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좌의 난[李麟佐의 亂]-1728년 3월15일. 영조4년.
이인좌(1695~1728)는 소론으로 전주이씨이며 충북 괴산출신이었다.[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 후손]
충북은 노론과 소론이 혼재된 지역이었으나 노론 중심지역이었다.
소론학파는 충남 논산 노성을 중심으로 윤증을 영수로 기반하는 학파였다.[신진사류인 양명학파]
윤증은 주자학 중도파 광주출신의 한성태생 성혼의 딸과 혼인하였던 관계로 주자학에서 신진사류인
양명학으로 대체하여,중국의 신진학풍을 따라가며 실학사상,개화사상의 싹이 트게 만드는 학파였다.
노론은 충북 옥천의 송시열을 영수로 기반하는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로 신진사류인 양명학을 거부하며
주자학의 원칙을 고수하는 학파였다.[송익필의 주자학(정주학=태극설)신봉학파]
정여립학파의 사상철학은 소론 실학자들에 의해 민권사상으로 계승된다.
[주리철학+신분질서 타파/대군양성, 근대식 개혁학파]
이인좌는 남인 윤휴학파 영수인 윤휴의 손주 사위였다.
남인의 정신적 기조는 나주~ 부산지방까지를 말하며 선조 시기까지는 김성일[나주목사]이 이끄는
나주가 주도하였으나,1597년 정유재란 시기 칠천량 해전 패전 이후부터 류성룡 등이 남인화되면서
대북,소북으로 갈라지며,1631년(인조9년) 조식학파 후예의 광해군 복위운동[정한(합천),박희집(고령),
성지도(창녕)등 6명이 사사당하고 40여명이 유배]이 실패한 후 윤휴학파의 등장으로
영남지방의 남인들이 주류가 되어 남인을 대변한다.
기타 지역의 남인은 비주류에 속한 남인이었다.
비주류 남인은 원래 조상의 고향이 남인지역이거나 성씨 족보가 남인 지역인 곳을 말한다.
[조상이 여기저기 타지방으로 옮겨 살았을 때는 현조부의 출생지를 下시조로 하여 제사와 제향하고
정치에서 죄가없이 좌천시킬 때 현조부를 원칙으로 하고 조부(관직이 있을 때)의 고향으로 좌천시킴]
-이성계의 6대조(현조부)가 고려 의종 무신시대 때 이의방의 동생 이린- 유교질서(현조학생 부군신위).
숙종(이순/李焞) 당시 장희빈의 아들 이윤[경종]이 병약하였다.
장희빈은 남인을 대변하였고 소론은 이당시 이윤을 지지하였다.
1717년 숙종[43년]은 당시 안질에 걸려 책을 읽는일이 불편하였는데, 노론 영수 이이명[좌의정]은
책을 대신 읽어주는 사람을 곁에 두게 하자며 이윤을 곁에 두어 정사를 읽히게 하라고 권하게 된다.
정확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승정원 승지[남도규],춘추관의 기사관[권적]을 내보내고
정유독대[丁酉獨對]를 나눈다.
노론은 숙빈 최씨가 낳은 연잉군[영조]을 옹립하려 하였기 때문에 소론의 강력한 반발을 사게 된다.
노론은 양광도지방을 대표하고 소론은 충남 논산을 중심으로 경기도 중서부 지방을 아우르며 대표한다.
이당시 노론은 연잉군을 왕위로 올리려 하였고, 양광도뿐만 아니라 옥천을 중심으로 여산지방을
아우르고 대표하였으며, 청주성은 노론학파의 심장부로서 상징적인 곳이었다.
[여산은 노론,소론이 정신적 기조로 삼는 상징적인 곳이었으며,서인의 대부 송익필(정주학/태극설신봉)이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의 대부로 여산송씨였기 때문. 순조 이후로는 안동김씨가 장악(양광도 노론/동인)]
숙빈최씨[최복순,최소령(숙종),최화경(영조)]는 정읍태인에서 가족들이 전염병으로 죽어 고아가 되었는데,
인현왕후 민씨 일가가 나주목사로 부임하는 길에 태인에서 최복순이 고아가 된 사실을 알고
태인 현감에게 부탁하여 나주로 데리고 간다.
