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흙은 살아 있다 - 고고학의 원리
살아 있는 흙-생토
요즘 환경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경제...산업 발전에만 정신을 쏟는 사이에 우리 국토의 많은 부분이 오염되었고, 그 결과 우리의 건강은 물론 후손들의 생활 터전가지 위협받기에 이르렀습니다. 국토의 오염원으로는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겠지만, 그중 생활쓰레기와 폐수 등 땅을 병들에 하는 요소들은 우선 지적할 수 있겠습니다. 땅이 병든다? 언뜻 보기에 상당히 문학적인 표현인 듯하지만, 이건 지극히 사실적인 표현입니다.
우리 몸은 세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이 생동감을 유지하기 때문에 우리가 건강하게 활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 어른으로 자라는 것을 생물학적으로 표현하면 세포의 끊임없는 분열과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과 같은 동물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풀...나무와 같은 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체는 모두 세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포가 성장 혹은 활동을 멈추면 큰일입니다. 그것은 곧 죽음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생명체가 땅으로부터 생깁니다. 그리고 땅 위에서 생활합니다. 땅은 흙 알갱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식물의 종류가 다양한 것처럼 흙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동물의 피부색이 다양한 것처럼 흙의 색깔도 다양합니다. 흙도 변합니다. 먼지가 날아와 모이더니 흙덩이가 됩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흙덩이가 돌이 되기고 합니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흙을 생토하고 합니다. '살아 있는 흙'이란 뜻이죠, 생토는 자연퇴적한 상태의 흙입니다. 그 위에 흙먼지가 날아와 덮이고, 낙엽이 떨어져 쌓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며 생토인 흙은 마치 세포처럼 성장합니다. 그래서 생토의 색깔도 천연색 그대롭니다.
생명력이 있기에 탄력이 있습니다.
죽은 흙 - 부식토
인간의 손길이 닿은 후의 흙은 부식토 혹은 부토라고 합니다. '썩은 흙'이란 뜻이죠. 부토는 마치 활동을 멈춘 세포와 같습니다. 다른 흙 조직으로부터 강제로 이탈되어 생명을 잃은 흙입니다. 이들은 생명체의 세포가 그렇듯이 급속히 썩어갑니다. 그리고 매생물의 온상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싫고 썩어가기에 부토의 색깔은 검은색입니다. 탄력을 잃어 푸석푸석합니다.
우리가 비옥한 땅이라고 부르는 속은 대부분 부토로 이루어진 땅입니다. 썩어가기에 그것이 자양분이 되어 식물의 성장으로 촉진시키는 것이죠. 농사를 지을 때 가래...삽...곡괭이 등으로 논밭을 가는 이유는 흙을 썩게 해 그곳에 심을 벼와 보리가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비옥한 땅을 만들기 위해서는 흙을 보다 깊이 파서 더 많은 흙을 썩게 해야겠지요. 이처럼 논밭을 깊이 사는 것을 심경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손길이 거쳐 간 자연 재지는 상처를 입습니다. 그리고 한 부분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흙도 죽는다.........'. 이 원리를 이용한 학문이 있습니다. 바로 고고학입니다. 역사학이 기록에 의존해 인간의 발자취를 목원하는 학문이라면, 고고학은 남겨진 물건을 이용해 인간의 발자취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무덤...성곽...살림터...절터 등이 주요 연구대상이죠.
현행법에 의하면, 어느 한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곳에 민족문화유산이 있는지를 알아보고, 있다면 먼저 발굴을 통해 유적의 성격을 구명해야 합니다. 따라서 개발을 앞둔 지역을 반드시 고고학의 조사를 거쳐야 하는데 조사 과정에서 토기 조각이라든지 석기, 혹은 금속기의 일부를 발견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유물이 발견된 지점을 중심으로 주변 일대에 대한 발굴이 진행됩니다.
