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감동적이거나 생각에 충격을 주는 영화를 보고 돌아오면 조용한 시간에 그 영화에서 남은 단어찾기를 해본다. 영화, 무극을 보고 돌아와서 약속과 열망이란 단어를 찾아보고 그 결과를 정리하느라고 한동안 그 영화 속을 헤맨다. 무극은 나에게 집요하게 말을 걸어왔다.
마음잡고 영화를 같이 볼 사람을 찾다보면 시간과 날 잡기에 진을 뺀다. 영화보고 싶은 마음이 약해져 그냥 주저앉고 싶어질 때가 많다. 그래서 나는 부지런히 움직이다가 내 일상 중에서 2시간 반만 여유가 보이면 하던 일손을 놓고 영화관으로 튄다. 그것이 영화를 보기 위한 나와의 약속이다. 한번 약속을 해두면 두 번째부터는 애쓰지 않아도 자연발생적으로 몸이 움직인다.
첫 경험은 그래서 참으로 중요하며 자극적인 경험은 강한 구호를 낳는다. 그 구호가 강렬하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워지면 자연스럽게 다른 영역에도 새로운 약속을 가진다. 아마도 그것이 성격이라고 말한다면 무리일까..
딸이 퇴근하여 저녁을 주고나니 9시다. 딸이 수저를 놓기가 무섭게 시계를 본다.
"엄마, 우리 영화볼까?"
"가자!"
1분내로 준비가 끝났다.
코엑스몰의 볼만한 영화는 매진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본다.
"좌석이 따로 따로라도 좋으니 두 장만 챙겨주세요."
헤어진 연인인 줄 알고 좌석을 될 수 있으면 멀리 줄까 묻는다. 모두가 제 경험치로 말한다. 그 시간에는 짝꿍들이 보는 시간이므로 우리같이 영화보는 것이 목적인 사람들에게는 기다리는 좌석이 있다. 입장은 해결이다.
선입견이 전혀 없이 무극에 몰입한다. 애써 스토리를 따라갈 영화가 아닌 것이다.
마음의 세계는 논리에 맞는 세계가 아니라 스토리를 따라가려면 무리가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전쟁이라 함은 이 세상에 일어나는 실제적 전쟁이 아니라 살아가는 관계를 전쟁코드로 읽었다는 이야기다.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4남자가 끼어 있는데 3명이 죽어가고 마지막 한 남자가 사랑을 차지한다. 거기까지 누가 시켜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저들의 행동의 뿌리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나는 찾아가며 보았다.
이들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운명이라고 믿는 것은 자기가 만든 내적 구호이다.
그러나 그 구호를 잊은 것을 운명이라고 명명해버린다.
자기도 모르게 자기 구호에 맞게 살다가 그 구호가 맞아떨어지는 사람을 마치 운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받아들인다. 모든이의 강하고 자극적인 기억은 일생동안 지켜내야 할 약속처럼 운명적인 구호를 갖게 한다.
아주 자연스럽게 운명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것은 내면의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각자는 자작하지 못한다.
행위의 뿌리에 대한 자각이 들면 운명이 바뀐다.
그 자각이 주목적인가 수단인가에 따라 결합의 묘가 생긴다.
헌신하는 사람과 의존적인 사람이 갈등없이 자연스럽게 결합하듯 그렇게 만나면서 운명이라고 이름붙인다.
이 영화는 과거지향이 아니라, 회귀과정에서 통합을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을 전쟁으로 엮어 잘 보여준다. 나는 영화촬영의 기술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 없다. 다만 문학적, 심리적, 미술적 영화보기에 촛점을 맞춘다.
<칭청>
칭청이라는 여자를 중심으로 3남자가 격투를 벌이는데 그들의 마지막 사랑은 어떻게 결합하는가를 살펴보면 재미있다.
1.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여자아이 칭청이 시체에서 빵을 빼앗아 든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아이는 너는 살게 될 것이다란 구호를 갖게 되고 훗날 왕비가 된다
2. 신발을 신으려고 하는 순간, 왕관을 쓴 한 남자 아이가 나타나 빵을 빼앗고 여자아이
에게 노예가 되어주면 빵을 준다고 약속을 한다.
그 여자 아이는 빵을 빼앗길 수는 없기에 생존 전략으로 거짓을 택한다. 그와 동시에 죄
의식이 피어난다. 자신이 속여서 빵을 쟁취한 것과 그가 떠났다는 감정을 동시에 체험
의 세계로 간직하게 된다.
-"나는 약속을 어겼으니까 나는 사랑하는 남자를 잃게 될거야가 지배하게 된다.
