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시대 (Cell)성도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癸卯年 정착과 부흥의 해
생명의 양식(복음)을 하찮게 여기면, 마귀의 표적되어 영생의 기쁨을 빼앗겨 침체됩니다.
고전2:1-5절) 전도의 미련함
사람은 자기에게 유익(有益)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으라고 하면, 뛸 듯이 좋아하면서 듣겠지만, 듣고 싶지 않고, 따분한 이야기를 들으라고 하면, 전혀 기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친한 사람끼리 만나 시시한 이야기를 할 때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또 재미있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데는 시간이 아깝지 않지만, 가만히 앉아 설교(說敎)를 몇 십 분 들어야 할 때는 인격적(人格的) 모독(冒瀆)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즘은 길을 걷는데, 누군가 길을 막아선 채, 전도지를 나눠주며,‘예수 믿으라’고 하면, 무슨 불결(不潔)한 것을 피하듯 외면하고 뿌리치며, 지나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탕이나 건빵을 매달아 미끼?로 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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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영향을 받는 교회에서는 예배드릴 때, 목사 한 사람이 강대상(講臺床)에 서서 재미없는 설교(說敎)를 길게 하는 것보다, 설교(說敎) 전에 영상물을 보여주고, 평신도(平信徒)가 나와서 간증하고, 드라마 같은 것을 보여주고, 설교(說敎)보다 교인들끼리 둥그렇게 둘러앉아 커피를 마시고, 간식을 먹어 가면서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는 자유로운 방식의 성경공부를 더욱 좋아 합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옛날처럼 강대상(講臺床) 중심의 설교(說敎)가 필요할까?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懷疑的) 시각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과거 청년 수련회를 가면, 설교(說敎)시간에 설교(說敎)라는 단어 대신에 주제 강의(講義) 또는 주제 강연(講演)이라고 쓴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체(主體)하는 사람에게 설교(說敎)라고 하지 않고, 왜 강의(講義)라는 단어를 썼느냐?고 물어보면, 내용이 없는 설교(說敎)보다는 무엇인가 내용이 있어 보이는 강의(講義)가 더 들을만한 내용이 있다는 식으로 대답했습니다.
지금까지 그것을 뭐라고 부르든지 간에 한결 같이 설교(說敎)를 해왔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Ⅰ.복음의 능력(상)
다른 사람 앞에 서서 무엇인가 가르치고 보여준다는 것은 월등한 실력을 갖추지 않으면,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대학 교수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은데, 대학생들 앞에서 무엇인가를 강의하려면, 지식 면에서 월등한 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또 연주자(演奏者)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악기를 연주할 때도 실력이 월등해야지, 잘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남들 앞에서 연주한다고 이상한 소리를 내면, 욕만 얻어먹을 것입니다.
학생들이 보기에는 교수들이 쉽게 강의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강의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을 투자(投刺)해서 충실(充實)하게 강의안을 준비해야만 제대로 된 강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고, 우스갯소리나 하고, 농담이나 하면서 그 시간을 보낸다면, 결국 학교에서 쫓겨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을 세상(世上)에 보내어 하나님과 구원(救援)의 진리(眞理)에 대해 증거(證據)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믿지 않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지식이 월등히 높은 것도 아니고, 어떤 분야에서 실력이 뛰어난 것도 아닙니다. 단지 다른 사람보다 먼저 예수를 믿었다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기독교에 대해 설명하거나, 예수 믿으라고 전도(傳道)하는 것이 자신 없을 때가 많습니다. 즉 나 혼자 예수 믿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傳道)하는 일에는 자신 없어 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구원(救援)에 대하여 다른 사람을 설득(說得)할 만큼 자신감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2:l절)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전도(傳道)할 때, 고린도인이 좋아하는 웅변술(雄辯術)이나, 수사학적(修辭學的) 말재간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인은 그리스 사람으로, 그들에게 호머가 끼친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었습니다. 호머는 맹인이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리스 사람은 호머가 쓴『알리아드』를 시(詩)를 비롯한 문학과 사상(思想)의 표준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 사람에게 문학이라고 하면, 서사시(敍事詩)였습니다. 또한 그들에게 덕(德)이라고 하면 용기(勇氣)를 의미했는데, 이는 다른 사람에게 복수(復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그리스 사람에게 영혼(靈魂)이라든지, 도덕적(道德的) 가치(價値)는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리스에서는 비극(悲劇)이 유행했습니다. 이 비극(悲劇)은 국가적 가치(價値)와 개인적 양심이 갈등을 일으키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나중에 사포라는 여성이 등장하면서 시(詩)는 남녀간의 사랑을 노래하는 것으로 변했습니다. 사포는 레스보스 섬 출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여기서 여성 동성애자 레즈비언이라는 단어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리스의 시(詩)나, 소크라테스의 대화록을 보면, 처음에 그리스 사람은 영혼(靈魂)에 대해 관심이 전혀 없었다가 점점 영혼(靈魂)이나, 양심에 대하여 관심을 같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혼(靈魂)에 대해 막연하게 추측만 할 뿐, 결정적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휘발유를 끼얹고, 폭탄을 던진 이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인 중에서데 사도 바울이 그처럼 위대한 진리(眞理)를 가지고, 그리스 세계로 들어올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옛날에 서양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처음 복음(福音)을 들고 들어왔을 때, 그들은 한 번도 복음(福音)을 들은 적이 없고, 하나님을 믿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과연 예수를 믿을지?