흙담처럼 무너져가는 나이, 몇 번의 병원생활과 생사를 오가는 수술 탓일까? 이불을 휘감은 채 등을 보이고 누워있는 (남편의) 모습이 예전 같지 않다. 새벽 4시면 일어나 서재에서 시간을 보내곤 하던 사람이 해가 집안 깊숙이 들어오는 시간에도 이불과 한 몸이 되어 있을 때도 있다. 칸트처럼 시간을 정해 일상을 지켜왔던 남편인데 상상도 하지 못했던 모습이다.
며칠 전에는 친구 남편의 부고를 받았다. 퇴직 후 귀촌해 과수원 가꾸는 재미에 푹 빠져 지내는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했던 소식이다. 남편을 앞세운 친구들이 하나 둘 늘어간다. 친구 본인이 하늘의 별이 된 경우도 있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이별과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의미)이다. 일본의 소노 아야코는 노년에 경계해야 할 것들을 계로록(戒老錄)이라는 책에 기록하였다. 평소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재미있는 인생을 보내었으므로, 나는 언제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늘 심리적 결재를 해 둔다.'는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나 자신은 물론이고 남편과도 이별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한다는 소리로 들린다.
어떻게 나이 들어야 잘 사는 것인가? 부고장, 그 주인공이 나와 내 남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한 번 더 새기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감수성이 가장 예민했던 시절, 그때 나는 수술실 책임자로 있었다. 수술 중에도, 수술 후 회복 중에도 죽어가던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본 관계로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희미했다. 눈만 감으면 죽을 수 있는 연약한 인간, 공급하던 산소가 끊기자 5분이 안 되어 온 몸이 청색증으로 변하여 호흡이 끊어지던 젊은 남자 환자, 흉곽을 열어둔 채 아무리 강심제를 주입해도 흐느적거리다 멎어버리는 인간의 심장은 삶의 열정마저 멎게 했다. 난 생각했다. 어차피 죽을 인생이라면 40세 까지만 살다 죽을 것이라고. 나이 들어 산다는 것은 추한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 후의 삶을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할 필요도 없었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자 죽음은 감수성이 아니라 잊어야 할 것으로 다가왔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 어디 그것을 생각한단 말인가? 죽음은 멀리 있을수록, 잊고 살수록 편한 것이었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길인 죽음, 어느 철학자는 ‘죽음을 가까이 하는 것은 자유를 실습하는 것이다.’고 했다. 피해 갈 수 없는 죽음을 자주 반추해 본다는 것은 자유를 찾는 길이고, 삶이 가벼워지는 길이다.
부부라는 연을 맺고 아웅다웅하며 살고 있지만, 서로에게 등을 기댈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오늘이 마지막 삶일 수도 있다는 것, 지금 이 시간이 어쩌면 마지막 순간이 될 지도 모른다는 것. 순간순간 삶 속에서 이것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를 얻는 것이리라. 누군가 한 사람이 먼저 떠나더라도 혼자 당당하게 살아갈 힘을 키워 놓는 것, 그 무엇 보다 오늘 하루를 더 치열하게 잘 살아내는 것이 잘 죽는 길이 아니겠는가.
이왕 맞을 거라면 정면 돌파, 웨딩 플래너가 결혼준비를 도우 듯 장례식 플래너로 음악도 미리 준비하고, 초대할 사람들도 챙기고, 스스로 리허설 해 놓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매사에 선택이 분명한 남편은 곡도 준비했는데 나는 무슨 곡을 택해야하나? 이왕이면 첼로곡이면 좋겠는데 오펜바흐의 ‘자클린의 눈물’은 너무 슬프고, 차이코프스키의 ‘안단테 칸타빌레 현악 4중주’가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찬기가 남아있는 3월의 바람이 창문을 흔드는 저녁, 이어폰을 꽂고 거리를 거닐면서 내 장례식 곡도 한 번 고민해 볼 작정이다.(2022년 3월/ 12.2매)
※ 안단테 칸타빌레 : 음악용어로 ‘천천히 노래 부르듯이’의 뜻이다.
