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도에서 '오가고 호'를 타고 2시간여 만에 나로도에 도착했습니다.
배에 꽉 찼던 승객 중에서 나로도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내리더군요.
아니나다를까, 나로도 선착장 앞에 관광버스들이 몇 대 대기하고 있습니다.
나로도. 네, 바로 그 나로도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센터가 있는 섬,
얼마 전 마침내 나로호를 쏘아올려 주목받은 섬.
이 섬에는 관광안내문에도, 지도에도, 현수막에도, 식당에 붙은 포스터에도
우주, 항공에 대한 꿈으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하나의 땅, 하나의 섬이 세상에 이름을 알리는 방식, 혹은 알려지는 방식...
한편으로, 그런 방식은 이 땅의 다양성을 못 보게 하는 면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나로도와 고흥은 남도 여행에서 발길이 쉽게 가는 곳은 아닙니다.
목포에서 여수로 이어지는 2번 국도변에서 유독
고흥 반도는 남쪽으로 멀리 달아난 곳에 있는 까닭입니다.
팔영산 같은 훌륭한 산을 품고 있는 데도 말입니다.
그 고흥에 오랜만에 발길을 디딘 것입니다.
나로도의 시골 터미널에서 1시간 정도 기다린 뒤 고흥 읍내로 가는 버스를 탑니다.
그리곤 내일 향할 '그 섬'을 가기 위해 고흥에서 또 녹동 행 버스를 탔지요.
거문도의 소설가 선생님이 나로도에서 녹동이 멀지 않을 거라 하셨지만,
자주 다니질 않는 시골 버스를 2번이나 갈아타다 보니, 두 세 시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그새 어둑어둑 밤이 내려 앉습니다.
녹동 읍내에서 포구쪽으로 내려와 저녁을 먹으려고 기웃거립니다.
그 밤, 잠 잘 곳으로는 읍내의 꽤 번듯한 찜질방을 점찍어 두었습니다.
애초 거문도에서 먹으려던 거나한 저녁을 못 만나 섭섭했기에,
녹동에서 뭘 좀 먹으려는데, 거의 모든 식당이 1인분은 어렵다고 합니다. ㅠ
섭섭합니다. 1인분이 안 되는 식당들이 많아지는 것은.
무전여행의 시대가 종언을 구한 것이야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이런 식당들이 도와주셔야,
나그네라는 희귀 종족들이 이땅에서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 텐데요 ^^;
1인 인데도 한 접시에 4~5만원을 부르는 횟감은 먹을 엄두를 못냅니다.
간신히 한 장어식당에 좁은 자릴 얻어 장어탕을 한 사발 먹기로 합니다.
여수의 별미이기도 한 장어탕과 서대회는 이곳 고흥에서도 8미(味)에 꼽히더군요.
회 한 점 못 먹지만, 장어탕 한 그릇에 소주 한 잔이 찐한 객수(客愁)를 달래줍니다.
역시 비린내 없이 담백하고 든든한 장어탕 한 사발.
처음엔 건너편 식탁의 아나고회, 장어구이를 쳐다보며 입맛을 다셨지만,
배가 조금 불러오자, 맘이 간사해집니다. 장어탕이면 그만이지, 뭐! 하고...
장어탕 먹고 나와, 바로 찜질방에 들지 않고,
(찜질방 들어가면 더는 술을 마실 수 없으므로^)
아직 비가 내리지 않는 포구 선창가에 앉아 바다를 마주하고
선창가 구멍가게에서 사온 맥주 캔 두어 개를 따 마셨습니다.
칠흑같은 밤, 모두 문을 닫은 포구의 횟집들,
저만치 아래 있었는데 어느새 차고 올라와 내 운동화를 젹시는 밀물의 출렁거림,
그리고 내일 넘어갈 저 바다 건너의 '그 섬', 소록도...
문둥병, 나병 ... 그러니까 한센병 환자들이 있을 건너편 소록도가
그 교교한 밤, 칠흑같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잠들어 있습니다.
찜질방에서 잘 자고, 소록도 가는 버스 시간(07:30)에 맞춰 읍내로 나섰습니다.
마침내 하늘은 약속을 지켜, 빗방울을 뿌리고 있습니다.
