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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두 표정
Daum카페/ 칭찬의 소리는 '확성(擴聲),' 비판의 소리는 '축성 (縮聲)'
– 김종헌, 김재복의 동시 비평을 듣고 3-1
∇ ‘비판의 소리’를 대면하는 반가움
비평가는 오래전부터 작가에게 지탄의 대상이었다. ‘비평가란 말 꼬리에 붙어 다니는 쇠파리’라고 일갈한 것은 안톤 체호프이고, ‘저 개를 내쫓아라, 저 놈은 비평가니까’ 하고 경멸의 말을 던진 것은 괴테다. 사르트르조차 비평가를 ‘묘지기’에 불과한 존재일 뿐이라고 깎아내렸으니, 비평가를 향한 악담의 수위가 꽤나 고약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런 악담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비평 무용론’으로 빠질 필요까지야 있을까. 비루한 비평이야 차라리 없는 편이 나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비평가를 그저 하찮고 쓸모없는 존재로 비하할 것만은 아니다. 『25시』의 작가 게오르규는 시인을 ‘잠수함 속의 토끼’에 비유한 바 있지만, 따지고 보면 비평가 또한 문학에 닥친 위기를 감지하는 잠수함 속의 토끼가 아닐까. 예민한 예지력을 가진 비평가가, 무수히 쏟아지는 작품들에서 어떤 징후를 읽어 내고 문학에 닥쳐올 위험을 미리 경고하는 것은 타기할 일이 아니라 권장할 일에 속한다. 비평가의 시선이 타당한 것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그의 충언을 경청하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일 것이다.
지난 10년간 우리 동시단에 불어닥친 창작의 바람은 거세었다. 그렇지만 그 성과와 한계를 적실하게 짚어 주는 비평의 발걸음은 굼뜨고 더디기만 했다. 창작에 대한 상찬과 호응의 목소리는 더러 있었을지 모르나 그 한계를 지적하는 ‘비판의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너무 적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런 견지에서 최근 읽은 김종헌과 김재복의 동시 비평은 새삼 반가운 생각이 든다. 김종헌은 비평집 『우리 아동문학의 탐색』(소소담담 2019)과 동시 전문 집지 『동시 발전소』(2019년 봄호~겨울호) 지면을 통해 2005년 이후 우리 동시의 흐름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꾸준히 개진하고 있으며, 김재복 또한 『창비 어린이』(2019년 겨울호) 지면을 통해 최근의 김개미, 송현섭, 김창완 동시집이 거둔 성과와 한계를 비교적 소상히 짚은 바 있다. 이들의 비평 작업은 우리 동시의 흐름을 옹호와 상찬의 자리가 아닌 비판적 관점에서 접근하려 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글이 지닌 타당함을 논하기 전에 우선 빈약한 비평의 조건 속에서 피어난 그 생명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이 제출한 우리 동시에 대한 비평적 시선은 어떤 방향을 가리키고 있을까?
∇ 김종헌의 본 오늘의 동시
김종헌 비평집 『우리 아동문학의 탐색』에는 모두 20편의 길고 짧은 비평들이 실려 있다. 이 모든 글들이 동시와 관련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동화와 청소년소설’을 다룬 5부를 뺀 나머지 글들은 직간접으로 동시와 관련되어 있어 사실상 동시 평론집의 성격을 지닌 책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김종헌이 고백한 대로 “잡지사의 청탁으로 쓴 계간평이 대부분이어서 감상과 해설에 치우친 한계”가 있긴 하지만, 현장 비평의 성격을 지님으로 해서 의미를 지닌다. “엇비슷한 주장이 반복되는” 단점도 지니고 있지만, ‘지금 여기’에서 생산되고 수용되는 동시에 관한 그의 관점이 비교적 일관되게 제시된다는 점에서 우리 동시단의 호흡을 되짚는 데 하나의 계기가 되는 글이다.
동시를 논한 여러 글 가운데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아무래도 평론집 서두에 실린 「책 머리에」와 2부 ‘쟁점’에 실린 세 편의 글(「동심의 재발견과 미의식 회복을 위한 진통」 「말놀이 동시와 감동의 시적 사유」 「재미에 갇힌 동시, 진영에 갇힌 문단」)이 아닐까 한다. 특히 「책 머리에」는 김종헌 평론집의 핵심적 발언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글이라 할 만하다.
김종헌은 「책머리에」에서 “최근 우리 아동 문단은 풍성해졌다”라고 전제한 뒤 특히 우리 동시 문단이 “양적인 면과 질적인 면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라고 말한다. 김종헌은 그러나 그 변화를 “동시문학의 성과로 평가하는 데는 멈칫거릴 수밖에 없”음을 고백한다. 그는 변화의 대표적인 예로 최승호의 ‘말놀이 동시’와 유강희의 ‘손바닥 동시’를 언급하면서 그것이 “동시의 외연을 넓혔을지 모르나, 동시가 지니는 ”문학성을 잃“게 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그는 일부 평론가들이 ”가벼움의 쾌락을 동시의 변화“로 보고 그것이 ”엄숙주의와 교훈주의를 벗어났다고 평가“하며 ”최상의 변화인 양 수용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문제라고 지적한다.
