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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136
8월29일 [연중 제21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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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소멸의 가치>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참으로 이해 안가는 일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 아닐까요? 아직 갈 길이 구만리 같은 한 청춘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일, 법 없이도 살 착한 사람들이 겪는 끔찍한 고통...
때로 세상은 너무나 불공평합니다. 이 세상에서 불필요한 것들만 소멸했으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세례자 요한이 그랬습니다. 그는 당대 모든 사람들로부터 기대와 존경을 한 몸에 받던 대예언자였습니다. 단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하느님의 뜻을 성취해나가던 참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런 세례자 요한이었는데, 참으로 안타깝고 어이없는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너무나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오는 황당한 죽음을 급작스럽게 맞이합니다.
이 세상에서 불필요한 것들, 무가치한 것들만 소멸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한 것이 자연의 이치요 우리네 인생인가 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모든 것들이 더욱 특별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일 습관처럼 만나는 인연들이 더욱 소중합니다.
마치 파리 목숨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세례자 요한의 짧았던 생애 앞에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크겠지만, 그의 죽음에서 반드시 우리는 하나의 의미를 찾아내야만 합니다.
우리네 인생은, 우리네 운명이란 것은 사람의 힘으로 좌지우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우리에게 매일 다가오는 모든 삶의 국면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줄 아는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가고, 이렇게 자신감 지니고 살아가지만 내일 우리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단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느님 그분의 손길에 달려있습니다.
강물이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유유히 흘러가듯, 중력이 위에서 밑으로 작용하듯, 우리네 삶도 물 흐르듯이 흘러가게 놔둘 일입니다.
떨어질 순간이 오면 떨어지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합니다. 밑으로 내려갈 순간이 오면 너무나도 당연히 내려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던 어느 날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아쉽지만 모든 것 내려놓게 그분께로 나아가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아직 우리가 이 땅위에 두발을 딛고 서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아직 뭔가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 기꺼이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내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가 아닐까요?
고통의 순간이 다가오면 있는 그대로 견뎌내고, 주어지는 모든 것에 만족하며, 작은 인연조차 소중히 여기며, 절박한 순간조차 유머감각을 잃지 말며, 최악의 순간에도 최선을 다하시는 하느님을 생각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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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 내가 어느 장단에 춤추고 있는지 아는 방법>
경아는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반에서 1등을 놓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1학년 학기말 시험을 앞두고 난데없이 머리가 쪼개질 듯 아프다는 것이었습니다. 엄마는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경아야, 좀 쉬었다 해봐. 이번 시험 망치면 그동안 애써 쌓아왔던 게 말짱 물거품이 되잖아.” 시험을 보고 온 경아에게 엄마는 “시험은?”이라고 물었습니다.
“엄마, 시험이 나보다 더 중요해? 나 지금도 머리가 쪼개지는 것 같아. 시험 그냥 백지 내고 왔어.”
엄마는 10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아 그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정밀검진을 했을 때 경아는 중증 우울증으로 나왔습니다. 자살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소견이 나왔습니다.
경아는 방에 틀어박혀 이어폰을 끼고 하루 종일 핸드폰만 했습니다. 엄마가 말을 걸라치면 죽어버리겠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엄마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왓칭의 저자 김상운씨는 이 어머니에게 무조건 아이의 감정에 동의해주고 미안하다, 고맙다, 용서해 달라는 말만 하고 절대 비난조의 말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엄마는 처음엔 어색했지만 경아보다 공부만 강조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아이는 엄마의 잡은 손을 뿌리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평소처럼 해. 이상해.”
엄마는 자신의 처지가 비참하기도 해서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았습니다. 그랬더니 눈물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그래. 경아야. 네 말이 맞아. 엄만 맨날 너를 들볶기만 했어. 말 한마디 따뜻하게 못했어. 늘 공부하라고만 강요했어.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경아는 쌀쌀한 말투로 또박또박 말했습니다.
“미안한 짓을 왜 했어? 내가 그 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꼭두각시 노릇 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 내가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지 물어본 적이나 있어?
중학교 1학년 때 기억해? 내가 독감에 걸려 초죽음이 다 됐는데, 엄마는 날 새벽 1시까지 못 자게 했어. 어떻게든 이번 시험에선 1등을 해야 한다며. 그러면서 엄마도 안 마시는 커피까지 마시라고 했지.
1등 하는 게 그렇게 중요해? 딸의 건강보다 성적이 더 중요하냐고. 딸의 건강은 망가져도 시험은 망치면 안 되는 거야?”
엄마가 경아의 손을 다시 잡으려했지만 경아는 엄마의 눈을 노려보며 손을 뿌리쳤습니다. 엄마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체 없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경아의 손을 잡았습니다.
경아는 이번엔 그대로 있었습니다. 경아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습니다.
“미안하다. 경아야. 내가 너를 자동차처럼 몰고 다녔어. 세상에 기댈 사람은 엄마뿐이었는데. 엄마가 참 미련하고 못됐었어.
미안하다, 용서해줘. 경아야.”
“엄마, 나도 미안해. 다 나 잘 되게 하려고 그랬던 거 나도 알아.”
엄마는 귀를 의심했습니다. 딸이 처음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엄마는 그 이후로 딸의 감정에 장단을 맞춰줄 뿐 자신의 감정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딸은 우울증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어느 날 경아는 엄마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엄마, 고마워. 다시 옛날 엄마로 돌아간 것 같아서.”
자신의 욕심이 딸을 망치게 했다는 것을 깨달은 엄마는 또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출처: ‘리듬: 상대의 부정적 생각 싹 날려버리기’, 김상운, 정신세계사]
우리는 상대를 위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상대를 죽이며 살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헤로데도 그랬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 같고 위해주는 것 같았지만 결국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안에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헤로디아의 사랑을 잃을까봐 두려웠고, 그의 딸인 살로메의 사랑을 잃을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 두려움이 결국 요한보다는 헤로디아를 택하게 하였습니다. 경아의 엄마도 두려웠습니다. 무엇이 두려웠을까요?
자신의 딸이 공부 못한다는 말을 듣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물론 실제로는 그런 딸을 두었다는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사람은 두려워하지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합니다. 심지어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 널 위해서 그러는 거야!’란 생각으로 자신까지 속여 버립니다. 경아 엄마가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지 않았다면 딸을 그렇게 자살 직전까지 몰고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딱 두 장단에 춤을 춥니다. 하나는 자아의 장단이고 하나는 하느님의 장단입니다. 문제는 자아의 장단에 춤을 추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고 착각하는 것에 있습니다. 실제로는 이용하고 죽이고 있는데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이지 않기 위해 어느 장단에 춤을 추고 있는지 자신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자아의 장단에 춤을 추고 있다면 반드시 지금 ‘두려운 것’이 있게 마련입니다.
뱀은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않으면 무언가 잘못될 것처럼 부추겼습니다. 그 두려움이 선악과를 따먹게 만든 것입니다.
