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복음주의와 성화실천 | ||
1. 종교개혁 500 주년과 감리교 성화실천
복음의 열정과 사회정의에 대한 소명은 현대선교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에 하나이다. 교회가 물질의 노예가 되고 권력의 시녀가 되는 상황에서 교회의 본래적 사명을 다짐하는 오늘의 종교개혁은 믿음의 만큼 중요한 사랑의 실천을 주목하는 것이다. 지난 1997년 가톨릭 바티칸 신앙교리성에서는 ‘Dominus Jesus’를 발표하였다. 바티칸이 개신교를 교회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발표한 것이다. 그동안 로마 가톨릭을 교회일치의 파트너로 삼아왔던 개신교들은 ‘합법적인 사도계승권과 성례전적 신비의 참되고 완전한 본질을 보존하고 있지 않은 교회적 공동체(ecclesial communities)는 진정한 의미의 교회가 아니다’라며 잇달아 유감을 표명하였다. 5C 이후 바티칸은 실제로 오직 하나의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베드로와 그의 계승자들이 다스리는 가톨릭교회는 지상에 오직 유일하게 정교회만을 인정하고 있다. 실제로 유럽에서 가톨릭교회는 국왕과 제후들 위에 군림하면서 초국가적인 교권을 행사해 왔다.
루터의 독일복음교회나 영국 헨리 8세가 이끈 성공회는 이러한 바티칸에 대항하여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민족국가 단위의 교회가 되었다. 장로교회라고는 하지 않지만 칼뱅주의 교회의 고향 같은 제네바의 경우는 16C 종교개혁 시기에 교황의 통치행위를 거부하고 시의회가 중심이 되는 당회(Consistory)를 구성하여 개혁의 주체를 세웠다. 바티칸의 무소불위의 권력은 15C부터는 타락하기 시작하여 교황은 추기경을 돈으로 매수하였고 재산증식을 위하여 각종 세금을 부과하였고 주교는 1년 치 생활비를 선납토록 하였고 신임성직자들에게는 성직발령 대기표를 판매하거나 대기표의 대기표를 판매하여 무한정 대기하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레오 10세 교황시기에는 마침내 면죄부를 판매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종교개혁은 가톨릭의 교권 사유화에 대항하여 공교회성을 살리고 민족의식에 기반을 둔 새로운 국가교회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헨리 8세의 이혼문제를 놓고 대립하던 끝에 교황의 간섭을 배제하고 독립하였다. 그런데 감리교는 18C 산업혁명기를 맞아 노동대중과 이농민들을 상대하는 부흥운동을 일으킨 성공회 신부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그것은 교회와 국가의 갈등이 아니라 국가교회가 시민적 자유와 성령운동을 하는 정체성을 가지고 맞서는 자유교회의 출현을 놓고 벌이는 갈등이었다.
존 웨슬리의 감리회는 성공회의 교구제도가 아닌 신도회(Religios Society)라는 소그룹운동을 통하여 형성된 교회안의 작은 교회운동이었다. 감리신도연합회(United Socieities)는 속회를 기본으로 삼아 구역회와 지방회 연회와 총회로 이어지는 연합체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감리교회만 있던 것이 아니었다. 올리버 크롬웰의 청교도의 장로교와 존녹스의 스코틀란드 장로교회가 있었으며 침례교회 회중교회 종교친우회(Quakers)등이 있어 자유교회의 다양한 모습이 가능한 사회였다. 이들은 모두 비국교회로 분류되었고 독립교회라 불렀다. 감리교는 성공회 부흥운동을 선도하던 신도회로서 성장하여 존 웨슬리 사후에는 비국교회 독립교회가 된다. 대륙 경건주의의 영향으로 기도하고 선교하는 교회로 시작한 감리교는 성공회의 신학과 직제를 채용하여 민간인 자유교회를 구성하였다. 종교개혁은 가톨릭 교권에 도전하여 민족국가 교회들이 등장하는 시대였다면 18C 산업 혁명기에 처한 영국에서 등장한 감리교는 알미니안 주의를 가지고 선행은총을 믿는 복음의 확신을 모토로 삼은 선교하는 새 교회였다. 물론 정교회 가운데 단성론자들이지만 카파도키아의 영성가인 니사의 그레고리나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감리교는 이신칭의를 기반으로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가지고 성화의 교리로 이신성화라는 한 단계 변화된 새 교리를 가지고 있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강조하면서 16C 종교개혁의 이신칭의가 죄씻음의 믿음이 공공성을 높이기 위하여 선행을 강조한 것처럼 새로운 교리체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종교개혁이 북 알프스 지역의 민족주의의 발흥과 바티칸에 대항하는 대중들의 반란에 영향을 받아 일어난 교회였다면 18C 감리교는 가톨릭에 맞서는 성공회를 벗어나면서 새 시대의 새 교리를 가지고 형성한 새 교회로서 기독자의 완전을 목표로 하는 복음주의 교회였다. 그러나 감리교의 복음의 열정과 경건주의 선교는 둘째 축복인 성령충만과 방언역사로 인하여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감리교에서 성결교회가 나가고 나사렛교회와 오순절계 교회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성령은사교회 곧 카리스마운동이 본격화되면서 감리교는 중산층 교회로서 운동성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시대마다 찾아오는 인간 삶의 스타일의 변화는 유럽교회들의 지형변화를 촉진하였고 그 가운데 감리교는 칭의의 신앙과 성화간의 갈등과 봉합을 일으킨 새 교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2. 종교개혁과 교회의 공공성 회복
16C 로마 바티칸은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문화 예술 건축에 대한 막대한 투자를 하였다. 르네상스 교황들 가운데에는 사치와 문화적 욕구를 채우는데 막대한 재정을 필요로 하였는데 특히 식스투스 교황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레오 10세 교황은 성 베드로 성당 재건축을 위한 건축 헌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면죄부를 팔았다. 성직자 상납금을 올리기 위하여 성직자 인사이동을 빈번하게 실시하는가 하면 대기자들에게 돈을 받고 번호표를 발행하면서까지 돈을 모았다. 특히 면죄부 판매는 세례 받은 교인들이 죄를 범하고 두려워하는 신자를 돕고자 만든 것이 참회제도였다. 그리고 면죄부는 참회의 방식을 보속행사를 이용하여 죄를 완화(Indulgentia)해주고 경감(milderung)해주는 방식을 가지고 참회의 보속행위(satisfactio operis)를 해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결국 보속행위란 죄를 범했을 때 고행성사를 통해 용서를 얻었으나 그 죄를 인하여 발생한 벌을 면해주는 주는 고해신부에게 가는 불필요한 것을 자동으로 면해주는(Absolutio)방식이었다. 이것이 당시로서는 비교적 부유한 독일의 교회와 수도원들을 상대로 면죄부를 판매하게 된 이유이다.
