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렬한 문장의 수필들
계간 ‘한국수필가’ 창간호를 읽고
이 원 성
우리나라 수필문단이 날로 팽창하고 있다. 수필 발전을 위해 바람직한 일이라 하겠으나, 이 양적인 발전에 비해 질적인 발전이 따르지 못하고 있으니 수필계의 모두가 같이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월간, 계간, 연간 등 많은 수필 전문지가 간행되고 그 수필지마다에 신인상 제도가 있다. 이 신인상을 받으면 문단에 등단하고, 등단하면 수필가가 되니 해마다 많은 수필가가 양산되어, 한국문인협회에 가입한 수필가가 1,800 여 명에 이른다. 이렇게 수필가가 늘어난다는 것은 문학 발전의 면에서 나쁠 것이 없겠으나, 질적인 향상이 기해지지 않고 있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문단공해라 할 수도 있다.
한국문인협회에서 이 많은 수필인의 발표 지면을 넓혀 창작의욕을 북돋우기 위하여 ‘계간 한국수필가’를 간행한 것은 매우 고무적이고 환영할 일이라 하겠다. 이 창간호를 반가운 마음에서 몇 편 읽어 나가다가 졸렬한 문장 내지 잘못된 문장이 군데군데 보이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밑줄을 그어가면서 읽었다. 이것을 글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문학작품의 글이라고 내어놓을 수 있겠는가고 반문하지 않으면 안 될 부분이 너무나도 많아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수필이 문학일진데 좋은 수필은 무엇보다 좋은 문장이어야 한다. 아무리 소재가 좋고 주제가 훌륭하다 하더라도 표현력이 따르지 않으면 그 뜻을 독자에게 전달할 수 없다. 표현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문장력이다. 문장력의 기본은 정확한 문장을 쓸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정확한 문장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을 어찌 글이라 할 수 있고, 문장이 엉망인 글을 문학작품이랍시고 내어놓을 수 있겠는가.
말을 하면 흥미롭게 듣는 사람이 있어야 보람이 있고, 글을 써서 발표할라치면 읽어줄 독자가 있어야 글 쓴 생색이 나는 법이다. 그런데 남이 듣지 않는데 혼자 중얼거리면 주위 사람들이 미쳤다 할 것이요, 글을 지어 놓았으나 읽어 주지 않으면 공염불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글이 읽혀지는 글이 될 것인가.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물 흐르듯이 술술 읽혀 내려가는 글이어야 한다. 술술 읽혀진다는 것은 문법에 맞는 정확한 문장이 아니면 안 된다. 문법은 문장의 작법과 구성법, 그리고 언어의 구성 및 운용상의 규칙이다. 이 법이 지켜지지 않으면 질서가 허물어진 글이 된다. 내용은 차치하고 문법에 맞게 질서정연한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 문장의 기초이다. 기초적인 질서를 어그러뜨린 글은 문학적인 글만이 아니라, 간단한 실용문일지라도 메시지 전달을 못 한다.
필자는 여기서 ‘계간 한국수필가’ 창간호에 발표된 작품들의 작품성이나 문학성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문장이 되지 않고는 그 작품의 문학성을 말할 수 없기에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의 잘못된 문장을 하나하나 지적해 보고자한다.
행복했던 시절을 찾아서(하재준)의 49쪽 말미부분에
‘나는 나의 후손들에게 이렇게 떳떳한 인생을 살아왔노라고 멋진 인생을 남기고 싶은 꿈이 그간 줄기차게 나의 가슴에 서려있었다.’라 했는데, 문장에 두서가 없다. 「떳떳한 인생을 살아왔노라고」와 그 뒤의 문장과의 호응이 안 되어 문맥이 닿지 않는다. ‘살아왔노라고’ 다음에 ‘어떻게 했다’라는 설명이 있어야 문장의 흐름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남기고 싶은 꿈이 그간 줄기차게」의 ‘그간’이 막연하다. ‘그간’은 ‘그동안, 그사이’란 뜻인데 어느 동안이란 것인지 알 수 없다. 이렇게 앞뒤가 안 맞는 글은 독자를 당황하게 한다.