지난 밤 불을 밝혔던 횟집의 마당에도, 떠 있던 배들에도, 바다에도
고루고루 비가 뿌리고 있습니다. 기다리던 비입니다.
버스 시간이 다 되기도 하였거니와
마땅히 아침 먹을 곳도 없을 듯하여, 어제 그 구멍가게에서
단팥빵과 카스테라와 두유 하나를 사서 배낭에 넣었습니다.
이런 여행길이니, 그런 빵도 오랜만에 먹어보게 되는군요.
포구가 있는 녹동은 생각보다 큰 마을입니다.
나중에 보니, 광주나 순천 같은 도시에서도 이곳 녹동으로 오는 버스들이 제법 많더군요.
그도그럴것이 녹동 항에서 떠나는 배편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금일도, 금당도 등의 인근 섬들은 물론, 거문도로 가는 배도 있고
심지어는 제주도로 가는 배도 운항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녹동 하면 바로 떠오르는 섬은
바로 녹동 읍내에서 지척에 있는, 바로 몇 해 전 다리가 놓인 소록도일 겁니다.
소록대교가 생기기 전에는 역시 녹동 항에서 소록도로
10~20여분이면 건너는 배로 오고갔다고들 합니다.
사슴이 많았다는 '녹(鹿)동'이나, 어린 사슴을 닮았다는 '소록(鹿)도'나
모두 사슴이란 동물이 그 지명 안에 숨어 있습니다.
하늘에서 그 섬을 내려다 본 적 없을 옛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이름을 지었을지 궁금합니다.
시간에 맞춰 버스가 도착합니다.
버스 안에는 현지 분들이 서너 명 계실 뿐, 여행자는 혼자인 듯합니다.
생각해보니, 이 아침이 월요일인 것입니다!
지인들과 회사 사람들이 바삐 출근을 서두르고 있을 시각...
그렇게 생각하니, 뵈는 것 모두 낭만적이고 아름답습니다!!! ^^
녹동에서 소록도로는 너무도 쉽게 넘어 왔습니다. 채 20여분이 걸렸을까요?
금단의 섬으로 보이던 소록도를 이렇게 쉽게 넘어도 되나 싶을 정도입니다.
소록도에 내리자, 빗줄기도 굵어지고 바람도 거세집니다.
짐을 가볍게 하느라 챙겨온 가볍고 빈약한 우산이 그제야 휘청거립니다.
우산 안쪽 견고했던 살 하나가 그 바람에 비쭉 휘어져 있습니다.
버스가 선 정류장 앞 휴게소 처마 아래서 잠시 짐을 갈무리하고,
단팥빵과 카스테라로 아침을 떼웁니다.
멍하니 바라보는 비에 젖은 바다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습니다.
흔히 우리가 소록도라 부르는 이 곳의 현재 정식 명칭은 '소록도 국립한센병원' 쯤 됩니다.
1916년 일제에 의해 처음 수용소로 조성된 이 섬이 이제는 국립병원이 된 셈입니다.
버스가 멈췄던 주차장과 휴게소가 있는 섬의 중심지에서
휴게소를 등지고 왼편으로 가면 병원 관계자들이 사는 직원 지대가 있고,
오른편 숲길을 따라 600m 쯤 가면 병원과 병자들 숙소가 있는 병사 지대가 있습니다.
바로 그 병사지대로 향하는 솔숲 입구에 입간판 하나가 처음 여행자를 맞이합니다.
'수탄장'. 탄식의 장소...
바로 이 부근이 문둥병(일단 이렇게 부르기로 합니다)에 걸린 부모와
아직 감염되지 않은 어린 자식들이 한 달에 한 번 상봉(면회)을 하던 장소라지요.
감염을 우려하여 5m 쯤 간격을 두고 오로지 눈으로만 면회가 허용되었다고 하며,
불어오는 바람에 병이 옮을까봐 바람이 부는 방향 바깥 쪽에 문둥병 부모들이 섰다고요...
그 아름다운 솔숲을 사이에 두고, 그리운 사람의 얼굴도, 몸도, 손도 한 번
만져보거나 쓰다듬을 수 없었던 슬픔의 장소.
