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완. 이합규
교리에 가장 밝았던 중인 출신 신자
김계완 : 7-1802, 세례명 시몬, 서소문 밖에서 참수
이합규 : ?-1801, 세례명은 미상, 서소문 밖에서 참수
김계완(金啓宂, 시몬)은 중인 집안 태생으로 자는 백심(白心, 혹은 伯深)이었다. 서소문 밖 양대 전동에서 살았던 그는 1791년 최필공에게서 교리서 들을 빌려 보고 입교한 뒤 최창현에게 세례를 받았다. 1791년 신해박해 때 최필공, 권일신, 최필제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는데, 그때 이름은 김계환이었다. 그렇지만 동일 인물로 보인다.
이합규(苄鴿逵)는 전복(典僕) 이인찬의 아들로, 그 자신은 반복(泮僕)이었다. 다른 이름은 용겸이고, 세례명은 알 수 없다. ‘사학 매파(邪學媒婆)로 유명한 정복혜가 ”그는 교주(敎主)여서 밤에도 간혹 초청해 왔습니다”라고 진술한 것을 보면, 이합규는 가성직 조직에서 이승훈으로부터 신부로 임명된 10명 가운데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두 사람 중 하나였거나, 아니면 ‘육회’ (六會)의 회장직을 맡지 않았었나 생각된다.
그는 일찍이 어머니 김소사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는데. 그의 어머니는 김대득의 어머니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었다. 그 후 이합규는 최필제를 찾아가 교리를 토론하곤 하였으며, 또 손가의 어머니에게서 한문과 한글로 된《삼본문답》과《진도자증》, 한글로 된《성교일과》등을 빌려 보고 천주교의 진리를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가 읽은《삼본문답》이나《성교일과》는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교리서요 기도서였지만, 《진도자증》은 예수회 소속 중국 선교사 샤바냑(E.deChavagnac. 沙守信) 신부가 지은 것으로, 상당히 수준 높은 교리서였다. 따라서 그가 이 책을 읽었다는 것은 중인 계급이 지만 그만큼 한문에 능통했고, 또 교리 지식도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강완숙은 그를 김계완과 함께 교리에 가장 밝은 인물 가운데 하나로 평가하였다. 그가 선교한 사람은 그의 누이동생인 동정녀 이득임, 최봉득, 최설애, 정복혜, 정명복, 외숙 김득호, 외숙모 정분이등이었으며. 그 밖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선교한 것으로 보인다.
하느님 안에서 모두 한 형제
김계완은 약방을 운영하며 교회 활동에 전념하였는데, 홍필주가 충훈부 뒷 마을에 주문모 신부와 살 집(강당)을 마련할 때에는 황사영, 이취안과 함께 각기 돈 100냥을 희사하기도 하였다. 그 후로 그는 최필공, 최 창현, 정약종 황사영 이현 이합규 등과 신앙 공동체의 일원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고. 주문모 신부가 숨어 있는 강완숙의 집에 드나들며 학문을 갈고닦았다.
그는 비록 양반 신분은 아니었지만, 정약종과 형제처럼 친숙하게 지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이 무렵 천주교를 신앙하는 양반들 간에는 하느님 앞에 모두 한 형제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계완은 주문모 신부가 강완숙의 집에 와 있을 때 침구를 정성스럽게 마련해 주었고, 또 주 신부의 복사로 교회를 위해 헌신하였다.
1800년 12월경 박해가 크게 일어날 것을 예감한 김계완은 사창동에 있는 이합규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이합규 역시 유명한 천주교 신자로 지목되어 그 집도 안전한 곳은 못 되었다. 이에 김제완과 이합규는 이듬해 1월 강완숙에게 편지를 보내 좀 더 안전한 곳을 주선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자 강완숙은 용호영 근처에 있는 김연이의 집을 알려 주었다. 이들이 김연이의 집에 숨어 있을 때 황사영도 강완숙의 안내로 이 집으로 피신해 왔다.
황사영이 온 바로 다음 날인 2월 11일 최창현의 신문 과정에서 김계완의 이름이 드러나자. 금부에서는 그를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포도청에 내려보냈다. 신변이 더 위태로워진 것을 느낀 김계완은 이 서방이라고 호패(號牌)를 바꾸고 그 집에서 사나홀 더 숨어 지냈다.