산의 품속으로(정인조) 50쪽 중간쯤의
‘실은 나무나 풀, 새나 벌레, 야생동물 등의 이런 미물들의 삶이’에서 나무, 풀, 새, 벌레, 야생동물을 모두 ‘미물’이라 했는데 미물의 뜻은 ①변변하지 못하고 작은 물건, ②썩 자질구레한 벌레란 뜻인데, 나무 풀 야생동물 들을 미물이라 하는 것은 당치도 않다. 이는 스스로의 무식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승만이 김 서방(홍경식) 54쪽 끝 부분
‘잿빛 하늘에 해가 설핏해질 무렵’의 「설핏하다」의 뜻은 ‘짜거나 엮은 것이 보기에 좀 거칠고 성기다’인데 ‘해가 설핏하다’는 말은 전혀 맞지 않는 표현이다.
젊음과 시간(金章浩) 57쪽 중간 부분
‘중년이 요절하는 시대라 아침운동 인구가 증가함은 자연적 추세로’에서 「요절」의 뜻은 ‘나이 젊어서 죽음’인데, 중년은 청년과 노년 사이 즉 쉰이 가까운 나이니까 요절일 수 없지 않을까. ‘중년이 요절하는 시대’라 했으니, 모든 사람이 중년이 되면 다 죽는다는 말인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月光斷想(손홍식) 68쪽 끝 문단
‘달․ 달빛․ 달무리는 나그네에게는 길손이 되어주기도 하고’의 「길손」은 ‘먼 길을 가는 나그네’란 뜻이다. 그러니 ‘길벗’ 또는 길동무‘라야 될 것 같다. 엇비슷하다고 그냥 단순하게 쓴 것 같은데, 사전을 한 번쯤 찾아보고 퇴고를 하였더라면 이런 우는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몸으로 이름을 말한다(오복순) 71쪽 여섯째 문단
“‘범부채’는 초록키를 아주 주금씩 뽑아내고 있다.”에서 「초록키」가 무엇인지 뜻을 알 수가 없다. 아마 신장 즉 체고(體高)를 말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초록색의 키가 조금씩 크고 있다’라고 했으면 독자가 이해하기 쉽지 않았을까. 작자만 알고 독자는 잘 모르는 이런 표현은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無等山 눈(허학수) 75쪽 첫 문단
‘풀어서 난필하면 독선일지 몰라도 세인이 몫을 하면 천혜의 선물이다.’의 「난필」의 뜻은 ‘되는 대로 막 어지럽게 쓴 글씨’이다. 어지럽게 쓴 글씨가 독선일지 몰라도 어떻게 된다는 것인지? 그리고「몫」은 ‘여럿이 분배하여 가지는 각 부분’인데 ‘세인이 몫을 하는 것이’ 왜 천혜의 선물인지? 마무리 곱씹어 보아도 뜻을 헤아리지 못하겠다. 이런 뒤죽박죽의 글을 누가 읽겠는가.
76쪽 셋째 문단
‘한 발 한 발 正鵠하지 않으면 구르고 떨어진다.’의 「正鵠」은 ‘과녁의 한복판이 되는 점’이란 뜻의 명사인데, 이에는 ‘하다’를 붙여 동사로 사용할 수 없다. 그러니 ‘정확히 내딛지 않으면’으로 함이 옳을 것 같고, 그 아래로 몇 줄 더 내려가서
‘엄습하는 한기는 온몸을 쪼그린다.’는 ‘온몸을 쪼그리게 한다’라고 해야 맞다. 주체와 객체가 혼돈되어 ‘한기가 몸을 쪼그린다’는 뜻이 되었으니 모순이 아닌가. 사람이 몸을 쪼그리지 한기가 몸을 쪼그릴 수는 없다.
세탁(정연순) 83쪽 둘째 문단 끝의 혼잣말
‘이번만 입고 내버리라 했는데, 하도 깨끗한 맛에…’의 「내버리라」는 ‘내버리려’ 또는 ‘내버리려고’라 해야 어법상 맞다. 문맥으로 보면 스스로가 하려는 의지를 표명한 뜻인데 ‘내버리라’ 하면 남에게 시킨 것이 되니 이치 상 맞지 않다. 또 같은 쪽 셋째 문단 끝 부분
‘큰 빨래나 광목이나 옥양목을 벼리는 일은’에서, 「빨래나 광목이나」와 같이 조사 ‘이나’를 겹쳐 쓰는 것은 문장의 결이 자연스럽지 않고, 「벼리다」는 ‘날이 무딘 연장을 불에 달궈 날카롭게 만들다’이니 틀린 말이다. 여기서의 뜻은 ‘빨래 등을 볕에 쬐어 희게 한다’이니 ‘바래다’라야 한다. 그리고 84쪽 끝 부분
‘자신의 필요를 잘라 이웃을 돕는 착한 이들의 뉴스를 들으면’의 「필요」는 꼭 소용이 있음이란 뜻을 가진 명사이니까, ‘하다’가 붙어야 용언이 된다. 그러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로 해야 바른 뜻이 된다. 이러한 따위는 문법의 무식에서 오는 소치이다.
