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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학당] 진여와 열반 39강 - 진여와 열반의 핵심(4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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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여와 열반 강의는 항상 제가 강조합니다. 제발 진여와 열반, 진짜 진여와 열반을 자기 마음에서 증득하는 그런 전법이어야죠. 그래서 청정광명심(淸淨光明心)이 답입니다. 진여(眞如)가 청정광명심이고 열반(涅槃)이 청정광명심이에요. 그런데 이 부분을 아직도 불교계에서요 이걸 얼마나 받아들일지 의문입니다. 청정광명심, 참나라고 하면 막 난리 치는 거 아니까 참나란 말을 안 쓴 거죠, 제가. 청정광명심이라고 하자. 청정광명심은 달라이 라마도 인정하시는 거니까 누구도 부정 못해요, 청정광명심은. 그리고 청정광명심을 왜 부정 못 하냐면요, 청정광명심을 참나가 아니라고 할 수는 있어요. 그 청정광명심이 사실은 고정된 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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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하게 변하는 실체라고 말할 수도 있어요. 다 좋아요. 하지만 청정광명심이 있어야 돼요, 어떤 불교도. 왜 그런지 아세요? 간단한 공식 때문인데요. 이것 좀 알아두시라고요. 우리가 어떤 진여, 진리를 얘기하잖아요. 그럼 이 진리가 뭐예요? 법, 불교의 법이 있죠. 이 법이 없다면 불교는 성립할 수 없죠. 진리, 영원불멸한 건 진리뿐이죠. 이 말에 대해서는 부정하는 학파가 없습니다. 부처님이 전한 다르마, 법을 연구하자, 법을 증득하자에서 다른 말 할 수가 없죠. 그렇죠? 그런데 이 법이라는 게 이게 이 법 자체가 불생불멸의 법이거든요. 생멸하는 법은 지킬 필요가 없죠. 여러분 열심히 불교하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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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올해부터 법 바뀌었는데.” 그러면 뭐가 돼요? 부처님도 뭐가 돼요? 2500년 전 법 지키던 분이에요. 지금 의미가 없는 존재가 돼요. 이해되시죠? 법이 불변이니까 부처님이 의미를 지닙니다. 그런데 이 법, 왜 불법승에서 불을 또 얘기할까요? 법만 있어도 되는데 부처님도 법만 강조하고 돌아가셨는데. 이 법을요 인식하는 인식하고 실천에 옮기는 주체가 필요한 거예요, 불이. 그러면 이런 원리로요 이 진여의 진리가 있다면 이걸 알아차리는 무분별지라는 지혜가 필요해요 무분별지와 진여, 진여·진리 이거는 인식대상입니다. 이거는요 인식주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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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주관입니다. 여기는 객관이에요. 주·객이라는 거를 배제하고는 이 진리를 설명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우리는 진리를 깨달아야 된다. 영원한 진리가 있다라고 외치는 거는요, 영원한 진리가 있다고 외치는 말은 동시에 무슨 말인지 아세요? 영원한 진리를 인식하는 영원한 지혜가 있어야 돼요. 영원히 진리를 알고 놓치지 않고 기억하고 항상 인식하고 있어야 되는 인식주체가 없다면 진리가 있든 말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하고. 공부하실 필요가 없다고요, 여러분이 진리를 아실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진리를 논할 때는 항상 진리를 인식하는 주체가 있어야 돼요. 열반에 든다고 할 때는 열반이라는 진리를 인식하는 주체가 있어야 돼요. 열반에는 누가 드는데요? 그럼 그걸 한 에고로 설정하면 또 욕해요, 참나론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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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힌두교의 참나론은 아니라고 치자고요. '아트만' 너무 에고성이 묻어있다. 왜 부정하냐? 에고성이 있다. '나'라고 하는 에고성이 지금 묻어있는 것 같다. 그럼 이 말 쓰지 말자. 하지만 인식 주체는 있어야 된다고요. 여기서 헷갈리시는 거예요. 진리만 있는 종교가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진리를 누가 알았는데요? 그러면 어떻게 알았는데요 그게 진리인지? 그 진리를 어떻게 지금도 계속 알고 계신데요? 그냥 우리의 인식능력이면 될 줄 알아요. 어떤 종교 철학도요, 진리를 아는 인식능력은 따로 설정합니다. 플라톤 철학에서 이 로고스에 해당되는 이 로고스의 진리를 아는 건 뭐죠? 이 로고스라는 진리를 아는 건요, 인식주체는요? '누스'라고 따로 있어요. 일반 의식은 진리를 알 수가 없어요. 이데아를 인식하는 특수인식능력입니다. 누스도 영원해요. 그럼 진리가 영원하면요 누스도 영원해요. 그래서 이게 신적 지식이에요. 신적인식능력이에요.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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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소크라테스는 뭐라고 정의해요? 인간의 영혼의 근본 부분은 영원불멸하다고 봐요. 신과 똑같다고 봐요. 안 그러면 신의 진리를 알 수가 없어요. 신의 진리를 인식하려면 뭐가 필요해요? '신의식(神意識)'이 필요해요. 