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 녹동에서 탄 버스가 낮 12시 조금 넘어 순천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여행자는 어디로 갈지 막막했습니다.
굳게 믿었던 여수의 금오도, 사도가 좌절돼 잠시 멍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걱정은 안 했지요. 순천에서라면 세상 어디로 가든 좋을 터이니!
지난 해 넘은 적 있는 순천 송광사-선암사의 굴목재로 갈까?
우중 고갯길을 부실한 발목으로 넘을 자신 없어서 패스 -
가까운 구례-하동의 섬진강 길?
지난 달 벚꽃 철에 다녀왔으니 패스 -
여수처럼 아름다운 섬들을 많이 거느린 통영?
차편 보니, 2~3시간 뒤에나 통영가는 차가 있어,
그날 중 섬에 들어가기 어려울 듯하여 ... 패스 -
잠시 막막함. 그러나 여러 길들이 지워지기 무섭게
새로운 장소가 마음 한가운데 길을 놓습니다!
그래! 해남에 가자! 해남 대흥사 앞 유선관에 가서
밤새 빗소리 들으며 막걸리를 마시자!
유홍준 선생의 <나.문.답>을 들고 처음 찾은 이래 몇 번을 갔던 곳.
몇 해 전 TV 인기프로그램 <1박2일>에 이곳이 소개되는 '대참사'가 벌어지면서
주말이나 휴일이면 예약은 물론, 방을 잡기 하늘의 별따기가 된 유선관 -
그 오래 묵은 여관에 전화를 해보니, 오늘은 방이 있다고 합니다!
지금 순천에서, 이 빗길을 뚫고, 혼자 몸으로 가겠다고 하니
방값에서 1만원도 빼준다고 하고요.
아! 정말 좋은 생각입니다!
아, 나는 길 더듬는 일엔 천재가 아닐까! 우쭐해 하면서 ... ^^
점심을 먹고, 1시 반쯤 차에 올라타 빗길을 달려 해남으로 향합니다.
여수, 순천, 통영, 진주, 강진, 고창, 하동... 그런 도시들처럼
'해남'도 언제나 설렘과 흥분이 묻어나는 이름입니다.
삭막한 도시로 변하지도 않았고,
아름다운 자연과 그곳만의 멋, 역사의 이야기가 숨쉬는 고장들입니다.
지난 해 관매도에 갔다 나오는 길에 잠깐 들러
대흥사 사하촌에서 산채비빔밥만 한 그릇 비우고 돌아나온 게 내내 섭섭했는데,
오늘은 대흥사 바로 앞 유선관에서 독방을 쓰며 '위대한 혼자'가 되어 볼 요량입니다.
차창으로 풍경이 따라옵니다!
비에 젖은 남도가 따라옵니다!
봐라, 비가 쫓아온다!
엄청나게 큰 순천 정원박람회 주차장에 잠시 들렸던 버스가
이내 남도의 2번 국도로 접어듭니다.
순천에서 벌량만을 지나, 벌교, 조성, 보성 지나 장흥, 강진의 터미널들을
잠깐씩 거쳐간 버스는 마침내 2시간여만에 해남에 가까워집니다.
비바람에 흠뻑 젖은 길이지만 역시나 아름답고 기분 좋습니다.
우리나라 국도 중에서 이처럼 많은 아름다운 마을과 땅들을
한꺼번에 구슬 꿰듯 엮어주는 길이 또 있을까요?
군대 상병 시절이었을 겁니다.
2번째 휴가를 나와 같이 휴가나온 부산 친구 집에서 밤새 술을 마시다가,
이튿날 아침 깨어 무작정 서쪽으로, 서쪽으로 향했습니다.
부산에서 배에 올라타 다도해를 뚫고 여수까지 가던 뱃길엔
희부연 해무 속에 불쑥불쑥 나타나던 외딴 섬들의 그림자가 경이로웠습니다.
(그 배, 그 노선이 아직 남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여수에서 내린 뒤, 오후엔 완행버스를 타고 목포까지 향했지요.
여수에서 목포까지 이어지던 2번 국도는 화창하게 맑았고,
군인을 가장한 여행자의 손엔 카프카의 단편집 <변신>이 들려 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무렵, 국내 최초로 100만 관객을 불러들인 영화 <서편제>가
이 남도 땅에서 촬영되었단 생각에 책장보다 차창밖을 더 많이 읽었지만요.