여행의 끝(유미경) 87쪽 둘째 줄
‘창문을 반쯤 덮은 커단 떡갈나무가’라 한 「커단」은 기본형이 ‘커다랗다’이니 ‘커다란’이어야 하는데, 준말이 ‘커닿다’니까 착각을 한 것 같다. 다음 88쪽 끝줄
‘술빛 닮은 노을이 서산에 걸려’에서「노을」은 ‘해 뜰 무렵이나 질 무렵에 공중의 수증기가 햇빛을 받아 하늘이 벌겋게 보이는 기운’인데 어떻게 노을을 술 빛이라 할 수 있을까 알 수가 없다. ‘붉은 포도주’라 한다면 그런 대로 이해가 될 것이다.
장손(李炳壽)의 89쪽 첫 문단
‘외손들만 지녔다가, 처음 친손녀를 보았을 적의 기쁨도 컸었지만, 이번 친손자의 탄생은 더 큰 생의 보람을 느끼게 한다.’라 했는데, 「외손들만 지녔다가」의 ‘지니다’는 ① 몸에 간직해 가지다 ② 몸에 갖추어 가지다 ③ 변조하지 않고 원모양을 간직하다 등의 뜻인데 물건이 아닌 외손들을 지녔다는 것은 합당한 표현이 아니다. 그리고 「친손자의 탄생」이라 한 것도 온당하다 할 수 없다. ‘탄생’은 ‘사람이 태어남’이란 뜻이라도, 귀인이나 어른에 대하여 쓰는 말인데 자기의 손자를 탄생이라 할 수 있겠는가.
直指寺의 秋史 현액(丁炳哲) 92쪽 첫 줄
‘과거 시험을 보러 한양으로 떠나면서’의 「과거 시험」은 ‘역전 앞’ ‘석유 기름’과 같은 겹말로 자연스럽지 못하다. ‘과거’의 뜻이 문ㆍ무관을 등용할 때 보이던 시험이니 ‘과거를 보러’로 함이 옳다고 하겠다.
손전화(羅基彩) 96쪽의 끝 부분
‘나는 항상 감시당하는 것이 싫어서 손전화를 집에 두고 다닐 때가 평상시보다 많다.’의 「평상시보다 많다」의 ‘평상시’는 ‘보통 때’ ‘평소’란 뜻이다. 그러니 ‘보통 때보다 많다’라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논리가 닿지 않는 말은 문장이 될 수 없다. 글을 좀 더 잘 써보겠다는 생각에서 필요 이상의 말을 썼는지는 몰라도 ‘평상시보다’를 빼면 앞뒤의 연결이 자연스러울 것 같다.
은발(방난기) 97쪽 둘째 문단
‘중년들은 새치머리 감추느라 할 수 없이 염색을 시작하고’라 했는데, 「새치」면 될 것을 ‘새치머리’라 했으니 말이 어색하다. ‘새치’는 젊은 사람의 머리에 난 센 머리카락이니 ‘새치머리’하면 겹말이 되고, 중년은 새치가 아니고 ‘센머리’라 해야 옳을 것 같다.
탱자나무의 사상(오헌광) 105쪽 끝 문단
‘탱자나무가 갖는 애정이 나를 차마 경외스럽게도 한다.’에서 「차마」는 ‘애틋하고 안타까워서 감히 어찌’의 뜻을 가진 부사로, 뒤에 오는 동사를 부정하는 뜻으로 쓰이는데 ‘경외스럽게 하는 것’을 부정해버리면 문장의 뜻이 어찌 되겠는가. 지은이가 이 글에서 말한 탱자나무의 찬미는 엉뚱하게 쓴 「차마」의 한 마디로 말미암아 전부 허물어지고 만다. 단어 하나가 문장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으니 용어 선택을 신중히 해야 한다.
未練(이 연) 106쪽 끝줄
‘친구들이 엽초 담배를 헌 종이나 신문지에 말아 가지고 피우던 시절이다.’의 「엽초」의 뜻이 ‘잎담배’이니 ‘엽초 담배’라 하면 어색하고, 또 107쪽
‘담배의 미련을 벗어날 묘방이나 해안은 없는 것인지 골똘한 생각을 하다가도 깜짝 놀라 자신을 추스른다.’에서 「해안」이란 말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추스른다」는 ①치켜올려 잘 다루다 ②잘 수습하여 다스리다의 뜻이니 문맥상 맞지 않는 말이다. 이렇게 독자가 알 수 없는 한 마디의 말이나, 뜻이 엉뚱한 말을 생각 없이 구사하게 되면 독자를 잃어버리게 된다.
