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은 다른 글들과는 다르게 컨셉 잡고 이렇게 써봤습니다. 그래서 일단 정상순서 파일을 올렸습니다. 역순으로 글을 쓰는게 재미지더라고요. 글을 연습할때 자신이 지니고 있는 하나의 스테레오타입을 깨부수는데 많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고 있습니다. 어쨋거나 역순으로 글을 쓴다는건, 자신의 사고방식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서 글의 재구성을 요구하는 일이다보니까요. 저 같은 경우에는 간단한 소개로 시작해 줄거리, 책에서 중요한 내용, 그리고 제가 생각한 핵심적인 주제상을 쓰는 편으로, 가능하면 글의 중요도를 후반에 가면 갈수록 집중하는 편입니다. 이렇게 반대로 쓰니까 벌써부터 어색해지지만 글쓰기의 색다른 재미를 발견하게된 시간 같네요. 참고로 모든 문단을 뒤집을까 생각했지만 그러면 나중에 저도 읽기 어려워 질거 같아서 그냥 큰 주제만 뒤집기로 결정했습니다. 뭐 책소개 - 줄거리 이런식으로 가야하는게 줄거리 - 책소개 이런식으로 뒤집었다 생각하시면 될거 같네요. 그나저나 이번 리뷰는 정말로 다른 리뷰와는 색채가 정말로 다른거 같긴 하네요. 안그래도 주관적이었던 제 리뷰에 하나의 극단을 보여준게 아닐까 싶은 정도로 주관성을 밀고 붙여나가서 아예 동떨어져 있는걸 써버린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게 되었네요.
더 괜찮았던 점은 아무래도 수대연이 문학 동아리다보니까 철학이나 사회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나눴는데 과학이 좀 소외시 되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번에 그나마 과학적인 이야기도 나눴다는 점이었네요. 과학을 다룬 문학들도 굉장히 많은데 앞으로는 이전에 올렸었던 갈라테아 2.2에서처럼 과학관련된 책들도 종종 읽어 써봐야겠네요. SF라... 듄이랑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는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아직 엄두가 안나고... 아이작 아시모프나 어슐러 르 귄, 그거 말고도 최근에 로버트 A. 하인라인 전집인가 번역됐던데 그거 짤깍짤깍 건드려봐야 겠네요.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어느 퍼거슨이 죽고 나서 그 이후 장들에 어떻게 나오는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깐, 뭐 1장에서 죽은 퍼거슨이 있다고 하면, 그가 2장에서 어떻게 보일지. 나타나는거 보고 왜인지 소름이 돋더라고요.
라이프니츠의 자유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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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만이 그 능동성이 순수하고 수동적으로 겪는다고 일컬어지는 것이 전혀 없는 유일자임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피조물에게 능동성의 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피조물의 능동성은 실체에서 자연적으로 나오는 실체의 변용이며, 신이 피조물에게 전달해준 완정성에서뿐만 아니라 피조물로서 그 완전성 안에서 스스로 드러내는 제약 속에서도 변화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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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자신을 유심히 살펴본다면, 비록 우리를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선택한 항으로 우리를 기울게 하는 어떤 원인에 언제나 이유가 있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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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간단하게 라이프니츠의 자유의지에 대한 관점을 조명하고 끝내겠습니다. 이 지면에서는 굳이 라이프니프의 모든 자유의지론에 대해서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 쪽을 택한 만큼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입장도 넣기 위해서 그냥 넣어봤습니다. 라이프니츠는 신의 존재를 전제하고 자유의지를 이끌어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는 신의 예지를 예시로 들며 어차피 사물이 행동하는 것은 신의 예지에 따라서 사물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견된 것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은 도출되지 않으며, 필연적 진리 그 자체는 반대가 불가능하거나 모순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가 내일 글을 쓸것이다 라는 내용의 진리는 이런 성질의 것이 아니며 따라서 필연적이지 않다. 하지만 신이 이러한 것을 예견하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진리의 예견은 곧 결과의 필연성이고 우리는 이것을 가정적 필연성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신이 그러한 예견을 내렸다고 가정했기 때문에) 그러나 문제시 되는 것은 절대적 필연성입니다 라고요. 그는 여기서 가정적 필연성과 절대적 필연성을 구별해서 상황을 나누는데, 이들의 차이는 간단하게 말하면 신이 예지를 하였는가 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물론, 절대적 필연성을 신이 예지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신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신이 예지를 하지 않더라도 벌어질 일이기에, 신이 굳이 예지를 할 필요가 없는 필연성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에게 인간 존재들이 하는 행동은 신이 예지했다고 가정한 상황, 즉 가정적 필연성을 따르기 때문에 그것이 절대적으로 예지 되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충분히 인간의 자유의지의 발현을 이루어짐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라이프니츠에게 있어서 단순실체란, 모나드 입니다. 모나드는 전체를 인식하는 신이 아니기에, 신과는 반대로 불확실에서 명확함으로 지각의 경계를 뻗습니다. 이러한 행동이 욕망이고 능동성이라고 부를수 있습니다. 신이 전체를 보는 유일자로서 주어지기 때문에, 그렇지 못하는 다른 존재들, 모나드로 이루어진 객체들의 경우에는 지각의 경계를 조금씩 확장해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는 이런 확장의 행위를 자유의지의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자유에 대한 생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자유는 기울어지되 (경향성을 갖되) 필연성은 아니다’ 입니다. 이후 신은 최선은 선택할 수 밖에 없지만 그렇게 하도록 강제된 것은 아니며, 그 선택 대상에는 필연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말합니다. 사물들의 다른 계열이 역시 가능하기 때문립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선택이란 여러 가능한 것들 중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인 만큼 필연성에서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의지는 오로지 선택 대상의 선성이 우위일 때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리는 선택이라는 것은 가능세계 속 무수히 많이 존재하는 어떤 상황속에 존재하고, 신은 그곳애서 최선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그 최선은 필연적이다거나 강제된 것은 아니기에, 이는 전제처럼 정해져 있는 절대적 필연성이 아니라 가정적 필연성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라이프니츠의 자유에 대한 주장은 우리가 자유롭고 자유의지가 있는 이유는 우리의 미래가 확실하지/필연적이지 않기 때문이다로 볼수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이야기할수도 있습니다. 그래 너 말대로 우리의 세계에서는 자유의지가 제한되어 있거나 존재하지 않을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자유의지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세계로 인해서이다라고. 이 주장은 가능세계, 즉 나를 어떤 행동을 함에 있어서 그 행동을 하지 않거나 다른 행동을 취하는 여러 선택의 중첩으로 존재하는 선택의 종합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실존해있는 세계만의 자유의지의 틀에서 벗어나 내가 존재할수도 있는 세계에까지 확장하여 자유의지라는 개념을 적용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라이프니츠가 사용하려는 자유의지에 대한 방식이기도 합니다. 미래의 불확정성, 즉 현재의 변동에 따라 미래가 변화한다는 것으로 인하여 자유의지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가능세계에서 내가 현재 선택하지 않은 것과 분과되어 존재하는 행동과 결과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자유의지가 있어보인다는 말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능세계라도 하나의 동일한 명제를 공유한다는 것. 즉, 자유의지를 논할 때의 가능 세계는 현실의 세계와 최소한 논리적 연관성 내부에 존재하는 세계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A라는 원인이 존재하면 결과 x로서 결과가 존재한다는 것. 자유의지를 옹호하려는 가능세계의 주장은 인간이 선택해서 행동하면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을 전제로 사용해야합니다. 자유의지 개념을 다루는데 가능 세계마다 각가지 다른 정의를 허용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가능 세계에서 우리가 같은 선택의 상황 A가 있다고 하더라고 결과로서의 변수 x에 가능 세계만의 값이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가능성이 풍부해 보이는 가능세계는 결국 하나의 절대적인 전제 아래에 놓여있으며 그로 인해 가능세계의 본질은 현실과 다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능세계로 자유의지를 옹호하는 주장에는 하나의 약점이 있는데, 이들은 가능세계를 전체로서 바라보고 판단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전체적인 가능 세계로 바라보았을때, 분명히 선택은 여러 갈래의 결과를 낳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서 선택의 자유를 부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개별적 가능 세계의 영역으로 들어간다면, 하나의 선택은 하나의 결과를 낳는다는 것으로 보일 것이기에, 자유의지가 아닌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결정론, 결정론, 결정론, 결정론... 그렇게 자유의지를 만들어 내는 총체적 가능 세계가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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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음날 하루 종일 시종에게 무엇을 명령할 것인지 어떤 이가 모두 알고서, 시종과 완벽하게 닮고 내가 명령할 모든 일을 순서애 따라 정확히 실행하는 자동 기계를 만들었다. 내 시중을 들 자동기계의 행동이 전혀 자유롭지 않다고 해도, 나는 내가 바라는 모든 것을 하도록 자유롭게 명령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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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들은 제가 길게 말했던 로봇의 자유의지에 대한 반박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제시했던 자유의지는 인간과 유사하게 행위하는 로봇에 대한 것이었지만, 라이프니츠가 말하고 있는 것은 자동기계를 만든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라이프니츠가 말한 이 문장의 경우에는 보편적인 인간존재에 대한 자유의지의 증명이 아니라 창조주로서 인간존재의 자유의지를 말한 것이기에, 결국 자동기계를 만든 인간의 자유의지는 여전히 꼬리를 물어 나타납니다.