빵을 뺏고 도망갈 때는 그 일에 몰두하느라고 생각할 여유가 없지만, 빵을 잃고 생각
에 잠겨있을 때 그 빵을 준 첸홍이라는 운명의 신은 자기가 인식하면서 이미 만들어진 인
생의 구호이기에 내면화 한 내면의 목소리다.
*칭쳉은 살기 위해 빵을 챙기지만, 노예로 사랑을 취하지는 않는다.
굽히고는 살 수 없다는 선택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다급할 때에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내면의 소리를 듣고 느낄 여유가 없다. 아무 생각없이 허겁지겁 달린다. 그러다가 한시름 놓고 나면 그제서부터 속시끄럽기 시작한다. 살 만하면 남자가 바람을 피우거나 여자가 우울증에 시달리는 경우를 맞는다.
칭쳉은 사랑을 느껴서라기보다는 살게 해준다는 말에 사랑을 시작한다.내적 주술에 걸린 셈이다. 그러나, 그 말의 상대는 대장군이 아니라, 대장군의 노예였기에 그 사랑은 혼돈을 부른다. 혼선을 겪으며 결국 말의 주인공과 만나지만 그 말의 주인공은 새주인이 생겼다는 것을 알라나. 그들의 사랑이 완성되기 위해 '진실한 고백'이 필요했다.
그녀는 살게 해준다는 말을 따른 것이지 사랑을 따른 것은 아니고, 오히려 섬기고 구해서 사랑을 쟁취한 것은 쿤룬이었다.
사랑이라기보다 살게해 준다는 우선 과제와 항상 누군가를 섬기던 노예근성이 붙은 사람과의 만남은 운명이라 하겠지만 실은 각자가 태어나서 만든 구호의 실현인 셈이다.
<쿤룬>
그 사랑을 이룬 쿤륜의 구호가 열망으로 바뀐 시점은 늘 굽혀야 하는데서 출발한다. 굽히고 살기가 정말 싫다, 나는 '바람처럼 달리고 싶다'이지만 그가 택한 생존 전략은 굽힘과 섬김이었다.
대장군이 무엇때문에 너는 전쟁터에서조차 주인을 업고 달리느냐고 물었을 때 아무 생각없이 “주인이니까”라도 답한다. 그리고 배불리 먹기만 하면 된다고 답한다.
우리는 무엇때문에 내게 이런 라이프 스타일이 정해졌는지 자신에게 한번 따져묻지도 않고 정해진 방식대로 살아간다. 살기 위해 붙은 노예근성도 왜 그렇게 살아가는지 자각하지 못하면 그 방식대로 살아가며 늘 열망을 저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에게는 서서 달리기를 소망하던 터라 그 열망이 힘이 되어 드디어 주인을 업고 도망을 가면서 바람처럼 달린다.
결국 노예는 굽히고 걸어야 한다는 명령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필생의 경우를 만난 것이다. 거기서 그는 1차 운명을 바꾼다. 들소떼에 몰려 피해야 하는데 죽기 살기로 주인을 업고 달리는 노예가 예사롭지 않아 대장군이 따라가서 보고 자신의 노예가 되겠느냐고 묻는다. 밥그릇을 해결하면서 수락한다. 그리고 “바람처럼 달려도 된다”는 허락을 받는다.
대장군의 갑옷을 입고 달려 왕을 구하러 갔다가 왕을 살해하고 왕비를 구해 오다가 벼랑으로 내몰면서 목숨을 부지하다가 어린 날 칭쳉에게 배신당한 북공작 무환과 마주친다.거기서 살게해준다는 약속의 말을 남기고 쿤룬은 왕비를 북공작에게 넘긴다.
벼랑으로 떨어져 간신히 살아나 생존하기 위해 붙은 노예근성의 법칙대로 주인을 찾아가서 이를 알린다. 그의 생존전략은 복종과 '섬김'이다. 다시 왕비를 구해오라는 대장군의 명령을 받아 왕비를 구해다 대장군의 품에 안긴다. 쿤룬에게 배신은 없다. 그 결과 섬김으로 스스로 섬김을 받는 자리에까지 오르면서 비로소 사랑을 고백할 기회를 얻는다.
어린 날, 설국에서 살던 시절, 부모와 여동생이 당했던 참극을 되돌리려 한다. 마음의 세계에는 시공이 문제되지 않는다. 이미 일어난 일이라지만, 그것을 드러내 새롭게 만나면서 인식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내면에서 구호가 리모큰 역할을 하며 끝없이 노예근성을 피워 낼 것이다. 자각하고 깊이 숨어있던 감정을 현실화하면 기억으로부터 장애를 받지 않아도 된다.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쿤룬은 출신성명에 대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충격적인 사건 앞에서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 행동을 우리는 경험한다.
