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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솔뫼 성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탄생지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 108
1845년은 한국 교회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金大建, 1821-1846년) 신부가 사제품을 받고 귀국한 역사적인 해이다. 세계 교회 역사상 그 유래가 없이 자생적으로 설립된 한국 천주교회는 그 해 김대건 신부의 사제 서품과 귀국으로 비로소 명실상부한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솔뫼는 바로 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탄생지로서, 성인이 박해를 피해 조부 김택현(金澤鉉)을 따라 용인 땅 골배마실로 이사 갈 때인 일곱 살까지 살았던 곳이다.
‘소나무가 우거진 작은 동산’이라는 뜻을 가진 ‘솔뫼’는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이곳은 김해 김씨 안경공파에 속한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金震厚, 1739-1814년 순교), 종조부 김종한 안드레아(金宗漢, ?-1816년 순교, 족보에는 漢鉉으로 나옴),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金濟俊, 1796-1839년 순교) 그리고 김대건 신부 등 4대의 순교자가 살던 곳이다. 김대건 신부는 바로 이곳에서 사제품 받고 1년 만인 1846년 순교하기까지 그의 삶을 채웠던 뜨거운 신앙과 열정을 배웠던 것이다.
김대건 신부가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오르고 30년 뒤인 2014년 8월 16일, 나머지 3대 순교선조들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라 4대 모두 복자와 성인품을 받았다.
이 작은 마을에 복음이 전래된 것은 김대건 신부의 조모 이씨의 삼촌이며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 루도비코가 그의 고향인 충청도 지방의 전교를 맡으면서 시작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가 면천 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그는 이존창으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는 곧 벼슬을 버리고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로부터 이곳 솔뫼는 교우촌이 되었다.
하지만 1791년 전라도에서 제사 문제로 일어난 진산 사건으로 그 역시 신해박해의 회오리에 휩쓸려 홍주 · 전주 · 공주 등지의 옥에 갇히게 되었고,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귀양을 떠나야만 했다. 그 후 귀양에서 풀려 돌아온 후 1805년 또다시 붙잡혀 해미 감옥으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10년간 옥중 생활의 고통을 참아내던 중 1814년 12월 1일(음력 10월 20일) 75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1821년 8월 21일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와 모친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김대건 신부는 재복(再福)이라는 아명으로 솔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 김대건 일가가 살던 집은 아흔아홉 칸이나 되는 큰 집이었다고 한다.
솔뫼에서 대대로 명망이 높았던 김씨 가문이었지만 김진후가 수차례 체포되기를 반복하고, 1805년부터 10년간의 긴 옥중 생활을 하면서 가세가 기울어 신앙을 지키고 살기가 어려워졌다. 셋째 아들 종한은 부친이 옥중에 있을 때 경상도 안동 땅으로 피난을 갔다가 붙잡혀 1816년 대구 감영에서 순교하였다. 둘째 아들 택현은 1827년 아들 김제준과 손자 김대건 등을 데리고 경기도 용인 땅 ‘골배마실’이라는 산골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오랫동안 살아왔던 집과 땅이 있는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김씨 일가의 피난길은 설움과 눈물이었지만 신앙을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에서 나온 결단이었다.
선대의 신앙을 이어받은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은 성 모방(Maubant) 신부로부터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고 회장에 임명되어 전교에 힘쓰면서 자신의 아들을 사제의 길로 인도하였다. 그리고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그 해 9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마카오로 유학을 갔던 신학생 김대건은 1845년 8월 17일 상해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페레올(Ferreol)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고 그 해 10월 귀국하였다. 귀국 후 첫 사목지를 은이 마을로 정한 뒤 공소를 차려 용인 일대의 사목을 시작하였다. 유학 중에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하고 모친 역시 귀국 후 잠시 얼굴만 대했을 뿐, 김대건 신부 또한 사제품을 받은 지 1년 만인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장렬한 순교로 일생을 마감하였다. 1814년 증조부인 김진후로부터 시작하여 김대건 신부까지 32년 동안 김씨 일가는 4대가 순교의 월계관을 쓰는 신앙의 명가가 된 것이다.
1906년 합덕 성당 주임 크렘프(Kremff) 신부는 솔뫼를 성역화하기 위해 인근의 토지 매입을 시작하였고, 1946년 김대건 신부의 순교 100주년을 앞두고 백문필(Perrin) 필립보 신부는 복자 김대건 신부 100주년 순교 기념비를 세우고 생가 터를 매입하였다. 그 후 대전교구는 1976년부터 성지 개발을 본격화해 이듬해 3m 높이의 김대건 신부 동상과 기념탑을 건립했다. 동상은 한국 전통 의상인 갓과 도포를 갖추고 영대를 두른 모습으로 바로 뒤에는 보호자인 성모를 의미하는 흰 기념탑을 세웠다. 이어 1983년에 순교자 신앙을 가르치고 전하는 솔뫼 피정의 집을 건립하여 솔뫼 성지를 ‘순교자 신앙의 학교’로 삼았다.