같은 길일 테지만, 그때 그 옛길이 훨씬 더 아름답고 황홀했던 것 같습니다.
큰 읍내에 가까워지면 여지없이 나타나는 아파트와 콘크리트 건물들이
아슴푸레한 기억 속 2번 국도변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반나절을 뱃길로, 반나절은 육지의 길로,
부산에서 목포로 향했던 젊은 날의 어떤 길은 평생 잊을 수가 없는 길입니다.
그때만 못 하다 해도, 그래도 아름답습니다.
굳이 해남 아니어도, 벌교에 내리거나 보성에 내려도,
장흥에 내려 천관산에 가거나, 강진에 내려 완도나 영암쯤으로 향해도
다 좋은 길입니다. 좋은 길이 좋은 길로 가지를 뻗어, 더 좋은 길들의 세상입니다.
해남 읍내의 터미널에서 종점인 대흥사 입구까지는
군내 버스로 15분~ 20여분이면 충분합니다.
1시간에 두 세 대 가량의 버스가 운행을 하지요.
해남 읍내에서 대흥사로 가는 버스 길도 제겐 참 행복한 길입니다.
그 중간에 고산 윤선도의 유적지인 '녹우당'이 있고,
그곳에는 우리 회화사상 가장 훌륭한 초상화라 일컫는 윤두서의 자화상이 있지요.
녹우당 정류장에서 대흥사쪽으로 한 정거장쯤 더 가면
닭요리로 유명한 마을이 나오는데, 이 부근에서 예전에 '닭 육회'를 팔았다지요.
왠만한 음식에 다 자신있다는 저로서도 소고기 육회도 아닌 '닭 육회'는
아무래도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만난 전라도 후배 왈,
"아니, 그 맛있는 걸 왜 못 먹어요?"
그 어간을 지날 때마다 '닭육회' 생각이 자꾸 납니다.
언젠가는 그 놈을 먹어보긴 먹어봐야 할 텐데요.
버스가 마침내 대흥사 입구의 여관, 식당마을 앞에 내렸습니다.
헐렁했던 버스에서 내린 여행자는 혼자 뿐입니다.
버스가 떠나자 사하촌이 텅 비어버립니다. 텅빈 사하촌에 빗소리만 가득합니다.
대흥사 입구 일주문.
이 일주문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1993년 겨울, 군 제대 뒤였습니다.
친구들과, 그땐 아직 작은 어촌마을에 불과했던 땅끝마을에 갔다온 뒤 여길 들렀지요.
인적이 드문 초겨울, 바로 이 일주문 앞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던 그때 그 친구들.
일주문 앞에 오늘, 그 친구들이 없습니다.
다들 지금, 누군가의 아내와 남편이 되어 그들 곁에 있을 겁니다.
인생을 허비하다 여기까지 다시 와 비를 쫄딱 맞는 나그네만 홀로 거기 서 있습니다.
그 뒤, 이 대흥사는 두서너 해 간격으로 찾아오면서
아름다운 추억과 행복한 기억들을 많이 만들고 온,
우리 국토에서 가장 좋아하는 절집이 됩니다.
청도 운문사, 서산 개심사, 봉화 청량사, 지리산 실상사, 부여 무량사,
안동 봉정사, ... 그리고 여기 해남 대흥사.
한 동안 사찰들을 헤매고 다닐 때 가장 좋아하게 된 절집들입니다.
그 절집들... 그냥 그 모습 그대로 오래오래 남아 있으면 좋겠습니다.
"쏟아지는 빗속을 뛰어 봐요오 ~
부딪히는 빗방울이 즐거워요 ~
울적했던 마음들 활짝열고 뛰어봐요
뚜뚜루뚜 뚜루뚜 ~ 뚜뚜루뚜 뚜루뚜 ~ "
최백호의 노래 '뛰어'를 가슴 속에 흥얼거리며 걷습니다.
류이치 사카모토가 작곡한, 영화 <마지막 황제>의 삽입곡
'rain'의 선율도 환청처럼 들리며, 발걸음을 경쾌하게 재촉합니다.
계곡에 물이 넘치고, 물살이 거셉니다.
아침 소록도에서부터 망가지기 시작한 우산살이 마침내 모진 비바람에 툭 부러집니다.
우산의 산비탈 한쪽이 허물어 집니다.
