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정법 사용 문파 개요
1)티베트의 밀교
(1)티베트 밀교 연원
①밀교의 정의
「밀교(密敎)」란 「비밀불교(秘密佛敎)」의 약칭이다. 인도, 유럽, 미국의 학자들은 그것을 「비교적 불교(比較的 佛敎, Esoteric Buddhism」이라던가 불교 내의 비교라 부른다. 보통 비밀불교라 부르기도 하고 교의상의 특색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포착한 이칭(異稱)도 그 수가 많다.
불교는 인도에서 일어났고 동남 아시아에 널리 전파된 가르침이기 때문에 그 원의(原義)를 구하는 데 있어서도 인도의 입장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많은 학자들이 여러 가지 실례를 수집하고 그 경중을 판단해서 대표적인 것으로 보여지는 용어들을 들고 있으나 누구에게 있어서도 반드시 확인되고 있는 호칭은 금강승(金剛乘; Vajryana)이다.
인도에 있어서 비밀불교의 개척자인 Bhatta-carya 박사는 후세에 타락한 형태의 불교를 금강승 혹은 딴뜨라불교라 부르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유럽의 학자들은 이러한 견해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말하는 밀교에 상당하는 고대 인도어의 일반적 호칭은 금강승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금강승이 교리와 교단과 경전을 포함해서 인도 후기 불교의 호칭인 것과 더불어 그 경전의 특색을 포착하는 또 하나의 호칭 「딴뜨라불교」(Tantric Buddhism)가 외국인 학자들이 인도불교를 부르는 통칭이다.
그러나 그 호칭은 본래 딴뜨라 승(乘)을 의미하였으나 현재에는 그 이미지가 꽤 달라진 것으로 되어 있다. 딴뜨라의 정의는 곤란하나 그것은 베다 이외의 체계인 것은 틀림없고 실제는 성력(性力; Sakti, 여성의 에네르기)의 숭배가 중심으로서 남녀의 합일의 교리와 실천이 중요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명확하다. 그것은 불교 딴뜨라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따라서 그 점만으로는 비성력적(非性力的)인 체계를 포함한 호칭인 금강승과 성력적인 세계를 포함한 호칭인 금강승과 성력적 체계의 명칭인 딴뜨라 불교 혹은 딴뜨리즘과는 구별할 필요가 있다.
②밀교의 역사적 전개
인도, 티베트 등 모든 불교권에 걸친 밀교를 포함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서 최근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은 초기, 중기, 후기의 세 시기로 나누어 설명하는 밀교의 역사적인 분류법이다. 이것은 밀교의 발생국인 인도의 밀교전개를 기본으로 한 것이지만 모든 밀교권에도 적용할 수 있고, 현대에는 가장 표준이 되는 분류법으로 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초기밀교란 인도에서 4세기로부터 6세기에 걸쳐 성립한, 다라니를 중심으로 하고 체계가 잡히지 않은 밀교로서, 일본에서 분류하는 잡밀에 해당한다.
다음 중기밀교란 7세기 경 새롭게 인도에서 성립한 《대일경》·《금강정경》 등을 기반으로 하는 체계적인 밀교로서 당나라 시기의 중국을 통해서 일본에 전해진 것은 이 단계의 밀교이며 순밀이 여기에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후기밀교란 8세기 인도에서 성립한 탄트리즘의 전개와 함께 성립한 밀교로서 탄트라불교라 불리고 있다. 이 단계의 밀교는 지금까지 거의 취급되지 않았던 성적 행법과 생리적 행법을 대담하게 도입하여 때로는 좌도밀교라는 이름하에 심한 혐오감을 느끼게 한다. 이 계통의 밀교는 중국 송대(宋代)에 한역되었지만 유교적 윤리관에 지배되어 있는 사대부의 나라에 수용될 리가 없었다. 또한 일본에도 송나라에 갔던 성심(成尋) 등에 의해 일부의 한역본이 소개되었으나 끝내 빛을 보지는 못했다.