그 울음과 탄식을 오래된 소나무들이 기억하고 있을 듯싶습니다.
왼편 직원지대로 올라가는 길목에 우체국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문을 연 우체국.
격리와 절망 속에 살아온 문둥병 환자들에게 작은 희망이 되어준 장소였을 겁니다.
함께 살 수 없는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소식을 띄울 수 있는 유일한 터널...
세상 어떤 우체국보다 아름답고 귀해 보입니다.
그 아침, 병사지대에서 전동 휠체어를 타고 달려오신 어르신 한 분이
우체국에 우편물을 부치고 다시 전동차를 타고 병사지대로 되돌아 가십니다.
'아! 문둥병 환자다!'
순간, 두려운 생각, 오싹한 생각이 든 것이 사실입니다.
영화 <벤허>에서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걸렸던 병,
영화 <빠삐용>에서 문둥병 환자의 담배를 건네 받아 피던 빠삐용,
신약성서나 문학작품에도 많이 등장하던 그 환자들.
높이 자란 밀밭 한가운데 아이들의 간을 빼먹는다는, 그런 전설까지 갖고 있던 그...
그런데, 바투 다가와 지나가던 어르신의 얼굴을 흘끔 엿보니,
그닥 병색이 짙어 보이지 않으십니다.
그저 우리네보다 조금 더 창백한 정도랄까요?
조금 전 우체국에서 한 직원이 거동 불편한 이 어르신을 부축하여
휠체어에 태우며, "더 도와드릴 거 없어요?" 하던 광경이 떠올라 부끄러워 집니다.
문둥병에서 나병으로, 그리고 이제 한센병이란 이름으로 부르기까지,
그리고 이들이 우리와 다름없는 사람이란 걸 인식하기까지
인류는 참으로 오랜 시간을 허비한 셈입니다.
국립 한센병원 가는 길.
그냥 보면 참으로 아름답기만 한 솔숲과 오솔길과 바다.
다행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자연이 이곳에 머물러 계서서.
또다시 옆을 스쳐 지나가시던 한센병 환자인 듯한 할머니.
여행자의 눈길을 피해 지나가시던.
버스에 내려 길을 물을 때, 안내소에 계시던 분이 그러셨습니다.
일찌감치 아침을 드신 환자 분들이 이 길을 따라 산책과 운동을 나오신다고...
그러다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9시 이후로는 비로소 병원에 들어가 안 나오신다고.
조금 일찍 찾아온 덕분(?)에 저는 그 분들과 쉽게 마주한 셈입니다.
마침내 병사 지대, 병원의 입구입니다.
가장 먼저 여행자를 맞는 것은 하나의 추모비입니다.
1945년 8월 22일. 일제가 물러가기 직전, 자치권을 얻기 위해 싸우던 환자 분 중 84명이
비극적으로 살해 당해 매장당한 자리에 이 비를 세운 것이라 합니다.
소록도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일로 기록된 사건일 듯합니다.
그 사건을 추념하기 위해 2002년 8월 22일에 세운 추모비입니다.
소록도의 역사를 기억하는 기념물이나 기록들은 대부분
현재 늠름하게 세워진 국립한센병원의 뒤편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병원 뒤편으로 가기 위해 거쳐가야하는 좁은 길목에는 이와 같은 정갈한 길이 조성돼 있습니다.
타일과 벽면을 이용해, 환자들과 의료진, 봉사자 등의 얼굴을 담은 그림들...
어느 단체에서 처음 시작하여 조성한 프로젝트라고 합니다.
처음엔 사진 찍히는 걸 꺼려했던 환자 분들이, 타일에 그림 형식으로 새겨넣는 걸 아시고는
마음을 여셨다고 합니다.
이 길 위에 서니 눅눅해졌던 마음이 비로소 조금 환해집니다.
소록도를 방문한 사람이라면, 그 섬에서 가장 끔찍하고 살벌했던 기억을 갖고 있는
건축물들 앞에 가장 먼저 발길이 닿을 것입니다.
병원 뒤뜰, 얕은 언덕길로 올라서는 초입에 선 두 동의 벽돌 건물들.
