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의 땅 ㅡ5권 21
워렌은 프린트물을 정리하는 피터슨의 손끝을 무심한 시선으로 바
라보았다. 미국 국민들이 내일 이 기사를 읽으면 대통령에 대한 배신
감으로 치를 떨 것이다. 해리슨은 탄핵을 받아 물러나고 부통령인 고
든이 대통령직을 계승하게 될 것이다.
"피터슨, 앨버트를 조심해라. 우리를 제일 악착같이 찾고 있는 놈이
그놈이다. "
워렌의 말에 피터슨이 서류를 손에 든 채 빙긋 웃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보스. 이보다 더 어려운 상황도 겪었습니다. "
"해리슨이 cia 국장직을 나 대신 더글라스에게 맡기려는 것 같다. "
더글라스는 차장이지만 행정직으로만 잔뼈를 굳힌 사랑이어서 부하
들이 잘 따르지 않는다. 해리슨은 고분고분한 국장을 원했을 것이고,
마약부의 로스만이나 FBI 국장도 cia의 격을 떨어뜨리려고 그를 추
천했을 것이다.
"이미 저쪽은 불을 질했다. 이젠 우리도 시작이다. "
워렌이 다시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동양속담에 이기면 군왕이요, 패하면 역적이라는 말이 있지.군왕
과 역적은 종이 한 장의 차이라는 말이다. 난 내 소신에 자신이 있다. "
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앨버트가 밤 늦게 사무실로 돌아오자 기다리고 있던 앤더슨이 그의
방으로 따라 들어왔다.
"보스, 여기 가져왔습니다. "
그늘 책상 위에 타이프된 인쇄물을 펼쳐 놓았다.
앤더슨의 뒤를 따라 서너 명의 부하들이 그의 방으로 들어섰으나 앨
버트는 서류를 읽느라고 머리를 들지 않았다.
"이거 대단하구만."
앨버트가 입술을 달학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의 얼굴은 시간이 지
날수록 점점 굳어져 갔다.
· 워랜은 과연 cia의 국장다웠다. 그의 폭로 기록은 시간과 장소, 그
리고 대화내용과 결정 사항이 간결하게 적혀 있었고, 그것에 대한 결
과와 대통령의 반응까지 상세하게 묘사되고 있었다.
앨버트가 언뜻 보기에도 서류의 내용은 사실이었고 법원의 증거물
로도 손상이 없었다.
앨버트는 머리를 들었다. 대여섯 명으로 늘어난 부하 직원들이 말없
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큰일이다. "
앨버트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책상 위에서 거칠게 휴지를 뽑아내어 얼굴의 땀을 닦았다. 동
전만한 휴지 조각이 람에 붙어 있었으나 아무도 그것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게 보도되면 폭동이 일어날 것이다. 아니, 세계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전쟁이 일어난다. "
그는 목이 탸는지 침을 끌어모아 삼켰다.
"FBI와 지방 경찰에는 이미 말해 놓았다. 이것은 대통령의 특별 명
령이다. 이것을 보도하려는 언론기관이나 기자가 있으면 사살해도 좋
다. 하다못해 집에서 복사기를 써서 인쇄를 한다 해도 그자를 반역죄
로 사살해라. 자, 움직여!"
부하들이 다투어 문 쪽으로 밀려 갔으므로 문 앞에서 일대 혼란이
일어나다가 순식간에 조용해겼다. 방 안에는 앤더슨이 그를 바라보고
서 있을 뿐이다.
"보스, 시간이 되었습니다. "
그가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는 시능을 했다.
밤 11시 반이 되어 있었다.
머리를 끄덕인 앨버트는 자리에서 일어딘다. 앤더슨은 본부에서 파
견된 요원이었다. 삼십대 중반으로 말품한 용모의 사내였는데, 니카라
과의 정글에서 3년 반 동안 마약조직과 전투를 치른 경력이 있다.
