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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547
10월13일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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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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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6Wx4In8qr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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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호박을 바라보며>
여러 농작물을 재배하는 가운데, 가장 신기하게 바라보게 되는 작물은 호박입니다. 봄에 1000원쯤 하는 모종 몇 개를 둔덕에 심어놓고, 거름을 듬뿍 줍니다. 완전히 잊어먹고 있었는데, 가을이 오면 온 둔덕이 호박넝쿨과 호박잎 천지로 변합니다. 여기 저기 묵직하고 탐스런 호박들이 숨어있습니다. 어떤 녀석들은 얼마나 무거운지 혼자서 들기도 힘들 지경입니다. 탐스럽게 잘 익은 녀석들 때문에 올 가을축제 때는 호박죽을 제대로 쑤어 팔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는 올 호박 농사가 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호박과실파리라는 녀석들 때문입니다. 호박재배 농가의 피해는 심각합니다. 더 괴로운 것은 퇴치를 위한 뾰족한 대책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렇게 잘 자란 호박의 겉모양은 정말 멀쩡합니다. 오랜 나날 자식 키우는 심정으로 잘 키웠다가 설레는 마음으로 수확합니다. 시장에 내다 팔거나, 호박 즙을 생산하는 건강원에 납품합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항의가 빗발칩니다. 물건 도로 가져가라고.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으면 어떻게 이따위 호박을 팔 수 있냐는 말을 들으며 호박을 거두어 와야 합니다. 호박을 잘라보면 호박과실파리 유층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호박과실파리 녀석들이 애호박 시절, 애호박 안에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호박 내면에 자리 잡은 알들은 애벌레가 될 때까지 그 안에서 성장을 거듭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이르십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예수님 시대 바리사이들, 불행하게도 그들은 호박과실파리들로부터 철저하게 유린된 썩은 호박과 같았습니다. 겉은 멀쩡했습니다. 기도도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이 봉헌하는 헌금의 액수도 대단했습니다. 봉사활동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예수님으로부터 심한 질타를 받았을까요? 그들은 철저하게도 이중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삶이 가식적이었습니다. 위선적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잘 보이기보다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바빴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그럴듯한 모습으로 비쳐졌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사라진 곳에서는 호박씨를 깠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귀신같이 꿰뚫어보시던 예수님이셨기에 그토록 철저하게도 이중적인 인간들,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사악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간과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평생에 걸쳐 노력해야할 것이 바로 위선과 이중성의 극복입니다. 사람보다는 하느님 앞에 똑바로 서기입니다. 언행일치, 기도와 삶의 조화, 신앙과 생활의 통합, 전례와 삶의 일치입니다.
미사 가운데서는 천사가 따로 없습니다. 그러나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는 말과 함께 다른 사람으로 돌변하게 될 때, 우리 역시 예수님의 신랄한 질책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기도를 그렇게 열심히 바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시간이 ‘땡’하기 무섭게 주변사람들 괴롭히고 족치는 사람들, 예수님의 무서운 질책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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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바리사이의 초대>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9lMko1FcER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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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어떤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를 받으십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이스라엘에서 일종의 관습법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예수님을 죄인으로 지목하는 이들이 바로 죄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우리 안에 초대합니다. 말씀과 성체로 우리는 예수님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시고도 바리사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하나의 인격체로 초대한 것이 아니라 지식이나 율법으로 초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지식이나 율법은 인격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우리 집에 초대해야 구원을 받는데 우리는 성체를 영하면서도 머리로만 초대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바리사이의 초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개신교 목사님 중의 한 분인 유기성 목사가 있습니다. 그분은 현재 ‘영성일기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저녁에 하루를 돌아보며 주님과 진정으로 함께하지 못했던 때를 되돌아보고 뉘우치는 일기를 쓰는 것입니다. 이런 운동을 펼치게 된 이유는 대부분 신도가 예수님을 바리사이처럼 초대하기에 삶의 변화가 없음을 본인 스스로 체험한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기성 목사는 목사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나서 어렸을 때부터 목사가 되는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물론 교회 내에서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모습을 많이 보면서 자랐습니다. 그렇게 목사가 되었고 군목으로 훈련을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훈련 도중 다리에 중상을 입고 의사는 다리 절단 소견을 내렸습니다. 이때 그가 찾은 것은 하느님 아버지가 아닌 육체의 아버지였습니다. 수원에서 사목하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좀 해달라고 보는 사람들에게 매달렸습니다. 다리 절단 수술은 바로 다음 날이었습니다.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처지에서야 비로소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기억해 낼 수 있었습니다. 다리를 고쳐달라고 애절하게 기도하던 중 지난날의 죄를 깨닫고 눈물로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군 선교를 위해 군목으로 간다는 마음보다 마음속 진정한 동기는 사병보다 장교가 편하다는 마음에서였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군목의 특권으로 목사안수도 일찍 받고 유학도 다녀와 큰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는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리를 고쳐달라는 기도가 점점 “이 오른쪽 다리도 주님께 바치겠습니다”라는 기도로 바뀌었습니다. 또 “이제 진짜 주님의 종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이 가라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겠습니다”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때 그분은 ‘내가 바뀌고 있구나!’를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음 날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두 번의 수술을 더 거쳐 다리가 완전히 치유되었습니다.
사람의 변화는 아는 것만으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십계명만으로 모두가 구원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으로만 이뤄집니다. 우리에게 이 시간이 성찬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인격적으로 그분을 우리 집에 초대합니다.
하지만 만약 내가 이웃의 잘못을 심판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주님을 인격적으로 초대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초대했다면 나의 죄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남의 죄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처럼 머리로만 초대했다면 자신의 죄는 보지 못하고 그 율법으로 이웃을 심판합니다.
‘자비의 예수님’을 환시로 보고 그림도 그렸던 성녀 파우스티나는 처음 수녀원에 들어가기 위해 여기저기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아무 곳에서도 그녀를 받아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비의 성모 수녀회’에 갔을 때 원장 수녀님만은 달랐습니다.
