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은 이동할 수 없을 뿐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겪는 어려움을 똑같이 겪죠. 빛, 물, 영양분을 얻기 위해 궁리를 해야 하고, 자손을 퍼뜨리기 위해 짝짓기도 합니다. 또한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처럼 식물 역시 다양한 방식을 통해 가장 좋은 타이밍에 씨앗을 퍼뜨리죠. 오히려 식물은 동물보다 지구상에 먼저 나타난 생물입니다. 그만큼 오랜 시간 동안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해왔던 존재죠. 식물은 우리처럼 강한 욕망과 본능을 가지고 행동하는 ‘동물(動物)’입니다. EBS <녹색동물>은 이런 그들에 대하여 ‘식물은 동물이다’라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제시합니다.
네펜데스 로위(Nepenthes lowii)와 나무두더지
식물은 지구상 모든 곳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어떤 생명체보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움직입니다. 모든 존재들의 본능과 욕구를 이용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죠. 다만 인간이 이를 쉽게 볼 수 없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동이 불가능한 식물은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굶주림으로부터 살아남은 것일까요?
아무런 영양분이 없는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말레이시아 물루산. 이 지역엔 큰 나무가 자랄 수 없습니다. 번성하고 있는 것은 오직 작은 관목과 이끼류뿐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 서식하는 동물 수도 제한적입니다. 그런데 이 척박한 환경에 특이하게 생긴 한 식물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네펜데스 로위. 변기 모양의 식물입니다.
변기가 된 식물, 네펜데스 로위(Nepenthes lowii) <출처: EBS 다큐프라임 [녹색동물]>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네펜데스 로위는 나무두더지의 배설물을 영양분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배설물을 ‘잘’ 받아먹기 위해 변기의 모습으로 진화했죠. 이 식물의 모양은 나무두더지 엉덩이에 최적화 된 크기에, 배설물을 한 곳으로 모을 수 있는 유선형의 디자인을 가졌습니다. 또한 어지간한 힘을 가해도 휘거나 구부러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죠(아주 강한 힘을 가하면 깨지긴 합니다만). 인간이 만든 변기와 한 가지 다른 점은 뚜껑 부분에 나무두더지를 유인하는 하얀 물질을 만든 것입니다. 나무두더지가 핥아먹는 하얀 물질 속엔 단맛뿐만 아니라 배변을 활발하게 하는 성분도 들어 있죠.
이것이 변기가 된 식물, 네펜데스 로위가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는 방식입니다.
기생식물 실새삼은 살기 위해 주변 식물을 살육합니다. 식물의 줄기를 움켜쥐고 뚫어서 체액을 빨아먹죠. 다 빨아먹은 다음엔 또 다른 식물로 몸을 옮겨갑니다. 그리고 실새삼에게 모든 영양분을 빼앗긴 식물은 그 자리에서 시들어버립니다. 실새삼은 생존을 위해, 모든 에너지를 다른 식물로부터 빼앗습니다.
냄새를 맡아 사냥하는 식물, 실새삼(Cuscuta australis R. Br.) <출처: EBS 다큐프라임 [녹색동물]>
하지만, 눈이 없는 실새삼. 그에게 세상은 암흑입니다. 그런 실새삼은 빙글빙글 줄기를 돌리며 주변의 ‘냄새’를 맡아 ‘숙주’로 삼을 식물을 사냥합니다. 마치 동물이 사냥을 위해 냄새를 맡는 것처럼 말이죠. 마침내 숙주를 찾게 되면 자신의 줄기를 감고 체액을 빨아먹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독특한 행동을 하죠. 실새삼은 자신의 싹이 나왔던 첫 줄기를 스스로 끊습니다. 뿌리가 없기 때문에 쓸모가 없어진 기관은 냉정하게 제거하는 것이죠.