○ 글이 짜임새 있고 맛깔스럽다.
봄눈이라도 내리면
이광조
2월 하순인데도 바람이 차다. 겨울 내내 (겨우내) 눈 한 떨기 접하지 못한 마른 바람이다. 날씨 걱정을 하시던 아버지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만다.
“봄에 하면 되는 걸 씰데없이 서둘디만, 산소에 심은 떼 다 죽을다. 온 삼동 비 한 줄기 안 왔으이, 뭔들 남아 나겠노. 헛돈 썼다.”
“허허 참, 누가 이크러 가물 줄 알았니껴.”
꾸지람을 막아 나서는 작은 아버지 말씀이 고맙긴 하지만, 민망한 건 어쩔 수가 없다. 일이 이렇게 꼬일 걸 염두에 두지 못했던 내 잘못이 크다.
12월에 접어들면서 묘 터 정지 작업을 했다. 포클레인과 인부 두 사람이 동원되어 터를 고르고 테두리를 만든 다음 잔디를 입혔다. 아버지는 기다렸다가 봄에 하자고 하셨는데, 내가 서둘러서 해치웠다. 작업을 서두른 것은 치매증세가 부쩍 심해진 어머니 건강이 불안했기 때문이다. 90세가 넘은 분이니 얼마나 더 비(버)틸 지 조마조마한 마음에 뒷일이라도 미리 해놓아서 부담을 덜고 싶었다.
산소 자리를 두고 몇 년 전부터 아버지와 이야기를 해오던 중이었다. 당연히 선영에 가실 줄 알았던 아버지가 여동생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영천에 있는 호국원(국립영천호국원)을 들먹거리자 망설이셨다. 썩 내키는 것은 아니지만, 뒷날 자식들이 산소 돌보는 수고를 덜 수 있다는 측면에서 호국원도 마음에 두는 듯 했다. 두 곳을 두고 저울질 하시는 걸 짐작했기 때문에, 아버지 뜻을 따를 테니 편하게 결정하시라는 말을 덧붙인 적도 있다.
아버지 뜻이 정해지기를 기다리다가 작은아버님(지) 의중을 조심스럽게 여쭈었다.
“집 사람이 먼저 가 있으니 그리 가야 안 되겠나. 자리 잡고 있는 사람 이장할 일은 아니지.”
불당묘역으로 가겠다고 하실 줄 알았던 분이, 먼저 간 부인을 의식하여 고향 마을 선영으로 가시겠다고 하는 순간 생각이 명쾌해졌다. 아버지 마음도 여전히 선영을 맴돌고 있으니,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사촌 동생하고 의논을 한 다음 전문적으로 산소 일을 하는 지인(산역꾼)에게 작업을 의뢰했다. 윗대 어른들 산소 아래에 남아있던 밭을 다듬어서 널찍한(이) 가족 묘 터로 삼을 작정이었다. 이틀 애를 쓴 끝에 어른들을 비롯하여(과) 우리 형제 모두 자리 잡아도 남을 너른 공간이 마련됐다.
완성된 묘 터 앞에서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을 보면서 모처럼 아들, 조카 노릇 좀 한 것 같아서 흐뭇했다. 두 형제분이 나란히 자리를 잡게 된 것이 무엇보다도 의미가 있다. 우애가 각별한 두 분이 이다음 생(生)도 같이 보내실 것 같아서 더할 나위 없다.