불생불멸의 진리를 알려면 불생불멸의 의식이 있어야 돼요. 이게 과학과 다른 겁니다. “과학도 나름 불생불멸이야. 이 법칙 영원해! 한데 우리는 신의식이 아니지만 알아낼 수 있어.” 이건 주객을 끊어서 알아내는 거죠. 그런데 무분별지라는 말을 왜 쓸까요? 무분별지가 아니면 진여를 알 수 없다고 보는 이유가 뭐냐면요. 무분별이라는 건 주객이 없다는 거예요. 주객이 없는 인식능력이 있어야 돼요. 그래야 진리랑 한 덩어리가 돼서 진리를 읽어낼 수 있어요. 여러분이 만유인력 법칙과 한 덩어리가 돼서 읽어낸 건 아니죠. 인식주체인 에고가 그때는 주객이 나뉘면 무슨 일이 벌어지냐면요 이쪽이 에고가 돼요. 에고가 대상으로서의 진리를 인식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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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거는 주·객이 분리돼 있어요. 여러분 공부하실 때 주객이 분리돼 있는 한 그 지혜는요 유루지(有漏智)라고 합니다, 불교에서. 이때 에고가 아는 지혜는 유루, 번뇌가 있는 지혜, 번뇌가 있는 지혜, 유루지. 또 다른 표현으로 세간지(世間智), 세간의 지혜. 그러면 이 무분별지는 뭐라고 하겠어요? 출세간지예요. 세간을 초월하는 지혜입니다. 출세간이라는 건 에고성이 없어요. 그러니까 에고성 없는 인식능력을 찾으셔야 돼요. 이게 참나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참나란 말 쓰기 싫으면 청정광명심, 무분별지, 자성청정심, 공적영지, 허령지각, 이런 표현들이 왜 난무하냐면요? 이게 주객을 초월해서 진리를 인식하는 능력이에요. 에고성을 초월해야 돼요. 에고성이 있는 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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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대상으로서 진리를 대해요. 그런데 인간이 철학의 깊은 세계, 종교의 깊은 세계에 들어가 봤더니 진리를 정확히 알아내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더라. 뭔지 아세요? 진리 되기. 진리가 되지 않으면 여러분 진리를 영원히 타자로 인식하게 돼요. 주객을 초월해서 진리와 한 덩어리가 되는 의식이 있다는 걸 발견한 거예요. 그래서 과학이 아닌 이제 철학의 고유 영역이 설정된 겁니다. 과학의 세계랑은 다른 철학의 고유 영역. 여러분이 종교 철학의 진수를 아시려면요, 진리로서 존재할 수 있어야 돼요. 그럼 이 자체가 그대로 뭐예요? 이 자체가 진리예요. 진리이자 이 자체가 그대로 또 뭐예요? 진리이자 동시에 마음이에요. 인식주체는 마음이라 그래요. 인식대상은 법이라 그래요. 그래서 인식주체를 지, 알 지(知) 자 하나로 받을 수도 있고, 마음 심(心)자로 받을 수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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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영지(空寂靈知).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인식능력이 필요해요. 그래서 원효대사가 대승기신론소 쓰실 때 일심(一心) 한마음. 주객이 없어서 하나요, 인식능력은 있기 때문에 마음이라고 한다. 한마음을 그렇게 정의해요,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주석 다실 때. 근데 이 한마음을 지금 과학적으로 인식하시면 어떻게 돼요? 과학적 접근. “진리를 인식하는 에고인가 보다” 그래요. 그럼 이 에고는 유루지·세간지예요. 여긴 무분별지라면 여기는 분별지예요. 그래서 이 분별지·세간지 중에도 이제 유루도 있고 무루도 있겠죠. 물론 유루지랑 바로 통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주로 유루지라고 한다는 거죠. 에고성이 작동하니까 번뇌가 있다고 본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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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만약에 얘네들이, 세간지·분별지 중에 무루의 모습을 드러내려면요, 이 무분별지를 각성한 뒤에 이게(세간지·분별지) 작동하면 이게 무루로 작동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이때는 무분별후득지라 그래요, 다른 이름으로. 무분별을 깨달은 뒤에 후에 따라오는 지혜라고 해서. 그러니까 그냥 분별지면요 분별심이죠, 그냥. 여러분도 분별해서 판단할 수 있죠? 이런 거 이제 분별지·세간지라고 잘 안 할 수 있습니다만 유루일 때는. 주로 무분별 후득지로서의 분별지를 강조하기 때문에 경전에서는. 하지만 이렇게 부를 수도 있어요. 분별하니까 세간에서 작동하니까 번뇌성 속에서 작동하니까. 이게 지금 과학과 철학의 근본 차이입니다. 철학은요 로고스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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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불변하는 영역을 '이데아'라고 그래요. 그럼 이데아는 누스로만 인식할 수 있어요. 다른 인식능력으로 인식을 못 해요. 저 누스는 주객을 초월한 의식입니다. 그럼 성리학에서는요 이걸 리(理)라 그래요. 그럼 이 리를 깨달으려면 이쪽에서 허령지각(虛靈知覺)이 있어야 돼요. 허령지각이라는 맑은 인식능력이 있어야 돼요. 이 인식능력이 이 원리를 품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미 한 덩어리인 거예요. 저 인식능력이 원리를 품고 있어요. 품고 한 덩어리가 돼서 알아차리면서 그 원리를 구현해요. 그러니까 이 원리를 구현하는 우주의 주재자가 있다면 의식인 거예요, 신은. 