우선 유적이 폐기된 뒤에 쌓인 자연퇴적물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제거합니다. 그러면 유적이 만들어질 당시의 지표면이 드러나는데, 그 중에는 다른 곳과 구별되는 특성을 보이는 부분이 있게 마련입니다. 흙의 색깔이 다르고, 성질이 다른 곳, 바로 썩은 흙이죠, 부토를 조심스럽게 걷어내면 유적을 사용하던 당시의 땅 모습이 그대로 복원됩니다. 그리고 복원과정에서 당시 각종 유물을 수습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은 물론 충분히 교육받은 고고학자에 의해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유적이 제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발굴은 또 다른 파괴다'라는 지적이 있긴 하지만.......
2) 지구와 인간
지구의 역사
우리 인간은 지구상의 한 생명체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지구는 우주 속의 수없이 많은 행성 중 하나에 지나지 않죠. 다라서 인간은 지구가 생긴 뒤에 출현했고, 지구는 우주가 탄생한 이후에 생겼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천체과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주는 지금부터 약 180억 년 전쯤에 탄생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어떤 한 덩어리의 물질이 폭발해 팽창하면서 지금의 우주와 같은 공간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지금부터 약 45억 년 전쯤에 이르면 지구가 탄생합니다.
지구에 생명체가 출현하는 것은 약 40~30억 년 전쯤이라고 합니다. 방상충...해면과 같은 미생물이 그에 해당하는데, 이들이 나타나 활동한 시기를 시생대라고 합니다. 그러다 지금부터 약 9억 년 전쯤에 이르면, 원시 조류, 박테리아 그 뒤로 각종 단세포 동물들이 태어납니다. 우리는 이때부터를 원생대라고 부릅니다. 세월이 흘러 지금부터 약 6억 년 전쯤에는 해초와 양치식물 그리고 무척추동물이 번성하기 시작합니다. 고생대이지요. 이 무렵 지구상의 생염체 중 동물은 모두 물고기류였습니다. 육지동물이 나타나는 것은 지금부터 약 3억 5천만 년 전쯤이라고 합니다.
지금부터 약 3억 년 전쯤에 이르면 중생대가 펼쳐집니다. 트라이아스기, 쥐라기, 백악기로 다시 구분되는 중생대에는 활엽수계의 식물과 파충류...양성류...경골어 등이 번성했습니다.
중생대 말기 곧 지금부터 9,000만년 전쯤에는 대뇌가 발달하는 대신 얼굴이 짧고 한 쌍의 유방과 손발을 가진 원시 형태의 영장류가 출현했다고 합니다.
신생대는 지금부터 약 6,500만 년 전 쯤에 시작되었습니다. 신생대는 다시 제3기와 제4기로 나뉘는데, 지질학에서는 제3기를 다시 고신세, 중신세, 선신세 등으로 구분하고, 제4기를 홍적세와 충적세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출현
인류는 지구의 지각 변동이 심하고 포유류가 번성한 제 3기의 말기쯤에 출현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처음 발견된 '남쪽 원숭이 사람'이 바로 그것인데, 그들의 출현 시기에 대한 견해는 학자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략 지금부터 400~300만년 전쯤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들에 앞서 라마원숭이처럼 인류의 조상일지도 모르는 존재들이 이미 1,000여만 년 전에 인도...케냐...터키...중국 등지에서 서식한 흔적을 찾을 수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인류의 조상이라는 확증이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화석을 조사한 결과 '남쪽 원숭이 사람'의 두뇌 용량은 평균 약 500cc로 추정되며, 성인 남자(수컷의 평균 키는 140cm, 몸무게는 52kg으로 추정됩니다. 평균 수명은 11~12살이어서, 여자(암컷)의 경우 늦어도 7~8살쯤에는 출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쪽 원숭이 사람'이 과연 현생 인류의 조상인지에 대해서는 의무의 여지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화석 구조로 볼 때 두 발로 서서 걸었으며, 치열이 현생인류와 일치한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과의 관계를 쉽게 부정할 수 없도록 만듭니다. 연장을 사용한 듯한 흔적도 역시 우리의 관심을 끕니다.
