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이미지 1 / 이종수 (시인) 관념이 아닌 구체적인 모습을 띠게 하라. ‘사랑’을 에리히 프롬은 ‘자기 힘의 생산적 활용’이라고 했다. ‘사랑은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을 내던지는 것이며, 우리의 사랑이 상대방에게서도 사랑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희망에 자신을 완전히 내던지는 것이다. 사랑은 신념의 행위이며 누구든 신념이 없는 사람에게는 사랑도 없다.’ 는 말을 시로 실천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사랑으로 나는 내가 보았던 매미 날개와 매미 날개에 머무는 햇살과 그 햇살의 순간의 예민한 망설임들을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내가 보지 못했던 오로라와 그 오로라가 우주 먼 곳 태어나지 않은 역사와 맺는 관계를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내 내장 깊은 곳까지 박힌 칼들을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언젠가 그 칼들이 나를 더 이상 아프게 하지 못할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죽어가는 세계의 모든 생명들과 이제 막 태어나는 어린 생명들과 하나가 되고 싶다. 될 것이라고 믿는다. 될 것이다. 사랑으로 나는 나이며 너이며 그들이다. 사랑으로 나는 중심이며 주변이다. 사랑으로 나는 나의 상처의 노예이며 주인이다. 사랑으로 나는 나의 상처를 세계의 상처 위에 겸손하게 포개놓는다. 세계. 나의 아들이며 지아비인 세계의 상처 위에. 나처럼 아프고 불행한 세계의 상처 위에. 가만히. 다만 가만히. - 김정란, <사랑으로 나는> 온몸으로 사랑했던 실천했던 이야기들을 떠올려보라. 스스로 세계 앞에 시로 쓰는 사랑은 어떤 것일지 구체적으로 선언해 보라. 문득, 사랑이여 머물지 않는 마음으로 눈짓 한 번 스쳐보고 뒷모습만 남는 나는 언제나 그림자였네 아무 이름 외지 않고 손 내어 옷깃 한 번 흔들지 않고 나는 항시 떠나는 구름이었네 다시, 사랑이여 나는 그대 창가에 스러지는 바람이고 싶네 그리하여 어느 날 그대 생각 한 번 적시고 가는 빗줄기이고 싶네 그대 가슴에 피어나는 노을이고 싶네 끝끝내 나는 이름 없는 별이고 그대 신새벽의 이슬이고 싶네 - 김경호, <내 사랑은> ‘세계’와 ‘그대’ 사랑의 차원은 확연히 다르다. 내 사랑 안으로 굽는 ‘바람’과 ‘빗줄기’와 ‘별’과 ‘이슬’이 백만 번쯤 불러보는 ‘사랑으로 나는’과 변별력을 가질 수 없다. 하늘엔 조각구름 떠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있고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어 이렇게 우린 은혜로운 이 땅을 위해 이렇게 우린 이 강산을 노래 부르네 도시엔 우뚝 솟은 빌딩들 농촌에 기름진 논과 밭 저마다 자유로움 속에서 조화를 이뤄 가는 곳 도시는 농촌으로 향하고 농촌은 도시로 이어져 우리의 모든 꿈은 끝없이 세계로 뻗어 가는 곳 정수라가 불렀던 노래 <아, 대한민국>의 한 대목이 얼마나 많은 구체적인 희망을 생략했는지 알 것이다. 구체적으로 희망사랑을 그려놓은 것 같지만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은 뜬구름 잡는 정권찬양처럼 들릴 뿐이었지 않은가. 비록 노래이지만 시에서도 이처럼 막연하고, 현실의 관념화로 만들어가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볼 대목이다. ‘디자인 서울’을 내세우며 도시의 외관만을 꾸밀 때 용산의 아픔과 뉴타운 지역의 딜레마가 동시다발로 터지지 않았던가. 