신은 지금 종교 철학에서 의식입니다. 왜냐하면 인식주체여야 돼요, 신이. 신이 빛이 있으라고 할 때 빛은 타자예요. 그렇죠. 객체죠. 근데 신 안에서 통합돼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신은 빛을 만들어내요. 우리는 못 만들어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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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의 세계에서는 그게 안 돼요. 신과 가까이 가려면 진리랑 한 덩어리가 돼 있는 의식 상태로 들어가야 돼요. 그럼 그 의식 상태에서 나는 진리만이 불변하고 의식은 무상하다라고 해버리면 여러분 뭔가 문제가 생기죠. 이게 달라이 라마식 저기 지금 귀류논증중관파가 주장하는 한계입니다. 자꾸 진리를 에고의 세계에서 분석해가지고 따지려고 해요. 그렇게 따지는 건 다 희론(戱論)이라고 자기들도 알면서 계속 따지고 있어요. 그럼 희론을 초월하면요 청정광명심·무분별지에서 진리를 직관한다고 달라이 라마가 주장해요. 그런데 그러면서 뭐라고 설명하려고 하냐면 이 무분별지랑 이 진여의 진리가 한 덩어리라고 주장하는 닝마파나 까규파 주장에 대해서 한 덩어리는 아니라고 극구, 잠깐 합했던 거라고. 에고 의식이 잠깐 정신 잃고 진리랑 한 덩어리가 됐다가 떨어지는 거라고 그래서 이 청정광명심 자체가 무분별지도 무상한 거라고 자꾸 주장하려고 한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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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는. 그건 뭐 쓸데없는 소리예요, 그거는. 진리랑 한 덩어리인 의식이 그럼 끊어졌다 접속했다 끊어졌다 계속하고 있다고요? 진리를 인식했다 못했다 하고 있다고요? 말이 안 되는 소리죠. 진리를 영원히 인식하는 그 의식이 있습니다. 그게 청정광명심이라서 불생불멸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도 불생불멸이 되는 거예요. 무분별지·청정광명심 이런 건요 불생불멸의 지혜입니다. 저게 없다면 여러분은 공부를 하셔봤자 아니에요. 그냥 귀류논증중관파 하듯이 경전 읽고 분석하면 돼요. 분석해서 “우주가 공하구나! 만법이 공하구나!” 하고 과학적 접근하는 외에는 답이 없어요. 지금 불교를 과학적으로 접근하고 계신 분들, 주객이 나뉜 채로 연구하고 계신 분들은 절대 부처님이 말한 청정광명심을 알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이 묘사했죠? 께왓다경에서. 청정광명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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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하게 빛나는 그 의식 상태에 들어가니까 거기에는 일체만법이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더라, 없더라, 아무것도. 지수화풍도 거기는 못 서더라. 의식만 충만하더라. 그럼 일체가 공하다는 진리도 그 의식으로 안 거죠. 부처님도 일체가 공하다는 걸 뭘로 알았어요? 의식으로요. 인식주체가 있었어요? 없었어요? 여러분 열반에 드셨는데 인식주체가 없다면 열반에 들었는지 어떻게 알아요? 근데 해탈한 자들은 아라한들은 얘기합니다. '나는 열반에 이르렀다' 라고 정확히 압니다. “나 열반 얻었어!”라고 정확히 압니다. 그럼 열반이라는 이 고차원적인 진리를 인식하는 고차원적인 인식주체가 있어야 되고, 그게 벌써 둘로 찢어져 있으면 열반이 아니에요. 열반인 줄 알려면 열반과 하나가 돼야 돼요. 그럼 그때 의식은요? 고차원 의식입니다. 인식주체가 나눠져 있으면 안 돼요. 이거를 멋진 표현으로 불교에서 뭐라고 하냐면 이지명합(理智冥合)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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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울 명(冥), 명상할 때 쓰는 말이죠. 인식대상입니다, 이거는. 진리와 객체, 지혜. 주체, 인식주체죠. 진리와 지혜가 구분할 수 없게 합해져 있다. 어둡게 합해졌다는 건 구분이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게 모든 종교의 핵입니다. 하나님은 진리를 품고 있어요. 이때 이제 성부·성자 놀이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이 품고 있는 진리는 성자 그럽니다. 그게 딱 사랑으로 결속돼 있어요. 그 사랑은 성령, 기가 막히죠. 3박자 갖다 붙이는.. 방금 제 말 이해하셨으면 아우구스티누스나 중세 삼위일체론의 아퀴나스의 실체가 이거예요. 하나님과 진리가 하나로 탁 꿰어져 있는 거. 여기서도 성부·성자·성령을 읽어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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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아는 성부·성자·성령이랑 좀 다릅니다만 신학자들은 거기까지 들어가요. 불교도 이게 있어요. 유교도 유교도요 왜 이렇게 그려놨을까요? 성학십도에 보면 퇴계 선생의 성학십도에 보면요, 인(仁) 대충 그릴게요. 인(仁)·의(義)·예(禮)·지(智)·성(性) 이렇게 돼 있어요. 허·령·지·각. 이게 뭐가 위인지 모르겠는데 심(心) 이렇게 돼 있어요.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을 같이 그려놓은 겁니다. 이게 우리 마음의 본판이라고요. 조선 선비들도 기본적으로 다 이렇게 알고 있었어요. 이해되세요? 이게 왜 이렇게 그려야 하는지를 이해하셔야 돼요. 궁극에 들어가면요, 이지명합 똑같아요, 여기.