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2:25-38 인생은 해석이다[67]401.417
요셉의 호의(25절,43:23)25절에 보니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인의 돈은 그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 요셉은요 자기의 신분을 숨긴 채로 베풀 수 있는 최대의 호의를 베푼 겁니다. 돈을 몰래 다시 자루에 넣어 주었어요. 이것은 후에 형들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나쁜 의도로 한게 아니었어요(28절). 43:23을 보면 이 문제에 관해서는 추호도 추궁이 없이 안심시켜주고 있는 것을 보게됩니다.[43장 23절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내고] 그러니까 자기 가족들에게 어떻게 돈을 받고 곡식을 있느냐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아요. 뿐만 아니라 길 양식을 주었다고 그랬어요.25절 형들이 산 곡식만 준게 아니라 여행하는 동안 먹을 곡식을 공짜로(싸비쓰로) 더 주었어요. 이렇게 길양식을 따로 준 이유는 아마도 곡식 자루를 풀어보면 돈이 들어있는 것을 발견할까 봐 집에 도착할 때까지 곡식 자루를 풀어보지 못하게 양식을 따로 준 것 같습니다. 사실 요셉은 형들을 마음으로는 이미 용서해준 것입니다.
이런 요셉의 은밀한 호의 속에서 형들은 길을 떠났습니다. 창42장 26절 그들이 곡식을 나귀에 싣고 그곳을 떠났더니 곡식을 구했으니 당장 우리 모든 식구들은 굶어죽지는 않겠구나 하는 안도감도 있었겠지요. 그리고 돌아가서 인질로 잡혀있는 시므온의 아내나 아이들에게는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하는 착잡한 마음도 있었을 겁니다.
어느덧 하룻길을 가서 밤이 되었어요. 그래서 여관에 들어갔습니다. 성경에 객점이라고 나왔는데 이 객점은 오늘날과 같은 시설을 갖춘 여관이 아니라 단순히 잠만 자는 곳입니다. 여기서는 사람이나 짐승이 먹을 음식까지 파는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27절에 보면 요셉의 형들 중 한명이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곡식 자루 중 하나를 푼 것입니다. 27절 한 사람이 객점에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풀고 본즉 그 돈이 자루 아구에 있는지라 왜 우리가 단체로 놀러 가면 식사당번 설거지 당번 청소당번 이런걸 정하잖아요? 27절에 나오는 이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형제중 나귀 당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준 길 양식은 사람 먹으라고 준 거니까 짐승 먹을 것은 원래 곡식 자루에서 줄 생각이었던 모양이지요. 그런데 자루를 열어보니 뭐가 들어있었어요? 돈다발이 들어있는 겁니다. 그래서 기겁을 해서 형제들에게 말을 합니다. 28절 그가 그 형제에게 고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 일을 행하셨는고 하고
돈에 대한 반응1-두려움(28절)28절 혼이 나서 떨며 - 히브리 원문상으로는 혼이 나가서 라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정탐꾼으로 의심을 받아 혼이 났는데 이제 엎친데 덥친 격으로 돈까지 훔쳐온 꼴이 되었으니 목숨이 위험한겁니다. 28절 하반절에서 뭐라고 말합니까?"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 일을 행하셨는고 하고" 그런데 이말은 언뜻 들으면 굉장히 신앙적인 말 같습니다. 어떤 점에서 우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이런 일을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나 형들이 한 말은 이와는 다릅니다. 형들은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노력한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않고 있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면 돈을 돌려 주었어야합니다. 그런데 돈을 돌려주지 않고 그냥 집으로 가거든요? 그런걸 보면 이 말은 이일을 행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께 원망을 한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세상에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어쩌자고 일을 이렇게 꼬이게 하시나 말이야"
부정적 해석-본문에서 요셉의 형들은 요셉의 호의를 오히려 함정이 아닌가, 나쁜 뜻으로 도적 누명을 씌워 우리를 해치려는 속셈이 아닌가 하고 오해를 했던 것입니다.
참 재미있지요? 선한 행위가 오히려 두려움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기까지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경의 전후를 알기 때문에 형들의 해석이 틀린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요셉의 형들이 되어 이런 일을 막상 당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어떻게 해석했겠습니까? 세상에는 늘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늘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살다가 부딪히는 여러 사건들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편입니까? 아니면 대부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편입니까?
