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는 구화산으로 가려고 출발을 하더니 그저께 우리가 식사를 하였던 식당 앞에 차를 세우고 운전사의 부인을 태웠다. 운전사의 부인이 공인 가이드인데 구화산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음으로 같이 간다는 설명이었다.
구화산으로 가는 도로변의 농촌 풍경으로 달리는 차 안에서 촬영을 하여 사진 질이 좋지 않음
차는 좁은 공로를 따라서 달리는데, 주위에 보이는 농촌 풍경이 꼭 우리의 예전 시골 모습을 보는 듯 하였다. 벼가 심어진 논의 논두렁에는 예전에 우리가 그랬듯이 콩이 심어져 있었다. 중국에서 이런 논농사는 처음 보는 셈이다. 중국의 한 두메 산골에서 논두렁에 콩을 심어 놓은 광경은 마치 예전의 한국의 농촌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했다.
운전사 가족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이 곳의 풍경이 마치 한국과도 같다고 이야길 해 주었더니 신기해 했다. 운전사의 부인 말에 의하면 구화산에는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 온다고 했다.
이윽고 구화산이 있는 청양현에 들어섰고 운전사 부인이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자기들은 이곳 구역이 아님으로 구화산으로 이 차로 들어가면 도로 통행료와 입장료를 물어야 함으로 구화산 지역의 차를 별도로 불렀다고 하고 자기들이 미리 돈을 다 지불을 했음으로 별도로 그들에게 돈을 주지 말라고 일러주었다.
약속 장소에서 구화산에서 나온 차로 바꾸어 타고 (황산에서 온 차는 우리를 기다리기로 하고) 구화산으로 달렸다. 이 차에도 운전사가 있고 여자 가이드가 별도로 있었다. 가이드의 이야기로는 구화산의 김교각 스님이 등신불이 된 육신보전에는 소원을 잘 들어준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어쩐지 그녀의 이런 이야기가 경계심을 갖고 있어서인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곧이 들리지 않았다.
차는 고개를 하나 넘고 내리막길에 들어서자 가이드가 김교각 스님이 처음으로 이 곳에 와서 공부를 한 곳을 복원을 하고 있는데 기부를 하라고 하면서 차를 새로 짖고 있는 건물을 앞에 세웠고 승려가 한 사람 나오는 것이 보였다.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오늘 안으로 황산역으로 돌아가서 상해 행 기차를 타야 함으로 빨리 육신보전이 있는 곳으로 가자고 재촉을 하여 차는 다시 육신보전이 있다는 곳으로 달렸다. 이 건물 앞에서 차를 멈추고 기부를 하라고 하는 것은 김교각 스님의 육신보전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을 통과하는 하나의 코스 같아 보였다.
김교각스님이 등신불로 모셔져 있는 육신보전을 현판에 호국육신보탑이라고 쓰여져 있다
차는 김교각 스님이 처음으로 구도를 하였다는 곳에 도착을 하였고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건물이 하나 나오는데 마당에는 향을 피우는 연기가 자욱하였다. 가이드가 향과 초를 사서 불을 붙이고 법당 안으로 들어 가라고 하여 초와 향 값을 물어보니 향 값이 200위안이고 초 값이 100위안이었다. 일반 물가에 비해서는 엄청 비싼 가격이었다.
향과 초는 승려가 별도로 팔고 있었는데, 여러가지의 불교 용품도 같이 팔고 있었다. 한국의 사찰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에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가이드가 향을 사서 전각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여 향을 사서 불을 붙이고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법당 안에는 김교각 스님의 지장보살상이 모셔져 있었다. 인자한 미소를 띄고 있는 지장보살상이었다.
김교각스님의 등신불이 모셔진 육신보전의 불상
법당을 둘러보고 나와서 다시 차를 타고 김교각스님의 등신불이 모셔져 있다는 육신보전이라는 곳으로 갔다. 이 곳으로 들어가기 전에 향과 초를 파는 상점이 있는데, 가이드가 향과 초를 사라고 다시 재촉을 하였다. 보나마나 엄청난 가격일 것이 뻔하여 향과 초를 사지 않고 그냥 육신보전으로 들어 갔다.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이 중시하는 것이 아니고 향과 초를 사서 불전에 올린다고 복을 받는 기복불교의 현장을 보는 듯 했다. 중국에서는 종교도 이미 상업의 한 영역으로 변한 듯한 느낌을 주었다.