그러나 금부도사가 포졸들을 보내 이들이 숨어 있는 마을을 수색하자, 이 세 사람은 아침밥을 먹은 뒤 계산 고개를 돌아 십자교 근처까지 갔다.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을 때, 그들은 소공동에 살며 붓을 만들어 파는 필공(筆工) 곽정근을 만나게 되었다. “황 진사님은 현재 자수하는 길밖에 달리 좋은 도리가 없습니다”라는 곽정근의 말에. 이들은 눈물을 흘리며 각자 살길을 찾아 떠나기로 하였다.
황사영은 곽정근과 함께 민저 떠났고, 김계완과 이합규는 돈녕부 근처에 사는 대장장이〔冶匠工〕최가의 집으로 가서 며칠 숨어 지냈다. 그러다가 이합규가 마련한 반촌(泮村)에 며칠 있었는데. 한 집에 두 사람이 오래 숨어 있으면 발각될 위험이 많아 김계완은 최가의 집으로 다시 와서 10 여일을 지냈다.
이합규는 그 후 이인채의 집을 찾아갔다가 그곳에서 신자 곽진우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집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성균관이 있는 반촌으로 가서 집을 빌려 아버지와 함께 숨어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때 그의 외숙모가 피할 곳을 찾아 강완숙의 노비 소명(효명)을 데리고 찾아왔다가, 이들을 미행한 포졸들에 의해 이합규 부자는 체포되고 말았다.
그 후 포도청에서 신문을 받은 뒤 형조로 이송된 이합규는 천주교를 믿으며 많은 부녀자에게 선교한 죄로 사형 판결을 받고 1801년 4월 2일(양 5월 14일) 정철상, 최필제, 정인혁, 정복혜 , 윤운혜 등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늙은 아버지보다 천주교가 더 중요하다.’
한편 2월 그몸께 계동 이현의 집에 와서 숨어 지내던 김계완은, 3월 초 앞집에 사는 과부 윤 씨에게 숨어 살 집을 구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윤씨 과부가 아현동에 사는 활 만드는 조궁장이〔弓人〕한성호의 집 뒷방을 구해 놓자 그 집으로 가 한 달 가까이 숨어 있었다.
체포령이 내려진 지 두 달이 다 되도록 김계완이 잡히지 않자. 포도청에서는 그의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 모두를 잡아 가두었다. 이런 창황한 가운데에서도 그는 가족들의 소식을 듣기 위해 4월 7일 돈녕부 근처 최가의 집으로 가서 4〜5일 머물렀다.
▲ 김계완이 잡히지않자 포도청에서는 그의 아버지를 가두었다.
그리고 다시 아현동 한성호의 집으로 돌아와 있다가 결국 체포되고 말았다.
포도청의 형리들은 김계완이 주문모 신부에게 침구를 정성스럽게 마련하여 준 것과 주 신부의
복사로 일한 것, 그리고 황사영이 어디로 도피하였는가를 집중적으로 신문하였다. 그리고 늙은 아버지가 자식 대신 체포되었는데도 자수하지 않은 이유를 추궁하였다. 이에 대해《사학징의》의 내용중 ‘경중지설’(輕重之說)이란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그는 “늙은 아버지보다 천주교가 더 중요하다”고 진술한 것으로 보인다.
형리들은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인륜을 저버린 것이니 만 번 죽어 마땅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김제완은 비록 형벌 아래 죽을지라도 추호도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다고 당당하게 진술하였다. 샤를르 달레의《한국 천주교회사에는 그가 포도청에 체포된 뒤에 있었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를 석방하여 달라고 몰래 갖다 주는 돈을 받은 관장은 그의 항구한 마음을 혼들리게 할 생각으로 사홀 말미를 주어 집으로 돌려보냈다. 시몬이 다시 오자 관장은 '그래, 이제는 마음이 변했느냐?' 하고 물었다. 증거자는 ‘예’ 하고 대답하였다. 좋다. 그럼, 이제부터는 그 못된 도당(徒黨)을 따르지 않겠지’ 하고 다시 물으니, 시몬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마음을 단단히 고쳤습니다. 그러나 전보다 천주교를 더 잘 신봉하기로 단단히 결심하고. 하느님의 법률에 더 완전히 회두하기로 마음을 고쳤습니다.' 관장은 이 대답을 듣고 기가 막혔다. 그리고 시몬은 더 이상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포도청에서 형조로 이송된 김계완은 다시 신문을 받고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1801년 12월 26일(양 1802년 1월 29일) 정광수, 홍익만, 손경윤, 김의호, 송재기, 최설애, 장덕유, 이경도 등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