교황은 독일출신 요한 테첼을 대사로 임명하였다. 참회를 돕는 면죄행위에는 돈 대신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는 것과 로마 성지순례가 있었다. 마틴 루터는 가톨릭교회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개혁의 중심주제는 면죄부를 반대하는 이신칭의의 교리였다. 당시 가톨릭교회에 저항하는 것은 언제나 위험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이단이 되거나 파문당하기 일쑤였다. 막강한 바티칸의 권력은 이단재판소를 운영하고 파문을 무기로 삼았다. 제네바의 개혁자 장 칼뱅의 묘지는 실존하지 않지만 제네바의 플랑플랑에 있는 묘지 표지석에 루터파 이단(파르티잔)인 칼뱅의 무덤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가톨릭교회는 종교개혁을 루터파의 잔당들이 저지르는 해교행위로 간주한 것으로 보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루터의 95개조 항의문에는 바티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고위를 언급하지 않고 있었다. 문제제기는 믿음의 원리 이신칭의의 도리에 대한 문제제기로 집중되어 있다. 인문학적 소양으로 논쟁을 하고 종교자체의 권위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논쟁은 가능하되 혁명적 변화를 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빌미가 되어 중교전쟁은 일어났다. 말없는 지지층과 유리된 종교개혁주의자들은 북 알프스 민족국가의 중심세력을 일으키게 된다. 가톨릭은 종교개혁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예수회를 결성하고 동방선교에 들어간다. 당시 식민지종주국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동참하여 파도로도아(padorodoa)시스템을 채택하고 동방으로 진출한다. 가톨릭교회는 반종교개혁을 시도한 것이다. 16C 글로벌 미션은 종교개혁의 반작용으로 시도된 선교운동이었다. 이러한 종교개혁의 흐름에서 보자면 18C 영국의 감리교의 출현은 개혁이 일어난 지 200년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감리교 복음주의 부흥운동은 복음에 대한 뜨거운 확신과 열정을 품고 시작한 선교운동이었다. 존과 찰스 웨슬리 형제는 성공회의 교권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고교회주의자로 자처하면서 성공회안의 작은 교회로 처신하였다. 복음성가를 부르고 야외집회를 하면서도 예전은 중시하고 교구 교회로 출석하였다. 주일의 성만찬을 받도록 한 것이다. 감리교의 성격은 종교개혁의 범주가 아니라 가난한 자들의 교회가 되고자 하였다. 이신칭의와 성화 기독자의 완전교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나타난 결과물이었다. 대륙 경건주의의 영향과 정교회의 영성신학이 같이 작동하고 성공회 예전주의가 깊숙이 침투되어 있는 감리교 신앙은 성결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 운동이었다. 그래서 감리교는 신학이 없다고 말들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감리교는 복음주의 신학 노선에 충실한 공동체교회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감리교 신학과 운동방향은 종교개혁신학의 입장의 제 3의 관점이었다. 그러면서 연속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20세기의 오순절성령은사 운동으로 이어가는 글로벌 신학의 융합과 진화 과정을 공유하는 집합체라고도 볼 수 있다. 순진한 장로교에서는 감리교를 알미니안주의 이단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신흥종교 취급을 받았던 터이다. 그러나 존 웨슬리의 부흥운동이 교회성장으로 이어지면서 감리교는 중산층교회가 되었고 박해를 피해 떠난 미국에서는 100년 안에 주류교회로 격상하면서 자유주의신학이 번성한 중산층교회가 되었다. 감리교 구원론의 핵심인 성화교리는 구원은 믿음으로 역사하는 것이지만 성화론의 핵심인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나가는 길을 개척하였다. 알미니안적 선행은총과 신인협동설의 탄력을 받으면서 에큐메니칼한 신학적 면모도 보여주고 있다. 감리교에는 복음주의 신앙과 함께 성결교와 오순절성령은 사주의 요소와 함께 에큐메니칼한 신학적 보편성도 가지고 있다. 성공회신학과 결코 분리되지 않았고 성령은사에 있어서도 열린 자세를 가지고 이단시비를 잠재우고 있다. 그것이 사회적 성화를 통하여 열린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현대사회에 스며드는 사회적 종교로서 윤리적 사회적 기준에 충실한 교파신학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감리교 운동의 초기에는 성령은사로 취하여 있던 감리교를 성공회 주교들은 열광주의자 집단이라고 공격하였고 분리주의자들의 교회라고 경계하였다. 이러한 성공회의 반감을 사회적 성화실천을 가지고 교회의 공공성을 담보하면서 복음주의 노선에 충실하였다. 19C에는 영국의 해외진출을 따라 영어사용 식민지로 진출하였다. 감리교가 글로벌 선교의 선구적인 입장을 가지게 된 배경인 것이다. 감리교는 이신성화의 교리를 가지고 사회적 성화실천에 주력하면서 사회복음운동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였다. 그러면서 감리교에서 나온 성령충만의 교리, 즉 두 번째 축복을 가지고 성결교회가 나가고 회개 중생의 복음에 신유 재림의 교리를 추가하였다. 존 웨슬리는 일찍이 회개는 믿음의 집의 현관이고 중생은 안방 거실의 문이라면 성화는 믿음의 집 전체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감리교 성화는 복음의 개인적 확신과 동시에 사회적 종교로서의 성화실천을 위한 복음주의 경건 운동의 공동체였다.
3. 복음의 열정과 성화실천
최근에는 오순절신앙의 유행으로 자극받은 장로교에서 칼뱅의 성령론을 재발견하는 시도를 많이 하고 있다. 칼뱅의 성령론의 내용은 주로 성화를 가르치는 것이다. 칼뱅은 25세를 전후하여 성령체험을 하였다고 하는데 성화를 실천하는 과정에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고 있다. 반면에 감리교의 성화론은 구원의 핵심으로서 즉각적인 회심보다는 점진적인 변화를 이룩하는 관점에서의 성화론을 펼치고 있다. 특히 존 웨슬리는 은총의 수단을 통하여 역사하는 성화를 강조하고 있다. 성화의 실천은 19C 감리교가 크게 부흥하며 비국교회의 양심으로 역할을 하면서 본격화된다. 우선 도시화로 인하여 발생한 빈민을 상대로 하는 선교를 시작한 감리교는 사회복음운동을 전개하면서 과거 절제회운동으로 쌓은 힘을 모아 사회적 순결운동을 확산시켰다. 감리교 선교는 가난한 이웃들의 벗이 되고 사회 구조의 희생자가 된 약자들을 위한 선교를 펼쳤다. 1869년부터는 결손가정의 희생자인 아동들을 상대로 하는 NCH운동을 선도하였다. 성결된 삶을 지행하는 사회적 성화를 실천하는 감리교가 된 것이다. 웨슬리는 사회적 구조에 대해서는 피상적이었고 왕당파에 속하여서 사회구조에 대한 이해가 피상적이었지만 성화실천을 통하여 사회적 성화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노예제도를 반대하고 윌버포스를 지지하였다. 로버트 레익스를 도와 국민교육운동으로 발전시켰다. 감리교의 사회적 성화실천과 교회의 공적 신학의 과제는 오늘날 양극화된 사회속에서 절대적으로 요청되고 있다.
지금도 영국감리교회는 ‘Mission alongside to the Poor 프로그램’을 하고 있고 유명한 이스트엔드와 웨스트 런던 미션을 통하여 노숙자와 도시빈민 이주민 난민문제에 도전하고 있다. 감리교는 노동자와 도시빈민과 농민들의 벗이었다. 지금도 다인종사회인 영국에서 이민자와 아프로-캐리비안과 난민들을 위한 선교에 정성을 쏟고 있다. 이러한 감리교는 부흥운동으로 형성된 복음의 열정이 영혼구원만을 각성과 함께 사회정의를 위한 성화실천을 위한 신앙사상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19C 미국에서는 중산층 관료주의 교회로 바뀌면서 복음의 성결을 주장하는 이들이 기도운동을 제창하면서 만국성결교회운동을 일으킨다. 이들은 감리교의 성령충만의 교리인 두 번째 축복, 성령충만의 교리는 새롭게 조명되어 독립한다. 1907년 미국 엘에이의 아주사 스트리트에서 일어난 성령은사운동은 방언을 최고로 세우면서 입신과 방언 신유와 기름부음을 강조하며 신사도운동으로 발전된다. 오늘날에는 이것이 빈야드운동 펜사콜라 신사도운동등으로 번져나갔다. 감리교는 성령은사를 절제하면서 성공회적 보수신학을 숭상하였다. 그 결과 외적으로는 기독교 사회윤리를 강조하는 제도권 교회라는 인식을 심었고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하는 교회가 되었다.
하지만 감리교에는 오순절성령은사운동의 중요한 특징인 성령충만의 교리가 있고 대중들의 심리를 파고드는 부흥운동의 저력이 있다. 은사를 사모하되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지 않으려는 윤리적 기준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의 주류교회로서의 자긍심을 가지고 성화실천의 가치를 추구하려는 의지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글로벌 선교의 균형감각을 키우고 복음주의운동의 정신적 기틀을 이루고 있다. 복음성가를 보급하고 금요일 철야기도회를 인도하고 산부흥회인 캠프미팅을 주도하였다. 1983년 영국감리교회와 성공회는 대화위원회를 가동시켜서 신학적 일치문서를 만들어 냈다. 그 가운데 기독자의 완전교리는 독창적인 신학사상으로 평가하면서 대화문서에 추가되었다. 감리교는 궁극적으로 개인의 성경적 성결 곧 거룩한 삶의 열정이 기독자의 완전으로 나타나지만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면서 선행적 은총을 믿고 있다.