허물어진 우산 쪽부터 몸이 흠뻑 젖어버립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우산을 쓴 채 만 채, 빗물을 퉁기며 놀았던 유년의 기억이
제 몸, 제 기억 안에 아직 살아있습니다. 이런 빗길을 언제 또 다시 만나겠습니까?
대흥사는 그 절집 자체로도 좋지만,
해남 읍에서 대흥사 대웅보전까지, 아니 산속 일지암까지 향하는
그 모든 길이 다 좋았던 것 같습니다.
해남읍에서 대흥사 입구 여관, 식당촌까지 오는 버스 길도 좋고,
거기서 내려 9개의 다리와 만나고 헤어지며 걸어 올라가야 하는
2~ 3km 남짓한 이 숲길도 행복한 길입니다.
하지만, 보통 때 같으면 이곳은 좋은 길을 즐기는 사람들로 늘 북적거립니다.
그런 길을 오늘 저 혼자 독차지 하고 있습니다!
"쏟아지는 빗속을 뛰어 부아아아요 ~" 하면서!
이런 길을 혼자 독차지 하는 건 호사 중의 호사입니다!
간간히 쓸쓸한 자가용 한 두 대가 지나가고
무료한 순찰차가 한 대 지나갔지만,
길은 이내, 어둡고 깊고 빗물로 가득한 적막이 이어집니다.
망가진 우산은 아예 접어두고, 간신히 꺼낸 손수건 한 장으로 머릴 가린 채,
이 분위기를 카메라에 담지 않을 수 없어 셔터를 누릅니다.
빗방울이 렌즈 앞에 맺혀 자동 초점 기능이 먹통이 되면서
내내 흐리멍덩한 이미지만 찍힙니다. 얼핏 찍힌 사진을 보니, 그도 나쁘지 않습니다!
이런 때 나그네는 자객이 된 기분입니다.
차갑게 날이 선 장검을 휘두르듯 카메라 셔터를 휘두르며,
풍경을 살해하고 마음을 도려내는 빗길 위의 자객이 되어 나아가는 기분!
몇 개의 다리를 지나고,
익숙한 안내판과 가게들을 몇 개 지나는 동안에도
빗방울은 잠시도 수그라들지 않습니다.
기억의 거리보다 길은 더 멀고 아득하기만 합니다.
비와 함께 차근차근 어둠이 내리려 합니다.
속옷까지 흠뻑 다 젖어 올 즈음, 희부연한 눈 앞으로
억수같은 비의 장막 너머로, 그 집, 유선여관이 나타납니다.
흔건히 젖은 신발이 찰박찰박, 발이 아파옵니다.
여관에 들어 행장을 풀었습니다.
성능 좋은 보일러로 금새 따끈따끈해지는 방바닥에
젖은 옷가지와 가방 안의 젖어있던 것들을 늘어 놓습니다.
그리곤, 문지방에 걸터 앉아 다시 내리는 비를 멍하니 바라봅니다.
오랜만에 찾은 유선관. 별로 변한 게 없습니다. 다행입니다.
무서운 기세로 쏟아지는 빗물에 이내 냇물처럼 고인 방문 앞 웅덩이에
'첨벙!' 발을 담가봅니다.
첨벙! 첨벙! 첨벙! ...
누가 이 느낌을 '첨벙'이라고 맨 먼저 표현했을까요?
내처 그 물에 피곤한 발을 씻습니다. 여행의 피로가 한꺼번에 풀리는 듯합니다.
그리곤 이내 저녁을 시켰습니다.
조금 늦게 7시나 8시쯤 먹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이 빗길에 동리 밖으로 마실을 나가야 한다며
6시 반까지 안 드시면 저녁을 못 낸다고 하십니다.
그래요, 사장님도, 아즈매도 오늘 같이 한가로운 날 마실을 가셔야죠.
여기서 못 먹으면 저녁 먹으러 또 동리 밖을 걸어나가야 하니,
하는 수없이 이른 저녁상을 받기로 합니다.
그래, 일찌감치 저녁을 먹어야 밤중에 막걸리 부어 넣을 배도 마련되겠지..
시간에 맞춰 방으로 상째 배달되어 오는 저녁 상.
이것저것 찬거리가 있지만, 갈비찜이 메인 디시 입니다.
그러나 오늘 최고의 찬거리는 마당 한가득 쏟아지는 빗소리입니다.
