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연회로 분열되는 감리교회와 제11대 윤창덕 감독
제10대 변홍규 감독은 임기가 끝나기 전에 1970년 3월에 은퇴하고 말았다. 이는 제11회 총회 개최하는 문제로 계파 간의 갈등을 야기했다. 변홍규 감독은 1966년 10월부터 임기가 시작되었으니 1970년 10일이 임기 완료 시점이다. 그런데 장정에는 총회를 4, 5월에 개최한다고 되어 있으므로 장정대로 총회를 열게 되면 감독과 총무 및 이사들의 임기가 5개월이 단축되며 10월에 개최한다면 6개월이 연장되기 때문에 규칙을 개정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제11회 총회 개최 일 결정은 서로의 이해관계로 인해 중요한 사안이 되었다. 이를 결정하기 위하여 1970년 2월 10일에 특별총회가 개최되었다. 6시간의 격론 끝에 성화파와 정동파가 합세하여 제11회 총회는 10월에 개최하기로 결의했다. 이 결정으로 중부연회장 정등운 목사가 감독 서리로 선임되었다. 그의 감독대행으로 제11회 총회가 10월 20일부터 25일까지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되었다.
총회 벽두부터 연회장 제도를 폐지하고 연회 간사를 두는 개정안을 통과시켜 장정을 개정하였다. 이는 연회장의 권한을 다시 감독에게 집중시키겠다는 발상이었다. 이어 총회는 윤창덕 목사를 제11대 감독으로 선출하였는데 계파 간의 파벌이 치열한 감독 선거전에서 윤창덕 목사는 총 투표수 132표 중 100표를 얻어 1차에 당선이 되었다. 전임 변홍규 감독을 선출할 때 111회 선거를 치른 예로 비추어 본다면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각 국의 총무 4석도 성화파 2석, 호헌파 2석을 사이좋게 나누어 가졌고 모두 다득점으로 총무에 선출되었으니 분명 사전에 두 계파 간의 협약이 있었음이 분명했다. 이렇게 하여 윤창덕 감독은 연회장 시절의 감독과는 달리 상징적 자리에서 실제적인 자리를 얻어 중부, 동부, 남부, 삼남연회의 행정권을 한 손에 쥐고 감독에 당선된 것이다.
총회는 잘 끝났지만 2월 특별총회로 인해 각 계파 간의 알력이 더 치열해지고 급기야 성명전으로 발전하였다. 1971년 3월 1일 ‘교회신풍운동회’가 기독교 대한감리회 538명의 이름으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파벌을 금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하나 되자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정동파에서는 이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파벌 간의 다툼으로 인해 급기야 경기연회의 분열이 야기되었다. 결국 1971년 3월 5일 인천 숭의교회에서 경기연회 창설연회가 개최되고 말았다. 이때 경기연회 창설 추진위원장으로는 이천읍교회의 김정구 목사가 맡았다. 연회 조직에 들어가서 연회장에 김정구 목사, 총무에 임은영 목사, 서기에 이철용 목사, 부서기에 박용익 목사가 선임되어 연회를 구성하였다. 경기연회는 모든 연회 기능을 수행하였다. 목회자의 자격, 과정심사, 허입, 안수, 진급을 독자적으로 처리했다. 연회 실행위원을 돕고 모든 사건을 처리토록 했으며 여주, 이천, 수원, 인천, 강화 5개 지방으로 구분한 감리사와 교역자를 파송하였다.