이미지만으로 구체적인 사람들의 현실을 포장할 수 없음을. 정지용 시인의 고향에서도 시의 조각 조각이 난무하는 이미지들만 넘쳐나고 정작 시를 이야기하지 않은 관광지의 명암이 드러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시에도 보여주는 이미지만 화려한 시가 있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히 알고 있다고 믿는 ‘사랑’이 실천되지 못한 삶을 떠올려 보면 구체적으로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지 아닌지 구별할 수 있으리라. 늘 푸른 물 파랑 잔잔히 비늘 벗어 흰눈 고깔모자 덮어 쓴 바위산 물 위에 띄워놓다. 텃새로 고향 삼은 백로 한 쌍 넓은 품에 담고 갈대 사각이는 소리 겨울 노래로 울어 정겨운 날. 산비탈 들 뛰던 산토끼 산전 콩밭 깍지로 이삭 줍다. 나그네 발 기척 들었나 황황히 놀라 넘던 산 능선 뒤로 나지막한 초옥 뒤 늙은 아낙이 쪼그라진 고욤 남은 세월을 따고 있다 - 박찬승, <서운리 유감> 지금은 물에 잠긴 마을을 보며 쓴 시를 비교해 보자. 그곳이 고향인 사람과 그냥 스쳐가면서 시의 소재만을 취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시는 분명히 다르다. 무엇보다 구체적인 마을 이름이 있고 없고에 따라 다르다. 과거에는 그랬던 곳이라 해도 그곳만의 ‘유감’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절절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기보다는 ‘무제’의 느낌에 가깝다. 가감없이 ‘남은 세월’을 따는 늙은 아낙으로 마무리하며 보여줄 뿐이라고. 어둠의 강 저편에 사람들이 살았다 할아버지가 일구어 놓은 땅 아버지가 씨를 뿌려 어머니가 거둬들이던 곳. 오늘 낚시를 한다. 송사리에게서 친구들 냄새가 나고 붕어에게서 아버지 냄새가 나고 잉어에게서 할아버지 냄새가 난다. - 배병무, <충주댐 낚시터에서> 앞의 시에 비해서 물에 잠긴 근처에 와서 돌아가지 못하는 고향을 바라보며 쓴 시는 ‘송사리, 붕어, 잉어’에게서 고향을 이끌어내며 구체적인 이미지를 확보하고 그 너머의 그림자까지 끌어낸다. 물컹하고 만져질 것 같은 마음의 움직임을 가져온다. 배오재 고개 너머 평북 마을 중간에 느티나무 있네 잎새만큼 세월을 살아오며 남한강을 굽이굽이 살피고 산과 들을 호령하며 사람들과 오래오래 살았네 낮과 밤에는 오가는 사람들에게 따스한 체온과 바람 주었네 우리 동네에 쌀 많고 평북 마을에 옥수수 많아 서로 돕고 도우니 느티나무 더불어 춤추고 남한강 머리 풀었다 묶었다 여울 노래 부르고 별꽃 뿌려 놓으니 어름치 산란탑 쌓아 잘 놀았네 평북 마을 사람들과 함께 얼굴 남한강에 비벼대니 느티나무 얼씨구 웃네 - 배병무, <느티나무> 느티나무에 기대는 화자의 마음도 그렇다. 막연히 가지 못할 고향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배운 삶의 언어를 늘어놓으며 이 땅에도 그러한 세상이 열리기를 바라는 마음을 ‘느티나무’로 대상화하고 있다. 김용택 시인이 어릴 적 심은 손가락 굵기만 한 느티나무가 아름드리 느티나무로 자라 네 엄마가 나한테 배우고, 네가 그 엄마가 되어 떠나갈 때까지 지켜주었던 느티나무라고 가리키는 대목처럼. 호수공원에 200살 된 느티나무가 있다 내 나이가 8살인데 200살이라면 얼마를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 노소영, <느티나무> 추상적인 나무이기 앞서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세월 앞의 나무가 그대로 드러나는 초등학교 2학년다운 궁금증이 바로 느티나무의 이미지인 것이다. 