도 인의예지와 허령지각이 한 덩어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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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허령지각(虛靈知覺)을요 명덕(明德)이라고 그래요, 유교에서. 광명한 덕성이라고. 그러면서 주자가 명덕을 어떻게 풀었어요? 명덕(明德)은 구중리(具衆理) 모든 원리를 다 갖추고 있으면서, 명덕은 마음이에요. 구중리는 본성이에요. 응만사(應萬事) 만사에 응하고 있다. 이거는 감정이에요. 마음이 주재자가 돼서 본성을 인식하고 감정으로 구현해내는 거예요. 이건 인식되는 대상일 때 이건 객체예요, 이게 주체예요. 주체는 마음이지, 절대 본성이 주체일 수는 없어요. 본성은 마음에 인식되는 객체예요. 근데 통합돼 있는 거예요. 명덕 안에 모든 원리 인의예지의 원리가 갖춰져 있다가 사단으로 펼쳐진다. 이 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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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이 그림이에요. 심을 위에 써 놨네요, 여기서. 심을 갖다가 여기서 지금 퇴계 선생 그림에 보면 이 위에 이제 따로 그려져 있어요.
허령지각(虛靈知覺), 인의예지성(仁義禮智性). 어때요? 지금 이 그림 그대로 하면 예(禮)자를 밑에 이쯤에다 그리고.. 이거 기억해 두시라고요. 기억해 두세요. 이게 이지명합(理智冥合)을 유교식으로 그려놓은 겁니다. 그럼 불교식으로 그리면요? 공적영지의 6바라밀을 탁탁탁 6개로 제가 DNA처럼 박아놓은 그림들 있죠? 그래서 그린 거예요, 제가 그게 이지명합 상태예요. 그러니까 내 안에 인의예지가 있다는 걸 알려면요, 그 고도의 허령지각 상태에서 원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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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덩어리가 돼서 원리를 갖추고 있는 명덕 상태여야 돼요. 진리가 한 덩어리죠. 그래야 그게 구현이 돼요. 여러분이 신에 가까울수록 신성이 구현돼요. 그 이유가 신의식(神意識)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신의식 안에서는 '빛이 있으라' 하는 빛이라는 진리를 구현할 수 있는 힘이 있어요. 하나님이 갖추고 있던 진리 중에 하나, 빛을 꺼내서 빛이 있으라 하니 응만사, 빛이 만들어졌다. 이게 신의식 상태에서만 가능한 겁니다. 지금 여러분은요? 에고가 빛이 있으라하니 빛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왜 명령을 들어요? 남인데.. 주객이 찢어져 있잖아요. 여러분 뜻대로 안 돼요. 여러분 이 객으로 인의예지를 설정해놓고 하려고 하면 영원히 안 돼요. 인의예지가 왜 여러분, 여러분 게 아닌데 왜 여러분한테 와서 여러분의 인의예지가 돼 주겠어요? 갑자기. 여러분 안에 인의예지가 있는 걸 표현해내는 거예요. 이걸 맹자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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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했냐면 “순임금은 인과 의로 말미암으셨지 인과 의를 하려고 하신 적이 없다” 이렇게 돼 있어요. 인과 의가 속에서 터져 나오셨지 인과 의를 하려고 한 적이 없다. 밖에 있는 인과 의가 좋아 보여서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 하면 바리새파죠. 예수님은요 사랑과 정의를 안에서 끄집어내려고 한 거고 바리새파들은 율법으로 정해놓고 밖에다가 사랑과 정의의 원칙을 새겨놓고 따르려고 했어요. 주객이 나뉘어 있는 공부는요 욕 처먹는 겁니다, 성인들 왔을 때. 왜? 그런 식으로 하면 겉만 꾸미고 있거든요. 네 속은 하나님이 안 만들었냐? 옛날 송강호 영화에 막 이렇게 막으면 야, 이건 네 팔 아니야? 하고 막 이거는 이건 안 아프냐? 하고 때리는 것처럼. 예수님 말씀이 그거예요. 겉만 막 꾸미고 있으면 야 속은 너 아니야? 나는 속까지 다 보시는데, 하나님이. 속은 시커먼데 겉만 그 에고가 성성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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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진리 따르는 모습을 보인다고 네가 진리야? 진리랑 하나 되겠다 하는 건요 진리랑 이미 하나인 그 의식이 있어야 돼요. 동질의 것이 동질의 것을 알아봅니다. 동질의 것이 없는데 진리를 알아보시겠다고요? 열반과 동질의 의식이 내 안에 없는데 열반을 증득했다고요? 진여를 얻겠다고요? 절대 될 리가 없습니다. 에고 눈엔 에고만 보입니다. 부처 눈에 부처가 보여요. 그럼 그 부처 눈이 인식주체예요. 부처는 인식대상이에요. 그 말 안에 다 나와 있잖아요. 동질의 것이 동질의 것을 알아본다. 돼지 눈에 돼지 보인다. 돼지 눈에 여러분 보시면, “어, 날씬한 돼지인데.” 그렇죠. “뭐 뭐한 돼지인데.” 다 돼지로 보이겠죠. 이 느낌, 어떠세요? 되게 중요한 부분입니다. 모든 철학의 핵인데 이걸 무시하고 다들 논리를 전개하세요. 경전을 아무리 읽어도 저걸 못 잡아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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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날 읽어도 그건 못 잡아냅니다. 그리고 절대 여러분은 견성할 수도 없고, 부처가 못 됩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신성을 깨달아야 돼요. 예수님이 깨달으라는 그 성령, 앞으로 보내줄게 한 그 성령이, 성령의 이름이 뭐죠? 