“이 집의 주인님께 가서 자매님을 받아들이시겠느냐고 여쭈어보십시오.”
그녀는 곧바로 성당으로 가서 기도하였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받아들인다. 너는 내 마음 안에 있다.”
원장 수녀님은 “주님께서 당신을 받아주셨나요?”라고 물었고 그녀가 “예”라고 대답하자, 곧 “주님께서 받아주신다면 나 역시 받아들입니다” 하며 그녀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성녀가 되었습니다. 다른 수도회 원장 수녀들은 파우스티나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수녀원에 예수님을 실제적으로는 초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우리 안에 초대했나요, 아니면 바리사이처럼 초대했나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않으면 삶의 변화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구원도 불가능합니다. 나를 바꾸는 것은 마음이지 머리가 아닙니다. 머리로 초대하지 말고 마음으로 초대합시다. 그러면 우리 마음 안에서 ‘탐욕과 악의’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웃을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해지고 자신의 변화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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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11,37-41: 겉은 깨끗이 닦아도 속에는 착취와 사악이 가득 차...
예수님과 바리사이 사이에 논쟁이 일어난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겉으로는 깨끗해 보일지 모르지만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시면서 잔과 접시의 겉과 속을 닦는 비유를 말씀하신다. ‘겉’과 ‘속’을 만드신 하느님께서는 겉과 속이 다 깨끗하기를 바라신다. 우리의 겉이 깨끗하려면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이 순결해야 하는데, 이 내용물은 바로 자선과 자비와 하느님의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신다. 거기 모인 이들이 좀 더 고결한 사람들로 만드시려고 그 순간을 이용하신다. 바리사이가 그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38절)고 한다. 주님의 행동이 보통 사람과는 다른 특별한 것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의인이요 예언자라고 하는 자가 전통적 습관을 따르지 않은 것을 보고 놀랐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39절) 예수님께서는 식탁에 놓인 잔과 접시를 들어 비유로 말씀하셨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육신의 더러움뿐 아니라, 마음에 감추어진 것까지 씻어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이는 육체를 지으신 분이 영혼도 지으셨다는 뜻이다. 겉과 속이 다 하느님의 작품이기 때문에 씻을 때는 똑같이 씻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육신의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내는 방법을 예수님께서는 알려주셨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자선을 통해 깨끗해질 수 있다. 즉 자비가 우리를 깨끗하게 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깨끗하게 한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깨끗하게 되었다.”(요한 15,3)고 하셨다. 또한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 주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 준다.”(토빗 12,9)고 했으며, “네 곳간에 자선을 쌓아 두어라. 그것이 너를 온갖 재앙에서 구해 주리라.”(집회 29,12)고도 하셨다.
자비로운 행위는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나그네에게 잠자리를, 도망자를 숨겨주는 것만이 자선이 아니다. 병든 이와 갇힌 이를 찾아가고, 포로를 풀어 주고, 지친 사람의 짐을 져 주고, 눈먼 사람을 인도하고, 슬퍼하는 이를 위로하고, 병든 사람을 고쳐주고, 길 잃은 이에게 바른 길을 일러 주고, 조언을 해주는 것도, 필요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도 자선이다.
용서하는 것도 자선이고 훈육하여 바로 잡아주는 것도 자선이다.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의 죄를 용서하고 그가 용서받기를 기도한다고 하면 그는 자선을 행하는 사람이다. 용서하고 기도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잘못한 자를 꾸짖고 적절한 벌과 함께 그를 바로잡아 줌으로써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자선에는 종류가 많다. 자선을 행하면 우리 죄를 용서받는 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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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노란 색안경을 끼면 세상이 다 노랗게 보이고, 파란 색안경을 끼면 세상이 다 파랗게 보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마음의 색안경을 하나씩 끼고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성악을 하는 제 친구는 음악 이야기 하는 것을 무척 좋아하고, 성악과 관련된 것에 무척 예민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목소리, 가수들의 노랫소리 등에 다른 사람보다 더욱 관심을 두고 듣습니다. ‘음악’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식탁 위에 놓인 음식을 바라보는 바리사이의 시선과 예수님의 시선은 달랐습니다. 이는 바리사이가 낀 색안경과 예수님께서 끼신 색안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는 ‘율법’이라는 색안경을 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율법을 지키느냐, 그렇지 않느냐?’입니다. 율법을 지키면 선이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악입니다. 그리하여 식사 자리에서 율법에 따라 손을 씻느냐의 여부에만 관심을 둡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예수님을 판단합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사랑’이라는 색안경을 끼셨습니다. 식탁에 그릇과 음식이 놓일 때 그분께서는 그 음식들을 보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떠올리십니다. 마치 자식을 군대에 보낸 어머니가 맛있는 음식을 볼 때마다 자식을 떠올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음식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우리는 어떤 색안경을 끼고 살고 있습니까? 성찬의 식탁에 올려진 성체와 성혈을 사랑이라는 색안경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우리의 제사는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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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을 꾸짖으시다.>
“예수님께서 다 말씀하시자,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루카 11,37-38)