한편 총리원 윤창덕 감독은 1971년 3월 17일부터 19일까지 정동제일교회에서 개회된 제30회 중부연회에서 그 대책을 논의하고 경기연회는 불법 단체이며 가담자는 중부연회로부터 자퇴한 것으로 간주한다고 결의하였다. 그러나 경기연회원들은 총리원을 점거하고 연좌농성으로 더욱 과격해졌다. 이러한 사태의 해결을 위하여 1970년 6월 28일에 3부 연회 연합실행부위원의 이름으로 성명서를 발표했다. 감리교회의 당면 문제와 총리원 개편 문제 등을 다루며 새로운 감리교회를 다짐했다. 그러나 사태는 수습되지 않았다. 이에 총리원 이사회 실행부위원회 긴급사태대책위원회에서는 1971년 9월 12일‘감리교 교우들에게 보내는 글’이라는 제하의 대책안을 발표하였다.
윤창덕 감독은 1973년 10월 20일부터 25일까지 정동제일교회에서 특별총회를 소집하였다. 연회장 제도가 폐지된 실권을 가진 감독이었지만 경기연회 분열 등 여러 가지 감리교 안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혼자 책임지고 가기에는 힘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그는 감리교가 발전하려면 서클 정치의 지양과 다원제 감독제를 도입하여 교권을 나누어 맡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런 방향으로 장정을 개정할 필요성 때문에 특별총회가 소집된 것이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단일 감독제는 제12회 총회로 이어지게 되었다.결국 경기연회는 1975년 연합총회를 조직하고 김정구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여 별개의 조직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1975년 11월 17일 갱신 측 총회와 중부중립 측 교회들과 통합을 발표하고 분열된 세 단체가 하나가 됨으로써 경기연회 분열은 일단락되었다.
윤창덕(尹昌德) 감독은 1909년 9월 8일 평남 평양에서 부친 윤석과 모친 김영심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31년 3월에 광성(光成)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6년 3월 마경일, 한세홍, 이호운 등과 함께 서울 감리교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33년 11월부터 강서지방 함종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여 1939년 5월 7일 황해도 해주 남본정(南本町)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 서부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해 일본 고베(神戶) 간사이(關西)학원 신학부에서 공부하고 고베 시외의 다가라스가 교회를 담임하였다. 1941년 귀국하여 해주 사리원(沙里院)교회, 1943년 진남포지방 덕동(德東)교회에서 목회했다. 3부연회가 해산 된 후 1946년 해방된 그 이듬해 서부연회가 평양중앙교회에서 모이고 1949년 남산현교회에서 마지막 제4회 서부연회가 모였을 때 윤창덕 목사는 서기에 피택 되었다.
1946년 8월부터 평양지방 채관리(採關里)교회에서 목회하였고 서부연회 직영 성화신학교 출강하였다. 1950년 6월에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북한 공산당 치하에 있었다가 1951년 1․4 후퇴 때 남하하였다. 이때 육군 군목으로 활동하면서 군종제도 정착에 공헌하였다. 한국전쟁이 한창이었던 1951년에 대구제일교회를 설립하고 감리사를 겸했다. 1954 9월에 미국으로 건너 가 시카고 한인교회 부담임목사로 시무하면서 에반스톤 개렛 신학교에서 실천신학을 연구하고 1956년 6월 졸업하였다. 귀국 후 1956년에 인천내리교회 제20대 담임자로 부임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48세로 한참 일하기 좋은 나이였다. 그의 인품은 쾌활 명쾌하였으며 용모 수려한 미남이었고 진취적이고 활동력이 강한 리더십의 쾌남이었다. 그의 목회의 출발점과 핵심은 신령한 은혜와 기도에 힘쓰는 것이었다. 영적인 면은 뜨겁고 머리는 차가워서 계획과 조직이 치밀하게 움직이는 목회를 운영했다.