문을 열어놓은 채, 빗소리를 반찬 삼아 저녁을 먹습니다.
한 끼니로 다 먹기에도 버거운 한 상...
이 밥상이 또한 유선관의 자랑이기도 합니다.
밥상 떠맡기기 바쁘게 마실 나가시려는 주인 아즈매와 약속을 하나 해둡니다.
10시쯤 마실서 돌아오시면 두륜산 탁주에 파전 하나 해 주셔야 한다고...
이 푸짐한 저녁밥 먹고 어떻게 그 밤 막걸리를 마실 수 있을까?
그렇다고, 유선관까지 와서 두륜산 탁주 한 잔 안 마시기도 그렇습니다.
저녁 먹고 상을 물린 뒤 유선관 안팎을 서성입니다.
우산이 성하기만 했어도 대흥사에 잠시 올라갔다 오거나
이제까지 걸어온 대흥사 앞 숲길을 조금 산책하다가 올 텐데요.
유선관에서 대흥사 쪽 바로 위엔 '피안교'라는 돌다리가 있습니다.
이태 전인가, 그곳에서 아주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그때 아내와 처형과 함께 셋이 유선관에 와 묵던 밤,
술을 하지 않는 두 사람이 먼저 잠들었을 때 혼자 불콰하여 나왔던 밤에
그 피안교 아래 뭔가 수상한 것이 계곡 아래로 휙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수달이다!!!'
까탈스럽기로 소문난 수달이 그런 곳에 살 수 있는지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순식간에 나타나 불어난 냇물로 들어가 유유히 거슬러 올라가던
그 요령부득의 짐승을, 수달이나 그 비슷한 동물로 밖에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족제비도 아니고, 고양이나 그 어떤 짐승도 아닌 ...
헛것을 보았다고요? 아닙니다. 분명, 수달이었을 거라 믿습니다.
고양이보다 훨씬 길쭘하게 크고 날렵하게 생긴 몸매,
순식간에 몸을 움직여 물 속에 들어가 곧잘 헤엄쳐 올라가던 짐승.
그 위쪽으로는 여관이나 식당이 없는 계곡의 지류인데,
대둔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이 그만큼 맑았다는 증거일 겁니다.
하지만, 이 밤엔 빗줄기가 거세 피안교 앞까지 가기도 주저됩니다.
몸에서 쉰내가 납니다.
비에 젖은 옷에 짙게 밴 쉰내.
까짓거, 어떻습니까. 그게 여행자의 냄새인 것을.
씻고 들어와 여벌의 상을 펴고,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니는
얇은 노트북을 펼쳐들어 이것저것 끼적여 봅니다.
때마침, 전화가 옵니다. 서울입니다. 회사입니다.
"실장님, 일 들어왔어요! 내일 오후에 회의해야 합니다!"
불안하다 했더니, 역시 먹고사는 일이 가만 내버려두질 않습니다.
뭐, 하지만 잘 놀았습니다. 내일 오전에 버스 타고 올라가면
서울 올라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회의하고 일하면 되겠지요.
몸에 밴 쉰내가 딴짓하고 올라온 티를 좀 내게 하겠지만요.
한옥 유선관의 그 많은 방 중에, 그 밤 손님이 든 방은 제 방까지 3개 정도입니다.
희미하게 불을 밝혔던 이웃방들의 불들이 꺼지자 적막함은 더 깊어집니다.
밤 10시를 넘겨도 마실 간 아주머니가 돌아오는 기척이 없습니다.
비오는 밤, 밤마실에 흥취가 여간이 아니신가 보군...
이러다 막걸리 한 잔 못하고 자야하는 거 아닐까.
그때 주인집 방문이 열리며 이 집 아드님이 잠시 밖으로 나서는 모습이 보입니다.
"젊은 사장님, 막걸리 한 잔 할 수 없을까요?"
다행히, 다른 건 못해도 해물파전은 그 분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곤, 이내 전 지지는 소리가 나더니, 작은 상에
탁주 한 자, 해물 파전 하나가 배달돼 옵니다.
파전도, 두륜산 탁주도 혼자 먹기 부담스러울 만큼 큽니다.
작업하던 상을 물리고, 술상을 받아 한 잔 두 잔 마십니다.