4. 한국교회와 종교개혁의 과제
현재 한국교회가 직면한 문제로는 교회세습화와 함께 목회자의 윤리적 타락이 가장 크다. 급속한 교회성장이 교회를 사유화하고 부자세습을 촉진한 측면이 있다. 동시에 교회의 양극화가 극심하여 미자립 교회의 문제도심각하다. 그러나 대체적은 분위기는 배금주의 사조가 강하여 맘몬목회를 하고 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러한 교회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가난한 교회들의 아픔을 외면한 이기주의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올해로 500주년을 맞이하는 종교개혁 기념일은 남다른 감회를 준다. 유럽 가톨릭교회가 배금주의의 지배를 받았다. 지금 한국교회는 중세 가톨릭교회처럼 배금주의의 지배를 받고 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외면하고 벌어지는 각종 범죄행위는 종교개혁의 목소리를 더욱 크게 만들고 있다. 유럽에서 일어난 문제 중에서는 역시 성직 매매와 베드로 성장 개축문제를 놓고 재정동원을 하기위하여 시행한 면죄부 판매가 꼽힌다. 루터의 개혁은 신앙적각성과 신학적 자성이었다. 그리고 독일어 성경번역과 인쇄술의 발달로 성서를 공급하고 대중적 지지를 구축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제후들의 지지와 민족감정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95개의 개혁적 의제를 교회정문에 게시하였다. 당시 성직세계는 신임성직자들의 대기표를 사도록 하였다. 심지어는 대기표에 대기표를 팔 정도였다. 특히 지방의 돈 있는 귀족 자제들은 성직자로 나설 정도였다. 돈이 전부였고 교권을 사고파는 성직매매가 일반화되어 있었다.
오늘 우리 교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실력 있고 자질 있는 성직자보다 돈 있고 어리석은 것들이 출세하는 세상이 되어 있었다. 교회사유화는 교권의 타락이었고 성직매매는 상용화되어 있었다. 주교는 재정참사를 통하여 교회재산을 관리하였는데 이들을 고위성직자들과 작당하여 변칙적인 매매행위를 일삼았다. 부유한 수도원과 농장은 세습되고 있었다.
5. 복음의 본질 회복과 개혁과제
최근 한국기독교언론포럼의 위촉으로 지앤컴 리서치가 조사한 ‘한국사회 주요 이슈에 대한 목회자 및 일반성도의 의식조사’ 결과가 2016년 12월 15일자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란에 보도되었다. 내용을 보면 종교개혁과 관련한 설문지에서 지금 한국교회가 직면한 종교 개혁과제에 대한 일반적인 인지도를 살펴본다. 지금 한국교회는 복음의 본질을 외면하고 있다는 응답이 전체 응답자의 42.2%에 달했다고 하는 것이다. 이어서 두 번째 지적 사항은 목회자의 윤리회복이 급선무라는 지적이 38.5%로 꼽혔다는 것이다. 분열된 교회의 일치 7%, 개교회주의 극복 4.7%, 교회 양극화해소 4.6%, 한반도 평화정착과 통일운동 1.8% 등이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종교개혁의 과제가 복음의 본질을 벗어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으로 ‘복음의 본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그것은 먼저 성경이 증거 하는 원죄, 죄인의 회개, 죄의 용서(칭의), 중생(거듭남) 성결, 성령충만(불세례), 성화(성결), 성도의 견인, 기독자의 완전 등과 같은 것일 수 있다. 특히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한국교회가 실천해야 할 우선적인 과제는 복음 본질회복과 함께 목회자의 윤리회복 문제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 다음에는 신학적인 문제이다.
지난 2006년 7월 28일 서울 금란교회에서 모인 세계감리교협의회(WMC) 총회 3일째 되던 날 에큐메니칼 대화 프로그램에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한국가톨릭을 대표하는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하여 바티칸의 발터 카스퍼 그리스도인일치위원회 위원장이 와서 당시 루터교세계연맹(LWF)의 총무였던 이스마엘 노코 총무와 같이 WMC 회장이었던 나이지리아의 선데이 음방 대감독과 감리교 신학자들이 회동하였다. 이들은 전통적인 칭의 교리와 성화에 대한 신학적 합의를 위한 JDDJ(Joint Declaration of Doctrine of Justification)문서에 서명하였다. 종교개혁의 대상으로 서방교회들과 오래전에 결별 하였던 가톨릭교회가 루터교회와 1999년에 칭의 교리에 대한 신학적 함의에 일치하는 신학적 문서에 합의하였는데 그런 일을 한지 7년만인 2006년 7월에, 제 19차 세계감리교협의회 총회 석상에서 공동합의를 도출하고 서명한 것이다. 면죄부(Indulgentia) 판매로 시작하여 알프스 북부지역 교회들의 저항을 받아 시작한 종교개혁운동은 루터의 이신칭의로 절정을 달하고 있었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한 신학적 선언이 종교개혁의 신호탄이 된 것이다. 물론 자비선행도 중요한 개혁적 요소이고 교회의 공공성을 담보하는 신학적 의제도 중요한 것이었지만 당시 종교개혁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던 시절에는 칭의교리가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작동했던 것은 분명하다.
바티칸은 마리아 신앙이라는 민중신앙의 기반을 신학으로 교묘히 포장한 모성적 조직이었다. 교조적 신비주의를 모체로 하는 신학과의 충돌을 감내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모체가 되는 개신교가 되었다. 지난 종교개혁 500년 역사는 이러한 상흔을 뒤적이면서 회고하고 남겨진 교훈들을 음미하는 작업이다. 이들이 공동 채택한 신학적 문제는 JDDJ라고 부른다. 이 문서는 1999년 10월 31일 가톨릭교회와 루터교가 오랜 신학적 대화와 협상 끝에 만들어진 문서로서 이신칭의를 다루고 감리교의 성화의 교리를 추가한 것이다. 18C 영국의 존 웨슬리 부흥운동은 이신칭의를 넘어 이신성화의 교리로 발전한 것이다. 이신칭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문제이고 존 웨슬리의 성화와 기독자의 완전교리는 구원 얻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성경적 성결을 말하는 것이다. 거룩한 삶은 평범하게 말하면 성결의 삶을 뜻한다. 하지만 이문서는 세계 기독교의 중요한 일원인 성공회나 구세군 장로교 복음주의 오순절교회들은 서명에 참여하지 않았다. 문서는 말 그대로‘Jointed Declaration of Doctrines of Justification’이다.
1999년 10월 31일 가톨릭과 루터교는 이 문서를 공식화하여 서명하였는데 7년 뒤인 2006년 7월 28일에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모인 세계감리교협의회 총회를 계기로 감리교와 공동서명을 했다. 이들이 남긴 교훈은 새 시대, 새 교회를 위한 신학적 함의를 되새기면서 선교활동의 공동적 기반을 형성하자는 것이며 기독교 신학이 주목하는 복음의 본질은 가톨릭과 루터교, 감리교가 선도적으로 합의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교파 간 교회 간의 차이점을 안고 있지만 지구촌 전체의 신학적 선교적 공통분모를 확보하여 기독교라는 종교 안에서 공동의 노력을 펼쳐보자는 뜻이 깃들어 있는 것이리라. 가톨릭교회는 1964년 제 2차 바티칸 에큐메니칼 협의회를 통하여 개혁적인 신학을 채택하였다. 개신교가 중산층 교회로 타락하고 있을 때 가톨릭은 노동자 칙서를 발표하고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는 개혁적 조치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오늘날은 개신교가 공공성을 외면하고 가톨릭교회가 고난당하는 이들과 연대하는 교회로 바뀌고 말았다. 이제 감리교는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돌아서서 복음화와 함께 사회정의와 평화를 위한 예언자적 교회로 돌아서야 한다. 그것이 500년 종교개혁을 행사로 기리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서 개혁정신을 실천하는 공공성 회복에 나서야 한다. 예수의 누가복음 선포처럼 주의 영이 함께 하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갇힌 자와 병든 자가 포로 된 자가 노임을 받고 희년복음이 선포되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6. 감리교 성화사상과 종교개혁의 전망
이러한 감리교의 입장은 16C 종교개혁 정신을 회복하여 복음의 본질적 메시지인 인간구원과 해방을 위한 이신성화를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적인 희생을 본받아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것이 글로벌 시대 감리교 선교의 목표이고 가치이다. 특히 웨슬리 사후 탄생한 원시감리교회는 광산노동자와 도시노동자들의 벗이었다. 여성 설교자를 세우고 평신도가 주체가 되는 교회를 일으킨 원시감리교회는 영국 중서부 지역의 가난한 노동자들의 교회가 되었다. 노동당이 이러한 원시감리교회의 품에서 탄생하고 정당정치의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운동의 배후에는 감리교 떠돌이 설교자들이 있었다. 감리교 사회적 성화는 말로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정치지형의 변화를 이끌고 언제나 교회적 입장에서 영성적 사회적 성화사상에 중심을 모은 감리교가 있었다. 감리교는 칭의를 통하여 믿음의 확신을 품고 사회적 성화를 실천하여 윤리적 완성을 구하였다. 이것을 이신성화 라고 불렀다.
