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개방 제자들 웅묘아가 대경실색을 하며 물었다. "말을 몰고 어디론가 달려갔다고? 아이고, 큰일났군! 정말 이거 큰일이로군. 그들이 왜 말을 몰고 갔는지, 또 어느 쪽으로 갔는지 알고 있느냐?" 취한들은 서로를 멀거니 바라볼 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한참이 지나서 마침내 한 사람이 대답했다. "얼핏 보기에 사람을 찾아서 달려가는 것 같았어요." 웅묘아가 급히 물었다. "누구를 찾아가는 것처럼 보였지?" "누구를 찾는지는 저희들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우리가 보기에 분명히 사람을 찾아서 달려가는 듯한 인상을 받았어요. 그리고 그 세 필의 말은 저쪽으로 달려갔습니다." 웅묘아가 발을 구르면서 말했다. "망할...... 망할...... 방금 들은 그 말발굽 소리가 틀림없이 그들이었을 것 같은데......." 그는 술이 취한 상태에서 급한 말발굽 소리는 들었으나 주칠칠이 중얼거리는 소리는 듣지 못했던 것이다. 누가 뭐래도 그는 술이 취해 있었던 것이다. 다만 주칠칠이 상상한 것처럼 그렇게 정신을 잃을 정도로 취하지는 않았을 뿐이었다. 웅묘아가 말했다. "우리 지금 빨리 쫓아가도록 하자. 어쩌면 따라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형제들, 빨리 나에게 말 한 필을 구해다 주게. 빨리...... 훔쳐서라도 좋고, 빼앗아도 좋고, 사와도 좋으니까 빨리 한 필을 구해다 주게." 주칠칠은 총총히 객점으로 들어갔다. 이 며칠사이 객점의 대문은 밤새 활짝 열려 있었다. 주인은 주칠칠이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아첨하는 듯한 웃음을 띠며 아는 체를 했다. 그 뒤에 서있던 점원도 허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굽신거렸지만 주칠칠은 그들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녀는 무슨 골똘한 생각에 잠긴 듯 머리를 숙이고 자기 방쪽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가슴 속에는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답답하고 짜증스러움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때 그녀의 등뒤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에 가시는 상공께서는 잠깐만 제 말을 들어 주시겠습니까?" 주칠칠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을 때 두 명의 흑의 대한이 큰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감돌고 있었으며 얼핏 보기에도 별반 악의는 없는 듯하여 보였다. 그러나 주칠칠은 눈을 크게 흡뜨며 물었다. "나는 당신들을 모르는데 왜 나를 불러 세우는 거요?" 흑의 대한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저희들도 공자를 알지 못하지만 저희집 주인은 공자를 알고 계십니다." 주칠칠은 깜짝 놀라 물었다. "당신들의 주인은 도대체 누구지요?" 그 중 한 대한이 말했다. "저희집 주인이 급한 일이 있어서...... 헤헤...... 급한 일이 있어서 공자를 찾고 계십니다." "급한 일이라니? 그게 무슨 일이오?" "아무 일도 아닙니다. 중요한 건 아니구요, 다만...... 다만 공자를 청해서 술 몇 잔을 권하고 싶다고......." 그 흑의 대한은 표독스럽고 날카롭게 생겼으나 말하는 것은 우물우물거리긴 했으나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주칠칠은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술을 마신다구요? 이렇게 깊은 밤에 나를 찾아서 술을 마시겠다구요? 흥, 내가 보건데 당신의 주인이라는 사람은 틀림없이......." 이때 주칠칠은 갑자기 자기 자신이 역용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미쳤다. 그리고는 날카롭게 따져 물었다. "당신들의 주인이라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죠?" 그 대한이 웃으면서 말했다. "저희집 주인은 바로 구양(毆陽)......." 주칠칠은 깜짝 놀라며 날카롭게 물었다. "나는 구양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을 아는 사람이 없소." "그렇지만, 그렇지만 저희집 주인은 이(李) 공자를 분명히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저희들에게 이 공자께 가서......." 주칠칠이 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들은 눈이 멀었소? 누가 이 공자라는 거요?" 대한은 주칠칠의 위아래를 몇 번 훑어보고는 자기 동료를 바라보면서 우물거렸다. "그렇다면 저희들이 잘못 알았다는 말씀......?" 주칠칠이 노갈을 터뜨렸다. "멍청한 녀석들! 다음부터는 사람을 똑바로 알아보고 말을 걸어요. 알았소?" 두 명의 대한은 동시에 허리를 굽신거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주칠칠은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두 대한을 어찌해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다만 노려보고는 몸을 돌렸다. 그녀의 입에서는 참지 못하고 욕지거리들이 터져나왔다. "허우대만 멀쩡하게 생긴 것들이 사람도 제대로 알아볼 줄 모르고...... 정말 눈이 삐었군." 그녀는 중얼중얼 욕지거리를 퍼부어대면서 걸어 들어갔다. 이때 몇 명의 여자들이 머리를 산발한 채 상체를 뒤로 젖힐 수 있는 등받이 의자를 붙들고 울며불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 의자에는 흰 천이 덮씌어져 있었는데 거기에 있는 사람이 아마 죽은 모양이었다. 부인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매우 슬피 울고 있었다. 주칠칠은 눈썹을 찌푸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재수없군. 죽은 사람까지 보게 되다니.......)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한옆으로 몸을 비껴서서 그녀들에게 먼저 지나가도록 하였다. 부인들은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서 주칠칠 옆을 스쳐갔다. 그러나 이때 어떤 노부인이 코를 세차게 풀더니 손을 옆으로 홱 부리쳤다. 