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依山島爲國邑。舊百餘國,漢時有朝見者,今使譯所通三十國。從郡至倭,循海岸水行,歷韓國,乍南乍東,到其北岸狗邪韓國,七千餘里。始度一海,千餘里至對馬國。其大官曰卑狗,副曰卑奴母離。所居絕島,方可四百餘里,土地山險,多深林,道路如禽鹿徑。有千餘戶,無良田,食海物自活,乖船南北市糴。
왜인은 대방(帶方)의 동남 대해 가운데에 있으며 산과 섬을 의지하여 국읍(國邑)으로 삼는다. 옛날에는 100여 개의 나라가 있었는데 한(漢)나라 때에 조견(朝見)하여 왔다. 지금은 통역으로 통교하는 나라가 30여 나라이다. 군(郡 : 대방군)으로부터 왜까지 해안(海岸)을 돌아 물길로 한국(韓國)을 거쳐 남쪽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가면, 그 북쪽 해안인 구야한국(狗邪韓國)1)에 이르는데 7000여 리이다. 처음에 바다를 한 번 건너 1000여 리를 가면 대마국(對馬國)2)에 이른다. 그 나라(對馬國)에서는 관리를 비구(卑狗)라고 부르고 부관은 비노모리(卑奴母離)라고 부른다. (대마국 사람들은) 절도(絕島)에 거주하며 사방이 대략 400여 리이고 토지가 험하며 숲이 많다. 도로(道路)는 짐승이 다니는 길과 같다. 1000여 호가 있으며 좋은 밭이 없어 해산물을 먹어 살아가거나 배를 타고 남북을 오가며 양곡을 산다.
又南渡一海千餘里,名曰瀚海,至一大國,官亦曰卑狗,副曰卑奴母離。方可三百里,多竹木叢林,有三千許家,差有田地,耕田猶不足食,亦南北市糴。
또 남쪽으로 한해(瀚海)3)라고 하는 바다를 한 번 건너 1000여 리를 가면, 일대국(一大國)4)에 이른다. 역시 관리를 비구(卑狗)라고 부르고 부관을 비노모리(卑奴母離)라고 부른다. 사방은 대략 300리이며 대나무가 많고 숲이 울창하다. 3000가량의 집이 있다. 밭은 약간 있으나 경작하여도 먹을 것이 부족하여 (일대국 사람들은) 역시 남북으로 오가며 양곡을 사 먹는다.
又渡一海,千餘里至末盧國,有四千餘戶,濱山海居,草木茂盛,行不見前人。好捕魚鰒,水無深淺,皆沈沒取之。
또 바다를 한 번 건너 1000여 리를 가면, 말로국(末盧國)5)에 이른다. 4000여 호가 있고 (사람들은) 산과 바다에 의지하여 살아간다. 초목이 무성하여 다니면 앞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말로국 사람들은) 물고기와 전복을 잘 잡아 물이 깊고 얕음에 상관없이 모두 잠수하여 그것(물고기와 전복)을 취한다.
東南陸行五百里,到伊都國,官曰爾支,副曰泄謨觚、柄渠觚。有千餘戶,世有王,皆統屬女王國,郡使往來常所駐。
동남쪽으로 뭍길로 500리를 가면 이도국(伊都國)6)에 이른다. 관리는 미지(爾支)라고 불리고 부관은 설모고(泄謨觚)나 병거고(柄渠觚)라고 불린다. 1000여 호가 있고 세세토록 왕이 있어 모두 여왕국(女王國, 邪馬壹國)에 속해있다. 군(대방군)의 사신이 왕래하며 항상 (이도국에) 머문다.
東南至奴國百里,官曰兕馬觚,副曰卑奴母離,有二萬餘戶。
동남쪽으로 가면 노국(奴國)7)에 이르며 100리이다. 관리는 시마고(兕馬觚), 부관은 비노모리(卑奴母離)라고 부른다. 2만여 호가 있다.
