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14 금요성령집회 / 조원 목사
말씀 : 데살로니가전서 1:1-8
제목 : 믿는 자의 본이 되는 이유
2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
진실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주안의 성도들이 교회로 나와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마음껏 찬양하고
소리 높여 기도하며 말씀을 듣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매일의 삶을 되돌아보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셨고, 내가 계획했던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원하지 않은 고난과 아픔 속에서도 묵묵히 살아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제 그렇게 돌보시고 인도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심에 감사하여 귀한 예물을 드리오니 이 예물을 기뻐 받아 주시옵소서.
그리고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그 기도의 제목도 받아주셔서
기도의 제목들이 응답받는 시간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을지라도, 기도하다가 주님을 만나고 우리가 구한 것보다 더 귀한 주님의 은혜를 부어 주시옵소서.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합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시고 깨우쳐 주셔서 그 말씀이 우리 마음에 새겨지는 귀한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부족한 종의 마음과 생각과 입술을 주장하여 주셔서 주신 말씀 증거하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성령님께서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오늘도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주의 성전에 오신 우리 주안의 성도들을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의 능력을 붙들고 함께 기도함으로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누리는 귀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즘 우리는 많은 매체들을 통해서 다양한 소식들을 듣고 있지요.
그 소식들 가운데 보면, 진짜도 있고 가짜도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보니까 '가짜 뉴스 판별법'이라는 것도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 보니까 8가지로 소개되어져 있는데, 대부분 여기에 다 포함되어져 있더라고요.
뭐냐 하면, 뉴스 형태의 경우 '해당 뉴스의 도메인이나 URL 주소를 확인해라'
좀 어려운 말이지요. 뒤에 가면 쉬워집니다.
'제목과 본문 내용이 일치하는지 확인해라' '출처를 확인해라' '발행일을 확인해라'
'비판적으로 일방적인 주장 여부를 확인해라' '모든 정보 자세히 관찰해라'
'사진이나 동영상 보안 및 기사 내용과 연관성을 확인해라'
복사 붙여넣기, '복붙'이라고 얘기를 하는데, '복사 붙여넣기인지 확인해라'
결국은, 뉴스를 보면서 확인하라는 거예요. 이게 더 어렵겠더라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다 보니 미국의 뉴저지에서는 학교 정규 과정 가운데
'가짜 뉴스 판별법'이라고 하는 과정을 신설해서 필수 과정으로 넣었다고 최근에 뉴스에 보도가 되었습니다.
또, 서울시 평생교육원에서도 이 가짜 뉴스 판별하는 과정을 개설해 놓고
전문가 양성반도 하고, 필수과정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이 과정을 이수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참 세상이 발달되기는 했지만, 여러 가지 소식을 접함으로 우리가 구별해야 할 가짜 뉴스들이 참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가짜뉴스, 지금이야 가짜뉴스라고 얘기하지만, 옛날에는 '헛소문' 혹은 '소문' 이렇게 이야기를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소문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찾아보니까,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세상에 떠도는 소식'이라는 것이에요.
여기에는 진짜도 있고 가짜도 있고, 쉽게 말하면, 누군가 만나서 편히 주고받을 수 있는 얘기인데,
근거 없는 얘기일 수도 있고 근거 있는 얘기일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혹시 우리 주안교회에 대해서 어떤 소문을 듣고 계신가요?
혹은 여러분 개인에 대해서는 어떤 소문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소문' 혹은 '루머'라는 하는 단어를 여러분은 어떤 뉘앙스, 어떤 마음으로 이 단어가 다가오나요?
긍정적인가요? 부정적인가요?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이 소문이라는 의미에 해당하는 단어의 뉘앙스는 부정적인 의미 뿐만 아니라 사실은 긍정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에 드러난 소문이 어떤 것인지를 판별해 보면
'아, 이것이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이었구나'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의 배경을 좀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2차 선교여행을 하면서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어요.
지금의 터키 지방인데, 이 내륙을 관통해서 쭉 북쪽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런데 설령님께서 그 길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막으십니다.