‘어떤 바리사이’는 예수님을 자기들과 같은 부류의 ‘랍비’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초대한 것인데, 예수님께서 식사 전의 정결 예식을 행하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그 정결 예식은 단순히 손을 씻는 일이 아니라 상당히 복잡한 예식이었습니다. 여기서 ‘놀랐다.’라는 말은, 자기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아서 놀랐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정결 예식을 행하지 않으신 것은 아마도 의도적인 일이었을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꾸짖으시려고, 또 ‘참된 깨끗함’을 가르치시려고.)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39-41)
사람들은 바리사이들의 겉모습만 보고 그들이 ‘거룩한 사람, 청빈한 사람’인 줄로만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탐욕과 사악’을 꿰뚫어보셨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사람들도 아니었고, ‘청빈한’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힘없는 사람들을 착취해서 재산을 모으는 탐욕스러운 사람들이었고, 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부르신 것은, 그들이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것만 중요시하고, 하느님의 심판은 생각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겉모습만 보고 존경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인정을 받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런 것에 취해 있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것입니다.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라는 말씀은, “하느님은 사람들의 마음속과 사람들이 숨어서 몰래 하는 일도 보시는 분이다.”라는 가르침입니다.(마태 6,4.6.18) (사람들은 속일 수 있어도 하느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라는 말씀에서 ‘속에 담긴 것’은 힘없는 사람들을 착취해서 모은 재물을 가리킵니다. “자선을 베풀어라.”라는 말씀은 그 재물을 힘없는 사람들에게 돌려주라는 뜻입니다. 이 경우에 ‘자선’은 선행이 아니라 보속입니다. 부당하게 모은 재물을 돌려주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말로만 회개한다고 하면, 그 회개는 ‘거짓 회개’입니다. 잘못한 일들을 바로잡는 일까지 해야 진짜 회개입니다. (빼앗은 재물은 돌려줄 수 있지만, 만일에 남의 목숨을 빼앗았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경우에는 평생 보속을 해야 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기 때문에 연옥에 가서 보속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만드실 때의 원래 상태로 회복될 것이라는 뜻인데, 모든 것을 원래 상태로 되돌려 놓으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원래 상태 그대로 깨끗해진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그게 안 되었다면, 연옥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뒤의 20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겉으로만 거룩하고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한” 자들을 직접적으로 꾸짖으신 말씀이 나옵니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욱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루카 20,47)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다는 말씀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착취한다는 뜻인데, 그 당시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신앙상담이나 법률 자문 같은 일을 하면서 많은 돈을 갈취하는 것을 꾸짖는 말씀입니다.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는 말씀은, 속에 있는 탐욕과 사악을 감추고 겉으로만 거룩한 척 하는 것을 비판하는 말씀입니다. 그런 자들은 더욱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은, 그런 자들의 행위는 이웃 사랑을 거스르는 죄이고, 또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이기 때문에 그만큼 더 엄한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성직자들은)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도와주는 봉사자입니다. 봉사는 원래 대가 없이 하는 일입니다. 겉으로는 봉사하는 척 하면서 속으로는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은 교회를 ‘강도들의 소굴’로 만드는 죄를 짓는 일이고(루카 19,46),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우리는 세속에서도 그런 ‘위선’을 자주 봅니다. ‘정의’를 외치면서 길거리에서 시위를 하는 사람들의 경우, 그들 가운데에는 분명히 가난하고 힘없고 약한 위치에 있어서 ‘분배 정의’를 요구하는 시위를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런 낮은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면서 자기 ‘밥그릇’만 챙기려는 이기심과 탐욕으로 말로만 정의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길거리에서 시위를 할 수밖에 없는 진짜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그런 위선자들 때문에 더 피해를 보게 됩니다. 신앙인은 그런 위선을 물리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신앙인 자신이 먼저 위선을 버리고,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칭찬하고 존경하고 높이 평가해 주는 것은 누구에게나 기분 좋은 일이지만, 신앙생활의 관점에서는 그런 일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루카 16,15)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것은 ‘위선’이라는 죄를 짓는 것이고,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기를 바라고, 또 그것을 좋아하는 것은 ‘교만’이라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위선과 교만을 버리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됩니다. 하느님은 위선과 교만을 몹시 싫어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안에서 생기는 위선과 교만을 없애기 위해서 평생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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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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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경연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저도 좋아했던 프로입니다. ‘나는 가수다, 불후의 명곡, 히든 싱어, 복면 가왕, 팬텀 싱어’와 같은 프로입니다. 가창력은 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드러나지 않았던 숨어 있는 실력자들의 노래를 듣는 프로입니다. 오직 실력만으로 평가받는 프로입니다. 기존의 방식으로 가수가 되지 못했던 사람들의 수준 높은 노래를 듣는 것은 즐거움이고, 신선함이었습니다. ‘나는 가수다’는 기존의 가수들이 다른 가수들의 노래를 부르면서 가창력을 인정받는 프로였습니다. 노래 경연 프로그램의 새로운 시작을 알렸습니다. ‘불후의 명곡’은 드러나지 않았던 실력자들이 기존의 노래를 재해석해서 불렀습니다. 많은 사랑을 받던 프로입니다. ‘히든 싱어’는 말 그대로 숨겨진 보물 같은 가수를 찾아내는 프로입니다. ‘복면 가왕’은 시청자들이 오직 가수의 노래만 듣고 평가했던 프로입니다. ‘팬텀 싱어’는 평소에 잘 들을 수 없었던 뮤지컬 배우들의 수준 높은 노래를 들었던 프로입니다.