東行至不彌國百里,官曰多模,副曰卑奴母離,有千餘家。
동쪽으로 가면 불미국(不彌國)에 이르며 100리이다. 관리는 다모(多模), 부관은 비노모리(卑奴母離)라고 부른다. 1000여 호가 있다.
南至投馬國,水行二十日,官曰彌彌,副曰彌彌那利,可五萬餘戶。
남쪽으로 물길로 20일 가면, 투마국(投馬國)에 이른다. 관리는 미미(彌彌), 부관은 미미나리(彌彌那利)라고 부른다. (투마국의 호수는) 가히 5만여 호에 달한다.
南至邪馬壹國,女王之所都,水行十日,陸行一月。官有伊支馬,次曰彌馬升,次曰彌馬獲支,次曰奴佳鞮,可七萬餘戶。
남쪽으로 물길로 10일, 뭍길로 한 달을 가면 사마일국(야마타이 국, 邪馬壹國, 邪馬臺國)8)에 이르는데 여왕이 도읍한 곳이다. 관리로는 이지마(伊支馬)가 있다. 그 다음 관리는 미마승(彌馬升)이라고 부르고, 그 다음은 미마획지(彌馬獲支), 그 다음은 노가제(奴佳鞮)라고 부른다. (사마대국의 호수는) 가히 7만여 호에 달한다.
自女王國以北,其戶數道里可得略載,其餘旁國遠絕,不可得詳。次有斯馬國,次有已百支國,次有伊邪國,次有都支國,次有彌奴國,次有好古都國,次有不呼國,次有姐奴國,次有對蘇國,次有蘇奴國,次有呼邑國,次有華奴蘇奴國,次有鬼國,次有爲吾國,次有鬼奴國,次有邪馬國,次有躬臣國,次有巴厘國,次有支惟國,次有烏奴國,次有奴國,此女王境界所盡。其南有狗奴國,男子爲王,其官有狗古智卑狗,不屬女王。自郡至女王國萬二千餘里。
여왕국의 북쪽부터는 그 호수(戶數)와 도리(道里)를 소략하게 기재할 수 있으나, 그 나머지 방국(旁國)은 거리가 멀어 상세히 적을 수 없다. (사마대국의) 다음으로는 사마국(斯馬國), 이백지국(已百支國), 이사국(伊邪國), 도지국(都支國), 미노국(彌奴國), 호고도국(好古都國), 불호국(不呼國), 저노국(姐奴國), 대소국(對蘇國), 소노국(蘇奴國), 호읍국(呼邑國), 화노소노국(華奴蘇奴國), 귀국(鬼國), 위오국(爲吾國), 귀노국(鬼奴國), 사마국(邪馬國), 궁신국(躬臣國), 파리국(巴厘國), 지유국(支惟國), 위노국(烏奴國), 노국(奴國)이 있다. 이곳이 여왕의 경계가 끝나는 곳이다. 그 남쪽에는 구노국(狗奴國)이 있는데 남자가 왕이며 관리로는 구고지비구(狗古智卑狗)가 있고 여왕에 속하지 않는다. 대방군으로부터 여왕국까지 만 2천여 리이다.
男子無大小皆黥面文身。自古以來,其使詣中國,皆自稱大夫。夏後少康之子封於會稽,斷髮文身以避蛟龍之害。今倭水人好沈沒捕魚蛤,文身亦以厭大魚水禽,後稍以爲飾。諸國文身各異,或左或右,或大或小,尊卑有差。
남자는 나이가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모두 얼굴과 몸에 문신을 한다. 옛날부터 그 나라의 사신이 중국에 이르면, 모두 스스로 대부(大夫)라고 칭했다. 하후(夏後) 소강(少康)의 아들이 회계(會稽)에 봉해지자 머리털을 깎고 문신을 함으로써 교룡(蛟龍)으로부터의 해로움을 피했다. 지금 왜의 물 사람들은 물에 들어가 물고기와 조개를 잘 잡는다. (이들은) 문신을 하는데 (이것으로써) 역시 대어(大魚)와 물짐승(水禽)을 놀라게 하였으며, 훗날에는 점차 (문신으로써) 장식을 하게 되었다. 모든 나라의 문신은 각기 다르다. 어떤 자는 왼쪽에, 어떤 자는 오른쪽에, 어떤 자는 크게, 어떤 자는 작게 하는데 존비에 따라 다름이 있다.