후일 인현왕후 민씨 가문으로 들어가 잡일을 도맡아 하면서
민씨가 인현왕후가 되어 궁궐로 들어가자 무수리가 되어 궁궐 잡일을 하다가 숙종의 눈에 띄어
상궁에서 숙원, 숙의, 귀인을 거쳐 숙빈으로까지 봉해진다.
태인 출신이었기 때문에 숙빈 최씨는 태인에서 호남 동부지방, 낙동강 서안지방까지 대변하게 된다.
영조는 노론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양광도지방[경기 동부, 충청 북부, 충북, 강원 영월, 경북 북서부]으로부터도 지지를 받고 있었다.
소론 영수 윤지완[영중추부사-정승을 지낸 관리에게 주는 직책]은 노론 영수 이이명이 이윤[경종]으로 하여금
왕의 정무를 배우게 하려 하는 것은, 실수하기만을 기다렸다가 폐세자 시키려 한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82세로 와병 중이었던 윤지완은 관을 메고 서울로 상경하여 정유독대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상소를 올린다.
정유독대에서 숙종과 이이명이 이윤을 왕세자에서 폐위하고 연잉군을 왕세자로 추대하기로 밀약했다고
의심하였다.
이일로 경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한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왕세제로는 연잉군[이금]이 오르는 것으로 타협이 이루어진다.
숙종이 노론영수 이이명에게 연잉군을 부탁하였고 병약한 경종을 대신하여 대리청정까지 하게 되자,
소론은 경종이 독살될 것을 우려하여 경종 보호를 위해 신임사화[임인옥사]를 일으키고
소론정권의 기반을 굳힌다.
경종이 4년만에 죽고 연잉군[영조]이 왕이 되자 임인옥사에 대한 책임을 물어 소론이 배척당하고
노론의 지위가 회복된다.
그러자 소론에서는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짠다.
1725년 영조 1년부터 충남을 중심으로 소론세력을 결집해 나가며 밀풍군 이탄[소현세자 증손]을
왕으로 추대하기로 하고 전국 각지에 흉서와 괘서 사건을 일으켜 가담자들의 가노와 노비들을
모집하였으며 화적떼를 끌어모았다.
1727년 정미환국[탕평책의 일환으로 온건한 인물들로 사색당쟁을 없애기위해 개편한 인사정국]으로
소론의 온건파들이 기용되고 반란모의가 노출되기 시작하자, 소론 온건파들이 먼저 영조에게 고한다.
1728년 무신년[영조4년]3월15일부터 4월3일까지 청주를 중심으로 이인좌의 반란이 시작된다.
이인좌는 청주성으로 부임할 시기만을 기다리다가 노론학파의 심장부라 할수있는 청주성 목사로
부임하게되자, 상여에다가 무기를 싣고 청주성으로 들여와 점령하고, 충청도 병마절도사 이봉상과
청주 진영장 남연년, 홍림 등을 살해하며 스스로 대원수에 올라 자체적으로 청주목사,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임명한 후 진천, 천안 목천 등으로 북상하여 안성 죽산에서 패하자,
청주 상당산성으로 밀려나서도 패한다. [이봉상은 이순신의 5대손]
이인좌는 윤휴의 손주사위였기 때문에 청주성 상당전투에서 패하자
거창, 합천으로 지원군을 모으기 위해 내려간다.
그틈에 정읍 태인현감 박필현이 임실 병력과 함께 가담하여 정여립 학파의 진원지였던 진안 죽도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조식학파의 계승자 정인홍의 후손 정희량 등과 함께 고령, 합천에서부터 거창, 함양,
산청 산음 병력을 모아 북상하면서 진안 죽도에서 합류하는 사이에 도원수 오명항이 이끄는
진압군과 대치한다.