자아의 장단에 따르는 사람들은 그래서 ‘우리 아이가 공부 못한다는 소리를 들이면 어떡하지?’, ‘내가 중학교밖에 안 나온 걸 성당 사람들이 알면 어떡하지?’, ‘남편과의 사이가 안 좋은 걸 친구들이 알면 어떡하지?’ 등의 걱정을 합니다.
이 두려움이 ‘아이가 공부를 더 잘하면 행복할거야.’, ‘내가 똑똑하게 보이면 행복할거야.’, ‘우리 부부가 다정한 모습으로 미사에 나가는 걸 보면 다들 부러워하겠지?’ 등의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나의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가까운 사람들을 이용하고 결국 죽게 만듭니다. 하느님의 장단에 춤을 추며 살아가는 이들은 ‘이미’ 행복합니다. 그래서 늘 감사합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만약 하와가 감사하고 행복했다면 뱀의 꾐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죄책감을 없애기 위해 아담까지 이용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씩 사람을 이용하고 죽이거나, 혹은 살리거나 하면서 살아갑니다. 사람을 죽이는 사람은 지금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고, 사람을 살리는 사람은 지금 있는 것으로 감사한 사람입니다.
아무 것도 바랄 것 없이 그저 주님 때문에 충분히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가 행복해지려고 무엇을 더 원하게 된다면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게 됩니다. 나는 생명을 주려다 목이 잘리면서도 감사한 요한의 삶을 살고 싶은가요, 아니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거나 생명을 희생시키는 삶을 살고 싶은가요?
생명을 주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아무 것도 바라는 것 없이 항상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능력부터 먼저 키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행복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추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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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6,17-29 : 세례자 요한의 죽음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수난 기념일이다. 세례자 요한의 삶은 모두 그리스도께 대한 증거였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가실 길을 닦아드린 다음, 그 길을 예수님께 내어드리고 자기의 제자들을 그분께 인도하고 순교하였던 분이다. 그분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피를 흘리기까지 견디어낸 사람들과 수도자들의 아버지이다.
고행과 순교의 두 면을 보여준 분이다. 그는 권력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말하였고,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순교하였다. 그분은 당신의 삶으로 그리스도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피로써 주님을 증거하신 분이다. 헤로데 왕의 잘못을 간하다가 잡힌 몸이 되었는데, 이제는 헤로데의 만용이 세례자 요한을 죽음에로 몰아넣고 있다.
여기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왕의 잘못에 대해 자신의 위험을 생각지 않고 끝까지 지적할 수 있었던 그분의 예언자적 정신과 자세이다. 예언자는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항상 하느님의 뜻을 전한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들은 항상 진리 편에서 그것을 증거했기 때문에 항상 박해를 받았고 죽임을 당해 왔다. 그래도 그 예언자적 정신은 항상 계속되어 왔던 것이다.
이 예언자적 삶은 고금을 막론하고 항상 박해를 받아왔다. 그래서 권력은 진리를 외치는 입을 막아 침묵하게 하고, 또한 침묵을 강요하곤 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예언자들은 그 권력에 맞서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진리를 외쳐왔고 지금도 외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그 예언자적 삶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계승해야 한다. 이것은 말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되지 않는 것이다.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자기들이 바라고 기다리고 있던 엘리야라고 알기도 하였고, 예언자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아마 예수님 안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로마의 억압에서 해방하여 자유를 주고 세계를 지배할 승리를 가져다 줄 정복자로서 예수님에게서 엘리야로 생각할 수도 있었고,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보면서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능력과 말씀을 전하던 예언자의 모습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엘리야를 무한히 능가하시고 예언자들을 능가하시는 분이시다.
하여간에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 기도와 신앙 안에서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그분이 누구시라고 말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죄를 짓고 쫓기는 마음으로 헤로데처럼 말할 것인가? 군중들처럼 현세를 위한 해방자인가? 아니면 진실한 믿음 안에 생명의 주님으로 대하고 있는가?
진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만에 빠져 죄 없는 사람을 죽음에로 몰아넣을 수 있는 헤로데와 같은 잘못은 범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세례자 요한의 자세를 본받고, 주님을 우리의 참 구세주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대하고 모시는 우리 되도록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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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홍보국장/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역사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 안티파스, 곧 헤로데 2세의 명령으로 죽음을 당합니다. 헤로데 1세의 손녀이며 아리스토불루스의 딸인 헤로디아가 자기 형제의 아내였음에도, 헤로데는 페트라의 임금 아레타스의 딸인 합법적인 아내와 이혼하고, 아직 남편이 살아 있는 헤로디아를 남편과 헤어지게 하여 자기 아내로 삼았다고 합니다.
헤로데는 바로 헤로디아 때문에 세례자 요한을 죽였고, 딸이 모욕받은 사실에 분개한 아레타스와 전쟁을 벌입니다. 이 전쟁에서 헤로데의 군대는 전멸하였는데, 이는 요한을 죽인 죄의 대가를 치른 것이라고 요세푸스는 기록하고 있습니다.(『유다 고대사』 18,5,2 참조)
“동생(필리포스)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혼인에 관한 성스러운 명령을 폐기한 헤로데를 향하여 대담하게 외쳤던 말입니다. 시대의 예언자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헤로데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살인 계획을 세워 실행해 보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사람을 보내어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요한을 죽일 기회를 찾던 헤로데는, 자신의 생일을 맞이하여 호사스러운 왕실에서 죽음의 연회를 베풉니다. 외모를 뽐내고 고개를 까닥거리며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음탕한 춤을 추는 헤로디아의 딸, 손님들의 쾌락과 방탕 속에서 헤로데의 무모하고 경솔한 맹세가 요한의 죽음을 앞당깁니다.
쟁반 위에 담은 요한의 머리가 춤에 대한 상으로 주어집니다. 자신의 혀를 다스리지 못한 헤로데는 요한의 머리를 베었지만 그의 소리는 없애지 못하였습니다. 요한의 혀는 잠잠하게 만들었지만 의로움과 마음의 회개를 전하는 그의 소리는 가라앉히지 못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폭력적인 죽음을 당하였지만 오늘도 폭군의 죄악을 침묵하지 않고 고발하는 의인의 모습으로 자주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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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세례자 요한의 죽음>
스테파노 순교자가 순교 직전에 했던 설교를 보면, 스테파노이런 말이 나옵니다.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조상들과 똑같습니다. 예언자들 가운데 여러분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들은 의로우신 분께서 오시리라고 예고한 이들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러분은 그 의로우신 분을 배신하고 죽였습니다."(사도 7,51-52)
이 말은, 직접적으로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일을 비판하는 말이고, 넓게는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일들을 비판하는 말입니다.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일도 이 비판에 포함됩니다.
여기서, 목이 뻣뻣하다는 말은 고집이 세다는 뜻이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했다는 말은, 하느님을 안 믿는 이교도와 같다는 뜻입니다.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다는 말은, 줄곧 하느님을 거역하고 있다는 뜻인데, 인간들의 회개와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보내신 것은 인간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였는데, 인간들은 회개하고 구원받기는커녕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였습니다.
