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멩이 -
옛골에서 출발한 버스가 대치동과 도곡동을 지나 강남 그랜드 백화점 앞에 서면, 눈에 힘을 주고 지켜보던 나는 얼른 달려가서 버스에 오른다. 1, 2, 3, 6번. 한 자리 숫자의 시내버스 4개가 전부인 동네에서 올라온 나에게 78-1번, 두 자리 숫자에 -(대시)까지 붙은 버스 번호는 이 도시의 크기를 보여주는 것 같다. 나는 최대한 시골에서 온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원래 이 동네 사는 것처럼 무심하게 창 밖을 '구경'한다.
쭉 뻗은 왕복 4차선 도로가 너무 넓어 차선을 몇 번이고 세어본다. 선릉역을 지나고 영동고등학교 앞을 지난 버스는 크리스마스 장식이 화려한 갤러리아 백화점이 보이면 좌회전 한다. 반짝이고 예쁜 걸 좋아하는 나에게 지금부터 지나 갈 구간은 혼자 서울에 떨어뜨려진 두근거림과는 다른 두근거림을 준다. 화려해진 거리와 화려해진 사람들, 그리고 압구정 현대백화점을 신호로 하차 벨을 누르고 버스에서 내린다. 광림교회를 이정표 삼아 지금 내가 가는 곳은 압구정 에바다 미술학원.
1992년 겨울, 아직 고3의 신분이지만 나는 허락을 받고 한 달 동안 학교를 가지 않는다. 뒤늦게 입시 미술을 시작하는 경우가 없진 않지만, 당시 우리 지역에서 미대에 가는 아이들은 원래 미술반이었다. 언제부터 그림을 시작했는지 모른다. 학교를 다니기 전에도 집 앞에서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렸고, 학교에서는 늘 미술반이었다. 지역 사생대회에 나가면 항상 보는 얼굴들이 있었다. 그 중 영주는 물론이고 인근 지역인 안동에 까지 피카소로 소문난 한 살 많은 언니가 있었다.
입시가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가장 최근에 그린 그림을 사진으로 보내라는 언니의 전화를 받고 가장 자신 있는 그림을 찍어 사진으로 인화한 후 우편으로 부쳤다. 칭찬을 기대했던 내 예상과 달리 당장 서울로 올라와 시험 준비 마무리를 하라는 언니의 연락을 받았다. 중간 과정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데 학교에 결석계를 냈고, 그리고 나는 서울에 있었다.
서울에 도착한 날 오후, 언니와 함께 홍대 앞 미술학원들을 돌아다녔지만 한 달만 다닌다는 지방 학생을 반겨주는 곳은 없었다. 받아준다고 하는 곳은 언니가 미덥지 않아 고민이 된다고 했다. 그사이 조카가 서울로 온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던 작은 아버지가 미술학원을 수소문하여 등록까지 끝냈고 나는 다음날부터 압구정 미술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기본 학원비에 주말 특강을 포함하면 한달 학원비가 우리동네 미술학원 일 년치 수업료와 맞먹고, 엄마가 아빠에게 받는 한 달 생활비를 넘기는 금액인 무서운 곳을.
학교를 안 가는 나는 오전부터 자정까지 학원에서 그림을 그린다. 오전은 재수생 반인데 눈에 띄는 그룹이 있었다. 내 소견으로 재수생이면 어른이 아닌데 그녀들은 고운 화장에 방금 미용실을 다녀온 연예인 같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금빛 악세서리와 미니스커트, 하이힐. 모피 코트가 아니면 한 눈에도 고급스러운 자켓을 입었다. 자꾸 쳐다보게 될 만큼 예쁜 언니들이지만 입이 거칠고 내용이 놀라워서 눈이 마주치지 않게 조심했다. 수업 사이 저녁시간에는 로바다야끼에서 정식을 먹었다고 했다. 튜브 3개 값이 내가 쓰는 신한 수채화 물감 24색 세트보다 비싼 렘브란트 물감을 무려 20색 넘게 박스로 사서 쓰고 있었다.
조금 뜬금없지만 내 장래희망은 ‘부자’였다. 이전까지 내가 알던 가장 부자는 나의 6학년 때 친구였다. 그 친구는 팔다리가 굽는 고급 마론 인형과 인형 가구들을 잔뜩 가지고 있었고, 내가 특별한 날에만 아껴 먹는 가나초콜릿을 친구들에게 먹으라고 3칸씩 뚝뚝 떼어주었다. 친구를 보면서 나름 진지하게 부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는데 압구정에서 본 부자는 차원이 달라서 슬며시 꿈을 내려놓게 되었다.
아무튼, 그런 중요한(?) 사건도 있었고 좋지 않은 기억도 있다. 어느 날, 무리 중 수채화 반이었던 세 명이 나를 보면서 킥킥거렸다. (생각해보니 가십걸의 블레어와 셀레나 같다!) 내가 돌아보면 시치미를 떼다가 그림을 그리면 다시 키득거렸다. 귀를 쫑긋 세우고 작게 들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게스’, ‘가짜’.......
집에서 옷을 갈아입다가 알게 되었다. 전 날이었나? 그녀들이 한참동안 비싼 청바지 이야기를 했고, 그게 Guess라는 브랜드였고, 내가 입은 (보세)바지 뒷주머니에 누가 봐도 가짜인 Guess 사돈의 팔촌 같은 로고가 붙어있었다는 것. 당시 영주에도 백화점이 두 곳 있었다. 하지만, 서울의 백화점과는 전혀 다른 곳이다. ‘백화점’은 3층짜리 건물 안에 여러 개의 가게가 들어와 있는 종합 상가를 의미했다. 그 안을 채우고 있는 물건은 나중에 보니 남대문 시장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내 바지는 영주 백화점 출신도 아니었다. 브랜드를 모르는 무지와 비싼 옷을 사지 못하는 처지를 설명해야 할까? 부끄러워해야 할까? 남은 기간 동안 어떤 마음으로 다녔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비싼 물감에 비싼 옷을 입고 비싼 밥을 먹고 비싼 학원을 오래 다녔던 그들이, 엄마가 남들에게 창피하다고 유학을 보낸다며 이야기하던 그들을 압구정 오렌지족이라고 부른다는 건 얼마 후에 알았다. 어쩐지 역사의 한 가운데에 있었던 기분.
첫댓글 서울 풍경을 묘사해주신 부분이 인상적입니다. 장면이 그려지는 글을 좋은 글이라 생각하는데, 장면이 그려져요:)
그리고 '브랜드를 몰랐던 것과 비싼 옷을 사지 못하는 처지'가 당연히 부끄러운 일일리 없지만, 저 또한 학생때 선생님과 아주 똑같은 경험을 한 적 있어요. 얼마나 낯뜨거웠는지 모릅니다. 왜 그렇게 민망했는지 당시 장면이 선하네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