그들은 서늘한 대기에 덮여 있는 건물의 밖으로 나왔다.
그들이 12번가 모퉁이에 있는 cia 지부에 도착했을 때는 12시가 조
금 넘어 있었다. 앨버트와 앤더슨이 앞장 서서 현관으로 다가가자 네
명의 요원들이 뒤를 따랐다. 네 명의 요원 중에 두 명은 FBI 소속이었
다. cia 지부는 5층짜라 빌딩이었는데, 현관 간판에 '오리엔트 무역상
사'라고 조그맣게 책어 있다.
"나, 마약부의 앨버트야. 당신 지부장인 김멜을 만나러 왔어."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신사복 차림의 두 사내가 앞을 가로막듯 졌으
로 앨버트가 말했다.
앤더슨이 사납게 그들을 쏘아보았고 뒤따라 들어온 요원들이 그들
을 에워쌌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
한 사내가 겨우 입을 열었다.
"2충의 계단 바로 앞쪽 방입니다. "
그리고는 어금니를 물었는데, 자신들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눈치였
다. 그들의 보스인 워렌이 특수부 요원들을 거느리고 반역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터지러운 발자국 소리를 내면서 2충의 계단을 올라갔다. 김
벨의 방은 바로 앞쪽에 있었다.
델버트가 노크를 하자 곧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대머리가 벗겨지고
비대한 체격의 김멜이 물끄러미 앨버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앨버트, 어서 오게."
그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앨버트와 앤더슨, FBI 소속의 플레밍이
안으로 들어딘고 다른 요원들은 밖에 남았다.
"앨버트, 우리도 10분 전에 본부의 연락을 받았어. 더글라스 차장이
국장의 직무대리가 되었는데, 자네에게 적극 협조하라고 하더구만."
그들이 자리에 나누어 앉자 김벨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와 앨버트는 술자리도 몇 번 같이한 사이였다. 업무상 협조도 이
제까지는 잘 되어 가고 있었다.
"나로서는 할 말이 없어, 앨버트. 명령에 따를 뿐이야."
"김멜, 그렇다면 FBI소속인 플레밍이 앞으로 자네와 같이 행동할
거야. 이해할 수 있겠지?"
앨버트의 목소리도 부드러워졌다.
"얼마 걸리지 않을거야. 워렌의 일이 끝나게 되면 다시 원상회복이
되겠지."
"할 수 없지. 하지만 워렌은 이곳에 손을 내밀 입장이 못돼. 그놈 때
문에 직원들 사이가 말이 아냐. 직원들이 그놈을 증오하고 있다네."
"알고 었어, 김멜.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그러는 것이니까."
앨버트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준비는 되었나?"
머리를 끄덕인 김멜이 책상 위에 놓인 단추를 누르자 곧 옆쪽 문이
열렸다. 그리고는 수갑을 찬 신용만이 이맛살을 찌푸린 얼굴로 방 안
으로 들어딘다.
그를 데리고 온 직원이 김멜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뒤돌아 방을 나갔다.
"김멜, 그럼 이 친구는 내가 인수하겠네."
앨버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김멜은 책상 위에 놓인 종이 쪽지 한
장을 앞쪽으로 밀었다.
"사인하게."
"내가 하지요."
앤더슨이 나쳤다.
그가 사인을 하자 아직도 어릿거리는 신용만의 어깨를 밀고 앨버트
늘 방을 나왔다. 방에는 김멜과 플레밍이 남았다.
"내 다시는 이런 비행기를 타지 않을거여."
비행정 안을 둘러보며 최대광이 흔잣말로 투덜거렸는데, 이번의 비
행은 두 사람뿐이었으므로 고영무에게 한 말이나 같다.
"웬놈의 비행기가 이렇게 떠는지 달린 것이 다 떨어지겠어."
고영무는 의자를 뒤로 젖혀 놓고는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진동 의자에 앉은 것처럼 비행정은 끊임없이 떨고 있었다. 페
르난도가 신경써서 골라 준 비행기였는데도 이렇다.