이틈에 남인 윤휴학파[청소북>청남학파-청도~청송,청풍/주리철학 개혁학파/허목학파]세력과
소북[탁소북>탁남학파-진주,마산,창원,진해,거제/허적학파/이황학파를 잇는 주리철학 원리주의 학파]이었던
세력까지 모두 가담하여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주자의 주리철학은 완성된 학문이라 개혁하면 변종이되는 학문임]
영조는 소론이었던 도원수 오명항을 내세워 이인좌의 반란을 진압하게 한다.
이인좌는 죽산마을 주민 신길만에게 잡혀 서울로 압송되고,
반란군은 이곳에서 패하자 대구지방으로 달아나 대구전투에서도 패하여 동대구에서 궤멸된다.
영조는 동대구에서 평영남비를 세우고 5품이상 진출을 99년간 등용 금지시킨다.
노론은 영조를 지지하고 영조모친 숙빈최씨는 영호남 동인을 대변하였기 때문에 4년후부터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등용되기 시작하여 5년후부터 영남지방으로 확대되어 다시 등용시키게 만든다.
박필현은 처형되고 태인현이 폐현될 위기에 처했다가 살아남았으며, 정희량도 죽고
합천군은 합천현으로 강등된 후 폐현되었다가 5년후부터 점차적으로 풀리기 시작한다.
전국적으로 산발적으로 일으킨 반란은 모두 진압되었다.
이인좌의 난이 쉽게 무너진 것은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란 병력을 한곳에 집결시킨 후 일으켰어야 하는데
산발적으로 일으켰기 때문에 빨리 무너진 것이다.
반란에 가담한 지역은 안성,평택,천안,진천,청주,음성,보은,옥천,부안,임실,정읍,순창,무주,나주,담양
춘천,원주,강릉,서울,평양,경흥,문경,상주,거창,함양,합천,산청산음,진주,고령 등이었다.
충청도-이인좌,신천영,민원보..
경기도-정세윤,계윤,임서호,권서봉,서린,신광원,조관규.
경상도-정희량,조성좌,조세추,한세홍,임환.
전라도-박필현,심유현,나만치,정팔룡,고응량
서울-남태징[포도대장],김중기[총융청 총융사]
평안도-이사성[평안도 병마절도사],안추
함경도-권익관[함경도 관찰사],황부
강원도-한세능,심성연,정봉남......
서로간의 학풍은 달랐으나 학맥간의 연합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패잔병들은 살아남기 위해 중국 상해지방으로 배를 타고 달아나고, 일부는 북상하여 만주지방으로 달아나
반란은 종결되었다.
[전형적인 이이재이 전법으로 상대 진영을 점령하고 상대 지방인을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킨 사건임,
패전하자 동맹이나 다름없었던 남인 윤휴학파를 이용하고 소멸한 조식학파 [대북]와 소북세력까지
동원하였으며, 역시 인조반정으로 소멸한 호남지방의 주기학파[근대식 개혁학파/정이학,정주학,예학,
주자가례를 주자학 내에서 퇴출시켜 신분질서를 타파하고 조선을 개화하여
근대화시키려 했던 근대 이성철학파/
서인 인조반정으로 몰락하고, 효종때 윤휴학파>허목학파인 남인정권 유직의 공격으로
주기철학 학문을 완전 몰락시킴] 후예까지 끌어들였다가 실패한 반란이었음.
낙동강 서안 경북지방과 합천, 산청 중심의 대북, 진주 이남의 소북, 호남 중심의 주기학파(강원 포함)는
인조반정 이후 소멸되어 권력의 중심에서 장기간 소외되어 있었던 시기]
반란 초기에 한성이 아닌 노론학파의 심장부를 노린 것이 실패한 원인으로 판단된다.
역성혁명을 꿈꾸기보다는 상대 진영인 노론학파의 중심지에 치명타를 안겨주기 위한 명분이
더욱 컸던 반란이었다.