자유의지
이런 역사관을 토대로, 하나의 질문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여전히 퍼거슨들이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다고 말할수 있는가? 이는 쉽사리 답을 내려 말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우리가 보았던 자유롭게 행동하고 여러 사건에 휘말리며 각기 다른 삶을 살아가는 퍼거슨들은 그 각자의 자유의지가 있기에 이런 변화를 만들어냈다라고 말할수 있겠지만, 이는 마지막 퍼거슨이 존재하지 않았을 경우에만 입니다. 마지막 퍼거슨이 존재하기에 이들은 그 어떠한 자유의지도 결코 지닐 수 없습니다. 그들이 행동하고 사고하고 생각한 그 모든 것은 결국 한명의 창조자, 즉 다른 퍼거슨들에 비해 덜 허구성을 지니고 있는 퍼거슨이 지니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를 인간으로서 인식하고 사유하기 때문에 그는 온전히 자기와 분리된 행동과 사고를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물론 그것에 반대되어 보이는 것들을 조합하여 새로움을 보일수는 있지만 그것의 기원 자체도 덜 허구적인 퍼거슨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기에 그 자신의 주관에 묶여 있다는 생각을 떨쳐내기 어렵습니다. 절대적 창조자 앞에서 우리가 봐왔던 퍼거슨들이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다라고 말할수 있을까요?
만약 가능하다고 한다면 우리는 덜 허구적인 퍼거슨이 창조한 퍼거슨들이 사는 세계들을 두가지로 구분해야 합니다. 먼저, 자유의지가 존재하는 가능적인 세계, 다음은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 가능적인 세계로 말입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자유의지가 존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경우 나의 자유의지란 내가 내 의지로 무언가를 행동한다는 것은 착각에 불과하거나 주관성의 영역에 들어가 빠져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자에서는 작가라는 이름의 창조자가 그들이 할 행동 하나하나 사고 한 글자를 모두 적어놓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난 자유의지가 있어라고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믿음으로 인한 자유의지는 절대적 창조주의 존재가 불분명한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비해 약할 것입니다. 그것이 불분명할 경우 최소한 나는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다에 대한 반박으로 창조주의 존재가 나타나지는 않지만, 창조주가 존재할 경우에는 네 자유의지는 근본적으로 온전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유의지에 강함과 약함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깐, 수치적으로 나는 100의 자유의지를 지녔는데 네놈은 50의 자유의지만을 지녔군 이라고 우리가 말할 수 있나요? 자유의지에 있어서 양의 개념이 여기서 문제가 됩니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전자의 세계에서의 자유의지의 존재는 납득가능할 것 입니다. 그러나 자유의지에 양이 없다면 이들은 아마 자유의지가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할것 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데 x 만큼의 자유의지를 사용하는 것이 y 만큼의 자유의지를 사용하는 것보다 더 자유로운가요? 어쨋거나 내가 그 세계를 상정한 순간, 최소한의 순간에 나는 그들의 자유를 제한하게 됩니다. 이것이 퍼거슨이 글을 쓰며 한 행동이고 그렇기에 최소한 그의 세계에서는 자유의지가 없다고 보는게 맞을거 같습니다.
자유의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제 논지를 확장하여 실존하고 있는 인간, 즉 작품 속의 퍼거슨들이 아닌, 그것을 쓴 작가나 그것을 읽고 있는 인간들도 자유의지가 존재하냐는 질문으로 넘어가도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우선, 자유의지를 긍정하지 않기에 하나의 실험을 준비해봤습니다. 이는 로봇에게도 자유의지가 존재하는지를 통해서 이를 인간에게까지 확장하는 실험입니다. 우선, 로봇이 하나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 로봇은 어떠한 외압을 받게 된다면 (상황/배경/환경적 요소) 받게된 압력을 자신의 행동으로 치환하여 결과를 도출합니다. 우리가 로봇을 때린다거나 발로 찬다거나 하는 그런 요소들에 대하서 제가 임의적으로 특정한 값을 부여한다면 그건 너무나 자의적인 것이 되기 때문에 어느 특정한 무한소수를 이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나마 가장 익숙하지 않을까 하는 무한소수인 π를 로봇에게 외압으로 작용한다면, 그 로봇은 아까도 말했듯이 행동을 합니다. 또한, 만약 이런 외압이 적용된 경우, 로봇이 그것을 처리하고 행동하는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애매하긴 하지만 일반적인 뇌의 처리속도 만큼의 값을 부여하는 것으로 해서 단순처리 능력은 일반 컴퓨터라고 생각합시다. 이제 이 로봇의 메커니즘을 π, 즉 3.141592….로 시작하는 수들을 하나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봐서, 3, 1, 4, 1, 5, 9, 2… 이런식으로 본다고 설정합니다. 그리고 만약 숫자가 홀수일 경우 왼쪽으로 돈다, 짝수인 경우 오른쪽으로 돈다고 하죠. 그렇다면 로봇은 왼쪽, 왼쪽, 오른쪽, 왼쪽, 왼쪽…. 이것을 끝없이 반복할 것입니다. 이런 두가지 행동 밖에 할수 없는 로봇에게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것은 자명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메커니즘을 그 다음수가 0-3인 경우 왼쪽으로 회전, 4-6인 경우 직진, 7-9인 경우 오른쪽으로 회전한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이 로봇은 왼쪽으로 회전, 왼쪽으로 회전, 직진, 왼쪽으로 회전, 직진, 오른쪽으로 회전… 이런 식으로 반복하며 특정한 위치에서 특정한 위치로 끊임없는 움직임을 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 로봇은 자유의지를 지니지 않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로봇은 아직까지 너무나 단순한 회로를 지니고 있고 움직임이라는 단순한 행동을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발전시켜서, 로봇에게 이제 날아오르기와 내려가기를 추가해보겠습니다. 0-1는 왼쪽으로 돌기, 2-3는 직진, 4-5는 오른쪽으로 돌기, 6-7은 날아오르기, 8-9는 내려가기. 그렇다면 결과는 직진, 왼쪽으로 돌기, 오른쪽으로 돌기, 왼쪽으로 돌기, 오른쪽으로 돌기, 내려가기, 직진… 이렇게 움직임이라는 차원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로봇은 이제 이차원 평면에서가 아니라 삼차원 공간을 점유하며 이동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로봇은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지 않나요? 물론 로봇이 보여주는 행위는 미시세계 속 생물의 행동방식이나 또는 입자가 운동하는 방식과 유사할정도로 발전하긴 했다만, 그래도 로봇은 아직까지도 자유의지를 얻는데 실패한것처럼 보입니다. 여전히 무언가 결여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메커니즘을 확 발전시켜 보겠습니다. 로봇에게 x라는 동물이 기본적으로 행동할수 있는 가능한 모든 행동을 추출해 그것을 데이터화해 로봇에게 등록시키는 겁니다. 그리고 부여한 무한소수에도 변화를 주어서, 처음 시작하는 수는 그 다음 수가 지닐 길이에 해당하는 값을 부여한다고 합니다. 가령, 3.141592..가 있을 경우, 로봇은 변화된 변수의 입력을 3(길이), 141(행동번호), 5(길이)로 파악할 것입니다. 그래서 변수 π의 경우 3이라는 값으로 시작하기에 길이가 3인 가장 가까운 수인 141을 선택하고, 그 고유번호를 지니고 있는 행동을 할 것입니다. 141이라는 행동을 먹기라고 한다면 로봇은 무언가를 먹기라는 행동을 할 것입니다. 먹기 이후에는 메커니즘을 따라서 로봇은 동물이 가능한 행동들을 계속해서 행할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그 어떠한 관계성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로봇은 눈을 감았다 날아오르고 배변을 하고 뒹굴고 나무위를 오르다 떨어지는 것을 그 어떠한 근거없이 연결해서 행동할 것입니다.