計其道里,當在會稽東治之東。其風俗不淫,男子皆露紒,以木綿招頭。其衣橫幅,但結束相連,略無縫。婦人被髮屈紒,作衣如單被,穿其中央,貫頭衣之。種禾稻、紵麻,蠶桑、緝績,出細紵、縑綿。
그 나라의 거리를 헤아려 보면 마땅히 회계(會稽)9)와 동야(東冶)10)의 동쪽에 있다.11) 그 나라의 풍속은 음란하지 않다. 남자는 모두 (관이나 두건을 쓰지 않고) 머리를 드러내어 상투를 틀었는데 목면(木綿)으로 머리를 묶었다. 그들의 옷은 가로로 되어 있으나 단지 서로 연결되어 있을 뿐이며 바느질은 거의 되어 있지는 않다. 부인은 머리를 풀어헤친 뒤 구불구불하게 묶는다. 옷은 홑겹으로 만들어 입는데 옷의 가운데를 뚫어 머리를 통과하게 한 뒤 입는다. (왜인은) 벼(禾稻)를 심고 모시(紵麻)를 생산하며 양잠을 하고 뽕나무를 키운다. (蠶桑) 그리고 실을 만들어 내고(緝績), 가는 모시(細紵)와 비단과 솜(縑綿)을 생산해 내기도 한다.
其地無牛馬虎豹羊鵲。兵用矛、楯、木弓。木弓短下長上,竹箭或鐵鏃或骨鏃,所有無與儋耳、硃崖同。倭地溫暖,冬夏食生菜,皆徒跣。有屋室,父母兄弟臥息異處,以硃丹塗其身體,如中國用粉也。食飲用籩豆,手食。
그 나라의 땅에는 소와 말, 호랑이, 표범, 양, 까치가 없다. 병사들은 창과 방패, 나무 활을 사용한다. 나무 활은 아래는 짧고 위는 길며 대나무 화살이나 철촉, 골촉을 쓰는데, 이는 담이(儋耳)와 주애(硃崖)의 것과 같은 것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왜의 땅은 온난하여 겨울과 여름에 생채(生菜)를 먹으며 모두 맨발로 다닌다. 가옥이 있어 부모 형제가 함께 지내지만, 거처는 달리한다. (왜인들은) 붉은 염료를 몸에 바르는데 이는 중국에서 분을 사용하는 것과 비슷하다. 음식을 먹을 때는 변두(籩豆)12)를 사용하며 손으로 음식을 먹는다.
其死,有棺無槨,封土作塚。始死停喪十餘日,當時不食肉,喪主哭泣,他人就歌舞飲酒。已葬,舉家詣水中澡浴,以如練沐。
그 나라에서는 사람이 죽은 뒤 (장사를 지낼 때) 관(棺)은 있으나 곽(槨)은 없이 흙을 쌓아 무덤을 만든다. 처음 사람이 죽으면 10여 일은 상(喪)을 멈추는데 그때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 상주(喪主)는 소리를 내어 우는데 다른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술을 마신다. 장사를 지내면 온 가족이 물속에 들어가 몸을 씻는데 이는 중국의 ‘연목(練沐)’13)과 같다.