(아버지는) 맏이가 일곱 살, 동생은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아버지의 초등학교 때 꿈이 하루 빨리 졸업해서 농사짓는 것이었다고 하니 그 형편이 오죽했겠는가. 중학교를 못 가고 농부가 된 게 한이 되었던 아버지는 어떻게 하더라도 동생은 공부시켜야 되겠다고 결심한다. (작은아버지는) 새로 생긴 초등학교 분교에서 1년간 사환 노릇을 해서 모은 돈으로 작은아버지가 중학교 진학은 했는데, 형편이 안 돼서 (할머니가) 고등학교는 못 보낸다고 할머니가 버티셨다. 고민하던 아버지는 입대하는 자신을 배웅하러 온 어머니(할머니) 손을 잡고 호소했다고 한다.
“어메요, 나는 인제 전쟁터로 가면 언제 죽을지 모르니더. 그르이 어야든지 동생을 공부시켜서 집안의 기둥으로 키우소.”라고.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는 큰아들 말에 마음을 고쳐먹은 할머니가 송아지를 팔아서 입학금을 마련해 준 덕분에 작은 아버지는 고등학교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고 한다.
철공소 직공으로 일하면서 야간 고등학교를 졸업한 (심지 굳은) 동생이(었다.) (그러한 동생이)모아 둔 돈 없이 (의욕만 앞서) 한약방을 개업하려고 하자 형은 농사에 없어서는 안 될 소를 팔아서 보탰다. 한약사로 이름을 떨치며 승승장구 하던 동생이 상처를 하자, 그 외로운 처지를 생각하며 밤마다 눈물을 흘리셨다고 하는 걸 보면, 아버지의 동생에 대한 연민은 끝이 없는 것 같다.
형만 한 동생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형편이 넉넉잖아 아버지가 맏아들을 대학에 못 가게 하자, 작은아버지는 학비를 대어 돌보면서 조카를 약사로 키워냈다. 홀어머니 모시면서 고생한 형과 형수를 위해서 이미 20여 년 전에 낡은 고향집을 허물고 반듯한 양옥을 지어드리기도 한다. (했다.) 90세가 넘은 형과 형수를 위해서 지금도 꾸준히 녹용이 들어간 보약을 지어 드리지만, 물질이 다는 아니다. 30여 년 전 부인병을 지닌 형수가 자식들에게 알리는 걸 부끄러워하자 조카 질녀들 몰래 입원시켜 수술을 받게 하고 입원비까지 다 치른 걸 보면, (치뤘다.) 어떤 자식이 그토록 마음을 쏟아 부모를 섬길까 싶다.
유년에 아버지를 여의고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던 가정(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운 형제가 이제(는)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다. 형을 아버지처럼 모셨던 동생과, 동생을 자식처럼 아꼈던 형이, 옛날처럼 한 집에서 살겠다고 터를 마련하고는 마주보며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인연을 위해서는 하늘이 상을 좀 내려도 좋을 것 같다.(내린들 어떠랴.) 말라가는 잔디 걱정을 접을 수 있게 봄눈이라도 흠뻑 내리면 더 없는 축복일 테니까.(좋겠다.)
○ 아름다운 이야기
광화문의 추억
이지연
아들이 서울특별시민으로 입성했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부동산 사이트에서 미팅을 잡아 올라가더니 번갯불에 콩 볶듯 당일로 집을 구했다고 전했다. 취업 전 한 달-가량 일하기?로 한 출판사에서 출근 일자가 빠를수록 좋다는 전갈을 받은 터라 딴에는 몹시도 서두른 것이다. 취업처와 가까우면서도 집값이 저렴한 봉천동에 원룸을 구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사할 때 따라나서고 싶었지만(,) 인천으로 가는 선배가 짐까지 실어 준다며 (어미를) 안심시켰다. 몇 년 전부터 가겠다는 걸 건강상의 이유로 (를 빌미 삼아) 가까이 두려고(두고자) 붙잡았지만 결국 떠나고야 말았다.