제2의 인생(김영한) 108쪽 끝 문단은
‘지난 5월 24일 단양에서 열린 제21회 소백산 철쭉제 행사 중 하나로 전국 자연보호 백일장 대회가 열려 심사위원 위촉을 받고 24일 청주에서 11시 출발 단양에 도착해 점심식사 후 곧바로 심사에 들어가 심사를 마치고 나니 5시가 넘어 주최측에서 준비한 저녁식사까지 마친 뒤 단양문인협회에서 열고 있는 시화전시장에 도착, 단양문인협회 회원들과 어울려 놀다가 회원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고 이튿날 아침 비가 오는 가운데 소백산 정복에 도전했다.’
이렇게 긴 한 문장으로 되어 있다. 중간에 쉼표도 한 군데밖에 없다. 주어 서술어의 관계가 뒤엉켜 지은이가 말하려는 주된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아무리 끈기 있는 독자라도 읽어나가다가 짜증이 나고 숨이 막혀 읽기를 중단하고 말 것이다. 내용을 정리해보면 ①철쭉제의 백일장 심사위원 위촉을 받았다 ②청주에서 단양으로 갔다 ③점심을 먹었다 ④심사를 했다 ⑤저녁을 먹었다 ⑥시화전을 관람하고 놀았다 ⑦회원 집에 가서 잤다 ⑧이튿날 소백산 정복에 도전했다. 사흘에 걸친 이 많은 내용을 한 센텐스의 문장 속에 담아놓았으니, 과연 문학적인 글이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만연체가 아니라 뒤죽박죽문체라 함이 옳겠다. 수필이라고 하기에 부끄러운 이런 글을 읽으라고 하는 것은 독자를 고문하는 것이 아닐까싶어 고소가 저절로 나온다. 전 편이 이런 흐름의 글이니, 이 정도의 문장력밖에 안 되는 사람이 백일장 심사를 하여 뽑은 작품은 어떤 수준이었을지 자못 궁금하다.
봉숭아 사랑(權正錫) 125쪽 둘째 문단
‘뒷마당 빈터를 일구어 모종을 뿌리고’의 「모종」은 심는 것이지 뿌리는 것은 아니다. 씨는 뿌리고 모종은 심는 것인데, 이렇게 정확하지 않는 언어의 구사는 문장수업이 덜된 듯한 느낌을 준다. 아니면 글을 너무 안이하게 다루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126쪽 3분의 2부분쯤의
‘밉기야 하지만 때리고 꾸짖을 놈은 없는 상하다’에서 「상하다」는 ‘성하다’라야 한다. 아마 지은이가 평상시 습관적으로 쓰는 말이기에 그렇게 무심히 쓴 것 같은데, 조사, 접사 등 간단한 한 마디의 말이라도 신중히 생각하고 글을 써야 정확한 문장이 된다.
오해의 門(李信子) 133쪽 넷째 문단
‘침묵으로 수행하지 못한 나의 허물을 반성할 수밖에…. 허나 마음 한 구석은’의 「허나」는 ‘하나’로 함이 옳다. ‘하나’는 ‘그러하나’의 뜻을 가진 접속부사다. 사투리로 ‘허나’를 쓰는 지방이 있지만, 드라마의 대사에 ‘허나’ 헌데‘ 하고 쓰는 경우가 왕왕 있으나 대화가 아닌 지문(地文)에 쓰는 것은 글의 품격을 떨어뜨리게 한다.