목 안이 마른 느낌이 들어 침을 모아 삼키자 비행기의 엔진 소리가
귀를 가득 메웠다. 이제 한시간정도만 더 비행하면 LA앞바다에 내
려앉을 것이다.
고영무는 눈을 뜨고는 텅 비어 있는 비행정 안을 둘러보았다. 옆쪽
의자에 앉아 있는 최대광은 불평하는 것에도 지쳤는지 몸을 구부리고
어두운 바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밀리카는 페르난도와 함께 보고타의 공동묘지에 묻었다.
페르난도는 밀리카의 사망 소식을 듣고 달려왔는데 마치 미쳐 버린
사람 같았다. 소리내어 울다가는 주먹으로 가슴을 쳤고, 그러다가 그녀
의 시체를 껴안고 뒹굴기도 했다.
그를 달래던 고영무도 눈물을 쓸으며 함께 울었다. 그녀에게는 이제
영원히 잊지 못할 빚을 지게 되었다고 고영무는 생각했다.
그녀의 사랑을 받아 줄 수 없었던 자신이 싫었고,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구한 그녀에게 죄를 지었다고 생각했다. 밀
리카를 안았던 것은 정욕 때문이었다. 그것도 부끄러웠다.
그녀는 그것을 알면서도 이쪽을 받아들였다. 그때 그녀가 느껐을 반
쪽짜리 허전한 가슴을 생각하면 다시 가슴이 아팠다. 밀리카는 억지로
라도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했었다. 설령 그것이 진심이 아널지라
도 고영무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말만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가 마지막 순간에도 섹스를 원한 것은 아직도 미흡했기 때문이
었다. 그의 사랑이 그녀에게 전달되지 않자 굶주린 사람처럼 그저 달
려든 것이다. 육체만이라도 끌어안고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부족한 채 죽었다. 얼굴에 웃음을 띄우고 있었으나 가슴은
비어 있었을 것이다.
시선을 돌린 고영무는 최대광이 이쪽을 바라보는 것을 보았다. 커다
란 몸을 웅크리듯 의자에 파묻고는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형님, 술 한잔 드릴까요?"
그는 옆자리에 던져 놓았던 위스키 병을 들어 보였다. 술은 반쯤 남
아 있었다. 고영무는 손을 뻗어 술병을 쥐었다. 안주도 없고 잔도 없다.
마개를 벗긴 고영무는 커다랗게 서너 모금을 삼켰다. 식도를 타고
뜨거운 기운이 위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위 안에 가득
히 열기가 고였다.
"형님, 조금만, 어깨 상처가‥‥‥‥"
최대광이 고영무의 어깨를 덕으로 가리키며 말했는데,상처가 덧날
염려가 있으니 조금만 마시라는 말이었다.
고영무는 다시 서너 모금의 위스키를 삼켰다. 총알에 맞은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으나 밀리카가 밀어 내지 않았더라면 이번에는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비행정이 고도를 떨어뜨리는지 몸이 앞쪽으로 쓸렸다.
최대광이 두 손으로 의자의 손잡이를 움켜쥐고는 힐끗 이쪽을 바라
보았다.
'그래, 널 사랑하겠다, 밀리카.'
다시 술병을 입으로 가져가면서 고영무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영혼이 있을테니까 들어라, 밀리카. 너를 사랑하고 기억하마. 네가
만족할 때까지 너를 아낄 것이다. '
고진호씨는 신문을 내려놓고 찻잔을 받았다. 얼굴에 엷은 웃음기가
띄워져 있었다.
"난 조금 걱정이 되었어. 소식이 오랫동안 끊겨서 말이야."
"보고타에 가 있었거든요."
김영지는 쟁반을 두 손에 든 채 그의 앞쪽 의자에 앉았다.
"그곳에 제 집이 있고 집에서 운영하는 자동차 수리공장이 있어요."