남편은 차량접촉사고가 났을 때, 우리집 전화번호가 생각나지 않아 수첩을 뒤져 동생네에 전화를 걸었다.
한 5학년 아동은 부산에서 부모와 엇갈리면서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아 20년간 죽도록 고생하고 간신히 기억을 뒤져 집으로 돌아오는 사례도 있다.
어느 사업가는 파산의 충격으로 기억이 지워져 자기 정보를 다 잊어버려 식구들을 찾을 수 없다고 슬퍼했다. 그러나 서서히 안정을 찾고 긴장을 늦추면 기억이 회복된다는 선 지식을 가지면 영화를 읽어내는데 도움이 많이 될 것이다.
강한 쇼크 뒤에는 그 기억을 낯선 곳으로 옮겨놓는다.
그는 단순하다. 마치 성서의 가르침대로 자신은 접고 주인을 섬기는 데만 주력한다. 그는 시공을 초월하여 기억 속의 장면과 대면하면서 자각 증세를 가지게 되고 진실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며 그로하여 사랑을 얻게 된다. 다분히 성서적 원리를 깔고있다.
<북공작 무환>
그는 어리면서도 여자의 빵을 빼앗고 빵을 빌미로 노예를 삼겠다는 야망을 가진다. 그러나, 여자의 거짓된 약속으로 배신을 당하고 그는 믿지 않는 습관이 들어버렸다. 그가 성인이 되어 한 나라를 넘보고 포위를 했을 때, 황제가 묻는다.
한 여자 때문에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나 북공작은 좋아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기억을 가지게 되고 '기어히 차지할거야 '라는 구호를 완성시키고 싶어한다.
세월이 흐르고 그들은 성인이 되었다. 칭쳉은 왕비가 되고 무환은 북공작이 되어 왕비와 황제를 처들어 가 궁을 포위하고 황제는 왕비를 인질로 내세우고 죽기를 권한다. 그리고 북공작에게 비아냥거린다.
여자를 가지고 싶은 열망으로 전쟁을 일으키냐고 묻는다.
이때 북공작이 보낸 자객의 칼에 성처를 입은 대장군이 갑옷을 노예인 쿤륜에게 입혀 황제를 구하라고 명령하자, 궁에 이르러서는 왕을 살해한다. 그로서 칭쳉은 운명처럼 남자를 잃은 여자가 되나 목숨만 구한다.
쿤룬은 그 왕비를 데리고 도망을 가다가 벼랑끝에 몰리자 거기서 북공작에게 왕비를 넘겨준다. 쿤룬의 중요한 사안은 왕비를 살려주는 것이지 소유가 아니었다.
두 사람 다 쿤룬을 대장군으로 착각하며 인간의 역사는 허위가 된다. 북공작은 그렇게 일차적으로 왕비를 취해 궁으로 데리고 간다. 가슴을 열어 선택한 사랑이 아니면 그 사랑은 길을 내지 못한다.
북공작은 대장군이 보낸 쿤룬에 의해 왕비를 빼앗기고 대장군은 한적한 교외에서 자연인으로 왕비와 살아간다. 왕비는 가면속의 인물을 잘못 알고 살기에 늘 어긋나게 된다.
북공작은 쿤룬의 혁혁한 공로로 왕비를 대장군에게 빼앗기고 만다. 사랑은 강제로 가두어서 이룰 수가 없다. 그는 빵을 주며 지배하고 군림하고 싶은 1차 열망은 이루었으나 끝내 여자는 차지하지 못했다.
<대장군>
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장군 쿠왕민이 자객의 공격을 받아 상처를 입자 쿤룬에게 갑옷을 벗어주는 순간 자신은 대장군으로의 자격을 잃었다고 운명을 정해버린다. 대장군이 될 수 없다고 자기 명령어를 가지는 셈이다.
그에게 갑옷은 장군의 상징이었고 그 갑옷을 벗음으로서 자신은 대장군을 포기한 사람으로 자청한다. 왕비를 사랑하게 되지만 잘못 알고 있는 자기를 되돌려 놓지 못해 애탄다. 쿤룬은 얼마든지 자신의 사랑의 진실을 밝히고 가로챌 기회를 얻지만 노예에게 섬길 주인은 한 사람이다. 쿤룬은 그녀를 살아나게만 한다.
노예는 주인의 청을 들어주어야 한다.
대장군 쿠왕민은 칭쳉을 데려오기를 원하고 쿤륜은 가면속의 인물이 자신이라는 것을 밝히지 못한다. 쿠왕민은 거짓으로 사랑을 쟁취하기도 했지만 대장군의 1차적 구호는 '장군은 충성심을 가지는 것'이었다. 부름을 받고 사랑을 택하지 않고 나라의 뜻을 받아들인다. 칭쳉의 두번째 상실이다. 거짓으로 취한 사랑은 열매가 쓰다. 죽기 전에 진실의 소통을 호소하고 간다.