그곳에 소녀가 있었네(전성순) 137쪽 둘째 문단
‘읍내랄 것도 없는 운산의 갓길 뚝방에 앉아 도시락을 펴놓고 먹던 때가 어제인 양 그려진다.’에서 「뚝방」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고, 「그려진다」는 ‘그리워진다’로 해야 옳을 것 같다. 그리고 같은 쪽 여섯째 문단
‘차는 느긋하고 우리는 신성의 땅이라도 밟은 양 충만해진다.’라는 대목은 무슨 뜻인지 해득이 안 된다. 형용사 「느긋하다」의 뜻은 ‘마음에 여유가 있고 넉넉하다’이다. 차가 마음에 여유가 있고 넉넉하다 라는 표현은 초등학생도 쓰지 않을 것이다. 또 ‘우리는 신성의 땅이라도 밟은 양 충만하다’ 는 무엇이 충만한가. 주어 서술어의 관계를 맞추어 보면, ‘우리가’가 주어이고 ‘충만하다’가 서술어가 될 것이니 ‘우리는 충만하다’하면 문장구성이 바르게 되었다고 볼 수 없다. 「충만하다」는 ‘가득하게 차있다’이니 ‘우리는 가득하게 차있다’라는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讀書不賤(權夕霞) 144쪽 일곱째 문단의
‘천박한 땅에 과수를 심어 결실을 맺게 할 만큼, 아버지는 인고의 세월을 독서에 의지하여 천하게 살지 않으려고, 지식들도 남에게 귀한 사람 되기를 무진 노력하며 사신 분.’ 부분은, 글의 연결이 자연스럽지 못하여 뜻의 파악이 잘 안 된다. ‘과수를 심어 결실을 맺게 하는 것’과 ‘독서에 의지하며 천하게 살지 않으려는 것’은, 앞뒤 문장의 호응이 되지 않아 글의 뜻이 흐려지고, 「자식들도 남에게 귀한 사람 되기를 무진 노력하며」는 ‘자식들도 남에게 귀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하여 한없이 노력하며’로 하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무진」은 ‘히’를 붙여 ‘무진히’로 해야 부사가 되니, ‘무진 노력하며’ 하는 것은 어색하다.
산사의 풍경소리(연규석) 151쪽 다섯째 문단
‘나도 그 틈바구니에 끼어 마음속으로 소원을 빌었다.’라 한 「틈바구니」는 ‘틈’의 속어다. 이런 통속적인 저속한 말을 문장 속에 쓰면 글의 품위가 떨어진다. 같은 문단 끝 부분에
‘네 발로 아장아장 헤엄치며 노는 것도 눈에 보였다.’의 「아장아장」은 어린 아이나 키가 작은 사람이 천천히 걷는 모양을 나타내는 부사이다. 그러니 ‘자라가 아장아장 헤엄친다’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152쪽에 보면
‘예구들이 눈에 들어왔는데
석불이 눈에 들어왔는데
성도원이란 사찰이 눈에 들어온다.
경사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맨 뒤켠에는 산신각이 자리하고’라고 「눈에 들어온다」와 「자리하고」를 중첩하여 거듭 쓰고 있다. 이것은 필자의 어휘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들어낼 뿐 아니라 문장의 흐름도 자연스럽지 못하다. 또 「뒤켠」의 ‘켠’은 사투리다.
풍경(全河然) 155쪽 일곱째 문단의
‘저 감나무들에게도 분명 땡감을 달고 있던 시절이 있었다. 딱딱하고 떫기만 한 나도 언젠가는 肉脫해 붉고 달고 말랑말랑해질 수 있을까.’는 전혀 문의(文意)를 파악할 수 없다. 작자만 알고 독자는 뜻을 헤아리지 못하면 표현력이 모자란다고 말할 수박에 없다. 「肉脫」의 뜻은 ①몸이 여위어 살이 빠짐 ②매장한 시체의 살이 완전히 썩어 뼈만 남음인데, ‘땡감’이 육탈하면 어찌 말랑말랑해진단 말인가. 알 수가 없다.
명상의 종소리(류지연) 는 전편의 문맥이 난맥으로 일관되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글이다. 이런 글을 수필이랍시고 발표하는 작자의 용기가 대단하다. 그 중에도 중간 중간 말이 안 되는 부분을 발췌해 보면
‘아파트라는 주거형태는 사각 네모난 떡판처럼 층층의 사람들과 숫자의 간판을 내걸고 너무나 열심히 사는 층층과 또한 그렇지 못한 상황의 현실 속에서 그나마 안주하면서 그럭저럭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그 일의 노동에서부터 찾아온다고, 사실 말이지 나도 글을 쓰는 글쟁이라서 말인데 왜 나라고 숨겨진 비밀이 없으며 똥오줌 안 누고 살겠는가.’
