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모방과 창조 1 / 이종수 (시인)
‘누구 누구에게 영향을 받다’,‘ 본보기로 삼다’는 말에는 단순한 흉내 수준을 떠나 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해야만 진정한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뼈와 살이 될 것이다. 옷을 만들 때 종이에 그린 본(本)을 떠서 시작하는 것이 겉으로 보아서는 본바탕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지만 절차탁마(切磋琢磨)를 거쳐 창조의 단계로 들어서는데 있어 ‘본’은 아주 중요하다. 그 본은 제대로 보기삼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모방인 것이다. 미술 시간에 아그리파를 열심히 본떠서 그리는 것이나 수천 번, 수만 번의 선 긋기를 하는 것도 모방의 단계를 철저하게 거쳐서 만물을 제 멋대로 자유롭게 그려내기 위한 동작이다. 시에 있어서 모방이란 말은 위험해 보인다. 시를 배울 때 멘토가 되는 시인의 시집에서 영향을 받아 자기도 모르게 비슷한 정조로 써내려가고 있는 것을 느꼈을 때, 독자들이 누구 누구의 아류다,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로 재단하는 경향이 있기에 경계가 모호하다. 어디까지가 모방이고 자기 것으로 만들었느냐를 가리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슷한 것은 가짜다’ 하는 말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모방은 곧 계승(繼承)이란 말을 업고 가는 것과 같다. 전통을 이어받아 지금의 옷과 살림도구에 맞게 만든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욕구 가운데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모방이라고 했다. 모든 예술활동은 모방 본능에 바탕을 두고 있다 했다. 모방에는 자극이 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따르려는,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새롭게 탈바꿈하려는 뜻이 담겨져 있는 까닭이다. 중국의 유협(劉勰)이 지은 <문심조룡文心雕龍>에 “경서(經書)의 우아한 어휘를 공부하여 언어를 풍부하게 한다면 이는 광산에 가서 구리를 주조하고, 바닷물을 쪄서 소금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한 것도 모방을 모든 문학의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시의 역사가 고전의 활용에 있듯이 모방은 곧 유용지물(有用之物)인 셈이다. 법고창신(法古創新)에서 말하는 '옛것‘과 ’새것‘의 조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쓰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 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 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 하듯이
-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의 시는 많은 시인들의 본보기가 되어왔다.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들을 만들어내고 ‘가난하고 늙은 어머니’를 떠올리고 ‘대구국을 끓여 놓고’ 먹는 저녁을 이야기 하고 있다. 안도현은 시집 제목을 ‘외롭고 높고 쓸쓸한’이라고 하면서 ‘외롭고 높고 쓸쓸’한 정조를 닮고자 했다.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 것으로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말라’고까지 했다.
또 다른 말도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밥과 따스한 국물 퍼 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도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 .
- 안도현, <연탄 한 장>
쓸쓸한 것 앞에 ‘외롭고 높’다는 말이 들어가면서 산꼭대기로 솟구치는 단풍과도 같은, 머릿속을 뜨거우면서도 차갑게 뚫고 정수리로 빠져나가는 기운이 느껴진다.