아들이 떠난 날부터 마음은 수시로 서울로 내달렸다. 스마트폰을 열어 서울 지도를 펼쳤다. 거미줄처럼 얽힌 길들에 눈이 어지럽다. 서울역에서 봉천동을 찾기 위해 훑는데 ‘광화문’이 눈에 들어왔다.// 아, 2019년 9월-25일. 그곳에서 난생처음 겪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선생님들, 우리도 이번 집회에 참석합시다!”
“그래요. 협조를 못 해줘서 집행부에 미안했는데 이번에는 동참해요.”
“올라간 김에 첫날 천막농성도 우리가 합시다!”
(방문지도사) 선생님들의 동의를 얻어 첫날 천막농성 자리에 ‘대구 동구’ 이름을 올렸다.
전국에 216개소의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있다. 센터에서는 여러 사업을 하는데 그 당시 대부분의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중점 사업은 여성가족부로부터 위탁받은 ‘방문교육사업’이었다. 방문지도사 선생님이 다문화 가정에(을) 방문하여 ‘한국어, 부모교육, 자녀교육’서비스를 지원하는 사업인 것이다.
처음 방문 사업이 생기고 10여 년이 넘는 동안 한 번도 방문지도사의 임금 인상이나 처우개선이 없었다. 의식 있는 선생님들이 전국에 1,700명이 넘는 방문지도사 선생님들을(를) 온라인 공간으로 모으는 작업을 하였다. 최초로 노조에 가입한 당진센터 선생님들이 센터와 단체협약을 통해 처우 개선비를 받게 된 후에는 다른 센터에서도 노조 가입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온라인 모임에 가입하는 회원이 많아지면서 앞장서서 일 할 임원을 선출하였다. 그때부터 좀 더 활발히 소통을 하게 되었고 개선점을 봇물처럼 쏟아내게 되었다. 대표 선생님의 코치를 받아 본격적으로 여가부(여성가족부)에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민원을 넣기도 했다.
나와 우리 (대구)센터 선생님들은 앞장선 선생님(분)들께 고마움을 느끼며 그들의 말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우리 센터 선생님들은 노조라는 거대한 집단이 당최 낯설고 무서워 감히 가입할 용기를 갖지 (내지) 못했다. 그러는 (밍그적대는 그) 사이에 권리를 찾을 힘을 얻기 위해 노조에 가입하는 센터가 늘어나고 있었다. 우리 센터 선생님들은 1년 동안 방관만 했다.
노동조합에 가입하여 센터 측과 단체협약을 하여 정해진 임금 외에 교통비를 추가로 받거나 처우개선비를 받는 센터가 늘어났다. 노조의 힘이 느껴졌다. 한 달에 한 번씩 센터 회의 때 선생님들과 만나면 노동조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의도적으로 긍정적인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자신은 보수라서 조합에 가입할 수 없다는 K선생님을 제외하고 우리 센터 선생님(분)들도 노동조합에 가입하였다. 낯선 곳이었지만 함께했기에 두렵지만(두려움을 떨치고)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나서기 싫어하는 대구 사람들의 특성 때문에 할 수 없이 나는 임원진들과(의) 긴밀한 대화를 위해 대구 대표가 되었다. 여러 센터 선생님들과 힘을 모아 국회의원들에게 방문지도사의 실상을 전하고 여성가족부에 민원 넣기를 반복하여 약간의 성과를 거두었다. 매 수업 후 일지 쓰기가 대폭 간소화되었고, 역량평가 시험이 없어졌고,(으며) 연차라는 것도 생기고, 연 2회 보너스도 조금이나마 받게 된 상태였다. (되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1년의 노력으로 이룬 성과가 적지 않기에 그동안 우리가 너무 바보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우는 아이에게 젖을 준다는 것을 실감했다.
천막농성 첫째 날이었다.