其行來渡海詣中國,恆使一人,不梳頭,不去蟣虱,衣服垢汙,不食肉,不近婦人,如喪人,名之爲持衰。若行者吉善,共顧其生口財物;若有疾病,遭暴害,便欲殺之,謂其持衰不謹。
그 나라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 중국에 올 때 항상 한 사람으로 하여금 머리를 빗지 않고 서캐와 이를 제거하지 않고, 의복을 더럽게 하고, 고기를 먹지 않게 하고, 부인을 가까이하지 않게 한다. 마치 상을 당한 사람과 같은 이 사람은 지쇠(持衰)라고 한다. 만일 여행이 순조로웠다면 (사람들이) 함께 지쇠의 노예와 재산을 돌보아 주지만, 만일 (사람들이) 여행 도중에 질병을 앓거나 해로움을 입는다면 지쇠를 죽였다. 이는 (사람들이) 그 지쇠가 삼가지 않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出真珠、青玉。其山有丹,其木有柟、杼、豫樟、楺櫪、投橿、烏號、楓香,其竹筱簳、桃支。有薑、橘、椒、蘘荷,不知以爲滋味。有獮猴、黑雉。其俗舉事行來,有所雲爲,輒灼骨而卜,以占吉凶,先告所卜,其辭如令龜法,視火坼占兆。其會同坐起,父子男女無別,人性嗜酒。《魏略》曰:其俗不知正歲四節,但計春耕秋收爲年紀。
(왜에서는) 진주(真珠)와 청옥(青玉)이 나온다. 그 나라의 산에는 주사(丹, 朱砂)가 있고, 나무로는 녹나무(柟), 상수리나무(杼), 예장(豫樟), 유력(楺櫪), 투강(投橿), 오호(烏號), 풍향(楓香)이 있다. 대나무로는 소간(筱簳)과 도지(桃支)가 있다. 생강(薑)과 귤(橘), 산초나무(椒), 양하(蘘荷)가 있지만 (왜인들은) 맛을 모른다. 원숭이와 검은 꿩이 있다. 그 나라의 풍속에, 일을 하거나 길을 떠날 때 뼈를 태워 길흉을 점치고 그 결과를 고한다고 한다. 이는 마치 영귀법(令龜法)과 같으니, 바로 불에 그을린 자국을 보고 조짐을 점치는 것이다. 그 나라 사람들이 함께 모여 앉고 일어날 때는 아버지와 아들,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다. (왜인들의) 성품은 술을 좋아한다. 『위략(魏略)』 : 그 나라의 풍속은 정월(正歲, 正月)과 사절(四節)을 모르며 다만 봄에 경작하고 가을에 수확하는 것을 바탕으로 해를 센다.
見大人所敬,但搏手以當跪拜。其人壽考,或百年,或八九十年。其俗,國大人皆四五婦,下戶或二三婦。婦人不淫,不妒忌。不盜竊,少諍訟。其犯法,輕者沒其妻子,重者滅其門戶。及宗族尊卑,各有差序,足相臣服。收租賦。有邸閣。國國有市,交易有無,使大倭監之。
(왜인들은) 대인(大人)을 보면 공경의 뜻으로 단지 손을 두드리며 무릎을 꿇고 절한다. 그 나라 사람들의 수명을 고찰하면, 몇몇은 100년을 살기도 하고 8~90년을 살기도 한다. 그 나라의 풍속을 보면, 국대인(國大人)은 모두 4~5명의 부인을 두고 하호(下戶)는 2~3명의 부인을 둔다. 부인은 음란하지 않고 질투하지도 않는다. (왜인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으며 (왜에서는) 쟁송이 적다. 그 나라 사람이 법을 어기면 가벼운 경우는 그의 처자(妻子)를 몰수하고 무거운 경우는 그 가문을 멸한다. 존비에 따라 차등이 있어 서로 신복(臣服)한다. 조세를 거두고, 식량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다. 나라마다 시장이 있어 있고 없는 것을 교역하는데 대왜(大倭)로 하여금 그것을 감독한다.