일본에서는 역사적·질적인 차이를 포함시킨 가치관으로 밀교를 분류할 경우 흔히 순밀(順密)·잡밀(雜密)이라는 분류법을 사용한다.
잡밀은 정식으로 잡부밀교라 부르며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어수선하고 정비되지 않은 밀교를 의미한다. 구체적으로는 최증(最澄)·공해(空海)가 당에 들어가기 이전 즉 나라 및 헤이나시대에 행해지고 있던, 충분히 체계화되지 않은 밀교를 말한다. 그것은 순밀과 비교할 때 다음 네 가지 점에서 다르다.
우선 첫째는 본존(本尊)이 되는 존격(尊格)이 순밀처럼 만다라의 중심이 되는 대일여래(大日如來)가 아니고 석가여래·약사여래 등의 전통적인 여래, 혹은 십일면·천수·불공삭(不空索) 등의 특수한 형태를 가진 관음인 변화관음 등이라는 점이다.
둘째는 나라시대의 밀교를 보면 명확하듯이 제존의 다라니를 외는 것이 중심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신밀(印相을 겸하는 것), 구밀(진언, 다라니를 외우는 것), 의밀(마음으로 명상하는 것)의 삼밀행(三密行) 중에서 구밀만이 확립되어 있을 뿐이다.
셋째 이 단계의 밀교에서는 치병(治病), 구아(求兒), 연명(延命) 등 현세적인 이익이 목적으로 되어 있고, 자기에게 비장되어 있는 불성을 개오하는 소위 성불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다.
넷째 밀교적 세계의 축도라 할 수 있는 만다라가 완성되어 있지 않다. 이상의 특징을 가진 밀교를 잡밀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에 반해 순밀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는 홍법대사 공해, 전교대사 최증 등이 확립한 진언, 천태의 양 밀교를 말한다.
우선 첫째 본존이 대일여래라는 새로운 성질을 가진 우주적 불격(佛格)으로 되어 있다.
둘째 신구의라는 3종의 표현 형태(三密)를 총합적으로 구사하는 전신적 행법이 완성되어 있다.
셋째 종래의 현실적 목적과 함께 자신들이 불을 체현하는 즉신성불의 사상이 구극목표로 되어 있다.
넷째 대일여래를 중심에 실은 만다라가 완성되어 큰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는 점 등을 열거할 수 있다.
이상의 두 가지 분류법 외에 인도와 티베트에서는 다양한 밀교의 분류법이 시도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은 티베트의 대학장 푸톤(티베트의 유명한 불교학자) 등이 사용한 다음의 4종분류법이다. ①소작(所作)탄트라 ②행(行)탄트라 ③유가(瑜伽)탄트라 ④무상유가(無上瑜伽)탄트라 이들은 밀교의 경전을 네 가지 계통으로 분류한 것이다.
우선 첫째 소작탄타라는 수법에 사용하는 제단 등의 조영법, 공물의 조달법 등 기초적인 작법을 설한다. 다음 수행탄트라는 특정한 존격과 만다라의 제존에 대한 구체적인 예배법을 설하고 있다. 셋째 유가탄트라는 3밀행이 완전히 갖추어지고 진언과 인상(印相)과 만다라를 사용해서 자기 자신이 성스러운 대일여래와 다름이 없다고 실감하는 것이다. 이들을 앞의 역사적인 분류법에 적용시키면 소작탄트라와 수행탄트라의 일부가 초기밀교에, 수행탄트라의 나머지와 유가탄트라가 중기밀교에 해당한다. 무상유가탄트라는 최고의 탄트라라는 의미로 8세기 이후 인도·티베트에서 크게 유행한 후기밀교를 말한다.