그날은 낮에 집회를 하고 집회 해산과 동시에 2년의 정년 유예를 주장하는 한 달 예정의 천막농성 첫째 날이었다. 온라인으로만 소통하던 서울, 당진, 울산, 부산, 대전 등 전국의 방문지도사 선생님들을 처음으로 대면한 날이었다. 방문 사업이 10개월의 재정-일자리 사업에서 1년 사업으로 전환되며 느닷없이 정년이 생긴 것이다. 방문지도사 선생님 중에는 나이가 많은 선생님(분)이 많이 있다. 이대로 정년이 확정된다면 내년 재계약에서 탈락될 선생님(분)이 300명에 다다르는 상황이었다. 이에 상대적으로 젊은 선생님들도 당장 정년에 걸리는 선생님(분)들을 외면할 수는 없기에 정년 2년 유예를 주장하며 집회와 천막농성을 결정한 것이었다.
집회에서는 세 분 선생님의 삭발식이 있었다. 긴 머리칼이 바닥에 맥없이 떨어질 때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선생님이기 전에 가정에서 여러 가지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그분들이 가족들과 얼마나 많은 의견 충돌이 있었을까. 대의를 위한 선생님들의 숭고한 뜻에 속울음을 삼키지 않은 선생님(분)들이 없었을 것이다. 그날 우리는 청와대까지 가두행진도 하였다.
광화문 서울 청사 앞에서 텐트를 치고 노숙을 한 일이 벌써 2년 반이나 흘렀다. 혼자라면 무섭고 두려웠을 그 밤이 뜻을 함께같이하는 선생님들과 함께 하였기에 투사가 된 듯했다. 밤새 텐트 옆을 달리는 차와 굉음을 내며 내달리는 오토바이, 헤드라이트 불빛, 낮에 열 올리던 행사장을 철거하는 소리로(소음 때문에)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했다. 게다가 선잠이라도 들라치면 왱왱대는 모기들이 다리를 물어-뜯던 그날 그 밤. (그날 밤을 어찌 잊으랴.)
모두가 만족한 상황이 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이 아닌가 한다.) 방문지도사 선생님들이 부당한 처우를 개선해 줄 것을 요구하여 분명 더 나아졌고,(다.) 집회와 천막농성을 통해 2년의 정년 유예도 인정을 받았지만 (다.) 오히려 (하지만) 정년이 생긴 것에 불만을 토로하는 목소리가 많아 마음이 아픈 추억이기도 하다. 모두가 만족한 상황이 되기는 (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이 아닌가 한다.)
주말에는 (가끔) 아이가 사는 서울에 방문했다. (간다.) 여전히 광화문 앞 광장과 청사 앞, 청와대 입구에는 저마다의 사연을 이야기(호소)하는 사람들이 있을 (여전할) 것이다.
(그 소원들이 퍼뜩 이뤄져 따뜻한 가정으로 돌아가시길 진심으로 응원한다.)
용감한 김선생
배정행
남자고등학교로 첫 발령이 났다. 꽃다운 청춘 24세의 나이에 아저씨 같은 느낌이 나는 덩치 큰 남학생들을 가르치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좀 논다 하는 아이들은 대놓고 나를 무시했다. 수업 시간에 아예 엎드려서 자는 아이도 있었다. 어떤 때는 일어나라고 야단을 쳐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옆에 앉은 아이들은 교권이 땅에 떨어지는 현장을 보며 비웃기도 하고 혀를 차기도 했다.
"쟤 건들지 마세요. 어쩌면 약 먹었을지도 몰라요. 흐흐...(….)"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여기 저기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라 엎드려 있는 그 아이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일어나라고 임마! "
그러자 그 아이가 발작을 일으킨 듯이 벌떡 일어나더니 눈에 뵈는 게 없는지 다짜고짜로 나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뵈는 게 없는지) 눈이 벌겋게 충혈돼 있었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피하지도 못하고 얼굴을 한-대 얻어 맞은 나는 아픈 것 보다 창피함이 앞서 무작정 교실을 빠져 나왔다.