[백제시대 충남은 백제의 주류였고, 충북은 복속된 개별가야 지역이 더 많았으며,
진천이남 증평, 청원 라인이 개별가야 지역이었다.
백제에 복속된 개별가야를 신라가 점령해 들어오자 성왕이 회복 전쟁에 돌입하는 계기가된다.
신라는 금관가야 [남가야]인 김유신의 부친 김서현을 내세워 개별가야 서부 한계지방인
진천으로 부임케하여 지키게 한 것이며, 성왕이 신라에 빼앗기자 사비로 옮겨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고
회복 전쟁에 돌입하여 옥천, 보은, 영동지방까지 차지하고 보은 삼년산성으로 50여 명을 이끌고
정찰차 나갔다가 매복에 걸려 전사하게 되는 것임.
신라의 도당 계단 밑에 성왕의 목을 묻고 신라인들이 밟고 다니게 만든 것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제천, 단양, 영월, 영주 부석사 서부지방이 개별가야 최북단 지방이었다.
-김유신의 조부 김무력 복속]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게 된 근본 원인은
"노론학파가 주리철학 원칙을 고수하며 중국에서 일어나 조선으로 들어온 신진사류의 학풍인
소론학파의 양명학을 탄압했기 때문에 반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과거 백제 성왕시대 역사적 사건도 한 몫함]
영조 때 홍대용에 이르러서야 청에가서 신문물을 들여와 영조에게 안경 등을 보여주게 되면서
실학의 중요성이 대두되게 된다. [실학사상의 싹이트는 배경은 효종때 유형원(한성/부안)의 반계수록]
노론학파는 주리철학을 중심으로하는 주자학 원리주의[정주학] 보수파였고
소론학파는 양명학을 중심으로 하는 진보개혁파였다.
[동인 주리학파(이황학파)는 주리철학 원리주의 학파이자 정이학(무극론/음양오행론)신봉학파]
영조의 모친 [숙빈 최씨]인 최무수리[최복순]는 정읍에서 전염병으로 가족을 잃은 고아였을 뿐이고,
고아가 된 최복순을 태인현에 잠시 머물게 하였는데 인현왕후의 친척인 민씨일가가 나주목사로 부임하면서
데리고 가서 인현왕후를 따라 궁궐로 들어가 정 1품 숙빈으로까지 봉해지는 것이다.
대박 드라마에서
극적 효과를 얻기 위해 노름 도박꾼의 아내 설정(숙빈최씨를 임신한 노름 도박꾼의 아내로
궁궐로 들어가게 하는 말도 안되는 설정)으로 나오나 숙빈 최씨[1670~1718]가 된 후부터
호남 동부지방과 낙동강 서안지방을 나름대로 대변하여, 영조가 어쩔 수 없이 등용금지를 풀고
폐현된 군현을 풀어주는데 있어서 숙빈 최씨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태인이 우륵(우르)가야문화가 발견되는 최서북 지방으로 조선시대 범동인의 최서부 지역이었음]
숙종 때 장희빈 사건으로 후궁은 왕후에 오르지 못하도록 법률(경국대전)로 정하게 되는데
숙빈 최씨 (숙종-최소령, 영조-최화경)가 제1호의 후궁임.
p/s
이징옥의 난,이괄의 난 등이 무관이 일으킨 군사반란이라면 이인좌의 난은 문관이 일으킨 난이다.
노론학파는 주리철학을 고수하여 고대 학문인 주자학을 가지고 조선을 통치해 나가자는 주장을 하였고,
소론학파는 실사구시 실천철학을 중시하는 양명학을 중심으로 국가를 이끌어 나가고자 하는 한판 싸움에서
소론의 진보개혁파가 패하여, 고대학문인 주자학을 중심으로하는 양광도 노론학파[서인]정권으로 이어지며
양광도 노론[동인]인 장동(안동)김씨의 60년 세도정치로 이어지다가 조선이 몰락하게 되는 것이다.