③밀교의 지리적 전개
인도에서 발생한 밀교는 여러 가지 문화의 유전에 호응하면서 각각의 불교권으로 전파하여 갔다. 그 흐름의 방식은 실로 다양하지만 그 루트를 요약하면 다음 세 가지로 상정할 수 있다. ①북전(北傳)·비단길 루트 ②남전(南傳)·남해안 루트 ③동전(東傳)·히말라야 루트 북전·비단길 루트라고 이름한 흐름은 인도 불교의 대부분이 거친 경로이다.
즉 인도 중심부에서 육로 케시미르, 간다라를 경유해 힌두쿠시 혹은 파미르 산맥을 넘어 비단길의 동쪽으로 해서 서쪽으로부터 중국에 이르는 통로이다. 이 루트는 현장을 위시하여 인도에 간 대다수의 구법승, 혹은 인도에서 동쪽으로 온 승려들이 밟았던 길이다.
밀교사의 측면에서 보면 《대일경》을 한역한 선무외를 필두로 송대의 시호, 천식재, 법호 등 번역가들이 왕래하였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북량(北凉)시대에 서역의 주술법을 전한 불도징(佛圖澄), 《대일경》의 범본을 입수하였으면서도 중도에서 객사한 무행(無行) 등도 이 루트와 인연이 있었던 사람이다.
이 루트의 중계지점이 되었던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 도시에도 일찍이 밀교가 전해졌으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소멸하여 그 흔적을 상세히 검토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지만 투르판, 칼라호트 등에는 금강저와 촉루를 가진 존상의 벽화가 남아 있어서 보다 주의깊게 탐사하면 귀중한 유품이 재발견될 여지가 있다.
또 불교문화의 보고인 돈황에는 다수의 잡밀경전에 섞여서 극히 일부이기는 하나 순밀계 문헌과 회화자료도 확인되고 있으므로 얼마간의 형태로써 밀교를 파악할 수 있다. 남전이라고 하는 남해 루트 또한 밀교 유전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육로에 비하면 위험성을 띠고 있으나 구법심(求法心)에 불타는 많은 사람들이 이 바다를 건너간 것이다.
남해로의 주류는 동인도의 타무라리푸티와 남인도의 칸치 등에서 출항, 슈마트라·쟈바 등을 지나 중국 남해를 북상하여 중국의 남쪽에 이르는 길이다. 이 루트를 지난 밀교승으로서는 《금강정경》을 처음 중국에 전한 금강지, 그의 제자로서 금강지의 사후 밀교경전을 구하러 인도와 스리랑카에 간 불공(不空), 공해(空海)의 스승 중 한 사람이고 많은 밀교경전을 번역한 반야(般若)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밀교승은 아니나 이들보다 앞서간 인물로서 《남해기귀전》·《서역구법고승전》을 지은 의정의 이름도 뺄 수 없다. 남해로에 있어서 밀교의 중계기지는 아무래도 쟈바섬이 아니었나 추측된다. 쟈바에는 지권인 대일여래·금강살타·헤루카 등의 전형적인 밀교존상의 금동불과 석상이 남아 있다.
이상의 두 가지 루트가 최종적으로는 중국까지 도달했음에 반해, 세 번째 루트는 인도에서 곧 바로 티베트로 통하는 것이다. 이 루트를 동전(東傳)이라 부르는 것은 다소 문제가 있으나 동북방면에의 전파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좋을 듯하다. 지리적으로 볼 때 결코 멀다고는 할 수 없는 티베트에는 7세기경부터 인도불교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특히 '삼예논쟁'에서 일단 인도불교측이 승리를 거둔 것은 그 증거의 하나이다. 파드마삼브하바, 아티샤 등 인도에서 간 저명승들도 적지 않다. 역으로 티베트에서 밀교를 구하러 인도에 들어간 린첸삼포와 마르파도 중요하다. 티베트에 전래된 밀교는 시대와 더불어 당연히 변화하고 있으나, 중국에 전하여진 밀교가 초기·중기의 두 시기의 밀교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9세기 이후에도 끊임없이 인도와 접촉을 가졌던 티베트는 후기밀교, 즉 무상유가밀교를 대량으로 유입한 것이다. 따라서 밀교미술상에서도 남녀 양존이 서로 포옹하고 있는 환희불이 다수 발견되는 것이다. 그 결과 앞의 두 가지 루트를 통한 밀교와는 질적으로 다소 차이가 있음을 염두하여 둘 필요가 있다.