自女王國以北,特置一大率,檢察諸國,諸國畏憚之。常治伊都國,於國中有如刺史。王遣使詣京都、帶方郡、諸韓國,及郡使倭國,皆臨津搜露,傳送文書賜遺之物詣女王,不得差錯。下戶與大人相逢道路,逡巡入草。傳辭說事,或蹲或跪,兩手據地,爲之恭敬。對應聲曰噫,比如然諾。
여왕국의 북쪽으로부터 특별히 일대솔(一大率)이 설치되어 여러 나라를 검찰하는데 여러 나라가 이를 두려워한다. (일대솔은) 항상 이도국(伊都國)을 치소로 삼는데 이는 나라 안에 자사(刺史)가 있는 것과 같다. 왕이 사절을 경도(京都 : 위(魏)의 수도 낙양(洛陽))와 대방군, 여러 한국(韓國)에 보낼 때와 대방군의 관리(郡使)가 왜국에 사자로 갈 때 모두 나루터에서 검사하고 보낼 문서와 물품을 여왕에게 전송하는데 착오가 없게 한다. 하호(下戶)가 대인(大人)을 길에서 만나면 뒷걸음치며 풀숲으로 들어간다. (하호가 대인에게) 말을 전하거나 무언가를 설명할 때는 엎드리거나 무릎을 꿇어 두 손을 땅에 짚음으로써 공경의 뜻을 보인다. (대인이) ‘희(噫)’라는 소리로 대답하면 승낙한 것과 같다.
其國本亦以男子爲王,住七八十年,倭國亂,相攻伐歷年,乃共立一女子爲王,名曰卑彌呼,事鬼道,能惑衆,年已長大,無夫婿,有男弟佐治國。自爲王以來,少有見者。以婢千人自侍,唯有男子一人給飲食,傳辭出入。居處宮室樓觀,城柵嚴設,常有人持兵守衛。
그 나라도 본래 7~80년 동안 남자가 왕이었다. 왜국이 어지러워지자 서로 공격하기를 여러 해가 지나자 마침내 (왜인들이) 함께 여자 하나를 왕으로 세우니, 이름은 비미호(卑彌呼)라 한다. 비미호는 귀도(鬼道)를 부려 능히 사람들을 매혹할 수 있다. 나이는 이미 많으나 남편은 없어 남동생이 나랏일을 보좌하였다. 왕이 된 이래로 모습을 본 자가 적다. 계집종 1000명을 시중들게 하는데 오직 한 남자만이 음식을 나르며 (비미호의) 말을 전하며 드나들었다. 거처와 궁실, 누각, 성책이 엄히 설치되었고 항상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지켰다.
女王國東渡海千餘里,復有國,皆倭種,又有侏儒國在其南,人長三四尺,去女王四千餘里,又有裸國,黑齒國復在其東南,船行一年可至。參問倭地,絕在海中洲島之上,或絕或連,周旋可五千餘里。
여왕국에서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1000여 리를 가면 다시 나라가 있는데 모두 왜의 종족이다. 또 그 남쪽에 주유국(侏儒國)이 있는데 사람들의 키가 3~4척이며 여왕국으로부터 4000여 리나 떨어져 있다. 또 그 남쪽에 다시 나국(裸國)과 흑치국(黑齒國)이 있는데 배를 타고 1년을 가야 도달할 수 있다. 왜의 땅을 더듬어 보면, 바다 가운데 섬 위에 떨어져 있으며 끊어져 있기도 하고 이어져 있기도 하여 둘레를 돌아보면 가히 5000여 리이다.