벌건 얼굴을 감싸쥐고 교무실로 들어서니 수업 없는 교사들 몇몇이 앉아 있다가 깜짝 놀라 내게로 몰려들었다.
"무슨 일이에요 수업도 아직 안 끝났는데? 얼굴은 왜 그래요? "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같은 과목 김선생이 금방 눈치 채고 재빨리 교실로 올라 갔다. 그러더니 잠시 후 그 애(아이)를 끌고 내려왔다. 아무리 덩치가 크고 노는 학생(아)이라도 남선생을 상대로 어떻게 하진 못했는지 김선생 앞에선 고양이 앞에 쥐처럼 온순했다. 그리고 김선생의 주선으로 사과도 받아냈다. 후일 그 아이는 교사를 폭행한 죄로 정학 처분을 받았고 다른 학교로 전학 가는 걸로 그 일은 마무리가 되었다. 몸을 사리지 않고 그 일을 처리해 준 김선생이 무척 고마웠다.
그 일을 제외하면 그럭저럭 내 초년의 교사 생활은 평탄한 편이었다. 사춘기에 접어 들어 여 교사를 향해 노골적인 장난을 일삼는 중학생 보단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의외의 복병이 눈 앞에 나타났으니 그는 다름아닌 교감 선생이었다. 그것도 업무 때문이 아니라 엉큼한 손 버릇 때문이었다. 그 당시 그는 (교감은) 50을 훌쩍 넘긴 나이였는데 딸벌(뻘) 되는 여교사를 상대로 손버릇이 좋지 않았다. 그것도 금방 눈치챌 정도로 수위가 높은 정도가 (만큼의 높은 수위가) 아니라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저의가 의심되는 정도라고 해야 하나.
악수할 때 조금 더 오래 손을 잡는다던지 무슨 이야기하면서 슬며시 어깨에 손을 얹어 본다던지 하는 행동이었는데(다. 하지만) 교사 초년생인 내가 감히 호랑이 같은 교감선생에게 항의를 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었다. 미투가 시작되면서 제일 먼저 나는 그 교감이 생각 났다. 그가 몇해 전에 유명을 달리 했다는 소식을 들어서 달리 방법은 없었지만 나처럼 말못할 고민을 안고 직장 생활을 한 사람이 얼마나 많았을까를 생각하면 한숨만 나올 뿐이다.☞
회식 자리에서도 불편한 일이 가끔 있었다. 하필 그날도 교감 옆 자리에 앉게 되었다. 몇 번(차례) 술잔이 오가고 나서(나자) 교감이 나에게 술을 따라주며 마시라고 권했다. 지금은 (간염이나) 코로나의 영향으로 술잔이 돌지(을 돌리지) 않지만 그때만 해도 자기가 마신 술잔에 술을 부어 권하는 일이 많았다. 동료 사이의 친분이나 친구 사이의 친근감을 과시하는 의미로 그런 술 문화가 만연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남교사가 마신 술잔에 술을 따라서 여교사에게 마시라고 하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 나는 잔을 받지 않고 버티고 있었고 교감은 손 부끄럽게 왜 안 받느냐며 물러서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내 처지가 딱해 보였는지 그 김선생이 선뜻 흑기사를 자처하며 나섰다. (어떤 행동?) 덕분에 나는 그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미혼이었던 흑기사 김선생은 그날부터 내 마음 속에서 백마 탄 기사가 되기(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는 내가 곤경에 처할 때마다 어디선가 어김없이 나타났다. 그렇지만 감사의 마음을 전할 겸 따로 만나 차라도 한잔 하고 싶었으나 내가 먼저 데이트 신청을 할 용기는 없었다. 그렇게 애를 태우며 시간은(이) 흘러갔지만 둘만의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다.
