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오감(五感)을 살려라 1 / 이종수 (시인) ‘터럭 한 오라기가 달라도 남이다’(一毫不似 便是他人) 조선시대 초상화에 나타난 회화 정신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얼굴의 상태만 보아도 그 사람의 병색이며 정신까지 읽을 수 있도록 그렸던 초상화에서 진실된 모습, 외면 아닌 정신을 그리려 했다는 말이다. 흔히 대기업 회장의 초상화와 이재 초상화를 비교하며 말한 오주석 선생의 말을 빌리면 생긴 그대로를 가감 없이 그리는 단순하고 적확한 자세 속에 그 사람의 기운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강세황의 초상화를 보면 영락없이 잔나비상으로 생긴 얼굴인데 여기에는 강세황 선생의 글에 나타난 정신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내가 몸집도 작고 얼굴도 잘생긴 편이 못돼서 사람들이 종종 나를 얕잡아 보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 내 안에 대단한 학식과 기특한 포부가 있다가 자부하는 까닭에, 그런 말에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고 한 말처럼. 이 말을 시에 적용하면 어떨까. 세부적이고 적확한 묘사로 인한 극사실주의 시라고 할 수 있을까. 사물을 보는 것은 눈이지만 그 눈은 우리의 마음길이 가는 곳에만 신경을 집중할 뿐이라는 과학자의 말을 빌려본다면 지금부터 이야기 하려는 오감(五感)을 살려 쓴 시는 돋보기에 모아진 햇빛처럼 강렬한 에너지를 가진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오주석 선생은 옛 그림을 진짜로 잘 보려면 옛 사람의 마음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화폭 속에는 여러 형상이 갖가지 모양으로 그려져 있지만, 요컨대 이 모든 것 또한 한 사람, 즉 화가의 마음이 자연과 인생에 대해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묘사해 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마음으로 읽어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래서 초상화에 서린 정신을 이야기하면서 왜 김은호 화백이 그린 논개와 춘향, 이순신 장군의 화상이 예쁘기만 하고 내면의 정신이 빠진 껍데기 그림이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기운생동(氣韻生動)인 것이다. 오감을 살려서 시 쓰기란 바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에 마지막으로 마음을 담는다는 것이다. 날마다 보고 느끼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지만 마음이 서려 있지 않으면 살아 있지 않다고 보듯이 시시때때로 그냥 시를 쓰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한다. 시를 잘 쓰냐 못 쓰느냐의 기준은 내면에서 싹튼 그림이 가감 없이 독자들을 감동 시키느냐는 차이일 뿐인데 지연, 혈연처럼 얽매인 발표지면이나 소속단체 등에 의해 가려질 때가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공산품이라도 되는 양 시를 양산하고 있는 시에 대한 자숙이 필요한 시점에서 오감을 살리는 뜻을 헤아려보아야 할 것이다. 