‘의로우신 분’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인데, ‘죄 없으신 분’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인간들에게 ‘의로움을 주시는 분’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의로움을 주신다는 말은 용서와 구원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의로우신 분께서 오시리라고 예고한 이들’ 가운데 대표적인 예언자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인간들이 세례자 요한을 죽인 것은 구세주를 거부한 일의 예고편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예고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구세주이신 예수님까지 죽임으로써, 자기들이 구원받기를 거부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냈습니다.
(인간들이 세례자 요한을 죽였다는 말에 대해서, “요한을 죽인 사람은 헤로데인데 왜 ‘인간들’이라고 표현하는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직접 살인죄를 지은 사람은 헤로데입니다. 그렇지만 헤로디아와 헤로디아의 딸도 공범이고, 헤로데의 생일잔치에 참석했던 사람들도 모두 공범이고, 넓게 생각하면 헤로데의 범죄에 대해서 침묵을 지킨 사람들은 다 공범이고, 더 넓게 생각하면,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도, 예수님의 복음을 외면하는 사람들도 모두 공범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인간들’이 “의로우신 분께서 오시리라고 예고한 예언자”를 죽였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마르 6,17-20)
마르코복음의 표현만 보면, 헤로디아만 세례자 요한을 죽이려고 했고, 헤로데는 요한을 보호한 것으로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14,5)
헤로데가 두려워한 것은 요한이 아니라 군중이었습니다. (이 말은, 하느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여론만 두려워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헤로디아가 요한을 죽이지 못하게 막은 것은, 요한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론의 움직임을 살펴보다가 적당한 때에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라는 말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있는 군중의 여론이 두려워서, 헤로디아가 요한을 죽이려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적당한 명분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라고 헤로디아를 설득했다.”라는 뜻입니다.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다.”라는 말은,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불러서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을 즐겼다. 요한의 말 때문에 가끔 입장이 난처해져서 당혹스러워할 때도 있었지만.”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에는 헤로데가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을 느꼈다는 뜻은 없습니다. 헤로데가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가둔 것은 죽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요한을 죽이는 것은 처음부터 헤로데의 계획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서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죽인 다음에는 예수님도 죽이려고 했습니다.(루카 13,31) 나중에 예수님께서 체포되신 뒤에 헤로데와 만나신 일이 있었는데, 그때 헤로데는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했습니다(루카 23,11).>
<26절의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라는 말도 오해하기 쉬운 말입니다. 헤로데는 하느님의 예언자를 죽이는 것을 괴로워한 것이 아니라, 손님들 앞에서 경솔하게 함부로 헛된 약속과 맹세를 한 것을 괴로워했습니다. 그는 딸에게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라고 말하면서 맹세까지 했습니다.(마르 6,23) 그런데 그가 ‘내 왕국’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왕국은 없었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고, 헤로데는 사실은 로마황제의 꼭두각시였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손님들은 그런 사정을 환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헤로데가 딸에게 약속하는 말을 듣고서 속으로 비웃고 있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해서, 또는 예언자들의 죽음에 대해서, “원래 예언자들의 숙명은(운명은) 그런 것이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말은 별로 좋은 말도 아니고, 적절한 말도 아닙니다. 처음부터 하느님께서 그렇게 정해 놓으신 것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파견하실 때, 살해당하라고 파견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예언자들이 임무 수행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기를, 즉 사람들이 예언자들의 말을 듣고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예언자들을 파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번번이 하느님의 뜻을 거역했고, 예언자들을 죽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경우에도, 그렇게 살해당한 것은 원래 그렇게 되도록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은 인간들의 범죄입니다.
<오늘날에도 회개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끊임없이 들려옵니다. “그 말씀에 나는 지금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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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차룡 바오로 신부님]
<불의에 항거하며>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이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다고 극찬한 세례자 요한의 수난 죽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 예수님이 오실 길을 미리 닦아놓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요, 신약의 시대를 열어 놓은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은 진리를 위해 몸을 바친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 안티파스가 예수님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 예수님을 두고 요한이 되살아난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는데 헤로데도 그 소문을 믿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존재가 종교계의 지도자뿐만 아니라 정치 집권자에게도 두려움을 안겨주었던 것입니다.
당시 왕의 불의에 대하여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입을 다물고 있었을 때 요한 홀로 그것을 거듭거듭 충고하였기 때문에 왕의 미움을 사서 결국 죽임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하지요.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 왕에게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데리고 사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거듭거듭 간하였기에 헤로디아는 호시탐탐 눈에 가시 같은 요한을 죽일 기회를 엿보며 가슴에 비수를 품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들에게 내린 옳은 충고를 비판과 저주로 받아들여 하느님의 사람인 요한을 죽일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중에 참으로 좋은 기회가 왔고, 그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요한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마르 6,25)”
결국 왕은 마음이 괴로웠지만 이미 맹세한 바도 있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어서 백성들이 예언자로 여기고 있는 요한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것이 불의를 자행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행하였던 것입니다.
아무리 옳은 충고라 할지라도 그 순간에는 나를 비판하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나의 태도를 고치기보다 그 사람에 대한 증오와 저주를 마음에 담아둔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어 옳은 충고를 받아들였다면 진리를 전하는 예언자와 하느님을 박해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하느님의 법을 용기있게 외쳤기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의 이름은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세상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고 있습니다.
영원한 삶을 선택하였기에 현세의 부귀영화와 세상이 가져다주는 모든 것을 거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평신도의 대부로서 영국의 대법관이며 수상으로 살았던 토마스 모어 성인은 헨리 8세 왕의 이혼 문제로 교회법의 혼인의 불가해소성을 주장하여 왕과 의견이 엇갈리자 왕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 부인이 면회를 왔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를 썼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여보, 내가 왕의 말을 들어 혼인의 불가해소성을 무시하고 그 결혼을 인정하여 내가 살 수 있다면 이 지상에서 얼마나 더 오래 살 수 있을 것 같소? 한 20년, 30년? 일시적인 생명을 얻기 위해 영원한 생명을 포기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오, 나는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내 신앙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오.”
예수님께서는“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너희에 앞서 같은 박해를 받았다.”(마태 5,10 - 12)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의 밑거름은 순교자들이 흘린 피의 신앙입니다. 순교자들의 피의 대가로 값진 신앙과 교회의 유산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들의 박해와 순교의 원인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고 세상의 권력에 손잡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인간의 뜻에 순종하기보다 하느님의 뜻에 먼저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은 이 세상의 편안한 삶을 위해 진리를 버리지 않았고 오히려 진리를 위해 몸을 바침으로써 영원한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불의에 항거하며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세례자 요한과 토마스 모어와 같은 진리의 증인이 많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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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정의를 선포하려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비윤리적인 삶을 살고 있는 헤로데 임금에게 바른말을 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헤로데의 비정상적인 아내 헤로디아는 세례자 요한을 미워하였습니다. 헤로데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헤로디아는 자신의 지위를 위태롭게 하는 요한에게 증오심을 가졌습니다.