景初二年六月,倭女王遣大夫難升米等詣郡,求詣天子朝獻,太守劉夏遣吏將送詣京都。其年十二月,詔書報倭女王曰:
경초 2년(A.D. 238) 6월14), 왜 여왕이 내부 난승미(難升米) 등을 군(대방군)에 보내 천자에게 조헌(朝獻)하기를 청하자 태수 유하(劉夏)가 관리를 보내 (난승미 등을) 경도(낙양)로 호송하였다. 그해 12월, 조서(詔書)를 내려 왜 여왕에게 답하기를,
「制詔親魏倭王卑彌呼:帶方太守劉夏遣使送汝大夫難升米、次使都巿牛利奉汝所獻男生口四人,女生口六人、班布二匹二丈,以到。汝所在逾遠,乃遣使貢獻,是汝之忠孝,我甚哀汝。今以汝爲親魏倭王,假金印紫綬,裝封付帶方太守假授汝。其綏撫種人,勉爲孝順。汝來使難升米、牛利涉遠,道路勤勞,今以難升米爲率善中郎將,牛利爲率善校尉,假銀印青綬,引見勞賜遣還。今以絳地交龍錦五匹、臣松之以爲地應爲綈,漢文帝著皁衣謂之弋綈是也。此字不體,非魏朝之失,則傳寫者誤也。 絳地縐粟罽十張、蒨絳五十匹、紺青五十匹,答汝所獻貢直。又特賜汝紺地句文錦三匹、細班華罽五張、白絹五十匹、金八兩、五尺刀二口、銅鏡百枚、真珠、鉛丹各五十斤,皆裝封付難升米、牛利還到錄受。悉可以示汝國中人,使知國家哀汝,故鄭重賜汝好物也。」
“친위왜왕(親魏倭王) 비미호에게 조서를 내리노라. 대방태수(帶方太守) 유하(劉夏)가 사신을 보내 너희 나라 대부 난승미와 차사(次使) 도시우리(都巿牛利)를 호송하여 (대방군의 관리와 왜의 사신이 함께) 네가 바친 사내 노예 4명과 계집 노예 6명, 반포(班布) 2필 2장을 받들고 도착하였다. 네가 자리한 곳이 너무 멀지만, 마침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니 이는 너의 충효이며 나는 심히 너를 애지중지 여기노라. 지금 너를 친위왜왕으로 삼고 금인(金印)과 자수(紫綬)를 대방 태수에게 맡겨 너에게 대신 수여하게 하려 한다. 그 종족의 사람들(種人 : 倭種, 倭人)을 위무하고 효순(孝順)에 힘쓰거라. 너의 사신인 난승미와 우리(牛利 : 都巿牛利)가 먼 곳에서 건너와 길에서 힘썼으니, 이제 난승미를 솔선중랑장(率善中郎將)으로, 우리를 솔선교위(率善校尉)로 삼고 은인(銀印)과 청수(青綬)를 내린다. 인견(引見)한 뒤 (난승미와 우리를) 위로하며 상을 내리고 돌려보내노라. 지금 강지교룡금(絳地交龍錦) 5필 (裵注) : 신(臣) 송지(松之)는 ‘지(地)’는 응당 ‘제(綈)’가 되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한나라 문제(文帝)가 조의(皁衣 : 진한(秦漢) 시대에 관원이 입던 검은 옷)를 입었는데 이를 ‘익제(弋綈)’라고 부릅니다. 이 글자(地)는 잘못되었습니다. 위나라 조정의 실수가 아니라면 옮겨 적은 이의 실수일 것입니다. 과 강지추속계(絳地縐粟罽) 10장, 천강(蒨絳) 50필, 감청(紺青) 50필로 네가 바친 공물에 답하노라. 또한, 특별히 너에게 감지구문금(紺地句文錦) 3필과 세반화계(細班華罽) 5장, 백견(白絹) 50필, 금(金) 8냥, 오척도(五尺刀) 2구, 동경(銅鏡) 100매, 진주(真珠), 연단(鉛丹) 각 50근을 모두 난승미와 우리에게 맡겨 보낸다. (난승미와 우리 등이 왜국으로) 돌아가 도착하면 (하사품을) 기록하여 모두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보여 국가(國家 : 위나라)가 너를 매우 아끼고 있음을 모두가 알게 하여라. 그러므로 정중히 너에게 좋은 물품을 보내노라.