2019년 봄에 창간된 계간 『동시발전소』에 연재 형식으로 싣고 있는 그의 ‘개념으로 읽는 동시’ 꼭지는 이론 비평과 실제 비평을 아우르는 형식을 띠고 있다. ‘동심의 특질’(봄호), ‘동시의 미학적 조건’(여름호), ‘표절’(가을호), ‘동시의 시형식’(겨울호) 등 각 편마다 하나의 중심 테마에 대해 이론적 탐색을 시도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현 시기 발표된 동시들의 성과와 한계를 짚어 보는 글들이다. 짜임 면에서 평론집에 수록된 글들과 상이한 점은 있지만, 글의 기조는 「책 머리에」 취지와 상통하는 지점이 많다. 그는 “동심의 바운더리(boundary)” 안에는 “미숙한 동심과 성숙한 동심”이 함께 자리할 수 있다고 보며, 그 둘을 “변증법적으로 승화시킬 때 아동문학은 온전한 자리에 서게 된다”(『동시발전소』 2019년 여름호, 94~100면)라고 주장한다. 그는 또한 니체가 말한 예술미의 두 가지 성격―디오니소스적 충동과 아폴론적 충동―을 언급하며, 시인은 어느 한쪽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아폴론적 ‘의미’와 디어니소스적 ‘감흥’”을 “통합”하는 태도를 가져야 함을 역설한다. 그러한 기준에 비추어 보았을 때, ‘말놀이 동시’를 위시해 최근 유행하는 “짧은 동시”들은 동시가 지니는 요소 중 어느 한쪽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형국이어서 온전한 문학적 조건에는 미달한 작품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재미”와 “디지털 시대의 감각적인 발상”을 앞세우고 있지만, 어느 경우이든 “동시의 미학이나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는 한계”가 명백하다는 것이다.
∇ ‘가벼움’의 프레임과 규범이 지닌 문제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김종헌 비평은 ‘동시의 황금시대’라고도 일컬어지는 2005년 이후 약 15년간 동시단의 변화 모습을 긍정적이기 보다 매우 비판적인 시선으로 살피고 있다. 이른바 ‘동시의 호기(好期)’를 그는 ‘동시의 위기’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종헌이 지금 동시단에 내리고 있는 진단은 얼마나 타당한 것일까? 이것을 살피기에 앞서 그의 평론집 「책 머리에」에 언급된 다음과 같은 글을 다시 읽어보도록 하자.
요즘 유행하고 있는 짧은 형식의 말놀이 동시는 그 연원이 일제강점기 동요에 있다. 윤복진과 이주홍 등 당대 많은 아동문학가들은 의성어와 의태어의 반복과 어린아이들의 말을 시어로 선택하여 놀이요를 창작하였다. 이런 동시는 획일적인 동심, 천사적인 귀여움의 대상으로 어린이를 타자화하였다는 비판을 받았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당시 신인이었던 박경용, 조유로 등은 ‘동시의 시운동’으로 종전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동시의 정서를 부정하고 나섰다. 또 1970년대는 이오덕의 ‘일하는 아이(현실주의)와 박경용의 문학성(미학)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을 거쳐 제반 문제를 극복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런 아동문학사의 경험과 동시 문단의 전통으로 얻은 성과가 뿌리내리려는 순간에 가벼운 동시 문단을 맞았다. (『우리 아동문학의 탐색』 6면)
우리 동시의 흐름을 간략하게 요약한 것으로 파악되는 이 글은 ‘말놀이 동시’의 출현이 갖는 부정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짧은 형식과 말놀이 동시”는 이미 일제 강점기에 나왔다가 폐기된 낡은 “놀이요”에 뿌리를 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동시 문단이 얻은 “성과”를 왜곡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비판한다. 다시 말해서 2005년 등장한 말놀이 동시는 우리 동시의 역사를 볼 때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며, 동시의 성숙에 기여하기는커녕 그것을 망친 주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김종헌의 관점대로라면 ‘말놀이 동시’가 나오기 전인 2005년 이전 시기를 우리는 ‘동심의 황금시대’라 불러야 맞는 것이 아닐까? 그의 말대로라면 그 시기는 ‘현실주의’와 ‘문학성’ 간의 격렬한 논쟁을 거쳐 제반 문제를 극복한 말 그대로 완벽한 동시의 시대였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 기억으로는 그 시기는 결코 그런 시대가 아니었다. 동화의 호황으로 아동문학의 부흥기라 불렸던 2000년대 초반, 동시는 아동문학의 중심에 있기는커녕 마치 변방의 장르처럼 물러나 있었다. 우리 동시가 동화처럼 호응을 받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진지함이나 수준 높은 문학성을 이해하지 못한 시대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그런 시대 분위기에 휩쓸려 즉흥적이고 가벼운 것을 따라다니는 독자 때문이었을까? 2000년대 이후 확산된 시대감각이나 독자들의 정서적 변화를 전혀 감지하지 못한 동시단 내부에도 그 원인이 있지 않았을까?