보르네오 열대우림에 서식하는 다른 모양의 네펜데스, 이름은 네펜데스 헴슬리야나입니다. 이 식물 역시 박쥐의 ‘배설물’을 양분으로 살아갑니다. 박쥐의 습성을 잘 이해하고 박쥐가 언제 배설을 하는지도 알고 있죠. 그것은 박쥐가 잠이 드는 아침. 그렇다면 이 네펜데스는 어떻게 박쥐를 잘 알고 부르는 것일까요?
박쥐의 호텔이 된 식물, 네펜데스 헴슬리야나(Nepenthes hemsleyana) <출처: EBS 다큐프라임 [녹색동물]>
박쥐는 음파로 주변을 인식합니다. 이 또한 알고 있는 네펜데스 헴슬리야나는 박쥐의 음파가 뚜렷하게 반사되어 자신을 알아볼 수 있도록 뚜껑과 입구의 각도를 조절했죠. 박쥐의 능력 진화에 맞춰 이 식물도 함께 진화했습니다. 눈에 띄는 호텔 ‘간판’을 달게 된거죠. 그리고 박쥐도 익숙한 곳을 찾는 본능이 있기 때문에, 매일 같은 잠자리를 찾습니다. 그 결과 네펜데스 헴슬리야나는 매일 박쥐로부터 신선한 영양분을 공급 받을 수 있습니다.
식물은 잎을 통해 광합성을 해야 살 수 있습니다. 정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식물은 사실 끊임없이 빛을 쫓아다니죠. 그래서 잎에 구멍이 뚫린다는 것은 그들에게 치명적입니다. 게다가 빛은 천지 사방에 있지만 모든 식물이 공평하게 광합성을 할 수 있는 조건은 아니죠. 이런 상황에, 어떤 식물은 일부러 잎에 구멍을 냅니다. 자신이 스스로 구멍을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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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피도포라(Rhaphidophora foraminifera) |
라피도포라는 빛을 사냥하기 위해 큰 나무를 타고 오르는 덩굴식물입니다. 이렇게 자라다 보면 위쪽 잎들이 아래쪽 잎들의 햇빛을 가리게 되죠. 그래서 드물게 숲 천장을 뚫고 햇빛이 들어오면, 위쪽 잎은 구멍을 통해 아래쪽 잎에 빛을 나누어 줍니다. 구멍이 난 잎에는 손해지만 전체 잎들이 받을 수 있는 빛의 양은 그 손해 이상으로 늘어납니다. 빛이 잘 들지 않는 숲속. 개체의 희생으로 전체는 살아남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식물을 ‘정적이고 연약한 존재’로 여기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생명체들이 멸종할 때에도 지구상 모든 곳에서 살아남아왔습니다. 현재까지도 척박한 땅과 보석들 사이 심지어는 전깃줄 위에서도 그 생명을 이어가죠. 생존을 위해 동물의 배설물을 양분으로 삼고, 냄새로 숙주를 사냥하며 하나의 잎이 나머지 전체를 위해 희생하기도 합니다.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고군분투하며 강한 생명력을 유지해온 ‘식물’들. 그들은 정말 연약하기만 한 존재일까요?
- 관련 방송
- 제목 EBS 다큐프라임 ‘녹색동물’
- 방송일시 2016년 1월 18일(월) ~ 1월 20일(수) 밤 9시 50분 / 종합 1월 24일(일) 저녁 8시 15분
- 내용 <녹색동물>은 5대양 6대주를 돌아다니며 지구의 경이로운 식물들을 찾아 2년여 간의 시간에 걸쳐 완성한 식물의 ‘일대기’를 담은 자연다큐멘터리다. 태초의 신비가 존재하는 자연의 아름다운 경관과 함께 정적인 존재로 치부되었던 ‘식물’을 새로운 관점으로 조명한다.
- 글
- 손승우 | EBS PD
- EBS에 2006년 입사 이후, 2009년 자연다큐멘터리 <사냥의 기술>을 시작으로 <천국의 새> 등 다수의 자연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제작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