正始元年,太守弓遵遣建中校尉梯俊等奉詔書印綬詣倭國,拜假倭王,並齎詔賜金、帛、錦罽、刀、鏡、采物,倭王因使上表答謝恩詔。
정시 원년(A.D. 240), 태수 궁준(弓遵)이 건중교위(建中校尉) 제준(梯俊) 등을 조서(詔書)와 인수(印綬)를 받들게 하여 왜국에 보내 왜왕에게 대신 수여하고, 아울러 황제의 명령으로써 금(金)과 비단(帛), 금계(錦罽), 칼(刀), 거울(鏡), 채색 무늬가 있는 깃발이나 의복(采物)을 하사하니 왜왕이 사절을 보내 표(表)를 올려 황제의 은혜로운 조서에 답례하였다.
其四年,倭王復遣使大夫伊聲耆、掖邪狗等八人,上獻生口、倭錦、絳青縑、綿衣、帛布、丹木、𤝔、短弓矢。掖邪狗等壹拜率善中郎將印綬。
정시 4년(A.D. 243), 왜왕이 대부 이성기(伊聲耆)와 액사구(掖邪狗) 등 8명을 보내 노예, 왜금(倭錦), 강청겸(絳青縑), 금의(綿衣), 백포(帛布), 단목(丹木) 부(𤝔), 단궁시(短弓矢)를 바쳤다. 액사구 등은 솔선중랑장(率善中郎將)의 인수(印綬)를 받았다.
其六年,詔賜倭難升米黃幢,付郡假授。
정시 6년(A.D. 245), 조서를 내려 왜의 난승미에게 황당(黃幢 : 황색 깃발)을 하사하였다. (황당을) 군(대방군)에 맡겨 대신 수여하게 하였다.
其八年,太守王頎到官。倭女王卑彌呼與狗奴國男王卑彌弓呼素不和,遣倭載斯、烏越等詣郡說相攻擊狀。遣塞曹掾史張政等因齎詔書、黃幢,拜假難升米爲檄告喻之。
정시 8년(A.D. 247), 태수 왕기(王頎)가 부임지에 도착하였다. 왜 여왕 비미호가 구노국(狗奴國)의 남자 왕인 비미궁호(卑彌弓呼)와 평소 불화하여 왜의 재사(載斯)와 오월(烏越) 등을 군(대방군)에 보내 서로 공격하는 상황을 설명했다. (위나라 조정이) 새조연사(塞曹掾史) 장정(張政)을 보내 난승미에게 조서와 황당을 주어 격문으로 그들을 타일렀다.
卑彌呼以死,大作塚,徑百餘步,徇葬者奴婢百餘人。更立男王,國中不服,更相誅殺,當時殺千餘人。復立卑彌呼宗女壹與,年十三爲王,國中遂定。政等以檄告喻壹與,壹與遣倭大夫率善中郎將掖邪狗等二十人送政等還,因詣台,獻上男女生口三十人,貢白珠五千,孔青大句珠二枚,異文雜錦二十匹。
비미호가 죽자 (왜에서는) 크게 무덤을 만들었는데 (무덤의 크기가) 100여 걸음이었으며 순장된 사람이 노비 100여 명이었다. (왜인들이) 다시 남자 왕을 세웠는데 나라 안에서 따르지 않자 (남자 왕을) 다시 주살하니 당시 주살된 자만 1000여 명이었다. (왜인들이) 다시 비미호의 종녀(宗女) 일여(壹與)를 세웠다. 나이 13세였으며 나라 안이 드디어 안정되었다. 장정 등이 격문으로 일여를 타이르자 일여가 왜 대부 솔선중랑장 액사구 등 20명으로 하여금 장정 등을 호송케 하여 (낙양으로) 보냈다. (장정 등과 액사구 일행이 낙양에) 돌아와 대(臺)에 이르러 남녀 노예 30명과 백주(白珠) 5000개, 공청대구주(孔青大句珠) 2매, 이문잡금(異文雜錦) 20필을 바쳤다.
1) 『삼국지』 동이전 한(韓) 조에는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의 김해(金海) 지방이다.
2) 지금의 대마도(對馬島)이다.
3) 대한해협(大韓海峽)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다. - 문화콘덴츠닷컴
4) 『양서(梁書)』와 『북사(北史)』에는 일지국(一支國)으로, 『고사기(古事記)』에는 이기국(伊伎國)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의 이키섬(壹岐島)으로 비정된다.