그러자 그 콧물은 그대로 주칠칠의 가슴께에 와서 철썩 붙어버렸다. 주칠칠은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지만 그녀들이 너무나 슬프고 애닯게 울었기 때문에 오른발을 들어 쾅 내리밟고는 큰 걸음걸이로 자신의 방으로 뛰쳐 들어갔다. 다행히 방 안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 있지 않았다. 왕련화는 얌전히 침대에 누운 채로였다. 왕련화는 주칠칠이 웅묘아를 떼메고 나갈 때 수혈을 짚었기 때문에 아주 곤히, 깊이 잠들어 있었다. 주칠칠은 재빨리 왕련화에게 다가가 수혈을 풀어 주었다. 그녀는 가슴 속에 화가 잔뜩 끓어오른 상태에서 왕련화의 수혈을 풀었기 때문에 그녀의 손은 매우 매서웠다. 왕련화는 '아야!'소리를 지르면서 마침내 잠에서 깨어났다. 주칠칠이 말했다. "당신은 잠도 잘 주무시는군. 나는 밖에서 귀찮은 일만 당하고 왔는데......." 그녀는 왕련화가 잠을 자고 싶어 잠을 자고 있는게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이 그녀를 억지로 웅묘아를 떼메고 나가라고 시킨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괜한 화풀이를 왕련화에게 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여자가 억지를 쓸 때에는 아무도 그녀를 달랠 수가 없는 법이다. 더구나 이순간 주칠칠의 화풀이에 왕련화는 어떻게도 해 볼 방법이 없었다. 그녀의 짓은 화풀이에 왕련화의 상세는 나아지지 않고 더욱 깊어졌으며 그 눈빛이 암담해져 신음소리마저도 내지 못할 지경에 빠져드는 듯하였다. 주칠칠이 말했다. "당신은 심랑이 방금 말을 타고 가버렸다는 사실을 알아요?" 왕련화가 탄식하면서 말했다. "내가, 내가 어떻게...... 어떻게 알 수 있겠소?" 주칠칠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일 만약 그 사람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내가 지금까지 헛고생한게 되지 않겠어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요. 이처럼 큰 모임에 무림계의 모임을 그가 참석하지 않을 리가 있겠소?" 주칠칠이 한참 생각을 하다가 비로소 얼굴을 활짝 펴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겠군요. 당신이 지금까지 한 말 중에 그 말이 제일 제 맘에 들었어요. 좋아요. 당신은 매우 힘든 것 같은데 제가 자도록 해드리지요." "고맙소." 그는 다시 한숨을 쉬고 말했다. "잠자는 것 마저도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해야 되다니...... 그리고 고맙다고 말을 해야 되다니...... 당신은 내가 불쌍하지 않소?" 주칠칠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더이상 그를 괴롭히지 않고 구석자리에 있는 등받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부지불식간에 깊이 잠이 들어 버렸다. 주칠칠은 확실히 피곤했다. 한 번 잠이 들자 그녀는 떼메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 왕련화는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다. 그녀는 눈썹을 찌푸리며 실소를 날렸다. 그리고 누웠던 자리에서 일어나 신발을 신고 머리를 손질하고 눈을 비빈 다음 허리를 펴고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대충 자신이 누웠던 자리를 정리한 다음 방문을 열어 제꼈다. 그때 갑자기 한 사람이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주칠칠은 깜짝 놀라 움찔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주칠칠이 놀람에 찬 비명을 채 지르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뛰어들어온 사람이 바로 왕련화가 두 번 다시 보기도 싫어하는 승현임을 알았다. 승현은 뛰어 들어오던 자세를 안정시킨 다음 주칠칠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으나 표정은 매우 초췌해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지난밤 한잠도 잠을 자지 못한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주칠칠은 지난밤 그가 틀림없이 매우 분주히 여러 가지 일을 했으리라는 사실을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곱게만 자란 귀공자가 밤새껏 이리저리 부지런히 돌아다녔으니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얼굴에 가벼운 웃음을 띠고 말했다. "자네는 문밖에서 내가 깨어날 때까지 꼬박 기다렸단 말인가?" 승현이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제가 조금 전에 왔을 때 두 분께서는 곤히 주무시고 계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감히 두 분을 귀찮게 해드리지 못하고......." 그는 말을 하다가 슬쩍 침대에 누워있는 왕련화를 바라보더니 또 우물쭈물 이어서 말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문밖에서 기다리다가...... 그만, 그만 문에 기대서 깜박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말을 마치고 그는 또 왕련화를 힐끗 쳐다보고 다시 주칠칠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의 눈에는 이상하다는 듯한 기색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주칠칠이 웃으면서 말했다. "내 이 조카딸은 병이 깊어서 밤에는 반드시 다른 사람이 옆에서 간호를 해주어야 한다네. 그리고 이렇게 밖을 돌아다니면서 간호인을 데리고 다니는 것도 귀찮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나도 여기에서 잠을 자면서 저 애를 간호해 주곤 한다네." 승현은 주칠칠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말하자 얼굴이 더욱 붉어져서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예, 예. 당연히 그러셔야겠지요." 주칠칠이 말했다. "내가 자네에게 부탁한 일은 모두 잘 처리했는가?" 승현이 비로소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 "말씀하신대로 이미 처리했습니다. 