2021년 천주교 복합예술공간 기억과 희망이 건립된 후 이곳은 현재 내포교회사연구소로 사용하고 있다.대전교구는 또한 1998년 7월 28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46호로 지정된 김대건 신부의 생가 터에 지자체와 함께 2004년 9월 22일 생가를 복원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복원된 성 김대건 신부 생가는 전통 한옥 구조로 당시 내포 지역 사대부가 살던 집 규모와 구조를 따라 건립되었다. 이어 2006년 3월 30일에는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과 성당 축복식을 갖고 성인의 성덕과 순교 정신을 기리고 본받기 위한 장을 마련하였다.
새로 정비된 성지 입구에 들어서면 뫼산(山)자 모양의 정문과 그 옆의 예수성심상이 자애로운 미소로 순례자를 맞이한다.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 정면에 조성된 솔뫼 아레나와 생가 사이에는 한복을 입고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2m 크기의 솔뫼 성모상이 정겨운 시선으로 순례자를 맞이한다. 성모상을 지나면 소나무 숲속에 건립된 성 김대건 신부 동상과 기념탑, 그리고 가장자리 벽면으로 유리타일로 제작된 십자가의 길 15처와 조각 작품들로 조성된 십자가의 길 14처가 순례자들의 마음을 이끌고 있다.
이는 2009년 주차장 및 야외 화장실 건립 공사를 시작으로 5년여에 걸쳐 솔뫼 성지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 작업을 시행한 결과이다. 솔뫼 성지는 한국인 첫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성지의 위상에 걸맞게 야외무대와 광장을 조성하고 성지를 집회와 순례, 기념 공간으로 나누어 순례자들이 성지순례의 참 의미를 묵상하도록 단장하였다. 노후화된 솔뫼 피정의 집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1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야외 공연장이자 문화공간인 솔뫼 아레나(Arena)와 광장을 건립해 2011년 5월 14일 축복식을 가졌다. 아레나는 고대 로마 원형경기장 내지 극장 중심 부분을 지칭하는 말로, 로마 시대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한 곳이기도 하다.
2014년 8월 15일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솔뫼 성지를 방문해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한 청년들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고, 그해 9월 25일 문화재청에 의해 김대건 신부의 생가가 있는 ‘당진 솔뫼마을 김대건 신부 유적’이 국가 지정문화재 사적 제529호로 지정되었다. 2015년 4월 24일에는 교황 방문 후속 사업의 하나로 충남 당진시의 협조로 프란치스코 교황 동상 2점과 족흔 조형물, 교황과 성 김대건 신부가 남녀 어린이와 손을 잡고 웃고 있는 토피어리가 설치되었다. 2017년 8월 14일에는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 3주년을 기념해 성지 내에 신축한 매듭을 푸시는 성모 마리아 경당 축복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대전교구와 당진시는 2021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탄생 200주년 기념사업으로 솔뫼 성지에,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아시아 청년들과 만났던 현장에 천주교 복합예술공간 ‘기억과 희망’(Memoria et Spes)을 조성하기로 하고, 2019년 9월 20일 기공식을 거행했다.