성경에 보면 '진리의 영'이라 그래요. 그럼 진리를 품고 있는 영이거든요. 그때 그 진리는 인식대상입니다. 인식주체는 누구예요? 성령. 아시겠어요? '진리의 영'이라는 말에 다 들어있는 거예요. 인의예지(仁義禮智)를 갖추고 있는 허령지각(虛靈知覺), 명덕이 인의예지 '구중리'라는 건요, 인의예지를 갖추고 있는 허령지각이에요. 그럼 자기가 자기 기본값을 구현하겠다는데 안 될 리가 없어요. 모든 진리를 자기의 기본값으로 삼고 있는 의식이 있어야 돼요. 이 의식을 못 만들어내면 진리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인가도 안 되고 구현도 안 돼요. 그래서 부처님이 초기 경전부터 일관되게 법구경부터 주장하는 게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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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분별지를 얻으려면, 지혜를 얻으려면 선정에 들어라. 과학은 선정이 안 들어도 연구할 수 있습니다. 적당한 몰입만 해주면 돼요. 왜 철학은 선정에 들어야 될까요? 에고의식으로 연구하니까 안 되니까요. 아니 탐진치 없는 세계를 연구하겠다면서 탐진치로 연구하면 이상하잖아요. 열반은 뭡니까? 탐진치 없는 세계예요. 그럼 여러분 의식에 탐진치가 없어야 열반이 인식되겠죠? 이렇게 접근하셔야 된다고요. 이게 현명한 성공하는 도인들의, 요즘 성공을 좋아해서.. 성공하는 도인들의 사고방식입니다. “동질의 것이 동질의 것을 알아본다.” 이 정도 기본 감각이 있어요. 진리를 알고 싶다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다고? 그러면 내 의식이 하나님에 공명해야 돼요. 최소 공명은 해야 돼요. 그리고 하나가 돼야 돼요, 더 나아가서. 이 짓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명상을 하는 거예요. 모든 종교가들이, 철학자들이
23:00
명상해서 알아내는 거예요, 진리를. 그래서 자기의식을, 에고성을 초월해서 신의식에까지 갔을 때. 이걸 참나라고 하면 막 또 난리치니까 지금 참나라는 말을 제가 자제하고 하지만 그게 참나예요. 나의 가장 본질이에요. 왜? 내 의식의 본질이지, 남의 의식의 본질이 아니잖아요. 내 의식의 제일 핵이라니까요. 여러분 의식 안에 다 있다니까요, 그 신성한 의식이. 그게 여러분의 본질이기 때문에 참다운 나라고 말할 수도 있는 거예요. 여기서 에고성을 읽어내는 사람이 돼지인 거죠. 부처가 지금 참나라고 하는데 돼지가 “에고를 얘기하십니까?” 하면 뭐라 그래요? “네 눈엔 에고로 보이겠지.” 이런 말에 현혹되지 마시라고요. 여러분 의식의 핵이기 때문에 참나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선사들이 '주인공'이라고 하고 본래면목(本來面目), 본래의 너라고 하는 겁니다. 본래면목은 되고 참나는 안 돼요? 면목이 얼굴인데. 본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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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본래 얼굴이야.” 이건 허용. 참나! 나? 그 나가 아닙니다. 인식능력을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참나 싫어하시면 청정광명심이라고 하죠. 인식능력은 달라이 라마도 부정 못합니다. 왜 진리를 알아내려면 무분별지가 있어야 되거든요. 이건 불교 공식입니다. 이 청정진리를 알아내려면 무분별지 상태여야 돼요. 주객을 초월하는데 이 안에 힌트가 있어요. 주객을 초월하는 지혜라는 건 진리랑 한 덩어리라는 얘기예요. 이지명합. 진리랑 완전히 한 덩어리가 된 의식인데 왜 진리는 불생불멸 영원한데 이 무분별지는 영원하면 안 되죠? 왜 무상해야 되죠? 달라이 라마는 계속 무상해야 된다고 고집하고 있어요. 고집이에요. 닝마파는 시원하게 뭐라고 그래요? “저 지혜도 불생불멸이다.” 그리고 이 지혜와 이 진리, 공성의 진리라고 하면 좀 더 와 닿으시려나요? 진여. 공성의 진리하면 중관파는 “공성의 진리만 불생불멸, 그걸 아는 무분별지는 무상하다” 그래요.
25:00
그냥 에고적인 인식능력 취급을 한단 말이에요. 아니에요. 영원불멸. 그리고 달라이 라마도 인정해 줘요. 그럼 에고성만 초월했다면 무상해도 돼요. 아뢰야식도 무상하잖아요. 아뢰야식도 에고는 아닌데 무상하죠. 그러면 인정. 달라이 라마도 인정. 무상하면 어때요. 아무튼 영원불멸한다는 거는 달라이 라마도 인정해요. 왜? 무분별지가 영원하지 않으면요 진리가 끊겨요. 그럼 부처도 영원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해요. 부처가 영원하려면요 부처의 무분별지가 영원해야 돼요. 그래야 부처는 영원히 진리를 자기 것으로 소유할 수 있으니까. 이 '자기 것'이라는 말이 좀 또 에고를 불러들인 것 같지만., 부처가 진리를 못 품고 있으면 부처예요? 말도 아니죠. 이걸 놓친다고요. 인식주체에 대해서 생각을 안 한다고요. 자꾸 인식대상만 생각한다고요. 대상만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는 게 에고놀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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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입니다. 에고가 자꾸 진리를 연구할 때, 이 진리만 영원해 보이고 에고는 무상해 보이기 때문에 에고는 자꾸 이렇게 생각해요. 저 진리만 위대하고 나는 형편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걸 어쩌다 인식한 것 뿐. “인식해서 죄송합니다” 수준이죠. “모자라는 제가 하필 인식해서 죄송합니다. 더 뛰어난 분들이 진리를 알았어야 되는데..” 아니에요. 진리를 아는 그 의식은 진리랑 동질의 것이어야 돼요. 이렇게 하면 좀 이해되세요? 왜 청정광명심 무분별지 이런 말들이 중요한지.. 