오늘 복음의 사건에서 우리는 악한 계략과 의인의 희생을 바라보게 됩니다.
헤로디아의 악한 계략으로 세례자 요한이 순교의 피를 흘리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인간의 악한 계략과 요한의 죽음을 통하여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미리 보여 주셨습니다.
대사제와 원로들은 자신들의 권위와 기득권을 지키려고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일 계략을 꾸밉니다. 빌라도는 유다 지도자들의 계략과 군중들의 폭동을 두려워하여 예수님께 사형 선고를 내립니다. 인간의 악한 계략과 의인의 희생은 오늘날에도 지속됩니다.
한 사람의 죄는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며 그 죗값은 후대에까지 이어집니다. 죄의 악순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끊을 수 있습니다.
헤로데는 자신이 죽였던 요한이 되살아날까봐 두려워하였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영혼은 하느님의 심판 앞에 두려워 떨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회개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가담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자신의 삶을 주님 안에서 되돌아보지 않으면, 우리 역시 악한 계략의 동조자로 전락합니다.
그래서 하루를 마감하기 전에 ‘반성 기도’와 ‘통회 기도’를 하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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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유재훈 바오로 신부님]
헤로데 안에서 제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헤로데는 바른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 세례자 요한을 옥에 가두지만 죽이지는 않습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잘못을 꾸짖는 요한의 말을 듣기 싫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의 말을 따릅니다.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는 것이 몹시 괴로웠지만 사람들이 보는 앞이어서 소녀의 청을 들어줍니다.
세례자 요한이 수난을 당하게 된 이유는 헤로데의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입니다. 그처럼 우유부단한 성격이 하느님의 일을 망칠 수 있습니다.
우유부단함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겠죠. 아니,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내어맡기는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든든한 후원자를 만드십시오. 우리에겐 든든한 후원자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을 후원자로 둔 우리는 행복합니다. 비록 내가 재능과 능력이 부족하지만 하느님을 믿고 일을 시작하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실수나 실패를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일으켜 주실 것이니 걱정이 없고, 과거의 향수에 파묻혀 현재를 도피하지 않고 기쁘게 살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혹시 저처럼 우유부단하신 분들, 든든한 후원자 하느님을 마음에 모시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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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 고리>
마르코 6,17-29 (세례자 요한의 죽음)
그때에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사람 고리>
사람이
사람이 고파
사람에게
고리를 건다
사람이
사람이 고파
사람에게 건
고리에 매인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고리가 있다
사람이
있는 곳
그 어디든
고리가 있다
고리와 고리
사이에
사람이 있다
고리가
있는 곳
그 어디든
사람이 있다
고리로
이어지기에
사람은 비로소
사람이다
고리로
이어지기에
사람은 홀로라도
언제나 함께이다
사람이
함께 잇는 고리가
다 같은 것은 아니다
사람을 살리는
선한 고리가 있고
사람을 죽이는
악한 고리가 있다
사람을 살리는
선한 고리는
굳게 이어야 한다
사람을 죽이는
악한 고리는
단호히 끊어야 한다
선한 고리도
악한 고리도
사람이 함께 잇고
사람이 함께 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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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작은 길에 서서….>
제가 5년 넘게 영적일기를 준비하는 기도를 하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합니다. 왜냐면 내가 그 일에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녀 소화 데레사는 그 길을 영적 어린이가 아장아장 걸어가는 “작은 길”이라고 표현합니다.
작은길을 이렇게 표현한 글도 보았습니다. 그 작은 길에는 한 호흡 한 호흡이 합하여 찬양이 되고, 한 방울 한 방울이 보태져 소나기가 됩니다. 한 송이 한 송이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꽃다발이 되는 것과 같이 하느님은 백합과 장미를 만드셨지만, 당신 발치에서 기쁨을 줄 수 있는 팬지나 오랑캐꽃도 만드셨습니다. 나의 약함과 부족함도 주님의 계획이고, 약할수록 주님께 더 의탁함으로 그것은 은총이었음을, 그리고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께서는 나의 약함 안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 하셨음을 영적으로 어린아이의 믿음으로 믿습니다. 아멘.
오늘 성 요한 세례자 수난 기념일 성무일도 저녁기도에서 이렇게 찬미가를 불러드립니다.
“은총의 길을 닦으신 어진 선구자, 진리를 전파하신 주님의 사자, 주님의 앞길 비춘 주님의 등불, 영원한 주님의 빛 선포하셨네. 구세주 이 세상에 나시기 전에, 한걸음 앞서나신 요한 세례자여, 세례를 주님에게 베푸심으로 참 세례 베푸실 분 알려주셨네. 사랑이 지극하신 아버지시여, 우리도 세례자의 가신 길 따라, 세상의 가시밭길 지나간 뒤에, 주님의 후한 갚음 받게 하소서.” 아멘.
세례자 요한(이하 요한)에게 인생은 짧았지만, 요한은 하느님이 주신 사명을 다했기에 승리한 인생이 되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요한은 헤로데와 헤로디아에게 죽이고 싶을 정도로 눈의 가시와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바른 말을 못하고 있었는데 요한이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라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헤로데의 생일날에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주게 되었고, 헤로디아의 요청에 의해서 요한을 죽여 버렸습니다. 요한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의 관심은 오직 하느님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하느님이 주신 사명대로 사는 것이 요한의 삶의 목표였습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이런 묵상을 해보십시오.
“나는 정말 필요한 사람입니까?”
화초는 아름다운 꽃을 통해서, 새들은 아름다운 소리로, 과일은 아름다운 맛으로, 인간은 기도하는 소리로 하느님을 찬미, 찬양합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고운님들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큰 사명을 주셨습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다른 사람이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은 내가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창조주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에는 사명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필요 없는 사람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각자에게 맞는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필요한 사람입니다.” 다시 한번 미친 듯이 크게 웃으면서 한번 외쳐봅시다.
“나는 필요한 사람입니다.” 아멘.
영적 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오늘 세례자 요한의 수난 기념일을 맞이하여, 고운님들도 성 요한 세례자처럼 고운님들의 삶을 통해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작은 일에 충실하고, 받은 은총에 감사하고 보답하며 살아가는 필요한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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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238)
♧♧ 시편 45편 11-12절….
"들어라, 딸아! 보고 네 귀를 기울여라. 네 백성과 네 아버지 집안을 잊어버려라. 임금님이 너의 아름다움을 열망하시리니 그분께서 너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그분 앞에 엎드려라."
* 네 백성과 네 아버지 집안을 잊어버려라...