2021년 7월 20일 축복식을 봉헌한 천주교 복합예술공간 ‘기억과 희망’ 안에는 기억과 희망 성당과 예술 공연장, 전시관, 회랑 그리고 야외 조각공원 등이 들어섰다. 복합예술공간인 ‘기억과 희망’은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의 사목표어인 ‘피어라 순교자의 꽃들아!’와 문장에 등장하는 들장미를 형상화해 13개의 들장미 꽃잎을 지붕 형태의 덮개로 올리는 방식으로 건축되었고, 대규모 행사를 위해 건물을 개방해 외부 광장까지 객석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또한 한국의 산티아고 순례길로 불리는 충남 당진 버그내 순례길이 솔뫼 성지에서 합덕제 · 수리민속박물관, 합덕 성당, 합덕제 중수비, 복자 원시장 · 원시보 우물, 무명 순교자의 묘, 신리 성지를 잇는 13㎞ 구간에 조성되어 많은 도보 순례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23년 6월 1일)]
솔뫼와 다락골 - 첫 한국인 사제들의 생가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과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는 첫 한국인 사제로, 서로 동갑내기인데다가 인척이었으며, 함께 신학생으로 간택되어 이국땅에서 서로 의지하며 생활하였다. 다만 김대건 신부가 훗날 피의 순교자며 성인이 된 반면에 최양업 신부는 한국 사제들의 모범이 될 땀의 순교자가 되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김대건 신부의 집안이 언제부터 ‘솔뫼’(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생활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의 집안에서 처음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 증조부인 김종현(金淙鉉)이고, 그 때 솔뫼에서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이후 그의 영향을 받아 증조부 진후(비오)를 비롯하여 조부 택현과 종조부 종한(안드레아), 희현(루수)이 입교하였으며, 이러한 신앙 전통이 부친 제준(濟俊, 이냐시오) 성인과 대건 신부에게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1821년 대건이 태어났을 때는 이미 증조부인 진후가 1814년에 해미에서 옥사하였고, 종조부인 종한은 경상도로 이주하여 생활하다가 1815년의 을해박해 때 체포되어 이듬해 대구에서 순교한 뒤였다.
김제준 성인이 가족을 이끌고 고향 솔뫼를 떠난 것은 김대건의 소년 시절인 1820년대 중반이었던 것 같다. 이후 그의 가족들은 서울 청파로 이주해 살다가 다시 경기도 용인의 한덕동(寒德洞, 이동면 묵리)을 거쳐 이웃 골배마실(내사면 남곡리)로 이주하였다. 바로 이곳에서 김대건은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매듭을 푸시는 성모님의 집(경당)에 설치된 환조 입상 모습.반면에 최양업 신부의 선대는 본래 서울에서 세거하던 집안이었으나, 증조부 최한일(崔漢馹)이 복음을 받아들인 후 1791년의 신해박해 때 과부가 된 증조모가 아들 인주(仁柱, 최양업 신부의 조부)와 함께 충청도 청양 다락골로 낙향하게 되었다. 인주는 이곳에서 장성한 뒤 이웃 ‘새터’(청양군 화성면 농암리)로 옮겨 새 삶의 터전을 가꾸었으며, 차츰 이곳으로 신자들이 이주해 오면서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최양업은 1921년에 이 새터 교우촌에서 태어나 부친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성인과 모친 이성례(李聖禮, 마리아)의 신앙을 먹으며 성장하였다.
최경환은 이후 가족들과 함께 다락골 새터를 떠나 서울의 낙동(현 회현동)으로 이주해 살다가 다시 이곳을 떠나 지방을 전전하였고, 양업의 나이 만 11살이 되던 1832년 무렵에는 과천의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안양 3동)에 정착하였다. 이 뒤뜸이 마을은 얼마 안 되어 신자들의 비밀 공동체인 교우촌으로 바뀌게 되었다. 양업은 1836년 초 바로 이곳에서 신학생으로 추천되었으며, 경환은 훗날 수리산의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솔뫼는 김대건 신부의 가족이 이주한 뒤 교우촌으로서 의미를 잃었다. 반면에 다락골과 새터 교우촌은 계속 유지되었으며, 병인박해 이후 여러 순교자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솔뫼 생가 터는 1946년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후손들에게 매입되었고, 같은 해 6월 4일에는 순교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그 후 대전교구의 ‘솔뫼 성역화 추진 위원회’에서는 1976년부터 본격적으로 성지 개발을 시작하여 이듬해 동상과 기념탑을, 1983년에 피정의 집을 건립하였다. 반면에 병인박해 때의 무명 순교자들이 안치되어 있던 다락골 줄무덤은 1982년에야 비로소 청양 본당 교우들이 사적지로 조성하였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9월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연보
-. 1821.8.21 충청도 솔뫼(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김제준 (이냐시오)과
고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출생.
-.1836.4 경기도 용인의 '은이 공소'에서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뒤 신학
생 후보로 선발.
-.1836.12.3 앞서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양업(토마), 최방제(프란치스코)와 함께
정하상(바오로), 조신철(가를로) 등의 인도를 받아 변문으로 출발.
-.12.28 조선입국을 위해 요동에 머루르고 있던 샤스탕(Chast ant,鄭)신부 댁에
도착.
-.1837.6.7 중국 대륙을 남하하여 마카오에 도착. 이후 파리 외방 전교회 극동
대표부(대표;Libois신부)에서 칼레리(M.C allery)신부 등에게서 수학.
-.1837.8 마카오 민란으로 인해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1838년 겨울 귀환)
-.1841.11. 마카오 민란으로 인해 다시 마닐라로 피신(11월에 귀환)
-.1841.11. 최양업과 함께 철학 과정 이수, 신학 과정 입문.