‘왜냐하면 문학이 주는 활자의 위대함은 가히 소동을 확실히 넘어서고 이겨내고 우뚝 솟아오르는 월등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물의 원점은 맨 위 꼭지점에서부터 시작하여 점점 아래로 내려오면서 그 성좌가 시작된다. 이미 그 정신은 평등사상으로까지 놓여있기 때문이다.’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156쪽에서 157쪽 첫 부분까지 읽다가 그만 책장을 덮고 말았다. 문장의 ABC도 안된 이런 사람이 어떻게 문단에 등단하였는지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충전(최행자) 168쪽 둘째 줄
‘책상 위에 공과금 용지들과 우편물이 잔뜩 놓여있다.’의 ‘공과금 용지’의 「용지」는 어떤 일에 쓰이는 종이다. ‘공과금에 쓰이는 종이’란 말은 맞지 않는다. ‘공과금 고지서’라 해야 옳지 않겠는가.
招魂(김용순) 174쪽 셋째 줄
‘얼마 후 나락을 얻어 나르던 자루를’이라 한 「나락」은 ‘벼’의 사투리다. 대화나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표준어를 써야 할 것이다.
스승(안 숙) 186쪽 둘째 문단
‘가냘픈 체구에 가랑가랑한 맑은 분위기만큼이나 속마음이 깊은 듯 그림자처럼 조용한 분이었다.’에서 ‘가랑가랑한 맑은 분위기’라 했는데 말이 되지 않는다. 「가랑가랑」은 ①액체가 가장자리까지 거의 찰 듯 찰 듯한 모양 ②국물은 많고 건더기가 적어서 조화되지 않는 모양 ③물을 많이 먹어서 뱃속에 물이 가득 괴어 있는 모양, 그리고 잘 울리는 쇠붙이 따위가 끌리거나 구를 때 나는 소리 등을 나타내는 부사인데 ‘가랑가랑 맑은 분위기’라 하면 말이 될 수 없지 않겠는가.
어떤 悲運(全炳勳) 196쪽 끝 문단
‘터진 입술에 핀 피질을 떼어내고자 연신 손이 입가를 오가며 피로가 역력해 보였다. 하나 예측하기에는 터무니없는 날벼락이다.’는 문맥이 닿지 않는다. ‘입가로 오가며’는 ‘입가로 오가는 것이’로 해야 될 것 같고, ‘하나 예측하기에는 터무니없는 날벼락이다’는 앞뒤의 연결이 맞지 않아 읽는 이가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다.
나의 믿음(한부월) 204쪽 둘째 문단
‘청광산은 나무도 없고 봄이면 진달래꽃이 피어 만산홍엽이다.’라 했는데, 나무도 없는 산에 어찌 진달래가 피는가. 작자는 교목(喬木)만 나무로 아는 것 같은데 관목(灌木)도 분명 나무다. 진달래가 피었는데 어찌 ‘만산홍엽’인가. 「홍엽」은 紅葉으로 ‘단풍이 든 나뭇잎’ ‘단풍나무의 붉은 잎’이다. 진달래가 핀 봄 산에 홍엽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사리에 맞지 않는 글은 글이 아니다.
연꽃 향기를 찾아(김미옥) 206쪽 넷째 문단 첫머리
‘그러나 막상 도착하고는―솔직히 좀 실망스러웠다.’의 문장부호 ―는 무슨 뜻인지? 줄표 「―」는 이미 말한 내용을 다른 말로 부연하거나 보충함을 나타낼 때 쓰는 부호이다. 여기서는 줄표가 그냥 아무 뜻 없이 쓰이고 있다. 문장부호도 제구실을 하도록 써야 정확한 문장이 된다. 그리고 같은 문단 끝 부분
‘물이 낮은 다랭이에 불쑥불쑥 키가 솟아있는 연잎들이 너무 낯설었던 것이다.’에서 「다랭이」는 ‘다랑이(썩 좁고 층층으로 된 작은 논배미)가 맞는 말이다. 또 같은 쪽 일곱째 문단
‘우산위로 풍경소리에 섞인 가는 빗소리가 꿈결처럼 적막하다.’의 「적막」은 ‘쓸쓸하고 고요함’인데 우산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어떻게 ‘적막’할 수 있는가. 불분명한 표현은 뜻의 전달도 명확하지 않거니와 졸렬한 문장이 된다. 몇 줄 안 내려가 207쪽 첫 줄을 보면
‘만개 직전의 그 청순한 아름다움은 사람이나 꽃이나 비할 데가 없지 싶다.’라 했는데, ‘사람이나 꽃이나’를 어디에다 비한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고. 문장구성도 어색하여 뜻의 전달이 애매하다. 같은 쪽 중간을 좀 더 내려간 대목의
‘흔히 여자들 고무줄이나 끊고 그네나 빼앗던 악동 짓은 고사하고, 늘 코스모스 같은 눈웃음으로 머물던 그를 30여 년 만에 만난다는 기대.’는 말의 줄기가 서지 않는다. 「고사하고」의 뜻은 ‘그만두고’다. 그렇다면 ‘악동 짓은 그만 두고’ 어떠했다라는 설명이나 부연하는 말이 있어야 할 텐데, 느닷없이 ‘코스모스 같은 눈웃음의 그를 만난다는 기대’가 이어지니, 산 위에 강물이 흐르는 격이라고나 할까.