종교개혁 시대에도 성화의 교리는 있었다. 장 칼뱅의 기독교강요 3편은 성령론이었는데 여기에서 성화의 교리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장로교의 성화는 성령의 주권이 강조된 교리로서 감리교의 이신성화와 같은 자유의지를 논하지 않았다. 성령의 주권적인 입장이 강하여 노예의지적인 순종을 강조한 것이었다. 칼뱅이 주장하는 예정론에서 중요한 교리인 성도의 견인이 이를 설명해 주고 있다. 성도의 견인은 성령이 전적으로 역사하는 것이다. 감리교는 은총의 일반적 수단에 의하여 성사적 실천과 영적훈련과 사회적 성화 실천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인간의 영적 헌신성이 거룩한 삶을 이루는 것으로 보고 있었다. 칼뱅의 성화론은 한마디로 노예적 성령 주권을 강조한 것이고 감리교 성화는 여기에 반하여 자유의지를 가지고 인간의 윤리적 책임을 강조한 것이라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성화는 기독자의 완전에서 찾았다. 기독자의 완전은 감리교 신앙 체계의 궁극적 목표인 것이다. 이것을 감리교-성공회 대화에서는 감리교 웨슬리의 탁월한 교리 신학적 성취라 불렀다.
웨슬리는 성화를 여러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하였다. 초보적인 성화, 즉각적인 성화(Immediate sanctification)에서 시작하여 온전한 성화를 거쳐 3번째 단계인 그리스도인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과 최종적인 단계인 영화(Glorification)로 발전한다고 하였다. 존 웨슬리는 구원론적 기준에서 기독자의 완전을 최종적인 단계로 인식하였지만 영화를 최종적인 단계로 설정하였다. 특히 온전한 성화(Entire Sanctification)는 육신의 연약함을 인정한 성화로 세밀한 구분을 하였다. 단 영적으로 티끌만한 흠이 있다면 성도의 완전한 성화는 불가능하다는 엄격한 입장이었다. 이것이 웨슬리의 복음의 가치이자 그의 구원론의 요체이다. 구원파가 주장하는 구원은 일생에 단 한번 죄사함 받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애를 통하여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죄를 회개하고 확신을 되찾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성도의 상화과정은 거룩한 삶을 위한 끊임없이 회개와 죄책의 고백을 통하여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기독자의 완전은 영화로 나타나난다는 것이다. 성화는 천국으로 통하는 계단과 같은 것이다. 구도자의 길은 이러한 험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하여 완성되는 것이다. 회심과 성화를 거치면서 영적인 자각과 책임성을 가지고 거룩한 삶의 완전을 향해서 나가는 성결생활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감리교가 16C 유럽의 종교개혁과는 다른 18C의 시공에서 살았다는 증거이다. 산업사회의 노동의 소외를 고발하면서 만국의 노동자를 선동하였던 칼 마르크스를 능가하는 존 웨슬리의 사회적 성화의 교리는 현대인의 삶속에 자리 잡고 있다. 이것이 칭의와 성화를 감싸고도는 거룩한 삶의 내용인 것이다.
7. 감리교 복음주의와 성화운동
19C 부흥하던 미국 감리교회는 감독제 관료적인 교회정치로서 성장해 나가면서 중산층이 좋아 하는 교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감리교의 경건주의 운동을 되살리고 부흥운동을 다져진 보수적인 신앙을 지키려는 이들이 성결교회를 만들어 나갔다. 감리교의 부르주아적 교회를 거부한 것이다. 특히 1908년에는 나사렛 교회가 1911년에는 하나님의 성회 오순절성령은사운동이 등장하였다. 웨슬리안 교리와 신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교회를 갈라가지고 나갔다. 웨슬리안 교회의 마지막 남은 정체성은 역시 성경적 성결이었다. 미 연합 감리교회는 자유주의적 연대주의 체제로 발전하였고 성결교회는 복음주의적 개교회주의로 독립하였다. 여기에 덧붙여 오순절 카리스마 교회는 두 번째 축복인 성령충만을 교리로 삼아 방언과 은사주의운동으로 성결을 넘어버렸다. 감리교는 복음주의적 중도주의를 가지고 신앙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복음적 진보주의이지만 부흥운동과 사회적 성화를 보듬고 나가는 이변처중을 하고 있다. 그리고 조직교회로서 공공성을 담보하고 사회 윤리적인 책임을 따지는 사회국(Social Responsibility)을 설치하여 연방의회와 감리교 입법로비를 총괄하고 있으며 감리교긴급구호기금(UMCMCOR)과 기독교사회봉사회(Church World Service)를 통하여 북미주 최대의 기독교 NGO를 운영하는 주체가 되고 있다. 이들 구호기금은 WCC와 ACT Alliance를 지원하고 있으며 지역적으로는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의 NGO와 교회기관을 공동지원하면서 해당국가와 사회의 지역사회개발 프로젝트를 후원하고 있다. 이러한 감리교의 선교정책은 19C 사회복음운동의 흐름을 타고 성장한 것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오순절성령은사교회는 은사개발에 몰두하고 사회윤리가 상대적으로 약하다. 복음주의는 과학적 사고와 진화론의 영향으로 자유주의 신학으로 변했고 지금은 뚜fut한 신학적 특색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미 연합 감리교회는 연대주의 체제를 지키고 감독정치가 강하다. 여기에 반하여 북미주의 오순절성령은사교회는 개교회주의 체제로 부흥하였고 2000명이상 모이는 대형교회를 지행하였다. 감리교는 주류교회로서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세계 선교운동에 뛰어들었고 학생자원선교운동과 개도국들을 위한 민중그라스 루트 운동을 지원하였다. 브라질의 파울로 프레어리의 의식화 교육을 도입하고 지역사회조직운동(Community Organization)을 선도하였다. 자연히 정치신학과 해방신학을 전파하였다. 그러나 성결교회는 연합 사업을 외면하고 개교회주의적 체제를 발전시켜 복음주의 신학을 발전시켜 미국식 근본주의신학 운동으로 진출하였다. 신학적 탈을 바꾸지 않고 성결의 교리에 충실한 복음주의 운동으로 개교회에 충실하였다. 한때 일제강점기에는 재림교리로 악랄한 탄압을 받은 적이 있었다. 북미와 남미에서는 오순절성령은사주의 운동이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그러면서 오순절은사주의운동은 현실적으로는 가톨릭교회나 개신교회 교파교회들과는 달리 미국의 신식민지주의 정책에 동조하는 행로를 걸었다. 이들의 메시지는 번영의 복음이었고 체제순복적인 입장에 서서 해방신학을 비판하고 나왔다. 이들의 기복 신앙은 자본주의 체제를 긍정적으로 인정하고 성공철학을 지지하였다. 방언과 신유은사를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떠한가? 이들은 부흥운동이 강조하던 성령충만의 복음은 사회정의와 무슨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죄씻음과 성령충만의 복음은 대중화에는 성공하였지만 기독교의 사회윤리와 복지사회 형성에는 거리가 있었다. 번영의 복음은 타계적이었고 정교분리정책으로 나타나 독재권력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인구의 도시집중현상에 부응하여 대형교회를 이룩하였다. 반대로 에큐메니칼 운동은 현실참여 신학을 가지고 있었다. 보수주의적인 행동에 반하여 20세기 종교개혁적인 신학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민주주의 가치를 전파하고 지역사회개발을 후원하고 의식화교육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현실 변혁적 입장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특징으로써 근본주의집단들과는 구별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오늘날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고 사유화와 세습행위로 나타나는복음주의 대형교회의 이미지이다. 개교회주의는 19C 교파주의 신학에서 나온 것이다. 국가교회에서 벗어난 독립교회들은 교파신학을 가지고 선교하는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 전통적인 신앙과 직제를 거부하고 교리보다는 뛰어난 전도의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이론적인 면보다는 인간 삶의 현실적인 면에서 뛰어난 경쟁력을 확보하고 성공적인 웰빙 대형교회를 일군 것이다.