-.1842.2.15 메스트를 신부와 함께 프랑스 함대 세실 함장의 에리곤호에 탑승하여
마카오를 출발
-.10.26 요동의 백가점(白家店)도착. 최양업,메스트로 신부와 함께
소팔가자(小八家子)로 감. 12.27 조선교회의 밀사 김 프란치스코 상봉.
-.12.29 변문 출발. 의주를 통해 조선에 귀국(1차 귀국) 12,31 압록강을 다시
건너 중국측 변문으로 감.
-.1843.3. 변문으로 나가 조선교우와 접촉한 뒤 백가점으로 귀환 (2차 탐색)
4. 소팔가자로 거처를 옮겨 최양업과 같이 신학 공부.
-.1844.2.4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북방 입국로 탐색을 우해 훈춘 으로 출발
(4차 탐색)
-. 3,8 훈춘을 거쳐 조선에 귀국(2차 입국), 경원에서 조선 교우 상봉.
-. 1845.1.1 조선교우와 상봉하여 조선에 귀국(3차 입국) 1.15 서울 도착.
돌우물골(석정동)에 유숙.
-, 1845.4.30 선교사 영입을 위해 현석문(가를로)등 11명의 조선인 교우들과 함께
제물포 출발(6,4 상해 도착)
-. 8.17 상해 금가항 성당에서 사제 서품.
-. 8.24 상해에서 약 30리 되는 만당 성당에서 첫 미사.
-. 8.31 페레올 주교,다블뤼 신부와 함께 라파엘(Raphael)호를 타고 상해 출발.
-. 10.12 충남 강경 부근의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
-. 1846.5.14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자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 주 교의 지시를
받고 교우들과 함께 마포를 출발.
-. 6.5 체포됨.
-. 6.9 해주 감영으로 압송.
-. 6,21 서울 포도청으로 이송.
-. 8,29 조선 교우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회유문 작성.
-. 9.15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음.
-. 9,16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
-.10.26 이민식(빈첸시오)에 의해 미리내에 안장됨.
-.1857.9.23 가경자로 선포됨.
-.1901.5.18 유해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성당으로 이장.
-.1925.7.5 시복됨.
-.1949.11.15 한국 성직자들의 대주보로 결정.
-.로마 교황청에서 7 월 5일을 김대건 신부 축일로 정함.
-.1960. 7. 5 시복됨.
-.1984. 5. 6 시성됨.
4대 박해와 김대건 신부님 일가
1, 신유박해 1801년
1784년 탄생한 가톨릭교 신앙 공동체는 ‘진산사건’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1795년 중국인 주문모 신부님의 조선 입국 이후 교세가 크게 확대되었고, 1800년 무렵에 이르러 신자수가 10,000명을 헤아리는 공동체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1800년 6월 정조의 사망 후 어린 나이의 순조(純祖)가 즉위하고, 그 후 견인 대왕대비 김씨를 중심으로 하는 노론 벽파가 득세하면서 가톨릭교는 또한 차례의 박해를 겪어야 했다.
임금도 몰라보고 아비도 몰라보는 무군무부(無君無父)의 무리로 간주된 가톨릭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1801년 신유년 1월 조정의 공식적인 박해령과 더불어 시작되었던 것이다. 1801년이 신유년이기에 신유박해라 칭한다.
남인 시파를 제거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가 내포된 이 박해는 서울에서만이 아니라 지방에까지도 확대된 대대적이고 전면적인 박해로 가톨릭교 신앙 공동체에 큰 희생을 초래하였다.
이 박해 중에 300명 이상이 희생되었는데, 사학죄인(邪學罪人)으로 몰린 이승훈, 정약종, 최창현, 최필공, 홍낙민 등이 참수형을 당했으며, 이가환과 권철신은 고문을 이기지 못한 채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주문모 신부님이 의금부에 자수하여 군문효수(軍門梟首)의 형을 받은 후, 가톨릭교에 대한 박해는 6년간 주문모 신부님을 헌신적으로 도왔던 강완숙을 비롯하여 주신부님과 관계했던 인물들로 확대되었다.
이 박해는 같은 해 말 황사영을 비롯하여 이른바 ‘백서사건(帛書事件)과 관련된 많은 이들의 희생을 초래하며 막을 내렸다.
신유박해로 인해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증조 할아버지인 김진후(비오)는 1801년부터 감옥을 드나들기 시작하더니, 1804년에는 체포되어 해미로 압송되었고, 해미성지에서 10여 년간의 옥살이 끝에 1814년 옥사하였다.