진리를 인식하는 주체인데 청정광명심을 부정하고 청정광명심을 못 닦으면, 명상을 통해 못 얻으면 무슨 진리를 알았다는 거예요? 공성의 진리 알았다는 사람들한테 다 물어보면 “공성의 진리 어떻게 아셨습니까?” 청정광명심으로 알았다는 사람은 없고, 다 “연기(緣起)하잖아요. 무자성(無自性)이잖아요. 그러니까 공하죠.” 이런 논리를 떠들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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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달라이 라마도 이 부분 부끄러워합니다. “주객으로 따지고 있는 건 희론(戱論)에 불과해서 절대로 진여를, 공성의 진리를 직관할 수 없다”고 그래요. 직관은 못한 거예요. 주워들은 견해지 직관한 사람이 아니에요. 아시겠죠. 직관한 사람은 다르죠. 연예인도 직관해 보세요. 못 본 사람은 영원히 아쉽습니다. 말만 들어요. “잘 생겼디?” “장난 아니야.” 어휘력도 좋으면 모르겠는데 “대박!” 이럽니다. 거기서 뭘 얻으실 거예요? 그러니까 어휘력마저 딸린 사람이 직관하면요 최악입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알아도 할 말이 없어요. 진리를 깨달았는데 어휘력 딸린 사람이 깨달으면 할 말이 없어요. “대박! 말로 할 수가 없어!” 거기서 뭘 얻으실 거예요? 어휘력 좋은 사람은, “봄날에 아지랑이가 필 때, 뭐 할 때 그 기분이야!” 막 이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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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뭐 해 줄 수 있겠죠, 더. 접근시켜줄 수 있겠죠. 그런 차이입니다. 다만 알 때는 에고가 떨어졌어야 돼요. 에고로는 딱 에고의 대상으로서의 진리밖에 인식 못해요, 개념화된 진리밖에. 이게 지난번에도 읽어드린 거 있었는데요, 달라이 라마께서 이거 정리한 것도. 견도위(見道位) 전까지는 이 상태라고요. 그래서 진리를 이 무분별지로 완전히 직관하게 되면 그때부터 견도예요. 이게 견성입니다. 무분별지가 견성(見性), 본성을 보는 거예요. 이게 궁극의 견성이에요. 이거 견성하면요 1지 보살이에요. 내 안에 있는 진여를요 진여의 진리를 온전히 봐야 돼요. 온전히 보면 그때 견성이에요. 그러니까 그 견성은 1지부터고요, 그 견도위 아래 가행위(加行位)라고 있어요. 가행위는 참나체험은 했어요. 그리고 아공·법공까지 증득했어요. 구공의 영역까지 “6바라밀이 내 안에 있다”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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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온전히 증득 못했어도 “일체만법이 참나 작용이고, 청정광명심 작용이고 여래장 작용이다”까지는 인식해요. 증득해요. 그 정도가 가행위입니다. 근데 가행위도 아직 이렇게 쳐줘요. 에고로 증득하는 단계로 쳐줘요. 왜? 일정 부분 무분별지를 써서 보고 있는 부분이 있지만 무분별지를 통해 진여의 부분만 보고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대승기신론에도 부분만, “법신을 부분만 본다”라고 말해요. 온전히 보면 1지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막 10지 안 꿈 꾸셔도 돼요. 불교적으로 1지만 되면요 내 안에 진리의 모습을 직관합니다. 그 진리의 직관을 방해하는 요소가 뭐냐면? 이 업장들이요 지금 어떤 게 쌓여 있냐면? 업장이 어떤 게 쌓여 있다기보다 어떻게 터는지를 말씀드리면 6바라밀을 해야 털리는 업장들이 있어요. 6바라밀을 원만히 해야만 털려요. 그게 다 털린 뒤에 정확하게 내 안에 있는 실상, 나의 기본값이 딱 보일 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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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성입니다. 이게 기본값이에요. 인간의 기본값이 보여요. 6바라밀이에요 그게. “이렇게 하라고 우주에서 날 낳았구나!” 하는 걸 아는 게 1지 보살 때입니다. 그게 견도(見道), 견도위(見道位)고 다른 이름으로 통달위(通達位)라 그래요, 통달했다고. “그러면 1지 이후 10지까지는 뭔가요?” 그러면 “연륜만 쌓여간다” 그래요. 면허증은 1지에서 받았고,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기 위한 그런 과정일 뿐이다. 새로 뭐가 더 있는 건 아니다. 공부했다고 해서 6바라밀 너머에 새로운 게 나오는 건 아니다. 여기까지 이해되시죠? 인식주체와 인식대상, 오늘 진짜 포인트입니다. 이것만 하고 끝내기 약간 아쉬우니까 안 아쉬울 수도 있지만 제 Z자 이론 한번 보여드릴까요? 늘 설명 드리는. 이걸로 한번 이해해 보실까요? 저게 지금 포인트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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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헷갈리지 마세요. 참나가 있냐 없냐 아니에요. 중요한 건 뭐예요? 인식주체예요. 그 진리를 인식하는 주체, 근데 참나 있냐 없냐 떠드는 친구들 다 보면 다 에고로 얘기하고 있어요. 진리를 타자화 해가지고 “나라는 주체가 타자인 진리를 얼마나 알고 그 타자인 진리와 나 에고의 마음이 얼마나 합일할 수 있을까?” 자꾸 이런 얘기를 하고 있어요. 본래 하나인 자리는 얘기를 안 하고 “열심히 닦아서 합일해야지” 하니까. 예전에 신수대사 게송이 이런 식이죠. “빨리 닦아서 합일 해야지.” 그러니까 육조대사가 “원래 하나인데 뭘, 뭘 닦아!”라고 친 거예요. 이 느낌입니다. “뭘 합일을 해? 진리랑!” 여러분, 여러분 이렇게 느끼시죠? “아, 나도 빨리 부처님의 진리랑 하나 되고 싶다.” 