본당에는 공적인 조직이 있습니다. 사목협의회를 중심으로 여러 분과가 있습니다. 분과에는 분과의 성격에 맞는 단체들이 있습니다. 전례, 구역, 교육, 사회사목, 선교, 청소년에 소속된 단체들이 많습니다. 본당의 사목은 전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전례분과에 속한 단체들이 많습니다. 직원회의를 통해서 수도자와 사무실과 소통하기도 합니다. 사목회의를 통해서 사목을 기획하고 조정합니다. 요즘은 코로나19의 상황이라 모임과 소통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선행을 베풀거나, 도움을 주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대부분 말씀이 별로 없고, 행동도 요란하지 않습니다. 소년가장에게 장학금을 주던 분도 있었고, 독거노인에게 추석이나 설날이면 떡을 나눠주던 분도 있었습니다. 본당의 행사에 특히 청소년들의 행사에 남모르게 후원금을 주시던 분도 있었습니다. 형편이 어려운 분들의 치아를 무료로 치료해 주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마을의 정자에 있던 커다란 느티나무처럼 말은 없지만 힘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시는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을 알아보고, 이런 분들과 함께하는 것은 사제의 기쁨이며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신문사에도 이런 분들이 계십니다. 지금은 코로나19로 함께 하시지 못하지만 오랫동안 구독료 봉투에 우표를 붙여 주시는 어르신들이 있습니다. 단순한 일이지만 시간이 필요한 일입니다. 어르신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식사를 하였습니다. 코로나19가 지나가면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고 싶습니다. 연말이면 신문사를 위해서 연금을 보내주시는 어르신도 있습니다. 신문에 좋은 글도 보내주시는 어르신입니다. 신문사의 크고 작은 일에 맥가이버처럼 도와주시는 분도 있습니다. 창틀도 고쳐 주시고, 지붕도 고쳐 주시고, 화장실도 고쳐 주시고, 냉장고에 얼음도 나오게 해 주셨습니다. 매주 본당 미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시고, 어려운 일은 해결해 주시는 본당 신부님도 있습니다. 규모가 크지 않은 한인 공동체에도 드러나지 않은 곳에서 사제들 도와주시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과 같은 분입니다. 예수님의 곁에서 도움을 주던 마리아, 수산나, 막달레나와 같은 분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믿음으로 의로워지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교회는 제도(Institution)와 선포(Kerygma)가 같이 있어야 하느님백성 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제도만 있고 선포가 없으면 빈 그릇이 될 것입니다. 선포만 있고 제도가 없으면 분열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율법이라는 ‘틀’에 갇혀있는 율법학자들에게 ‘선포’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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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난 묵상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창덕궁 앞에 ‘돈화문 국악당’이 문을 열었습니다. 교구청 신부님들과 함께 공연을 보았습니다. 황병기 선생님께서 해설을 해 주셨고, 국악 중에서 정악을 감상하였습니다. 현대음악에 익숙해서인지 국악의 맛을 음미하기는 어려웠지만 우리 것의 소중함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황병기 선생님은 ‘음악은 시대와 사회의 산물’이라는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정악은 왕실과 양반들에 의해서 주도된 음악이며, 민속악은 일반 대중에 의해서 주도된 음악이라고 합니다.
정악은 대부분 시조를 연주하거나 노래하였다고 합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의 정체성을 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서점에서 책을 찾을 때는 일정한 기준이 있습니다. 책을 분류하는 원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전산화 되어 있어서 책의 이름, 저자만 입력하면 재고가 몇 권인지, 어느 서점에 있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책을 보관하고, 분류하는 시스템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서점이라는 하드웨어는 책 분류라는 소프트웨어가 있기에 우리가 쉽게 책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34년 만에 성당 후배를 만났습니다. 한국 가톨릭의 기록물 관리 시스템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명동에 있는 것을 알았고, 서울교구의 문서 관리 및 보관 시스템에 대해 알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 협의회, 전국의 각 교구와 본당, 교회 산하 단체의 문서와 기록물이 하나로 통합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서 바티칸의 기록물 보관 시스템과 비교하거나 연계하면 더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였습니다.
후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금은 부끄러웠습니다. 서울 교구는 지난 30년 동안 본당 신축이라는 하드웨어를 구축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교구와 성당에서 발생하는 각종 기록물과 문서를 통합하는 시스템 구축에는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교구에서는 기록물과 유물을 보관하는 통합 시스템을 개발한다고 하니 좋은 결과를 기대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겉으로는 친절한척하고, 웃으면서 뒤로는 남을 험담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지만 남을 돕는데 인색한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욕심 때문에 형제와 다투는 사람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참된 신앙생활을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믿음으로 의로워지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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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밥 먹기 전에>
루카 11,37-41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을 꾸짖으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다 말씀하시자,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밥 먹기 전에>
그래
밥 먹기 전에
손을 꼭 씻어야하지
나를 살리는 고마운 밥
어찌 더러운 손으로
대할 수 있겠는가
혹여 손에 묻어있을
더러운 그 무엇들
어찌 밥과 함께
귀한 내 몸에 들일 수 있겠는가
그런데 말일세
밥 먹기 전에
손보다 먼저 마음을
씻어야하지 않겠나
손은 마음을 따라가는 것
마음을 씻으면
손도 깨끗해질 테니까
그러니 말일세
거하게 차렸든
별 볼품이 없든
밥 한 그릇 전리품 삼는
교만을 떨쳐버리고
내가 뭐라고
잊지 않고 먹여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부족하나마 밥값 하겠다고
다짐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말일세
피땀 흘려 밥을 짓는
땅의 사람들 깔보던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며
밥 지어 몸소 밥이 되어준
수많은 낯모르는
벗들에게 고마움 전하며
나도 그리 되리라
다짐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말일세
밥 빼앗겨 울부짖고
밥 먹지 못해 쓰러지는
제 탓 없는 착한 이웃들
애써 모른척했던
돌 같은 마음 찢으며
같이 먹자고 초대하고
나를 먹으라고 내어놓고
함께 배부르고 함께 배고픈
살맛나는 대동의 세상 만들리라
다짐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말일세
우리 이제부터라도
밥 먹기 전에
손보다 먼저 마음을
더할 나위 없이 깨끗하게
씻고 또 씻어 보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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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내면을 잘 가꾸어 나간다는 것>
+찬미예수님
응당 훌륭한 사제의 덕목을 뽑는다면 “좋은 강론”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러한 제 생각은 조금씩 변해갑니다. 그것은 교수로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고 훌륭하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스승의 중요한 덕목으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제가 말을 유려하게 해도, 강의가 좋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겨 있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 신자분들과 학생들에 대한 애정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제의 강론은 금방 힘없이 흩어져 버릴 것이고 강의 역시 한낱 흥미거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 사랑과 애정으로 준비된 강론 혹은 강의는 화려하지 않아도, 유려하지 않아도 내적으로 꽉 차있어 더욱 큰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 그 안에 담겨져 있는 것인 듯합니다. 그리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단순히 공부하고 준비하는 것에 나아가 기도가 사제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의 마음의 움직임을 잘 살펴보고 하느님께 성실히 의탁하는 자세가 가장 필요하므로 내면을 잘 관리하는 것이 저에게 있어 제일 중요하고 시급한 일인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음을 보고 놀라워합니다. 성경에서는 그들이 “놀라워했다”고 표현하지만 사실 맥락을 보면 “경악을 금치 못했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손을 씻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정결례와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열대성 기후 탓에 연중 4월에서 10월 사이엔 덥고 건조한 긴 여름이 계속되는 기후입니다.