저는, 저는 이 조카는 어젯밤 하룻밤 사이에 심랑 그 녀석이 해치웠던 잔악한 일에 대해서 오십칠 명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심랑 그 녀석은 결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겁니다." "잘했네. 듣는 사람들은 그 얘기를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 승현이 말했다. "개방 제자들은 그 얘기를 듣고 울화통이 터져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으며 심지어 어떤 제자들은 눈물을 흘리고 통곡을 터뜨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제자들은 곧바로 심랑을 찾아가서 복수를 하자고 아우성이었어요. 그러나 제가 그들에게 조금만 더 참았다가 오늘, 개방의 모임에서 천하 모든 무림호걸들에게 이 사실을 알린 다음 심랑에게 복수를 하자고 권했습니다." 주칠칠이 말했다. "개방 제자들은 그렇다치고 다른 사람들은 또 어떻든가?" "개방 제자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제 얘기를 듣고 모두 얼굴에 노한 기색을 드러냈지요. 어떻든 한 마디로 말해서 심랑 그 녀석이 오늘 개방의 모임에 모습을 드러내기만 한다면 결코 온전한 상태로 그 자리를 빠져 나가기는 어려울 겁니다." 주칠칠이 한스러운 소리로 말했다. "잘했네, 잘했어...... 그 녀석이 당하는 꼴을 빨리 보고 싶군. 정말 빨리 보고 싶어. 지금 도대체 몇 시나 됐는가?" 승현이 신중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아직 그 개방 모임이 개최되려면 시간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때 점원이 열려진 방문 틈으로 머리를 삐죽이 내밀고 웃음을 띠면서 말했다. "손님들께서는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주칠칠은 의아하여 물었다. "식사? 아침이오, 점심이오?" 점원이 다시 얼굴에 웃음을 띠고 말했다. "정오가 방금 지났습니다. 제가 여러 번 이곳에 왔는데 두 분께서 아주 곤히 주무시길래 깨우지 못했습니다." "아, 정오가 지나가 버렸다고? 참 시간이 빠르군." 그녀는 정오가 지났다는 말을 듣자 심랑을 곤경에 빠뜨릴 시간이 다가온다고 생각하고 기뻐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녀는 기쁘지가 않았고 오히려 마음은 착잡하고 슬퍼지기만 했다. 주칠칠은 도리질을 하며 말했다. "좋아. 얼른 상을 이리 들여오게." 점원이 사라지자 그녀는 또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밥을 먹고 우리 밖으로 나가도록 하세. 승현, 자네는 배불리 먹어두게. 배가 불러야 비로소 힘도 생기고, 심랑 그 악당 녀석을 자네가 직접 처단할 수도 있을 테니까." 승현이 탄식 하면서 말했다. "애석하게도 이 조카가 손을 쓰기 전에 심랑 그 녀석은 아마 다른 사람들 손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겁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식사가 방 안으로 날라져 왔으며 어젯밤 왕련화를 부축해 돌아다니던 두 여자도 따라 들어왔다. 그 여자들은 왕련화의 식사를 옆에서 도와주기 위해서 따라 들어온 것이다. 왕련화는 밥을 한 입 삼키고 한숨을 쉬곤 하면서 꾸역꾸역 한 입 한 입 먹어갔다. 승현도 밥을 한 입 먹고 한숨을 쉬고 젓가락을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멍한 표정을 지어보이고 있었다. 그는 가끔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기도 했으며 또 슬쩍슬쩍 왕련화를 훔쳐보기도 했다. 그러나 주칠칠은 이들의 행동을 전혀 보지 못했다는 듯 게걸스럽게 음식들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사실 주칠칠의 마음은 하늘만이 알 것이다. 그녀는 음식을 입에 집어 넣을 때마다 목구멍에 콱콱 걸려 넘어가지 않았고, 음식을 십는 맛이 마치 모래를 십는 기분이었다. 심랑은 곧 사람들에게 산산조각이 나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직접 그녀가 조작한 일이다.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참 대단한 인간이야. 심랑이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대단하다는 말인가? 어떻든 그 사람은 내 손에 당하게 되었으니 내 자신이 기뻐해야 될 일이 아닌가?) 그녀는 생각을 하면서 얼른 구운 생선 토막을 하나 집어서 입으로 집어 넣었다. 그러나 그 생선은 너무나 썼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거릴 만큼 생선은 쓰고 껄끄러웠다. 그녀는 갑자기 손에 들었던 젓가락을 탁자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고 큰소리로 말했다. "심랑! 아, 심랑! 내가 당신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없는 이상 난 당신을 죽여버릴 거예요. 내가 당신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없는 이상 이 세상의 어떤 여자도 당신을 갖도록 그냥 놔두지 않을 거예요." 승현은 깜짝 놀란듯 밥을 한 입 가득 문채, 고개를 쳐들고 주칠칠을 바라보았다. "삼촌께서는 지금, 지금 무슨 말씀을......." 주칠칠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실언을 알아차리고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아,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아니오. 밥이나 빨리 먹게. 말은 가급적 적게 하는 게 좋은 걸세." "조카는 이미 다 먹었습니다." "자네는 사내 대장부이면서 어떻게 아직 시집가지 않은 아가씨들보다도 더 적게 먹는단 말인가? 흥, 밥 두 그릇도 먹지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 남의 집 아가씨를 넘본다는 건가?" 승현의 얼굴이 순간 붉어졌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더...... 더 먹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그는 다시 밥을 한 그릇 가득 퍼담더니 입 안에 가득 채워 넣었다. 