"허어, 그럼 서울에 집이 있다던 것은."
고진호씨가 찻잔을 든 채 눈을 둥그렇게 했다.
"거짓말이었어요. 고영무씨를 찾기 위해서 그했어요."
"저런, 왜?"
"오빠와 아버지가 그 사람 손에 피살되었다고 믿었었거든요."
고진호씨는 찻잔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잔잔한 얼굴로 김영지를
바라보던 그가 이윽고 머리를 끄덕였다.
"신문에서 읽었지. 그 가족이‥‥‥‥"
"네, 제가 김영지예요. 유영미라고 거짓말을 했었습니다. "
"그래, 그놈을 찾았나?"
고진호씨가 다시 찻잔을 들며 물었다.
열띤 한낮이다. 햇살은 밝고 따뜻하게 베란다를 통해 집 안으로
비쳐 들어왔고, 바깥에서는 아이들이 노는 소리가 들려 왔다. 집 안에
는 그들 둘만이 않아 있었다. ,
"네, 찾았습니다. "
김영지는 머리를 떨어뜨리고 쟁반을 내려다보았다. 무늬가 있는 쟁
반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
그가 부드럽게 묻자 김영지는 머리를 들었다.
"고영무씨는 저회 오빠를 해치지 않았어요. 아버지도 실수로 넘어지
셔서 돌아가셨습니다. "
"저는 지금도 그것을 믿어요. 하지만,"
고진호씨는 잠자코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녀가 가슴 가득히
슬픔과 원한을 안고 살아 온 것을 이해하는 몸짓이다. 이윽고 김영지
가 머리를 들었다.
"그이는 저를 사랑한다고 했어요. 아버지와 오빠 몫까지 합해서 저
를 사랑해 주겠다고도 했어요. 그런데,"
"그런데 그것은 알고 보니까 동정이었어요. 책임감 때문이었어요."
고진호씨가 천천히 찻잔을 들어 입에 대었다.
"그는 거짓말을 했어요, 저에게."
김영지는 한쪽 손바닥을 펴서 볼에 대었다. 달아오른 볼에 찬 손바
닥이 닿자 온몸에 서늘한 기운이 번져 나갔다.
"그는 다른 여자와 살고 있었어요. 그 여자가 저에게 말해 주더군요.
고영무씨가 저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괴로워한다고,그 여자는 임신한
몸이했어요."
앞쪽에서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저는 그이에게 확인하지도 못했어요. 두려웠어요. 그래서 한국으로
왔어요."
"나쁜 놈."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에 김영지가 깜짝 놀라 머리를 들었다.
고진호씨는 탁자 위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눈을 부릅뜬 얼굴이었다.
"내 아들이 그럴 리가 없어. 만일 그렇다면 그놈은 내 아들이 아니다. "
굵고 낮은 목소리가 응접실을 울렸다.
머리를 든 그늘 김영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더 나뿐 것이다. 비열한 짓이기도 하
고. 만일 그놈이 그했다면 내 손으로 내 아들을 죽이겠다. "
"저는, 저는 그런 말씀 듣고 싶지 않아요."
마침내 김영지의 두 볼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끊임없이 물어져 나오
는 눈물은 눈에 그득히 고였다가 아래쪽으로 흘러내렸다. 아렛입술을
깨물면서 눈을 크게 떠 눈물을 막으려던 그녀는 갑자기 딸꾹질을 했다.
"저는 그냥 알고 싶고 듣고 싶을 뿐이에요. 하지만 직접 듣기에는..."
또다시 딸꾹질이 났으므로 어깨를 늘어뜨린 김영지는 길고 가느다
란 숨을 내쉬었다.
"알았다. 내가 가지. 어디냐? 그놈이 있는 곳이."
번쩍 머리를 치켜 든 고진호씨가 커다랑게 물었다. 눈물에 범백이
된 얼굴을 든 김영지가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어디
에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