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푸트대학교 창작이론 강의 Frankfurter Vorlesungen
하인리히 뵐 Heinrich Boll
안인길 역
나이 들면서 나는 지금껏 너무 급한 나머지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미심쩍은 일을 하나 확신하게 되었다. 내가 독자로 생각하는 비평가는 분류하고 표현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라도 빠뜨리면 그는 작가가 생각한 바를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면 이미 말한 바 있는 정의의 미로가 생긴다. 이 미로는 모욕과 자극 그리고 항의와 갖가지 바보짓으로 이미 있던 미로보다 더 애매해진다. 그러면 최소의 가정도 요구할 수 없을 게 분명하다. 작가가 전달하기 위해 골라 낸 시각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찾아내는 걸 요구할 수 없게 된다. 더 짧게 말하면 비교적 사실적인 장편 소설에는 복잡한 마력이 있어서 독자와 비평가는 작가가 선택한 시각에 맞춘 임의의 전문적인 희극성을 알지 못하면, 본의 아니게 희극 배우로 변하고 만다.
다른 경우를 말해 보자. 라디오 드라마에서 굴뚝청소부가 떨어졌다. 어질고 순진한 한 여자 청취자가 금세 앰뷸런스를 부를 생각을 할 수 있다. 어디로? 라고 물으면 우리는 방송국으로 가라고 말한다. 이 경우 이 여자 청취자가 방송국 회장보다 더 미학적으로 정확하다. 회장은 금세 방송국장 그 다음으로 방송국 데스크에게 전화를 걸어 이의를 제기한다. 내가 이따금 무얼 갑자기 깨달을 때가 있다는 걸 반복해 말한다. 음악 용어로 가볍고 진지한 걸 동시에 뜻하는 말을 가정할 수 없을까? 진지하고 명랑함은 히쭉 웃는 바보짓이나 유머 또는 풍자가 아니며 그 범주가 다르다. 풍자는 결코 조소하는 것이 아니다. 가정을 만들어 내는 것은 작가가 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작가와 같은 언어로 가르치고 배우고 분석하고 비평하는 사람의 몫이다. 간단히 말하면 가정하면서 써 놓은 글을 취급하는 사람들이 할 일이다.
이 도시에서 테오도 W. 아도르노가 대단한 말을 하나 했다.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쓸 수 없다”, 나는 이 말을 바꾸어 표현하겠다. 아우슈비츠 이후 숨쉴 수 없고 먹을 수 없고 사랑하지 못하고 책을 읽을 수 없다. 그러나 처음으로 숨을 쉬고 담배에 불을 붙인 사람은 살아남기로 결정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먹고, 사랑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이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여러분께 말하고 있다. 나는 기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믿음직한 지역, 즉 언어의 지역을 생각했다.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결혼도 했고 담배도 피웠다. 그리고 체류를 연장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그는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주머니에 폭탄을 넣고 살아간다. 우리는 모두 주머니에 성냥과 담배와 나란히 폭탄을 가지고 있다. 폭탄 때문에 시간은 지속하는 걸 거의 막아 버리는 다른 차원을 얻게 되었다. 진지하고 가벼움이 중요하다. 그 밖에 남을 건 하나도 없다. 뿌리를 내린 것도 전혀 없다. 발로 진득하게 땅을 밟을 수도 없다.
잃어버린 고향, 잃어 간 관계들, 믿음이 없는 지역에 대해서 앞으로 또 한 시간 말하겠다. 왜냐하면 인간주의와 사회 그리고 연결됨은 고향이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향이란 이름은 이웃 사람과 믿음을 포함하는 말이다. 이것이 없으면 사회의 기본 단위인 가정은 절대적이며 독이 묻은 요새가 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비전문가를 배척하는 동호회나 살롱 마담 모임으로 밀려나게 된다. 동호회, 살롱 마담 모임 그리고 폐쇄된 사회와 비밀 결사는 전체주의 사회의 현상이다.
이것들은 내게 언짢게도 1933년 이후의 첫 몇 년을 기억나게 한다. 당시에도 있었던 동호회와 그룹은 개인적이고 비밀투성이였다. 이것들은 대개 아마추어로 안전 장치가 엉성했다. 이미 간첩과 정보부원과 교제하고 함께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간첩들이 빨리 끼어들었다. 국가 조직에 끼지 않은 사람이 두셋 청소년들과 축구를 하면 그 후 체포와 신문이 따랐다. 가끔 경고로 끝났지만 더 나쁜 결과를 낳기도 했다. 독재자는 우발적인 일을 벌이기도 했다.
오늘을 보자. 연구소나 대학교, 출판사, 그룹, 방송국으로 위장하지 않고 이것들의 주변과 그 안에 형성된 학술과 비밀결사가 바로 비공개의 권력이다. 하나하나의 순수한 전술부대만 있지 작전은 아무데도 없다. 그렇다면 적전은 숨어서 이루어지는가? 이 경우 자유로운 문학이 이런 전술 단위 부대들 사이에 생긴 혼란 속에 스며든다. 문학은 그 자유로움 때문에 측량할 수 없을 정도의 기대와 주목의 대상이 된다. 문학은 종교와 직업 조합을 대신할 수 없다. 비정상적인 전선의 뒤바뀜과 위치 변화가 생긴다. 왜냐하면 오해의 깊은 골을 넘어서 우정을 맺으며 또 적을 안다는 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학술이 아니라 종교 테마를 선택한 작가로서는 틀린 걸 찾아내는 게 중요하지 않다. 앞으로는 점점 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세계에서 투쟁하는 교회를 위해서다. 이에 따른 훈장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우리나라에 사실주의에 대해 이상한 개념이 지배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일 전짜리 동전처럼 무미건조하고 쉬운 단어가 된 것 같다. 아이들은 누구나 늦어도 첫 번째 등교하는 날 언어의 믿음이 가는 나라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신이란 단어도 있는 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정치는 말로 하는 것이다. 학술도 말로 표현된다. 종교도 말로 알린다. 그러나 이 말 중의 하나도 가까운 데 있는 동전 투입구에 맞게 간단하고 쉽지 않다. 대중을 위해 대량으로 인쇄된 글이 말을 다듬어서 통용할 목적이었지만 훼손되어 무미건조할 위험에 들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수백만 권의 포켓북이 팔렸다. 이 시대 문학의 거의 모두가 이런 방법으로 인기 있게 되었다. 또 몇 년 후에는 전문서적도 그렇게 될 것이다. 누구나 주머니에 가지고 있는 책은 기실 선물 받은 것이다. 가장 값싼 시간당 임금으로 살 수 있는 책이다. 하다못해 의료보험 처방도 한 번에 오십 페니히의 수수료를 낸다. 이 돈은 자가가 포켓북 한 권에 대해 받는 원고료의 8배에 해당한다. 대중 문학은 대량 매체를 필요로 한다. 대중 매체에 맞춰 미학적 가정을 쓴다. 대학교가 대량 인구의 연구소로서 대량으로 늘어날 것이다. 나는 작가로서 대량 출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반대하던가 찬성하지 않는 사람이 만든 해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로서는 가정이 있는 텍스트에 대해 가정도 모르면서 해석하는 권리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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