이렇게 로봇을 유사한 동물의 수준까지 이끌어 올렸고, 이제 동물에 도달하게 하나를 더 추가해보겠습니다. 로봇에게 대상물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그 대상물과 유사하다면 특정 범주에 포함되어 있는 행동을 하라는 메커니즘을요. 물론 이것이 애초에 인식 그 자체가 가정된 메커니즘이 아니냐라는 반문이 들어올 수 있다만, 우리는 자유의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고, 단지 사물을 인식한다고 해서 자유의지가 온전하게 생기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룰수 있지 않을까요? 굳이 문제가 생긴다면 추가할 메커니즘을 더 낮은 차원으로 환원해서, 우리가 대상이라고 부르는 존재들의 정보를 주입시키는 것 까지는 동일한데, 그 정보에 정보를 추가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카시아 나무와 소나무라는 정보를 줄때 그 정보에 나무 라는 공통적인 2차 정보를 꼬리표처럼 추가해서 2차 정보가 동일하다면 두개의 개별적 대상은 연관을 지닌다 라는 것을 말이죠. 다시 돌아와서 가령, 로봇에게 고기가 하나 보인다고 가정하면, 새로운 메커니즘을 따르는 로봇은 고기를 x라는 것 (또는 2차 정보)과 유사하다라고 판단할 것이고, 그 x는 행동방식에서 식사를 하는 것으로 연결될 것입니다. 이 메커니즘의 추가로 인해 3.141592…라는 하나의 고정된 숫자값에서 변화를 줄 수 있습니다. 로봇은 더이상 하나의 141번 행동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식사라는 범주에서의 141번이 있고, 이동에서의 141번이 있고, 놀기에서의 141번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인식과정에서 진행된 고기를 x와 유사함이라고 인식한 것이 식사로 연결되어 식사 범주의 141번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된다면 이상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동물과도 같은 로봇을 만들 수 있을거 같습니다. 이전 단계와는 다르게 우리는 로봇이 더이상 음식을 보면서 그 위에 배변하려고 하는 행동들을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즉, 행동을 하는데 최소한의 개연성을 부여했다고 생각해도 될거 같습니다.
이제 전 두 단계에서 동물이라고 한 부분을 인간으로 바꾸어 보아 인간적인 로봇을 보겠습니다. 이 인간적인 로봇은 자신이 인식하는 대상물에 따라서 그것이 어떤 범주에 있는 것인지 파악하고 (이 범주 파악은 또다른 무한소수를 사용한다거나 π의 제곱 또는 자연상수 e를 사용해서 표현이 가능해보입니다) 자신의 행위를 결정해 인간처럼 행동할 것입니다. 이 경우에 로봇은 여전히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지 않나요? 혹은 지니고 있나요?
이 단계에서도 저는 로봇이 인간다움이라는 부분에서 부족하다고 느껴 이 로봇에게 가중치라는 값을 추가하기로 했습니다. 이는 즉, 로봇이 동일한 대상물을 보고 행동한 행위에 가중치를 부여해 후에 같은 대상물을 다시 보더라도 다른 행동을 할 가능성보다 이전에 했던 행동을 반복하게끔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능케하는 방법은 어느 한 범주에서 공허한 값을 가중치로 전환하면 가능합니다. 우리가 식사라는 범주에서 무한한 행위를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특정 유형의 행동을 하는 것처럼, 로봇이 인간의 행위에 대한 정보를 받을때 인간이 ‘많이’행하는 행동, 또는 절대 하지 않은 행동을 제외한 행동들 중 최소한의 가중치가 존재하는 행동로만 유한하게 받아들이면 됩니다. 예시로 식사라는 범주에서 고유번호를 지니는 행동이 141번 까지 있다면 나중에 142번 이상의 숫자가 가능적으로 등장한다면 이전에 행했던 행동에 가중치를 부여해 그것을 반복시킨다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141번의 행동을 했다면 141번이라는 행동의 고유번호를 스스로 정보화해서 저장하고, 만약 15976이라는 번호가 나타난다면, 141번의 행동을 반복하는 겁니다. 물론 12번이 나타난다면 12번을 따르는건 변하지 않은 상태로요. 그렇다면 이제 이 로봇은 비록 스스로 사고하지 않지만 인간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행위를 행합니다. 이전까지는 같은 밥이 주어져도 한번은 숫가락을 사용하고 다른 한번은 손으로 먹고 다른 한번은 마시려고 하는 이런 일치되지 않은 행동들에서 벗어나 하나의 습관이라는 것을 형성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로봇은 자유의지를 지닌건가요? 만약 그렇다면 어떤 부분에서 자유의지라는 것이 자유의지를 지니지 않은 존재에게 깃든건가요? 이전까지 우리는 정보와 메커니즘이라는 형태로 로봇을 인간과 유사하게 만드려고 했었습니다. 정보와 메커니즘의 발전이 자유의지에 대한 필요충분 조건일까요? 자유의지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이 문제로 인해 저는 일차적으로 자유의지를 부정합니다. 물론, 애초에 가장 초기단계의 로봇에게 자유의지가 깃들어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수 있습니다. 만일 그 로봇이, 제자리에서 방향 회전만 하는게 가능한 로봇이 자유의지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식물에게도 자유의지가 존재하고, 그 이후단계인 동물도 그러하고, 메커니즘 자체가 들어있지 않은 움직이지 않고 그 어떤것도 하지 않는 로봇, 즉 모든 즉자에게 자유의지가 깃들어 있다는 것으로 확장됩니다. 만일 자유의지가 보편 존재에 대해서 본질적인 어느 한 요소라면, 자유의지가 인간에게 있어서 그토록 중요함을 지녀야함은 무엇이며, 우리가 정의내린 자유의지와 모순되는 정의를 지니게 될 가능성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스피노자를 떠올리게 하는 로봇에게도 자유의지가 포함되어 있다라는 주장은, 이것은 저에게 거짓으로 보입니다.
선택에 대해서
우리가 바라본 4개의 퍼거슨의 삶이란 결국 그가 선택한 것들로 인해서 발생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는 자신의 선택이 우리가 미래를 알지 못하는 것과 동일하게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알지 못하며, 그 결과가 오롯이 자신에게 달리지 않는다는 것도 그는 모르고 있습니다. 그가 내린 선택은 자신만을 향해있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의 환경과 타인에게 영향을 미쳐 그들의 행동양식마저 바꾸게 됩니다. 그의 선택이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초반, 어른 퍼거슨이 나무에서 떨어졌나 나뭇가지가 떨어져 머리를 맞아 죽는 것으로 알 수 있고, 그의 선택이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범죄를 저질러 대학에 가지 못하게 될 위기나 사고를 당하는 것등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이처럼, 4 3 2 1에서 선택이라는 행위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로서 작용합니다.
이런 선택이 하나의 중요한 요소로서 4 3 2 1에 떠오를때 그와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 있습니다. 필연성과 우연성입니다. 4 3 2 1에서 이것들이 부각되는 이유는 결말에 다다라서 알게됩니다. 이제까지 분리된 독립적인 퍼거슨들의 삶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작품 내내 등장하던 퍼거슨이 작성한 자신의 가능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밀런 쿤데라가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토마시와 테레자의 모습으로 보여준 바와 같이 필연성과 우연성의 대립구조를 보여줍니다. 그는 필연성의 삶을 살아가는 토마시와 우연적인 삶을 사는 테레자가 한 집아래에 결혼해서 사는 것을 보여주며 그 둘의 대립구조를 서서히 무너뜨려 둘의 조화를 보여줍니다. 이는 토마시가 테레자를 보며 그녀는 여섯 우연의 겹침이라고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퍼거슨이 보여주는 필연성과 우연성의 대립과 그 대립 도식의 파괴는 쿤데라가 보여준 구조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에 해당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책이 흘러감에 따라서 퍼거슨의 선택에 따른 현상들의 변화에 따라 그의 선택은 우연적인 결과를 낳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의 선택에 의한 결과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기에 그가 유사한 선택 혹은 동일한 선택을 하더라도 판이하게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런 생각은 결말이 이르러 파괴되고 맙니다. 우리가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미 글로 써있는 것이었고, 우리의 앞으로만 달려나갔다고 생각했던 시간이 사실은 이미 정지된 역사, 즉 필연성을 바라보고 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폴 오스터는 이런 방식으로 작품의 중간중간에서 우연성과 필연성의 인식적인 혼란을 줍니다. 이렇게 쓰인 작품의 형식, 위에도 나와있듯이 순환성을 보여주는 결말 때문에 우리는 또다른 역사관에 대해서도 알수 있습니다.