이 구절은...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할 때 행하는 모세의 규정을 반영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즉 신명기 21장 10-14절을 보면, 이방 여인(여자 포로)을 아내로 맞이할 때 머리를 깎고 손톱 발톱을 손질한 다음, 포로 때에 입었던 옷을 벗기고, 그 여자는 한 달 동안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하여 곡을 한 다음 모든 것을 잊게 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임금의 신부될 이는 임금과의 사이를 벌어지게 할 수 있는 모든 지난날의 인간관계를 끊고 오직 임금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신부인 교회, 즉 주님께 충실한 이들은 걸림돌이 되는 모든 세속적인 것들을 끊어버리라는 가르침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루카복음 9장 62절. 참조) 사실 신부가 고향과 집 생각에만 잠겨 있어 임금을 제대로 섬기지 못한다면 임금의 극진한 사랑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 충실한 이는 이전의 것을 낡은 옷 벗듯이 벗어버리고 새로운 신분과 그에 걸맞은 새로운 삶의 옷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에페소서 4장 22-24절. 참조)
* 그분께서 너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그분 앞에 엎드려라...
사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기본자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영적 신부인 교회, 즉 주님께 충실한 이들이 주님께 순명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더욱이 그리스도는 저희의 창조주이시며, 저희의 구원자로서 저희의 온 삶을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시니 단순한 순명 이상의 찬양과 경배, 그리고 흠숭을 드려야 마땅한 것입니다.
♧♧ 시편 45편 13절…
"티로의 딸이 선물을 가져오고 백성 가운데 부자들이 네게 경배하는구나."
‘띠로...’는 구약 시대 당시 근동 지역에서 막강한 부를 자랑하던 곳입니다. 따라서 ‘띠로의 딸’은 ‘띠로 성읍의 주민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이방 민족 중에서도 가장 부유한 도시주민을 의미합니다.(이사야서 60장 3-14절. 참조) 따라서 이 구절의 의미는 이방 민족의 부유한 자나 특정한 계층을 가리키는 ‘부유한 자’ 모두가 임금의 총애를 받는 왕비에게 예물을 바쳐 환심을 사려고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역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이신 주 예수님께 선택받아 주님의 사랑스러운 영적 신부인 교회, 즉 주님께 충실한 이들이 세상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존귀와 영광을 받게 됨을 나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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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작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밤에 자다가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무릎 쪽에 커다란 통증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너무 아파서 벌떡 일어나 방의 불을 켜니 이불 위에 지네 한 마리가 보입니다. 지네가 자고 있었던 저의 무릎을 물은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제일 먼저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또 물릴 수가 있으니 이 지네를 잡아서 처리하고 물린 부위에 벌레 물렸을 때 사용하는 약을 꺼내어 발랐습니다. 이 지네는 우연히 제 방에 들어오게 되었을 것입니다(아직도 어디로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자신보다 몇천 배나 큰 거대한 인간을 발견해서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저를 물었겠지요.
설마 이 거대한 인간을 처리해서 이곳을 자기 땅으로 만들겠다는 목적이 있었겠습니까? 아니면 저에 대한 억하심정을 가지고 물었겠습니까? 또 그것도 아니면 좋은 먹이인 줄 알고 물었겠습니까? 단지 생존을 위해서 문 것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프기는 했지만, 지네에 대해 억울하지도 않고 복수를 하겠다는 마음도 들지 않습니다.
그보다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지네가 다시는 제 방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받은 상처들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상처를 받으면 먼저 상처의 치유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상처를 치유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을 향한 복수를 비롯한 부정적인 생각에만 머문다면 어떨까요? 가장 필요한 상처의 치유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죽였던 헤로데 임금에 대한 생각을 해봅니다. 그는 헤로디아의 딸의 춤에 즐거워서 사람들 앞에서 맹세를 합니다.
이에 헤로디아와 그 딸은 자신의 결혼이 옳지 않다고 주장을 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달라고 청하지요. 맹세를 깨지 않기 위해서 소원을 들어주지만, 사실은 그 역시 세례자 요한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부정적인 마음이 작용했을 것입니다. 잘못된 맹세는 깨버리는 일이 더 합당합니다. 잘못된 맹세를 지킴으로 인해서 더 큰 죄악으로 치닫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세례자 요한의 말이 잘못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더 큰 죄악으로 치닫지 않도록 맹세를 깨고 올바른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의 잘못은 바라보지 못하고 맹세를 지켜야만 한다는 의무감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혼했던 전처 아버지와의 전쟁에서 대패한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지금까지도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잘못된 왕으로 평가받게 되었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성인께서는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러면 어떠한 해도 입지 않을뿐더러 더 큰 상도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으로 살아가는 삶,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삶을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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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변했어!!!}
성지에서 미사를 마친 뒤, 성당 입구에서 신자들과 인사를 나눕니다. 그런데 어떤 자매님께서 “신부님, 저는요. 신부님 글을 아주 예전부터 보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처음 직접 뵙지만, 신부님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제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십니다. 하지만 맞는 것도 있고, 틀리는 것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19년간 글을 쓰다 보니 오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저 역시 변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좋아한다고 말했던 음식을 지금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도 있고, 예전에는 싫었던 것들이 지금은 너무나 좋아하는 것이 되어있기도 합니다. 사람은 변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주 잊습니다. 그래서 “너 변했어.”라고 누가 말한다면, 그 상대가 사람임을 특히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임을 잊어버린 것이 아닐까요?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함은 나 자신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변할 수 있는 나를 바라보며 남 역시 변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변화 역시 모두 인정하며 받아주시는 주님입니다. 타인의 변화를 인정해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바로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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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8월28일)
산책하면서 동네 구경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어제는 서점을 보았습니다. 가격이 다소 비싸지만 읽고 싶은 책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발견하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서점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 같았습니다. 내면의 울림을 주는 류시화 님의 책을 샀습니다. 며칠은 책 읽는 재미에 빠질 것 같습니다.
책 제목이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새는 날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입니다.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면 좋습니다. 결정했으면 후회하지 말고 앞으로 가면 좋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나를 여러분의 선생으로 모셨습니까? 선과 악을 판단하는 분은 선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판단하고, 비난하고, 자신의 잣대로 평가합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조금만 옆에서 바라보면 그럴만한 사정과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보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나를 따르면 됩니다.’ 아쉬움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결정했으면 앞으로 가는 겁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많은 책을 남겨 주었습니다. ‘고백록, 신국론, 삼위일체론’은 초기 가톨릭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성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시간에 대해서 알고 있는데 시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분명 시간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핸드폰에 일정표가 있고, 약속이 잡혀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두 가지 시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욕망의 시간, 위선의 시간, 탐욕의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시간 속에 사는 사람을 책망하십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내면은 텅텅 비어 있는 사람입니다. 불평과 불만의 시간을 사는 사람입니다. 남을 평가하고, 남을 판단하고, 남을 비난하는 시간을 사는 사람입니다.
