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새로운 언어의 발견 1 / 이종수 (시인)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피에르 바야르/여름언덕)에 보면 자기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라는 말이 나온다. 자기를 서술하는 일, 다른 사람들의 말의 무게에서 마침내 해방된 독자가 자기 자신의 텍스트를 만들어내며 작가가 되는 힘을 자기 안에서 찾게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창작 주체를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기 자신이 창조자가 되는 것, 발견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스토리텔링의 시대라고 한다. 학교 현장에서도 아이들도 단순히 텍스트에 대한 존중과 수정 불가의 금기에 마비당하여 암송하거나 내용을 알아야 한다는 속박으로 인해, 너무나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내적 일탈 능력을 잃어버리고 상상력에 호소하는 것을 막아버리고 있다고 한다. 스스로 창조가가 되기, 발견자가 되는 것임을 알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안도현 시인은 좋은 시의 세가지 조건을, 첫째, 새로운 언어로 표현된 시, 둘째, 새로운 인식을 도출하는 시, 셋째, 새로운 감동을 주는 시, 라고 말했다. 시는 더 이상 혼자만의 ‘의도’를 가지고 이렇게 쓰려 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이야기를 걸고 나누려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언어란 남이 쓰지 않는 독특한 말을 골라 쓴다는 것일까. 바른말글 사전이나 우리말 사전을 응용하여 시를 쓴다고 새로운 언어일까. 아니다. 그것이 단지 빌려 쓰는 데에만 쏠려있다면 새로운 언어로 표현되기는 했어도 좋은 시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밤새도록 먹물 풀어 묵화 한 폭 그린 여백 갈매기 흘림체로 힘찬 글씨 메워 놓고 붉은 해 수평선 위에 낙관 하나 찍고 있다
- 채윤병, <아침 바다>
시인의 공력이 생동감을 잃게 만든 느낌이 드는 시다. ‘갈매기 흘림체’라든가 ‘붉은 낙관’이 새로운 맛을 주는 듯하지만 정물로 만들어버린 느낌이 강하다. 살아서 이야기가 된다기보다는 잘 부려 쓴 글씨 속에 묻혀버린 시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새로운 인식과 감동을 주는 시가 되지 못한 까닭이다.
아침엔 라면을 맛있게들 먹었지 엄만 장사를 잘할 줄 모르는 行商이란다
너희들 오늘도 나와 있구나 저물어 가는 山허리에
내일은 꼭 하나님의 은혜로 엄마의 지혜로 먹을거랑 입을거랑 가지고 오마.
엄만 죽지 않는 계단
- 김종삼, <엄마>
엄마란 말 하나로 이렇게 감동시킬 수 있는 시여야 한다. 어머니라고 그 많은 시들이 발표되었지만 가장 엄마에 충실하고 있는 듯한 시여서 시인만의 공력을 느낄 수 있다. 잠깐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자기 안의 엄마를 끌어낼 수 있다면 좋은 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새로운 언어란 전당포나 사전 속에 있는 것만이 아닌 까닭이다. 계단에 나와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떠오르고 엄마의 ‘지혜’가 떠오르고 저간의 흉흉한 사정이 떠오를 것이고 끝내 죽지 않는 ‘계단’을 새로운 언어와 감동으로 이어놓은 것이다.
사람은 죽은 다음에 천국이나 지옥에 간다 하지만 나는 틀린다 여러 번 죽음을 겪어야 할 아무도 가본 일 없는 바다이고 사막이다
작고한 心友銘 全鳳來 詩 金洙暎 詩 林肯載 文學評論家 鄭 圭 畵家
- 김종삼, <掌篇-3>
작고한 벗들을 생각하며 그들은 틀림없이 천국이나 지옥의 구별 없이 신세계에 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만들어낸 ‘바다’와 ‘사막’일까? 아무도 가지 않았으니 모르는 것이지만 충분히 그럴 거라는 생각을 만들어낸다. 아무나 가지 않는 곳이기도 할 것이다. 바다와 사막을 경외시하며 어쩌면 가장 나중에 숨어들고 싶은 곳이기도 하니까.
公 告
오늘 講師陣
음악 部門 모리스 라벨 미술 部門 폴 세잔느
시 部門 에즈라 파운드 모두 缺講.