덕분에 유대인들의 생활은 주로 실내에서 이루어졌고, 외부의 질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했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질병은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벌이라 생각했고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부정한 것이라 여겼습니다. 결국, 이러한 부정을 방지하기 위해 정결례를 율법으로 제정해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 이들의 기본적인 교리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므로 부유한 사람들은 집 안에 정결례를 위한 욕조를 만들었고, 이 욕조에 담는 물은 저장 용기에 담은 적 없는 빗물이나 바닷물이어야 했습니다.
탈무드 제1부의 6권 전체가 ‘씻는 규정’에 관련된 것이었고 죄인들이나 이방인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에 다녀오면 물통에 팔꿈치까지 넣어 손을 씻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의식들이 무의미하며, 그 안에 사랑이 담겨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죄인, 혹은 이방인이라고 해도 그들이 병균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며 유대인들과 같은 사람이고, 오히려 도움과 사랑이 절실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이러한 정결례로 인한 허례의식과 교만함, 차별이었습니다. 이 안에는 사랑도, 하느님께 대한 존경도 담겨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 질 것이다”.
이처럼 외면과 행동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인격과 마음입니다. 실제로 세상에서 존경받는 사람은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사람도,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법을 잘 지키는 사람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들보다는 묵묵히 아름다운 내면을 드러내는 사람, 법이나 규칙에 상관없이 이웃에 대한 사랑을 행동으로 드러내 보이는 사람들이 존경 받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라고 해서 모두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겉으로만 신자이고 내면은 비신자인 사람들도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내시는 하느님은 이러한 신자들보다 겉으로는 비신자라할지라도 내면은 그리스도인과 같은 사람을 더 사랑하십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과연 우리의 내면은 하느님 앞에서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인지 돌이켜 보아야 하겠습니다. 많은 재산, 아름다운 외모도 우리에게 기쁨을 주지만 결국 다른 이들에게, 그리고 누구보다 하느님께 큰 기쁨을 드리는 것은 좋은 정신, 아름다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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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본 바리사이는 놀랍니다. 그는 예수님을 율법의 위대한 스승으로 생각하며 가르침을 들으려 했는데 율법을 어기시는 모습을 보고 놀란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알아차리신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지적하시며 잔과 접시의 겉만 닦지 말고, 마음속에 숨겨진 탐욕과 사악함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마음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내면의 추한 모습을 가린 채 위선을 저지르는 사람들의 거짓을 알고 계십니다. 바리사이들은 형식적인 율법 준수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들은 외적인 것과 인간적인 잣대를 중요시하며 율법 규정에 매달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면의 선함을 보시고 사람을 판단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시며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또한 과부의 보잘것없는 헌금에 담겨 있는 믿음과 정성을 알아보고 칭찬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 자체로 의로워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의롭게 만들어 하느님의 은총을 가로막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인연이 끊긴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은총은 사랑으로 행동하게 만들어 율법을 완성시킵니다. 외면적인 행위와 계명의 세부 규정에 집착하는 사람은 선입견과 편견에 사로잡힙니다. 하느님 안에서 의롭게 된 사람은 죄를 불러일으키는 계명의 준수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성령 안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하느님의 사랑을 영혼 안에 가득 채우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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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홍성만 미카엘 신부님]
"나의 것이 이웃을 향해 흐르는 깨끗한 삶을 유지합시다."
오늘 복음은, 초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식사에 앞서 손을 씻지 않으시는 주님을 보고 놀라워하는 바리사이에게 하시는 말씀이 전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너희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닦아 놓지만 속에는 착취와 사악이 가득 차 있다. 이 어리석은 사람들아, 겉을 만드신 분이 속도 만드신 것을 모르느냐? 그릇 속에 담긴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다 깨끗해 질 것이다."(루가 11,39-41)
예수님께서는 지금 깨끗하다는 의미를 겉에 두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상태가 어떠하냐에 두고 계십니다. 우리는 가끔 '저 사람은 참으로 곱게 늙었다. 저 사람은 추하게 늙었다'하고 말을 듣기도 하고 또 하기도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생전의 깨끗한 삶의 내용이, 혹은 깨끗하지 못한 삶의 내용이 지금 드러났다는 의미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깨끗함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 주시고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그렇습니다. 물이 흐를 때 비로서 물의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듯이, 나의 것이 이웃에게 나누어질 때, 내 마음은, 정화되고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나의 것이 이웃을 향해 흐르는 깨끗한 삶을 유지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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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귀웅 토마스 신부님]
<호박 같은 사람>
저는 단호박을 무척 좋아합니다. 매일 아침 식사로 찐 단호박을 한 쪽 먹거나 아니면 단호박으로 끓인 죽을 먹습니다. 간식으로도 단호박 먹기를 좋아합니다. 교사회합에 찐 단호박을 가져가 나누어 먹기도 하고, 아이들과 소풍 갈 때에도 단호박을 간식으로 가져가서 얼마나 맛있는지 자랑하면서 먹으라고 합니다.