그러니까 무시아까지 서쪽으로 가서 서쪽에서 조금 더 올라가는 '드로아'라고 하는 항구가 있습니다.
그 항구에 딱 있었는데, 저쪽 마게도니아 지방에서 어떤 한 사람이 나타나 드로아에서
'들어와', '들어와' 이런 환상의 소리를 들은 거예요.
그래서 드로아에서 들어간 곳이 네압볼리이고, 배 타고 네압볼리로 넘어가서
차로 한 20분 정도 가니까 빌립보라고 하는 도시가 있더라고요.
그곳에서 첫 성에서 루디아라고 하는 여인을 만나서 그곳에서 개척을 하고,
이제 데살로니가로 간 것입니다. 한 180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차로 2시간 거리 정도 되는 아주 예쁜 항구 도시입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니까 거기로 가서 세 이레 동안 복음을 전했다라고 말을 해요.
세 이레 동안 복음을 전했는데,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이 이 말씀을 잘 받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유대인들이 핍박하고 이교도들이 핍박하니까 사도 바울이 견디다 못해 이제 아덴으로 다시 내려가게 됩니다.
세 이레 동안 복음을 전했는데, 피신해서 내려오고 난 다음에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가르치다가 그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떻게 됐는지 너무 궁금한 거예요.
그래서 아덴이라고 하는 곳에서 디모데를 시켜 "야, 그 교회 어떻게 됐는지 한 번 가 봐라"
그리고 가서 디모데가 보고, 그 내용을 들고 와서 고린도에서 바울하고 만나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식을 전합니다.
바울이 그 소식을 듣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편지한 것이 바로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여러분, 이 내용들을 보면, '아 바울이 얼마나 기뻐했는지'를 오늘 본문 속에서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를 본받는 자"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또 뿐만 아니라,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의 믿음이,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다"라고 바울이 칭찬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궁금하잖아요.
도대체 어떻게 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살았길래
이 믿음의 소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곳에 퍼져 나갔을까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어떤 모습을 보고 칭찬했는지를 보며
함께 기도하고, 우리도 그 길을 따라가고자 다짐하는 그러한 시간이 되려고 합니다.
먼저, 3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3절)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여러분, 데살로니가 교회에 드러난 소문은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겠지요.
오늘 본문 말씀에 다 나왔습니다. 첫 번째,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
이 세 가지 소식이 "끊임없이 들려 왔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사도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그런데 우리가 인제 여기서 하나 생각을 해야 됩니다.
여러분 믿음이 뭐지요? - 오랫동안 교회를 다녀왔어요.
그런데 "믿음이 뭐예요?"라고 물어보면 뭔지는 아시겠죠. 설명을 잘 못하겠습니다.
"사랑이 뭐죠?"라고 하면 이게 뭔지는 알겠는데 설명이 잘 안 됩니다.
"소망은 뭔가요?"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사도 바울이 너무너무 친절하게 "믿음, 소망, 사랑" 이 옆에 단어를 하나 나란히 씁니다.
그래서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
이 세 가지를 설명하면서 '야, 이게 이런 뜻이었어?'
그래서 "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믿음 안에서 이렇게 서 간 거야"라고 칭찬한 것입니다. 그 의미를 조금 살펴보고자 합니다.
* 믿음의 본이 되는 세 가지
1. 믿음의 역사
첫 번째 [믿음의 역사]입니다.
"믿음의 역사" - 믿음의 역사를 좀 쉽게 풀이해서 쓰면, 믿음으로 말미암은 역사, 믿음에서 비롯된 역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이 뭐냐?"라고 물어 봤잖아요.
그 믿음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셨어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일을 지금도 행하십니다.
그 행하심을 우리가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나타나는 성도들의 행위를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것을 믿으시지요. 그렇지요.
그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어요.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지 내가 알아요.