다른 하나는 의미와 가치의 시간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런 시간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나무는 독립적으로 서 있어도 하나의 숲을 이루는데 왜 우리는 하나의 숲을 이루지 못하나!’ 우리 안에 있는 시기, 갈등, 질투, 욕망, 원망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의 숲을 이루어야 합니다. 희망의 시간, 믿음의 시간, 사랑의 시간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모두 신앙의 숲을 만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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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원한 삶>
-사랑의 관계-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입니다. 새벽 성무일도시 아름답고 은혜로운 초대송 후렴과 찬미가, 그리고 즈가르야 후렴으로 하루를 시작한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요한은 주님에 앞서 수난을 당하였으니, 천주의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께 어서와 조배드리세.”-
-“드높은 공덕갖춘 행복한 이여/당신은 깨끗하기 눈과도 같고
죄라곤 모르옵는 능한 순교자/은거를 사랑하신 예언자시여.
당신의 높은 성덕 우리게 입혀/굳은 맘 박힌돌을 없애 주시어
거칠고 굽은 길을 평탄케 하며/우리를 지름길로 인도하소서.”-
-“신랑의 친구가 그의 음성이 들릴 때 기쁨에 넘치듯/내 마음도 기쁨으로 가득 차 있도다.”-
예수님 없는 세례자 요한, 세례자 요한 없는 예수님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두분이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을 중심으로 이심전심 얼마나 깊고 아름답고 돈독한 우정관계인지 깨닫게 됩니다.
고립단절의 혼자가 지옥입니다. 제가 웬만해선 쓰기 싫어하는 말마디가 지옥입니다. 그러난 엄연한 현실 또한 지옥입니다. 죽어서 가는 하늘 나라가 아니듯 죽어서 가는 지옥이 아니라 이미 오늘 지금 곳곳에서 목격되는 지옥같은 현실입니다.
관계를 떠나 살 수 없습니다. 존재는 관계입니다. 이어져 연결되면 살고 끊어져 단절되면 죽습니다. 하여 유대紐帶와 연대連帶를 말하는 것입니다. 고독도 그 자체가 아닌 내적 유대를 목표하고 있습니다. 외딴 섬같지만 아래 깊이에서는 하나의 지구에 연결되어 있듯이 말입니다.
제가 요즘 문자 메시지로 이런저런 소식을 전달할 때, 의도적으로 자주 담대하게 사용하는 “사랑하는---”이란 말마디입니다. 사랑이 필요한 분이라 생각될 때는 더욱 사용하는 “사랑하는---”이라는 말마디입니다. ‘혼자’가 아니라는 관계속의 존재임을, 또 자신의 책임감을 일깨우기 위함입니다.
“사랑하는-”일단 우선 고백으로 던져 놓고 보면 사랑은 뒤따라 오는 법입니다. “사랑하는---”이라는 복된 덫에 스스로 매일 필요도 있습니다. 빈말이라도 하면 할수록 좋은 “사랑하는” 이란 말마디입니다. 어제 2년만에 피정왔다는 개신교 자매를 만나 대화를 나눴습니다.
“정신과에 갈까, 명상센터에 갈까 할까 하다 수도원에 왔는데 참 잘한 것 같습니다. 2년전 왔을 당시 남편은 건강했었는데 그 사이 남편은 폐암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렇게 갑자기 돌아갈 줄은 몰랐습니다. 돌아가던 날 아침, ‘나 오늘 갑니다. 목사님 불러 예배하고 싶습니다.’라는 부탁에 목사님에게 연락했더니 바쁘다 오후에 온다 했다가 급히 일정을 바꿔 오전에 왔고 남편은 예배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매는 남편의 이런 마지막 선종의 죽음에 큰 위로의 구원을 체험했고 목사님또한 장례 예배 설교중 이 일화를 인용하며 남편은 하늘 나라에 갔다고 언급했다 합니다. 이렇게 좋은 관계 중에 떠남으로 부인안에 영원히 살게 된 남편입니다. 만일 남편이 아무런 관계 확인 없이 혼자의 외로운 죽음이었더라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었겠는지요.
다 사라져도 관계만은 영원합니다. 우리가 죽어 세상을 떠나도 관계는 영원히 지속됩니다. 주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무엇보다 주님과 사랑의 앎의 관계를 깊이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영원한 생명’이라합니다. 세상을 떠난 성인들같지만 하느님 안에, 우리 안에 영원히 살아있는 성인들입니다.
성인들뿐 아니라 좋은 추억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 주님께 간 수도형제들, 친지들 또한 주님 안에, 우리 안에 영원히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아주 예전에 민들레꽃을 보며 써놨던 “영원한 삶”이라는 시도 생각납니다.
-“꽃졌다하여 끝난 것이 아니다/떠날 채비는 끝났다
민들레 홀씨 형제들/언제 떠나 어디에 닿을 지는/아무도 모른다
임만이 알뿐이다/몇날 동안 참 행복했고 화려했다
이제/샛노랗게 빛났던 하늘 사랑 추억/씨앗마다 가득 담고
임 바람 불기만 기다릴 뿐이다/꽃졌어도 계속되는 생명
바로 이것이 영원한 생명이구나
죽어 사라져도/끊임없이 사랑의 홀씨들 나눴던 삶/죽음은 없다
영원한 삶이다/나눌수록 풍성해지는 생명이다/떠날 채비는 끝났다”-
(2001.5.4.)
민들레 노란꽃을 생각하니 얼마전 고백성사를 본 ‘노란신’이란 어느 자매의 재미있는 이름도 생각납니다. 민씨에 들레, '민들레' 성명을 본적도 있고 진씨에 달래, '진달래'라는 성명도 본적이 있습니다. 꽃졌다 하여 끝난 것이 아니듯 죽었다 하여 끝난 것이 아니라 꽃은 열매의 씨앗으로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의 관계입니다.
꽃피고 지는 모습을 관찰해도 재미있습니다. 봄부터 피기 시작한 꽃들은 줄줄이 형형색색의 꽃들로 이어집니다. 한꽃이 끝나면 다른 꽃이---계속됩니다. 역시 우리가 세상을 떠나도 계속 공동체를 이어갈 형제들입니다. 바로 이렇게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생명의 관계, 사랑의 관계가 영원한 생명입니다. 주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관계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의 죽음 전후로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는 장면과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이 나옵니다. 헤로데의 불의를 꾸짖다 순교한 정의와 진리의 예언자,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과 깊은 내적 관계에 있음을 봅니다. 세례자 요한이 혼자의 외로운 죽음인 듯 하지만 예수님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당신의 죽음도 예감했을 것이며 또 요한의 몫까지 충실히 살 것을 다짐하며 전의를 새로이 했을 것입니다.
외관상으로은 혼자같지만 내적으로는 하느님과, 예수님과 깊은 관계 중에 있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악의 연대’는 밖에서 볼때는 더불어의 관계같지만 내적으로는 혼자입니다. 바로 복음의 악인들인 생각없는, 영혼없는 헤로데 임금, 그이 아내 헤로디아, 헤로디아의 딸 무녀 살로메가 그러합니다. 그대로 내적으로는 고립단절의 지옥을 사는 이들입니다. 이런 생각 없는, 무사유의 사람들에 기생하는 악임을 알아야 합니다.