몇 년 전에는 텃밭에 손수 단호박 농사를 짓기도 했고, 요즘도 5일장에 나가서 직접 단호박을 사오기도 합니다. 단호박을 사람들과 나누어 먹으면서 저는 사람들에게 농담으로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저는 이렇게 호박처럼 생긴 사람을 좋아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빛깔에 영양가에 구수한 맛까지! 그래서 제가 바로 앞의 당신을 이렇게 좋아하나 봅니다.
당신도 이 호박을 닮았잖아요. 호박을 닮았다고 하면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드세요. 쭈글쭈글 주름진 할머니 손잔등이 떠오르시는지요. 단호박은 쭈글거리고 자잘한 혹도 많지만 겉보기와는 전혀 다른 음식입니다.
요즘 세상은 겉모습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흔히 디자인이라고 표현하지요. 물건을 고를 때도 품질보다 디자인을 먼저 고려한다는 사람도 많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배우자를 정할 때도 디자인에 속아 넘어가 후회하는 것도 많이 봅니다. 스스로 디자인의 속을 채우려고 노력해야 하고, 또 남에게서도 겉이 아닌 속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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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 그리스도 신앙이 할례를 받은 유다인의 율법 신앙과 분명히 다른 점입니다. 진심이 없는 형식적인 의무감이나 관습과 전통에 집착하여 본디의 복음 정신을 잃어버리는 완고함은, 그리스도인이 빠지기 쉬운 덫입니다. 교회는 이런 위선적 신앙에 대하여 교회 헌장 14항에서 다음과 같이 훈계합니다.
“교회에 합체되더라도 사랑 안에 머무르지 못하고 교회의 품 안에 ‘마음’이 아니라 ‘몸’만 남아 있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
평생을 성당에 다녔어도 주일 미사 참례나 판공성사의 의무를 채우는 정도로 신앙생활을 해 온 사람에게는, 섬뜩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해 놓고, 그분이 유다인의 관습대로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는 모습을 불편하게 쳐다본 바리사이를 향해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라고 질책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마치 주일에 미사 참례로 신자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거나, 교회에서는 헌신적이지만, 가정과 직장에서는 속되기 짝이 없는 표리부동한 삶을 사는 나 자신을 향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거룩한 부르심에 응답한 성직자, 수도자들 역시 위선의 늪에 빠지기 쉽습니다. 삶의 이상이 높을수록, 현실의 자아와의 괴리감이 더 커지기 때문입니다. 내 못난 모습을 감추려고 더 화려하게 나를 포장해야 하고, 사람들 앞에서는 한없이 자비롭고 거룩한 척해야 하는 이중적인 삶의 유혹은, 평신도들보다 성직자, 수도자들에게 더 큰 것이 사실입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나의 나약함을 솔직히 인정하고, 타인의 잘못을 용서하며, 가진 것을 나누며 사는 것이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임을 일깨워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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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강의를 위해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를 고대 철학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미 말했습니다. 이를 설득의 3요소라고 했는데, 그것은 로고스(논리), 파토스(감정), 에토스(신뢰)입니다.
논리와 감정과 신뢰가 갖추어졌을 때, 상대의 머리와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이 세 가지 모두가 중요하지만, 그중에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학창 시절에 인기 있는 선생님을 떠올려 봅니다. 논리가 뛰어나서 잘 가르치기만 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신뢰였습니다. 신뢰가 기반으로 이루어졌을 때, 논리와 감정도 함께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신뢰, 이 믿음의 기초를 쌓는데 가장 큰 노력을 먼저 기울여야 합니다. 특히 주님과는 이런 노력이 우리에게 더 필요합니다. 실제로 주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늘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너를 살렸다.”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주님과의 신뢰 관계, 또 이웃과의 신뢰 관계를 쌓는 데 우리의 노력을 쏟아부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후회하지 않는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해줄 것입니다.
바리사이와의 식사 때,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납니다. 이번에는 정결법과 바리사이들의 관습이 구약성경에 바탕을 둔 것인가가 주제였습니다.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는 모습을 보고서 종교지도자들은 정결법을 어겼다며 확대 해석을 합니다.
단지 자신의 손을 씻음으로 인해 모든 부정이 사라질 수 있을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겉으로는 깨끗해 보일지 모르나, 속은 탐욕과 사악함으로 가득 차 있음을 나타내시고자 잔과 접시의 겉과 속을 닦는 비유를 해주십니다.
바리사이들이 이런 모습을 보였던 것은 주님께 대한 신뢰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감정이 부정적으로 바뀌었고, 이로 인해 엉터리 논리를 내세우게 된 것입니다.
겉과 속을 만드신 하느님께서는 겉과 속이 다 깨끗하기를 바라십니다. 잔은 우리 육신의 고단함을 나타내며, 우리의 겉이 깨끗해지려면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이 먼저 순결해야 함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는 자선과 자비와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서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 신뢰를 드릴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 마음에 담겨 있는 사랑에서 나오는 자선을 통해서 분명해집니다.
그래야 모든 것이 깨끗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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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를 통해……>
해외 뉴스를 보게 되면 우리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생깁니다. 세계에서 코로나 19 방역을 제일 잘한 나라가 되어 국가 위상이 엄청나게 올라갔습니다. 확진자와 사망자가 속출해서 잘 통제되지 않는 다른 나라와 상황과는 달리 위험한 상황이 있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 통제가 잘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도 빨리 극복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한 사망은 안 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찾을 수 없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어떻게 괜찮을 수 있겠습니까?