그 사랑을 앎으로 나타나는 행동, 그게 '믿음의 역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은 이런 것입니다.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인해서 그동안 그들이 잘못 믿었던 우상들을 다 가차없이 버리고,
"나는 이제 하나님만 따라가겠습니다"라고 행동으로 드러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게 뭐 이렇게 어렵냐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여러분 지금이 아니라 2천년 전으로 돌아가서 그 당시 문화도 생각을 해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데살로니가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그곳은 행정상으로 상업상으로 굉장히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각종 우상들이 난무했던 곳이었어요. 그러니까, 우상을 섬기는 일과 그들의 삶은 같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주 우상숭배가 강한 도시 중의 하나가 데살로니가였어요.
그런데 그곳에서 "내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르겠다"라고 하는 것은 내가 내 삶을 포기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왜냐하면, 같이 어울려 살아가기가 너무 힘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 안에서 내가 지금까지 따라왔던 그 우상으로 말미암아 밥 먹고 살았고,
그 우상으로 말미암아 내 삶이 평안한 안위를 유지했던 그것인데, 그것들을 다 버렸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우상들을 버림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하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
바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드렸지만,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많은 핍박이 있었어요.
그 핍박 속에서도 그들은 흔들리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그대로 다 드러냈습니다.
끝까지 견디고 참으면서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다라고 성경은 말하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믿음의 역사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하면,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하는 우리의 삶의 모습이 드러나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을 내가 정말 믿는다면,
내 삶의 자리에서 나의 행동을 통하여 내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임을 드러나야 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으면 야고보 사도가 말했던 것처럼, 죽은 믿음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들었던 이야기 중에 아직도 기억에 남는 얘기가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이 답을 해 보십시오.
무당이 신내림을 받지 않습니까? 아시나요? 작두를 타요. 저는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냥 소문만 들었어요.
진짜 작두를 탔는지 안 탔는지는 모르지만, 어떤 분한테 물어보니까 진짜 작두를 탄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뭐 그분들이야 그렇게 타든지 말든지 우리는 상관할 바는 아니고,
무당이 신내림을 받으면, 신내림 받았다라고 하는 증거(작두를 타는)가 드러나요. 그렇지요.
그러면 이제 우리한테 물어보자는 거예요.
여러분은 하나님 믿으시지요?
조금 전에 이홍섭 목사님이 뜨겁게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선포하고,
우리가 그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고, 그 능력으로 살아가자라고 기도도 했어요.
여러분,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심을 여러분 믿으시지요.. 그러면, 이제 조심스럽게 대답하셔야 됩니다.
"내 안에 성령님 계시면,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하면, 나의 구원자 되시는 그 예수님을 내가 믿는다라면,
여러분, 그 믿음의 행위가 내 삶 속에서 정말 드러나십니까?"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해 심각하게 답해야 할 질문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이 내주하여 계신다라고 한다라면
내 삶을 통하여 정말 그 하나님이 그 예수님이 그 성령님이 드러나느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때때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 앞에 놓여진 삶의 무게들 때문에 온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을 외면할 때가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그렇게 대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원망과 불평을 할 때도 있습니다.
삶의 무게들 때문에 목 놓아 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선한목자교회 유기성 목사님의 책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등장하는데요.
유기성 목사님의 장인 되시는 분이 누구냐 하면, 종교 교회의 담임목사님이셨던 박신원 목사님이십니다.
40세 때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돼요. 그 당시 박 목사님께서 세상을 떠나셨을 때 자녀가 넷이 있었는데,
큰 따님이 지금 유기성 목사님하고 같이 살고 계시는 사모님이시고 고3이었고, 막내가 고1이었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4남매를 고스란히 남겨두고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셨어요.
그리고 사택도 곧 비워야 되고, 먹고 살 일도 막막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리 사모님이시지만, 아무리 믿음이 좋으시지만,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염려할 수 밖에 없겠지요.
그런데 하필 그때 재정을 담당하시는 장로님이 오셨어요.
그래서 사례비와 퇴직금, 그리고 장례 때 들어온 조의금을 모두 모아서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교회에서 드리는 마지막 생활비입니다.' 그리고 나가셨다는 거예요.