그 중 앞에 선 아담한 건물에는 '검시실'이란 안내 입간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검시실'의 조금 열어둔 창이며 문을 통해 안이 들여다 보입니다.
두 개의 방으로 이뤄진 검시실 중 길에 면한 방에는
사람 키 정도되는 크기의 돌로 된 석대가 놓여 있습니다.
이 돌로 된 석대가 시신을 부검하는 해부대, 부검대였던 셈입니다.
섬에 들어온 한센병 환자들이 이 섬에서 사망하면
예외없이 이곳 검시실에 보내져 부검을 거친 뒤 섬내 화장장으로 옮겨진다고요.
그래서 한센병 환자들은 세 번 죽는다는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번은 문둥병에 걸렸을 때, 두번째는 육신이 죽었을 때,
세번째는 이곳 검시실에서 부검을 당할 때...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서니, 어쩐지 서늘하고 오싹한 느낌입니다.
오래 못 있겠습니다. 황황히 검시실을 빠져나옵니다.
검시실 바로 위, 조금 더 큰 H형 모양의 건물에는 '감금실'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담으로 둘러 쌓여 있는 안쪽에 중간 복도길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몇 개의 어둑한 방이 늘어선 건물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 방에 병원장이나 관리자들의 판단에 따라 '문제 환자'로 낙인 찍힌 이들이
무시로 격리, 감금 조치를 당했다고 하는군요.
섬 안의 작은 형무소라고 할 수 있는 감금실.
일제 말기와 해방 전후의 시기에는
부당한 처우와 박해에 항거하던 수많은 한센인들이
이곳에서 무수히 사망하거나 불구가 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이곳에 일단 한 번이라도 감금된 사람은
출감시 예외없이 정관수술을 받아야 했다고 하니,
소록도에서 자행된 인권 유린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한센 병 환자는 감금실에 갇혔던 자신의 억울한 신세를
다음과 같은 시로 읊기도 하였습니다.
소록도에서도 가장 오래 발걸음이 머물렀던 검시실과 감금실.
병 들고 핍박받은 사람들이 비로소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대접받고
당당한 인권과 평등을 얻기까지, 인류에겐 참 많은 시간을 필요했습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붉은 벽돌 건물 어딘가에
누군가 몰래 묻어둔 통곡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이 섬에선 어디서나 죽은 자들만이 말을 하고 있어요. 살아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아요.
이젠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는 동상이 말을 하고, 섬을 빠져 나가다가 물귀신이 되어 간 사람들이 말을 하고,
그리고 그 납골당에 잠들어 있는 수많은 망령들이 말을 하고......하지만 말을 하는 것은 오직 그들뿐이란 말요.
- 이청준, <당신들의 천국>에서
이제 아침 9시쯤 되었을까요?
감금실 건너편에 자리잡은 관사에서 일군의 젊은이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들이 나온 건물 현판을 보니, '자원봉사자 숙소'라고 씌어 있습니다.
발랄하고 젊은 청년들의 발걸음에 검시실과 감금실에서 울먹했던 마음이 환해집니다.
참 대견한 친구들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감금실 맞은편 언덕에 역시 2개 동의 붉은 벽돌 건물이 서 있고
'소록도 자료관'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2개의 전시관 중 앞 건물은 소록도의 역사와 생활상을 기록한 전시물들이 있고,
뒤 건물에는 한센병의 증상과 치료, 이에 공헌한 인물들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돼 있습니다.
첫 전시실에 적힌 역사적 사건 중 2건의 사건이 눈에 들어옵니다.
1916년 세워진 뒤 4번째 원장을 맞은 소록도.
3번째 원장이 무척 헌신적이고 다정했던 데 비해, 4번째 수호 원장이라는 일본인이
원생들을 무자비한 강제 노역에 동원하는가 하면, 자신의 동상까지 만들어
참배를 강요했다고 합니다. 1942년 6월 어느날, 이에 반감을 품은 이춘상이라는 환자 분이
몰래 동상에 참배하는 척하다가 수호 원장을 흉기로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고요.
이춘상이라는 분도 결국 사형을 언도 받아 얼마 뒤 형이 집행되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 눈에 띈 것은 1984년 한국을 방문한 요한 바오로 2세가
이곳 소록도를 방문한 사건입니다.