심지어 반찬은 집어 먹을 생각도 않고 오로지 밥만 계속 입 안으로 쑤셔넣었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추칠칠은 속이 상해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이미 다 먹었으면 그만 먹을 것이지, 뭐하러 그렇게 어거지로 밥을 쳐 넣는가? 내 말은 다음부터 밥을 먹을 때는 남자답게 먹으라는 얘기일세." 승현이 밥을 입에 가득 문채 우물거렸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삼촌께서는 저에게...... 저에게...... ." 그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난처한 지경에 밥을 더 먹지도 못하고 젓가락을 내려놓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 식사는 주칠칠에게도 왕련화에게도 승현에게도 매우 괴로운 것이었으나 결국 식사는 끝낼 수 있었다. 식사를 물리고 승현도 왕련화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칠칠은 다시 방 안을이리저리 서성대기 시작했다. 그녀의 표정은 초조한 기색으로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승현은 그러한 주칠칠을 바라보며 더욱 주눅이 들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한쪽 구석에 멀찍이 멍청한 표정을 짓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왕련화는 잠이 들었다. 그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잠이 들어버렸다. 그는 더이상 승현이 게슴츠레하게 자기를 쳐다보는 그 눈빛을 바라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남자가 다른 남자에게 그 눈빛을 받는다는 것은 진정 괴로운 일이다. 시간은 이렇게 답답한 가운데에서도 그들의 마음과는 아랑곳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주칠칠 뿐만 아니라 승현, 왕련화마저도 그 몇 시간이 일 년보다도 더 길게 느껴졌다. 주칠칠은 창을 열었다 닫았다 한게 이미 십여 차례가 지났다. 그녀가 열세번째 창을 열었을 때 마침내 더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짜증스러운 소리로 물었다. "아직도 시간이 덜 됐다는 건가?" 승현이 말했다. "대략 시간이 다 된 것 같습니다." "개방 모임이 어디서 이뤄지는지 자네는 그곳을 알고 있는가?" "어젯저녁 그곳에 직접 가봤습니다." "좋네. 자네가 가서 방금 들어왔던 그 두 여자를 불러오게. 우리도 준비해서 나가도록 하세." 승현은 당황한 듯 멀뚱히 침대에 누워있는 왕련화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녀도...... 그녀도 갈 수 있겠습니까?" 주칠칠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왜 갈 수 없다는 건가?" 승현이 고개를 숙이고 우물거렸다. "저, 이...... 이...... 이 조카는, 이 조카는 약간 불편할 것 같아서......." "뭐가 불편할 것 같다는 건가?" 승현이 말했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을 텐데...... 그리고 상당히 번잡할 텐데...... 만약, 실수해서 그녀가 부상이라도 당하게 된다면......." "흥, 아직 자네에게 시집을 간 것도 아닌데 뭘 그리 걱정하는가? 내 조카딸은 아직까지는 우리집 사람일세. 나도 걱정하지 않는데 자네가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네. 내가 있는 이상, 누가 내 조카딸에게 손을 댈 수가 있단 말인가?" 승현의 얼굴은 다시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우물거렸다. "지당하신......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말을 마친 그는 재빨리 뛰어 나가 두 여자를 불러왔다. 그러면서 속으로 다짐했다. 다음부터는 이분 삼촌이 뭐라고 얘기하든 자기는 절대로 끼어들지 않겠다고....... 길거리는 어제 저녁보다도 훨씬 더 왁자지껄 시끄러웠다. 그리고 매 십여 호 간격마다 민가의 처마 밑에는 개방 제자들처럼 거지로 분장한 대한들이 있었다. 그들은 등에 대부분 서너 장의 마대를 메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개방의 집사의 일을 담당하는 제자들인 것 같았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팔짱을 끼고 남의 집 대문 계단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있거나 서 있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길 좌우 양측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다른 사람이 그들에게 말을 걸지 않는 이상 그들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이것은 바로 개방의 규칙이다. 그들은 오늘 개방의 모임에 참석하러 오는 무림계 인사들을 접대하기 위해 이곳에 모인 것이지만 길거리에서 동냥이나 구걸을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들에게 길을 묻는 무림인사들에게 그들은 모두 동쪽을 향해 손가락질해 보이고 있었다. 개방 대회는 동쪽 교외에서 벌어지고 있는 듯하였다. 주칠칠은 승현에게 길을 안내하도록 했다. 승현이 제일 앞에 서고 중간에는 두 명의 여자가 왕련화가 탄 들것을 들고 쫓아갔으며 주칠칠은 제일 마지막에 왕련화의 들것을 바짝 쫓아가고 있었다.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그들의 이러한 차림을 보고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주칠칠이 부릅뜬 눈과 마주치면, 주칠칠의 그 흉악한 기세에 눌려 더이상 그들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그들이 번화가를 벗어나자 개방 제자들은 더욱더 많아졌다. 이때 개방 제자 중 한 제자가 승현을 알아보고는 웃으며 아는 척을 했다. 그러나 그의 웃음은 억지로 만든 웃음이었기 때문에 매우 어색했다. 그들의 눈빛은 매우 슬픈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이런 것들을 미루어 짐작해보면 아직 좌공룡이 그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눈을 몇 번 굴려 주위를 둘러보고는 승현에게 다가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하고 난 후에는 자네는 가급적이면 우리와 같이 있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네." 