옥단어(홍재숙) 에 구사된 (228~229쪽)
「게질치않게」 「도통」 「빠삭하게」 「꺽센」 등은 지방 사투리 같은데 지문의 문장어로는 합당하다 할 수 없다.
장밋빛 스카프(박 하) 236쪽 둘째 문단에
‘코트를 벗어 횟댓보(옷 가리개)에 걸려는 순간’이라 한 「횟대」는 ‘횃대’가 맞다. ‘횃대’의 뜻은 ‘옷을 걸 수 있게 방안에 달아 매어두는 제구’이고 ‘횃대 보’는 횃대에 건 옷을 덮는 보자기다. 그리고 ‘옷 가리개’의 「가리개」는 머리맡이나 방구석 같은데 치는 두 폭의 병풍이니 ‘옷 가리개’도 정확한 말이 아니다. 한 단어에서 이렇게 두 가지의 오류가 있다는 것은 부주의 때문이 아닌가 싶다.
눈꽃 무릉도원(이명환)
지은이는 이 글에서 244쪽과 246쪽, 두 군데에 「헌데」라는 말을 쓰고 있다. 문맥상으로 보면 접속부사 ‘그러한데’의 뜻이니 ‘한데’로 써야 맞다. 글의 멋을 부리려고 ‘헌데’라 했는지는 몰라도, 이런 용어를 쓰는 것은 삼가는 것이 좋다. 「갤갱이풀」(243쪽 셋째 문단)이란 말도 사투리인 것 같고. 「산중의 적막을 깨치기도 합니다」(243쪽 셋째 문단 끝 부분)의 ‘깨치다’는, ‘깨달아 사물의 이치를 알게 된다’란 뜻이니 전혀 엉뚱한 말이라 하겠다.
상처받아도 사람이 좋다(조흥상) 265쪽 열째 문단의
‘내 쪽에서 규모가 크고 방대해서 젊은 분께서 부모님의 재산을 물려받았나, 어떻게 이렇게 큰 대리점을 운영하시게 되었나요? 하고 물었다. 그분의 전자대리점을 운영하게 된 고백을 하기 시작했다.’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문장이다. “‘젊은 나이에 어떻게 이런 큰 대리점을 운영하게 되었나’고 내가 물었다” 하면 될 것을 ‘규모가 크고 방대해서’ ‘젊은 분께서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았나’ 등의 말은 일종의 사족이다. 문장에 이런 불필요한 사족이 붙으면 글이 너절하고 뜻이 흐려지기 쉽다. 그리고 ‘그분의 전자대리점을 경영하게 된 고백을 하기 시작했다.’의 ‘그분의’는 ‘그분이’라 해야 된다. 다음 266쪽 첫 문단의
‘피와 눈물 나는 노력 끝에 사장님 눈에 예쁘게 보였기에… 전에 사장께서 어느 날 부르시더란다.’에서 …표 다음에 ‘전에 사장께서’라 했는데, 전에 사장이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 옛날 사장인지 어느 사장의 전인지 알 수 없다. 이렇게 분명하지 않는 글은 수준 이하의 글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실버 세대의 아픔(강영자) 268쪼 첫째 문단
‘그 노인들이 도대체 이 사회와 당신들의 과거를 어떤 눈으로 바라볼지도 생각하게 만들었다.’의 「바라볼지도」는 ‘바라볼 것인가를’로 해야 앞뒤의 연결이 맞을 것이다.