육신보전으로 들어가는 길에 육신보전이 있는 사찰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여관이 들어서 있는 광경은 보는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사찰과 담을 사이에 두고 영업행위를 하는 여관이 들어서 있는 광경은 어딘지 부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물론 한국인의 관점에서 보아서 그러겠지만, 이런 모습은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다가 왔다. 과연 이들이 지장보살을 공경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상행위를 위한 것인지가 분간이 안 되는 것 같았다.
중국에서는 공산주의체제가 들어서면서 모든 종교가 유린이 되다가 이제 와서 불교유산 자체를 중국인들 특유의 상술과 결합하여 상업화가 되어 있는 현실을 보고 황산에서 아름다운 비경에 취해서 환희에 찬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듯 했다. 공자의 고향인 곡부에서도 이런 모습을 보고 많은 실망을 하였었는데, 이 곳에서도 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입장료도 1인당 140원으로 무척이나 비싼 편이었다.
여러 계단을 거쳐서 육신보전이라는 곳에 들어서니 역시 향을 태우는 연기가 마당에 가득했다. 등신불을 모신 법당 전각에는 호국육신보탑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김교각 스님이 중국에 들어와서 중국인들의 호국등신불이 되었단 말인지? 중국에서는 향이 유난히도 커서 연기도 많이 나는 편이다. 등신불을 모신 법당 안으로 들어가니 승려 한 분이 기부금을 받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었다. 등신불은 원형대로 남이 있지 않고 탑 속에 보존을 하였다고 한다. 나는 등신불이 보존되어 있다는 말을 어렴풋이 듣고 과연 그 등신불은 어떠한지 그리고 신라의 왕자님이셨던 분이 중국에서 지장보살로 추앙을 받는다는 것을 듣고 먼 길을 달려 왔는데, 등신불을 보지 못하고 탑만 보고 돌아가자니 왠지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해왔다.
김교각스님의 등신불이 모셔진 육신보전의 불상
김교각 스님은 24세에 출가하여 중국 구화산에서 99세까지 불도에 정진하다가 열반에 들었고, 그가 열반에 들 때 “산이 울리고 돌이 굴러 내렸으며 대지에 신광(神光)이 번쩍이고 뭇 새들이 구슬피 울었으며 법당의 서까래가 무너져 내렸고 큰돌이 소리없이 떨어졌으며, 화성사(化城寺)의 종은 아무리 쳐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고 하고 또 석함(石函)속에 육신을 넣고 뚜껑을 닫은 지 3년 후에 개옹(開甕)해보니 용모가 생전과 다름없었고, 근골(筋骨)을 건드리니 쇠사슬(金鎖)소리가 나서 불경에 있는 지장보살에 관한 내용과 같은 현상이므로, 사람들이 지장보살의 현신(現身)으로 여겨 육신보전탑을 세우고 그 안에 등신불(等身佛)로 모시게 되었으며, 그 후 화성사가 더욱 번창하게 되었다는 화성사에 전해져 내려오는 기록과 전설의 주인공이라고 한다.
경내를 돌아보고 육신보전을 나오는데 몇 명의 한국인들이 육신보전으로 들어 오고 있었다. 이 먼 곳까지 한국인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왔던 길을 되돌아 청양현으로 오면서 가이드에게 승려들이 수행을 하는 곳은 안 보이는데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니까 육신보전 바로 밑의 건물에서 승려들이 수행을 한다고 하고 구화산에서 김교각스님 이후로 19분의 등신불이 더 나왔다고 했다. 아주 가까운 시기에도 등신불이 되신 스님이 있다는 설명이었다. 도저히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되는 등신불? 과연 어떻게 그렇게 될까 하는 의문이 청양현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청양현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이드에게 이 사찰에서도 법회 같은 것을 하는지 물어보니 한 사람이 법회를 할 때에는 하루 정도 걸리고 여러 사람이 함께 할 때에는 1주일 정도 기간이 소요된다는 대답이었다.실제 현실과는 동떨어진 대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이드에게 한국불교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고 김교각 스님이 이곳으로 와서 등신불이 되어서 지장보살로 추앙을 받고 중국불교의 4대 성지가 되고 구화산 일대가 명승지가 되어서 발전을 하였는데, 스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가이드는 김교각 스님이 한국인으로서 신라의 왕자였는데 이 곳에 와서 불도를 딲아 등신불이 되어서 중국 불교의 4대 성지가 된 인연을 생각한다고 대답을 하였고 가이드를 하기 위해서 공부를 별도로 하였는지 김교각 스님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가이드의 이야기로는 명나라 시기에 한 스님이 구화산에 와서 등신불이 된 김교각스님의 육신에 바늘을 찔러 보았는데 생전과 같이 피가 흘러서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갔다고 하고 그 이후로 등신불을 탑을 만들어서 탑 속에 보관을 하였다고 했다.