유일하게 반란중에서 가장 안타까운 반란이 이인좌의 난이다.
이인좌의 난으로 인해 영조의 탕평책이 강화된다.
고려시대 멸망 과정과 조선시대 멸망 과정이 판박이처럼 되풀이된다.
고려 인종시기 장흥임씨 공예왕후가 등장하자 신라파 진출로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관우처럼 기른
정중부의 수염을 연회장 보현원에서 술에 취해 촛불로 태우다가 목이 잘리면서 무신시대가 열린다.
이의방,정중부,경대승,이의민을 거쳐 경주의 이의민 3부자의 전횡으로 청주가문 최충헌이 권력을 장악하고
최우, 최항, 최의로 이어지는 62년 장기 군부독재를 거치며 몽골의 침략을 받아 무너지기 시작하고
신진 사림파 이색[영덕 영해], 정몽주[영천], 정도전[봉화]시대로 이어지며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한다.
조선 사림파[영남사림파/기호사림파]가 4대사화로 훈구파 서인을 내세운 양광도 동인에게 몰락한 후,
사림파에 이어 일어난 조식학파는 광해군을 지지하며 정권을 잡은 뒤,
대북정권은 노자의 도교철학, 장자철학, 제자백가 [백이숙제]철학을 숭상하는 상고대 학문을 고수하여,
주역/역술,예언,예언서,풍수지리,토정비결,도술[도참설],사술(사주/관상),주술,저주의식 등의 도교풍습을
정치에 악용하고 남발하면서 인조반정으로 몰락하고, 정권을 잡은 양광도 서인 노론정권은
소론의 양명학을 탄압하면서 순조이후 풍양조씨, 안동김씨 60년 세도정치를 거치며
일제의 침략을 받아 몰락의 길을 간다.
선조시기 임진왜란 전에 주기학파는 양명학, 실학사상이 대두되기도 전에 신분질서를 타파하고
조선을 근대화시키려고 제자들을 키워 나가고 있던 시기에, 풍신수길 [도요토미 히데요시]이 보낸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천주교 신자]의 부산 침공을 받고 ,정유재란 후 고대학문인
노자의 도교철학,장자철학,제자백가 철학파인 대북에 정권이 넘어가게 되면서
정신철학이 상고대기로 회귀하고 도학을 남발하며 정치보복을 일삼다가 인조반정으로
정인홍, 이이첨, 허균, 상궁 김개시 등 40여명이 사사되고, 200여 명이 유배를 가게되며,
정치보복을 피하기 위해 일시협력했던 주기학파 40여 명도 유배로 사라져
유배지에서 심장이 타들어가는 시기를 보내며 조선의 근대화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봐야만 하였다.
주기학파가 유배로 사라지고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으며 양광도 서인 노론정권에 이어,
남인정권[윤휴학파/허목학파]에서 효종(1년)때 윤휴/허목학파 유직의 공격으로 성리학의 이단이라며
주기철학 학문을 완전 몰락시키면서, 한비자의 법가사상[법학-반상의 법도], 예학(강상의 법도), 주자가례 등
주자학 강화무장을 시키며 폐쇠적인 조선으로 이끌어가게 되는 것이다.
임진왜란 이전 선조 시기 1560~1591년 2월까지 조선의 근대화를 이룩하느냐,
주자학 원칙을 고수하여 고대의 전통을 이어가느냐의 한판 싸움에서,
주기학파[근대식 개혁학파] vs 주리학파[주자학 원리주의 학파/ 정이학신봉] 간의
정국 주도권 다툼이 벌어진다.