시간이란 직선적인가? 우리가 지니고 있는 시간과 역사에 대한 관념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인식작용과 지각능력이 의해 온전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으로 시작된 역사관이 있습니다. 이런 시각에서 바라보는 역사관이란 과거에서 미래로 단방향적으로 흐르는 고착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전까지 옳다고 생각한 전통적 역사관에 입각한 이런 시선은 역사란 결과적으로 과거에서 현재로 흐르는 것으로 파악합니다. 이런 시선이 대립되는 역사관이란, 역사가 미래에 선결정되어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4 3 2 1을 읽어가는 도중 바라본 퍼거슨들의 이야기가 결국에는 실존하는 퍼거슨이 쓴 글에 불과하다는 것이 이 책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줍니다. 책이 흐름에 따라서, 퍼거슨이 아이의 모습으로 텍스트에서 드러나 소년이되고 그 소년이 대학생이 되고 급기야 죽음에 이르는 과정 모두를 우리는 흘러지나가는 현실로 받아들입니다. 결말에 이르기 전까지 우리가 바라본 퍼거슨의 삶이란 부분부분 떨어져 있는 그의 현실을 우리의 시간과 합치시켜 그것이 동일성을 지니도록 보이게한 연결 그 이상 그 이하가 아닙니다. 비록 작품 속 퍼거슨의 시간이 우리의 시간과 완전하게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과거에서 미래로 흐른다는 방향성 때문에 그것은 동일성을 부여받습니다. 그러나, 결말에 도달해 우리가 보았던 이야기 모두가 현재가 아니라 과거라는 것을 알게된 순간, 부여된 동일성은 사라지고 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았던 것은 누군가가 미래에 이미 작성해 둔 기록을 토대로 재구성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미래에서 만들어지고 과거로 나아갑니다. 저도 어디서 보았는지 혹은 생각해냈는지조차 기억이 안날정도로 오래된 생각이라서 엄밀성이 있다? 에는 답을 못할거 같네요.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생각해본다면 상당히 재미난 것들을 구성해볼수 있습니다. 이는 한번 직접 살펴보시면 좋을거 같네요.
어째서 문학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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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의 매력은 책의 매력과는 완전히 달랐다. 책은 단단하고 영원한 반면, 신문은 얇고 읽자마자 버리는 순간적인 것, 다음 날 아침이면 다른 신문으로 대체되는 것이었고, 매일 아침엔 새로운 날을 위한 따끈따끈한 새 신문이 나왔다. 책이 시작에서 끝까지 직선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던 반면, 신문은 늘 동시에 여러 곳에 걸쳐 있는, 동시성과 모순이 뒤범벅된, 여러 이야기가 한 면에 존재하는 매체였다. 각각의 이야기는 세상의 서로 다른 면모를 드러냈고, 각각의 이야기는 바로 옆에 있는 다른 이야기와 아무 관련이 없는 생각이나 사실을 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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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거슨의 인생은 책보다는 신문이다. 그는 책처럼 영원하게 기록되는 것보다는 신문처럼 무수히 많은 가능성들을 매순간 짓밟으며 그것들을 버리고 살아간다.
이전 등대로 리뷰에서 버지니아 울프가 회화라는 방식을 선택해서 그것으로 기존 언어예술이 지니던 한계를 깨트리려고 노력했던 모습을 보았습니다. 4 3 2 1에서는 그와는 반대로 오히려 언어 예술에 집중한 모습을 보입니다. 퍼거슨은 분명히 여러 예술을 선택해 그 예술을 사용하는 예술가가 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퍼거슨은 그런 점은 고려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자신을 포함한 다른 퍼거슨도 글을 쓰게 만들었습니다. 위에서 인용된 문장은 대학 신문 잡지 동아리 비슷한 활동을 한 퍼거슨이 느끼는 책과 신문에 대한 것입니다. 그는 책이라는 것이 단단하고 영원하며, 또한 동시에 시작에서 긑으로 날아가는 하나의 화살로써 보았고, 신문은 가볍고 순간적인 것, 어디에나 있으며 같은 것에 대해서 말하지만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고 하나의 독립적인 완결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에 지면에서도 다수의 이야기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여기서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은 꽤나 의미심장합니다. 왜냐하면 작가인 폴 오스터가 등장인물인 퍼거슨이 썼다고 말하는 이 책, 4 3 2 1은 퍼거슨이 말하는 책도, 신문도 아니라 그 중간 어디에 끼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것은 그가 말하는 책의 속성에 완벽하게 부합하지도 않으며, 신문의 속성에도 완벽하게 부합하지 않습니다.
4 3 2 1은 퍼거슨이 말한 책의 속성을 지녔다라고 말하기에는 어딘가 애매모호합니다. 4 3 2 1은 다른 일반적인 책들이 지니고 있는 독자적인 완결성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완결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해봐야 이미 죽어버린 퍼거슨들을 마주할때나 나타나는 것들입니다. 그들은 어쨋거나 죽음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겪음으로서 그 자신의 이야기의 완결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앞서 이야기 했듯이, 이 책은 시작에서 끝까지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도달한 이야기가 갑작스레 방향을 꺾어 시작을 되돌아오기도 하고, 하나의 이야기만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말한 신문의 속성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각각의 이야기가 바로 옆에 있는 이야기와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에 있습니다. 그가 지닌 이야기들은 전혀 연관도 없이 보이지만, 결말에 이르러서 그것이 전혀 연관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왜 문학가를 선택했냐는 질문에는 결국 모든 소설가가 추구하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이지 않을까 합니다. 소설가는 자기 자신만이 쓸 수 있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자기가 어떤 인생을 살았느냐 마저도 그의 독립적인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에서 벗어난 것이, 퍼거슨이 시도한 방식, 즉,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 그리고 자기가 경험할 수 있던 것들에 대해서 쓴다면, 이야기는 무한하게 늘어납니다. 써야할 이야기가 무한대라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조금이나마 푸는 것, 자신만이 지닌 무언가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해서 세상에 내놓는 것이 문학을 다루는 사람들이 지향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퍼거슨은 이를 단지 자신의 삶을 포함한 네가지 방식만을 표현했을 뿐입니다. 사실 그가 쓸 수 있었던 이야기들은 훨씬 더 많습니다. 마르지 않는 샘물을 퍼내며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 가능성을 보이고 소년이 소년으로서 그릴수 있는 그 감정의 태동들을 나타낸 것의 결과가 4 3 2 1인 것 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바라본다면, 이 책은 너무나도 짧습니다.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전기의 성격을 지닌 자서전, 그것을 고작 4개의 이야기로 표현하는 것은 너무나도 짧습니다. 그는 현실을 쓰도록 노력했고, 그렇게 서로가 차이를 지니는 개별적인 존재들을 그려냈습니다. 한명의 인간의 다른 삶들은 차이를 지니고 있고, 그 다른 삶들을 살아가는 자아들은 또 차이를 보입니다. 그렇게 하나의 자아에 대해서 하나의 우주가 생겼습니다. 하나의 자아가 사라지면 그 우주는 폐기되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어가고, 살아남은 자아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우주를 살리기 위해 살아갑니다.
평행세계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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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상상이라고, 퍼거슨은 속으로 생각했다. 자신은 그대로인 채 다른 일들이 달라질 수도 있는 상상. 다른 나무가 있는 다른 집에서 사는 같은 소년. 다른 부모님과 지내는 같은 소년. 같은 부모님이지만 하는 일은 지금과 다른 부모님과 함께 지내는 소년. 예를 들어 아버지가 여전히 큰 동물 사냥꾼이고 그들 모두 아프리카에 살았으면 어땠을까? 어머니가 유명 영화배우이고 그들 모두 할라우드에 살았다면 어땠을까? 남자 형제나 여자 형제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치 종조부가 죽지 않고, 그의 이름이 아치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같은 나무에서 떨어졌는다 다리가 한쪽이 아니라 양쪽 다 부러졌으면 어땠을까? 그가 죽었다면? 맞다,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었고, 일이 한 가지 방식으로 일어났다고 해서 다른 방식으로 일어날 수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모든 게 다를수 있었다. 세상은 똑같은 세상이지만, 만일 나무에서 떨어져 부러진 게 아니라 죽어 버렸다면, 다른 세상에서 펼쳐지는 게 아니라 살아갈 세상 자체가 없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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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문단에서 퍼거슨이 한 것처럼, 우리는 현재의 나 자신과는 판이하게 다른 나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존재한다 라고 부를수는 있을까요? 가능 세계와 평행우주라는 개념은 엄밀하게 따지자면 차이를 지니고 있지만, 우린 여기에서는 내가 나로서 존재하지 않는 내가 존재하는 세계로 정의내리고 이둘의 개념을 동일한 것으로 보도록 하죠. 여기에서는 대머리 여가수를 위해 읽고 있긴 한데, 어쨋거나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에서 그냥 몇개 때다 글을 썼다보니, 실존주의적 색채가 짙게 드러날수 있다는점 양해부탁드립니다.