청양현에 도착하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택시를 타고 다시 황산으로 돌아가는데, 운전사와 운전사부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서 이유를 물은즉 우리를 황산 입구에 내리게 하고 다른 택시로 황산역으로 보내는 계획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화장실 올 때 마음하고 나갈 때 마음이 틀린다고 하더니 택시 운전사는 우리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우리를 다른 차에 바꾸어 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눌치에게 저 사람들의 표정이 왜 저렇게 안 좋느냐고 하니까 눌치가 운전사와 마누라가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우리를 다른 차에 태워서 황산역으로 보내려고 하니까 그대로 얼굴에 나타나게 된다고 하여 웃었다.
급기야 눌치가 엄청 화가 나서 택시운전사에게 당신이 하고 싶은 데로 한번 해 보라고 하고 만약에 우리를 황산입구에서 다른 차로 바꾸어 타고 가게 하면 그냥 있지 않겠다고 일침을 놓았더니 운전사 마누라가 황산 입구도 황산이니 계약과 다를 바 없다고 생떼를 쓰는데 참으로 어처구니가가 없었다.
이들이 구화산으로 올 때에는 여유 있게 웃어가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였는데, 돌아가는 길에서 이들은 적반하장으로 우리를 다른 차에 태워 보낼 궁리를 하면서 이 것을 눈치채고 추궁을 하니까 얼굴 표정은 완전히 180도로 바뀌어 있었고 나중에는 집에 처가에서 손님이 와있어서 황산역까지 갈수 없다는 변명을 늘어 놓는 것이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계약을 하고 택시를 대절을 하였으면 계약한 곳 까지 태워다 주면 되는데 잔꾀를 부려서 황산역에서 들어 온 다른 택시에 우리를 태워 보낼 궁리를 하다가 맘대로 안되니 표독하게 얼굴을 확 바꾸고 온갖 생떼를 쓰는 것이었다.
눌치는 이들에게 나는 하얼빈에서 왔는데 계약과 다른 행위를 할 적에는 충분한 대가를 톡톡히 치를 것이니 알아서 하라고 일침을 가하고 나를 안심을 시켰다. 별수가 없었던지 운전사는 마누라를 자기 집 앞에 내려주고 황산역까지 갔다. 돈이 적으니 어쩌니 온갖 넋두리를 하다가 눌치의 단호한 태도에 눌려서 황산역으로 달렸다. 우리가 황산역에 도착을 하면 운전사에게 팁으로 돈을 더 주려고 하였는데, 이 운전사의 행동에 화가 나서 눌치와 나는 주려고 하였던 팁을 주지 않기로 하였다.
황산역에 내려서 때 늦은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서 인력거를 타고 식당을 찾아가는데 인력거 운전사가 자기가 잘 아는 식당에 값이 싸니 가자고 하면서 그 식당으로 우리를 데려 가려고 하였다. 우리는 도로변에 보이는 식당에 내려달라고 하고 그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다시 황산역으로 인력거를 타고 갔다. 인력거는 중간에 한번 섰다고 돈을 더 내라고 하였다.
황산역에 도착하여 상해행 기차표를 알아보니 상등칸은 없고 여럿이 타는 침대칸 표가 딱 두 개가 남아 있었는데 이 두 개의 표를 사고 열차에 올랐다. 3일간 황산과 구화산을 돌아보고 지친 심신을 이끌고 내일 아침에 상해에 도착하는 열차에 오르니 피로가 몰려왔다. 눌치가 상등칸이 남아 있는지 차장에게 갔다 오더니 마침 자리가 있다고 하여 상등칸으로 웃돈을 더 주고 옮겼다.
이로써 중국에 올 때 마다 벼루다가 우연히 청도에서 일을 마치고 귀국을 하려던 차에 한국에서의 부탁을 받고 소주에서 1달 넘는 기간 동안의 일을 마치고 황산 여행을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무사히 마치게 되었다.
열차 안에서 술을 사서 마시고 취한 상태로 잠자리에 들었다. 지친 몸을 뉘인 열차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의 정적을 뚫고 여명을 맞게 되는 상해로 달리고 또 달렸다.
상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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