요셉의 호의까지 부정적으로 보고 염려하는 형들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의 호의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습니까? 잘해줘도 이거 나쁜 의도로 잘해주는 척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까? 요셉의 형들이 터무니 없는 걱정을 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한번 침체에 빠진 사람들은 모든 일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정탐꾼으로 몰린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 일도 부정적으로 보고있는 것입니다.
돈에 대한 반응2-횡령(29,35절)28절 그가 그 형제에게 고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 일을 행하셨는고 하고 여러분, 28절에서 요셉의 형들이 자루 속에 돈이 있는 줄을 알고도, 걱정을 하면서도, 29절에서 어떻게 합니까? 그냥 가나안 땅으로 갑니다.
25절을 보니 자루마다 돈을 넣었다고 그랬어요. 25절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인의 돈은 그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 아마도 형제 10명이 돈을 다 나눠 가져갔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각자에게 곡식자루를 주었을 테니 아마 9-10개 자루가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객점에서 돈을 발견했을 당시는 돈이 몇개의 자루에 들었는 줄 알았어요? 실수로든 함정이든 돈을 발견한 그 한 자루에만 들어있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집에 가서 곡식자루 끌러보니 자루마다 다 돈이 들어있는 거예요. 35절 각기 자루를 쏟고 본즉 각인의 돈뭉치가 그 자루 속에 있는지라 그들과 그 아비가 돈뭉치를 보고 다 두려워하더니 그걸 보고 야곱만 놀란게 아니라 형제들도 또다시 놀랐습니다. 한 자루인줄 알았더니 모든 자루마다 돈이 다 있구나. 그렇다면 곡식 값 중 일부만 안 준게 아니라 하나도 돈을 안 준게 되어버리는 겁니다. 일이 단순 한게 아닙니다. 문제가 심각해 진거예요. 객점에서는 한 자루에만 실수로 돈이 들어간 줄로 생각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갔던 겁니다.
사실 본문의 요셉 형들도 실수로 돈이 더 오면 어떻게 했어야 했겠습니까? 돌려주어야지요. 그런데 그들은 돌려주러 돌아가지 않았어요! 11절에서는 스스로 독실한자라고 자처했지만 금전에 있어서 정직하지 못했던 겁니다. 물론 그 문제 때문에 돌아가서 돈을 반납하면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몰라. 두렵지만 그냥 집으로 돌아옵니다. 시므온의 안위를 모른체하고 그래서 그냥 집에 돌아가 야곱에게 보고 합니다.
33-34절 그 땅의 주 그 사람이 우리에게 이르되 내가 이같이 하여 너희가 독실한 자임을 알리니 너희 형제중 하나를 내게 두고 양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들의 주림을 구하고 너희 말째 아우를 내게로 데려 오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탐이 아니요 독실한 자임을 내가 알고 너희 형제를 너희에게 돌리리니 너희가 이 나라에서 무역하리라 하더이다 하고
33절 너희 집들의 주림을 구하고 - 그들의 보고 중에는 한 사람을 볼모 잡힌 후 베냐민을 데려오라는 요셉의 명령을 거론하지 않았다(16절). 즉 시므온이 구금된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될 수 있는 한 늙은 야곱에게 심적 부담을 주지 않기 의한 방도인 듯하다. 이것도 좋은 의도로 한 일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십니다. 자녀들에게 문제가 생겨도 사실대로 말씀드려야 합니다.
안 그러면 나중에 아시고 소외감을 느끼시는 거예요. '나 늙었다고 이 녀석들이 속이는구나. 난 필요 없는 존재라는 거지?'
이제 어려운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합니다. "아버지 베냐민을 데려가야 시므온도 돌려주고 앞으로도 곡식을 살수 있다는데 베냐민을 저희와 함께 보내주세요." 34절 너희 말째 아우를 내게로 데려 오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탐이 아니요 독실한 자임을 내가 알고 너희 형제를 너희에게 돌리리니 너희가 이 나라에서 무역하리라 하더이다 하고
그러자 이말에 대해 야곱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36절 그 아비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로 나의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36절 너희가 나로 나의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야곱은 자신의 자녀들이 하나 둘 자신에게서 없어지는 것같은 위기 의식을 느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우리가 가진 것 이 하나둘, 없어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 가진 것을 다 빼앗아 간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야곱의 피해망상이었습니다. 아들들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없어진 아들도 다시 돌아오기 직전이었습니다. ▲ 승리자는 "제가 넘어졌습니다."라고 말하지만 패배자는 "누가 밀었습니다!"라고 말한다. ▲ 승리자-"당신 덕입니다" 자신의 성공을 다른 사람의 덕으로 돌리지만 패배자-"당신 탓입니다"자신의 실패를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린다.