우선, 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 대해서 이야기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전적 정의로서 가능성이란 어떤 일이나 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 어떤 정도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요, 그렇다면 가능성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이와는 반대되는것, 즉 어떤 일이나 사건이 아예 일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거 같습니다. 흔히 여기에서 절대성을 생각하기 쉬운데, 이것처럼 아예 가능성을 배재하고 이것이 절대적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절대성 말고는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절대성의 영역에 들어가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실 이를 깊게 파고들면 무언가 애매해집니다. 우리가 흔히 이건 절대적이지 하는 것들도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데카르트 처럼 그래도 나는 무조건 절대적이지, 의심할 여지 없이 존재하지 않나? 하는 의문도 사실 주장과 반박이 있을뿐 1 + 1 = 2 처럼 명증한 사실로서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와서 너는 존재해라고 말한다고 하면 내가 존재하는 것인가요? 신이 있더라도 그가 나에게 넌 존재해 라고 말한다면 나의 존재에 관한 모든 물음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존재를 보증해줄 수 있는 존재가 있어도 없어도 나의 존재에 대한 확증을 얻긴 어렵습니다. 만약 그로 인해서 내 존재가 보장이 된다면 나는 결국 그 언명에 얽매여 존재하는 존재에게 이끌어져 존재하는 것으로 밖에 비춰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시로 든 수학은 절대적인 것인가요? 또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자연과학은 자연속에서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수학은 사실 그렇진 않습니다. 수학은 스스로가 절대적이라거나 자연에서 절대적 진리가 있던 말던 크게 신경쓰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정의에 따라서 그것들을 정의하고 그런 정의에 따라서 우리는 동일한 것을 사고하게 되는 쪽에 가깝습니다. 수학은 절대성의 영역에 있다기보다 보편성의 영역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네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기하인 유클리드 기하학은 가정된 공준과 공리들에서 출발하였고, 그것에 반대해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기하학의 공준과 공리들은 증명을 이용해서 사용되었을 뿐이지, 그 자신이 증명되지는 않습니다. 그냥 아 우리는 선은 이렇다 라고 말한 것처럼 그저 가정하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각이란 이런 거고, 변이란 이런거야, 각의 범위는 여기부터 여기까지이고, 자 이제 변3개와 각 3개를 써서 삼각형이라는 도형을 상상해봐 라고 했을때 누구나 그것이 가능한 이유도 그것이 결국 하나의 합의에 의거하였기 때문입니다. 수학은 각자의 영역에서 자기만의 논리구조를 지니고 있을뿐이지 절대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너가 아까 말한 1+1=2라는 건 어떻기 설명할껀데? 라고 물으신다면, 이제 그것을 증명하는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갑니다. 물론 페아노 공리계를 파고들고, 제가 또 읽고 있는 화이트헤트/버트런드 러셀의 수학원리서도 이를 증명하는 과정이 나와있기는 하지만 괴델이 불완전성 원리를 들고와서 이를 깨부셔버렸습니다. 그래서 뭐, 수학이 엄밀하게 절대적이다 라는 주장에는 저 개인적으로는 회의적입니다. 불완전성 원리 말고도 사실 페아노 공리 자체가 자연수에 대한 정의를 애매하게 내리고 시작하는 점에서 엄밀성이라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능성이 없는게 뭔데? 라도 물으면 저는 과거와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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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이 우리를 자기 자신으로 바꾼 것과 같이 죽음은 우리를 우리 자신과 합체 시킨다.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 우리는 ‘존재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타자의 판단 앞에 방어할 수단도 없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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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도 말했었고, 카뮈도 살짝 변형해서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판단하기 위해서 그 사람의 죽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 것과 같이, 사르트르도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먼저 과거에 대해서는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로서 사라트르는 과거란 결국 대자가 즉자가 되어버린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가능성이 결여된 즉자로 보았습니다. 사르트르의 대자란 쉽게 말해 의식이 깃들어 있는 존재, 간단하게 인간존재라고 생각하시면 되고, 즉자란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 그냥 돌멩이 같은 대상물입니다. 시간이 흘러버려 대자 자신이 아닌 과거의 대자는 즉자로 비춰지고, 그로 인해 대자는 과거의 자신에 판단작용을 할 수 있게됩니다. 과거란 이미 흘러갔기에 변화되지 않고 가만히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과거의 자신에게는 지금 내가 현재 지니고 있는 의식이 존재하지 않기에 과거를 의식이 결여된 존재로서 파악하는 것도 가능하죠. 마찬가지로 죽음도 동일합니다. 사르트르가 말한것과 같이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우리는 더이상 시간선을 경계로 즉자와 대자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즉자로사만 비춰지게되고, 변화없이 타인의 시선에서 나를 방어할수 없게 되었습니다. 최소한 살아있는 동안 나는 타자에게 대자로 비춰지며 시선에 맞대응하기라도 했으니까요.
그래서 이것을 반대로 적용해 우리는 가능성이 깃들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지금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가 죽지 않았기에 우리는 아직 우리에 대해 온전하게 파악하지 못했고, 나라는 인간의 가능성은 남아있게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는 것은 아닙니다. 미래는 가능성으로 뒤범벅된 세계입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세계의 외부에 존재하며 현실에 다가오지 않습기다. 미래는 현전이 가능한 것이지, 세계 그 자체에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것은 현실이고 미래는 언젠가 다가올 것으로서 세계의 외부에 존재합니다. 그것이 세계에 포함되어 있지 않기에 우리는 일정수준 미래를 조정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런 미래적인 가능성들을 우리는 예방이라는 이름 아래에 하나씩 없애나갑니다. 사르트르는 추락을 예시로 들며, 우리가 벼랑에 서서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우리가 떨어질 수있는 가능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직접 벼랑으로 뛰어내릴까봐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있던 행동을 함으로서, 그리고 하지 않음으로써 그 미래를 하나씩 줄여나갑니다. 내가 뛰어다니다가 넘어질 것 같아서 돌멩이를 미리 치워놓는것, 요리를 하다 칼애 베일수 있어서 손잡이 부분을 밖으로 빼내어 놓는것 이 모든 예방적 행동으로 우리는 다가올수 있는 미래를 하나씩 지워나갑니다. 이것이 끝없이 반복된다면 우연적인 미래의 다가옴은 필연으로 바뀌게 됩니다. 물론 우리는 예방적 행동을 무한대로 하지 못하기에 가능성을 잘라내 절대적 필연을 맞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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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길가의 조약돌을 ‘조심할 것이다’. 그리고 오솔길 가장자리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질 것이다. 나는 온 힘을 다래 위협적인 상황을 물리치려고 하는 나를 실감한다. 그리고 나에게서 세계의 위협들을 멀리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몇 가지 미래의 행위를 내 앞에서 계획한다. 그런 행위는 ‘나의’ 가능성이다. ~ 오직 나만이 그들의 가능이 존재하지 않는 것의 끊임없는 원천이다. 나는 그들에게 얽매여 있다. ‘나의’ 가능을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 나는 그 밖의 다른 가능을 내세우고, 그것을 무화시킨다. ~ 그러므로 만일 내가 불안과 현기증을 피하고자 한다면, 내가, 내가 당면한 상황을 거부하게 하는 동기 (생존본능, 선행하는 두려움 등)를 나의 선행하는 행위의 결정요인으로 여길 수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어떤 주어진 질량의 한 정점에서의 현존이, 다른 질량에 의해 그려지는 궤도의 결정요인이라는 뜻에서의 결정요인으로 여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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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이 존재와 무에서 무를 이해하는데 가장 도움이 되는 부분이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다른 여러 무화됨이 존재하지만, 나라는 존재가 무화한다는것, 그것은 내가 가능성들을 예방이라는 이름을 붙인 행위를 함으로서 하나씩 지워나가기 때문이다라는 것으로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미래의 행동이 가능성의 영역으로 들어가 펼쳐져 결국에는 무화되기 나는 끝없는 가능성을 지니는 존재임과 동시에 그 가능성들을 무로 만들어버리는 무의 존재입니다. 때문에 내가 인간으로서 마주하는 불안과 두려움을 직면해야 합니다. 내가 그것을 직면하지 않는다면 나는 결국 그 두려움과 불안의 상황에 빠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벼랑에 스스로 떨어지는 것이 두려워 그것에 대한 예방, 벼랑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다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언젠가 벼랑에 설것이고, 이는 내가 직접 몸을 던질수도 있는 가능성으로 이어집니다. 내가 최소한 예방적 행위를 할수 있는 것은 나의 그것에 대한 인지 이후이며, 그것에 대해 모른다면 예방이라는 행위를 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것의 대면 이후에 다른 가능성들은 무화되고 이제는 하나 또는 소수가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개인은 이제 그것이 필연적이라는 듯 당면하고 받아들어야 합니다. 무한한 평행세계보다는 유한한 선택적 세계가 저한테는 더 마음에 듭니다.