승현은 깜짝 놀란 얼굴로 주칠칠을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러나 주칠칠은 눈을 부릅뜨고 위협조로 그 물음을 무시해버렸다. "자네는 내가 하라는대로만 하면 되네." 승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탄식하며 말했다. "예, 말씀대로 하지요." 주칠칠이 또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지지도 말게." 말을 마친 그녀는 눈을 돌려 사방을 바라보고는 갑자기 실성한 소리로 말했다. "웅묘아가 저기 있네." 승현도 눈을 들어 사람들이 많이 있는 쪽을 두리번거리다가 웅묘아의 모습을 발견해내고 얼굴에 기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제가 가서 모셔 오겠습니다." 주칠칠은 차가운 소리로 말했다. "저런 술귀신을 데려다가 무얼 하겠다는 건가?" 승현은 또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예, 그러면 그만 두도록 하지요." 이때 두 명의 개방 제자가 멀찍이서 그들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우측에 선 사람은 신체가 우람했으며, 얼굴은 곰보투성이었으나 등에는 여섯 자루의 마대를 메고 있었다. 좌측에서 오고 있는 사람은 나이는 많지 않았고 작달막한 키에 신체가 뚱뚱했으며 둥근 얼굴에 실실거리는 웃음을 띠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어딘가 약간 모자라는 듯한 인상이었으나 그도 역시 등에 여섯 자루의 마대를 메고 있었다. 여섯 자루의 마대를 멘 개방 제자들은 개방 자체 내에서도 많지 않았다. 주칠칠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 저 두 사람을 아는가?" 승현은 잘 안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알고 말고요. 저 두 사람은 지난날 웅 방주의 제자들이죠. 제가 듣건데 저 두 사람은 개방 중에서의 위치가 대단하다고 합니다. 개방 삼로 바로 밑에 해당 합니다." "저 두 사람의 이름이 뭔지도 아는가?" "왼쪽 사람은 편지새금전(遍地璽金錢) 전공태(錢公泰)라고 하고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뭐였더라...... 소검소복신이라 하고 성은 고(高)씨고 이름은 소충(小蟲)이라고 합니다." 주칠칠이 실소를 날리면서 말했다. "소충? 참 재미있는 이름이로군." 이때 그들 두 사람은 이미 주칠칠 등의 면전에까지 다가와 있었다. 전공태가 가볍게 허리를 굽히면서 말했다. "어젯밤 승 공자께서 알려주신 소식, 정말 감사합니다." 말을 마친 그는 주칠칠을 힐끗 바라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 분께서는......?" 그들의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칠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이 친구의 삼촌 되는 사람이오." 전공태가 의아스럽다는 듯 말을 얼버무렸다. "아, 삼촌......." 전공태는 이상하다는 듯이 주칠칠을 위아래로 몇 번 훑어보았다. 주칠칠이 말했다. "내가 너무 젊어서 이 친구의 삼촌이 될 수 없을 것 같다는 의미요?" 전공태가 허리를 굽히고 웃으면서 말했다. "무슨 말씀을...... 무슨 말씀을......." "당신들은 길을 안내하려고 온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좋소. 길을 안내해 주시오." 전공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허리를 가볍게 굽히더니 한 손으로 그들 두 사람을 앞길 쪽으로 인도하는 시늉을 해보이며 말했다. "자, 가시죠." 그들은 원래 승현을 보고 달려왔다. 그러나 승현은 한 마디도 말을 하지 못하고 주칠칠이 승현 대신 말을 하는 것에 그들 두 사람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들을 안내했다. 승현은 씁쓸한 웃음을 날릴 수밖에 없었다. 개방 대회가 열리는 곳은 큰 논인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때가 겨울이라서 추수는 진작에 끝나 버렸고, 논에는 눈만이 가득 쌓여있어 평평한 초원처럼 보였다. 북방의 시골에는 원래 대나무가 많기 때문에 개방의 제자들은 팔뚝 만큼 통이 굵은 대나무들을 잘라다가 눈이 덮인 이 논 위에 대나무 울타리를 만들었다. 그들은 매우 급히 일을 서둘렀던 듯 대나무 울타리는 아주 엉성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그 대나무 울타리 안의 설비도 등나무 의자와 삐그덕거리는 탁자로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대나무 울타리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었고 기개가 대단한 인물들이었다. 대나무 울타리와 이들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어울리지 않을 만큼 우수꽝스러웠다. 대나무 울타리 밖에는 개방 제자들이 가득 있었는데 그들 중 어떤 제자들은 대나무 울타리 안팎을 오가며 기웃기웃 사람들을 보고 있었고, 어떤 제자들은 눈을 감고 태양빛을 쬐고 있었으며, 어떤 제자들은 겨울 햇살에 웃도리를 벗어들고 이를 잡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언뜻 보기에 매우 한가로운 듯 보였으나 사실은 그들 모두에게는 신중한 기색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이백여 명이나 되는 개방 제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으나 서로 말을 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전공태는 주칠칠 일행을 안내하여 대나무 울타리 북쪽에 앉게 하였다. 울타리의 북쪽은 당연히 울타리 내에서도 가장 윗자리였다. 그때까지도 고소충이라는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여전히 헤벌쭉거리고 웃을 뿐이었다. 울타리 안에는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았다. 주칠칠은 그들을 못본 척 그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거만하게 앉아있었다. 주칠칠 등 일행이 자리를 잡는 것을 보고 전공태가 얼른 포권을 하고 말했다. "세 분께서는 이곳에서 차를 드시고 계십시오. 저는 밖에 일이 있어서 그만 나가봐야 겠습니다." 