그 봉투를 들고, 사모님이 교회에 가셔서 펑펑 울며 하나님께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요. 어디 가서 살아요. 아이들은 어떻게 키워요?" 밤새 이렇게 놓고 기도했대요.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더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남편을 불러가실 때에는, 다 뜻이 있을텐데..
하나님께서 나와 아이들을 능히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킬 텐데 내가 왜 이렇게 걱정하지"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더라는 거예요.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자, 슬픔과 두려움의 기도가 감사의 기도로 바뀌었답니다.
이렇게 바뀌었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다 책임져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먹을 것도 공부시킬 것도 다 마련해 주실테니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새벽기도 시간이 되어서 눈을 떠보니까 앞에 봉투 하나가 있더래요.
열어보지도 않고, 하나님께 그대로 감사헌금으로 드리고 나오셨다고 합니다.
유기성 목사님이 이렇게 고백하더라고요. "믿음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기적이구나" 라고 말해요.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백성들은 그 사랑이 너무 커서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고난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랑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다라면 그 어떤 것도 이겨낼 힘이 있다"라고 유기성 목사님이 고백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믿는 믿음을 통하여
내 안의 하나님, 그 주님 그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드러나야 될 줄로 믿습니다.
2. 사랑의 수고
두 번째는, [사랑의 수고]
"사랑의 수고"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아가페'가 맞습니다.
여러분,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들,
이 죄인들을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고 그 은혜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거잖아요.
그러면 받은 은혜를 나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사랑의 수고'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수고'라는 단어가 재미있는 단어인데, '피곤할 정도의 노동'입니다.
녹초가 될 정도로 내가 고된 일을 할 때 쓰는 얘기가 '수고'라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인들은 세 이레 동안 사도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사실 조금 의아하긴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길래 그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와 사랑을 그들이 깊이 경험하고,
그 경험한 사랑으로 누군가를 사랑했을까? 수고했을까? 라고 의구심은 들지만,
오늘 이 '사랑의 수고'가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에게 드러났고,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의 본이 되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이 깨달아지자, 그들이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는 사랑의 수고가 반드시 뒤따릅니다.
이 사랑의 수고로 인해서 가정이 세워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최근에 어떤 목사님하고 이야기를 나눴는데,
둘째를 낳고 지금 17개월 18개월 됐대요. 그런데 아침마다 깨서 안아 달라고 운답니다.
그래서 그 아이 보다가 지금 8kg가 빠졌대요. 누구신지 상상은 하지 마시고, 네 그런 분이 있더라고요.
그 목사님이 저한테 그랬어요. '목사님, 8kg가 빠져도 별로 티가 안 나지요?' 그런데 너무너무 힘들다고 그러더라고요.
여기 계신 우리의 여성분들 권사님 집사님들 그런 수고가 다 있으셨잖아요.
저도 아이가 셋인데, 큰 애가 다른 사람한테는 안 갔어요. 제 아내한테만 갑니다.
제가 안아도 울어요. 그래서 제가 기억이 나는데 진짜 너무너무 울어 가지고 조심성 있게 침대에다 한번 던진 적이 있었습니다.
새벽기도를 가야 되는데 애가 밤새도록 안 자고 우니까 너무너무 화가 나더라고요.
그런데 확 던지면 다치니까, 조심성 있게 던졌습니다. 지금 그 애가 저보다 훨씬 더 큰 애가 됐는데,
부모님들의 수고가 있었기 때문에 그 아이들이 큰 것 아니겠습니까... 대가를 바라지 않아요. 그냥 주는 겁니다.
여러분 교회는 어떤가요?
제가 늘 우리 교회 성도님들을 보면, '아 이분들 참 대단하신 분들이다'라는 생각을 하는데,
우리 교회는 예수사랑 큰잔치를 예전에는 1년에 2번 했었고, 이제 몇 해 전부터는 1번 하고 있는데,
여러분, 코로나 이후에 다시 예수사랑 큰잔치를 하면서 걱정했어요. '이 분들이 이걸 할 수 있을까?'