죽음에서의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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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 초기 18개월 동안 로즈는 세 번 임신했다. 하지만 세 번 모두 유산했고, 세 번 모두 임신 3개월 단계에서 그렇게 되었고, 그래서 1946년 4월, 결혼 2주년을 맞이하기까지도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의사들도 그녀의 몸에 이상은 전혀 없다고, 건강 상태도 좋고 언젠가는 열 달을 다 채우고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거라고 했지만, 유산에 따른 상실은 그녕를 짓눌렀고, 그렇게 태어나지 못한 아이가 이어질수록, 하나의 실패가 다른 실패로 이어질수록, 여성성 자체가 자신에게서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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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 2, 1. 숫자가 줄어드는 것처럼, 퍼거슨의 가능성으로서의 현실도 줄어 들어갑니다. 애초에 책 제목이 그렇기도 하고, 또 그가 태어나기 이전에 그의 형제자매가 될 수 있었던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가 짤막하게 나오면서 4 3 2 1에서는 죽음이라는 요소 또한 중요도를 부여받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한명 한명의 퍼거슨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볼때마다 역설적으로 퍼거슨의 존재를 더욱더 크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한명의 퍼거슨이 죽는다면 우리는 먼저 죽음을 맞이한 퍼거슨을 생각하며, 그가 만약 죽지 않았다면 이라는 생각을 통해 그가 뿜어낼 수 있었던 가능성들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그가 만약 자신의 삶의 목표를 모두 다 이루고 죽었다거나, 또는 폴 오스터가 다른 가능성의 퍼거슨들에 대해서 글을 쓰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저 죽은 퍼거슨을 길에서 스쳐지나가 눈길 한번을 주고 짧은 시간에 바로 지워버리는 그런 이방인 같은 존재로 보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았기 때문에 죽어버린 퍼거슨은 살아서 미래를 향해가고 있는 퍼거슨들과 대조되며 그 존재를 점점 더 크게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만일 그가 죽지 않았더라면 어떤 모습의 그를 보여줬을까? 퍼거슨의 다양한 삶은 당시 미국의 수많은 사건들과 맞물리며 변화해나갑니다. 죽은 퍼거슨과 살아 숨쉬며 자신의 인생에서 변양을 만나가는 퍼거슨의 모습이 우리의 뇌리에 동시에 박히며 우리는 죽은 퍼거슨의 가능성 뿐만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은 퍼거슨, 즉 이 책에서 등장한 4명의 퍼거슨 말고도 다른 퍼거슨들, 어린 나이에 다른 가정으로 입양된 퍼거슨, 운동선수가 된 퍼거슨, 아버지 사업의 위기로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간 퍼거슨 등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의 죽음은 무한한 삶의 궤적을 그리며 날아다니는 가능성들을 엿보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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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안에 여러 자아가, 심지어 많은 자아가 있었다. 강인한 자아와 연약한 자아, 생각이 깊은 자아와 충동적인 자아, 너그러운 자아와 이기적인 자아 등, 자아가 너무 많아서 그는 그 모든 자아를 합친 것만큼 큰 사람이거나, 그중 어떤 것도 아닌 작은 사람일 수도 있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사실일 테고, 그건 곧 사람들 한 명 한 명은 모든 사람들이면서 동시에 아무도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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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의 죽음은 결국 순환으로 이어집니다.
4 3 2 1이 그저 퍼거슨의 여러 삶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면 이렇게까지 좋은 책이 되지는 못했을 겁니다. 이 책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위치에 서게된 데에는 퍼거슨이 결국 작가가 되어 자신이 걸을 수 있었던 길들을 다시 쓰는 것에 있습니다. 즉,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이던 개별 독립적인 퍼거슨들을 하나로 묶어내고, 그리고 이야기 자체에서 완결성을 내어버리지 않는 것으로 인해서 이야기의 위대함이 등장합니다. 책의 결말, 퍼거슨은 자신이 가능했던 과거에 대해서 쓰기로 결심하면서 끝이 납니다. 즉, 이는 퍼거슨이 미래에 쓴 글임이 분명하고, 우리는 그렇다면 책의 처음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자신이 퍼거슨에 대해서 쓰겠다고 밝히는 순간 책은 완결성을 포기하고 겹겹이 쌓이는 것을 선택합니다. 미래에 그가 글을 쓴것이 이 책이고, 우리는 미래를 따라가다보면 필연적으로 이 책의 처음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가 이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그러나 이 책을 읽는다면 두가지 선택지가 생기게 됩니다. 그가 성장했다고 가정해 앞으로 나아가 같은 선택을 마주할것이냐, 또는 무한히 반복되는 우로보로스의 길을 택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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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다음 마지막 장면, 이제 열일곱 살이 된 그레거는 혼자 언덕 위에 앉아 머리 위로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이 세상이 실제 현실인지 아니면 그저 자신의 정신을 투영한 뭔가에 불과한 건지 궁금해한다. 그제 실제라면, 어떻게 그의 정신 안에 이 세상을 담는 일이 가능한 걸까?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그런 다음 언덕을 내려오던 그는, 배가 아픈 걸 느끼며 점심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질지 나빠질지 생각한다. 오후 1시이다. 북쪽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전화선 위에 앉아 있던 제비는 사라지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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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이제 살아 움직이지 않고 내가 참여했던 하나의 세계가 끝장나는것, 이것은 퍼거슨의 행동으로 깨어지고 또다른 이야기의, 다른 감상의 씨앗을 잉태하게됩니다.
할아버지 역설
4 3 2 1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할아버지 역설에 관련된 것입니다. 과학철학 또는 물리학에서 등장하는 사고실험 또는 역설 중 하나인데, 시간여행에 대한 것입니다. 할아버지 역설이란 쉽게 말해, 현재의 자신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할아버지를 살해하면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될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나를 낳은 아버지를 낳은 존재를 죽인다는 것은 원론적으로 바라보았을때 나라는 사람 그 자체를 존재하지 못하기에, 만일 타임머신이 존재한다면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조금 더 거시적인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과거로 여행해서 내가 한 행동이 원인이 되어, 가령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갔다는 정보 그 자체 하나만으로 - 이 정보가 무의미하다고 가정하더라도 내가 과거로 가서 행한 그 어떠한 행동이라도 - 그것이 과거의 입장에서 미래, 즉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할아버지 역설에 대한 해답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애초에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란, 과거는 현재나 미래가 간섭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경우에도 변경될 수 없으며,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 운명론적인 세계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만약 시간여행이 발생했다면, 그것으로 인해 과거가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에 시간여행자가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과거는 새로운 정보을 얻음으로서 이미 축적되고 있던 엔트로피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 여행을 했다는 행위 그 자체가 이미 과거로서 기록되었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쉽게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할거 같습니다. 시간 여행자에게 있어서, 이미 전제가 시간여행을 해서 자신의 할아버지를 살해했을 경우이기 때문에, 시간여행자는 사건 초기에 존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 답변에 따르면 자신의 존재는 가정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설령 자신이 할아버지를 죽인다고 하더라도 그 자신의 존재는 변경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알던 할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아니던가, 아니면 또다른 역설이 말하듯이, 자신은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을 할아버지라고 믿고 그를 살해한채 자기 자신이 자신의 할아버지가 될수도 있는 것입니다. 