이 마음으로는 안 됩니다. “내 안에 이미 다 있더라”라는 걸 알아야 돼요. “내 안에 있더라!” 그때 “내 안”이 뭐냐고요? 그 “내 안”이 에고냐고요? 아니에요. 청정광명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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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보시면 이 청정광명심, ①청정광명심의 현존에 접속하셔야 되고, 여러분이. 그러면 방금 말한 이런 ②진리를 직관하게 됩니다. 그리고 ③진리를 분석하게 되고요 ④진리를 실천하게 됩니다. 이게 제 Z자 이론이죠. 여기서 보시면 이게(①→②) 지금 형이상학적인데 출세간이거든요. 여기는 세간의 작업이 아니에요. 여기는요? 여기(③→④는 세간의 작업이에요. 여기는 분별지·세간지의 세계예요. 그럼 이 두 개를 다 만들어내는 게 뭐겠어요? 정념(正念), 마음챙김입니다. 정념. 하나 더 적을게요. 정념과 나눠서 말하면 정지(正知). 보통 정념만 얘기하면 정지가 들어있거든요. 바른 마음챙김을 하고요, 그러면 바르게 알아차려요. 제가 얘기했죠, 제가. 햇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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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마음인데 빛 자체라고요. 빛나는 마음이 이미 있어도 돋보기를 통과해야 불을 일으킨다. 이 돋보기가 정념이에요. 그래서 여기(정념) 번역은, 올바른 번역은요 마음챙김이라고 해줘야 돼요. 여기(정지)는요 알아차림이라고 해줘야 돼요. 이건 지적인 거예요. 알아차린다는 건 지적인 거예요. 마음을 챙긴다는 건 행적인 거예요. 내가 마음을 하나로 모아준다는 거예요. 포커스를 맞춰주는 행동이 정념이고요 그러면 우리 의식이 불이 나요. 불이 나서 에고성이 초월되면서 어떻게 돼요? 광명한 의식으로 바뀌어요. 원래 안에 있던 의식이 드러나는 거죠. 그래서 이 정념으로 뭘 해야 돼요? 안으로 몰입하면 청정광명의 현존에 몰입이 돼요. 지금 여러분이 하셔야 될 일입니다. “몰라! 괜찮아!” 하고 딱 마음을 놓는 순간. 정념을 돕는 방편이에요, 몰라가. 몰라 하시면 어떻게 돼요? 생각이 뚝 끊어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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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청정광명심의 현존과 접속이 돼요. 그럼 이거를 지금 우리가 공부하던 거에 맞춰서 교학적으로 얘기하면 이게 무분별정(無分別定)이에요. 특정 선정이 아니라 무분별, 주객이 없는 자리로 들어간 거예요, 바로. 무분별의 선정으로 들어가게 돼요. 그러면 거기서 진리를 직관한다는 건 이 상태죠. 보세요. 진리를 한 덩어리가 돼서 지혜가 직관하고 있는 거거든요. 이지명합(理智冥合) 상태입니다. 이때 뭐가 작동해요? 이때 무분별지(無分別智)가 작동해요. ①무분별정(無分別定) ②무분별지(無分別智)입니다. 그럼 무분별지가 세간의 세계에서 어떻게 작동해요? ③분별지(分別智)로요. 이때 분별지는 무루(無漏)입니다. 왜냐하면 무분별하고 바로 거기서 영감 가지고 나와서 자명함 갖고 와가지고 분석하는 거예요. 그러면 ④6바라밀이 구현되겠죠. 이게 부처가 되는 퍼펙트한 길입니다. 그리고 이 정념이 중요한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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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거는, 이 모든 거는 정념이 일으키는 작용입니다. 왜냐? 깨어있어야 ①청정광명심의 현존과 접속하고 깨어있어야 ②무분별지의 직관이 이루어지고요. 깨어있어야 진리가 분별지에서도, 세간 안에서도 깨어있어야 진리, ③무루의 분별을 할 수가 있고요. 잠깐 방심하면 탐진치로 끌려가거든요. 이게(정념=마음챙김) 탐진치를 지금 막아주고 있는 거예요, 다. 탐진치를 막아주니까 안으로 들어가면 깊은 명상에 들어가서 진리를 캐고, 나오면 진리를 언어화해서 ④실천에 옮기는 겁니다. 끝까지 깨어있어야 돼요. 깨어있음이 약해지면 실천하다가 말아요. 실천하다가 변질돼요. 탐진치로 흘러가요. 의도는 좋았으나.. 의도는 좋았으나.. 이 전체를 누가 잡아줘야 돼요? 마음챙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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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부처님이 죽을 때까지 알아차리라고 하는 거예요. 마음을 챙겨서 알아차려라. 부처님도 계속해서 이미 도를 얻으신 부처님도 틈만 나면 뭐 하고 계세요? 자기 호흡 알아차리고 계셨어요. 말년까지 항상 출입식념(出入息念). 계속 정신을 모으고 있어야 되니까. 그래야 자꾸 불이 나가지고. 깨달은 진리도 지속적으로 접속해서 인가하지 않으면요, 보세요. 지금 인가하지 않으면 다 기억 속의 대상이 돼 버립니다. 타자화돼요. 기억은요 이미 타자예요. 지금 없어요. 알아차리는 내가 지금 없는 그거를 기억에서 끄집어내서 인식하는 거예요, 계속해서. 그것도 해야 돼요. 사라진 것 끄집어내서 지금 이 순간에 진리로 다시 인가해야 되거든요. 중요한 거는 계속 지속적으로 기억하고 알아차려야 된다는 거. 근데 과거 기억에 머물러 있으면 내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거는. 지금 인가 못하는 진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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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지금, 지금 인가한 진리대로 살고 계실 거거든요. “아공·법공·구공 아셨어요?” “작년에 제가 인가했는데요. 올해는 좀 바빠서요.” 