8. 종교개혁과 성화의 차이
그러나 최근 한국교회 일각에서 제기하는 이신칭의 문제는 범죄한 교역자의 구원의 문제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기독교인의 도덕적 불감증이 이신칭의 교리에서 유발되는 것이 아니냐?’하는 논쟁이다. 목회자뿐 아니라 장로들의 부정부패에 연관되어 구속되고 자살하는 사건을 접하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교회가 이신칭의의 교리를 잘못 가르쳤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구원의 은총과 탈락 균형 있게 가르치지 않는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지금 한국사회에서 기독교인 교역자와 장로들이 저지르는 범죄는 심각한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교직에서는 성직매매가 내밀히 거래되고 있으며 교회를 상대하는 법인과 유명 법조인의 수주활동은 다른 분야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죄를 지어도 예수 믿고 구원받는 다는 은혜를 값싸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개신교는 지난 500년 동안 신앙제일주의를 가지고 인간의 타락한 문제 때문에 탈락할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 나는 구원받았으니 앞으론 아무 문제가 없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는지도 모른다. 구원파 신앙은 이러한 구원의 값싼 문제를 충족시키고 하나님의 구원과 기독자로서의 윤리적 명령 성화의 명령사이에서 긴장을 잃어버리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구원의 일회성인 것이다. 이것이 칭의와 성화의 긴장관계 곧 믿음으로 인정받은 성도가 거룩한 삶 성결의 생활을 지속적으로 해나가야 하는 문제에 주목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것이 구원 얻는 백성의 성화적인 삶의 결단이 중요한 이유다. 값싼 은혜로 자위하기에는 성화적 삶을 살고 기독자의 완전을 위한 삶의 중요함을 가르쳐야 한다. 행위 없는 믿음은 성도들을 타락시킨다.
이것이 여러 연원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존 웨슬리가 신도회를 시작하던 1738년 회심 이후 모라비안과의 정적주의 논쟁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성공회 신부로서 즉각적인 변화를 거부하던 그가 즉각적인 변화 곧 복음의 내용을 통하여 회심을 경험한 것이었다. 1738년 5월 24일 저녁 모라비안의 정기 모임에 참석하였다가 성령의 감동으로 루터교의 핵심교리인 이신칭의를 설명하는 로마서 서문을 낭독하는 자리에서 큰 은혜를 받는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Salvation by Faith)이라는 주제는 그의 선행의인(Justification by Good Works)의 신학을 신앙의인화(Justification by Faith)로 바꾼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것은 웨슬리가 믿음을 이해하는 방식에서는 루터나 칼뱅과 동일한 과정을 밟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웨슬리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십자가의 은총아래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올더스게이트 체험이후 선행 의인화를 찾아야 하였다. 회심을 경험한 웨슬리는 1738년 그해 9월 중순 동료들과 함께 네덜란드를 거쳐서 독일 드레스덴에 있던 헤른후트 공동체를 방문한다. 그는 회심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사랑과 선행의 실천을 거부하는 모라비안들의 신앙제일주의(Solafideism)를 겪는다. 이른바 정숙주의(Stillness)라는 고집스러운 교리신학과 율법폐기론(Antinomianism)의 폐해를 직접 체험한 것이다. 후스의 복음주의 형제단이지만 진첸도르프 백작의 참여로 루터파 신앙으로 나간 모라비안들은 존 웨슬리가 신도회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특히 영국에 나와 있던 모라비안의 선교사 몰더와의 불꽃튀는 논쟁은 모라비안 정적주의(quietism)란 것이 믿음의 선행과 율법을 무시하는 집단이고 교리사상인 것을 깨닫게 하였다.
존 웨슬리는 말하기를 모라비안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무조건 루터를 따른다. 여기에는 선행도 율법도 계명도 없다고 비난하고 나선다. 누가 율법에 대하여 악하다 말하고 율법을 판단하는가? 이처럼 당시 모라비안의 신앙적 태도는 율법폐기론의 입장이었다. 이신득의와 이신성화의 과정에서 성화의 채찍질이 선행의 실천을 통한다는 요지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핵심사항은 성화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신앙이 온전해진다는 것이었다. 웨슬리는 1738년 10월 29일 야고보서를 읽으면서 성화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선행으로 신앙이 온전해진다는 성경적인 사실을 깨우친다. 1739년까지 웨슬리는 영적성장을 위한 자기 점검을 계속하면서 영성수련과 선행실천의 과제를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이 웨슬리를 감리교도라고 하는 이유이다. 몰더 선교사는 당시 영국인 미쎄스 터너에게 신앙은 성령의 선물인데 이것을 체험할 때까지 아무런 외적 선행을 하지 말고 ‘조용히 기다리라’고 당부한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정적주의 실체와 마주친 존 웨슬리는 이들이 조용히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만을 기다리는 이들임을 알게 되었다. 신앙의 확신은 언제나 선행의 실천을 동반한다. 이것이 선행의 수단을 무시하는 이들이 모라비안들이었다. 이들의 주장하는 정적주의란 신앙의 실천을 무시하고 것으로서 영적 제일주의로 나가자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칼뱅주의와의 논쟁이 있었다. 존 웨슬리에게는 옥스퍼드 시절 동료였던 부흥사 조지 휫필드와 깊은 우정이 있었다. 그런데 위일즈에서 활동하던 조지 휫필드는 칼뱅주의자가 되었다. 이들은 칼뱅의 후계자인 데오도어 베자의 주장대로 이중예정론에 집중하여 존 웨슬리의 자유의지론적인 입장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또한 휫필드 입장을 지지하는 감리교 부흥운동의 중요한 인사인 헌팅돈 공작부인도 가세하였다. 감리교 구원론의 핵심은 하나님의 은총에 응답하는 인간의 자유의지적 책임성이다. 여기에 반대하던 칼뱅주의자들은 성화의 과정에는 성령의 주도가 맞다고 하였다. 이 논쟁은 1741년부터 시작되었다. 칼뱅주의의 입장은 매우 강력하였다. 그러는 와중에 당시 웨슬리의 충직스러운 평신도 설교자였던 존 쎄닉과 조셉 험프리즈도 웨슬리를 공개적으로 공격하고감리교를 떠났다. 루터파 율법폐기론 논쟁처럼 칼뱅주의자들과 비참하게 헤어진 사건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웨슬리 구원론의 진수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감리교가 주장하는 신학적 교리적 원리가 제 2의 종교개혁을 가능케 하는 신학적 단초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가 변화하고 있고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 불의한 사회에서 구조적인 사회악이 만연한 근대사회에서 기독교 사회윤리가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신학은 여전히 전통적인 위력을 뿜으면서 이신칭의 교리를 주장하고 있었다.