아프리카의 케냐 지역에서는 지금부터 약 200만 년 전쯤에 해당하는 인류 화석이 발견되었는데, 사람들은 이를 '솜씨 좋은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의 화석 주변에서 석기가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중국 운남성에서도 돌과 나무로 된 도구를 사용했던 인류 화석이 발견되었습니다. 대략 170만 년 전 쯤으로 추정되는데, 학자들은 원모인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지금부터 약 180만년 전쯤, 그러니까 신생대 제 3기 말엽에 이르면 지구의 기온이 낮아지면서 남극지방과 고산지역을 중심으로 빙하가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제 4기의 홍적세에는 한랭성 기후의 영향으로 4~5번의 빙하기가 펼쳐지고, 그 사이 사이에 3~4번의 간빙기가 찾아옵니다. 빙하기는 지구전체가 얼음으로 뒤엎였던 시대가 아닙니다. 지금보다 평균 온도가 약 17도 정도 낮은 상태로서 극지방을 중심으로 인근지역에 빙산이 형성되던 시기일 뿐이죠, 따라서 비록 제한을 받긴 했지만, 각종 동...식물의 번식이 여전히 가능했던 시기입니다.
인류의 진화
정확한 시기를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지금부터 약 100만년 전쯤에는 '곧 선 사람'들이 출현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곧 선 사람'의 출현 시기를 150만년 전까지 소급시키기도 하는데, '남쪽 원숭이 사람'과는 한동안 병존했다고 합니다. 뼈의 구조 등에서 현생 인류의 조상임이 분명한 '곧 선 사람'의 초기 두뇌 용량은 성인남자를 기준으로 삼았을 때 700~800cc정도이며, 후기의 뇌용량은 1,000cc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성인 남자의 평균 키는 162.5cm, 몸무게는 76.5kg으로 추산됩니다. '곧 선 사람'의 화석 중 대표적인 예로는 50만년 전에 해당하는 북경원인과 자바원인을 들 수 있습니다. 중국의 남전인은 60만년 전에 해당하는 인류 화석이라고 합니다.
홍적세의 중기 후반쯤, 그러니까 지금부터 약 35만년 전쯤에 이르면 '슬기사람'이 출현합니다. 두뇌 용량이 1,300~1,400cc니까 현생인류와 비슷하며, 골격도 유사하지만, 눈두덩과 턱이 더 크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타제석기를 사용한 이들은 기둥을 세운 집을 만든 듯하며, 원시적 종교 관념을 지녔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이라크의 한 동굴유적에서 시체 위에 꽃을 뿌리고 흙을 덮은 흔적이 발견되었다든지, 중앙아시아에서 주검 둘에 염소 두개골 6개를 뿔을 땅에 꽂아 배치한 유적이 발견된 것에서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슬기사람'의 대표적인 예로는 독일에서 발견된 네안데르탈인 화석을 꼽을 수 있습니다. 20만년쯤에 해당하는 네안데르탈인 관련 유적에서는 실과 바늘을 이용한 듯한 가죽옷의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중국에서 발견된 화석 중에는 정촌인, 장양인, 오르도스 인 등이 슬기사람에 해당합니다. 북한에서도 '슬기사람'의 화석이 발견되었습니다.
1972년 덕천 승리산에서 2개의 어금니와 어깨뼈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덕천인'이라고 부릅니다. 또 1977년에는 평양에서 '역포인'으로 명명된 화석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현생인류와 같은 '슬기슬기사람'은 늦어도 4만 년 전에는 지구상에 출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프랑스에서 발견된 크로마뇽인의 골격이 현재의 유럽인과 유사하며, 두뇌 용량 역시 1,500~1,600cc로서 지금의 우리들과 큰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는 산정동인, 기린산인, 유강인 등이 같은 시기의 화석입니다. 북한에서는 덕천 승리산에서 발견된 '승리산인'의 화석이 이에 해당합니다.