실제 오늘을 사는 우리 안에서도 영원히 살아있는 세례자 요한이요, 영원한 죽음의 지옥의 사람들을 상징하는 헤로데, 헤로디아, 살로메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의 고립무원의 처지에 있는 예레미야와 복음의 세례자 요한의 처지가 흡사합니다. 이런 사면초가, 고립무원의 처지에서도 끝가지 견딜 수 있는 구원의 힘은 주님과의 관계였음을 봅니다. 예레미야와 주님과의 깊은 결속 관계를 알 수 있는 다음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오늘 내가 너를 요새 성읍으로, 쇠기둥과 청동 벽으로 만들어 온땅에 맞서게 하겠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위기상황일수록 주님과 깊은 신망애信望愛의 관계는 절대적입니다. 이래야 끝까지 무너지지 않고 자기를 견지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날로 당신과의 관계는 물론 형제들과의 관계도 깊이해 주십니다. 관계의 정화와 성화, 증진에 미사은총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화답송 다음 시편의 고백은 예레미야는 물론 예수님, 세례자 요한, 그리고 성인들과 모든 믿는 우리들의 고백처럼 들립니다.
“주 하느님, 당신은 저의 희망, 어릴 적부터 당신만을 믿었나이다. 저는 태중에서부터 당신께 의지해 왔나이다. 어미 배속에서부터 당신은 저의 보호자시옵니다. 주님, 저를 구원하소서.”(시편71,5-6ㄱ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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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현명한 바보>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 많으면 힘들어 집니다. 왜냐하면 자기 잘난 맛에 살기 때문입니다. 주장을 굽힐 줄 모르고 계산을 잘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우선적으로 챙깁니다. 그리고 상대를 의식하다가 얼굴이 굳어집니다.
그러나 바보와 함께하면 살기가 수월합니다. 그들은 계산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손해를 봐도 손해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챙길 줄도 모르고 웃으며 살아갑니다. 어쩌면 그들이 진짜 똑똑한 사람입니다.
오늘 기억하는 성 요한 세례자는 바보였습니다. 인간적인 계산을 하였더라면 헤로데 왕에게 잘 보여 자기의 권세를 누릴 수도 있었는데 해야 할 말을 서슴지 않고 했습니다. 옳고 그름을 명확히 했습니다.
요한은 헤로데 임금이 임금으로서 해서는 안 될 부정한 결혼을 하였다는 잘못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목이 베어져 죽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볼 때는 정말 바보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목숨보다도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러있는 것이 행복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눈에 바보가 될지언정 하느님을 놓치지 않길 희망했습니다. 그리고 빛이 되었습니다.
헤로데 왕은 모든 권력을 가지고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을 지녔지만 지혜도 없었고 헛 똑똑이입니다. 경솔한 말 한마디 때문에, 그리고 헛된 맹세 때문에 요한의 목을 베도록 명령하였습니다.
몹시 괴로웠지만 결국은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위신과 체면을 선택하는 계산을 하고 말았습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함으로써 하느님 앞에서는 그야말로 멍청한 바보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함부로 맹세를 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큰 고통을 가져올 것인지를 안다면 쉽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성공을 기대하지 말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하느님을 선택하는 현명한 바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창세기26장에 보면 우물을 파는 이사악의 얘기가 나옵니다. 중동지방에서 우물은 한 부족의 운명이 달린 것이기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물을 판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물길을 잡는 것도 그렇고 또 모래땅에서 우물을 파기란 어려움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이사악은 일곱 개나 팠습니다. 열심히 파 놓으면 주위 사람들이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러면 조용히 자리를 옮겨 또 파고 그러다 보니 일곱 개나 파게 되었습니다.
똑똑하고 잘 난 사람은 우물을 파지 않고 파 놓은 우물을 차지하려 머리를 썼습니다. 그러나 이사악은 그런 풍조에 물들지 않고 바보가 되어 우물파기에 열중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나의 종 아브라함을 보아서 내가 너에게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의 수를 불어나게 하겠다”(창세26,24).하시며 이사악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사악은 그곳에 천막을 치고 그의 종들은 그곳에서도 우물을 팠습니다. 결국 바보 이사악이 승리하였습니다. 우물을 빼앗았던 사람들은 똑똑한 것 같았지만 불행하게 살았습니다. 바보처럼 우물을 빼앗기고 또 빼앗겼던 이사악은 이미 주 하느님을 차지했습니다.
복음에 보면 죽은 이는 요한 세례자이고 살아있는 자는 헤로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죽은 자는 헤로데요, 살아있는 이는 요한 세례자입니다. 성 요한 세례자나 이사악이 바보처럼 보였지만 현명한 바보, 진짜 똑똑이입니다.
그러나 똑똑하고 잘 난 것처럼 보인 사람들은 헛 똑똑이였습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하느님을 선택하는 현명한 바보, 지혜로운 사람이 되길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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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주님의 길을 준비한 충직하고 겸손한 세례자 요한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의 미사 말씀들에서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예레 1,17).
주님께서 예레미야를 파견하십니다.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는 행동은 준비된 종의 자세이면서 분연히 자기의 소명을 다할 태세를 갖춘 태도입니다. 예언자는 주님께서 입에 담아 주신 말만 합니다. 주님의 명령이 그의 귀와 마음을 거쳐 입으로 선포되지요. 진정한 예언자는 주님의 말씀에 자기 것을 섞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언자는 자기가 전한 말씀 때문에 박해를 받을 겁니다.
복음은 우리가 잘 아는, 세례자 요한의 비극적 죽음을 다룹니다. 이 대목에는 세 부류의 "말하기"가 등장합니다.
먼저 세례자 요한의 "말하기"입니다.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마르 6,18).
권력자의 비위를 지적하는 일은 늘 죽음의 위험이 따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외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예언자입니다. 이미 그의 가슴에 하느님의 불덩이가 자리하기에 이를 외면하고 목구멍 아래로 가두어 둘 수 없습니다. 그랬다가는 질식해 버리고 말 테니까요. 복음을 선포하고 진리를 전하며 칼날이 목에 닿아도 진실을 외칠 때 예언자의 마음은 가장 자유롭고 홀가분합니다. 이 자유로움은 하느님 말씀의 통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증거입니다.
두 번째 "말하기"는 헤로데의 것입니다. 비극적 결말을 초래할 수 있는 속 빈 권력자의 허세 가득하고 경솔한 "말하기"지요.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은 맹세까지 하였다"(마르 6,22-23).
힘을 지닌 자의 가벼움이 초래한 "말하기"는 당장 자기 위신과 체면을 구하려는 만용을 넘어 폭력으로 변질됩니다. 그 결과는 예언자의 죽음, 하느님 말씀의 죽음이지요.