④티베트 불교의 전래
티베트에 불교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국교로 정해지는 것은 명군으로 알려진 티송데첸(742-797)왕 때의 일이지만, 이미 송첸감포(581-649)왕 시대에 불교는 티베트에 전해진다.
불교의 전래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송첸감포왕의 중국과 네팔에서 맞아들인 부인들이다. 송첸감포왕은 그의 아들인 궁송궁첸(621-643)왕의 부인으로 당에서 문성공주(文成公主)를 맞이하지만 궁송궁첸왕이 일찍 죽은 까닭에 후에 문성공주를 자신의 비로 맞이한다.
문성공주는 죽은 자신의 남편인 궁송궁첸왕을 위해 라사에 라모체사(Ramo che, 小招寺)를 건립하여 중국에서 가져온 불상을 안치하고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송첸감포왕의 또 다른 부인인 네팔계통의 티춘(khri btsun)왕비도 남편인 송첸감포왕이 죽은 뒤 투르낭('Phrulsnang, 大招寺)사를 건립하여 망부의 명복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이와 같이 중국과 네팔의 두 왕비에 의해 불교가 전래되었지만 실제 송첸감포왕이 불교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티베트에 전래된 불교가 새로운 계기를 맞이한 것은 약 반세기를 지나 중국에서 금성공주(金城公主)가 들어온 뒤부터다. 열성적인 불교신자였던 그녀는 남편인 티데축첸(704-754)왕을 설득시켜 황폐해진 라모체사와 투르낭사를 복구시키고 또한 새로운 절을 세우게 했다. 아울러 중국에서 승려를 초빙하여 머물게 하였다.
이러한 갑작스런 불교의 움직임에 대해 당시 본교(티벳 전통종교)도를 중심으로한 반불교세력의 저항도 나타나지만, 왕비의 노력은 티베트에 불교가 정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티테축첸왕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모든 사정은 변하여, 실권을 잡은 반불교세력은 사원을 파괴하고 승려를 추방하는 등 불교 전래이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가고자 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왕위에 오른 사람이 나이 어린 티송데첸왕으로 그에 의해 불교는 비로서 티베트 사회에 정착하게 된다. 티송데첸왕은 성년이 되자 권신들에 의한 파불정책을 배척하고 불교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자 결심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선왕인 티데축첸왕에 의해 중국에 파견되어 불교를 배워온 여러 사람들이 있었으며, 특히 그 중에는 삼예의 종론 때에 불교계의 최고지위에 오른 페르양(dPaldbyangs)도 포함되어 있었다.
페르양은 중국에서 귀국 도중 정중사(淨衆寺) 무상금화상(無相金和尙)을 만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하지만 불교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자 결심한 티송데첸왕은 신하로 하여금 당시 네팔에 체재하고 있던 나란다사원의 대학장인 샨타라크시타(725-783)를 티베트에 초청하는데 성공했다.
다시 말해 티송데첸왕은 인도불교를 티베트 불교의 근간으로 삼고자 하였던 것이다. 산타라크시타는 《섭진실론》·《중관장엄론》등을 지어 이미 명성이 높았던 인물로 특히 이 샨타라크시타의 사상은 후에 제자인 카발라 실라의 사상과 더불어 티베트 불교 사상의 바탕을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티베트에 들어간 샨타라크시타는 그다지 오랫동안 머물지는 못하고 다시 네팔로 돌아오게 되며, 후에 다시 왕의 초청으로 티베트에 들어가게 된다. 두 번째로 티베트에 들어갈 때 샨타라크시타는 파드마삼바바를 동행하였으며, 이 파드마삼바바의 주술적 능력에 의해 당시의 반불교세력이 제압되었다고 전해진다. 이와 같이 하여 불교 도입의 틀이 형성된 티베트는 775년경 부터 왕의 명령으로 삼예 대승원이 건립되고 대본당이 완성된 779년에는 샨타라크시타가 계사가 되어 최초로 티베트인에게 구족계가 주어져 티베트에 최초로 승단이 형성하게 된다.