1962년 7월 3일 제9회 총회에서 이환신 감독이 선출되면서 총리원 전도국 총무로 피택 되어 감리교 성장에 노력했다. 1965년 5월 16일부터 시온교회를 담임하였고 1967년 4월 동대문 교회에서 열린 제18회 동부연회에서 제1대 동부연회장으로 당선되었다. 1968년에는 온양선교정책협의회의 제3 분과 각 기관사업 및 선교사 인사관리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감리회 제11회 총회 기간 중이던 1970년 10월 23일 제8차 회집에서 제11대 감독으로 선출되어 시온교회를 떠나 감독직을 수행했다. 감독 임기를 마치고 성산교회를 담임하다가 1977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애리조나 훼닉스 한인교회를 담임하였다. 1982년 3월 25일 서울연회에서 정년 은퇴하였다. 1985년 9월 7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윤창덕 감독은 동부연회장 시절에 제26회 동부연회(1967년 4월 4일~8일, 동대문교회 개최), 제27회 동부연회(1968년 3월 24일~26일, 동대문교회 개최), 제28회 동부연회(1969년 3월 12일~14일, 서울시온교회 개최), 제29회 동부연회(1970년 3월 4일~6일, 동대문교회 개최)를 주관하였다. 또한 감독재임 시에는 제11회 총회 특별총회(1974년 4월 30일~5월 1일, 정동제일교회 개최)와 제12회 총회(1974년 10월 23일~27일, 12월 12일~15일, 정동제일교회 개최)를 주관하였고, 제31회 중부연회(1972년 3월 8일~10일, 정동제일교회 개최), 제32회 중부연회(1973년 3월 14일~16일, 정동제일교회 개최), 제33회 중부연회(1974년 3월 13일~15일, 정동제일교회 개최)를 이끌었다. 그리고 제30회 동부연회(1971년 3월 24일~26일, 동대문교회 개최), 제31회 동부연회(1972년 3월 1일~3일, 춘천중앙교회 개최), 제32회 동부연회(1973년 3월 7일~9일, 동대문교회 개최), 제33회 동부연회(1974년 3월 6일~8일, 동대문교회 개최)를 이끌었다. 또한 제18회 남부연회(1972년 2월 21일~23일, 대전제일교회 개최), 제19회 남부연회(1973년 3월 14일~16일, 대전제일교회 개최), 제20회 남부연회(1974년 3월 20일~22일, 대전제일교회 개최)를 주관하였다.
한편 윤창덕 감독이 1970년 10월 총회에서 동부연회장으로 있다가 감독이 되었으므로 동부연회장 후임으로 송흥국 목사를 선임하였다. 송흥국(宋興國) 목사는 1902년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났다. 1924년에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평양 남산현교회 부담임전도사로 일을 했다. 1928년에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1930년에 이화여전 강사로 활동했다 그 후 1933년에 미국 버클리 퍼스픽 신학교에서 웨슬리신학을 전공하여 학자요 목사로 그 위상을 갖추었다. 1936년에는 평북 회천교회 전도사로 시무했고 1939년 5월에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그해 총리원 교육국 간사, 1941년에는 삼청동교회를 담임했다. 바로 이때가 기독교조선감리회가 사실상 막을 내리고 정춘수 통리자에 의해 강제로 일본식 조선감리교단을 만들어 친일 행각을 일삼을 때였다. 송흥국 목사는 류형기, 정일형, 구성서, 전효배, 마경일, 이규갑, 김광우, 김종만, 이윤영, 노진박 목사와 함께 반 혁신교단 세력을 이루어 1942년에 대대적인 목회자 이동 때 ‘대명’(待命) 대상자에 포함되어 감리교회 밖으로 추방당할 상황에 처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송흥국 목사는 반 혁신교단에 핵심 인물이 되었다. 이로 인해서 일제의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 동안 옥중생활을 하고 1943년 3월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9개월을 선고받아 3개월을 더 살다가 1943년 6월에 석방되었다. 그 후 1950년 해군 정훈감, 1952년 대한기독교교육협회 총무로 재직하였고 1959년 정릉교회, 1965년에 감리교신학대학 전임강사 겸 사감으로 일했다. 1964년에는 한국 기독교근로전도회 회장으로 일했으며 1970년에 동부연회장에 선임되었다. 1972년 은퇴 후 용두동교회 소속목사로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