어머니는 솥에 태양을 퍼올렸다 쏟아 부으시며 회색빛 나무 그릇에 만들어진 황금의 햇살을 따르신다 태양 젖을 마실 때 두 볼에 태양이 알을 낳는다 어머니는 아침마다 태양의 우름을 걷어내셔서 내게 주신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태양을 모으고, 어머니는 젖을 짜신 후, 태양을 줄에 묶어 벌득 고개에 넘겨 풀을 뜯게 하신다 - 쩨. 사롤보잉, <어머니는 솥에 태양을 쏟아 부으신다> 몽골 시인의 시다. 자연이 준 것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예의라고나 할까, 몽골 초원에 쏟아지는 태양은 어머니 그 자체이고 사람들이 평생 먹고 자라는 젖이라는 고유의 신화와 철학을 그대로 가감 없이 적어 내려간 시다. 찬사가 아니라는 뜻이다. 시라면 흔히 찬사라고 알고 있지만 복사하는 수준의 것이어서는 안 되는 법. 자동기술하듯 찬사를 늘어놓는 시가 너무 많이 겹치는 시단을 볼 때 사롤보잉의 시는 태양 그 자체로 풀을 뜯게 만드는 어머니 대지의 정신이 그대로 서려있다. 식물은 소리도 고통도 없이 자란다고 들꿩이 말한 것은 귀가 울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작은 소리를 내며 식물이 자란다고 원앙새가 말한 것은 귀가 민감하기 때문이 아닐까 식물은 다만 낮에 자란다고 참새가 지저귄 것은 밤에는 잘 볼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식물은 다만 밤에 자란다고 부엉이가 힘주어 말한 것은 낮에는 잘 볼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 데. 체데브, <식물이 자라는 것은> 앞서 말한 찬사의 시는 큰 덩어리를 놓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한쪽 귀로만 듣거나 의도적으로 왜곡하기를 서슴지 않으며 시를 자신의 명망성을 위해 복무시키는 것은 아닌지, 묻는 듯하다. 한 번 보고 듣고 느낀 것으로 복제화 같은 시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들꿩과 원앙새, 참새, 부엉이의 반편화된 감각으로 시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되는 시다. 꽃은 세상이 모두 잠든 밤 눕지도 아니하고 하나님이 걸어놓은 찬란한 별빛 선율 끌어당겨 줄이 없는 가야금을 뜯는다 꽃은 새벽을 깨워 맑은 이슬로 헹군 잎 잎으로 손뼉을 치며 하나님을 향하여 노래 부른다 비 개인 날이면 태양과 더불어 열광쏘나타를 치며 새들을 불러 모아 함께 찬양하고 비 내리는 날이면 온몸이 악기가 되어 하늘과 땅을 잇는 빗줄기 오선지 삼아 빗물 젖은 영혼으로 특송을 한다 꽃은 이별할 때도 환희의 춤을 추며 돌아가는 하나의 음부(音符)가 된다. 꽃 앞에 서면 나도 한 송이 꽃이 된다 꽃이 되어 하나님의 봄 동산에 온 몸으로 찬양하는 꽃으로 핀다. - 이소희, <꽃의 노래> 꽃과 태양, 하나님과 어머니 가운데 어느 것이 거룩한지 빗대보면 위 시는 그저 노래일 뿐이다. 몇 개의 음절만 있으면 쉽게 만드는 찬미의 노래. 하나님에게 바치는 시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감동보다는 쓰임새에 맞춰진 시로 보일 수밖에 없다. 늘 보던 것에서 새로운 시가 탄생하게 마련이다. 같은 것을 보더라도 그 대상과 하나가 되려고 오래 바라보고 듣고 느낀 시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 세상에서 가장 긴 혀가 그렇다. 