물안개 속에 떠오른 공제선이 문득 남북으로 갈라선다 땅속으로 잠복호 밀어 넣고 얼핏 눈에 감겨오는 푸른 강줄기 목에 가슴에 두르고 물안개에 싸여 돌아오는 저녁 바람이 분다, 태극기가 펄럭인다 바람이 분다, 유엔기가 펄럭인다 나란히 펄럭이는 두 깃발 사이로 골짝에서 능선으로 누가 올라온다. 정지! 하고 소리쳐도 서는 시늉만 한다. 손도 올리지 않고 흰 손수건도 없이 머리 숙이고 흐느적흐느적 걸어 올라온다. 내 몸속에서 아득히 누가 소리친다. (기다려, 거기부터, 가시철망 기다려, 거기부터 지뢰밭 기다려, 거기서 손바닥 보이게 두 손 들고 머리 들고 뒤돌아서!) 물총새! 따오기! 간신히 한마디씩 주고 받았지만 양미간에 걸친 흰 능선이 늘어진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온몸이 따가워진다. 분계선에서 번개인지 폭우인지 불안인지 공포인지 한덩어리가 되어 숨결 으스러지게 포옹하고 서로 정신없이 갈 길 간 뒤 이틀 당겨 만나는 우리 가시철망 앞에 두고 마주보고 말도 없이 위험표지판처럼 서 있는 우리는 누구인가? (줄임) 그대 먼발치에서라도 보고 싶다던 그 사람은? 어머니도 애인도 아닌 그 사람은? 그대가 남긴 담배꽁초다 초조한 눈빛과 어두운 몸짓과 암호 속에 떨려오던 그대 목소릴 깊이 간직하리, 살아 있는 동안 떨리는 목소리 울려오는 곳에서 떨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꿈꾸고 피 흐르는 대로 시를 쓰리. 나를 넘어 그대를 넘어 이념을 위하여 이념을 버리고 민족을 위하여 민족을 버리고 잘 가라, 두 깃발 사이 우리 땅 어디에도 있지 않았던 그대여, 그대가 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 - 신대철, <그대가 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 이념을 위하여 이념을 버리고, 민족을 위하여 민족을 버린 자의 사랑이 무엇인지, 손 끝 하나라도 대면 터질 것 같은 비무장지대의 긴장 속에서 외치는 “물총새! 따오기”는 암구호를 넘어 시인과 그대의 염원을, 원래부터 하나였던 사랑을 말해준다. 이렇게 긴장하며 시를 써 본 적이 있는가? ‘나의 권총 속에서 나의 어머니는 죽었다’고 말한 세사르 바예호의 시처럼 그대는 시인이 겨눈 총구로 날아와 앉는 나비일 수도 있고, 이념을 버리고 민족을 버린 뒤에야 보이는 진정성이지 않을까. 바다가 왜 푸르냐고 아이가 물었다 섬과 바위들을 쉼 없이 때리다 보니 스스로 멍이 들어서 그런다고 누가 말했다 바다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아이의 손을 잡고 직접 말했다 나무와 바람, 달맞이꽃이나 하늘다람쥐 은빛 갈치 떼들이나 독을 품은 방울뱀까지 세상의 모든 생명들이 저마다 품고 있던 푸른색을 조금씩 보탠 까닭이라고 결정적인 것은, 네가 그런 의문을 품었기 때문이고 너도 모르게 빠져나간 너의 푸른색이 나에게 흘러들어 왔기 때문이라고 너 때문이라고 하지만 아직도 사람들이 스스로의 외로움을 벗지 못하는 이유는 어린 시절 이미 바다에게 이 대답을 들었건만 어른이 되고 나서 그 답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 박두규, <바다가 푸른 이유> 어느 날 문득 아이가 물었으리라. 대답하기 곤란하여 한참을 망설이다가 과학적인 근거를 대가며 하늘도 그렇다는 식으로 대답하였을 때, 과학이며 철학 모두가 의문으로 시작하여 그 까닭을 알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신새벽에 도착한 바다 앞에서 끊임없이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자기 안에서 끊임없이 되물어오는 정체성이라고 할까, 세상 만물의 푸른 기운이 스며들어서 푸른 것이라는 까닭만으로 바다의 이미지는 더 힘차게 출렁이는 것 같지 않은가. 