출생률 최저, 남녀 임금 격차 최고의 나라. 희망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코로나 19 대처를 통해 우리도 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희망이 있는 나라, 세계에서 가장 복지가 잘 이루어지는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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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그리스도인의 자유
-속이 깨끗하면 저절로 모두가 깨끗해 진다-
참으로 속 마음이 좋으면, 깨끗하면, 겉은 저절로 깨끗해 집니다. 무슨 옷을 입어도 자연스럽게 잘 어울립니다. 화장이나 성형이 불필요합니다. 특별히 인위의 노력이 필요치 않습니다. 무엇보다 자유롭습니다. 집무실에 방문하는 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서 독사진을 찍고 셀프카 사진을 함께 찍는 기쁨이 참 큽니다. 대부분 기뻐하면서도 주저합니다만 다음과 같이 격려하며 찍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진 찍어 보시죠. 바로 예수님 십자가밑에 서세요. 마음이 예쁘면 얼굴은 저절로 예쁘니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사실입니다. 마음이 깨끗하면, 마음이 예쁘면, 마음이 자유로우면, 외모는 전혀 걱정안해도 됩니다. 속 마음은 겉 모습으로 저절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웃음과 더불어 활짝 꽃처럼 피어날 때 누구나의 얼굴은 고유의 아름다움으로 빛납니다. 하여 어제도 예수님과 함께 찍은 사진을 전송하면서 덕담을 주고 받았습니다.
-“너무 멋지고 아름다워요. 사진처럼 예수님과 함께 늘 웃으며 행복하게 사세요. 결국 모든 일이 잘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매님!”
“네 신부님, 감사합니다. 큰 교통 사고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신부님을 지켜주셨듯이 저 또한 지켜 주시리라 믿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은 속보다 겉을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식사전에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라는 바리사이가 그러합니다. 바리사이의 시선이 온통 외적 행위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 예수님의 시선은 이들의 속 마음을 봅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았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표리부동의 천박한 바리사이들입니다. 참으로 삶의 깊이가 없는 어리석은 사람들이요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겉을 아름답고 품위있게 꾸며도 마음 속에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면 모두가 헛일입니다.
예수님과 바리사이들 모습이 너무 대조적입니다. 내적인간과 외적인간의 대조입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자유로운 분이시나 바리사이들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너무 많은 외적 법규 중심으로 살다 보니 마음 관리에 소홀했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예수님의 참행복 선언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마음 속 탐욕과 사악을 말끔히 비워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참 행복한 사람이요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참 자유로운 사람들이요 내적으로 부요한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마음 속 탐욕과 사악을 비울 수 있습니까?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말그대로 성령 충만한 마음입니다. 주님 향한 사랑으로, 희망으로, 사랑으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기도와 선행과 자선으로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위적인 모든 꾸밈이 필요없어 집니다. 그러면 속과 더불어 모든 것이 저절로 깨끗해 집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도 적절한 답이 됩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의로워지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성령을 통하여 의로워지기를 간절히 희망할 때.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으로 살아갈 때, 즉 신망애信望愛의 삶을 살아갈 때 무지에서 벗어나 참으로 1.지혜롭고, 2.아름답고, 3.행복하고, 4.자유로운 삶이겠습니다. 이런 이들이 진정 내적 부요의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의 마음속 탐욕과 사악을 깨끗히 비워주시어 참으로 아름답고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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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짱을 추구합니다>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사랑하면 사랑이신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 때문에 예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음의 깨끗함은 사랑을 실천함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의 깨끗함은 겉모양을 깨끗이 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 즉 자선을 베풀게 됨으로써 깨끗해집니다.
자선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선은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 위에 내리게 하는 힘이고, 우리 구원의 확실한 표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자선을 되도록 많이 해야 합니다. 성베드로 솔로그는 “자선으로 씨를 뿌릴 때 거기서 거두는 열매로 천국의 곳간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마음속에 담겨 있는 탐욕과 사악은 자선을 통해서 정화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정결례는 바로 마음속에 있는 탐욕과 사악함을 씻는 것입니다. 올바른 지향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선을 베풀어 마음을 거룩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외적인 더러움을 씻는 것입니다. 그리고 먹거나 마시는 그릇을 깨끗이 씻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외적인 깨끗함보다는 내면의 정결이 더 소중합니다. 모든 불의와 부도덕한 행위에서 정화될 때 그 사람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깨끗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외적 정결함을 강조하고 중요시하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은 잘 가꾸지 못했습니다. 거짓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들, 안 보이는 속은 내버려 두고 겉꾸미는 사람들, 말과 행실이 다른 사람은 그릇을 닦는 일보다 마음을 닦는 일이 우선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늘의 그물은 누구도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외적인 규정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혼자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을 지키는 것은 쉬은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고, 주 하느님은 속마음을 들여 다 보시니 여러분의 마음이 하늘을 향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선을 숨겨 두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마태6,4)
얼굴도 이쁘고 말도 잘하면 금상첨화, 둘 중의 하나가 부족하면 천만다행, 둘 다 부족하면 설상가상이랍니다.
그러나 고쳐야 할 것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에 도금을 입히지 않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얼짱, 몸짱을 추구하지만 우리는 마음짱을 추구합니다. 마음을 잘 가꾸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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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부터 며칠간 우리는 말씀 안에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매서운 질책을 듣게 됩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루카 11,39)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식사 전에 손 씻는 예식을 건너뛰신 그분을 보고 놀라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초대한 이의 체면을 봐서 에둘러 표현하지 않으시고 직설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데 철저했던 바리사이들에게 삶은 지켜야 할 구체적 규정들의 연속이었을 겁니다. 늘 기억하고 챙기며 어느 하나라도 어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행여 어겼을 경우에는 율법이 정한 예물을 바쳐 부정함을 씻어냈지요. 율법을 준수하는 바리사이들의 겉모습은 누가 봐도 충실하고 올바른 의인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속까지 보는 분이시지요. 바리사이들의 문제는 자신을 단속하는 시선을 타인에게까지 투사하여 율법의 척도로 심판하고 단죄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 눈에 사람은 의인과 죄인, 즉 정결한 이와 부정한 이로 나뉠 뿐, 개개인이 처한 다양한 현실과, 어떠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가 하느님 모상이라는 존엄성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탐욕과 사악"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올가미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요? 남의 몫까지 움켜쥐려는 탐욕과, 그러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사악의 유혹이 많은 이들 내면에 또아리를 틀고 있습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멀리 갈 필요도 없을 정도지요.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ㅣ
바리사이들의 탐욕은 물질적 부의 축적뿐만 아니라, 그들이 독점하다시피 점유한 종교 권력에까지 미칩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이 위선을 벗고 진정 깨끗해지기 위한 해법으로 '자선'을 제시하십니다.