무슨 나물을 무쳐도 맛깔스럽던 그 손으로 치댔을 눈부신 빨래들이 연처럼 날리는 집을 돌아오는데 축 처진 내 몸을 찌르듯 빨랫줄 중간을 치켜세우고 있는 장대 그 아득한 높이에 앉던 가을 잠자리 같은 빈집들을 달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햇살을 받고 있다 추사의 세한도에 부는 송곳 같은 바람이 빨래 속을 주인처럼 드나들고 있다
- 이종수, <추전을 지나>
시의 정신은 ‘외롭고 높고 쓸쓸한’ 것이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올 만큼 반향을 일으킨 것이다. ‘왜 나의 시에는 저런 어휘가 없을까?’ 하고 ‘승냥이가 새끼를 치는 전에는 쇠메 든 도적이 났다는 가즈랑고개’ 같은 이야기가 없을까? ‘아카시아들이 언제 흰 두레방석을 깔었나/어데서 물쿤 개비린내가 온다’(<비>) 같은 냄새가 없을까? 하며 ‘고향상실과 유토피아의 염원’(김재용의 해설문)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닮고 싶다, 따르고 싶다는 마음이 많은 시인들의 시로 재창조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몸과 마음이 말하고자 하는 물꼬를 터준 것 때문이다. 왜 그렇게 말하지 못했지? 하는 것에서 출발한 것이지 무턱대고 경향을 따르려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방은 표절이 아니기 때문이다. 표절은 아무런 의심 없이, 자기 주체를 내어놓고 따르려는 잘못된 것이다. 좋아한다는 까닭만으로 비슷하게 닮아가려는 무임승차다. 도용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백일장부터 신춘문예에 이르기까지 뒤늦게 표절이 밝혀져 당선 취소가 되고, 혼성모방의 혐의를 벗을 수 없는 작품들을 생각해 보면 알 것이다. 백석 시의 계승이자 창조이어야 하지 모방에 그쳐서는 안 되는 것인데, 좋아한다는 것만으로 구절구절을 빼다 쓰고 자기 것인 양 숨겨 놓는 것은 모방이란 본뜻에 위배되는 일이다.
Ⅰ 나는 한낮의 성숙한 하늘에 부조되는 장엄한 무늬를 보았다. 나의 것인 뜨거운 꿈 하나가 그 근처에 벌써 앉아 있었다. 구름의 흰 살에 일어나는 물결들.
나는 원했다. 삶의 한 순간의 質인 강렬한 빛의 혼례를. 설레이는 분만의 풍경을. 끝없이 겹쳐 오는 모든 계절들의 힘을.
더럽혀진 풀의 형상으로 대지의 낮은 중심에서 새들이 눈뜨고 있었다. 빛 한가운데로 소리의 騎士가 말 달리며 지나갔다.
바람이 불어온다. 흩어져라. 단단한 풀씨들이여. 사랑의 熱들이여. 날아올라라. 한없이 힘센 세력이여. 흰 욕망들이여.
나는 부풀어갔다. 장엄한 문양과 내 꿈이 숨쉬는 따뜻한 열이 나를 상승시켰다. 풀이 일어선다. 녹색의 무리들, 삶을 환히 밝혀주는 불붙는 표피여.
나는 부끄러워 눈물 흘렸다. 내 꿈은 나에게 입맞추어 주었다.
Ⅱ 삶을 준비하는 자가 새를 날려보냈다. 어둠 속으로 새는 젖혀진 밤의 골목으로 날아갔다. 새는 무너진 너의 슬픔 위로 떨어졌다.
그의 흰 깃이 남긴 무늬의 물결 속에서, 헤아릴 수 없이 어두운 숲의 한 가지에서 태어나는 불꽃처럼 밤은 빛나는 몇 개의 눈을 뜨고 우리는 숨의 증기인 눈물을 흘렸다.
두 번째 새는 돌아오지 않았다. 문법 바다의 가장 서늘한 심연에서 이마에 불을 단 우스꽝스런 심해어인 사랑이 헤엄치고 있었다. 지상의 어두운 골목에서 새는 차갑게 불타고 있었다.
노아의 세 번째 비둘기는 황금빛 올리브 잎사귀를 물고 왔다…….
이제 삶은 신성한 停止이며, 그의 그림자인 풍경만이 변모한다. 그의 입김인 바람은 흩어진다. 소리의 철책 사이에서.
새여, 슬픔의 첨탑 위로 떨어지는 푸른 입술이여…….