그럼 이게 뭐예요? 그 진리는 지금 내 것입니까? 그러니까 이건 에고 상태(주객분리)에서 이 진리를 다루는 소리예요. 이 상태에서 진리를 말해야 돼요. 아공·법공·구공의 진리는 지금 내 의식과 하나입니다. 이해되세요? 지금 어느 상태의 공부인지 점검하셔야 돼요. 그래서 늘 깨어있지 않으면 이 진리들은 남의 거다. 내 것이 안 된다. 깨어있으면 무조건 이 Z자가 무한 루프로 여러분 내면에서 굴러가야 됩니다. 깨어있다는 게 버튼 누르는 거고 버튼만 누르면 계속 굴러가야 돼요. 그럼 버튼은 계속 누르고 있어야죠. “한번 떼볼까?” 딱 떼면요, 다시 또 막 흐려져요. 접속 끊기고, 인가 안 되고, 뭐 분별 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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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없다는 소리 나오게 되고, 실천 안 되고. 신기하죠. 계속 누르고 있어야 돼요. 그게 안주(安住)해야 된다는 거예요. 바른 마음챙김에 안주해야 돼요. 여러분 계속 깨어있어야 돼요.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이런 일이 일어나요. 출세간적으로 출세간 지혜가, 무분별 지혜가. 그래서 불경에 나온 모든 성스러운 지혜는요. 별의별 이름이 나와요. 능가경(楞伽經) 가면 자증성지(自證聖智), 스스로 증득한 성스러운 지혜. 말만 계속 바뀝니다. 무루(無漏)의 지혜(智慧), 자증성지(自證聖智). 다 보면요 출세간지(出世間智)예요. 아시겠습니까? 무루의 지혜도 세간과 출세간을 또 나눌 수 있겠지만. 아무튼 어떤 경전에 이렇게 이런 이름들이 등장했을 때 들여다보면 무분별지를 얘기하고 있어요. 이해되시죠. 그러면 불경 뭘 읽어도 여러분 재밌습니다. 다 여러분 아는 얘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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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도 이겁니다. 마음을 챙겨가지고 청정광명심에 접속했을 때 반야바라밀, 깊은 반야바라밀이면 깊게 들어갔다는 얘기죠. 반야바라밀 하고 있을 때 이때 진리를 직관해보니까 지혜로 무분별지로 진리를 직관해보니까 뭐예요? 그러니까 5온이 자성이 없더라. 공하더라. 근데 사실 5온이 다 자성이 청정광명심이 자성이더라. 그러고 나서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일체고액에서 자유로워졌다. 6바라밀이 자동으로 나오게 됐다. 그러니까 모든 경전을 이 그림에다 갖다 붙이면 다 답이 떨어지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용어만 달라요. 그래서 제가 경전을 빨리 보는 이유가요, 처음 본 경전도 제 머릿속에 이미 구조가 있기 때문에 이 경전은 여기 뭐라고 부르지를 봐요. 능가경, 딱 보면 능가경에서 자증성지(自證聖智) 그럽니다. 스스로 증득해서 아는, 남이 해준 게 아니라는 거예요. 자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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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중요한지 아세요? 자기만 알아요. 왜? 에고를 초월한 건 자신이거든요. 그러니까 남이 해준 말 듣고 아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자증성지. 스스로 증득한 성스러운 지혜, 자기가 무분별정에 들어가서 무분별지혜로 꿰뚫어본 그 지혜, 자증성지(自證聖智)라고 그래요. 그럼 그거 나오면 그거는 출세간지(出世間智)라고, 또 주석을 출세간지 이렇게 답니다. 그게 무분별지(無分別智)예요. 무분별지 하나만 아셔도 되고요. 모든 경전에 다양하게 멋지게 표현하는데 다 같은 겁니다. 진여를 알아보는 지혜는, 진여라는 인식대상을 알아보는 주체는 주객을 초월한 지혜여야 되고 청정광명심 상태여야 되고 그게 인식주체입니다. 올바른 인식주체입니다. 그리고 주체와 객체는 하나가 돼 있어야 돼요, 궁극의 경지예요. 출세간에서는 하나예요. 왜? 출세간은 나와 남, 타자의 이원성이 있으면 안 되니까. 이원성이 있으면 뭐가 돼요? 세간이에요. 여러분 진리를 알아냈다고 해서 “야! 내가 진리를 알아냈어!” 하면 그거는 세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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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전에 딱 그 진리랑 하나 되어 있을 때가 출세간이에요. 그러니까 달라이 라마도 하나 되어 있을 때는 인정해요. 왜? 자기도 느꼈거든요. 그러니까 하나 되어 있다가 떨어진다고 생각한 거예요. “가끔, 자성 청정광명심이 가끔 업 돼가지고 진리랑 하나 될 때가 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닝마파는 여기(하나 되어 있다)만 강조하고 있다고요. 제 지난 강의 보시면 이렇게 설명돼 있습니다, 본인 입으로. “늘 하나 돼 있어서 진리랑 자성청정심은, 청정광명심 자성청정심은 원래 하나다” 하면 닝마파예요. (달라이 라마는) 그걸 반대하잖아요. “중관파랑 다르다. 우리 입장과는 다르다.” 이거 구분되세요? 오랜만에 중관파까지 한번 끌어들여서 설명해 봤습니다. 10분 쉬고 다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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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녹취) [홍익학당] 진여와 열반 39강 - 진여와 열반의 핵심(41:44) (홍익학당) | 작성자 수호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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