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어릴 적에는 대부분의 책들이 한자를 사용했습니다. 단어의 뜻을 분명히 할 목적으로 괄호 안에 한자를 병기했지요. 중학교 시절 교과서에는 한글과 한자를 병용했습니다. 그래서 한자를 배우지 않으면 글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에 한글 다음에 괄호에 한자를 넣는 병기식(倂記式)으로 바뀌면서 한자를 몰라도 글을 읽을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오늘날에는 한자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대신 괄호 안에 영문이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젊은 세대들은 영어를 보면 그 의미를 더 정확하게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책이 영문을 병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 한자문화권에서 이제는 영어문화권으로 바뀐 것이지요.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우리는 다시 미국의 지배를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오랜 세월 동안 강대국으로부터 문화와 정치 등 모든 영역에서 지배 또는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이런 일들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 KBS에서 방영한 ‘한국지성사’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서울대의 경우 미국 박사학위 비율이 76년에는 25.9%이던 것이 2005년에는 84.5%에 이르게 되었으며, 같은 기간에 미취득이 18.5%였으나 현재는 0%입니다.
타 대학에서도 비슷해서 연대 85.6%, 고대 80.5%, 서강대 85.4%, 성균관대 82.0%입니다. 국내 박사학위는 고대가 가장 높은 7.3%를 차지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지식의 불균형이며, 특히 미국 편향적인 지식체계의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지식에 대해서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이런 태도는 동양적 사고구조와 지식체계를 경홀히 하게 만드는 주된 요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지식체계의 문제점으로 서양 이론을 비판 없이 수용하는 태도를 우선 꼽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주체적인 이론과 담론을 개발해야 한다고 하는 주장이 가장 강력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마치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식입니다. 누가 방울을 다는 희생을 치를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일에 자신을 희생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에 이런 모순은 계속 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어린 시절 일상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대부분이 일본어였습니다. 학교 다닐 때 도시락이란 말보다 ‘벤또’라는 말을 더 친숙하게 사용했습니다.
소풍간다는 말보다 ‘원족(遠足)간다’고 했고, ‘산보(散步)한다’는 말이 일상적인 용어로 전혀 낯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피크닉 간다’라든가 ‘워킹’이라는 말로 대치되었습니다. 수많은 참고 문헌은 서양문헌 일색입니다. 그런 문헌을 참고하지 않으면 그 지식에 대해서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외국 문헌을 열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이 이런 일들은 암묵적(暗默的)으로 이루어져 온 것입니다. 누구 한 사람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상처럼 그렇게 우리들 속에 스며들어버렸습니다.
중국에서 일본으로 그리고 미국으로 영향권이 바뀌면서 우리는 여전히 우리 것에 대한 의식을 높일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 유럽에서 퇴계의 사상이 각광을 받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퇴계학(退溪學)이 유럽인들에게 주목을 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지만 인간의 삶을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사고 구조로만 이해하려고 하는데 대한 반작용으로 동양의 퇴계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퇴계는 성리학의 대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실상 그의 글을 접한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을 것입니다.
서양은 눈에 보이는 유물적 실존체계로 철학이 나갔다면 동양은 보이지 않는 존재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을 실존적 존재로 인식했다는 점이 다릅니다. 주희(1130~1200)는 ‘천지 사이에 가득 찬 소리와 빛깔, 모양과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이 물(物)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이런 생각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서양의 절대자로서의 신인식과 같은 것이며, 총체적으로 자연과 우주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 즉 생성되고 소멸하는 모든 것을 존재로 보며, 그 존재는 선과 면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3차원 또는 4차원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내면과 외면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형상으로 설명한 성경의 원리와 같은 논리이며, 모든 자연을 창조하고 그 속에 하나님의 속성을 부여하여 만물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서양철학이 지향하는 바는 관념적이고 사변적 철학에 입각해서 다양한 형이상학을 만들어냈지만 그것으로 존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존재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스스로 끊어버림으로써 존재를 추상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태도는 경험론적 인식론을 불러오게 만들었고 자연과학이 발달하게 하는 배경을 제공합니다. 이것은 철저한 과학주의를 이루어냈고, 따라서 신학은 학문에서 배격되기에 이르게 됩니다. 존재 이유로서의 학문은 힘을 잃게 되었고, 존재 가치로서의 학문이 자리를 굳게 하고 있는 것이 서양의 오늘입니다.
관념적 사변철학은 물론이고 과학에 의해서 존재의 온전한 해명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서양의 과학자나 철학자들이 동양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고, 그런 가운데 우리나라의 퇴계를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존재 이해에 대한 철학적 태도에 있어서 서양은 객관적, 논리적, 분석적인데 비해서 동양은 주관적, 직관적, 종합적이라고 알려져 왔습니다. 이렇듯이 존재에 대한 시각의 차이가 동양과 서양을 갈라놓았습니다. 서양은 존재를 객체화하려고 했고 동양은 그런 태도를 즐겨하지 않습니다. 동양은 모든 것을 자기 중심에서 바라보려고 했으며, 자신과의 관계성 속에서 파악하려고 합니다.
그런 까닭에 서양은 외면에서 찾으려고 했고 동양은 내면에서 찾으려고 했습니다. 근래에 서양은 칸트가 등장하면서 존재의 내면을 무의식의 세계로 이해하기 시작했지만 동양은 마음의 영역을 통해서 이미 확고하게 이것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영성에 있어서 마음자리가 중요하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지만 그 대부분의 학설이 미국에서 나온 것입니다. 마음의 움직임에 대한 연구가 해부학적으로 과학적으로 다루어졌고, 이 역시 서양의 사고구조인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관계로서의 내면을 소홀히 다룬 측면이 있습니다.