막걸리가 한 잔 두 잔 들어가고, 빗소리는 좀처럼 잦아들 줄 모르는데,
또다시 노래 하나가 적막한 밤중, 나그네의 마음에 흐릅니다.
"창밖에는 비 오고요, 바람 불고요 ...
그대의 귀여운 얼굴이 날 보고 있네요
창밖에는 낙엽지고요 바람 불고요
그대의 핼쓱한 얼굴이 날 보고 있네요
(중략)
아직도 창 밖에는 바람 불고요
비이 오오고오오오요오오오 ~ "
막걸리 한 잔에 백만년의 시간이 흐르는 것 같습니다.
머리맡 병풍 너머에 머리를 풀어헤친 귀신아라도 숨어 있을 것 같은 밤,
불콰하게 취해 그 귀신하고라도 충분히 대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밤.
꽤 늦게 잤지만, 결국 술과 안주를 다 먹지 못하고 불을 끕니다.
볼륨을 최대로 올린 라디오처럼,
빗소리가 가장 크게 들려온 때가 그때부터이기도 합니다.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장짓문 밖이 훤합니다.
문을 열어보니 수증기 같은 빗방울만이 허공을 떠다닙니다.
결코 수그러들지 않을 것만 같던 빗줄기가 그새 물러나고 있습니다.
이방 저방 다른 객들이 묵은 방으로 또 아침상이 들어가지만,
저로서는 아침 생각이 없습니다.
오전에 해남터미널로 가 서울가는 버스를 타려면 조금 서둘러야 합니다.
그렇더라도, 여기까지 왔는데 대흥사 경내를 한 번 둘러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1시간 정도의 여윳시간. 그새 조금 마른 옷을 걸쳐입고, 여관문을 나섭니다.
비가 내려 더 정갈하고 차분해진 유선관 앞마당.
이태 전 '수달(이었음에 틀림없는 짐승)'을 보았던 유선관 위 피안교.
대흥사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부도전.
서산대사, 초의선사라는 큰 스님들 외에도 수많은 고승, 학승들이 계셨던 큰 절집답게
부도전의 규모나 부도 숫자도 거의 우리나라 최고 수준입니다.
처음 맞닥뜨리게 되는 부도전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압도되는 절입니다.
단풍이야 가을의 꽃이겠지만,
요즘엔 파릇파릇한 여름 단풍잎도 보기에 좋아 보입니다.
게다가 이처럼 빗방울을 머금고 있는 단풍잎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요.
중국 여행에서 만났던 중국 절들의 느낌은 '불'의 이미지였습니다.
절집 입구마다 커다랗게 놓인 향로와 거기 꽂힌 연기 자욱한 향의 이미지 때문일 겁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 절집들은 확실히 '물'의 이미지가 강합니다.
어쩌면 절은 찾는 마음의 이면에는 좋은 계곡, 좋은 물을 만나고 싶은 맘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대흥사는 비교적 산 초입에 위치해 있지만,
그 어느 절집보다 물이 풍부한 곳입니다.
대흥사를 특별히 좋아하는 이유는,
어쩐 일인지 이 절집의 가람 배치가 다른 절들과는 사뭇 다르고 독특하다는 점입니다.
일주문으로부터 천왕문(각), 범종각을 지나, 마침내 대웅보전으로 향하는
다소 획일적이고 권위적인 느낌의 가람 배치가 대부분인데,
이 절집은 그런 일관성, 규칙, 권위 같은 게 해체된 느낌을 줍니다.
가장 높은 곳의 중심에 있기 마련인 대웅보전 등의 본당이
이 절집에서는 어쩌면 가장 낮은 지대에, 그것도 절집 구석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물론, 처음엔 대웅전과 몇개 건물만 있던 절이 긴 세월을 거치며 확장되어
지금과 같은 무정형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가람배치가 탈 권위적, 탈 정형의 느낌을 갖게 한 것입니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은 대흥사 탐방에서 곧바로 질러가야 할 곳이 이곳입니다.
작은 다리를 건너 나오는 '침계루', 저 안쪽 마당에 이 절집의
중요한 볼거리들이 대부분 다 있습니다.
빗물이 지나간 대기 아래, 옛 건물의 빛바랜 단청이 돌올하고 선명합니다.
눈부신 햇살 아래서는 낡고 힘없어 보이던 단청이 말입니다.
아마도, 이 절집에서 가장 유명한 걸 꼽으라면 이 두개의 현판 글씨일 것입니다.