밧줄에 묶인 강아지가 밧줄과 함께 놀고 있다 밧줄을 물고 할퀴며 밧줄에 길들여지고 있다 밧줄이 허락한 거리는 은행나무 둥치에서 치킨집 유리문까지 강아지는 맹렬한 속도로 치킨집 유리문을 지나가려다 나동그라진다 나동그라지면서도 밧줄에서 벗어나려고 애쓴다 밧줄이 느슨한 자리에 주인이 놓아둔 밥그릇이 있다 밧줄과의 놀이에 짜증난 강아지가 밥그릇을 뒤엎는다 곧바로 밧줄의 길이가 짧아진다 은행나무 아래 늙은 개가 긴 혀를 내밀어 강아지의 잔등 천천히 핥아준다 은행나무에서 유리문까지가 살아서 갈 수 있는 제 거리의 전부라는 걸 아는 강아지 은행나무와 치킨집 유리문에 싼 오줌으로 제 영역을 지킨다 강아지는 밧줄 너머의 세상을 바라본다 밧줄에 목이 감긴 강아지가 지금까지 내민 혀 가운데 가장 긴 혀를 주인에게 내민다 - 이창수, <세상에서 가장 긴 혀> 흔하게 보았던 장면일 것이다. 왜 이런 장면에 붙들려 안쓰럽게 이야기하고 있을까. 그것은 밧줄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는 강아지와 세상에서 가장 긴 혀를 오감으로 이끌어낸 시인의 마음이 겹쳐지는 지점이기 때문에 새롭게 탄생한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뒤척이는 밤, 돌아눕다가 우는 소릴 들었다 처음엔 그냥 귓밥 구르는 소리인 줄 알았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누군가 내 몸 안에서 울고 있었다 부질없는 일이야, 잘래잘래 고개 저을 때마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마르면서 젖어가는 울음소리가 명명하게 들려왔다 고추는 매운 물을 죄 빼내어도 맵듯 마른 눈물로 얼룩진 그녀도 나도 맵게 우는 밤이었다 - 박성우,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들리다> 이것은 무당의 접신하듯 내 몸으로 아파하는 사물이나 목숨들에 대한 헌시라고 부르고 싶다. 얼마나 절절하게 다가왔느냐가 중요하고, 함께 울어주는 소리를 마음으로 잡아내어 공수하려는 마음이 담겨 있느냐가 중요한 대목인 것이다. 서랍을 정리하다가 열쇠 꾸러미를 보았다 이사를 다닐 때마다 하나둘 모아둔 것들이 한 꾸러미나 되었다 녹이 슨 열쇠를 만지작거리다 보니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빈방들이 생각났다 하지만 옛 시절이 그리운 것도 아니어서 열쇠 꾸러미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철렁! 열쇠들이 소리를 질렀다 쓰레기통으로 들어간 열쇠들이 나를 큰 소리로 불렀다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주고 돌아가는 순한 짐승들이 나를 마지막으로 불러보는 것만 같았다 철렁! 죄를 지은 것처럼 가슴이 저려왔다 - 이창수, <열쇠 꾸러미> 이창수의 <열쇠 꾸러미>는 한낱 열쇠일 뿐인 것을 순한 짐승으로 만들어놓았다. 아니 무심코 버린 것이 ‘철렁!’하며 불러낸 것이다. 열쇠 꾸러미에 옛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가 아니라 떠나온 그 빈 방들에 꽂아 넣고 마지막 구원처라도 되는 듯 지친 몸을 들이밀었던 공간이며 그곳들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아니 여기까지 데려다 준 열쇠로 인해 자신을 뒤돌아보는 ‘철렁!’의 재발견이자 깨달음을 말해주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지금은 우리 어휘에서 사라졌으나 시인 스스로도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어디가 감춰 두었는지 모르는, 글자로 옮겨 적을 수 없는 모국어에 대한 반성을 읽을 수 있는 시도 있다. 