5) 『고사기』에는 말라현(末羅縣, まつらのあがた)로 기록되어 있으며 지금의 나가사키현(長崎県) 마츠우라시(松浦市)로 비정된다.
6) 후쿠오카현(福岡県) 이토시마시(糸島市)로 비정된다.
7)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나진(那津, なのつ)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지금의 후쿠오카현(福岡県) 하카다시(博多市) 부근으로 비정된다. 서기 57년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가 왜의 노국왕에게 하사한 한위노국왕인(漢委奴國王印)이 유명하다.
8) 3세기 왜국을 대표하던 나라로 보인다. 야마타이 국이 어디에 있었는가에 대한 위치 논쟁은 일본 고대사의 주요 쟁점 가운데 하나이다. 크게 큐슈설(九州說)과 기나이설(畿内說)로 나뉜다. 야마타이 국은 히미코(卑弥呼)라는 여왕의 통치하에 있었으며 대방군(帶方郡)을 통해 조위(曹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기도 하였다. 위나라 명제(明帝)는 히미코를 친위왜왕(親魏倭王)에 봉하고 사례품을 하사하기도 했다.
- 일본사학회, 『아틀라스 일본사』, 사계절, 2011, pp.20~21.
9) 고대 중국의 군명(郡名)으로 장강(長江) 하류의 강남(江南) 일대이다. 후한 시대 회계군의 군치(郡治)는 산음현(山陰縣)이며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이다. 『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에 따르면 후한 시대에 회계군은 15개의 현을 거느렸다. 삼국시대에는 손오(孫吳)의 영역하에 있었다. 손오는 회계군을 나누어 임해군(臨海郡, 절강성의 동남쪽)과 건안군(建安郡, 지금의 복건성), 동양군(東陽郡, 지금의 절강성 금화(金華), 구주(衢州) 일대)을 설치했다. - 바이두백과
10) 지금의 복건성(福建省) 복주(福州) - 바이두백과
11) 왜국이 회계와 동야의 동쪽에 있다는 『삼국지』의 이 기록을 그대로 믿을 경우, 왜국의 위치는 지금의 대만이 된다. 따라서 이 기록은 실제 왜국의 위치를 나타난 기술이 아니다. 중국 삼국시대 연구자인 와타나베 요시히로(渡邉義浩)는 "計其道里,當在會稽東治之東"가 『삼국지』의 찬자인 진수(陳壽)를 비롯한 당시 중국인의 관념이 반영된 기술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왜국이 손오의 배후에 있을 것이라는 관념이다.
12) 주로 식기나 제기로 사용된 고대의 그릇이다. 대나무와 나무로 만들어졌다. - 바이두백과
13) 사람이 죽은 뒤 1년이 지난 뒤에 지내는 제사가 소상(小祥)이다. 이때 연복(練服)을 입고 연관(練冠)을 착용하기 때문에 이를 '연(練)'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 시기는 복상 기간 중 예외적으로 목욕이 허용되는 시기이다. 본문에 따르면, 왜인들은 장례를 마친 뒤 물에 들어가 목욕을 하였다고 한다. 왜국에 파견된 위나라 사신들은 왜인들의 이와 같은 장례 풍습을 보고 연제(練祭) 때 목욕하는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다.
14) 본문에는 히미코가 위나라에 사신을 처음 보낸 시점이 경초 2년(238)이라고 기술되어 있지만 사실은 경초 3년(239)의 일로 보아야 합당하다. - 박대재, 「변진사회의 분화와 구야국의 성장」, 『문헌과 고고자료로 본 가야사』, 2019, p.176.의 注 93)
* 참고 자료가 명기되지 않은 주가 있다. 모두 "渡邉義浩, 『魏志倭人伝の謎を解く - 三國志から見る邪馬台国』, 中央公論新社, 2012"을 참고했다.
[출처] 『삼국지』 위지동이전 왜인 조|작성자 천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