내장탕 전문인 청일식당 빈대 콧구멍만 한 화장실엔 대각선으로 변기가 놓여 있다 일 보는 동안 어쩔 수 없이 모서리를 바라봐야 한다 똥처럼 마모된 모서리를 반성해야 한다 겉은 둥글둥글 따스해야 하지만 속으론 모서리의 힘을 갖고 있어야지 탈취제 빈 그물에 갇혀 있는 상표를 보며 자신의 이름을 반성해야 한다 네 귀퉁이 모서리마다 낡은 거미줄이 있다 입적을 마친 빈 방들이 매달려 있다 청양 버스터미널 옆 청일식당에 가면 대각선의 중심에 앉을 수가 있다 그래, 모서리는 힘이지 모서리가 있어야 똥심이 있지 독을 들이마시며 자신을 지워가는 순백의 탈취제, 그 낡은 이름표를 바라보며 중심을 찍고 나온다 버스를 한 대쯤 놓쳐 버리면 어떤가 칠갑산 그늘에 오래 숙성된 좋은 술이 팔짱을 끼리니 건배 대신 구기자를 외치며 칠갑산 계곡처럼 깊어지면 어떤가 - 이정록, <모서리의 힘> 이것이 ‘면과 면이 팽팽하게 설 수 있는 것은/모서리의 결사적인 버팀’(남태의, <모서리>) 때문이지 않을까? 구체적인 설명이 곧 모서리의 ‘힘’으로 정리된 것이다. 결사적인 버팀이 여기서는 ‘똥심’이자 ‘중심’으로, 따스함 뒤의 각을 세운 힘으로 나타난 것이다. 같은 이미지를 놓고도 다른 듯 보이지만 끝내는 ‘칠갑산 계곡처럼 깊어지면 어떤가’를 실토하게 만들고, ‘누군가는 제 뜻 꺾어 주어야 편한’ 것으로 합치게 되는 것이다. 뼛속을 긁어낸 의지의 대가로 석양 무렵 황금빛 모서리를 갖는 새는 몸을 쳐서 솟구칠 때마다 금 부스러기를 지상에 떨어뜨린다 날개가 가자는 대로 먼 곳까지 갔다가 석양의 흑점에서 클로즈업으로 살아온 새가 기진맥진 빈 몸의 무게조차 가누지 못해도 아직 떠나지 않은 새의 彼岸을 노려보는 눈에는 발 밑의 벌레를 놓치는 遠視의 배고픔쯤 헛것이 보여도 현란한 飛翔만 보인다 - 김중식, <황금빛 모서리> 저녁 무렵 석양을 받으며 날아가는 새의 현란한 비상에서 황금빛 모서리를 선뜻 읽어내기란 어렵다. ‘날개가 가자는 대로 먼 곳까지’ ‘석양의 黑點’에서 날아온 새에게서 彼岸을 겹쳐 보이게 하는 것이야말로 황금빛 모서리 때문일 거라는 생각을 해보며 갸우뚱하다 다시 시로 그 해답을 찾아나게 된다. 저 일몰 끝에 발목을 내려놓은 그가 앉아 있다 눈멀고 귀멀어 그는 아무리 소리쳐도 대답하지 않는다 그와 나는 시소 타는 사람 같고 해와 달 같아서 누가 먼저 궁둥이를 털고 일어나면 툭 떨어진다, 하늘 아래로 곤두박질친다 저 뜨겁고 차가운 해와 달을 ‘시소 타는 남녀’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 유홍준, <일몰 앞에서> 시는 시로 풀어내야 하는 원초적인 질문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네 편의 시에 고마움을 느낀다. 서로 다른 이미지이지만 읽어내면서 자신에 맞는 따뜻한 질책을 받는 것이라고나 할까. 나무는 별을 보며 이미지를 배운다 별이 유독 뾰족해지는 밤 나무들은 남몰래 가지 끝을 조금 더 뾰족하게 수선한다 나무들 정수리는 모두 다 별 모양이다 이동력이 없는 것들의 모양새는 그렇게 운명 지어진다 별이 별과 함께 별자리를 만든 건 고독했던 인류들이 불안했던 인류에게 남긴 위로의 한 말씀 나무와 나무 사이 그 간격은 몇십 센티미터가 몇억 광견과 다름이 없다 그래도 수백 년을 더 뿌리에게 뿌리로 닿기로 한다 내 나무는 어떨 땐 ‘플랜트!’ 하고 물으면 ‘플루토!’하고 대답한다 그건 내 나무들만의 비밀한 위트다 - 김소연, <위로> 거대한 공장이나 생산체 같기도 하다는 뜻에서 플랜트! 하고 부르면 플루토! (로마신화에 나오는 저승의 왕 하데스이자 명왕성의 이름이기도 하다) 하고 저 뿌리에게로 뿌리로 가닿는 나무의 이미지가 시인에게는 ‘위로’란 그 한 말씀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언어의 묘미를 떠나 모서리의 힘처럼 응집한 구체적인 이미지의 성공 그 자체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