아, 그런데 예수사랑 큰잔치 선포하고 나면, DNA가 발동이 되셔서 여러분들이 자동적으로 전도자로 다 바뀌시더라고요.
물질로 후원하시고, 몸으로 봉사하시고, 모여서 기도하시고, 나가서 전도하시고.. 이게 자동으로 발동이 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세워진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섬기던 교회에 있어서 이런 얘기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장로님이 교회 목사님의 사례비를 줘야 되는데 사례비를 줄 수가 없어서
집을 담보로 대출 받아서 목사님의 사례비를 줬다라고 하는 얘기를 제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모교회에서 우리 교회를 지을 때, 제가 아직도 기억이 나는데, 그때 인건비를 아끼려고
저도 벽돌 지고 빨간 벽돌 져서 위의 인부들한테 갖다주면 그분들이 이렇게 쌓고 하는 것을 제가 그때 했었습니다.
권사님들 바깥에서 땀 뻘뻘 흘리면서 불을 때서 밥을 해 인부들 먹이고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누군가의 수고로 인해서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여러분, 국가는 어떤가요? 여기에 머리 희끗희끗한 어르신들이
진짜 먹을 것 안 먹고 그렇게 허리띠 졸라매서 열심히 수고한 그 덕으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저는 생각이 됩니다.
여러분, 그런데 이 '사랑의 수고'의 최고의 모범은 누구냐? - 예수님이십니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여러분 죽는 것보다 더 큰 수고가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주님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그 '사랑의 수고'가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전해지진 않지만,
그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다라고 하는 것은
그들의 수고가 세 이레 동안 전해 들은 복음으로 인하여, 또 1년 6개월 동안 성장했을지는 모르지만,
그 수고가 온 지역에 퍼져 나갔다라고 오늘 사도 바울은 우리한테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런 사랑의 수고가 저와 여러분들 가운데 더 드러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소망의 인내
세 번째는, [소망의 인내]
"소망의 인내"가 있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소망은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것이 아닌 것을 알고 계시지요.. 이것은 우리 주 예수님에 대한 소망입니다.
이 소망은 성도와 교회 가운데 구원의 일을 시작하신 성령님께서
앞으로도 계속 이루실 것을 기대하는 그 마음을 가리켜 '소망의 인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그 소망이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많은 시간 동안, 오랜 시간 동안 견디고 참아야지만이 이루어지는 일들이 훨씬 더 많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소망은 현재의 고통스러운 상황들을 기쁨으로 묵묵히 견뎌내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그것은 인내할 때만이 그 소망의 열매를 우리가 얻을 수 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소망이 있는 사람들은 어떤 고난과 역경이 있다 할지라도
무너지지 않고, 장차 올 그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가게 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 자체가 이 소망의 약속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금방 받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25년 후에 아들을 얻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40년이 지나야 지도자로 세워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70년이 지나야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오기도 하고, 이런 역사들이 계속해서 이루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경 속에서 보면,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구약 2천년 그리고 2천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우리는 그 예수님이 오심을 소망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소망은, [부활의 소망]입니다.
여러분, 부활의 소망은 언제 이루어질까요?
[부활의 소망] -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 죽어야 됩니다.
원하던, 원하지 않던 우리는 다 죽어야 됩니다. 죽어야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럴려면 정말 오래 참으셔야 돼요.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합니다. "인내" - 견뎌내는 힘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그 인내를 통하여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의 말씀들이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
우리가 영광의 면류관으로 생명의 면류관으로 쓸 수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은 핍박 가운데서도 박해 가운데서도 견뎌내면서
이 소망의 인내를 가지고 그들이 믿음으로 살아갔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늘 고민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 우리도 다 이루고 싶지요. 그렇지요..
그런데 잘 되지 않습니다. 결단한다고, 다짐한다고, 금식 한다고 이게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기가 막히게 우리에게 아주 멋진 방법을 하나 알려줍니다.