가면 속의 인물이 대장군이 아니라는 것을 밝힘으로써 잠시라도 진정으로 사랑한 당사자라는 것을 칭쳉이 알아채린다.
이 영화가 가지치기를 얼마만큼 할지 의문이나 누구든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운명이라는 말에 주술이 걸리지 않도록 새롭게 의식하고 무의식의 노예가 되어 반복적으로 행동하징낳기를 소망해본다. 저마다 통합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 영화를 보고 >
나는 맏이로 터팔며 심하게 마음을 앓았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래서 어머니에 대한 양가감정을 가지고 늘 고통스러워했다. 착한 컴플랙스에 걸려 말 잘 듣고 눈치빠른 내가 어머니의 등만 보면 내내 때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 늘 괴로웠다.
어디로부터 오는 감정인지 몰라 나는 ‘엄마찾아 삼만리’를 한 셈이다.
어린 날 동생에게 젓물리고 있는 어머니의 등을 내가 보아넘기기가 견디기 어려웠던가보다. 그림과 소리를 매체로 내면여행을 하는 도중 숨어있던 감정이 표출되면서 무의식 속에서 어머니의 등을 그리고 그 무릎에는 아이가 안겨있는 그림을 그려냈다. 나는 그림에 그린 엄마의 등에 대고 볼펜으로 한없이 공격을 하였다.
내 생애의 첫 구호는 늘 나를 조종했던 것이다.
“잃어버린 어머니의 무릎을 나는 다시 차지하리라”란 내적 구호를 가졌었다는 것을 알아내고 웃는다.
그 결과 내 남편은 절대 아무에게도 한눈 팔지 않을 것같은 믿음을 주는 사람을 택했다. 결혼으로 1차 보상을 했다. 그 부분은 철저히 내 몫으로 해야 한다는 무서운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동생에게 빼앗긴 엄마의 사랑을 남편에게서 취한 것이다.
내 짝 남편은 6세에 어머니를 잃었으니 내 남편이 생존전략은 말 잘 듣고 공부 잘 하고 굽히면서 구호는 만들어졌을 것이다. 보호벽이 튼튼하지 못해서 질서와 정한 법칙을 지키지 않으면 아니 되었을 것이며 만용이나 지배구조를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남편의 구호는 “나는 높아져서 세상을 지배할거야”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자기 구호에 따라 한없이 공부하고 직급이 오르기를 소망하고 지배하고 그래야지 하다가 입지전적 인물로 평가되었을 것이다. 그 한 사람은 결핍이 열망을 일구어 피워낸 사람꽃이다.
헌신하는 자가 있다면 사랑을 따내기 위한 전략이었을 것이다. 왜 헌신을 택햇는지는 자신이 모를 수도 있다.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새롭게 자각을 하고 숭고한 정신으로 선택한 삶의 방식이라면 그것은 성숙된 사랑일 것이다.
어머니를 대면하고 자기와의 화해를 이루고 진실을 고백하며 노예근성을 뽑아버리는 쿤륜이라는 주인공을 통해 나는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나에게도 힘껏 박수를 쳐준다.
이 세상에 왕비를 미끼로 살아남으려는 황제같은 인간, 대장군처럼 나라에 충성하느라고 다익은 사랑을 저버리는 일을 밥먹듯 하질 않나, 무환처럼 불신의 왕자로 자기만 믿는 사람도 있다.
열망하면 징검다리 인연을 거쳐 뜻은 이루어진다.
나에게나 누구에게나 징검다리 인연도 가치로운 인연이다. 그 사람을 거치지 않으면 안될 인과성에 놓이기 때문이다.
첫댓글 함께님 무극 보고 올께요. 영화 함께 봅시다
글에서 보시다 싶이 느닷없이 2시간반이 생기면 보는 영화 감상객인데 , 집에서 걷기하느라고 코엑스몰에 갔다가 극장으로 들어가는 수가 생기는데 감당이 되라나 모르겠습니다. 날잡아 본다해도 4월부터나 가능해질 것같습니다. 한번 해봅시다.
함께님! 지는요 범어사 코앞에 삽니더. 저가 가는 영화관은 해운대 스펀지와 o2 시네마이지요. 아무래도 멀어서 만나서 보는 것은 힘들겠지요? 지가 서울갈까요? 부산 오실랍니꺼? 혹 오셔서 두시간 반 시간나시면 전화주이소. 영화보러 가자하면 자다가도 나갑니다. 영화보시고 글 올려주시면 저도 챙겨보지요.
님의 글에 영화에 함께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