몹시도 바쁘셨을 스케줄에 일부러 시간을 빼서 이곳 남도의 맨 끄트머리, 그것도
특별 선편이 아닌 보통 사람들의 배편을 이용해 이곳에 왔다는 요한 바오로 2세.
한국식 발음의 연설문을 작성해 환자들에게 읽어줬다는 교황.
환자들에게 얼마나 큰 희망과 힘이 되었을지 미뤄 짐작 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당신도 행복하십시오"
라는 유언을 남기고 십 수년 전 돌아가신 요한 바오로 2세.
알수록 참 훌륭한 분이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문득 그 분이 그리워집니다.
이렇듯, 소록도에는 못된 사람들과 위대한 사람들의 기록이 빼곡합니다.
인간성의 한 실험장이라고 해도 좋았을 이 섬을
그래서 이청준, 윤정모 등의 작가들이 자신의 소설에 섬을 옮겨놓기도 했었지요.
두번째 전시실 입구에는 한센병 치료의 길을 연 노르웨이 의학자 한센 박사의 초상과 함께,
나병 환자들을 위한 의미있는 정책을 편 세종대왕의 초상도 걸려 있습니다.
그리고, 전시의 마지막에는 이 섬을 다룬 문학작품,
그 중에서도 자신이 한센병을 앓았던 시인 한하운의 유품과 초상, 시집 등이 전시돼 있습니다.
이 섬을 소재로 한 우리 소설사의 명작인 <당신들의 천국>의 저자 이청준 선생님의
친필 서한이 책의 안쪽에 적혀 있습니다.
오래 전 읽은 <당신들의 천국>의 그 음산했던 분위기,
70년대 새마을운동에 겹쳐졌던 시대의 분위기가 어혐풋이 떠오릅니다.
이러니저러니, 참으로 사연 많고 생각할 것이 많은 섬임에 틀림없습니다.
검시실, 감금실과 전시실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마침내 발걸음은 병원 뒤편 언덕에 조성된 중앙공원에 다다릅니다.
그 한 가운데, 높이 솟은 탑의 이름은 '구라탑'.
나병으로 부터 생명을 구하기 위한 염원을 담은 탑 위에는
대천사 미카엘이 나병을 박멸하는 모습을 형상화했고,
탑 하단부에는 매우 단호한 어조로 '한센병은 낫는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병원에 근무하거나 견습 중인 듯 보이는 의료진 아가씨들이
공원을 배경으로 산책과 사진 촬영을 즐기다가
탑을 돌아 공원 안쪽의 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어느새 소록도에는 무르익은 평화가 정착해 있습니다.
1960년대, 처녀 시절에 이 병원에 들어와 평생을 헌신했던 외국인,
마리안느 수녀와 마리아 수녀를를 기념하는 기념물도 한쪽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아까 전시실에서 보고 알게 된,
4대 수호 수호 원장의 동상이 있던 기단 터입니다.
바로 이 부근에서 이춘상이란 분이 수호 원장을 살해했겠지요.
공원 이곳저곳이 모두 역사적 장소이자, 아프거나 아름다운 곳들입니다.
그리고 꽤 넓직하고 훌륭한 너럭바위 위에 새겨진
문둥이 시인 한하운의 시비.
그의 대표시인 '보리피리'가 너른 판석 위에 새겨져 있습니다.
피-ㄹ 닐니리 ...
꽤 아름다운 토속적 서정을 담고 있는 시지만,
너무 예쁘게만 쓰여진 이 시들보다 문둥병을 앓은 시인의 정체성과 울분을 담은
다른 시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 버드 나무 밑에서 찌까다비를 벗으면 /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 가도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
- 전라도 길 (부제 : 소록도로 가는 길에)
다시 공원과 건축물들을 돌아 내려오는 길,
감금실로 들어서는 경쾌한 발걸음의 여행자들이 보입니다.
돌아나오는 발걸음은 아마도 그리 가볍지 않을 것입니다.
번듯하게 지어진 최신식 건물의 국립 한센병원
이제 곧 100주년을 맞이할 겁니다.
벽면에 새겨진 표정들, 얼굴들.