9. 칭의와 성화
오늘날 우리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교회는 구원론의 도전을 쉼 없이 맞이하고 있다. 값싼 구원에 대한 교회의 영적 가치의 하락을 막을 방법이 없다. 현세구복적인 번영의 복음이 남발되고 있으며 전통 종교의 영향이 스며들어 교회를 어지럽히며 사회윤리를 외면하는 독선적 신앙이론은 반사회성을 강하게 띠고 있다. 오로지 죄씻음과 성령충만의 복음으로 기복신앙을 강조하는 심각한 현실인 것이다. 이러한 위기의 때를 맞은 우리 감리교는 성화실천의 교리를 재발견하여 구원론의 균형을 잡아야 할 절대적인 요청 앞에 서 있다. 이것이 우리시대 감리교 복음주의가 직면한 믿음으로 얻는 구원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실천이 균형 잡혀 보다 정의롭고 예언자적인 기독자의 완전을 보여주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존 웨슬리가 옥스퍼드대 크라이스트 칼리지에 입학한 해는 1720년 약관의 나이인 17세였다. 26세 때에는 링컨 칼리지 희랍어 조교수로 발령받았다. 그때가 1729년이었다. 그 시절 찰스 웨슬리도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였다. 부친사무엘 큰형 사무엘 웨슬리에 이어 부자 2대가 옥스퍼드를 입학한 것이다. 대학에 들어온 찰스 웨슬리가 대학동아리격인 홀리클럽을 만든 것도 이 무렵이었다. 당시 링컨대학의 조교수였던 존 웨슬리는 대학동아리인 홀리클럽의 지도교수가 된다. 엄격한 규율을 지키는 옥스퍼드의 모범생 클럽은 ‘Methodists’라고 소문이 났다. 성경읽기와 성만찬과 선행봉사도 하는 Methodists들은 홀리클럽 동아리 회원들이었다. 홀리한 생활을 원하여 동아리를 만들고 친교하는 공동체 홀리클럽은 정기적으로 모였고 대학주변의 가난한 가정들과 교도소 심방도 정기적으로 실행하였다. 감리신도회(Methodi-sts Society)라는 이름도 여기에 기인한 것이다.
1735년 그토록 가고 싶어 하던 미국 조지아주인디안 선교사로 파송 받아 식민지 장관 오글도프의 초청으로 미국을 갔다. 그때 대서양을 건너던 웨슬리 형제는 시몬즈호에서 모라비안들을 만났다. 그리고 깊은 감동을 받은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는 귀국한 후 이들과 어울렸다. 페터레인 신도회에서 모라비안들과 만난 웨슬리 형제는 그것을 계기로 찰스 웨슬리가 회심을 경험한다. 존도 회심을 경험한다. 모라비안의 헤른후트 공동체를 통하여 구체적인 친교를 경험한다. 속장이 있고 성경읽기를 하고 감리사가 있는 대륙경건주의의 요람이었다. 이들은 신학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해외선교를 원하고 있었다. 이미 아메리카 대륙으로 진출하던 모라비안들은 당시로서는 런던의 배편을 이용하고자 영국을 들어왔다. 성공회의 이신론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 성공회 신부 존 웨슬리가 복음형제단의 강력한 인도로 종교적 회심을 경험한 것이다. 성공회의 신부의 자존심을 무너뜨린 강력한 은혜를 받은 것이다. 감리교 구원론의 핵심은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었고 은총의 수단으로 받는 점진적인 변화였다. 상호 모순된 이러한 교리적배경은 성만찬과 기도에 더하여 회심이라는 극적인 순간을 체험하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이것을 존 웨슬리는 회개-의인- 성화- 기독자의 완전으로 이해하였다. 루터의 이신칭의에 이어 웨슬리 구원론의 핵심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성화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것이 기독자의 완전 교리이다.
1769년부터 1775년 사이 존 웨슬리는 성공회의 토플라디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논제로 하는 신학적 논쟁을 벌였다. 웨슬리는 인간의 자유는 성령의 역사에 참여하는 도덕적 책임의식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는 사랑의 율법이 요구하는 성화를 위한 선행을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감리회내부에서는 1770년-1778년 사이 헌팅돈 공작부인과 감리교연회록논쟁을 벌였다. 칼뱅주의자 헌팅돈 공작부인은 선행에 의한 구원을 가지고 논쟁을 시작하였다. 선행에 의한 구원은 가톨릭적인 표현으로서 인간인 선행의 공로로 구원받는다는 것으로 보지 않고 있었다. 기독교 구원의 궁극적인 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받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십자가의 공로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과 반대로 감리교연회록에는 인간의 선행(Good Work)과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구원은 완성되는 것이라 하였다. 성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 선행을 주장한 것이다. 여기에 헌팅돈 공작부인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그렇다면 존 웨슬리는 프로테스탄트가 아니라 가톨릭이라고 반격한 것이다.
결국 헌팅돈 공작부인은 칼뱅주의적이었다. 그리고 감리교연회를 탈퇴였다. 웨일즈 감리교회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웨일즈 장로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조지 휫필드는 예정론을 믿었고 알미니안적인 신학을 가지고 있던 존 웨슬리의 주장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이 감리교 성화사상과 기독자의 완전교리에 배어 있는 사상이다. 구원론의 시작은 선행은총이다. 이것은 성공회 종교강령 39개조에서 나온 것이다. 루터의 주장은 오로지 믿음이었지만 웨슬리는 믿음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었다. 이것이 감리교 신앙전통의 요체이다. 장로교 예정론을 피하여 나간 끝에 감리교는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고 율법적인 완전 곧 성화를 이루지위한 성도의 부단한 영적 노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신칭의를 넘어서서 이신성화로 이어지는 것이 감리교 기독자의 완전이다. 이것이 성경과 이성 전통과 체험을 바탕으로 깔고 전개되는 것이다. 성화의 첫째는 내면의 경건을 힘쓰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기도와 금식 성경읽기와 영성일기 쓰기가 포함되며 여기에 경건의 선행을 더 한다. 둘째 성도들 간의 상호협동적인 영성훈련(discpline)을 강조하고 서로 권면하며 격려하고 충고하고 상담한다. 동시에 집회참석을 강조한다. 셋째는 각종 악행을 금지하고 선행을 실천하며 자비의 선행에 힘쓴다. 가난한 자와 병든 자, 갇힌 자와 나그네 지체장애아와 소외된 자를 돌보고 사회 속에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한다. 이것이 사회적 성화의 근간을 이룬다. 웨슬리는 자비의 경건의 선행으로 기도와 금식 성경읽기와 성만찬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감리교는 복음의 능력은 자비의 선행을 통하여 사회적 성화의 실천이다. 웨슬리 성화교리는 개인적일 뿐 아니라 사회적이다. 기독교는 고독한 종교가 아니다. 사회적 종교이다. 경건과 사회개혁 인격적 성결과 사회적 성결이 동시적으로 추구되는 역동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감리교 신도회는 새로운 교파를 창도하는 것보다는 민족과 교회를 개혁하는 운동이라고 웨슬리는 선언하였다. 그러나 흥미로운 사실은 존 웨슬리는 왕권신수설을 지지하였고 보수적이었다. 사회를 구조적으로 파악하는 대신 기독교 복음의 인간 구원의 능력을 믿고 있었다. 회개와 중생의 복음은 성화를 통하여 기독자의 완전을 이른다고 믿었다.
그래서 감리교의 사회적 성화를 구체적으로 파악하여 박애운동으로 이해한 이들이 있었다. 1795년 존 웨슬리 사후 감리교총회는 안정화계획(Plan of Pacification)을 놓고 논쟁하면서 과연 성공회로 부터 독립하고 마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였다. 이때 감리교 총회는 3개 분파로 갈라져서 대립하고 있었다. 그중에 알렉산더 킬함(Alexander Kilham)이 이끌던 그룹에서는 감리교안정화계획은 당시 감리교 설교자들에게 기대이상의 많은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고 하였다. 현행 예배인도만 아니라 성만찬권도 부하는 것은 과하다는 것이었다. 1797년 총회에서 축출된 알렉산더 킬함은 5천명의 교인들을 데리고 감리교새연회(Methodist New Connextions)를 만들었다. 이들은 평신도 중심 체제로 가기를 바랐고 민주적인 교회운영을 원했다. 강력한 복음전도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교회를 만들어 나간 것이다. 1861년 감리교새연회에서 박애정신 사회적 성화를 주장하면 군대식 조직인 구세군을 만든 사람이 나왔다. 윌리암 부스와 캐더린 부스였다. 구세군(Salvation Ar-my)이 창설된 것이다. 복음의 열정이 식어버리고 사랑실천도 등한시되던 때였다. 중산층교회가 된 감리교는 기성교회를 흉내 내었고 사업적인 머리를 굴려서 교회경영은 부자들이 장악하였다. 예배가 형식화되고 성직자와 성가대의 가운은 화려해졌다. 의자와 방석은 푹신해지고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에서 소외당하기 시작하였고 체험적인 종교가 위력을 잃고 있었다.