침계루 안쪽 정면에 있는, 대웅전의 현판으로 쓰인 두개의 글씨.
위의 것은 조선후기 명필로 이름을 날렸던 원교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 현판 글씨이고,
아래 것은 우리나라 최고의 명필, 예술가인 완당(추사) 김정희가 글씨입니다.
두 현판에 얽힌 아주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지요.
당쟁에 휘말려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된 젊고 패기 넘치던 추사가
유배길에 이곳 대흥사에 들려 당시 이 절에 있던 초의선사를 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추사가 보기에 대웅전에 붙은 이광사의 글씨가 못 마땅했던 모양입니다.
이 뼈대있는 절집 대웅전에 저런 날림 글씨가 다 뭐냐고,
자신보다 1백년 이상 선배였던 이광사의 글씨를 떼내시고
자신의 글씨를 붙이라면서 쓴 글씨가 바로 아래 사진에 있는
'무량수각'이라는 예서체의, 매우 기름지고 힘이 넘치는 글씨입니다.
참으로 오만방자하고 자신감 철철 넘치던 추사의 모습이 눈에 보일 듯합니다.
그리곤 제주로 넘어가 쓸쓸하고 외로운 7년간의 유배생활을 하게 된 추사.
마침내 유배가 풀려 다시 서울로 올라가게 된 추사가 다시 대흥사에 들렀습니다.
그리고는 여기 대웅전 앞에 다시 서서, 조용히 부탁했다고 합니다.
제가 잘못 생각한 것 같다고. 자신의 글씨 대신, 원교 선배의 글씨를
다시 대웅전 현판 자리에 붙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그리하여 7년만에 원교 이광사의 글씨가 지금과 같이 대웅전 현판 자리에 걸리고,
7년 동안 그 자릴 차지했던 추사의 글씨는 대웅전 바로 옆 작은 건물에 걸리게 됩니다.
덕분에 후대 사람은 두 글씨를 한꺼번에 만나게 되는 행운을 누리게 된 것이죠.
유홍준이 쓴 훌륭한 김정희의 평전인 <완당평전>에서 읽었던 일화입니다.
이 일화를 좋아합니다. 하나의 진정한 예술가가 탄생하기까지,
제주 유배의 시간은 추사 김정희에게 아주 휼륭한 배움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의 최고 수작으로 꼽히는 '세한도' 역시 제주 유배시절에 탄생한 것이지요.
강진 유배 기간 동안 <경세유표>, <목민심서> 등의 저작을 쓴 다산 정약용처럼
흑산도 유배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어류도감인 <자산어보>를 쓴 그의 형 정약전처럼.
실학의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의 이야기는 늘 흥미로운 관심거리입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남도 땅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습니다.
대웅전 맞은 편 건물이기도 한 '침계루'에서 늘 이쪽 구석에 한번씩 서곤 했습니다.
바로 이 모습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곡선과 직선의 조화가 이처럼 극적으로 만나는 곳도 흔치 않습니다.
구부러지고 휜 나무 그대로 건물의 기둥을 쓴 절집 건물은 많지만,
이 침계루 건물 한쪽 귀퉁이의 기묘하게 뒤섞인 직선과 곡선의 조화는 조금 느낌이 다릅니다.
직선을 추구한 듯 지어졌으면서도
과연 무엇이 반듯한 것이고, 무언이 휜 것인지 묻게 되는 풍경이지요.
그러고보면, 우리 옛 건축의 멋은 세계 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극단의 자연미를 간직한 것 같습니다.
전체 절집 가운데서도 가장 외지고 낮은 지대에 있는 침계루 안쪽의 세상.
이 황홀한 세상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기꺼이 남도로 내려올 만합니다.
너른 대지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전각들.
대흥사 절집을 돌아다니는 동안 이상한 가람 배치를 내내 느끼게 됩니다.
관음보살을 모신 관음전. 문이 활짝 열린 건물 안쪽에
탱화로 구현된 천수 관음의 모습이 환하게 나그네를 반깁니다.
1시간 밖에 시간이 없었던 대흥사에서 제가 꼭 보려고 했던 것은
원교와 추사의 글씨 외에, 지금은 성보박물관이란 이름으로 바귄,
예전 '서산대사 기념관' 안의 한 불상입니다.