세 번째 말하기는 헤로디아와 그녀의 딸 살로메의 "말하기"입니다.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 청하였다"(마르 6,24-25).
사람을 해치는 죽음의 "말하기", 악이 주도하는 "말하기"입니다. 그녀들은 개인적 원한을 한 의인의 생명으로 되돌려 받고, 역사에 자기들의 부끄러운 이름을 각인합니다.
약하고 부족한 우리는 이 세 "말하기"를 두루 체험하며 삽니다. 나의 대화에서 어느 "말하기"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느냐 하는 것은 본인이 잘 알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적 시각에서 비극적 결말을 앞당긴 것으로 보이는 세례자 요한의 "말하기"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복음 환호송).
하늘 나라를 소유하는 "말하기"는 오로지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고 성령께 순종할 때 가능합니다.
"주님, 임금들 앞에서 당신 법을 말하며 저는 부끄러워하지 않으오리다. 당신 계명을 되새기며 끝없이 사랑하나이다"(입당송).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우리 입과 심장에 담아주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 곧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올 때 그 말씀을 자기가 미리 판단하지 말고 부끄러움 없이 있는 그대로 선포하는 것이 곧 말씀이신 분을 있는 그대로 신뢰하고 사랑한다는 표시지요.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면서 신약을 준비하고 그 포문을 열어 준 세례자 요한의 존재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정 무엇을 믿고 무엇을 말할 것인가 진지하게 묻습니다. 온갖 거짓과 기만, 자괴감이 뒤엉켜 발효된 "말하기"는 또 다른 악을 양산하거나 한풀이에 그칠 뿐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할 힘이 없습니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예레 1,19).
하늘 나라를 차지한 세례자 요한의 "말하기"를 하느님께서 친히 엄호하시니 두려워하거나 움츠러들지 말고 진리를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하루가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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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신부님의 영성의샘물※
♥우리는 ‘빈 단지’이지만 그 안에 횃불이 있다면,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빛이 어둠을 물리쳤다. 사랑은 죽음보다 훨씬 강하다. 이제 일상의 역사 안으로 들어가 우리의 상처, 한계, 연약함, 죄를 주의 깊게 살펴보자. 우리의 상처와 죄를 항상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랑받고 있다는 밝은 마음으로 감싸 안자. 우리는‘빈 단지’이지만 그 안에 횃불 (판관 7, 19-20)이 있다면,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불완전한 나에게」에서
♣우리의 유일한 부富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우리는 빈 단지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성 바오로가 말하듯이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는 보물처럼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빛이 빛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남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2코린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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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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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영산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님]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마르6,25)
오늘은 그리스도의 선구자, 그리스도에 앞서 파견되어 그리스도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는 특별한 영예를 부여받은 세례자 요한의 수난(죽음)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정의를 외치다가 불의한 헤로데의 칼에 순교당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 안에서 두 모습을 묵상해 봅니다. 이 두 모습은 우리 안에 그리고 내 안에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첫 번째 모습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사람들,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바로 오늘 독서에 나오는 예레미야 예언자와 같은 수많은 예언자들의 모습이며,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의 정의(뜻)를 외쳤고,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전부를 바친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모습은 불의에 적당히 타협하면서 자신들만의 이익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죽인 전형적인 헤로데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너의 구원과 세상 구원에는 관심이 없고, 죽음과 동시에 사라지고 말 것들에 집착하면서 살아갑니다.
이 두 모습은 우리 안에 함께 공존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두 모습이 함께 공존하지만, 사도 바오로의 권고 말씀처럼 함께 작용해서 첫 번째 모습인 하느님의 정의(뜻)로 나아가야 합니다.(로마8,28 참조)
오늘도 하느님의 정의(뜻)가 승리할 수 있도록 깨어있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사랑의 법을 이해할 수 있도록 주님의 도움을 간청합시다. 이 법을 간직하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모든 것을 뛰어넘어 서로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바오로 성인의 다음과 같은 권고는 우리 모두를 향한 것입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12,21). 그리고 '낙심하지 말고 계속 좋은 일을 합시다'(갈라6,9)."('복음의 기쁨', 101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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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마르 6,18)
누가 왕에게 직언할 것인가?
요한은 폭군 한 사람이 혼인에 관한 거룩한 명령을 폐기하는 것을 보고는 광장 한복판에서 대담하게 외쳤습니다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를 차지히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마르 6,18 참조). 우리는 동료 봉사자들도 똑같이 꾸짖어야 한다는 시실을 요한에게서 배움니다. 그 일로 죽음을 맞게 될지라도 형제를 꾸짖어야 하는 의무를 저버리지 마십시오 ‘나와 무슨 상관인가? 나는 그 시람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냉정하게 대답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오직 마귀하고만 아무 상관이 없을 뿐, 모든 인류와 많은 면에서 공통점을 지닙니다. 모든 이가 우리와 똑같은 본성을 지니고, 같은 지구에서 살아갑니다. 같은 음식으로 양육되고, 같은 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모두가 똑같은 법을 받았으며, 모두가 우리와 더불어 같은 축복을 받도록 초대받았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하지 맙시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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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적정선 지키기>
"원하는것은
무엇이든 청하여라"
불륜을 저지른 임금이
여인의 매혹적인 딸에게 넘어가
내뱉는 말이 법이 되고 맙니다.
혼탁해진 생각과 감정에
사로잡혀 걸려든 것이죠.
입밖으로 내뱉은 말이
어떤 사태를 일으킬지
알지 못한채 무엇이든
청하라는 덫에 걸려듭니다.
우리가 사는 곳곳에서
말에 의해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들이
곳곳에서 일어나니 안타깝습니다.
'무엇이든 다'라고 했다고
개념없이 수준이하의
생각과 행동을 한다면
기가막혀 말이 안나옵니다.
무개념은 상식선을 벗어나
큰해를 입힐수 있으니
상대 수준을 파악하는것이
무엇보다 필요하겠습니다.
'적정선을 지킬 때
사람이 사람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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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마르 6, 25)
살인의 잔인함은
이제 멈추어야
합니다.
폭력 앞에서
점점 더 작아지는
우리의
인격입니다.
이 세상은
극과 극을
치닫고 있습니다.
광기어린
폭력성 앞에서
할 말을 잃게 됩니다.
폭력과
살인으로는
결코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아픈 역사는
너무나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살인의 역사를
아프게 반성합니다.
나의 지나친
욕심으로
누군가의 목이
달아납니다.
무책임한
인간의 욕망으로
요한 세례자가
수난을 받습니다.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하느님의 소중한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힘을 다해
사랑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하늘 나라의 생명을
죽이는 것입니다.
내가 살기위해
수난당한 많은
이들의 소중한
생명 앞에 머리를
숙입니다.
오늘도 제2의
요한 세례자가
치기어린 광기로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당하고 있음을 아파합시다.
살인과 폭력
광기와 잔인함은
생명의 소중함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를 정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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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편집/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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