조선을 근대화 시키기 위한 이성의 정립(인격완성) 싸움인 사단칠정논쟁[기대승vs이황],
이기논쟁[이이vs이황]에서 주기학파가 승리하여 정권을 장악하였음에도,
바로 근대화를 시킬수 없었던 근본 이유는 "이성의 정립과 확립없이 근대화를 진척시키면
끊임없는 권력투쟁과 군사반란만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주리철학을 버리고 주기철학을 택한 것에 대해 명나라가 알게 되는 경우
화를 면치 못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샤머니즘, 토테미즘, 도교니즘, 기복불교 신앙을 타파시키고
"인간이 신에 의존하지 않고 이성의 주권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일"은
오랜 시일이 필요하였다.
주기학파 사상철학의 근간인 이성을 정립시키고 이성주의,경험주의,현실주의,합리주의적 사고를
익히게 하여 조선 백성들에게 확산시키고 난 후, 근대화시키는 일은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었기 때문이었다.
주기학파[근대이성 철학파]와 정여립 학파와의 차이가 바로 이점이었다.
정여립[부산 정씨]은 무인적 기질이 강하여 근대화시키려는 진보개혁파에 속하였으나
서인 강경파에 속해 "구더기가 무섭다고 장 못담그나"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이, 이항, 박순, 성혼 등을 비판하고 진안 죽도로 들어가 호남, 영남 동인을 대변하며,
왜군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대동계를 조직하고, 합천, 산청의 조식학파(대북,소북)와 연합하여
신분차별을 없애고 세력을 키우다가 반란 역도로 몰려 1589년 기축옥사로 제거되는 원인이 된다.
또한 조식학파와 연합하고 대동계를 동원하여 왜군 지리정찰대를 토벌하면서
새로운 동인 세력을 형성하여 동인권력을 소외되었던 호남 동부, 낙동강 서안지방으로 가져오려다가,
양광도 동인 주리학파가 서인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 정철을 내세워 기축옥사를 일으키게 하고
동인권력은 양광도 동인 주리학파가 지속적으로 독차지하게 되면서 1591년 2월 정철이 주색에 빠져
국사를 그릇쳤다며 강계, 강릉, 강진 등으로 유배보내 서인정권 마저 차지하고 주기학파 문무관들을
고향지방으로 직급 강등하여 좌천시키면서, 1년후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을 맞이한다.
[귀족과 대상인들이 독점한 육의전을 혁파하고 일정기간 난전을 허용하여 모든 것을 사고 팔게 하면
활, 화약, 총포의 등장으로 근대화가 촉발되는 시발점이 됨.
(근대화로 진입시키기 위한 사전 조치로 자본시장 일정기간 개방).
그럴려면 주기학파는 가장 중요한 것이 "이성의 정립(인격 완성)"이 먼저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고 본 것임.
서인 강경파 정여립 학파가 "이성의 정립 과정"을 무시하고 "구더기가 무섭다고 장 못담그나"라는
양명학에서 강조하는 실사구시 실천철학으로 도교학파인 합천, 산청의 조식학파와 연합하여
신분질서를 철폐하고 근대식 개혁을 밀어붙였다가 역모죄로 몰려 몰락하는 것임.
1981년 경부터 약 20여년 간 전주에서 해마다 난장을 열어 중소기업 제품 활성화에는 기여하였으나,
주요 과학기술 통제로 핵심 과학분야는 활성화 되지는 못함.
선조 때 근대화 시키지 못한 한을 난장으로 대신한 것인데 난장이 역사가 될 줄은 몰랐을 것임].
>현재도 육의전 우선주의 정치, 경제에서 벗어나 과학기술 통제를 풀고
모든 것을 법적으로 특허권과 지적재산권[저작권, 공업소유권, 유형재산권, 무형재산권(발견, 발명, 고안,
의장, 상표, 저작물, 컴퓨터 프로그램, 반도체 칩의 배치설계, 데이터 베이스등..)/상표권, 실용신안권,
디자인권, 의장권, 초상권..)을 절대적으로 인정해주는 정책을 펼치면,
제4차 산업혁명을 짧게 경험하거나 건너뛰고 바로 제5차 산업혁명 체제로 들어갈 수도 있음.
>육의전과 수구 정치, 수구 자본파 바로 졸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