그런데 사실 내면에서 자비심이 발동해서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이 자선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죄인이라 치부한 이들에 대해 자비심을 갖기 시작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자선의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자선은 그들이 지닌 과한 재물과 완고한 율법주의를 덜어내고 해체하여 가볍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또 자선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라는 율법의 정신을 회복하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유다교 전통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들에게 민감한 주제인 할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갈라 5,5-6)
할례라는 옛 계약의 표지는 성자의 희생 제사로 맺은 새로운 계약 안에 녹아 있습니다. 몸에 내는 할례의 표시로 하느님 백성을 가늠하던 옛 관습은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영혼에 새겨진 사랑의 상처로 대체되었지요. 이제 율법의 규정들은 성령의 불로 녹아내려 사랑이라는 결정체로 응축되었습니다. 이렇게 율법은 사라진 게 아니라 완성된 것입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갈라 5,6)
사도의 이 대담한 단언은 오늘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제시하신 '자선'과 맥락을 같이하는 듯합니다. 율법 규정과 문자에 매여 노심초사, 주춤주춤, 조심하고 또 조심하며 한 발짝씩 떼는 이는 제 안위 챙기기도 급급할 터이니, 곁에서 굶고 울고 쓰러져가는 사람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어렵겠지요.
반면 사랑하는 일에 목숨을 건 이는 율법의 모든 내용이 사랑 안에 들어 있음을 알기에 문자에 매이지 않고 두려움 없이 성큼성큼 나아갑니다. 그에게 자선이란 그가 가진 물질뿐만 아니라 내면에 가득 흐르는 기도와 연민과 눈물을 나누는 연대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얼마간 의인이고 얼마간 죄인입니다. 얼마간 순수하고 얼마간 위선자기도 하지요. 그런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을 닮아 "모든 것이 깨끗해"지는 길이 오늘의 말씀 안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것, 그것이 무엇이든 나누고 내어 주고 비우고 베풉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덜 비난하고 덜 불평하고 덜 단죄하게 될 것입니다. 더 믿고 더 사랑하고 더 기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벗님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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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악습과 고집의 한계를 어떻게 부숴야 할까요?
악습과 고집을 고치는 것은 참으로 힘겹습니다. 오른손잡이에게 오늘부터 왼손으로 식사하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무엇인가를 변화시키는 것은 어려우나 시도해야 합니다. 새로운 것을 배우려면 변화 되어야 하고, 나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까지 힘들게 하는 악습과 고집은 부숴야 합니다. 변화 되지 않으면 훗날 외로워집니다. 아무도 곁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평생 다른 사람을 힘들게 했을 텐데 누가 이해해 주며 옆에 있어 줄까요?
♣이러한 한계를 없애기 위해서는 <마음의 문단속을 잘해야 합니다.> 마음이 마냥 열려만 있어서도 안 되고, 마음이 굳게 닫혀만 있어서는 더욱 안 됩니다. 마음이 무작정 열려 있으면 유해한 것들까지 쳐들어와 혼란을 만들어 냅니다. 반면 마음이 너무 닫혀 있으면 마음은 성장을 멈춥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적당히 열어 마음속을 환기시키고, 새로운 경험을 받아들이되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마음을 닫고 되새김질하는 시간도 가져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늘 사람들과 함께 하셨지만, 때로는 사람을 피해 산으로 가시기도 하셨습니다. 이는 여닫음의 법칙을 당신 삶으로 보여 주신 예입니다.
-「나는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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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루카 11,39)
완연한 가을입니다. 자연의 피조물들은 때에 맞는 자신들의 모습을 뽑내고 있습니다.
월요일은 산에 가는 날! 어제는 가까운 화왕산을 다녀왔습니다. 화왕산은 이곳 영산에 있으면서 가장 많이 다녀온 산입니다. 자주 가는 산이지만 때마다 드러내는 모습들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자연의 피조물들이 가장 진솔하게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항상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고, 그들에게는 거짓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저도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자연의 피조물들을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은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친구들을 만나러 갑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셨다고, 예수님께서 율법을 어기셨다고, 바리사이들이 놀라워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의 위선, 곧 겉은 깨끗해 보이지만,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 찬 그들의 모습을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탐욕과 사악한 마음을 내려놓고, 이웃에게 자선을 베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창조물들 중에서 말없이 존재하는 자연의 피조물들만이 탐욕과 사악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겸손하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더 잘 순종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이런 피조물들을 보고 배워야 하겠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믿음으로 의로워지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갈라 5,5-6)
미사와 기도를 했네 안했네가 중요하지 않고,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 미사와 기도가 지금 여기에서 살아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에 의지하지 말고, 믿음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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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4DioxDKicE&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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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 41)
따사로운
마음이 그리운
요즈음이다.
긴 아픔을
함께 겪는
이 시대의
아픔이다.
아픔을
치유하고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자선이다.
복음이 깊어지면
자선도 깊어진다.
믿는 만큼
베풀게 되는
자선이다.
욕심에서
벗어나는 길은
자선의 길이다.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자선이다.
자선은
소유가 아닌
봉헌이다.
봉헌으로
하느님을
드러내고
봉헌으로
하느님께로
나아간다.
가장 아름다운
복음의 길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나눔이다.
병든 우리
마음을 깨끗이
정화하는
자선이다.
무너진 마음
오염된 마음을
바로잡는
자선이다.
사람은
자선으로
다시 일어난다.
삶을 다시
일으키는
자선이다.
자선은
우리 마음을
사랑으로 다시
깨어나게 한다.
따사로운
마음 하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복음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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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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