이으으으응 모르겄네 머리맡에서 할머니 갸웃대며 골똘하시다 그걸 어디가 둔다고 잘 뒀는디 이으으응 못 찾겄네 못 찾겄어 할머니 밤새 장롱이며 반닫이를 쑤석거린다 할머니가 이으으응 모르겄네 할 때 그 둥글게 꿈속까지 번지던 이이이이응은 글자로 옮겨 적을 수가 없다 (으가 세 번 들어갔는지 더 길게 발음이 되었는지) 할머니 밤마다 내 머리맡에서 고개를 갸웃대며 이으으으응 못 찾겄네 정신머리가 이렇게 없어서야 하시며 머리를 흔드신다 이으으응을 뒤적이며 자꾸 할머니를 빼닮았다는 나도 고개를 갸웃대며 문자로 옮길 수 없는 말과 어디 있는지 모를 무엇을 찾아 이으으으으으으응 이으으으으으으응 못 찾겄네 못 찾겄어를 중얼거려보는 것이다 - 송진권, <이으으으응> 도무지, 도대체, 영, 으로는 대체될 수 없는 충청도 사투리. 전라도의 ‘거시기’처럼 그 말을 내뱉은 사람의 입 모양이며 행동까지 보여주는 듯한 감흥을 던져주고 있다. ‘이으으으응’ 이 ‘이으으으으으으응’으로 길게 늘어나는 것은 시인 스스로 감지하는 허전함과 씁쓸함일까. 어디까지나 문자로 그 모든 정서를 표현해내야 하는 시의 숙명을 받아들이며 그리워하는 저 소리! 하지감자거치 폭신하게 익은 달이 둥실헌디 달빛은 왱기거치 한 가마니 그득 마당에 쏟아지고 가죽나무 그림자가 길게 마당을 덮어갔지요 슬레이트 지붕골을 타고 꽉 절은 별들이 도르르 굴러서 톰방톰방 쇠지랑물 속으로 빠지기도 하는디 고집불통 우리 소가 첫배 새끼를 낳느라고 동네 꽹매기네를 불러내고 생난리였는데요 우리 소여 워낙에 초산이라 부쩌지 못하고 들락날락 일났다 앉았다 용을 쓰는디 초저녁부터 시작된 산통이 새벽까지 가는디 욕봤다 욕봤어 양수 터진 누런 달빛 속 쇠등을 쓸며 에미 새끼 둘 다 죽을 뻔했다고 손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송아지라고 황송아지라고 불알이 똑 인절미 매달아논 거 거튼 눔이 부들부들 떨며 일어납디다 뿌연 달빛 속을요 허청허청 걸음마 어미젖까지는 어찌 그리 멀던가요 쇠지랑물 쇠비름 돋은 수채 모인 별들이 죄 희끄무레해지는 새벽참 입가에 젖을 묻히고 송아지는 겅중겅중 어미 곁을 뛰어다니더라니까요 - 송진권, <걸음마-못골4> 한편의 단막극을 보는 듯한 시다. TV문학관을 보는 듯하다. ‘하지감자거치 폭신하게 익은 달이 둥실헌디/달빛은 왱기(왕겨)거치 한 가마니 그득 마당에 쏟아지고/ 가죽나무 그림자가 길게 마당을 덮어갔지요’ 가 벌써 5분 분량은 되는 듯 역사적인 현장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소란스레 후두둑 막 퍼붓다가 들이붓다가 흙탕물 이뤄 떠난 것들을 따라가지 못한 물방울들이 칭얼대며 머위잎이나 오동나무 새순에 엉긴 밤이구요 똑똑 물방울 듣는 소리 사이사이로 돋는 저 소린 분명 맹꽁이 울음소리인데요 황소가 영각을 쓰며 벽을 들이받듯 세상의 옆구릴 들이받는 이 소릴 따라 찬찬히 가보면 청솔가지 매운 연기 매캐한 집 안 눈물 많은 식구 중 하나가 눈물 훔치며 똑똑 나뭇가지 분질러 아궁이에 불을 넣고 있을 거구요 내가 아직 뿔이 돋기 전 이도 나기 전 그저 하나의 숨이었을 때 보드라운 살덩이 하나로 살붙이들 가슴에 안겨서 들었을 이 소리 속에는 고모며 고모부며 그 고모의 아들딸들이며 마실 온 이웃 아주머니들까지 둘러앉아 감자에 소금 찍어 먹으며 왁자하게 웃고 떠들며 얘기를 하고 있을 것이지요 해서 이 소리는 솥뚜껑 여는 소리를 내며 감자 익듯 긴 밤을 저 혼자 익어가서 폭신하게 익은 보름달을 둥그렇게 밀어올리는 것이지요 - 송진권, <맹꽁이 울음소리-못골7> 맹꽁이 울음소리는 또 어떤가. ‘보드라운 살덩이 하나로/살붙이들 가슴에 안겨서 들었을 이 소리’ 지 않은가. 왜 그렇게 들렸을까 묻지 않아도 우리는 안다. 그 날은 참으로 별이 많았다 별만큼 맹꽁이도 울었다 창호지 문을 박차고 나와 시린 하늘을 보았다 아, 하늘 하늘, 새삼스러움에 잠시 눈물이 가셨다 김경미, <사춘기> 그것은 눈물처럼 떨어지는 별똥과도 같은 것이고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에서 동시에 접하게 되는, 시를 만드는 오감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