고로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할 것이 기정사실화가 된다면, 이미 나라는 개인이 시간여행을 해 과거에 도달했다는 것이 과거 그 자체에 기록되어서, 내가 할아버지를 죽이더라도, 나라는 사람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이 해답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너는 어떠한 방식을 사용하더라도 네 할아버지를 죽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평행우주입니다. 내가 나의 할아버지를 살해한 경우, 내 할아버지가 살해된 또하나의 세계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나의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낳아 내가 태어난 세계와, 내가 과거로 돌아가 할아버지를 살해한 세계는 하나의 통일된 세계가 아니라 분리된, 독립된 두개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코펜하겐 해석에서도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물리학에서는 파동함수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양자역학이 고전역학과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면 아마 입자의 운동상태에 관한 것일 겁니다. 고전역학은 어떤 입자의 움직임을 안다면 다음 순간의 입자의 상태를 알 수 있다고 말하는 반면 양자역학은 관측 이전 입자의 다음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양자역학의 성질 속에서 파동함수가 등장합니다. 파동함수란, 쉽게 말해서 입자가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위치들에 대한 함수입니다. 원자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보어가 도입한 보어 모형이 지니는 문제점을 해결하고 보완하기 위해서 나오게 된 확률 구름 모형이 파동함수의 한 종류로도 볼수 있습니다. 이 모형에서 나타나는 구름처럼 뿌연 부분이 전자가 존재가능한 위치를 표현한 것인데, 이를 시각화한것이 아니라 수학적으로 표기한다면 그것이 파동함수 입니다. 입자는 양자역학에 와서 존재 가능한 영역의 범위에 따라 가능적으로 존재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 실험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상자 안의 고양이가 당장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것처럼, 관측 이전에 우리는 입자가 어디 있는지 확실하게 알지 못하고, 단지 그것을 확률로서 알고 있고 그것을 확률로서 기술한 것이 파동함수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파동함수가 붕괴되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관측을 했을 경우, 즉, 고양이의 경우 박스를 열어 그 고양이가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확인하는 경우입니다. 붕괴란, 결국 확률집합이 확실성을 지향함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더 풀어 설명하자면, 파동함수의 붕괴란, 우리가 관측을 함으로서 얻게되는 하나의 결과, 가령 고양이가 살아있다거나 입자가 x라는 위치에 존재한다와 같은 결과들이 가능성들을 붕괴시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양이가 살아있다라는 결과를 얻게된다면, 관축이전까지 고양이가 죽어있다라는 결과는 관측을 하면서 붕괴되고 확률이 0이라는 절대성으로 변하게 됩니다. 가능성의 가짓수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관측을 통해 하나의 결과를 얻게된다면 관측 이전 무수히 많은 가능성들을 파괴하고 하나만을 지향하기에, 이를 파동함수의 붕괴라고 말합니다. 파동함수의 붕괴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의 결괏값을 얻게 됩니다. 고양이의 경우에는 생사의 여부이고, 입자의 경우 위치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파동함수의 붕괴와 존재를 이용해 해석을 시도한 과학자가 있습니다. 휴 에버렛은 오로지 유일한 파동함수가 존재하며 이는 슈뢰딩거 방적식을 따른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다중세계 해석의 단초입니다). 예시를 들어, 고전역학이 지구와 화성의 각각의 궤도에 파동함수가 (고전역학은 파동함수로 물체의 움직임을 기술하지 않지만 만일 가정한다면)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면, 양자역학의 경우에는 지구와 화성을 포함한 전체로서의 하나의 파동함수가 존재한다고 파악합니다. - 고전역학은 개별적인 입자에 대해 각각의 파동함수를 부여하고 에버렛의 해석에 따르면 모든 입자는 하나의 파동함수를 따르는 것입니다 - 지구와 화성의 궤도가 겹치는 가능성이 있는 것과 같이 입자들은 훨씬 더 많이 서로가 얽히는 것이 가능합니다. 입자들의 얽힘은 스핀 개념까지 나올수 있어서 자세한건 넘어가도록 하고, 어느 입자가 왼쪽/오른쪽으로 돈다면 다른 입자는 오른쪽/왼쪽으로 돌아야하는, 그런겁니다. 그래서 한 입자의 스핀 방향을 안다면 다른 입자의 스핀 방향도 알게 됩니다. 에버렛을 우리가 그 입자가 어느 쪽으로 돌고 있는지 관측을 하더라도 파동함수가 무조건적으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얽혀 다른 두가지의 결과를 말한다고 합니다. 즉 고양이가 살아있는 세계와 고양이가 죽어있는 세계 모두를 파동함수가 지향한다는 것입니다. 입자의 경우에는 우리가 그것을 관측해서 x라는 위치에 있다는 것으로 확인한다면, 그 즉시 입자가 y, z 등 여러 가능한 위치에 존재하는 평행우주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에버렛이 말하는 파동함수란, 결국에는 모든 평행 우주에 걸처 단 하나만 존재하기에, 우리가 아무리 관측을 하더라도 그것은 붕괴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결국에 이 해석에서는 시간여행자가 시간여행을 해서 과거로 돌아가 할아버지를 죽이더라도 결국에 또다른 과거로 분화되어 있기에 문제는 해결됩니다. 즉, 내가 과거로 돌아간다면, 내 시간대의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평행세계의 할아버지를 만나는 것이고, 이를 통해 나는 할아버지를 죽이더라도, 내 시간대의 할아버지에게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 말고 꽤나 유명한 해석이 하나 존재합니다. 가능성이 중첩되어서 존재한다는 것. 이 할아버지 해석의 답변은 이러합니다. 시간여행자가 할아버지를 죽인다고 하더라도, 결국 시간여행자의 존재와 할아버지의 존재는 완전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불확정성 원리에 대한 해석을 확장해 적용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해석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시간여행자가 할아버지를 살해한다면, 할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 시간여행자는 결국 존재하지 않게 되고, 그런 시간여행자가 존재하지 않기 위해 할아버지를 살해한다는 사건 자체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할아버지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존재하지 않기에 할아버지는 존재하게 되고, 할아버지의 존재로 인해서 시간여행자도 존재하게 됩니다. 즉, 시간여행자가 자신의 할아버지를 살해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할아버지가 살아있는 결과로 되돌아오는 결과. 즉, 시간여행자는 누군가를 살해하지만 정작 자신도 소멸과 존재를 반복해나가는, 가능성의 중첩의 상태로서 존재합니다. 제가 할아버지 역설을 떠올린것도, 이 해석에 대한 것이 책을 읽으며 동시에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시간여행자와 할아버지가 삶과 죽음이 중첩되어있는 상태에 있는 것처럼, 이야기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퍼거슨은 더 많은 삶과 죽음의 중첩에 놓이게 됩니다. 퍼거슨이라는 인물은 여럿이 아닙니다. 그는 오직 하나이지만 여러개의 인생을 동시다발적으로 살아가며, 그렇기에 그 인생의 줄기가 하나씩 끊어질때마다, 그리고 끊어지지 않은 줄기가 계속 앞으로 향해 나아감에 따라 삶과 죽음은 그를 뒤따라갑니다. 동일한 시간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어느 퍼거슨은 자유롭게 글을 쓰며 애인을 만나고, 어느 퍼거슨은 교통사고를 당해 죽습니다.
문학을 읽는다는것
저에게 4 3 2 1은 문학을 왜, 그리고 어째서 읽는가에 대한 답을 어느정도 내려준 책이기도 합니다. 물론 좋은 추억이 담겨 있기도 하고 책 그 자체가 굉장히 짜임새 있고 완성도가 높은, 제 기준에서는 좋은 책인 것도 맞지만, 제가 이 책을 왜 좋아하냐고 물었을을때 바로 답이 나오게 만드는 요소는 이런것들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왜 문학을 읽는지, 그리고 왜 문학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의 편린이나마 제가 스스로 정의내리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4 3 2 1 이전에 좋아했던 책들은 굉장히 많습니다. 지금 당장 떠올려보라고 한다면 스토너, 신곡, 레 미제라블, 고도를 기다리며, 마틴 에덴, 듄, 봄눈, 악령, 백치, 돈키호테, 대머리 여가수 등등 말해보자면 더 많이 나올 수 있을 정도로 전 좋아하는 책이 많은 편입니다. 물론 이러한 책들이 저에게 왜 책을 읽는지에 대한 답을 아예 내려주지 않은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답이 여전히 불확실하고 모호하게 다가오기만 했던것이 마침내 4 3 2 1에 와서는 하나의 어떠한 체계로서 완성되었다는 느낌이 들어서 입니다.