이와 같이 티베트는 인도불교를 바탕으로 한 불교의 전개가 이루어지지만 중국과도 왕비의 혼인 등 밀접한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관계는 당시 티베트가 대단히 강성하여 "토번제국"으로 불릴 정도로 강력했던 것에 연유하는 것으로 특히 786년경에는 돈황을 함락시켜 기세를 드높였다. 이 돈황 함락을 계기로 티베트에 들어온 사람이 중국의 선승 마하연으로, 그의 《불사불관(不思不觀)》의 선은 당시 티베트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마하연은 왕비의 후원을 얻어 크게 세력을 떨쳤지만, 이미 형성된 인도불교에 바탕을 둔 승단과 왕에 의해 한때 선종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선종 측의 강력한 항의와 자살하는 자가 속출하는 사태에 이르러 해금령이 내려지고 이러한 사태를 계기로 인도불교와 중국불교의 갈등을 해소하고자 왕에 의해 시도된 것이 바로 "삼예의 종론"이었다.
인도불교와 중국불교의 대립은 이미 샨타라크시타에 의해 예견되어진 일로서, 산타라크시타는 유언으로 후에 그러한 논쟁이 일어나면 자신의 제자인 카말라실라(740-797)를 부르도록 지시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샨타라크시타의 유언을 기억한 티송데첸왕은 신하로 하여금 카말라실라를 부르도록 하고, 삼예 사원에서 논쟁을 시켜 진 쪽은 티베트를 떠나도록 명령하였던 것이다. 이 삼예 사원의 논쟁이 곧 "삼예의 종론"으로 이는 티베트 불교의 향방이 걸린 운명적인 대사건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유명한 부든(Buston)의《불교사》에 의하면 이 논쟁은 티송데첸왕 앞에서 마하연이 먼저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그에 대해 카말라실라가 또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으로 진행됐다. 먼저 마하연은 일체 행위를 부정하고 《불사불관》에 의한 돈오를 설하는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이것에 대해 카말라실라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는 《불사불관》은 기절의 상태와 같은 것으로, 그것은 반야에 대한 지(智)마저도 버리는 것이라고 논한다. 또한 카말라실라는 무분별지(無分別智)란 단순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일체법은 무자성이다"라는 명확한 언어표현을 동반한 공성의 지(智)가 장기간의 수행을 통하여 순차적으로 달성되어 얻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돈오적인 마하연의 선종과 수행 자체적인 카말라실라의 논쟁은 반복되었지만, 결과는 결국 카말라실라의 승리로 돌아가고 마하연은 돈황으로 추방된다. 카말라실라의 승리로 인해 티베트불교는 인도불교적인 방향을 명확히 견지하게 되었고, 아울러 카말라실라가 남긴 《수습차제》 3권은 후에 아티샤, 총카파에게도 영향을 주어 티베트 불교사상의 바탕을 이루게 된다.
《삼예의 종론》은 티베트 불교의 향방을 결정한 중요한 사건으로 이는 인도불교와 중국불교의 대립, 점수와 돈오의 대립 등으로 달리 표현할 수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방향을 확립한 티베트불교는 이후 인도불교문헌의 본격적 번역과 연구 등이 이루어져 불교국가로서 기틀을 확립시켜 간다.
<여러 문파의 관정법에 관한 소개/ 이재흥*․안훈모**․이은미*** /*․**․***: 대한의료기공학회, ***: 대한한방소아과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