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20:1
앗수르 왕 사르곤이 군대장관을 아스돗으로 보내매 그가 와서 아스돗을 쳐서 취하던 해 - "사르곤"은 앗수르 역사에 없는 이름인 고로 그것이 앗수르 왕 산헤립의 별명이 아닌가 생각하는 학자들이 많다. 어쨌든 "사르곤"이라는 이름이 여기 나온 고로 이것이 성경의 오유(誤謬)가 아닌가 생각한 학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앗수르 도성에서 불란서 영사(領事)가 발굴한 고적에서 사르곤왕의 이름이 발견되었다. "군대장관"이라는 말은 타르탄이니 장군의 이름이 아니고 직위(職位)의 존칭이다. 앗수르가 블레셋의 아스돗을 점령한 때는 주전 711년이었다. 이 사건에 대하여 발굴된 조각문(彫刻文)에도 기록되기를, "내가(사르곤) 아스돗으로 나아가 포위하고 정복하였다"라고 하였다(Annals 224).
"아스돗"은 블레셋 도시로서 실상 애굽으로 통하는 요로(要路)에 있다. 그러므로 앗수르가 이 도성을 점령한 사실은 애굽으로 하여금 위태한 느낌을 가지게 하였다. 그 사실은 애굽에 대한 앗수르의 공격이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상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섭리하시면서 이제 애굽에 임할 일에 대하여 이사야로 하여금 예언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뜻하신 바는 공중 루각(空中樓閣)과 같이 하나의 이상(理想)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역사적 사실로 실현되고야 만다. 그가 애굽을 치시려는 계획을 이제 착착 이루어 가시면서 아스돗에 이르러 겨누고 있다.
사 20:2
곧 그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일러 가라사대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니라 - "이사야에게"라는 말의 "에게"는, 히브리 원어로 뻬야드(* )이니 그 문자역(文字譯)은, "손에 의하여"라고 하는데 이는 곧, 이사야의 사역을 통하여 그 백성에게 말씀하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명령하신 이 행동 예언은, 그 예언 목표 성취가 확실할것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이 행동 예언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이 아래 제 4절에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것은, 이사야가 하나님의 지시에 즉각 순종하였다는 것이다.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즉각 순종하였다. 하나님과 사람(특별히 하나님의 종)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은 복종이다.
사 20: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종 이사야가 삼 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여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예표와 기적이 되게 되었느니라 - 여기 "삼 년 동안"이라는 말은, 솰로쉬 솨님인데 이것이 이사야가 벗은 몸으로 3년 동안 살 것을 가리키는지? 혹은 3년 후에 있을 전쟁의 환난에 대한 예표라는 뜻인지? 자세히 알기 어려우나 첫째가 맞는 듯하다. "기적"이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모페드이니 여기서 기적(寄蹟)이라고 번역하는 것보다는 "징조"라고 함이 적합하다 (Alexander). 이사야의 예언 행동은, 장차 애굽에 임할 앗수르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애굽 사람들이 많이 사로잡혀 갈 것을 가리키는 징조이다. 이 예언 행동은 주전 708년에 나타난 것인데, 그 성취는 앗수르 왕 에살하돈(Esarhaddon-B.C. 681-668)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고, 또 다시 앗수르 왕 앗술바니발(Asurbanipal-B.C.663년)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 앗술바니발이 애굽을 정복한 데 대한 말이 조각문에 있는데 거기에 보면, 포로되어 온 애굽인들이 니느웨에 와서 앗술바니발의 발에 입을 맞추기까지 하였다고 한다(Lange's Commentary, Isaiah p.233).
사 20:4
여기 있는 말씀은 이사야의 행동 예언의 의미를 설명하여 준다. 위의 3절 해석 참조.
사 20:5,6
그들이 그 바라던 구스와 자랑하던 애굽을 인하여 놀라고 부끄러워할 것이라 그날에 이 해변 거민이 말하기를 우리가 믿던 나라 곧 우리가 앗수르 왕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달려가서 도움을 구하던 나라가 이같이 되었은즉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오 하리라 - 여기 "그들"이라는 말은 유대인을 가리킨다. 본장에 기록된 이사야의 행동 예언은, 사실상 누구보다도 먼저 유대인을 경고하기 위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앗수르의 침략을 당할 때에 먼저 애굽이나 구스의 원조를 바라보았다. "바라던 구스와 자랑하던 애굽". 여기 "바라던"이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마빠트이니 이것은 도움을 받기 위하여 바라봄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 택한 백성 유다 민족이 이렇게 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았다. 그는, 유대 민족이 하나님 밖에 다른것을 믿는데 대하여 극히 노하셨다. 사람이 하나님 밖에 다른 것을 믿으면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된다.
불신앙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사람의 힘을 의지함이다. 그것은 창조의 원리를 거스름이다. 인간은 피조물인 만큼 그는 하나님을 의지할 자로 났다. 그뿐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 밖에 다른 것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죄악이다. 하나님은 자기밖에 다른 것을 종교적으로 신뢰하지 말라고 하셨다(출 20:3-6).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려면 먼저 사람을 믿는 마음에서 끊기워야 된다. 어떤 사람이 밤중에 배를 저어서 바다 가운데로 나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가 밤새도록 노를 저었지만 배는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그 원인은, 배의 닻을 감지 않고 그대로 노만 저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 밖에 다른 것을 믿는 마음을 끊지 않고 하나님을 믿으려는 것은 그와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개인이나 국가나 하나님 밖에 다른 것을 믿을 때에 그들이 믿는 것(하나님 밖에 다른 것)을 파괴시키신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밖에 다른 것을 믿을 때에 기뻐하시지 않는 이유는, 아래와 같은 것이다. 곧, 사람이 하나님 밖에 다른 것을 믿을 때에는 그 마음이 갈리나니, 전심(全心)으로야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을 갈린 마음으로야 어떻게 믿으랴? 그러므로 성경은 말하기를,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님께 얻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약 1:6-8).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고(마 6:24), 주님께서 미지근한 신자는 토하여 버리겠다고 하셨다(계 3:16). 대하 16:7-9;렘 17:5,48:7,49:4;겔 33:13;암 6:1 참조.
"해변 거민"은 유대인들을 가리키고, "우리가 믿던 나라"는 유대인들이 의지하던 애굽을 의미한다. 그리고 "바라고 달려가서 도움을 구하던 나라"도 유대인들이 앗수르의 침략 때문에 원조를 의뢰한 나라 곧, 애굽을 가리킨다.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오". 곧,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애굽을 믿었으니 이제 그 죄악을 징계하기 위하여 먼저 애굽을 파멸시키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벌을 면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들이 하나님 밖에 다른 것을 믿을 때 그들이 믿는 대상(하나님 밖에 다른 것)을 없애 버리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