베란다에서 하늘을 보다(유세진) 276쪽 첫 문단
‘찬바람이 창틀을 덜컹거리지만’은 ‘창틀을 덜컹거리게 하지만’이나 ‘찬바람으로 창틀이’로 해야 된다. 이렇게 간단한 어법도 모르면서 글을 쓴다는 것은 독자에게 부끄러워해야 한다. 같은 쪽 셋째 문단에
‘현관문을 닫으면 거기엔 끈적거리는 습기로 질척이거나 또는 목젖이 따갑도록 메마른 공기가 덜미를 잡는다.’라 했는데, 「질척하다」는 ‘묽은 진흙 등이 차지게 질다’란 뜻이니 ‘습기가 질척이다’고 하는 것은 어색하며, ‘메마른 공기가 덜미를 잡는다’의 「덜미」는 ‘뒷덜미’의 준말로 ‘목덜미 아래 어깻죽지 사이’인데, ‘공기가 덜미를 잡는다’란 말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馬洞江을 둘이 건널 때(이동휘) 278쪽 셋째 문단
‘강을 따라 올라가면 긴 다리도 있지만, 사람들은 차가운 쪽으로 발을 뽑고 건너 다녔다.’는 것은 ‘차가운 쪽으로 건너다니는’ 이유가 설명되어야 논리상 맞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니 읽는 이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봄소식(이송리) 280쪽 끝 부분
‘雀舌 같은 연생의 녹음을 짙게 드리웠다가 성숙기를 지나 잎 떨어진 산길을 걷노라면 신발 창에 와 닿는 乾聲의 소리가 아스라이 여운을 남긴다.’라는 대목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연생이 녹음을 짙게 드리웠다가’의 「연생」과, ‘乾聲의 소리가 아스라이 여운을 남긴다’의 「乾聲」은 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이렇게 막연한 지은이만 아는 말을 써서 어찌 작자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겠는가. 뿐 아니라 같은 쪽을 읽어나가다 보면
‘봄을 빨아올리는 기감을 느낄 것이다.’라 했는데, 「기감」의 뜻도 알 수 없다. 아마 ‘氣感(기운의 느낌)’을 생각하고 쓴 듯하나, 이런 억지의 말을 써서는 좋은 문장이 될 수 없다.
인터넷 세상(전금희) 284쪽 중간 부분
‘주제를 살짝 던져주며 삼빡한 아이디어 하나만 달라고’의 「삼빡」은 ‘잘 드는 칼에 쉽게 깊이 베어지는 모양. 또는, 그 소리’인데, ‘삼빡한 아이디어’라는 표현은 좀 무리가 아니가싶다. 그리고 285쪽 다섯째 줄
‘철썩같이 믿고 있었는데’는 ‘철석같이’가 맞다. ‘철석(鐵石)’에 ‘같이’가 붙은 말이니 ‘철썩’이 될 수 없다.
꽃씨를 틔우는 시간(전미라) 287쪽 둘째 문단
‘학교에서 학생들의 봉사활동 시간을 의무적으로 매기면서부터’의 「매기다」는, ‘차례․값․등수 등을 정하다’이니 말이 안 되는 문장이다. ‘매기면서’를 ‘부과하면서’로 고쳐야 될 것 같다. 같은 쪽 셋째 문단의 「걸리적거리기만」은 ‘걸림돌이 되기만’으로 하든지 아니면 다른 알맞은 말로 바꾸어야 될 것 같다,
이상으로 ‘한국수필가’ 창간호에 발표된 작품의 문장이 잘못된 부분을 전부 지적하였다. 수록된 101편 중 문장에 결함이 있는 작품이 39편이나 된다. 미미한 흠은 그냥 넘겼으니 엄밀히 따지면 50% 가까이가 문장상의 잘못이 있는 글들이라 하겠다.
이렇게 문장 기초가 덜된 글들이 많다는 것은 현 문단에 문장수업이 안 된, 다시 말하면 문장기본을 모르는 수필가가 많이 등단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수필계의 현실이 이러하니 ‘수필이 문학이냐’라는 호된 비판을 받고 있는 게 아닌가.
이것은 우리 수필인 공통의 책임이다. 우리는 이 현실을 겸허하게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장이 안 된 수필을 함부로 발표하는 것은 문학과 독자를 모독하는 일이다. 이런 글이 엉망인 수필의 양산은 수필문단 전체가 부끄러워해야 마땅하다. 다 같이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문장공부를 다시 하자고 감히 제언한다. 〈妄言多謝〉
첫댓글 죄송하지만 1/3쯤 읽다가 말았습니다. 읽다보니 엉터리 문장들이 많네요. 수필가들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인천문단의 어떤 소설을 읽다보니 억지로 원고수를 채우려 한 흔적들이 보이더군요. 앞뒤 문맥이 연결되지 않는 뚱딴지 같은 문장들이 그것입니다.
뚱딴지 같은 문장 = 분위기 반전을 꾀하려는 건설적 차원이 아닌 불필요한 상황 전개의 중복 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