여러분 그것이 뭐냐하면, 6절 말씀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이 말씀은 좀 큰 목소리로 읽어야 될 것 같습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여러분, 이 말씀에 참 저는 이게 막 가슴이 미어 오더라고요.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이 '환난'이라는 단어는, 포도주틀에 포도를 넣고 즙을 짜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 짓누르는 겁니다. 이 단어가 '환난'이라는 단어입니다.
포도주틀에 포도를 넣어서 짓눌러 즙을 짜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들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 환난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왔느냐?
오늘 성경은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다'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이 "받았다"라고 하는 단어는 조금 번역에 아쉬움이 있는데, 환영하는 겁니다. 말씀이 선포됐을 때, 그 말씀을 환영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쁨"이라는 것은, 성령의 열매 중에 희락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그 희락이란 단어가 기쁨이란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열매로 주어진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질 때,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심으로 그 말씀을 환영해서 받는 거예요.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심겨지니까 "어떤 환난이 오더라도 그것들을 이겨내면서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이루게 되었다"라고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을 칭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기쁨으로 받으셔야 됩니다.
매 주일 선포되어지는 말씀, 매 새벽마다 매일마다 선포되어지는 말씀,
여러분, 순간순간마다 선포되어지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기쁨으로 받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님의 기쁨으로 받으면 우리가 어떠한 환난이 온다 할지라도, 어떤 고난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삶에 큰 만리장성과 같은 장벽이 쌓여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능히 이겨낼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 오늘 이 말씀 붙들고 살아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목사님을 통해서 주신 말씀도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 스스로도 집에서 이 말씀을 읽고 그 읽은 말씀들을 기쁨으로 받으셔야 됩니다.
여러분에게 하나 질문하겠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쉬워요? 어려워요?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대답하기 곤란하시지요..
어려운 것 같은데, 어렵다라고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상황..
여러분, 사실 어렵다라고 말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왜 어려울까요?
여성분들, 혹시 집에서 식사 준비하는 것이 쉬우신가요? 어려우신가요?
뭐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뭐 쉽다고 말을 하지요.
남성분들 운전하시는 분들 운전하는 것이 쉬워요? 어려워요? 예, 쉽지요..
왜 쉬워요? - 매일 하니까...
매일 우리의 삶에 이게 탁 붙어 있으니, 그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습니까...
주일에 올 때, 혹시 성경책의 먼지 터는 분은 없으시지요.
제가 그런 얘기를 들었어요. 잠 안 올 때 성경책 베고 잔다고 하더라고요..
수면제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이 성경을 읽으시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그런 얘기를 제가 진짜 들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나와 가깝지 않기 때문에 이 말씀이 어렵다고 느껴지는 겁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말씀을 읽고 듣고 성경 공부하고 암송하고 묵상하는 훈련을 늘 같이 하면
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질 때,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처럼
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 우리가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있게 된다라고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약속의 말씀들을 우리의 마음에 새기면서 "하나님, 나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하여 "믿음의 본이 되었다. 믿음의 소문이 퍼져나갔구나"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감당했던 그 데살로니가 교회를 칭찬하셨던 것처럼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기쁨으로 받아서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이루며 살아가는 귀한 성도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나에게 주신 이 말씀들을 생각하며 우리 함께 찬양하기를 원하는데요.
이런 찬양입니다.
♬ 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나의 말엔 주가 주신 진리로~
나의 눈에 주의 눈물 채워 주소서.
내 입술의 찬양의 향기가 두 손에는 주를 닮은 섬김이
나의 삶에 주의 흔적이 되어져서 이 땅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조롱하는 소리도 있고, 세상 유혹하는 소리도 있지만,
나는 주님의 순결한 신부가 되어서
내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 믿음의 본이 되는,
그래서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져나가는
하나님의 순결한 신부가 되어지겠다라고 하는 다짐하는 마음으로
이 찬양을 함께 올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