저 환한 얼굴 속에는 환자도 있을 테고, 헌신적인 의료진들과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봉사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람입니다.
함께 어울려 사람인 것입니다.
처음 들어설 때 바라보던 벽면의 얼굴들이
나오는 길엔 조금 더 환하고 밝게 다가옵니다.
많은 느낌과 생각을 갖게 해준 소록도 방문인 셈입니다.
그제야, 왜 소설가 선생님이 이 풍랑의 날에
소록도에 가보라 한지 알 것 같습니다.
두해 전 여름, 폴란드에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지난 겨울, 만주에 갔다가 일제의 화학전 만행이 남겨진 731부대 터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와는 좀 다르지만, 오늘 우리의 아픈 역사가 담긴 소록도에 와 보았습니다.
멋지고 자랑스런 역사보다도 어쩌면 아프고 부끄러운 역사가
가르쳐주는 것이 더 많은지도 모릅니다.
소록도 전시관을 통해, 저도 한센병,
즉 문둥병, 나병이란 것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세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전시관에 소개된 환자들의 은어들 몇과
인터넷 사전에서 한센병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옮겨 적습니다.
'몰라 3년, 알아 3년, 썩어 3년' /
병인 줄 몰라 잠복기를 거치기를 3년, 병인 줄 알지만 어찌할 줄 몰라 우물쭈물 하느라 3년,
이제는 병이 깊어 살이 썩어들어가고 문들어지느라 3년이라는 뜻의 자조적인 표현.
문씨, 나씨, 한씨 /
문둥병, 나병이라 불리던 병이 멸시와 차별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여
현재는 한센병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이를 두고 환자들 사이에 줄여 부른 표현임.
한센병 /
나균에 의해 감염되는 만성 전염성 질환을 한센병이라고 한다. 6세기에 처음 발견된 병이며,
현재는 전세계적으로 24개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연간 1만 명당 1건 미만으로 발생하는 드문 질환이다.
나균이 피부, 말초신경계, 상기도의 점막을 침범하여 조직을 변형시킨다.
한센병이라는 명칭은 노르웨이 의사 한센에 의해 나환자의 결절에서 나균이 처음 발견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한의학에서는 가라, 풍병, 대풍라 등으로 불리웠고, 과거에는 문등병 또는 천형병으로 불리웠다.
현재 일부 학술적 분야에서는 나병으로 하되, 사회적 분야에서는 한센병으로 통칭한다.
왜냐하면 나병이란 용어가 편견과 차별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대부분의 경우에서 한센병이라고 부르고 있다.
소록도를 빠져 나와 다시 녹동입니다.
차창 밖으로 빗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저 빗줄기와 넘실대는 바다 너머로 멀리 떨어진 섬 거문도가
오늘은 더욱 쓸쓸할 듯합니다.
녹동에 오래 머물지 않고 바로 버스를 타고 여수로 향합니다.
어제 소설가 선생님이 얘기해 준대로 아마도 여수 근해의
금오도나 사도 등으로는 바로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고...
녹동에서 여수까지는 버스로 2시간이 넘게 걸릴 거랍니다.
아! 그런데! 또!!! 다시 비보가 전해집니다.
미리 적어온 금오도의 민박집과 사도의 식당 번호로 전화해 보니,
조금 전 낮 12시 부로, 여수 앞바다의 선박 운항도 전면 금지되었다는 소식입니다!
아아, 럴수럴수 이럴 수! 다시 길이 꼬이다니!
작정하고 내려온 거문도와 남도의 섬여행이 이렇게 무참히 좌절되다니...
그렇다면, 굳이 버스를 타고 여수까지 갈 이유가 없습니다.
여수 가기 전 버스가 정차한 순천 터미널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립니다.
여수보다는 여러모로 교통이 편한 순천에 내려
어디로 발걸음을 돌릴 지 궁리합니다.
어디로 가야 할까? 그냥 서울로 올로가기엔 영~ 섭섭한 일인데 ...
순천 송광사로 들어가 내일 굴목재를 넘을까?
가까운 구례로 올라가 지리산과 섬진강변을 걸을까?
일기예보에 아직, 아니 내일까지도 비가 내리지 않을 거라는 통영쪽으로 가서
연화도나 한산도 쯤 들어가 볼까?