타제석기의 사용
지금까지 소개한 화석은 모두 홍적세에 살다간 인류의 흔적입니다. 이 무렵 인간은 돌을 연장 혹은 무기로 사용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연 그대로의 돌을 사용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돌을 깨뜨려 더 날카롭고 편한 모습으로 바꿀 줄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돌을 깨뜨려서 만든 도구를 타제 석기라고 합니다. 이를 다른 말로 구석기 혹은 뗀석기라고도 하는데, '곧 선 사람이 활동하던 시기는 대체로 전기 구석기 시대, '슬기사람은 중기 구석기 시대, '슬기슬기사람'은 후기 구석기 시대의 인류로 이해해도 좋을 것입니다.
인류의 진화와 구석기시대에 대한 위의 지식은 모두 고고...인류학자의 발굴...조사를 통해 얻은 것입니다. 또 그중 상상부분은 단순 사실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위의 사실들은 필수조선으로 삼아 유추의 날개를 펼치다보면 의외로 구석기인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와 있는 때가 간혹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구석기인들이 사용한 타제석기는 대부분 꽤 큼지막합니다. 물론 후기 구석기 시대의 말기쯤 오면 작고 가는 세석기가 사용되긴 하지만, 그 이전에는 주로 몸돌을 사용했습니다. 1.5리터짜리 주스 병보다 조금 짧은 크기의 울퉁불퉁한 뾰족한 석기로 그들은 과연 무엇을 했을까요? 사냥을 했다고 합시다. 무엇을 잡았을까요? 돌의 크기로 보아 꽤 큰 짐승을 잡았을 겁니다. 만약 토끼나 다람쥐처럼 작고 날쌘 짐승을 잡았다면 석기가 그처럼 클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절대 그처럼 커서는 안 되겠죠. 마침 당시의 자연환경을 조사하고 구석기인들의 생활유적지에서 발견된 짐승의 뼈를 관찰해보니, 북반구에는 순록...매머드처럼 덩치가 크고 피하지방층이 두터운 짐승들이 많이 살았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자연환경이 석기의 크기를 결정지은 것이지요.
구석기인의 생활상
구석기인들은 순록 혹은 매머드를 어떻게 사냥했을까요/ 아마 혼자서는 어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들과 같이 움직여야 했을 겁니다. 그러나 3~4명 혹은 4~5명만으로 순록 산양이 가능했을까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나 어머니의 형제와 그 자녀들, 그러니까 사촌들까지 포함하고, 그것으로도 일손이 모자라면 6촌...8촌 형제들과도 함께 움직여야 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리지어 사냥했으리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구석기 시대에 30~40명 정도가 함께 생활한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집단의 규모는 노천에서 생활할 때가 많았던 구석기인들이 맹수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기에도 효과적이었을 것입니다.
도구가 시원찮은 탓에 몇 번의 실패를 거쳐 오랜만에 사냥에 성공을 했다고 합시다. 한쪽에서는 사냥감을 몰고, 한쪽에서는 끈으로 짐승의 다리를 잡아채고, 또 몇 사람은 달려들어 돌도끼를 던지거나 휘둘러서 함께 잡았으니, 당연히 공평하게 나누어야지요.