퇴계는 “심학도”(心學圖)라는 도식을 그려 마음에 대한 설명을 하였습니다. 이 그림에서 마음을 몸 전체의 주재(主宰)로 보았고 그 속에는 허령(虛靈), 지각(知覺), 신명(神明)이라는 세 가지가 있으며 이것은 양심, 적자심(赤子心), 인심(人心), 본심, 대인심(大人心), 도심(道心)으로 구성되며, 이것들이 정밀하게 선을 선택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마음의 주재는 경(敬)이라고 설명하며, 이는 맹자가 40세에 마음이 동요하지 않은 상태이며, 공자가 70세 때 마음이 바라는 바대로 행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적자심이란 욕심이 어지럽히지 않은 양심이며, 인심은 욕망에 깨친 마음이며, 대인심은 의리가 모두 갖추어진 본심이며, 도심은 의리에 깨친 마음입니다. 의리란 성경적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욕심이란 그리스도의 의와는 상관이 없이 자신의 내면에서 비롯된 하고자 하는 욕구 즉 탐심(greed)을 말합니다.
이런 마음의 주재는 다시 여러 가지 상태로 나누어지는데, ‘마음을 바르게 함’, ‘흩어진 마음을 찾음’, ‘마음이 제 자리에 있음’, ‘자신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감’, ‘홀로 아는 마음을 삼감’, ‘한결같이 굳게 잡음’, ‘경계하고 두려워함’, ‘잡아서 보존함’, ‘마음으로 생각함’, ‘마음을 기름’, ‘마음을 다함’ 등입니다. 이런 마음 상태를 ‘경’(敬)이라고 하며 이것을 마음의 주재로 보았습니다.
이런 경의 상태로서 마음을 보존할 때 ‘마음이 바라는 대로 행하는’ 종심(從心)이 되며, 이는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이 자기의 기쁜 뜻을 위해서 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것”(빌 2:13)과 같은 내용입니다. 이것이 곧 마음의 본체이며, 바라는 것(欲)이 곧 작용이며, 본체가 곧 도(道)며, 작용이 곧 의(義)이며, 말소리가 음률이 되며, 몸이 법도가 되어 ‘생각하지 않고도 얻고 힘쓰지 않아도 들어맞게 됨’(不勉而中, 不思而得: 중용 20장)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역시 로마서가 가르치는 내용과 일치합니다. 바울은 이런 상태를 은혜로 설명했고,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이 우리 죄를 감당하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아무런 행위 없이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퇴계는 이런 마음 상태(敬)를 통해서 자신의 본성을 바라볼 수 있으며, 이런 마음 상태를 공부하는 자세로 ‘흩어진 마음을 찾는 것’(求方心)으로부터 시작할 것을 설명합니다. 마음이 거기에 있음(心在)을 깨닫지 못하면 ‘경’의 상태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대학’(大學)의 전 7장에서 ‘마음이 그곳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마 6:21)에서 비유로 설명한 것처럼 관심이 곧 마음을 기울게 하는 요소임을 가르칩니다. 따라서 영성적 삶이란 마음이 어디에 존재하는가를 살피는 것(求心)입니다.
이 ‘심학도’는 원래 정 복심이 지은 것인데, 퇴계는 그의 저서인 ‘사서장도’(四書章圖 )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이 글이 심 민정이 지은 ‘심경주부’에 실려있었는데, 이 논리를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 자신이 ‘심경후론’이라는 일종의 변증서를 지었습니다. 퇴계는 ‘심경주부’와 ‘심학도’를 옹호함으로써 이후에 한국 유학이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治心)을 강조했습니다. 새 영을 부어주고 새 마음을 주어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을 가르칩니다.(겔 36:26) 성경은 마음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책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마음자리는 절대적입니다. 마음의 동기가 어떠한가에 따라서 이미 그의 존재성이 결정됨을 가르칩니다(마 5:28).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는”(롬 10;10) 것으로 구원을 설명한 바울의 입장도 흩어진 마음을 찾는 것의 중요함을 일깨워줍니다.
퇴계는 그의 저서 “聖學十道”에서 특히 마음자리에 따른 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1568년 68세가 되는 나이에 당시 17세의 소년이었던 선조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판중추부사로 임명되어 이 책을 저술해서 왕에게 바쳤습니다. 그 후 도산서원에서 이 책은 교과서로 사용되어 조선 유학의 기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시절에 우리 조상들이 관계성으로서의 실존을 이해하였다는 점에서 하나님이 만물 가운데 그 뜻을 넣어둠으로써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식을 부인할 수 없게 하셨으며, 유학은 하나님의 복음이 없는 조선에서 하나님의 본성을 좇아서 행한 학자들의 신인식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며, 이는 동양의 정신이며, 우리 민족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본성을 드러내시며, 그런 까닭에 사람이 핑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우리 조상들의 마음 다스림을 제대로 이해할 때 우리는 유물적 대립으로 일관한 서양의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로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을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마음이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그 가르침을 삶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를 고민했던 우리 선조들의 노력을 퇴계학을 통해서 알게 될 것입니다.
출처..갓피플...영성 사역원..글..장봉운목사...불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