또한 작은 할아버지인 김종한(안드레아)는 1816년 안동에서 체포되어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 당하였다.
2. 기해박해 1839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하여 지도층 인사들이 거의 다 순교하거나 유배에 처해지거나 혹은 산간 벽지로 피신함으로써 조선교회는 존망의 절대적 위기에 처한 듯 했다.
그러나 가톨릭교에 대한 박해는 교우촌의 형성과 확산 속에서 조선 사회 전역으로 파급되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하였고, 이전과 달리 양반이 아니라 중인 이하 신분층을 중심으로 교회가 재건되었다.
그리고 1811년과 1825년, 두 차례에 걸쳐 교황에게 서한을 올리며 지속적으로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하는 가운데 1831년조선 대목구가 설정되고, 1836년과 1837년에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인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신부님, 샤스탕(Jacques Honore Chastan)신부님, 앵베르(Laurent Joseph Marie Imbert)주교님이 조선입국에 성공하여 사목활동을 전개 함으로써 조선의 가톨릭교 신앙 공동체는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였고, 1838년 말 그 수는 9,000여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기해년인 1839년 형조판서 조병현을 중심으로 한 벽파(僻派) 풍양 조씨가 시파(時派)인 안동 김씨로부터 정치권력을 빼앗으려는 과정에서 신자 수 10,000명을 헤아리는 가톨릭교회는 또 다시 박해의 시련을 겪어야 했다.
1839년 기해년에 일어난 가톨릭교회에 대한 박해라 하여 기해박해라 칭하고 있다.
사실상 이 박해는 조정이 가톨릭교 신자들에 대한 공식적인 체포령을 발표하기 전인 1838년 말부터 서울에서 시작되어 이후 1840년 말까지 계속되었는데, 조신철·정하상·유진길 등 당시 조선교회를 이끌어가던 핵심적인 신자들이 희생되었다.
앵베르 주교님은 박해로 인한 피해가 신자들에게 더 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홀로 자수하고 다른 두 선교사에게도 자수를 권고하였다.
이에 따라 모방 신부님과 샤스탕 신부님도 자수하였는데, 이들 모두 군문효수의 형을 받고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김효임 골롬바와 김효주 아녜스 자매가 신앙을 위해 동정을 지키다가 체포되어 순교한 것도 이 박해 시기이다.
기해박해의 여파로 김대건 신부님의 아버지 김제준(이냐시오) 성인은 아들을 서양에 사제 수업을 받게 하기 위해 유학을 보낸 중죄인으로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1839년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참수 당하였으며, 당고모였던 김 데레사 성녀는 앵베르 주교의 처소를 돌보며 신앙을 전파하다 체포되어 1840년 초 서울포청에서 교사 당하였다.
3 병오박해 1846년
조선인 성직자 양성의 중요성을 절감한 모방 신부는 1836년 말 최양업·최방제·김대건을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마카오로 보냈다.
이들 중 충청도 솔뫼 출신의 김대건은 신학교 생활을 마치고 선교사의 조선 입국로를 개척하던 중 1845년 8월 17일 중국 상해에 위치한 진쟈샹(金家港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는데, 이로써 최초의 조선인 사제가 되었다.
이후 바닷길을 통해 페레올(Jean-Joseph Ferreol)주교님, 다블뤼(Davely)신부님과 함께 지금의 강경에 잠입하여 사목활동에 투신한 그는 1846년 선교사의 입국을 위한 항로를 탐색하던 중 백령도 부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혹독한 고문과 조정의 회유 속에서도 신앙을 굳건히 증거하다 같은 해 9월 16일 서울 한강변 새남터 모래사장에서 순교하였다.
1846년 병오년에 일어난 박해이기에 병오박해라 일컬으며, 한국의 첫 사제였던 김대건 신부님의 체포를 계기로 가톨릭교에 대한 박해가 다시금 일어나 현석문을 비롯한 신자들이 순교하게 되었다.
4.병인박해 1866년
‘기해박해’와 ‘병오박해’처럼 가톨릭교에 대한 박해가 계속되는 가운데 많은 신자들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게 신앙을 증거한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는 더 많은 가톨릭교 신자들을 탄생시키는 씨앗이 되었고, 이전보다 더 넓은 지역에 복음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선교사의 계속적인 조선 입국과 활동 재개로 가톨릭교 신앙 공동체는 눈에 띄는 발전을 이루었는데, 1857년에는 그 수가 15,000명을 넘어섰으며, 1865년에는 23,0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러나 1864년 초, 고종(高宗)이 즉위하고 그의 아버지 흥선 대원군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후, 가톨릭교 신앙공동체는 다시금 박해의 시련에 직면해야 했다.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와의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러시아 세력의 남하를 저지하고자 계획하였던 대원군이 태도를 바꾸어 가톨릭교에 대한 박해를 감행한 것이다.