그 불상을 처음 만났을 때의 충격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제대 뒤 처음 찾은 1993년의 대흥사, 그 중 '서산대사 기념관' 입구 정면에 모셔졌던
빛이 좀 바랜 조선시대 황금색 청동 관음보살상.
아! 그런데, 관음보살님 모습이 가히 충격적입니다.
꼿꼿하게 가부좌를 하여 깊은 의미를 담은 수인(手印)을 하고 있거나
깊은 선정에 잠겨 있어야 마땅할 긴장된 불상의 모습이 아닙니다.
왼쪽 다리는 철퍼닥 바닥에 붙이고, 오른쪽 다리는 곧추 세워
몸을 비스듬하게 틀고는, 오른팔을 곧추선 다리 위에 올려놓은 모습의 관음보살상!
마치 화투 한 판 물린 뒤, 패가 돌아가기 전에 잠시 취하게 되는 한없이 느슨한 자세를,
중생도 아니고 비구도 아닌, 무려 관음보살님이 취하고 게십니다!!!
그렇게 인간적인 모습을 한 불상을 세상 그 어디에서도 보질 못했습니다.
(나중에 찾아보니, 불교 미술에 그런 양식의 관음보살 상이 있긴 있더군요.
몇몇 탱화로 전해지는. 그러나 불상으로 구현된 건 못 본 듯합니다.)
서울 길상사 마당의 성모마리아를 닮은 관음보살상 (천주교 조각가가 만든),
파키스탄 라호르 박물관에 있는, 간다라 미술을 대표하는 오래된 (피골이 상접한) 고행상과 함께
제게 가장 충격을 준 불상 중 하나가 그것이었습니다.
대흥사에 올 때마다 그 불상을 만났는데, 오늘은 그 불상을 만날 수 없습니다.
성보박물관이 내부 공사 중이라 입장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아쉬움을 뒤로 하고 절집을 돌아나옵니다.
대흥사를 빛낸 가장 유명한 스님은 아마도 서산대사일 것입니다.
그러나 서산대사의 사리나 주요 유적은 북녘 땅 묘향산에 있다고 했던가요?
남한에서는 그 분의 의발이 전해졌다는 이곳 대흥사가 서산대사의 중요 유적지입니다.
서산대사 외에 유명한 분으로는 몇 해전 이런 조각상으로 모셔진 초의선사입니다.
고졸한 풍경의 절집과는 어쩐지 잘 안 어울리는 기념물입니다.
우리나라 차(茶) 문화를 거론할 때 가장 유명한 분이시죠.
<동다송>과 같은 차에 관한 많은 저작을 내셨고,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과
교유한 것으로도 유명한 분입니다.
이 옆길을 따라 비좁은 산길을 한 시간쯤 올라가면 초의선사께서 거하셨다는,
우리나라 차 문화의 성지와도 같은 작은 암자, '일지암'이 나옵니다.
암자라 하기에도 무엇한, 그저 원두막 크기 정도의 한칸 집이 있을 뿐이었죠.
'일지암'에서는 한 번 근사한 저녁을 얻어 먹은 기억이 있습니다.
때는 십여년 전 5월 중순. 밤이 어둑해서야 간신히 올라온 일지암에서
산길을 내려가기가 너무 어두우니 제발 하룻밤 재워달라고 졸랐는데,
그곳 암자의 스님에게 일언지하에 거절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좀 미안하셨던지, 저녁공양이라도 하고 가라며
그때 산채 가득했던 절집 밥상을 나그네에게 내주셨지요.
산의 냄새가 가득한, 평생 잊지 못할 끼니 중 한 끼였습니다.
그리곤 앞이 하나도 보이질 않던 산길을 더듬더듬 내려오던 기억 ...
이래저래, 대흥사에는 너무도 많은, 아름다운 추억을 갖고 있습니다.
이름 아침, 여행자들이 드문 산사는 고요하고 차분합니다.
맑습니다. 해맑습니다.
그렇게 알뜰하게, 살뜰하게 대흥사를 소요하고 내려왔습니다.
언제 다시 와도 반가울 대흥사.
머지 않은 날, 마치 처음 와보는 절집처럼 시치미를 떼고
또 찾아와 소요해 볼 겁니다.
유선관에 다시 돌아와 남은 짐을 챙겨 떠날 채비를 합니다.
어제 다 먹지 못한 채 덮어두었던 파전과 막걸리가 남아 있습니다.
