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비추는 것이 모두 거울은 아니지만 몸을 비추면서도 제 속까지를 다 비추는 물은 더 없이 아름다운 거울이다. 유년시절, 물가에 앉아 놋그릇을 닦으시던 어머니의 손은 온통 황토 범벅이 돼 있었다. 나는 종종 어머니의 곁에서 내 몫으로 남겨진 조그만 놋그릇을 닦곤 했다. 벗겨진 녹이 차츰 풀려 물은 청동거울 같았다. 짚수세미에 황토를 묻혀 천천히 놋그릇을 닦는 일, 세상살이도 그렇게 녹을 벗겨 내듯 하라던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나는 돌멩이를 주워 물위에 던졌다. - 시현실 2000년 겨울호, 김충규 [놋그릇] 중에서
조선시대 때부터 많은 이들이 갖고 싶어 했던 ‘안성맞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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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란 좁은 의미로는 놋쇠로 만든 그릇이라는 뜻이지만, 넓은 의미로는 동(銅)을 기본으로 하는 비철금속의 합금으로 만든 여러 가지 기물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식기의 경우 여름에는 백자, 겨울에는 유기를 즐겨 썼으며 그 밖의 갖가지 세간에도 유기제품을 사용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유기를 언제부터 사용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넓은 의미에서 동합금의 일종인 청동기 시대의 동검이나 동경 같은 물건으로 보아 청동기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본격적으로 사용이 확대된 시기는 삼국시대부터이다. 삼국시대에는 주로 불교와 관련되어 불상, 범종, 반자 등을 청동으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불교에서뿐만 아니라 제기, 수저, 밥그릇, 향로 등 생활의 전반에 걸쳐서 동제품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나, 상류층에서 주로 사용하였다. 유기가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부터이다.
같은 유기라도 제작방법에 의해 구분 짓고 있다. 주조해서 만드는 곳은 ‘퉁점’이며 여기서 만든 주물 유기는 ‘붓배기’라 하며 안성이 유명하고, 단조해서 만드는 곳은 ‘놋점’이라 하며, 여기서 만드는 단조품은 ‘방짜’라 부르며 납청 일대가 유명하다. 특히 안성은 행세깨나 한다는 집에서는 갖고 싶어한다는 ‘안성맞춤’으로 이름 높았다. 안성의 유기가 다른 지방보다 유명한 것은 서울 반상가의 그릇을 주문 받아 제작하였기 때문이다. 안성맞춤 유기는 일반인이 사용하는 보통 그릇인 ‘장내기’에 비해 품질이 우수하였다.
유기회사에 입사, 장인 김기준에게 유기를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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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기에 안성에는 크고 작은 유기제작 공장이 많이 있었는데, 그 중에 가장 큰 것이 안성유기제조주식회사였다. 김근수 선생은 20세때 유기회사에 외무사원으로 입사하여 처음으로 유기와 관련을 맺어 공장에서 유기 만드는 기술을 숙련된 장인인 김기준 선생으로부터 배웠다. 이후 1960년대에 안성유기공업사로, 이후 풍화유기공업사로, 그리고 신시산업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꾸며 유기작업을 계속하였다. 1982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된 후 활발하게 유기 작품을 제작하였고 명예보유자로 인정되었다가 2009년 타계하였다. 선생의 사후 주물 유기 제작기술은 그의 아들 김수영 선생이 대를 이어 2008년 유기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어 전수활동을 펼쳐나가고 있다. 김근수 선생의 대표적인 작품들은 종묘제기, 능제기 같은 제기류와 칠첩반상기, 주전자세트 같은 식기류, 대야나 화로 같은 일상기물, 불구 등 각종 기명들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