병인년인 1866년에 시작된 이 병인박해는 1873년 말까지 계속되었다.
이 박해는 ‘병인양요’를 촉발하였고, 전국에서 8,000명 이상의 신자들이 희생되었는데, 박해가 일어날 당시 한국에서 있던 12명의 선교사들 중 베르뇌 주교님과 다블뤼 주교님을 포함하여 9명이 순교하였으며, 홍봉주·남종삼·황석두 등 수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들과 운명을 같이 하였다.
병인박해 당시 김대건 신부님의 사촌들과 친척들은 공주황새바위에서 순교하였다.
1866년에는 김제항이, 1869년에는 김진식과 김근식이, 1873년에는 김제교가 순교함으로 인해, 김대건 신부님 집안은 4대에 걸쳐 11분의 순교자를 배출하는 신앙의 명문이 되었다.
솔뫼에서 탄생하거나 관련된 천주교 순교자 및 성인
솔뫼에서 태어나시거나 사신 분들 중에 순교가 확실한 분들은 김진후(증조부), 한현(종조부), 제준(아버지), 데레사(한현의 딸), 손연욱(데레사의 남편), 제항(종조부 희현의 아들), 제교(종증조부 귀조의 손자), 김대건 신부님, 진식, 근식(숙부 제철의 아들들), 조씨(종조부 희현의 손자며느리) 등 11분이고, 그밖에도 순교하신 것으로 추정되는 분은 김택현(할아버지), 희현(막내 작은 할아버지), 선식(막내 작은 아버지 제철의 아들) 등 3분입니다. 이렇게 김 신부님의 가문은 시조 66世(중조 16世)부터 69世(중조 19世)까지 4대에 걸쳐 순교하셨습니다. 이 분들 중 현재까지 성인품에 오르신 분은 김제준(이냐시오)과 김 데레사, 그리고 김대건 신부님 등 세 분입니다.
성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1796-1839년)
성 김제준 이냐시오는 1814년에 순교한 김진후 비오(Pius)의 손자이며, 1846년에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부친이다. 그는 이미 여러 차례의 박해로 시련을 당한 서민의 집에서 태어나 충청도 면천 솔뫼라는 산골에서 살았다. 그 후 내포의 솔뫼로 거처를 옮겨 새살림을 시작하고, 아내 우르술라와의 사이에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1846년에 참수를 당한 최초의 조선인 신부 김대건 안드레아(Andreas)이다. 신심이 두터웠고 매사에 성실했던 그는 만사를 주님의 섭리에 맡긴다는 자세로 살았기 때문에, 아들이 전교 신부들에게 선택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에도, 온 가족이 당하게 될 무서운 형벌과 환난을 오로지 주님의 안배와 섭리에 맡기고 아들을 보냈다.
아들이 떠난 후 그는 관헌들의 추격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기해년 9월 중순 그의 사위의 인도를 받은 배교자 김여상이 포졸을 이끌고 그의 집으로 몰려왔다. 증인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기운이 장사여서 대여섯 사람쯤은 해 치울 수 있었으나 조금도 반항하지 않고 포승을 받았다고 한다. 포도청으로 붙잡혀간 이냐시오는 사학을 신봉한다는 죄와 자기 아들 안드레아를 국법을 거슬러 조선을 떠나 마카오에 가게 하였다는 죄, 즉 국사범이라는 중죄를 가해 혹독한 형벌을 당하였다. 그는 이러한 형벌을 견디지 못하여 결국 배교하였다.
그러자 옥에 있는 신자들이 그의 죄가 대단히 크다는 것과 배교한대도 석방될 수 없다고 이야기해 주며, “석방되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마십시오. 당신은 의심 없이 처형될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돌려 당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재판관 앞에 나가 배교하겠다고 한 말을 취소하고 순교자로 세상을 마치도록 하십시오.” 하고 거듭 권고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는 형조에 출두하여 배교한 것을 취소하니, 이어 세 차례나 혹형을 당하였지만 다시는 마음을 굽히지 아니하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아들 김대건 신부의 장한 모습도 보지 못한 채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하니 때는 1839년 9월 26일이요, 나이는 44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녀 김 데레사(1796-1840년)
성녀 김 테레사(Teresia, 또는 데레사)는 충청도 면천 고을에 살던 김대건 신부의 당고모이다. 그녀의 조부 김진후 비오(Pius)는 1814년에 해미에서 순교했고, 부친인 김종한 안드레아(Andreas, 또는 김한현 안드레아)는 1816년에 대구에서 순교했던 순교자의 후손이다. 그러므로 박해를 피하여 이리저리 피해 다녔기에 그녀가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어쨌든 그녀는 단아하고 자선심이 많은 처녀였다. 열일곱 살이 되어서 손연욱 요셉에게 출가하였는데, 단란한 생활 가운데서 여러 자녀를 낳아 모두 하느님을 경외하도록 교육을 시켰다.