金冠植, 쌍놈의새끼들이라고 소리지름. 持參한 막걸리를 먹음. 敎室內에 쌓인 두터운 먼지가 다정스러움.
金素月 金洙暎 休學屆
全鳳來 金宗三 한 귀퉁이에 서서 조심스럽게 소주를 나눔. 브란덴브르그 협주곡 第五번을 기다리고 있음.
校舍 아름다운 레바논 골짜기에 있음.
- 김종삼, <詩人學校>
제목만 걸맞는 단순 비유법이 통하지 않고 충실할 필요가 없다는 듯 시인학교의 분위기를 말하고 있다. 앞에 나온 <장편-3>에 나온 시인들을 떠올린다면 시인학교에는 ‘대한민국 김관식’이라는 명함을 가지고 다니던 괴짜만이 남은 셈이다. 아름다운 레바논 골짜기와 클래식이 낯설기는 하지만 공고에 난 강사진을 본다면 충분히 시인학교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앞서 말한 책에 나온 것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에도 모자란다고 생각해야 한다. 내 이야기라고 해서 게으른 일상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것이 아니라 ‘머지 않아 나는 죽을 거야/산에서건/고원지대에서건/어디메에서건/모짜르트의 플루트 가락이 되어/죽을거야/나는 이 세상엔 맞지 아니하므로/병들어 있으므로/머지 않아 죽을거야/끝없는 평야가 되어/뭉게 구름이 되어/양떼를 몰고 가는 소년이 되어서/죽을거야’(김종삼, <그 날이 오며는>)하고 내지르는 이야기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파장이 읽은 이를 움직이게 하고 ‘엇 뜨거워라’ 하며 다른 이에게 던질 수 있는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무야 너는 하나의 절이다. 네 안에서 목탁소리가 난다. 비 갠 후 물 속 네 그림자를 바라보면 거꾸로 서서 또 한 세계를 열어놓고 가고 있는 너에게서 꽃 피는 소리 들린다. 나비 날아가는 소리 들린다. 새 알 낳는 고통이 비친다. 네 가지에 피어난 구름꽃 별꽃 뜯어먹으며 노니는 물고기들 떨리는 우주의 속삭임 네 안에서 나는 듣는다. 산이 걸어가는 소리 너를 보며 나는 또 본다. 물 속을 거꾸로 염불 외고 가는 한 스님 모습.
- 이성선, <나무 안의 절>
同體大悲란 진정 접목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꽃 피고, 나비 날아가고, 알 낳는 고통을 보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녹색 땀 흘리는 한낮’ 123×68, 목판채색, 내리닫이로 쓰는 옛 편지처럼 하루하루를 밭이랑에 적어가는 사람들, 녹색 땀 흘리는 한낮, 이철수, 2009
농부 전기호도 밭에서 여럿이 한 골씩 잡아 일할 때 뒤처지는 사람의 골을 먼저 마친 사람이 도와주는 것을 골마중이라고 했듯이 문학도 제 태어난 골과 부비며 사는 사람들과 同體大悲임을
그러니 이땅에 살러 오고 일마중 온 먼 나라 사람들이 나무들처럼 가지 하나씩 뭉텅뭉텅 잘려나가 인도양을 건너고 남지나해를 건너 돌아가 가까스로 옹이가 진다 해도 저 살던 고뇌와 평화로 아물 것인가 떠나는 나무들에게 털끝만큼의 양심이 있다면 낙엽지는 단풍처럼 절절하게 물어야 하지 않은가
- 이종수, <同體大悲>
그것을 누군가의 그림에서 만날 수도 있고 읽지 않은 책에서 만날 수 있다.
헐○값○판○매
당신들은 헐값에 좋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헐값에 웁니다
하고 펄럭이는 것 같다
중독이다
머리수건처럼 둘러쓴 찔레꽃 덤불이며 애기똥풀 군락도 헐값에 우는 늦봄 같으니
- 이종수, <헐값에 웁니다>
국도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현수막을 보고 쓴 시다. 상술인 경우가 많지만 헐값에 내놓고 마는 울혈 같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도청 앞에 피 같은 알곡을 쏟고 우유를 쏟는 것이 어떻게 비쳐질지 모르지만 노동자의 삶까지 헐값에 팔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냥 나무라서 그곳에 있는 것 같지만 거꾸로 동체대비의 마음으로 보라는 뜻임을 아는 것 또한 새로운 언어의 발견과 감동을 자아내는 시를 쓸 수 있는 길이다.