10. 오순절성령은사주의 운동
이처럼 제도권 교회가 된 감리교는 교권에 함몰되면서 새로운 영적도전과 갈등이 일어났다. 곧 성결한 삶에 대한 강조점을 상실했다는 반성에서 출발한 성결복음운동은 감리교 신학의 대세를 형성하고 있던 자유주의 신학에 저항하여 일어난 것이기도 하였다. 예배의 생명력이 상실되고 신학교육은 체험보다는 지식습득에 매달리고 있었다. 교회 분위기 또한 세속화되었고 진보적인 신학도 등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인간의 원죄적 본질을 외면하고 도덕적인 책임을 강조하고 인간의 부패성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이른바 뉴 헤이븐 신학이 자리 잡은 것이다. 특히 성화 교리에 관하여 심각한 분열이 있었다. 성화를 내면의 변화가 아니라 외적인 도덕률의 준수 또는 사회적 책임으로 보면서 성결주의를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신학이라고 매도하였다. 급기야 1885년 시카고에서 제1회 성결총회가 열렸다. 그때 나온 결의문을 보면 온전한 성화는 다음의 세 요소를 포함한다. 먼저 육욕적인 마음의 철저한 소멸 즉 죄의 선천적인 원리의 전적인 제거, 둘째로 심령에 대한 완전한 사랑의 교통, 셋째는 성령의 내주하심이다. 이들의 주장은 한마디로 성결을 중생과 구분하여 성령세례를 통한 성결의 은혜체험을 강조한 것이다.
이 당시 미국 부흥운동사 가운데 피비 파머는 기독교 신앙정신은 사랑 안에서 온전함을 이루는 것이며 중생 이후에 일어나는 성결운동은 두 번째 축복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그는 성결로의 안내라는 잡지를 내면서 널리 홍보하였다. 찰스 피니도 이와 같은 전도메시지를 전파하고 있었다. 당시 크게 유행 하던 부흥회에서 회심의 경험과 결신, 간증, 회심의 가시적 표적은 결과적으로 성결운동으로 합류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성결운동의 파급력이었다. 성결운동은 여기에 더 나아가 신유와 전천년설을 아우르는 재림의 교리를 가지고 종말론적인 신앙정신을 강조하였다. 중생의 교리와 함께 강조된 성령세례는 두 번째 축복이라고 풀이한 성결교 운동이 마침내 1897년 만국성결연맹 및 기도동맹(International Holiness Union & Prayer league)을 결성한다. 이들은 감리교가 주장해온 중생과 성결의 복음 위에 신유와 전천년 재림사상을 덧입힌 것이다. 이들 가운데 찰스 카우만과 길보른이 하나님의 성서학원을 졸업한 후에 일본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동양선교회를 조직하였다. 이것이 일본 한국중국에 소개된 성결교회이다.
한국에는 1905년 김상준과 정빈이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하고 1907년 귀국하여 서울시청 뒤 무교동에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설립한다. 이것이 오늘날 졸로 6가에 있는 중앙성결교회가 된다. 그리고 1908년에 창설된 나사렛 교회가 생겼고 1914년 아주사 성령운동을 매개로하는 오순절운동을 일으킨 하나님의 성회가 탄생하게 된다. 모두가 감리교 계통 교회였다. 이렇게 이어져 나온 오순절성령은사운동은 감리교 웨슬리안 교리를 가지고 발화점으로 삼아 성화의 교리는 성결교회로 발전하였고 죄씻음과 성령충만의 교리는 나사렛교회로 나갔으며 성령은사주의운동은 발전하여 하나님의 성회로 발전하였다. 성령은사주의 운동으로서 신사도주의운동도 등장하였다. 신유를 포함하여 기름 부음 받는 증거를 내세우는 이것 역시 신유를 중시하는 집회이다. 중생의 교리가 죄씻음과 거듭남을 강조하고 성령충만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성결교회에서 두 번째 축복이라고 불렀던 교리이다. 이것이 이른 비와 늦은 비로 성령충만으로 각각 분화되면서 성령은사주의로 나간 것이다.
이처럼 종교개혁의 중심교리인 이신칭의는 이신성화로 이어지면서 성결의 교리가 강조되었고 이신성화는 내적으로는 영적 성숙과 외적으로는 기독교 사회윤리와 사회적 성화로 나갔다. 감리교는 이것을 절제운동으로 금주금연 도박거절 운동으로 나갔으며 사회복지활동과 연결하여 선한 사마리아운동과 사회적 순결운동(Social Purity)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사회봉사 박애운동도 결국은 복음적 열정과 사회적 성화의 균형 잡힌 교리사상의 핵심이었다. 웨슬리안 감리교 후예들이 갖는 공통적인 특징은 성결 생활의 강조다. 내적으로는 개인의 신앙체험을 강조하고 외적으로는 복음의 열정으로 사회적 성화로 발전하였다. 기독자의 완전교리 안에서 거룩한 삶을 세워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웨슬리안 감리교회 안에 영국에서는 사회적 성화운동이 박애주의 사랑실천으로 표현된 필안트로피(Philanthropy)운동 곧 박애운동을 표방하는 구세군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19C 미국에서는 감리교가 관료화되면서 성결교회로 발전하고 나사렛 교회까지 탄생한다. 이러한 감리교 사회적 성화 교리의 공유 현상은 존 웨슬리 복음주의 전도신학의 출발점이 성결의 교리인 것을 말해주는 것이며 오순절성령은사운동도 동일한 범주 내에 든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대 교단을 이룬 영국과 미국의 감리교회는 일부 중산층교회가 자유주의 신학을 펴고 정치 해방신학으로 발전해 나갔다.
지금도 감리교는 부르주아적이고 관료적이며 예배의 생명력이 사라지고 신학교육의 영적체험보다는 이지적인 신학으로 채워지고 있다. 교회의 풍토가 세속화 되었고 신학적 학문적 발달은 자유주의신학으로 나가게 되었다. 감리교는 체질적으로 연대주의가 강하여 중앙집권적 행태를 띠고 있으며 교권적이고 정치적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보수적인 교회로서 정체성을 상실하고 복음주의 신앙에 반하는 일들을 많이 벌이고 있다. 따라서 감리교 성화운동은 중산층지향성으로 다스리고 관료주의적 통제를 가하려고 한다. 그러나 글로벌 시대를 맞는 감리교는 성령충만의 복음을 전하면서 신비신앙을 강조하고 대중적 축복신앙을 전파하는 신사도운동이나 종말론적인 성령은사운동과 멀지 않다. 초기 복음운동의 비전과 열정을 상실한 교회가 본래적인 사명인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망각하고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복음전도의 소중한 가치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앞길을 막고 있는 문제점인 이러한 교회의 한계선을 돌파하려고 다짐해야 한다. 존 웨슬리의 개인적인 경건과 복음의 열정이 사라진 감리교는 열정적인 부흥운동과 차분한 기독교 교육의 원만한 합류를 이루지 못하면서 발생하였고 교권이 구축되면서 자유주의 신학으로 에큐메니칼 신학으로 기성교회의 타성을 쫒아간 교회는 감리교 영성의 권위를 상실한 것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실제 사회 속에 행동으로 신앙정신으로 성육신하여 나타나야 할 문제를 교권주의와 기득권 수호에 매몰되어 성령의 은사와 책무를 등한시한 결과이다.