그러던 중 1824년에 남편이 체포되어 해미 감옥에서 순교하자, 계속해서 정절을 지킴으로 모범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난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통으로 만족하지 않고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을 할 정도로 고행에 전심하였다. 당시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게 되자 신부의 처소를 보살필 사람을 구하였는데 김 테레사가 적임자로 뽑혀 정정혜 엘리사벳과 함께 이를 기쁘게 받아들여 열심히 일하였다.
유 신부가 조선을 떠난 후 김 테레사는 앵베르 주교의 처소를 보살피는 사람으로 일하던 중 박해가 일어났다. 그녀는 위험이 닥쳐왔을 때에도 피신하지 않고 있다가, 여러 신자들과 함께 7월 19일에 붙잡혀 오라로 결박을 당한 채 옥에 갇혔다. 김 테레사는 옥에서 고문과 갖가지 괴로움을 당하였지만, 배교하거나 신자들을 고발하거나 선교사들의 피난처를 말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태형 300대의 고통을 꿋꿋한 자세로 참아 받았다. 김 테레사는 여섯 달 동안이나 옥중에서 고초를 겪은 후, 마침내 교수형의 선고를 받았다. 형리들은 그녀의 목에 끈을 감고 양쪽에서 오랫동안 잡아 당겨 끈의 양쪽 끝을 말뚝에 단단히 감아놓았다. 이리하여 김 테레사는 44세를 일기로 순교의 영광을 차지하였으니, 때는 1840년 1월 9일이었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1821-1846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Andreas)는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솔뫼 마을에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대건의 아명은 재복(再福)이고 이름은 지식(芝植)이라고 하는데, 그의 집안은 열심한 구교 집안이다. 김대건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Pius)와 아버지는 순교로써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다. 신앙 깊은 순교자의 집안에서 성장한 김대건은 굳센 기질과 열심한 신덕으로 충실히 생활하던 중, 16세 때인 1836년에 모방 신부에 의해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가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 프란치스코는 병사하였으므로, 남은 두 신학생만이 훌륭히 학업과 성덕을 닦았으나 나이가 25세에 이르지 못하여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 무렵 파리 외방 선교회가 조선 교구를 담당하여 주교와 신부를 조선에 입국시켜 전교하고 있는 중이었으나, 조선이 외국과 수호조약을 맺지 않아 종교자유가 없었음으로 프랑스 루이 필립 왕이 파견한 함대의 세실 제독이 그 계획을 실행하겠다고 나섰다. 김대건은 세실 제독의 통역관이 되어 조선이 들어갈 메스트르 이 신부와 함께 에리곤 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세실 제독이 갑자기 조선 항해를 중지하게 되어 김대건은 혼자 육로로 본국에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변문에 이르러 조선 사절단의 일원인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본국 소식을 자세히 듣게 되었는데, 성직자를 비롯하여 아버지와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입국을 서둘러 그해 12월 29일 혼자 의주 변문을 거쳐 입국하였으나 중도에서 본색이 탄로날 위험이 생겨 다시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김대건은 백가점(白家店)과 소팔가자(小八家子)에 머물며 메스트르 신부로부터 신학을 배우고, 1844년 12월 15일 페레올 고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고, 다시 입국을 시도하여 고 주교와 함께 변문으로 왔으나 김 부제 혼자만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1845년 4월 주교와 신부를 맞이하기 위하여 상해에 갔다가 그 해 8월 17일 그곳의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페레올 고 주교 집전으로 사제품을 받아 조선교회의 첫 사제가 되었다. 이어 8월 24일 상해에서 30리 떨어진 횡당(橫堂) 신학교 성당에서 다블뤼 안 신부의 보좌를 받으며 첫 미사를 집전하였다.