아침 먹을 시간이 없을 듯해, 차갑게 식은 한 두 점 파전과 남은 막걸리를 마셨습니다.
배가 든든해졌습니다. 서울 길도 먼 길인데, 나서는 다리에 힘이 돋습니다.
안녕, 유선관. 다시 올게요.
어제보다 비가 더 많이 오거나,
대둔산이 하얗게 눈에 덮였다는 소식이 혹 전해지면,
다른 일 마다하고 내려올 게요.
그냥, 어떤 좋은 집에서 하룻밤 잘 자는 것만으로도
여행이란 건 충분한 거니까.
내려오는 길, 익숙한 표지판과 시비 등등.
유선관과 지금은 없어진 몇몇 여관 터가
5.18 광주항쟁 당시의 사적지임을 알리는 안내문.
불어난 물. 한껏 더 맑아졌을 숲과 자연...
남겨두고 떠나기 아쉬움.
엔딩 크레딧.
4월 중순부터 붙잡고 있던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를 마침내
여행 마치고 서울 올라가는 버스 안에서 다 읽었습니다.
두 도시, 즉 영국의 런던과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시민 혁명기의 프랑스를 생생하게 그려낸 책인데,
아주 통속적인 재미도 가미되어 꽤 재미있는 소설이었습니다.
일상은 제게 책 한 줄 읽을 시간을 주지 않는데,
역시 여행의 시간이 책을 펴고 책을 덮게 해주네요
여행이 주는 것이 참 많습니다.
거문도 등 여수 앞바다의 섬들을 보겠다고 벼르고 별러 찾아간 여행.
그 길은 큰 비와 함께 계속 꼬이고 꼬여
낯선 소록도로, 정든 대흥사로 발길을 향하게 했습니다.
트러블(trouble)이 없다면 트래블(travel)이 아니라고 했던가요.
계획되지 않은 길, 뜻하지 않은 길이 나타날 때
여행은 더 풍부하고 행복해지는 것 같습니다.
여행 한 번, 자알 ~ 했다!
2013.05.27~28. 전남 해남
첫댓글 빨간옷 입은 속알머리 없는 뒷 모습의 사내가 나와 같아 보이는 느낌. 참 심심했겠다는 생각이 드는 유선 여관방임. 춘향같은 여인이 있어야만 될 것 같은 유선 여관방.
잘 봤어요. 희인! 감사.
제가 묵은 방이 대문 옆에 딸린 방입니다. 행랑채라고 하나요? 하인들이 묵는 방이요. ㅋ 꼭 그 방을 내주시는데, 그 방이 편하더라구요. 비가 와서 좀 덜 심심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풍광이 너무도 좋구먼! 잘봤네. 그런데 일주문(一柱門)은 양쪽에 기둥이 하나씩인 문 아니가? 양산 통도사 처럼...?
아... 그렇게 시작된 이름이겠군요! 그런데, 원래의 뜻보다는 요즘엔 절로 들어가는 첫번째 문의 의미가 더 강해진 것 같습니다. 1밴년 전 (현재 강남의) 봉은사 일주문을 찍은 흑백사진을 본 적 있는데 그렇듯 앙상한 외기둥의 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선배님, 편안하시죠? ^^
희인 고맙다 담에 한번 엑기스만 모아서 형님이랑도 같이 가 보자 비오는 날이면 더 좋을 것 같다
안녕하세요, 형님^^ 비오는 날이 좀 불편하기는 하지요. 극회 선후배님들과 어디든 함께 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세편에 걸친 이번 여행기를 읽으며 여행 아니 인생에 임하는 자세를 배웠다고나 할까요. 좋은날씨가 여행에 70%는 차지한다고 생각해왔는데 생각을 바꾸니 세상이 더욱 아름답고 틀어진 계획에 실망감 보단 거기에 맞춰 또다른 곳을 찾아가는 모습. 인생을 이같이 살아간다면 참으로 풍요롭지 아니하겠습니까! 다음 여행지는 어디일까????
넘 과찬이십니다. 모처럼 생긴 여유 시간... 그냥 되돌아가긴 아쉬워서 돌아다닌 여행인데요. 부실한 우산 밖에 없었던 까닭에요. 다음 여행지... 저도 당장 어디든 떠나고 싶은데, 요즘은 일들이 붙잡아요 ㅠ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