전공태도 이미 승현의 삼촌이라는 이 사람이 상당히 상대하기에 껄끄러운 사람임을 알아차린 듯 재빨리 그 자리를 빠져 나가려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주칠칠이 도리어 전공태를 붙잡았다. "기다리시오." 전공태가 말했다. "귀하께서는 또 무슨 분부라도 계신지요?" "당신들은 저녁 시간에 이곳으로 사람들을 모이도록 하였는데 차 한 잔 밖에 대접할 수 없다는 거요?" 전공태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에 빠져 우물거리면서 말했다. "있습니다. 차 말고도...... 몇 가지 안 되는 산나물 안주에 술도 있습니다. 충분한 준비는 하지 못했습니다만 여기에 앉아서 답답하지는 않도록 저희들이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충분하지 못한 점이 있다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칠칠이 여전히 목을 꼿꼿이 세우고 말했다. "흥, 그 정도라도 준비되었으면 족하오." 승현이 재빨리 웃음을 띠고 말했다. "전 형께서 다른 일이 있으시면 나가 보시지요." 지금까지 바보스러운 웃음을 흘리고 있던 고소충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나는 아무 일도 없으니까 여기에서 이 분들하고 같이 있겠소." 전공태는 고소충을 한 번 바라보고 씁쓸하게 웃으면서 총총히 그 자리를 빠져 나갔다. 주칠칠이 말했다. "좋소. 당신은 여기에서 우리 옆에 있으시오. 먼저 차를 좀 따라 주시겠소?" 고소충은 주칠칠의 말에 히히 웃으면서 차 세 잔을 따르고 나서 말했다. "드시지요." 그 대나무 울타리 안에 앉아 있던 십여 명의 사람들은 슬쩍슬쩍 이쪽을 곁눈질해 보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쑥덕쑥덕 댔는데 얼핏 보기에도 그들은 주칠칠 등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고 있음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중에 한 사람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저 녀석은 도대체 누구지?" 그러나 주칠칠은 그들의 쑥덕 공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들어 아무 거리낌 없이 한 사람 한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들은 대부분 나이가 모두 사십 남짓 해보였으며 모두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고 기세가 대단했다. 얼핏 보기에도 그들은 모두 강호에서 행세꽤나 하는 인물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주칠칠은 그들 중 아무도 알만한 사람이 없었다. 웅묘아는 대나무 울타리 밖을 몇 바퀴 돌면서 대나무와 대나무 사이의 틈새로 울타리 안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주칠칠과 승현을 발견하고는 눈이 반짝 빛났다. 그러나 그들을 발견한 순간, 뒤로 슬쩍 물러서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래, 저 녀석도 왔군. 그러나 심랑 그 친구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는 지난 밤 밤새 내내 심랑 등이 달려갔다는 곳으로 쫓아가 찾아봤으나 어디에서도 심랑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이때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이 모여들고 있었다. 웅묘아는 다시 대나무 울타리 밖을 돌면서 모인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그러던 그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내가 왜 이렇게 멍청해졌지? 여기서 기다릴 필요가 뭐가 있어? 차라리 이곳으로 오는 길목에 가서 심랑이 오는 것을 기다리는 게 더 나을텐데......." 그는 한 번 생각이 들면 곧바로 실행에 옮기는 성격이다. 그의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개방 대회가 열리는 입구의 길목으로 달려갔다. 그가 그 번화가에까지 다시 돌아왔을 때 길가에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오가고 있었다. 개방의 초청에 응해 이곳으로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개방 대회가 열리는 곳에 도착한 듯했고, 몇 안 되는 개방 제자들만이 여전히 남의 집 처마 밑에 기대있거나 웅크리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웅묘아는 길이 꺾어지는 모퉁이에서 걸음을 멈추고 중얼거렸다. "만약 심랑이 온다면 틀림없이 이 길을 지나겠지." 웅묘아도 역시 팔짱을 끼고 다른 집 대문 계단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한참을 기다렸다. 한참이 지났을 때 갑자기 한 사람이 십여 개의 동전을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웅묘아는 깜짝 놀라 물었다. "도대체 이것은...... 이것은......." 그 사람은 웃으면서 말했다. "좀 귀찮겠지만 제발 다른 곳에 가서 서 있으시오. 우리 상점은 장사를 해야 되니까......." 웅묘아는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곧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얼굴에 가벼운 웃음을 띠며 속으로 생각했다. (하하...... 나를 거지로 봤군.) 그가 자신의 행색을 훑어보자 그의 차림은 조금도 거지와 다르지 않았다. 그는 어색한 듯 실소를 터뜨리면서 동전을 받아든 손을 다시 한 번 들어서 살펴보고는 돈을 건네준 사람에게 가볍게 인사하며 말했다. "고맙소." 그는 어슬렁 어슬렁 길가 맞은 편에 있는 포장마차로 가서 말했다. "동전 십 원어치의 술을 데워 주시오." 그의 이러한 행동을 보고 그에게 돈을 준 그 사람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혼잣말로 탄식하면서 말했다. "거지들이란 정말 어쩔 수 없군. 돈이 생기기만 하면 저렇게 곧바로 술이나 마셔대니......." 웅묘아는 상당히 귀가 밝은 사람이다. 그의 이러한 중얼거림을 그가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는 더욱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그가 주문한 술이 그의 앞에 놓여졌다. 그는 술그릇을 들어 단숨에 마셔 버리고는 큼직한 은자 한 덩이를 꺼내어 포장마차 주인에게 집어 던지면서 말했다. "다시 세 잔만 더 주시오." 