여러분도 야곱처럼 다른 사람이 내게 손해를 끼치고 있다고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야곱의 탄식에는 여러 가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니 자루에 돈이 다 들어있는 걸 보니 너희들이 혹시...제 버릇 개 못준다고...평소에 하던 대로 약탈하거나 사기 쳐서 곡물을 가져온 것이 아니냐?" 이걸 우려하는 겁니다. "베냐민을 달라고? 이 돈을 보니 너희들 하는 말도 다 내게 해롭게 하려고 하는 말인 것 같구나." 물론 이렇게 불신을 받는 데는 아들들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야곱이 자녀들을 지나치게 못 믿는 것은 아닙니까? 37절에서 르우벤은 자기 두 아들을 두고 맹세하면서 베냐민을 보내달라고 하지만 야곱은 끝내 아들들을 믿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슬럼프에 빠진 야곱을 발견합니다. 야곱은 어려운 상황을 만나서 한 가지를 잊고 있습니다. 과거에 하나님이 도우신 것을 생각도 못하고 있습니다. 약 5 : 13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찌니라
전에는 어려운 위기를 만나서 얍복 강가에서 밤새도록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했는데 본문에서는 얍복 강가 같이 하나님께 매어달리는 모습이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 어려움을 만나면 다른 사람을 원망하십니까? 다 나를 해롭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주변 사람에게 화살을 돌리십니까? 여러분, 야곱처럼 우리에게도 얍복강이 있습니다. 벧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당한 어려움에서 과거 얍복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벧엘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슬럼프에 빠져 계시지는 않습니까? 과거 왕년에 신앙생활 끝내주게 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이 중요합니다!시험에 대한 자세(고전10:13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하시느니라)
야곱은 다 나를 해롭게 하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학교 시험이 나를 해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게 맞는 말일까요? 시험공부를 해서 학생의 실력을 향상시키려는 의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시험만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길을 주십니다. 그러면 시험은 걱정할 필요도 없을까요? 그래서 감당은 할수 있지만 조금은 힘듭니다.
그런데 이 조금 힘든 것을 못 참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당하는 시험도 그렇습니다. 절대 식은죽 먹기 처럼 쉬운 시험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야곱처럼 뒤로 자빠져서 원망만하고 계시겠습니까? 아니면 시험을 이기기 위해 노력하시겠습니까?
특히 본문의 야곱이 놓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입니다. 다 나를 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중이었습니다(롬8: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은 잃었던 요셉과의 극적인 상봉으로 인도해 가고 계시는 분이었습니다. 야곱은 현재 다 이롭게 되어가고 있는데 정반대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당시에 야곱은 이런 일을 전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믿습니다.
이처럼 우리 자신의 앞길은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도 우리 앞에 먹구름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더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중인데 우리가 공연히 탄식, 불평, 고민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성도에게 의미 없는 고난을 결코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요즈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어떤 일들입니까? 여러분의 인생이 요즘 어려움을 만나고 있습니까? 뭔가 일이 꼬여가고 있는 중이 아닙니까? 그런 가운데 내 인생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습니까? 뭔가 일이 꼬여갈 때, 하나님이 내인생을 꼬고 계시다고 느껴질 때,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를 놓고 계시는 중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결론-에디슨이 어렸을 때 기차에서 신문팔이를 하며 틈틈이 공부했다. 기차에서 실험을 하다가 기차가 흔들려 불이났다. 불을 끄고 난 뒤 차장이 뺨을 때리고 기차 밖으로 내동댕이쳤다. 기차밖으로 떨어지면서 뇌를(?)다쳐서 귀를 먹었다. 후일에 에디슨이 말하길 "귀먹은 것을 감사합니다. 내 귀가 안들렸기 때문에 집중이 잘되었고 연구를 잘할 수 있었다."지금 내게 닥친 답답한 일들이 전화 위복이 될 것을 믿으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안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얍복강 가의 하나님을 잊고 슬럼프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을 내 눈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해석하고 내인생의 조각을 짜맞추어가시는 주님의 놀라운 섭리를 체험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