- 장석, <풍경의 꿈>
198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을 표절했다는 의문이 드는 작품을 보면 모방이란 말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1 나는 벌거벗은 하늘을 흐르는 빈 강물을 보았다 산수유 숲의 새 한 마리가 바람 따라 하늘 한 모서리에 앉아 있었다 구름의 가슴을 열어 일어나는 혈맥의 무리를
나는 노래했다. 살아 있는 풍경을 긴장한 육신의 정물을 밀물처럼 몰려오는 물상들의 힘을
새는 날아오르는 구름의 형상으로 지상의 낮은 곳에서 낮게만 날고 있었다. 바람 한가운데로 한 폭의 여인이 소리 없이 걸어가고 비가 온다. 빈 가슴의 눈물로 온다 젖어라. 건조한 畵筆이여 진한 꽃잎들이여 날아오르라. 날카로운 부리의 새여 흰 욕망의 깃털들이여
나는 눈뜨고 있었다. 더운 꿈과 미더운 내 붓의 물기로 山이 일어선다. 숲의 무리를 삶의 물상들을 아프게 밝혀내는 연한 속살들이여
나는 숲 속에서 부끄러웠다 내 山도 나를 낳지 못했다
2 삶을 연습하는 자가 山을 일으켜 세웠다. 새는 별빛 먼 숲을 위해 지상의 막다른 어둠 속으로 날아갔다
그의 젖은 입술이 남긴 아름다운 입맞춤으로도 그려지지 않은 파랗게 물오른 팔뚝의 한 가지에서 너는 풀씨처럼 눈을 감았지만 어둠은 여전히 안개를 퍼올리고
그래, 새는 다시 山을 날지 못했다 오밀조밀한 숲의 호흡을 헤집고 이마에 불을 단 반딧불 같은 사랑이 날고 있었다. 지상의 마지막 꽃잎이 질 때도 너는 차갑게 일어서고 있었다
네 최후의 기쁨으로 완성한 유채색 수풀의 고요 밖 물상들은 눈을 뜨며 한 마리 새를 지상으로 날려보냈다
이제 삶은 신성한 집중이며 숲의 그림자인 안개는 풍경 속으로 풀어진다 새의 호흡인 물소리도 잠들지 못한다 네 빛나는 눈물 사이에서 山이여, 슬픔의 입술 위로 떨어지는 푸른 물방울이여
- ○○○, <살아 있는 풍경>
당사자는 분명 표절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본보기로 삼았을 뿐이라고, 좋은 점을 따서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렇게 보이기에는 그것을 뛰어넘는 새로움이 없다. 그렇다고 패러디도 아닌 이상 관념의 복제일 뿐이다. 남의 옷을 입고 있는 초라한 형색일 뿐이다. 신춘문예에 도전하던 문청들은 대부분 심사위원과 당선작의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단순모방을 넘어 표절하고 싶은 욕망을 감추지 못했다. 당선을 위해 서슴없이 표절을 하거나 남의 시를 혼성모방하기도 했다. 그런 것을 충분히 감안한다 하여도 비슷한 정조에 더 나을 것 없는 작품이 된다면 자신을 위해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 습작기에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수많은 선배 시인들의 시집을 읽는 것은 눈으로 읽다가 좋으면 모방하는 일이다. 그렇게 써 봄으로써 그 시가 드러내려던 이야기를 읽어내는 것이다. 좋은 본보기는 어디까지나 영향권이다. 태풍의 영향권에 들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것처럼. 영향을 받되 자기 세계를 창조하는 새로움이 있어야 한다. 누군가 개척한 루트를 타고 히말라야를 오르는 일과 같다. 무엇을 어떻게 쓰려고 했는지는 제대로 읽어야 하고, 자기 것이 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인지 깊이 따져보고 고뇌한 흔적이 있어야만 창조로 가는 새로움이 있는 것이다. 서체를 연구하는 서예가들이 끝없는 붓놀림 끝에 자기 서체를 만들어가듯이 시에도 자신만의 문체가 있어야 하고 자기만의 정신이 오롯히 살아 있어야 하는 까닭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