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선교사들은 통역(通譯)하는 사람을 데리고 시골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예수 믿으라*고 전도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 번도 복음(福音)을 들어본 적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고,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자 선교사들은 선교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즉 사람은 하나님을 통해 사용될 뿐이고, 결국 사람의 마음을 열어서 예수 믿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처음 오순절에 성령(聖靈)이 임하셨을 때, 세계 여러 곳에서 예루살렘 성전에 제사를 드리러 왔던 사람들은 모두 다른 나라에서 왔고,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령(聖靈)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를 말할 때, 갑자기 이것이 전 세계어로 동시통역(通譯)되면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 나라 말로 알아듣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교인은 모두 다른 형편과 처지에서 살고 있으며, 지적(知的)수준이나 생활수준, 직업이 다르지만, 한 곳에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배 중에 하나님 생명의 말씀을 들을 때, 각자 자기에게 맞는 하나님 생명의 말씀을 듣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생명의 말씀을 들을 때, 나타나는 놀라운 현상입니다. 고린도에서 전도(傳道)하려고 할 때, 사도 바울은 돈으로 전도(傳道)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인에게 가장 매력적(魅力的)으로 보일 수 있는 방법은 그의 지식(知識)을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전도하지 않았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 사람에게 자신이 가진 탁월한 지식(知識)과 멋진 강의를 통해 그들의 관심을 끌고 싶다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지만, 그 방법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한다고 해서 고린도인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무리 유명해지고, 추종자(追從者)가 많아진다고 해도 그의 추종자(追從者)들이 구원(救援)받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것은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양심의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해서 그들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해주어 많은 지지자나 교인을 모으는데, 과연 그들 전부가 구원(救援)받을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대략 세 부류로 나눈다면, 어떤 사람은 상대가 아주 좋아하는 이야기를 해줍니다. 즉 사람들이 복을 받아 부자가 되고, 세상(世上)에서 성공하고, 병이 낫고, 천국에 간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런 설교자를 좋아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가진 해박한 지식(知識)을 가르칩니다. 이런 사람은 책(冊)도 많이 읽고, 깊이 있는 사고(思考)도 해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배울 것이 있어서 나름대로 지지자를 가지게 되고, 존경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무엇보다 성경 자체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사람이 어떤 지식(知識)을 인식하는 방법이 두 가지 있는데, 대개는 귀로 듣고, 머리로 이해합니다. 이는 보통 강의나 강연을 할 때,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 생명의 말씀은 두 가지 루트로 전달되는데, 하나는 귀로 듣고, 머리로 전해지지만, 다른 하나는 가슴을 통해서 영혼(靈魂)에 전달됩니다. 즉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가슴을 통해서 영혼(靈魂)으로 전달되는 루트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사람의 말재간이나, 능력으로 되지 않고,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됩니다. 그래서 설교 전에 반드시 기도가 필요합니다. 즉 말을 잘하고, 준비를 아무리 많이 했어도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시면, 한 사람도 은혜를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는 말도 어눌하고, 설교 내용도 매끄럽지 못했는데,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성령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지적(知的)내용이 많이 담긴 강의식 설교가 수준 높은 설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식(知識)이 그리 많지 않아서 도저히 지적인 설교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생각이 바뀌면서 지적 설교가 아니라, 성경 자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확성기가 소리를 멀리 전하듯 설교하겠다는 생각으로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을 확대하고, 구체화하는 식으로 설교할 때, 더 강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성경이 말하게 하는 것이 올바른 설교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설교를 하다 보면, 다른 논리(論理)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성경 자체가 논리적(論理的)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목사가 성경 자체를 자꾸 설교함으로써 교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부흥이 일어나고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중에 책(冊)을 많이 읽고 나서야 강의식의 지적 설교가 별로 좋은 설교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아-멘
찬송가 202장 *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
다음 날 계속 ⇨ 💖진리의 복음💖
†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교회갱신 성경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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