그런 책들과 4 3 2 1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제 나름대로의 생각은 형식과 의도에서의 차이가 있기 않을까 합니다. 보통 문학에서 무엇이 중요하냐라고 물을때 (의미와 같이 내재적인것을 제외하고) 답을 크게 서사와 문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서사가 강력한 책들, 신곡이나 레 미제라블 등의 책들이 있고 문장이 강력한 책들, 고도를 기다리며나 봄눈과 같은 책이 있습니다. 어느 것이 훨씬 더 중요성을 지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고, 이어가자면, 이런 서사와 문장의 구분은 좋은 책이 무엇이냐 하는 기준에서 저에게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앞서 말한 책들은 저에게 있어 서사와 문장에서의 우열이 있을 뿐이지 둘다 뛰어나다고 느끼게 했었습니다. 제가 좋지 못한 책들이라고 말하는 대다수의 부류들은 둘 중 하나가 극심하게 부족하거나 가끔 씩은 둘다 없는 경우까지 이어지죠. 이렇게 책마다 존재하는 경향성으로서의 서사와 문장은 어떤 경우에 합치되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게 됩니다. 그 의미들은 쌓이고 쌓여서 마침내 제가 4 3 2 1에서 그랬던 것처럼 하나의 갈무리된 결과로서 자신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을 제기할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네가 4 3 2 1을 읽지 않고 다른 책을 읽었더라면 충분히 그 자리에 다른 책이 대체되는 것이 가능하지않느냐 면서요. 하지만 이는 앞에서 말한 형식과 의도에 따라 다른 책들과 비교되는 4 3 2 1의 특징에서 답을 찾을 수 있겠네요. 굳이 하나의 사조적인 시선으로 4 3 2 1을 구분하자면 4 3 2 1은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 사이 그 사이, 애매한 스탠스를 취하고 있지 않을가 합니다. 이런 사조적인 애매함과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형식이 보이는 방식에 의해서 4 3 2 1은 제가 지닌 질문에 대해 답을 내릴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모더니즘은 이전까지의 전통적인 문학성을 배제하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새로히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포스트 모더니즘은 고착화되가는 하나의 전통문학의 갈래로서 모더니즘을 비판하며 그것을 파괴하고 더이상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새로운 길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나타난 이러한 새로운 문학의 길에 의해서 작가는 그렇지 않지만 독자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문학을 보는 방식은 다른 글들에서도 말했지만 전통적인 방식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와중에 작가는 의도적으로 정보를 숨기기도 하고 서사 구조를 파괴하기도 하며 비틀고 단어의 재생산을 유도하며 마치 독자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 듯한 경험을 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방황하며 불투명한 무경계 속에 놓여있는 독자는 길을 잃고 그러한 것들은 문학이 아니다라며 비판을 할수도 있습니다.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게, 형식의 끝까지 나아가면 결국 이들이 하는 이야기는 체계화된 조현병으로 보이기도 하고 완벽한 문법체계가 만들어지지 않은 아이의 일기를 보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제가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을 좋아하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그런 비판자들의 이 사조들에 애한 비문학성, 즉 작가가 자신의 생각을 강력하게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입니다. 작가는 자신의 사고를 강요할수 있지만 그것은 그 자신이 만들어놓은 서사와 문장들의 미로에 갇혀 독자에게 온전하게 전해지지 않으며, 결국 해석의 주체는 작가주의에서 말하는 작가보다는 그것을 읽는 사람, 즉 개인에 맡겨지게 되었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우리는 문학을 왜 읽는가? 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에는 아무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 그저 본능만을 따르는 행위 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네가 말하는 문학에는 그 어떠한 효용도 존재하지 않고 그저 유흥을 위한 행위이다라고. 다른 취미도 그러하지만 독서에게는 그런 잣대가 더욱 심하게 드리우는거 같습니다. 너는 독서를 왜 해? 라는 질문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답변들은 타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고, 그들이 생각하는 바에 심취해 깊은 수준의 공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 인것 같습니다. 그 간단함으로부터 시작해 제가 생각하는 문학을 읽는 이유가 시작합니다. 타인들의 경험을 기반으로 나 자신이 지니고 있는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답변,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저는 문학을 읽어나가며 감상하고 흘러가버릴 감정들을 붙잡에 오랫도록 내면에 가두어 놓습니다. 책을 읽음으로서 그것이 비록 작가라는 개인에게서 기인한 것이지만, 나의 인식적인 차원에서 벗어나 활자화된 타인을 읽음으로서 그들을 향해 한발자국 다가가는 행위, 그것을 4 3 2 1에서는 퍼거슨이라는 소년을 필두로 4가지 다른 삶의 궤적을 그려 표현했습니다. 나의 선택이 나의 삶을, 나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어나갈 것인지, 그 선택의 결과에 따라서 타인에게 그것이 어떤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뒤바꾸는지에 대해서요. 그가 사용한 퍼거슨들의 삶의 갈래가 이전에 읽었던 다른 책들과의 차별점을 만들어내가며 그로인해 저는 하나의 답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더 좋은 취미란 저에게 존재하지 않고 (그 어떤 취미라는 행위도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방향성을 세울수 있기 때문에) 단지 지향된 취미라는 것이 있습니다. 오롯이 자신만을 관조하는 취미란 존재하지 않기에.
줄거리
하나의 동일한 기원, 역사로부터 시작해 무수히 많은 선택에 기로에 앞서 달라지는 한명의 인물, 무수한 자아들의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하나의 고정된 과거로부터 시작됩니다. 이커도어 퍼거슨, 즉 이제 막 미국으로 도착한 그의 할아버지가 어떻게 퍼거슨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부터 출발해, 형제들과 함께 가게를 운영하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오고 마침네 퍼거슨이 등장합니다. 그의 부모님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퍼거슨은 죽습니다. 그의 아버지의 가게는 강도에 털리기도 하고 화재가 나기도 하며, 그로인해 아버지가 죽기도 합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가게를 운영하기도 하며 형제들에게 사기 당하기도 합니다. 어머니는 죽은 아버지를 잊고 새로운 사랑을 만나기도 하며 아버지와 이혼하기도 합니다. 퍼거슨은 글을 쓰기도 하며 야구선수를 꿈꾸기도 하고 작가를 꿈꾸기도 합니다. 사촌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며 사촌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도 합니다. 퍼거슨은 대학을 가기도 하고 가지 않기도 합니다. 교통사고를 당해 손가락 두개를 잃기도 하고 범죄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퍼거슨은 자신의 작품을 내고 교통사고를 당해 죽고 또 책을 집필합니다. 한명의 인간과 4개의 다른 이야기. 그것은 따로 떨어져 아무 관계 없는 듯 보이지만 끝에서는 하나를 지향합니다.
상당히 오랜만에 다시 또 돌아왔습니다. 오늘은 제가 말로만 계속해서 쓴다고 쓴다고 했었던 책인 폴 오스터의 4 3 2 1을 가지고 왔습니다. 제가 하는 수대연 마리아주가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이다 보니깐 시기가 여러모로 적절한거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폴 오스터라는 작가를 4 3 2 1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4 3 2 1에 대해서는 알지는 못했었습니다. 폴 오스터 꽤나 유명한 작가라고 생각하는데, 앞서 말한 뉴욕 3부작도 그렇고 달의 궁전, 선셋 파크 등 읽지는 않았지만 들어는 봤었죠. 그래서 왜 4 3 2 1이냐? 리고 말한다면, 일단 저는 단편이나 중장편 보다는 장편을 선호하는 편이기도 하고, 슬슬 SF관련 된 책들도 건들여봐야지 하는 마음이 크긴 했습니다. 그리고, 이 다음에 리뷰로 올릴 대머리 여가수를 위해서 배꼽이 배보다 커진거 같진 하지만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를 읽으면서 머리를 깨고 있는 상황이여서, 하루라도 빨리 4 3 2 1을 해치우고 싶은 마음에 지금에서야 올리게 되었습니다. 4 3 2 1은 미리 말씀드리겠지만, 일반적 문학이 지니는 형식을 깨부수려 노력한 책입니다. 분량도 그리 짧지만은 않아서 아주 쉽다거나 이야기의 구성 자체가 편의적이다라고는 할수 없었던 책입니다.
4 3 2 1은 최근에 와서 번역된 책입니다. 알라딘이었나 아마 펀딩 페이지가 나오고 나서 저도 소식을 들어 알게된 책이었는데, 그렇게 그냥 사게 되었습니다. 4 3 2 1 이라는 제목에서 호기심이 들기도 했었고, 아마 책 소개문에서 애초에 왜 4 3 2 1로 제목이 정해졌는지 이야기하는 바람에 흥미가 끌려버렸습니다. 제가 4 3 2 1을 사려고 마음 먹기전, 이전부터 읽고 싶었지만 품절이니 절판이니 뭐하는 문제들로 눈독만 들이고 있었던 책인 2666이 합본으로 새로 출판되었었습니다. 4 3 2 1을 살 때 하나만 사면 무안하고 또 숫자 깔맞춤을 목적으로 2666까지 같이 사버렸습니다. 4 3 2 1엔 좋은 추억도 하나 있는데요, 지하철 4호선을 타며 책을 읽고 있을때였습니다. 그때 서서 책을 피며 읽고 있었는데 어느 할아버지께서 칭찬을 하시며 지금 읽고 있는 책 나도 읽었는데 정말 위대한 책이다라고 말씀하셔서 짧긴하지만 이야기 나눴던 기억이 있네요. 다른 어떤 책에 대한 경험보다도 기억에 남을만한 경험이 담겨 있는 책이다보니깐, 아마 좋아하는 책에는 평생 있지 않을까 감히 예상해보네요,
인생은 저멀리 어딘가 레코드 판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란걸
첫댓글 와 드디어~!! 새로 번역된 책이라니 ㅎㅎ 뉴욕 3부작 마리아주 끝나고 빌려주세요~~~~ 글은 N회독 해야 할 것 같네욧 할아부지의 역설 이렇게 읽으니까 어렵네............................
빠르시군요 ㅋㅋㅋㅋㅋㅋ
꼭 빌려드리도록 할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