11. 사회적 성화운동과 선교적 실천과제
감리교는 개인적 차원에서 성령체험을 강조한다. 거듭남의 성령역사를 통하여 결신한 감리교인은 중생의 복음으로 무장하고 성화의 초기단계를 거쳐 중급 고급과정으로 나아간다. 궁극적으로는 기독자의 완전에서 영화 곧 거룩한 삶의 완전을 맛보는 것을 바란다. 둘째 만인구원론을 믿는다. 요한 칼뱅의 이중예정론을 거부하며 하나님의 선행적 은총을 강조한다. 셋째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시한다. 넷째 감리교도는 교리를 곡조와 찬양으로 고백한다. 찰스 웨슬리는 평생 6천곡의 복음성가를 작곡하여 보급하면서 감리교를 찬양하는 교회로 만들었다. 다섯째 기독자의 완전을 추구한다. 이는 도덕적 완전이 아닌 기독교 사랑의 완전을 의미한다. 여섯째 사회적 관심을 실천에 옮긴다. 존 웨슬리는 생전에 고아 과부 노인 빈민 나그네 노동자들의 복지에 관심을 쏟았다. 감리교는 실제로 정기적으로 교도소개혁을 실천하였고 고아원을 세우고 노숙자들을 돌보고 긴급구호를 실천하였다. 특히 당시 세계적인 악독이었던 노예제도 폐지를 강력하게 원했고 절제운동을 통하여 신앙 있는 사회적 성결을 실천하려고 하였다. 금주, 금연, 도박 및 오락과 유흥을 철저히 절제하는 기독교절제운동을 하였고 도시선교도 활발하게 하였다. 런던 동부와 서부에 도시선교회를 두고 기독교사회복음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맨체스터 도시선교회 쉐필드 도시선교회 루턴 도시산업선교회 등이 매우 활발하게 움직였다.
또한 원시감리교회는 맨체스터와 레스터지역에서 영국 최초의 노동조합운동을 시작하는 모체가 되었다. 1900년 초 영국 노동당의 최초의 의원이 원시감리교회 교인이었다. 감리교가 관심을 기울인 분야는 어린이노동금지였다. 여성노동도 같은 과제였다. 8시간 노동엄수 문제와 도시빈민 고리대금업 문제도 심각한 사회적 문제였다. 감리교 입장은 급진적 사회변혁운동과 거리를 두었지만 도덕적 윤리적 입장에서 사회변혁을 위한노력은 멈추지 않았다. 감리교는 구빈원(Poor House, Workhouse)을 돕고 지방과 도시마다 시설을 세웠다. 1869년 감리교의 토마스 스티븐스 목사가 두 명의 사역자들과 힘을 합쳐서 두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런던의 마구간에서 시작한 사업이었다. ‘National Children’s Home’을 통하여 집 없는 아이들을 돌보았고 ‘Methodist Home’을 운영하여 청소년 상대 교육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1878년부터는 감리교는 ‘Sisterhood’라 불리는 어린이와 청소년 상대의 전문사역기관을 세워서 자원봉사활동 영역을 개척해 나갔다. 영국의 노동당 출신으로 수상을 지낸바있는 해롤드 윌슨은 영국 감리교의 기여는 칼 마르크스보다 더 크고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노동사회 발전에 기여하였다고 회고하였다.
감리교 사회개혁운동은 사회적 성화 사상에 기초한 것으로 점진적 사회변혁을 위한 균형 잡힌 입장에서 사회통합을 겨냥한 활동이었다. 일곱째 감리교 연대주의를 통하여 교회연합정신을 강조한다. 감리교는 영국 사회에서 민족과 교회를 위한 비국교도들의 일치된 연대의식을 지켜나가면서 민족이 하나 되고 교회가 하나 되어 국가통합의 초석이 되는 방향을 위해 일하였다. 영국의 감리교는 복음전도운동을 하면서 사회복지 활동으로 박애운동과 경건운동 도덕개혁운동을 동시에 일으켰다. 특히 감리교 입장은 신앙 우선주의정책을 가지고 정치개혁 대신 복음적이고 윤리적인 입장에서 사회적 성화를 이루자는 것이었다. 특히 노동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영국 자유당과 노동당의 모체로서 감리교는 산업사회의 노동조건개선과 노동환경 조성에 참여하였고 고용조건 협상으로 하면서 실질적인 개혁을 일구어 냈다. 당시 노동운동에 참여한 감리교계통의 조직에는 노동조합(The Trade Union Movement)과 함께 임금개혁을 위한 단결운동 노동친우회(Friendly society), 절제회(Temperance Society) 등 성인교육분야가 개발되었다. 원시감리교회는 이러한 흐름에서 노동사회의 변혁과 봉사활동의 모체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활동의 밑거름을 가지고 영국 노동당이 탄생한 것이다.
감리교 사회 성화 운동은 웨슬리의 보수적인 입장에서 선회하여 진보적 사회운동으로 진화해 나갔다. 감리교도 중산층 교회가 되었고 평신도엘리트들의 진출로 성격이 달라지고 있었다. 엘리트들의 교회출석도 증가하였다. 특히 감리교중앙회관은 영국 전역에 걸쳐 100개가 넘었다. 중앙회관 사업은 지역사회 주민을 위한 레저, 스포츠, 연극과 음악공연 활동을 포괄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지역사회에서 사회순결운동(Wesleyan Committee for Soc-ial Purity)을 전개하였고 영국 비국교도를 대변하는 양심운동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889년 웨스트런던미션의 감리사 휴 프라이스 휴즈는 기독교선교활동을 사회복음신학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주장하기를 기독교선교는 궁극적으로 인간 활동에 개입하고 참여하여 교회의 공공성을 담보하자는 것이었다. 즉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면서 세속 가운데 현존하는 사회적 종교가 되기를 바랐다. 이것은 감리교가 보편교회로서의 자각을 가지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자는 것이었다. 교회 밖에도 사회적 책임을 가지고 살자는 것이었다. 감리교의 선교적 책임은 인간영혼 구원과 사회성화의 실천이었다. 이것을 기독교사회복음(Social Christianity)운동이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개인을 사회 속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성육신하셨고 이것을 이어받은 그리스도인은 인간사회의 정의구현과 사랑의 기초위에 새 사회를 재건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감리교 선교는 사회선교를 통하여 구조악과 대치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 이상윤 목사 프로필 ]
이상윤 목사는 강원도 영월 태생으로 원주고와 감신대를 나왔고, 1979년 감신대 대학원에서 역사신학을 전공하여 석사를 받았습니다. 1978년 서울회원교회를 담임하다가 충북 진천 성대리교회로 갔습니다. 농촌목회를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1981년 중부연회에서 안수를 받고 그해 5월 동대문교회 부목사로 부임하여 일하다가 뜻한바 있어 영국 버밍엄 셀리옥 유학중에 관심 있게 배운 것은 영국감리교회 본부 사업과 영국산업혁명의 본거지인 버밍엄과 맨체스터 그리고 영국 산업선교의 본산지인 루톤산업선교대학이었습니다. 당시 영국감리교회의 활동반경은 에큐메니칼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리서치를 한 것은 16세기 명말청초 예수회 신부로 중국에 들어간 이탈리칼리지(Selly Oak Colleges)로 유학을 갔습니다. 장학금은 영국감리교회 해외선교훈련기금(OTF)이었습니다. 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를 연구한 것입니다. 동서문명의 교섭이라는 중요한 과제를 안고 명조의 천문지리 수학 역학에 대한 괄목할만한 공적을 남긴 마테오 리치는 현대선교의 모형을 이룬 현지화전략의 백미였습니다. 귀국 후 대한성서공회 청년부장으로 일하였습니다. 1988년-1989년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장학생으로 인디아 방갈루루 연합신학대학(United Theological College)로 다시 유학을 가서 로베르트 드 노빌리 신부의 현지화선교를 연구하였으며 인디아불가촉천민해방신학(Indian Dalit Liberation Theology)으로 석사과정을 마치고 귀국하였습니다. 금란교회 부목사를 하다가 남양주지방에 신영감리교회를 개척하고 담임하였으며, 1995년부터는 남양주지방 감리사를 하였습니다. 1996년 12월 기감 본부 홍보출판국 월간 기독교세계 부장을 하였으며 이어서 교육국과 선교국 부장도 지냈습니다. 2001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에 선교국 국장으로 취임하여 일하다가 2004년 한국기독교사회봉사회 총무로 일하였습니다. 7년간 일하다가 2009년에는 스위스 제네바의 세계교회협의회(WCC) 재정개발국(IMD) 컨설턴트로 부름을 받아서 4년간을 일하다가 지난 2013년 10차 부산총회를 끝으로 귀국하였습니다. 현재는 KMC전략연구소 소장으로 있습니다. 1984년 월간 기독교사상에 시무언 이용도 목사 연구를 연재하였고, 월간 목회에 8년간 목회관련 연구기사를 썼으며 월간 목회와 신학에도 신도시 개발지역의 교회를 취재하는 연재를 4년간 하였습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