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호산나교회(한신형목사)에서 말씀을 전하다
원래는 오늘 을숙도를 경유하여 사상의 호산나교회에서 하룻밤 묵고, 26일(월)에 추억이 있는 부산을 둘러보고 부산역에 여유있게 도착하여 몇몇 지인과 만찬을 함께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26일에 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다. 그래서 내 인생길을 바꾸게 한 6.25 동란이 일어난 오늘 6월 25일에 부산역에 도착하기로 하다.
화명고등학교
낙동강 인도길. 자전거길과 나란히 간다.
부산 갈맷길 리본:
수영장도 있다. 아직 개장하지 않은듯하였다.
이곳에서만 야구장 두 곳을 보았다. 부산 야구가 더 강해질 것이다.
제2낙동대교
구포역 1.4km 남았다.
기차길 뚝 아래로 난 길. 기차가 달리는 소리가 정겹다.
구포역 밑으로
뒤돌아본 구포역
구포역-괘법역까지 걷게된 벛꽃길(낙동강 동안 제방)
대부분 인도와 자전거 길이 나뉘어져 있고, 양 옆에 벛나무들이 줄지어 있다. 중년의 여자분에게 이 길이 얼마나 계속되는가 물었더니 강 양쪽 길을 합하몀 100 리 벛꽃길이란다. 왈 진해 벛꽃 길은 " 택도없다"란다.
정식명칭은 '낙동제방벛꽃 길"
삼락교에서 벛꽃길을 벗어나 하천길로 괘법르네시스역으로
광장에서는 외국인 가요대회가 진행되고 있었다. 필립핀 청년이 열창하고 필립핀 동료들이 응원하고 있었다.
구덕터널을 향하여.
사상구청 경유, 학장사거리에서부터 구덕터널 오르막길을 걸었다.
택시 기사와 버스를 기다리는 분들이 터널안에 인도는 있는데 높고 좁아서 위험하다고 만류한다. 터널만이라도 보니 버스를 타고 통과하라고 충고했다. 인터넷 검색 결과와 일치했다.
버스를 타고 지나면서 보니 층고를 듣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터널 통과하여 서대신4동에서 하차하여 구덕운동장으로
뜻밖에 길가에는 각종 골동품을 파는 분들이 많았다.
대개는 나이가 지긋한 분들이었다.
부산의 상징 중 하나인 구덕종합운동장
국제시장
동대사거리에서 국제시장으로 발 길을 돌렸다. 1952년부터 2-3년 모친께서 장사를 하셨던 곳이다. 이곳에 자리가 있어서가 아니라, 마산에서 미군부대 물품을 받아다가 이곳의 가게에 넘겨주고 다른 물품을 받아오는 보따리 장사를 하셨다. 방학 중에 몇번인가 나를 데리고 오셔서 구경도 시켜주고 맛있는 것을 사 주졌다.국제시장에 불이 난 날에는 편찮으셔서 가지 않으셨다.
나이드신 분에게 가장 오래된 골목을 물어서 여기저기 걸어보았다.
명실상부한 국제시장
피부와 언어가 다른 다양한 외국인들도 많았다.
국제(다국적 제품) 물건을 파는 국제시장이 이제는 국제인이 걷는 진짜 국제시장이 된 것이다.
좁은 골목길의 식당
모친의 취향에 맞는 장소와 메뉴가 보이는 산수갑산 집에서 돼지김치찜을 먹었다. 식당 아주머니와 중국동포인듯한 종업원이 내게 괸심을 가지고 나의 여정을 물었다. 그러자 좌우에 있는 손님들도 관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물었다. 그리고 격려와 함께 완주를 축하해 주었다.
옛날 그대로다. 정겹고 맛있다.
광복동 거리; 다양한 사람들이 주말을 즐기고 있었다.
길거리공연
음악에 맟추어 비보잉을 하고 있는 청년들. 작은 바가지에 천원짜리들이 보였다.피곤하여 실수를 하는 모습이 안스러워서 1만원 지페를 넣어 격려하였다.
용두산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 시간이 있으면 올라갔을 것이다. 부모님 모시고 올라갔던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40계단 문화관광테마거리로.
무슨 테마가 있을까 해서 또 올라갔다.
그 시간에는 사람도, 볼 것도 보이지 않아서 이런 회전 길로 내려왔다.이제는 더 이상 들러보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중앙대로를 따라 속도를 올렸다.
정각 저녁 8시: 부산역
정각 20시. 마침내 부산역에 도착하였다.
20박 21일 동안 560.3km를 걸어서 도착했다.
의미있는 6.25일예 도착하려고 거의 쉬지않고 걸었다. .
도착하자마자 광장 분수가 솟구치면서 웅장하면서도 비장한 관현악 연주가 끝난다.
분수 사이로 흐릿하게 "부산역" 네온싸인이 보였다.
순간 저 밑에서부터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광화문에서 출발할 때도 혼자였는데, 부산역에 도착 한 지금도 혼자라는 것 때문이었을까?
마침내 완주했다는 감격때문인가?
66년 전, 1월. 모친과 함께 이곳에 내려서 갈곳을 몰라 두리번 거리던 그 때가 생각나서일까?
때마침 분수가 다시 솟구치면서 노래가 나왔는데 신기하게도 "내 나이가 어때서"였다. 아내가 경로당에서 많이 불러주는 노래다.
"내 나이가 어때서 도보여행하기 딱 좋은 나인데"로 들렸다.
잠시후 후배의 전화가 왔다. 내일 도착하는 줄 알고 지금 양산에 모여있다는 것이다. 전후사정을 설명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왠지 짠하게 느껴지는 뒷모습:
출발할 때처럼, 사진을 부탁하였다. 나의 여정을 이야기하고 배낭 사진도 부탁하였다.도보여행 카페 중에서 이 카페를 택한 것은 그 이름 때문이었다.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부모님의 인생길이면서도 나의 인생길을 걸어보고 싶었던 내게 딱 맞는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첫걸음을 끝낸 것이다.
친구 같은 후배 최홍준목사가 완주한 나를 배려하여 송도 해수욕장인근에 있는 25층 사무실에서 잘 수 있도록 잠자리를 준비해 두었다. 시원하고, 야경이 좋아서 큰 보상을 받은 느낌이 들었다
감사할 사람도 감사할 일도 많이 생긴 21일이었다. 긴 사색과 기도를 할 수 있었다. 다양한 길들을 걷고, 그 길을 되돌아보며, 내가 걸어온 인생길을 돌이켜보았다. 가야할 길의 방향과 코스를 어떻게 잡아야 후회없이 살 수 있을까도 생각했다.
21일의 여정 동안 여러모로 도와주고, 격려해주고, 재워주고, 먹여주신 분들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상처뿐인 영광"이 아니 "영광의 상처"
끝으로, 기형인 나의 발을 소개해야만 할 것 같다.
"상처뿐인 영광"이 아니라 "영광의 상처들"이라고 명명해 보다.
귀가 후 10여일 후에 알게 되었는데 왼쪽 셋째와 넷째, 오른 쪽 둘째와 셋째 발가락 발톱이 빠지고 그 밑에서 새 발톱이 자라고 있었다.. 카페에서 여러 후기를 보면 준비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의 미숙과 무식으로 가장 힘들어 했고 고통스러워했던 발이다.
물론 2차 남해안 도보여행 때에는 나아졌었다.
7차 여정 때에는 "아. 나도 이제는 도보여행가가 되었구나"라고 자인할 만큼 많이 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