1 너의 가슴에 달이 떠오르면 나의 나무는 거울이 되어 울어요.
너의 나무가 폭풍에 떠는 밤 나는 무서운 음악으로 뿌리까지 빛나요.
우리는 서로의 골짜기를 재우는 두 피리 솟음과 고임의 눈으로만 말하여요.
2 저녁 황혼에 서서 바라보면 너의 나무는 쓸쓸히 홀로 걷고 있어요.
새벽 언덕에서도 너만이 하늘을 받들고 울고 있어요.
추우면 별을 부르세요. 아프면 더욱 나를 부르세요.
3 너의 나무야 가까이 서 다오. 외로운 이땅을 함께 걸어가 다오.
너의 나무가 나의 나무에게 나의 나무가 너의 나무에게
서로의 가슴으로 가지 뻗어 알몸이 알몸을 부르며
4 네 눈에 뜬 별이 내 눈에 지고 내 눈에 뜬 별이 네 눈에 지고
하늘을 쓸고 내리는 혜성을 바라보며 가슴에 차오는 물소리 들으며
두 나무가 서로의 우물 속에 그림자 비추고 서서
5 끝내 침묵으로 묻어두고 돌아섰던 한 마디
한밤 촛불로 깨어나 네 영혼 향해 걸어가면
오오 전신에 전율로 오는 목소리 땅 가득 젖어 내 나무를 부르는
6 내 눈 속엔 너의 나무만 키우겠소. 너의 눈 속엔 나의 나무만 키워다오.
우리는 떨어져 서 있으나 하늘에 귀를 묻고 서로를 듣는 두 피리
마지막 네 모습을 내게 묻어다오. 하나씩 잎 떨구며 나도 네게 묻히러 가고 있소.
- 이성선, <나의 나무가 너의 나무에게>
때론 외곬수 같더라도 자기 길을 가는 시가 좋은 시다. ‘서로의 골짜기를 재우는 두 피리’란 문장처럼 나무의 성선설 같은 것을 대변하는 말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서로의 눈에 뜨고 지고 묻히는 나무의 정신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인은 너무나 여린 존재다. 세상 말을 다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 별을 보는 것만으로도 슬퍼하는 존재이니.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네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별아, 어찌하랴. 이 세상 무엇을 쳐다보리.
흔들리며 흔들리며 걸어가던 거리 엉망으로 술에 취해 쓰러지던 골목에서
바라보면 너 눈물 같은 빛남 가슴 어지러움 황홀히 헹구어 비치는 이 찬란함마저 가질 수 없다면 나는 무엇으로 가난하랴.
- 이성선, <별을 보며>
이런 마음은 시를 쓰는 사람이면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가난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기에 시를 쓰는 것이니 말이다.
입춘 지나 경칩이면 봄 아니냐고 밖에 내놓은 군자란이 밤새 냉해를 입어 한 잎 끝이 짓무르더니 손쓸 겨를도 없이 마르고 부서졌다
매끈하던 잎에 상처가 생겨 흉한 것을 며칠 들여다보다가 아예 잎 밑동을 잘라버릴까 가위를 들었다 놓기를 거듭하다가
그냥 두기로 하였다. 얼룩진 상처도 제 얼굴이려니 감출 수 없어서 눈길을 붙드는 흉터도 제 삶이려니 싶어 성급함을 자책하는 내 상심이 살을 도려내는 아픔보다 더하랴 싶어
그냥 두고 한 번 더, 한 번 더 만져주기로 하였다.
- 류정환, <상처를 만지다>
아무려면 내 상심이 살을 도려내는 아픔보다 더하랴 싶은 것이 시의 정신인 것이다. 내 아픔이 절로 치유되려면 남의 아픔을 껴안을 줄 알아야 하듯이 시는 사람들로 붐비는 혼잡한 세상에서 상처를 만지며 사는 숙명을 타고 태어난 것이다. 그것이 발견과 감동의 한 궤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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