그에게 돈을 건네준 그 사람은 웅묘아의 이러한 태도를 보고 깜짝 놀란 듯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멍청하니 있더니 고개를 흔들며 상점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가 상점 안으로 들어가면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또 웅묘아의 귀에 들려왔다. "요새는 왜 이렇게 이상한 사람이 많고 이상한 일들이 많이 발생하는지 모르겠군?" 웅묘아가 네번째 잔을 전부 마셨을 때 길을 오가는 사람들은 더욱 뜸해졌다. 이때 갑자기 개방 제자 한 사람이 길 입구에서 박수를 쳐댔다. 그러자 지금까지 남의 처마 옆에 기대어 서있거나 대문 입구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개방 제자들은 모두 박수를 치는 그 사람을 따라서 교외 쪽으로 달려갔다. 아마 개방 대회가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심랑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웅묘아는 매우 조급하여 중얼거렸다. "그 친구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거지? 개방 대회에 오지 않겠다는 건가? 그럴 리는 없을 텐데...... 개방 대회를 그 친구가 어떻게 참석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이야? 그 친구는 분명히 몇 시에 개방 대회가 열리리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왜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는 거지? 혹시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발생한 건가?" 이때 길가에는 더이상 무림 인사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길의 주점들과 상점들은 무림인사들이 갑작스레 몰려드는 순간부터 매우 바빠졌고, 혹시 큰 일이라도 발생하지 않을까 염려하며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으나 지금은 무림 인사들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에 그들의 얼굴에는 다시금 미소가 떠돌고 있었다. 그러나 웅묘아는 도리어 조급함과 근심으로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는 다시 몇 잔의 술을 더 들이키고는 가슴 속이 옷을 풀어헤쳤다. "만약 그 친구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주칠칠은 대나무 울타리 안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아무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오직 고소충만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녀가 이처럼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쳐다보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가시방석에 앉은 듯 당황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고소충이라는 개방 제자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여전히 얼굴에 바보스러운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주칠칠은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에게 말을 건넸다. "당신이 계속 그렇게 웃고 있는 것을 보니, 무슨 기쁜 일이 있는가보죠?" 고소충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여전히 얼굴에 웃음을 띤채 말했다. "그렇소이다." "무슨 일인지 저에게도 좀 말해 주실 수 있소?" "기분좋은 일이야 많지요. 보세요, 햇빛이 이렇게 따뜻하고 눈에 덮힌 천지가 이렇게 멋있고 또 손님들이 이렇게 많이 모였고...... 이러한 일들이 모두 기분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비가 올 때도 기분이 좋나요?" "그럼요. 당연하지요." "비가 올 때는 또 무엇 때문에 기분이 좋지요?" 고소충이 히히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만약 비올 때가 없다면 어떻게 태양이 나올 때 기분좋은 것을 알 수 있겠어요? 하물며 빗물은 초목을 더욱 신선하게 하고 영양을 공급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사람 대신에 지붕을 깨끗이 씻어주잖아요?" "그렇다면 도대체 당신이 기분 나쁠 때는 없소?" "최소한 지금까지는 기분이 나쁠 때가 없었습니다. 이 천하에 가는 곳마다 저로 하여금 기분 좋게 하는 것들 뿐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굳이 기분 나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일 년 삼백육십오 일 당신은 언제나 기분이 좋다는 거요?" "그렇습니다." 주칠칠은 멍청한 듯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실소를 날리면서 말했다. "당신은 확실히 이상한 사람이군요." 그녀는 자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는 사람들을 머리에 떠올려보았다. 그녀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이상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심랑, 웅묘아, 김무망, 심지어 승현까지도....... 이 사람들은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모두 이상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모두 그녀 눈에는 매우 사랑스럽게 보였다. 이때 갑자기 대나무 울타리 안에서 한 사람이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교 대협이 오셨소." 주칠칠이 눈을 들어 그 사람이 손을 들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과연 교오와 화사고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교오는 주위를 향해 가볍게 코권을 하고는 큰 걸음걸이로 대나무 울타리 안으로 들어왔다. 