순록 한 마리를 잡았으나, 나누고 보니 각자에게 돌아온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순록만 잡아서야 어디 생활이 되겠습니까? 상대적으로 힘이 약하거나, 아이들을 돌보아야 하는 사람들은 사냥에 나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냥 놀아서는 공평하지 않지요. 그런 사람들은 다른 방법으로 먹을 것을 구해야 하겠지요. 근처의 나무열매라든가 그 밖의 먹을 만한 것들을 채집해야 했을 것입니다. 구석기인들의 생활유적지에서 각종 식물의 잔흔이 발견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순록이나 매머드는 채식을 하는 동물입니다. 그들이 일정한 지역에서 한동안 생활하고 나면 먹을 만한 식물은 바닥나고 맙니다. 그들만이 아닙니다. 구석기인들도 역시 식물을 섭취해야 했으므로 한 자리에 오래 머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구석기인들은 그들의 먹잇감이 있는 곳으로, 다시 말하면 순록이나 맘모스가 움직여 가는 곳으로 끊임없이 이동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럴듯한가요? 이처럼 몇 가지 단서를 가지고 마치 탐정처럼 이리저리 상상하다 보면 어느새 구석기인들의 숨결이 내 손을 스쳐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구석기 유적으로는 공주시 석장리와 웅기군 굴포리, 제천시 점말동굴, 단양군 금굴과 상시, 제주도 빌레못 등이 유명합니다.
세석기의 사용
지금부터 약 12,000년 전쯤에 이르면 지구의 기후가 많이 달라집니다. 후빙기가 시작되면서 기온이 상승하게 된 것이지요. 날씨가 따뜻해지자 미생물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먹이사슬이 풍부해지면서 몸집이 작고 재빠른 동물들이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작고 재빠른 동물들을 쥐기조차 버거울 정도로 크고 무거운 석기로 잡을 수 있겠습니까? 어림없지요. 따라서 효과적으로 사냥하기 위해서는 사냥감에 맞춘 도구를 개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전에 덩치가 큰 짐승들이 많을 때에는 돌을 깨어 잔편은 버리고 알맞게 다듬어진 핵심만 골라 썼는데, 작은 짐승들이 번성하게 되자 이번에는 잔편 중에서 알맞은 것을 골라내어 사냥도구로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손가락 굵기 만한 작고 가는 석기 말입니다. 그래서 세석기입니다. 잔석기라고도 합니다. 세석기를 주로 사용하던 시기를 중석기시대라고 합니다.
세석기로 사냥을 한다? 그렇습니다. 세석기를 그냥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화살과 창 그리고 작살 등을 만들어 사냥을 하는 것입니다. 가볍고 빠른 동물을 잡으려고 가볍고 빠른 도구를 사용하게 된 것이지요. 사냥감이 작은 동물로 바뀌고, 또 더 효과적인 무기를 갖추게 되었으니 사냥방식도 달라져야 하겠지요? 이제는 예전처럼 대규모로 무리지어 사냥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개별적으로 사냥하다 보면 사람마다 능력이 달라 수확에 차이가 나겠지요? 이제 곧 재산에 대한 다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 것, 사유재산이라고 하는 개념이 생겨나는 것과 함께 말입니다.
작고 가는 무기를 사용하다 보니 가끔은 상처만 조금 입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짐승을 잡을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또 운 좋게 생포하는 수도 있었을 테지요.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던 만큼 그것을 길러 나중에 사냥이 잘 안될 때를 대비했을 법합니다. 다시 말하면, 가축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특히 중석기기대의 생활유적에서 개의 뼈가 자주 다량으로 발견되는 것은 개의 가축화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중석기인들은 대체로 동굴생활을 했던 것을 알려집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물고기들이 번성했으니, 그냥 두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당연히 작살 등으로 어업에 나섰겠지요. 그러나 깊은 물에서는 작살이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개발된 것이 그물입니다. 비록 지금의 그물과는 많은 차이가 있지만, 세석기인들은 그물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인류 역사상 세석기를 사용했던 시기는 매우 짧습니다. 지역마다 차이가 잇지만, 유럽 일대를 기준 삼을 때, 대략 서기전 9000년경을 전후해 1,000~2,000년 정도 지속되었으니까 그 긴 구석기시대에 비한다면 찰나라고 할 만합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세석기문화에 해당하는 뚜렷한 유적을 아직 찾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저 중석기 문화와 관련되었을 개연성이 높은 유적 몇 군데만 확인된 만큼, 앞으로 한 반도에서도 발견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강가나 들판을 거닐 때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