같은 달 31일 고 주교와 다블뤼 안 신부를 모시고 라파엘호라 명명한 작은 목선을 타고 상해를 출발하여 1845년 10월 12일에 충청도 나바위라는 조그마한 교우촌에 상륙하였다. 김 신부는 선교활동에 힘쓰는 한편 만주에서 기다리는 메스트르 이 신부를 입국시키려고 애썼으나, 의주 방면의 경비가 엄해서 고 주교는 바닷길을 알아보라고 지시함으로, 백령도 부근으로 갔다가 순위도에서 1846년 6월 5일 밤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김 신부가 황해 감사 김정집의 심문에서 자신은 조선에서 출생하여 마카오에서 공부했음을 토로하자 황해도 감사는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이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하여 중신회의를 열고 서울 포청으로 압송케 하였다. 일부 대신들은 김 신부의 박학한 지식과 외국어 실력에 탄복하여 배교시켜 나라의 일꾼으로 쓰자고 하는 의견도 있고 해서 배교를 강요했으나, 김 신부는 도리어 관리들을 교화시키려고 하자 사학의 괴수라는 죄목을 붙여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 신부는 사제생활 1년 1개월만인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때 김 신부의 나이는 26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이상 가톨릭 성인사전]
복자 김진후 비오(1739~1814년)
충청도의 내포 평야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면천의 솔뫼(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태어난 김진후(金震厚) 비오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증조부요, 1816년에 순교한 김종한 안드레아의 부친이다. 족보에는 그의 이름이 ‘운조’(運祚)로 기록되어 있다.
김 비오가 천주교 신앙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맏아들이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에게서 교리를 전해 듣고는 이를 형제들에게 전하면서였다. 당시 김 비오의 나이는 50세가량이었다.
그러나 김 비오는 처음부터 천주교 교리에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그는 세상의 권세와 쾌락에 대한 관심 때문에 은총의 부르시는 소리를 들을 여유가 없었다. 특히 그는 감사 밑에서 작은 관직 하나를 얻게 되자, 자식들의 권유를 강하게 물리쳤다.
이후에도 김 비오의 자식들은 부친을 개종시키려고 꾸준히 노력하였다. 그러면서 그의 영혼은 점차 예수 그리스도께 기울어지게 되었고, 마침내 관직을 버리고 비신자 친구들과의 관계도 끊어 버리게 되었다. 그는 열심히 신자의 본분을 지켜 나감으로써 어른으로서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김 비오는 1791년의 신해박해 때에 처음으로 체포되어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그는 이후에도 네다섯 차례나 체포되었다가 풀려나곤 하였다. 또 1801년의 신유박해 때에는 다시 체포되어 배교를 뜻하는 말을 하고는 유배형을 받았지만, 얼마 뒤에 귀양에서 풀려났다.
집으로 돌아온 김 비오는 1805년에 다시 체포되어 해미로 압송되었다. 그가 천주교 신자답게 행동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관장 앞에서도 서슴없이 신앙을 고백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의 박해가 공식적인 것이 아니었으므로, 김 비오는 사형 판결을 받지 않은 채 오랫동안 옥에 갇혀 지내야만 하였다. 그 동안 그는 점잖고 품위 있는 성격으로 해미의 관리와 옥리들에게 존경과 대우를 받게 되었고, 드러내 놓고 신자의 본분을 지킬 수도 있었다.
이렇게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김 비오는 모범적인 인내심으로 옥중 생활의 고통을 참아 냈으나, 이미 생명의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결국 그는 1814년 12월 1일(음력 10월 20일)에 옥중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75세였다. 아무리 신앙으로 인내심이 강하다고 할지라도 고통스러운 옥살이를 견디기 어려운 나이였다.
김진후 비오가 병으로 죽었는지, 굶주림이나 또 다른 고통으로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생전에 받은 박해와 옥중에서 보여준 신앙생활 때문에 온 교회가 그를 기리게 되었다는 사실만이 전해올 뿐이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김진후 비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순교자 손연욱(孫~) 요셉(?~1824)
성녀 심 데레사의 남편. 충청도 홍주(洪州)에서 태어났다. 1817년 10월(음) 덕산(德山)의 배나다리(현 지명은 禮山郡 揷橋邑 龍洞里 三區)에서 마을교우 30여명과 함께 체포되어 해미진영(海美鎭營)으로 압송되었고 해미진영에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으나 끝까지 신앙을 고수하였다. 그 후 6,7년간 해미진영의 옥(獄)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관장의 허락을 얻어 옥 근처인 개인집에서 동생과 함께 살던 중 1824년 어느 날 새벽, 철야기도와 삼종기도를 바친 후 선종하였다. 그가 체포되고 10년간의 옥살이 끝에 1927년 옥사했고, 아내 김 데레사는 1840년 1월 9일에 순교, 1984년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출처 : 한국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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