여러 지면에서 누누이 밝힌바, 최승호의 ‘말놀이 동시’는 굳이 비유한다면 고인 물처럼 정체되어 있던 동시단을 힘차게 휘저은 ‘막대기’였다. 그것은 비록 모든 시대 모든 독자들을 감복게 할 뛰어난 문학성을 갖추진 못했을지 모르나, 동시를 보는 눈을 새롭게 전복시켜 새로운 창작에로 물꼬를 트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시인의 관심은 규정된 동시 미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것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데 있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역사적 분기점’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던 것이다. 그 충격파로써 2005년 이전과 다른 동시의 흐름이 전개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2년 뒤 ‘해묵은 동시를 버리자’던 김이구의 선언은 그런 충격파를 적극 수용하고 승인한 발언에 다름 아니다. 그런 역사성을 괄호 치고 지금에 와서야 최승호의 말놀이 동시가 지니는 ‘가벼움’만을 비판하는 것은 다분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김종헌은 2019년 『월간문학』에 발표하고 평론집에 수록한 「감각적 재미와 가벼운 서사의 무게감」에서 최승호 이후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아류 작품이 연이어 나타”났으며, 평단이 이를 “동시의 엄격주의에서 벗어났다고 흥분된 목소리로 평가”했다고 질타한다. 그의 말대로 최승호 이후 그를 따르는 아류들이 전혀 없지 않았음을 인정한다. 그 아류 작품들에 대한 “흥분된 목소리”의 비평적 반응 또한 전혀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최승호 이후 그것을 추종하는 아류작들이 김종헌의 글이 쓰인 2019년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나는 인정할 수가 없다. 그 아류작들에 찬사를 보내는 비평적 발언이 무성했다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최승호의 ‘말놀이 동시’의 출현 이후 약 15년간 우리 동시단은 최승호의 아류작들만을 양산하며 제자리걸음을 한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시기는 우리 동시가 천편일률적이라는 오명을 벗어던지려 애쓴 시기이며, 우리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개성을 추구하며 그 어느 시기보다 다채로운 형식과 내용을 펼쳐 보이기에 열중했던 시대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종헌이 좋은 시의 사례로 인용하고 있는 김기택, 함민복, 문인수, 임수현의 작품들은 바로 최승호 이후 그러한 동시단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시인들의 산출물 가운데 일부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들 말고도 자기 언어와 개성을 갈고닦아 우리 동시의 영역을 확장한 시인들은 더 많다. 지난 15년간 그러한 시인들의 발걸음을 모두 ‘최승호의 아류작’들이라 말한다면 그것은 시인들에 대한 모독이 아니고 무엇인가.
전술한 것처럼 김종헌은 미숙한 동심과 성숙한 동심의 변증법적 승화, 아폴론적 의미와 디오니소스적 감흥을 통합하려는 태도에서 바람직한 동시가 산출될 것이라 주장했다. 그가 말한 ‘통합’과 ‘변증법적인 승화’가 구체적으로 작품 속에 어떻게 구현되는 것인지 명확히 인지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좋은 시가 될 조건의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점에는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비평가가 요구하는 좋은 시의 기준을 모든 시인이 반드시 따라야 할 의무 조항은 아니라는 점이다. 김종헌은 「시인의 오만과 시적 정의」(『동시발전소』 2019년 여름호)라는 글에서 동시가 갖추어야 할 여러 조건을 나열하며 ‘~해야만 한다’는 의미를 연속해서 쓰고 있는바, 나는 그런 글쓰기 태도가 무척 우려스럽고 갑갑하게 여겨진다. 시인과 대화적 비평을 시도하기보다 마치 비평가가 시인 위에 서서 무언가를 지시하고 지도하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비평의 권위는 시인에게 어떤 규범을 일방적으로 제시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비평가가 생각하는 ‘적격’(decorum)은 시 창작에 적용되는 여러 규범 중의 하나가 될지언정, 모든 시의 규범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설령 그렇더라도 그 규범을 파괴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려는 것이 시인의 ‘성실성’(sincerity)의 지표이기도 하다는 점을 명심할 일이다. 자신이 정한 시의 규범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성실성의 측면에서 시인이 어떤 노력을 기울였나를 유심히 살피는 것 또한 비평가가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닐까? < ‘동시를 읽는 마음, 새로운 동시를 위한 탈중심의 상상력, 김제곤 평론집(김제곤, 창비, 2022)’에서 옮겨 적음. (2023. 6.12. 화룡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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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신이 정한 시의 규범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성실성의 측면에서 시인이 어떤 노력을 기울였나를
유심히 살피는 것 또한 비평가가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닐까?
저는 시집을 구입하면 평론부터 봅니다
훌륭한 평론은 시 보다 더 멋진 분들도 계십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독서 방법인 듯합니다.
독자도 일정 부분 비평의 눈을 가져야 할 터입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씀이 죽비소리로 살아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