평소에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를 찾아볼 수도 없었으며 다른 사람들과 그렇게 친하게 지내는 듯하지도 않아보였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주위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곤 하는 것이었다. 대나무 울타리 안에 이곳저곳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모두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포권을 하고 아는 척을 했다. 주칠칠이 말했다. "참 이상도 하군. 저렇게 거만한 자세를 취하는 사람이 어떻게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지......?" 고소충이 웃으면서 말했다. "나쁜 일을 하지만 않고, 마음만 올바르다면 그리고 그 행동이 정정당당하기만 하다면 비록 약간 거만하다고 해도 사람들은 언제나 그 사람을 환영하는 법이오." "당신은 아는 것도 많군요." 고소충이 히히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천만의 말씀...... 그렇지 않소이다." 이때 갑자기 대나무 울타리 밖에서 '딱딱딱!' 하고 나무를 두드리는 소리가 세 번 들려왔다. 고소충이 웃으면서 말했다. "사형께서 집합하라고 명령을 내리시는 것 같소이다. 나는 가봐야 될 것 같소." 주칠칠은 고개를 돌려 대나무 울타리 틈새로 밖을 내다보았다. 사방에 흩어져있던 개방 제자들이 한곳에 몰려들어 엄숙한 표정으로 가지런하게 열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전공태와 고소충이 개방 제자들을 거느리고 대나무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백여 명이나 되는 개방 제자들은 대나무 울타리 중앙에까지 이르러 동시에 허리를 굽히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이렇게 참석해 주셔서 대단한 영광입니다." 말을 마친 그들은 동시에 눈이 덮힌 눈바닥 위에 주저앉았다. 주칠칠은 조급해져 중얼거렸다. "대회가 이미 시작됐는데 심랑 그 사람은 왜 아직도 안 오는 것일까?" 웅묘아는 열한잔째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만약 이때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그는 어쩌면 계속해서 수십 잔의 술을 더 마셨을지도 모른다. 심랑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는 술을 빌려 답답한 기분을 해소할 도리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자 웅묘아는 손에 들었던 잔을 팽개치고 미친 듯이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 달려갔다. 멀리서 세 마리의 말이 나는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순식간에 그 말은 웅묘아의 앞까지 달려왔다. 말에 탄 사람은 과연 심랑과 그 주루의 주인이며, 그 주루에서 웅묘아에게 따귀를 얻어 맞았던 대한이었다. 세 필의 말 뒤에 또 마차 한 대가 오고 있었다. 웅묘아는 두 어깨를 활짝 펴고 그 쪽으로 뛰어가면서 크게 부르짖었다. "심랑! 심 형! 당신이 조금만 더 늦게 왔더라면 아마 내가 미쳐 죽은 꼴을 발견했을 거요." 심랑은 말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세우고 말했다. "웅 형, 무슨 일인데 그렇게 허둥대는 거요?" 웅묘아는 웃으면서 주루 주인을 향해 말했다. "죄송하지만, 심 형을 저에게 약간 양보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심 형과 조용히 할 얘기가 있어서......." 말을 마친 그는 주루 주인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재빨리 심랑을 끌어당겨 멀찍이 떨어진 길모퉁이로 데려갔다. 심랑이 웃으면서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이러는 거요?" 웅묘아는 침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어젯저녁 심 형 당신은 도대체 어디로 갔던 거요?"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웅 형 당신이 술 몇 잔을 마시고 곤드레만드레가 됐는데, 내가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있었겠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 혼자 갔던 거요." 웅묘아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어젯저녁, 나는 아주 경천동지할만한 큰 비밀을 알아냈소." 심랑은 한 번도 웅묘아가 이처럼 정색을 하고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얼굴색이 변하면서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오?" "그 성이 승이라는 그 친구 말이오. 술 몇 잔을 마시더니 억지로 나를 잡아 끌고는 자기의 매파가 되어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소.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친구와 더불어 그곳에 갔소." 그는 어젯저녁에 발생했던 일, 들었던 일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심랑에게 말했다. 심랑은 얼굴색이 변하며 조급하게 물었다. "그 일들을 웅 형 당신이 직접 들은 거요?" "그들은 내가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취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 거리낌 없이 내 앞에서 이런 말들을 했소. 그러나 사실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은 취하지 않았었소. 오히려 그들 얘기를 다 듣고 나서 진짜 취해 버렸던 거요." 심랑이 신음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생각컨데 그 친구는 바로 승현이 말했던 심랑을 모방하는 가짜 심랑이겠구려." "그렇소." "웅 형이 보건데 그 사람은 누구일 것 같소?" "그 친구의 말하는 어조를 봐서는......."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동시에 탄식소리를 내뱉었다. 그들 둘은 말을 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