여름방학식을 하고 대구로 가던 날이었다. 교사들 대부분이 학교 주변에서 자취를 했기 때문에 그날은 모두 방학식 후 (함께) 대구행 기차를 같이 타게 되었다. 기차에 올라 자리를 잡고 앉으니 교감이 얼른 내 옆자리로 와 앉는 게 아닌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불쾌한 감정을 숨기고 잔득 웅크리고 앉아 있는데 한 칸 건너 편에 김선생의 얼굴이 보였다. 눈이 마주쳤지만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나 자신이 초라하고 한심해 보였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교감은(,) 거리를 최대한 벌리고 통로 쪽으로 바짝 붙어 앉아 있는 나에게 슬슬 말을 걸기 시작했다. 말하면서 내 팔을 툭툭 치더니 슬금슬금 자리까지 좁혀오는 것이었다. 참지 못하고 일어서려는데 순간 사과 한 알이 날아왔다. 그리고 정확하게 (와) 교감의 팔을 맞혔다. 김선생이었다. (던진 것이었다.) 그는 잽싸게 자리에 다시 앉아 모르는 척 창문 밖을 보고 있었다. 덕분에 또 지옥 같은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교감은 당황한 빛이 역력했지만 앞쪽을 흘끔 보고는 자리(세)를 고쳐 앉았다. 엉큼한 속내를 들켜 (뜨끔한 터라) 누가 그랬는지 짐작만 했지(하는 듯) 확인하고 (자시고) 할 입장이 못 되었으니 조용히 앉아 있기만 했다.
여름 방학은 길기만 했다. 김선생에게서는 내가 기대했던 연락이 여전히 오지 않았다. 그렇게 늘 지켜보고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분명히 이성으로서의 호감을 느꼈기에 가능한 일(때문)이 아니었을까. 심증만 있지 확신이 들지 않아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방학이 끝나고 2학기 수업이 시작되었다. 김선생과 나 사이엔 공적인 대화만 오갔을 뿐 특별한 일도(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듯한 소문을 들었다. 김선생이 가을에 결혼한다는 것이었다. 결혼할 사람이 있는지 물어본 적도 없었고 그 사실을 나에게 알려 준 사람도 없었다. 갑자기 그 쪽에서 (신부 쪽에서) 서둘러 결혼하게 됐다는 이야기가 들렸는데(,) 내가 보기에 그는 그다지 결혼을 달가워 하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곤란한 처지에 빠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구원자가 돼 주었던 (김선생이었다.) 그의 (그러한) 마음을 나에 대한 관심이라고 생각했었는데(던)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그것은 의협심 강한 그의 성격 탓이었으리라. 괜히 나 혼자 실망하고 뾰로통하게 화난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그 이유를 김선생이 알기나 했을까(.) 생각하면 혼자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한다.
☞미투가 시작되면서 제일 먼저 나는 그 교감이 생각 났다. (가장 먼저 떠오른 인사가 그 교감이니 껄끄러운 기억임이 분명하다.) 그가 몇해 전에 유명을 달리 했다는 소식을 들어서 (들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이제와서 별다른) 달리 방법은 없었지만(없다. 다만,) 나처럼 말못할 고민을 안고 직장 생활을 한 사람이 얼마나 많았을까를 생각하면 한숨만 나올 뿐이다. 미투의 회오리 바람이 심상찮게 불고 있는 이 시대에 김선생 같은 의협심 강한 사람들도 (흑기사가) 많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본다.
첫댓글 아이구 김상영샘~너무 수고 많으셨어요^^
제것은 완전히 총천연색 씨네마스코프입니다;;
조금씩 줄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김상영 선샘님이 수성에세이 팀에 와 주신 건 우리들 복입니다!
컬러 양을 보니 엄 쌤 좋아하시는 이유가 분명합니다!
이런 수고를 다 하셨네요, 너무 감사하고 귀한 석호(石號)샘~짱입니다~^^
과분한 찬사이십니다.
그저 재능 기부라 여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아이구, 대단하십니다. 목이 아프고 눈이 따갑도록 작업을 하셨네요. 감동적인 배려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