그때! ...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거길 가보자!"
방송을 한 번 오지게 탄 뒤로는, 주말이나 휴일에 도저히 방을 잡을 수 없던 그곳!
이렇게 비가 거세면 더욱 운치있는 밤을 보낼 수 있을 그곳!
휴대폰에 입력된 전화번호로 전화를 거니, 오늘은 방이 넉넉하다고 합니다.
게다가 전화로 빗길에 혼자 그 길을 헤치고 갈거라 하니 방값도 빼준다고 하십니다.
그곳으로 향하는 버스 차편을 물어보니, 1시간 뒤쯤 있다고 합니다.
마침 점심 때도 되었으니 근처에서 밥을 먹고 가면 되겠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괜찮은 생각입니다! 괜찮은 결정입니다!
순천 터미널 부근의 몇몇 식당을 기웃거리다가
게장 백반 집을 골라 철퍼덕 주저 앉습니다.
메뉴 판에는 역시 '2인 이상만 가능'이라 써 있지만,
비에 젖은 몰골을 보고는 아즈매들이 그냥 앉으라고 합니다.
서해안 쪽의 큼직한 꽃게가 아니라 씨알이 작은 게지만,
게장보다 더 좋은 건, 어쩐 일인지 요즘 좀처럼 보기 힘든 눌린머리고기, '편육'입니다.
그 편육을 2접시째 비워 더 달라고 했습니다. 쫀득한 맛이 역시 그만입니다!
아즈매가 별미라고 권해준 산수유 막걸리는 꼭 딸기 우유의 빛깔인데
아주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상을 받고 찬찬히 막걸리를 기울이며 바라본
현관 바깥으로 빗줄기가 더 거세지고 있습니다.
어쩌다가 길이 또 꼬여 버렸습니다!
그러니 즐겁습니다! 그러니 좋습니다!
이제 향하려는 곳에서 밤새 초여름 비를 맞을 생각을 하니,
한옥 처마 밑으로 떨어질 지랄맞은 비를 바라보며,
밤새 탁주를 들이킬 생각을 하니 ...
아아, 길이 꼬이는 게 여행이구나,
그래서 새로운 길이 보이는 게 여행이구나,
그렇지 그렇고 말고!
터미널에 다시 오니, 비를 맞은 버스들 몸뚱이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 오르는 것 같습니다.
따뜻한 잔등을 가진 비맞은 조랑 말들처럼. ^
가도가도 빗길, 남도길을 이제 달려갑니다.
2013.05.27. 전남 고흥, 순천
첫댓글 단숨에 읽어내리곤 비의 나그네 3편은 어느 곳일까 궁금해 하고 있음.
3편...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자꾸 장황해지네요 ㅠ
86년도에 들렀던 소록도에 대한 기억은 참 조경을 정성들였구나 하는 생각과 동심원을 그리듯 구역별로 나누어 통제하느라 중심부에까지 다다르기가 쉽진 않더라는 것과 돼지 축사가 콘크리트로 아파트 처럼 지어졌다는 것......그리고 육영수. 순천과 고흥을 잇는 여행루트가 부럽다. 순천 터미널 블로크 담장을 보고있노라니 아스라히 혜초의 군대 시절이 떠오른다. 저 담장 너머가 바로 31사단 95연대 OPEC쪽 아닌가 싶다.
형님 복무한 곳이 이 부근이셨나 봅니다. 그나저나 형님 졸라서 홍어 먹으러 가야 하는데요.ㅠ 행복한 여름날 되세요!
혜초와 희인이 같이 여행하는데 내가 끼고 싶다고 병창에게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먹거리에 대해 잘 아는 혜초와 감상이 풍부한 희인을 따라다닌다면 아주 황홀한 인생이 펼쳐질 듯해! 소록도를 가봐야한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나게 해 준 이번 기행문 감사!
언제 마음 맞는 극회 선후배님들과 1박2일... 그런 여행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소록도... 한번쯤 가보는 것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다음카페가 이래서 좋아...희인이 있어서
아흑... 형님, 놀리시면 싫어요이 ~ (엄앵란 버전)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